주일설교

방주 속의 세계

아빠와 함께 2025. 5. 11. 18:37

방주 안의 세계 

2025년 5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6-7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을 기뻐시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저없이 강행하신 전면 물 홍수 심판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물에 빠져서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관성을 발견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를 인간에게 내렸습니다.(창 2:17)

이 금지령에 대해서 인간들은 위반으로 나왔습니다. 마귀의 속성이 반영해서 그러했습니다. 즉 하나님만 알고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것이 있음에 대해서 인간들은 반항한 겁니다. 이 위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위반으로 맞서십니다. 이 두 번째 위반이란, 인간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성하면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법을 따로 마련해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법체계, 혹은 인간들 나름대로 진리체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위반되는 방식으로 쳐들어가시는 겁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인간 세계는 근원적으로 자신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정한 최종 기준을 세울 자격이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위반에 대한 위반’이 새로운 금지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고 구원될 자는 다른 조치에 의해서 건져내시는 방식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에 의해서 마땅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노아에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방주’가 곧 상(賞)입니다.

즉 전면적인 심판장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요소’를 그 심판 안에 기입시키신 겁니다. ‘심판 외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 한가운데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속한 자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전면적인 폭력을 통해서 세상을 재편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을 죽이는 방식 없이는 상(賞)도 없고 영생도 없습니다.

노아 식구가 탄 방주 안에서 전면적인 물 심판 끝나고 재편될 질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 중심’의 세상입니다. “다만 고기를 피째 먹지는 마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너희가 생명의 피를 흘리면, 내가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것이 짐승이든 사람이든 피흘리게 한 사람의 형제이든 간에 내가 복수를 할 것이다.”(창 9:4-5)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피는, 그 연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희생 제물의 피입니다. 이는 인간은 이미 심사가 끝났다는 말입니다. 홍수 안에서 마땅히 죽은 자들임이 명확합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 다 악합니다.(창 8:21) 악하디 악한 인간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창조 결정체가 필요합니다.

그 창조 결정체가 창세기 7:2-3애 나옵니다. “모든 깨끗한 짐승은 암컷과 수컷 일곱 마리씩, 깨끗하지 않은 짐승은 암컷과 수컷 한 마리씩 데리고 들어가거라. 하늘의 새도 암컷과 수컷 일곱 마리씩 데리고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의 종자를 온 땅 위에 살아 남게 하여라.”

정결한 것을 더러운 것들과 방주 안에 동승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시게 하는 것을 더러운 제물이 아니라 정결한 제물의 희생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일련의 작업은, 이미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기에 인간들이 내세우는 그 어떠한 거룩이나 믿음도 하나님의 기쁨하심의 이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동승한 정결한 짐승의 잡아 죽임으로서 제물이 된 정결한 피에 앞으로의 재편된 세상의 주도권이 모아지게 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믿고자 해도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란 없는 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데서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들의 몫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9:24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고 인간은 그 자존심을 돌파하지 못합니다. 마치 인간들이 대자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적인 규모로서 이 세상을 몰살하셨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대자연 속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대자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집단뿐만 아니라 각 개인별로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아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골라 천국에 넣어주시는 대책은 하나님 자신의 체험을 공유코록 하는 겁니다.

상(賞)이란 예수님의 체험에 의해서 동일 체험자를 포집하는 기능을 지닌 새로운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시험 속에서 지내오셨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는 처지와 같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기 위해 자신의 겅력한 요구에 의해서 바닷물이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살았습니다. 이는 곧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 있음’입니다. 그는 다시 물고기 배속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불가능함을 산 채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님의 형편도 이와 같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자는 다시 무존재로 돌아갈 수 없고, 이미 살아 있는 도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믿음이 생길 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갈등보다 심각한 갈등이요 번민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인간들로 하여금 ‘나를 쳐다 보며 살거냐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며 살거냐’라는 갈등 공간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복음으로 인한 갈등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녀가신 코스는 동일한 노선에 들어와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실 상(賞)은 이러한 주님께 겪었던 시험 속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더 이상 자신에게 의미있는 게 나올 게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갚을 것이 없다’는 말은 더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신앙이나 행함에 의미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중풍병자가 중풍병만 낫게다고 주님께 왔지만 주님께서는 예상 못한 ‘죄사함’을 주는 식으로(마 9:5) 성도가 예상 못한 희열을 이 세상 삶을 통해 제공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태어남 자체가 죽기 위해 태어났음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6강-히브리서 11장 6-7절(방주속의 세계)25051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6-7절입니다.

히브리서 11:6-7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정죄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정죄하는 그 방법은 노아 때 홍수를 퍼붓는 겁니다. 홍수를 퍼붓는다 할 때 그 홍수는 우산으로 피할 수 있는 그런 소낙비 정도가 아니고, 그 홍수는 하늘에서 밀려온 일종의 펜스, 장벽 같은 겁니다. 타 넘고자 해도 도무지 타고 넘어갈 수 없는, 밀려오는 큰 해일, 또는 장벽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홍수를 일으켰다는 말은 그냥 모두 죽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다.’라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분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죽었으니 그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을 죽은 인간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홍수, 그 홍수의 취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가 바로 믿음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홍수 잘 일으키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라고 믿는 사람, 그렇게 믿는 사람이 바로 믿는 자,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전반적으로 행했던 그 조치에 대한 속 시원함, 그 통쾌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모든 일에 대해서 같이 공조하고 있다,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홍수를 일으켰는가?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지를 시킨 것이 있습니다. 그 금지가 펜스에요, 장벽입니다. 그 장벽을 인간이 손댐으로써 인간 쪽에서 그 장벽을 허물고자 시도한 거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마귀가 인간 속에 집어넣어 준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알 것 다 안다는 마음을 가지는 이것이 인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렇게 독자적으로 신의 일부로서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이야기했건만 따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분명히 인간은 몰라야 하고, 하나님만 알아야 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뜻이기에 그 장벽, 펜스를 우리가 허물면 그래서 하나님만 알던 것을 우리도 알게 된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의 독자적인 의견이 의미 있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이게 위반이지요.

그때부터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위반이지만 인간 보기에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역마저 허물었던 그것이 자기 세계에 부합되는 합당한 행동을 한 거지요. 그래서 ‘인간들 세계는 온전해야 한다.’라는 그 인간들 나름의 정립된 질서, 이것을 하나님이 위반해요. 금지에 대한 그 위반에 대해서 위반을 해버리면 뭐가 계속 유효하게 되느냐 하면, 금지가 계속 유효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생명나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생명나무 따먹는 것을 금지시켰어요. 선악과는 훼손되었지만 생명나무는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금지시켰습니다. 금지할 때, 곧 인간세계가 하나님 세계에 접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두루 도는 화염검, 곧 불입니다. 그 불이 인간이 오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는데 이때 인간은 무엇의 한계에 잡혔는가? 인간은 자연 세계라는 것에 갇힌 셈이 돼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 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불로써 차단했기에 인간은 자연 세계를 돌파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 세계 속에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이미 규정 받았고요, 이름도 흙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번식했고, 번식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물로 다 죽였고, 또다시 홍수 다음에 번식했고, 번식된 그것을 이제는 불로 다 죽여버립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 해도 이 자연 세계를 돌파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연 세계에 갇혀 있고 자연 세계와 더불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조폭 영화에 나오는 어떤 조폭 두목이 그렇게도 나쁜 짓을 하다가 나중에 형사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있어요. 총 맞고 쓰러지면서 그냥 쓰러지지 않고 거실 커튼을 낚아채서 찢어지는 커튼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서 죽으면서 영화가 끝나는 거지요. 그 커튼, 자기 집 거실의 커튼은 친숙했던 조폭 보스의 은밀한 자기 삶의 배경이에요.

죽어가면서 그 커튼을 찢으면서 쓰러지게 되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가 친숙했고 살아오면서 늘 같이했던 그것이 그 대자연이에요. 주님께서는 그 대자연이 하나의 연극세트장이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대자연이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었던 거예요. 대자연에 적응해서 거기서 과학을 발달시키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거기서 건설사업을 해서 높이 높이 건물 짓는데 주님이 퍼부으신 그 물의 높이가 인간이 만든 모든 건물의 높이를 초과하는 높이로서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내린 겁니다.

물에 다 잠긴 거지요. 그동안 대자연 속에서 인간들은 번식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번식하면서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다정다감하게 얼마나 긴긴 세월 살아왔겠습니까? 아마 수백 년 동안 살아왔겠지요. 어버이날도 있고, 카네이션도 달아주고, 또 교회마다 경로잔치 한다고 65세 이상 된 분들 식사하러 오라고 플래카드 붙이고, 어린이날이라고 애들 완구점에 데려가지요. 애들은 ‘와,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느냐?’

“오늘 특별히 어린이날이다. 골라잡아라. 딱 세 가지만 골라라.”(‘물론 5만 원 한도 내에서…’) 그런 식이지요. 방송에서도 “오늘은 어린이날~” 노래 나오고요.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가 주인공이지요. 요새 어린이가 구박을 받은 적이나 있습니까?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하여튼 어린이날 실컷 재미나게 놀고, 같이 웃으면서 맛있는 것 먹는 그 모습이 얼마나 다정다감합니까?

그 다정다감 물에 다 잠겨버려요. 물에 다 잠겨버린다고요, 그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가족들의 그 다정다감이! 카네이션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에 다 빠져서 어푸어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성경 말씀이 더 효과 있겠지요? 누가복음 17장 26-27절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이 대규모의 홍수는 하나님의 거대한 폭력이에요. 거대한 전면적인 폭력, 그 전면적인 폭력 앞에서 사적인, 개별적인, 개인적인 사정 같은 것은 그 앞에서 완전히 찢어져 버리지요. 위에서 아래로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고민이 있거든요.” “이리 와!” 그대로 찢어버립니다. “하나님, 제가 상담 좀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리 와!” 찢어버려요.

네가 상담해 봐야 나오는 내용은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거지요. 홍수는 대규모 불 심판의 전조현상이에요. 그다음에 28절에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여기에도 사고판다는 내용이 들어가고 또 집 짓는 것까지 나와 있습니다. 29절에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도대체 하나님이 일하는 목적이 뭡니까? 멸하는 거예요. 사람 죽이는 겁니다. 새로운 교황 레오 14세의 첫 마디가 ‘온 세상에 평화가 함께 하기를!’ 이랍니다. 평화 없어요. 그냥 세계 심판이에요. 바티칸 성당 굴뚝에서 하얀 연기 피어오를 때 어떤 늙은 수녀는 감격해서 막 눈물을 흘리고 있어요.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성당 굴뚝에서 하얀 연기 피어오를 때가 아니에요.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 때 고마움과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하나님께서 약속 지킬 줄 알았어!’

불 심판, 물 심판당할 때 거기에 착한 사람 얼마나 많았는지 지 몰라요.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부모한테 효도하고, 자기 할 일 잘하고, 가정일 잘 돌보고, 남 해코지 안하고요. 접촉 사고도 한 번 안 냈어요. 너무도 바르게 산 사람들, 그 소소한 윤리와 도덕 그까짓 게 무슨…, 알량한 양심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내리는 것은 딱 하나에요. “너희들 살아도, 죽어도 의미 없다.”라는 거예요. 사람이 의미가 생기면 공포가 생겨요. 무서움이 생긴다고요, 의미가 있으면. 옛날에 고등학교 때인가 야구장에 딱 한 번 가봤어요. 요새 야구장에서 국민의례를 한 답니다. 야구 시합 전에 “동해 물과 백두산이~” 노래가 나올 때 관중석에서 일어나서 다 태극기 쳐다보지요.

그런데 엄마 아빠하고 같이 갔던 꼬마가 그게 지루했던 모양이지요. 태극기를 쳐다보면서 오른손을 가슴 위에 얹어야 하는데 엄마만 쳐다본다고요. 그러니까 엄마가 ‘저쪽을 봐야지, 저쪽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애가 또 엄마를 쳐다봐요. 그러면 또 고개 돌려주면서 ‘저쪽을 쳐다봐!’

노아가 언약이거든요,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다시 말해서 불 심판이 언약이거든요. 그리고 십자가가 뭐냐? 마지막 언약의 종결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이 종말에 뭘 쳐다봐야 하느냐? 십자가를 쳐다봐야 하지요. 머리 돌려서 십자가를 쳐다보라고요. 십자가를 쳐다보면 되는데 우리는 교회 나올 때는 십자가를 쳐다보는 듯하다가 돌아서면 전부 다 다시 날 쳐다봐요. 자기 자신을 쳐다본다고요.

‘나의 의미는? 나의 인생은?’ 네 인생은 물에 잠겼다. 나의 추억과 나의 기억은 전부 다 물에 잠겼는데 왜? 기억이나 추억이니 해봐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집 짓고, 그거 말고 뭐가 있어요? 애 키우고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거기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 외에 딴 것 있습니까? 없잖아요.

사고팔고 집 짓고 한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자꾸 어떤 알 수 없는 공포를 제공해요. 무서움과 두려움, 나 망하면 안 된다고요. 참 코미디 같아요. 망하면 안 된다고요? 내 인생이 위기에 빠졌다고요? 태어난 자체가 위기에요. 무슨 위기가 또 있어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은 이겁니다. 현재 안정되어 있는 이 세상 질서, 이 질서 모든 매사에 제발 위반하라는 거예요, 위반. 그들의 생각과 반대로 나가라는 거예요. 위반하라는 겁니다. 위반의 위반을 해야 그게 하나님의 금지가 유효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인간이 신에게 위반하고 난 뒤에 남은 것이 뭡니까? ‘야, 우리끼리 착하고 바르게 살자. 힘 합치고 우리의 지혜를 끄집어내서, 문명발달 시켜서 양심껏 살자. 우리 공동체 질서를 위반하는 인간은 용납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법 만들고요. ‘우리의 사회는 의미 있는 사회다.’ 그런 것으로 평생 교육받아 왔잖아요.

주님은 어떻게 산 줄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권총으로 자기 배에 총 쏘며 사신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서, ‘너희는 살려고 하지? 개코도 의미도 없으면서 살려고 하지? 유일하게 의미 있는 나는 나야. 의미만 찾는 이 세상에서 나는 너희들 보기에 내 의미를 따라올 수 없는 위반적인 모습으로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겠다. 누가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는 스스로 죽는다.’(요 10:18)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누굽니까? 믿음이라 하는데 누가 믿어요? 인간세계에서는요 자기 살기 위해서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시장조사를 해요. 어떤 30대가 편의점 하려고 사전 준비한다고 1년 동안을 연구했어요. 편의점으로 성공한 경우와 실패한 경우를 다 조사해서 연구한 다음에 개업했어요.

그렇게 개업한 편의점 2년 하다가 자진 폐업했습니다. 폐업할 때 편의점 회사에 위약금 3천4백만 원, 상가 원상 복구비 2천만 원, 그리고 그동안 월 백에서 이백만 원 손해 본 것 다 계산해 보니 1억 손해 봤어요. 이게 인간들이 하는 거예요. 잘된 것과 잘 안된 것 양쪽을 다 알아서 자기 미래를 설계하는 거예요. 왜? 나는 의미 있으니까요.

그런데 천국 가는 것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구원받은 사람이 많은 교회 즉 구원에 성공한 사례를 많이 연구하고, 구원에 실패한 사례를 많이 연구해서 실패의 사례는 줄이고 성공한 사례로 신앙생활 하면 구원에 성공할 수 있다.’ 이거 편의점 개업하는 것과 차이점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똑같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와서 그래요. 두려움 때문에.

그러면 성경에서 믿음은 뭐냐? 성경에서 믿음은 없어요. 성공 사례나 실패 사례, 이것은 인간들이 조작한 것이고요, 믿음은 없는 데서 생기고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무슨 성공 사례가 있고 믿음에 무슨 실패 사례가 있습니까? 믿음 자체가 없는데요, 믿음 자체가.

아니 물속에서 홍수 속에서 무슨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데 거기에서 무슨 믿음, 무슨 살 궁리를 찾습니까? 하나님의 조치하고 대비되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데 인간은 살려고 하니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위반되잖아요.

믿음은 뭐냐, 하나님의 일은 뭐냐? 너희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질서들이 살고자 하는데, 이미 선악과 따먹은 그것은 생각도 안 하고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데서 온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뭐냐? ‘죽는 것이 합당합니다.’라는 그쪽으로, 위반에 대한 위반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에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천국 가기가 힘든데 어느 정도로 힘든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힘들다’(마 19:24). 뭐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까?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인간들 맘속에는 자기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요. 자존심이란 마음속에 박혀 있는 긴 장대, 막대기 같은 거예요.

자기 맘속에 작대기가 삐죽이 걸려 있는 채로 바늘구멍 통과 한다고요? 이게 턱 받치지 않습니까? ‘내가 어때서? 내가 뭐가 문제인데?’ 자기 속의 자존심을 빼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체적으로 홍수 내릴 때 인간을 집단적으로도 너무 잘 알고요,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따져서도 너무 잘 알아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존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 그 자존심을 빼야 하는데 뺄 재주가 없고, 빼고 싶은 마음도 없고, 빼는 방법도 몰라요. 이건 뭐 게임 하나 마나 실패라는 말이지요.

<범죄와의 전쟁>(2012)이라는 영화에 최민식 배우의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마! 어저께도 같이 밥 먹고 어! 사우나도 같이 가고 어! 다했어!” 서장하고 친하니 뭐합니까? 물에 확 잠기는데. 자기 생각만 하고요, 자기 구원받을 생각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어요.

그동안 뭐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래 놓고 죽을 때는 마지막에 커튼 찢는 거예요. 내가 살아온 내 시공간과 더불어 같이 멱살 쥐고 붙들고 내려앉듯이, 자신의 추억과 기억과 더불어 자폭하듯이 그렇게 죽습니다.

자,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결론은 뭐냐? 죽었다, 그 말입니다. 살길은 없습니다. 믿음은 요청한다고 주는 것이 아니에요. 없는 데서 생겨야 하는데 안 생기면 어떻게 할래요? 죽은 데서 살아야 하는데 죽은 채로 있으면 어떻게 할래요? 살려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없는 데서 믿음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요. 그냥 죽읍시다. 그냥 죽으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 가운데 뭘 심어놓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쁘게 여기는 마음도 심판 속에 담아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뻐하는 것 그것을 집어넣어 놨는데 그게 상(賞)이라는 겁니다. 상(賞)은 어떤 형식을 갖춰서 상(賞)이 나왔는데 어떤 형태가 있어요. 그게 방주입니다.

상(賞)이 방주예요. 뭐가 포집하는, 긁어모으는, 포집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형태로서 방주가 상으로 주어졌습니다. 당연히 그 방주 안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심만 들어 있겠지요. 그래서 방주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멸해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질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함축된 내용이 방주 안에 들어 있어요.

세상 멸망시키고, 방주 안의 내용을 핵심으로 쏟아내게 되면 이 세상은 재편된 세상으로 계속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상(賞)이 있다고 오늘 본문에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그래서 그 방주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가 중요하겠지요. 방주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자,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당연히 죽어야 하지요.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으로 봐서 하나님께서 동행했기 때문에 노아를 안 죽였을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창세기 6장을 보면서.

그러면 노아는 안 죽기 때문에 높은 산에 올라가서 홍수 관람하는데 노아가 서 있는 발까지만 물이 찰랑찰랑 올라왔습니까? 물속에 잠긴 그 속에 노아의 텃밭이 없었겠습니까? 홍수 났을 때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개울가 텃밭 가꿔놨는데 이번에 물난리 나서 물에 다 잠겼다. 그동안 새벽마다 비료 주고 호미로 김매준 거 다 잠겼다. 속상해 죽겠다.” 그런 거예요.

우리 인생이 우리 텃밭입니다. 물에 다 잠겨요. 자꾸 미련 갖지 마세요. 의미 없습니다. 자꾸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지 마세요. 내 쪽으로 돌리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동해 물과 백두산이~” 나올 때는 고개를 태극기 쪽으로 돌리는데 그건 성령이 돌려주고, 성령이 돌려놓으면 마귀가 와서 또 내 쪽으로 돌려놓고요, 다시 성령이 와서 돌려놓으면 십자가가 보이고요, 다시 돌려놓으면 또 내가 보이고요. 이 싸움이 죽을 때까지 안 끝나는 싸움 같아요.

방주 안에 제단이 있습니다. 방주 안에 피투성이 제단이 있어요. 그 제단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7장 2절에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눴는데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이지요, 부정한 것은 두 쌍씩입니다. 다시 말해서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 시공간을 창조했다는 그 흔적으로 숫자 7이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3절에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하나님이 창조한 것을, 그 정결한 창조성을 압축해서 방주 안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뿐만 아니고 부정한 것까지 같이 방주 안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자기부정을 해버리는 거예요.

따라서 재편된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긍정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정도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에 의해서 매 맞고 저주받아 피 흘리는 그 모습도 새로운 세계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피에요, 피! 방주 안에 하나님이 상(賞)으로 주신, 선물로 주신 거예요.

선물 안에는 새 질서, 새 세계의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그 질서에 대해서 창세기 8장에 보면 물이 걷히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요. 20-22절에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정결한 짐승, 더러운 짐승 놔두고 정결한 짐승 잡는데 하나님께서 그 연기를 흠향하시고 굉장히 기뻐하신 거예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요소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 대상이 아니고 구원 대상이에요.

따라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들어 있느냐 안 들어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자기 노후 대책만 하지 마시고, 죽음 이후의 대책도 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죽음 이후의 대책이 뭡니까? 내가 기뻐하는 것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제가 친절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죽어!”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그냥 죽어’라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모습, 유치원 졸업, 초등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 이 모든 우리 일상의 일이 나를 죽이기 위한 조건들이에요. 회사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파트 사고, 차 사고, 전부 다 죽이는 용도에요, 죽이는 용도.

어떻게 죽는가는 모르지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 보면서 아는 겁니다. 챗GPT로 뭘 하고, 넷플릭스로 영화 보고 드라마 보고, 거기 나오는 모든 내용이 ‘아, 이래서 죽어 마땅하구나.’ 죽어 마땅한 내용들을 주께서 깔아주시는 거예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과학이든, 노벨상이든 전부 다 저래서 노벨상 받고 죽는 거예요.

그렇게 다 죽는 데 불에 타 죽으나, 물에 빠져 죽으나, 늙어 죽으나 죽기는 맨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것은 죽음이 이게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거예요. 나의 죽음이 하나님의 기쁜 일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어떤 미친 사람이 이걸 알겠어요? ‘하나님의 뜻은 내가 죽는 것이고 따라서 그 뜻을 받아서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쁜 일이냐? 나도 기쁘다.’ 이게 믿음 아닙니까?

왜냐하면 믿음이란 죽은 데서 사는 거거든요. 따라서 죽은 데서 산다는 것은 죽음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지요. 나를 죽음의 자리 거기에 놔야 해요. ‘악착같이 살아 보자’가아니라 ‘마땅히 어떤 식으로도 죽어야 한다.’는 그 죽음 자리에 우리를 놓자, 그 말입니다.

그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한다. 이것은 더 어려워요. 여자의 특징은 ‘진공’을 품고 있어요.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은 없는 데서 자식을 낳았으니까, 후손인데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라 하는 것은 없음을 뜻하는 거예요. 보통 여자가 자식을 낳는 것은 남자 때문에 자식을 낳은 거예요. 여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이 육신을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자식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7).

이 말은 뭐냐 하면, 육신은 없음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일을 방해하는 거예요.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 자’, 육체를 따라 난 자라는 것은 ‘있음에서 있음에 있는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 곧 ‘없음에서 있는 자를 핍박한다’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따라서 성도, 없음부터 출발한 사람의 신랑이 있는데 그 신랑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고요. 그리고 그 사람은 없음의 후손들, 예수님의 후손들이고요.

다시 창세기 8장으로 돌아와서, 방주 안에 제단이 있습니다. 방주 안의 그 제단이 있는데 이제 방주의 기능이 멈추고 바깥 새로운 세계로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제단부터 쌓고 거기에 정결한 짐승 잡아서 피를 흘리고 하나님께서 그 연기를 마셨어요.

그때부터 어떤 질서가 있느냐? 창세기 9장 4절에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두 번째 세상, 홍수 이후의 세상에서는 피를 통해서 내가 생명을 나타내겠다, 전달하겠다.’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중심 질서로 잡혀있습니다. 5-6절에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피를 흘린다는 것은 죽음에 대해서 인간이 인간을 죽일 권한이 없고, 그 죽음에 대해서 주도권은 주님에게만 있는데 주님이 이미 인간을 죽는 존재로 확정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창세기 8장 2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왜 죽어 마땅한가?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노아가 이걸 알아요. 노아가 이걸 알아서 아주 독하게 결정합니다. 세상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과 귀여운 손자를 저주하겠습니까? 창세기 9장 25절에서 아버지 노아가 함과 가나안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손자에 대해서까지 저주를 퍼부어요.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라.’

하나님의 홍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아셔야 할 것은, 노아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어떤 방어책도 세운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당하지요. 하나님의 조치에 그냥 당하면 그렇게 당한 노아가 상(賞) 덩어리가 돼요. 하나님의 은사, 선물 덩어리가 된다고요. 하나님의 기쁘심의 덩어리가 된다고요.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카피, 복사하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의 복사판이 보이는 노아예요. 이게 동행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카피를 한 거예요. 베끼는 거예요. 베꼈을 때 하나님은 노아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 ‘다 죽이고 새로운 사람을 내가 창조하겠다.’라는 것, 그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용납이 되지 않아요.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죽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기쁘심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죽이는 하나님은 기쁘게 죽이는데 막상 죽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을 못 할 때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 그리고 그런 위치에 있는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천국으로 전환 시키느냐? 그 절차, 그 작업만 남았지요.

그 작업은 구약 한 곳과 신약의 몇 곳을 찾아보면 연결됩니다. 구약에서는 요나입니다. 요나가 자진해서 죽기 위해서, 꼭 권총으로 자결하는 듯하지요, 그렇게 죽기 위해서 바닷물에 자진해서 뛰어들었어요. 선원들 보고 ‘주저하지 말고 나를 바닷물에 던지고 여러분 사시라. 나는 이참에 죽어도 좋습니다.’ 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요.

남들이 밀어준 거지만 결국 자진해서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요나는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를 안 죽였어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을 때 요나의 감정은 뭐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죽음 안에서 살아 있어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 있어요. 빠져나갈 구석은 없습니다. 탈출로가 없어요.

이게 오늘날 성도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당하는 체험, 형편, 처지를 요나가 미리 체험한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구약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를 네 손으로 번제로 드리라.’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입니다. 거기서 ‘시험’이라는 말을 해요.

결론부터 말씀드려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상(賞)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을, 똑같은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상(賞)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상(賞)을 받을 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받아야 하거든요. 예수님만이 다 이루었기 때문에 상(賞)을 받습니다.

그 상(賞)을 방주라 여기고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시험을 똑같이 당하는 그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에요. 아까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장차 오실 분이지만 장차 오실 메시아가 당했던 시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로 다가오는지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체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이려면 그냥 죽이시지 이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비린내 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살았다는 그것이 뭐가 산 것이겠어요? 따라서 그 요나에서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영생 얻는다는 것, 내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함’이라는 거예요. 그 불가능함을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모든 가능성은 다 끊어졌어요. 그 불가능함만 쳐다보는 그 공포가 어마어마하게 큰 공포예요.

이 공포가 있으면 이 세상 살아 가면서의 모든 공포는 그 앞에서 공포 같지도 않아요. 시시한 공포예요. 그것은 공포도 아니에요. 요나의 그 공포는 절대적인 공포에요. 차라리 죽으면 공포를 못 느낄 거잖아요. 요나를 살립니다. 살리면서 메시아가 당하는,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이 당하는 그 공포스러움을 요나가 미리 다 짊어지고 겪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요나의 표적이 바로 내 표적이다. 내 표적을 미리 당겨서 요나가 보여줬다.’(눅 11:29)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예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편의점 개업하듯이, 이렇게 또 이렇게 따지고 또 따지고 시장조사 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이고요, 그 불가능함에 대해서 ‘아이고 뭐, 주께서 알아서 믿음 주시면 믿고 없으면 뭐 나대로 살지.’

이것은 주님이 당했던, 십자가에서 당했던 그 공포가 아니에요. 그것은 배포지요. 그거는 농땡이치는 거죠. 그게 아니에요. 정말 성도는 주님이 당했던 그 시험 안에서 주님이 경험했던 그 불가능성, 난감함, 황당함…, 거기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엄청난 공포예요. 서슴없이 이런 고백을 해야 해요.

‘주님, 저한테 왜 이런 믿음 주셨어요?’ 짜증 섞인 말로 ‘왜 믿음 주셨어요?’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어떤 수완이 없어요.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궁지로 몰아넣는가 보세요.

말씀이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어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성이 주는 그 공포성을 더욱더 크게 키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말씀에 의한 공포성이 커져야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이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은 그 앞에서 다 녹아져요, 없어집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뭔가 착한 일을 해서 주께서 갚아주는 게 없고, 이 상(賞)은 내가 행해서 얻는 상(賞)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분, 신랑이죠, 동행하시는 신랑인 예수님 덕분에,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했던 그 시험, 예수님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당했던 그 시험의 결과로써 주어진 그 상(賞)에 그저 참여하는데, 다만 똑같은 주님의 그러한 시험에 대한 난감함을, 우리로 하여금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한다는 거예요.

방금 읽었던 이 말씀,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부한 사람 청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청하라’ 이 말씀을 차라리 우리가 몰랐으면 이러한 공포가 없겠는데, 이 말씀을 딱 들은 순간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내가 구원받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감, 수천만 원 헌금을 하고, 오백 명 전도하고, 강의 다니고, 개척교회 열 군데를 해도 그게 내 구원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데서 오는 그 공포성.

그러면 뭘 믿느냐? 부활을 믿는 거예요, 부활을. 나의 부활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 그 부활을 믿는 거예요. 여기서 나오는 당연한 질문들, ‘주께서 나를 안 건져주면 저 어떻게 돼요? 주께서 저 상(賞) 안 주고 믿음 안 주시면 저, 어떻게 돼요?’ 다른 말로 하면 ‘남들 다 물에 잠기고 나 혼자 방주 탔는데, 방주 밑에 빵꾸나면 어떻게 해요?’ 이로부터 오는 공포심, 노아에게는 없었겠습니까? 있었겠지요. 주님께는 없었겠습니까? 있었지요, 주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 이런 고민, 이런 공포가 바로 하나님께는 상(賞)이 된다는 거예요. 그 체험이 주님의 체험과 동반되면서, 그 시험받음에 동참함으로써 차곡차곡 상(賞)이 계속 쌓이는 거예요. 뭐, 어떻게?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느꼈던 갈등과 번민, 주님이 가신 그 길과 똑같은 길로, 네가 지금 이끌림을 받고 있다.’라는 거예요. 이끌림을 받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런 혜택도 안 줘요. 고민하거나 갈등하거나 번민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 편한 대로 살지 뭐. 주께서 믿음 주면 받으면 되고.’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 생각해요. 고개를 태극기 앞에서 자꾸 자기한테 돌려요. 자기변명 한다고. 고개를 십자가 쪽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십자가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경로와 절차를 밟아서 십자가에 죽게 됐는가, 그 노선과 같은 노선, 경로가 같은 노선이 되어야 할 텐데, 고개를 자꾸 내 쪽으로 돌려놓게 되니까 나는 나의 과거와 추억과 내 노력과 땀방울, 이런 것만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누가복음 14장을 계속 보게 되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14:16-20).

자기 장가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 있어요. 자기 장가잖아요. 자기가 주인공이잖아요. ‘내가 장가가는 주인공이니까 참석 못 합니다.’ 정당하게 느껴지죠. 그러니까 주인이 노해서 하는 말이, 전에 청했던 사람들 한 사람도 오지 못하게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를 비우지 못한 자는 주님의 시험에 의해서 다 걸러진다.’라는 거예요. 천국 좋죠, 지옥 싫죠. 그러나 천국, 지옥 가기 전에 먼저 주께서 시험의 공간으로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을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시험의 공간으로서. 그 시험의 공간에서 어떻게 되는가? 자기 자신을 걸러내지를 못해요. 자기 위주예요. 그러니까 점점 더 어떻게 되는가? 점점 더 불가능성이죠. 대략난감입니다.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그걸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실컷 설교했는데, 대략난감으로 끝났어요. 믿음을 얻고자 하는 수완 자체가 아주 불가능한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 이 말이죠. 이러면 믿겠다, 가 아니라 아예 있는 믿음도 다 없애버려요. 왜? 불가능성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하니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어떤 힌트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중풍병자가 왔을 때, 그들은 중풍병을 고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섞어 줬느냐 하면, ‘죄 사함’을 줬어요, 죄 사함을. 이것은 내가 예상한 범주 바깥에서 주어진 겁니다. ‘나 어떻게 구원받아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가요?’ 이것이 우리가 예상한 것인데 정작 주님께서 주신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의 구원받는 것, 그 모든 것을 무효화시켜요. 그걸 다 무의미로 무효화시키고 “치워라!” 하는 것처럼 전부 다 거부해 버립니다.

거부해 버리고 새로운 것을 줍니다. 중풍병 고치러 와서 중풍병 때문에 고민할 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께서 불러서 “네가 지금 고민할 잽을 가지고 고민하느냐? 정작 너는 무엇을 고민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왜? ‘너 자신의 고민에 의해서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원하는 것이 다 막혀 있다.’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해답은 이겁니다. 히브리서 전체의 내용이 해답입니다. 제단이 있어요. 그 제단 위에서 희생물이 피를 흘리고 불에 의해서 다 타버리지요. 제단에 피를 뿌리고 그렇게 합니다. 결국 이것이 무슨 말이냐? 피라는 게 ‘저 피를 내가 믿으면 되잖아.’라는 그런 피는 삑! 이것은 잘못된 피예요.

주께서 정작 주시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피입니다. 살이고 피예요. 그러면 이것은 예상 못 한 거예요. 그 피가 오는 순간, 그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개인적인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는 이 시험의 공간 속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관통, 통과시킨 거예요.

통과시키면서 결국 주신 것은 뭐냐? 이미 너는 죽었다 그 말이지요. 죽은 자가 어떤 고민을 해도 하나님이 안 받아요. 안 받고 죽은 자와 동행하는 분은 산 자에요. 산자가 주신 것은 피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결론 내리면 돼요. 이미 죽은 자들이 내릴 수 있는 조언을 남들에게 해주세요.

“피 없이는 살지 마세요.” 피 없이는 살지 마세요. 이것이 바로 고개를 태극기 쪽으로 돌리는 거예요. 피 없이는 살지 마세요. 만약에 마귀에 의해서 다시 내 쪽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공포, 두려움, 걱정 온갖 것 다 해요. 다시 성령께서 피 쪽으로 돌려버립니다. “없는 데서 네가 있고 죽은 데서 네가 살았는데 그것은 예수님 제단의 피, 정결한 제물의 피, 그 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그 증거가 성도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가면서 왜 그리 걱정 근심이 많고 두려움도 많은지, 모든 시선과 생각이 나 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런 내가 구원받고자, 천국 가고자 시도한 그 자체도 엉터리인 것을, 아무 의미 없는 일인 것을 저희들 깨달아서 다시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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