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기름의 의미

아빠와 함께 2025. 4. 27. 17:13

기름의 의미

2025년 4월 2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4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오늘 본문은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예물이 어떤 예물인지는 창세기 4장으로 가봐야 합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창 4:4) 여기에 제물의 몸통 부분과 기름 부위를 의도적으로 구분짓고 있습니다.

이는 몸통 속에서 본질이 ‘기름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제물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실상의 세계’와 관련되어서 이 보이는 세계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따라서 ‘보이는 세계’로부터 이 ‘그 기름 부위’를 해석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을 부각시키시는 이유는, 기름의 존재성 때문입니다. 나중에 모세 율법 제사법에서 기름 부위는 의도적으로 몸체와 분리시킵니다.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고”(출 29:13) 하나님께서 제단을 통해 기름이 태워져 위로 올라가는 그 냄새를 기쁘게 흠향하십니다.

그러니까 고체인 몸통과 액체인 피와 기체인 기름부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이유는, 보이는 것뿐이고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서 11:3에 나오는 취지, 즉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3.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표준새번역)

3.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공동번역)

3.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universe was formed at God's comman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what was visible.(NIV)

3.  Through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fram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things which are seen were not made of things which do appear.(KJV)

3.  By faith we understand that the worlds were prepared by the word of God, so that what is seen was not made out of things which are visible.(NASB)

 

그렇다면 아벨에게 있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그 제물과 제물 드린 자가 운명으로 결속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자가 나타난 자가 되는 그 결속 관계가 곧 믿음입니다. 이 결속 관계로 인하여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그 예물의 운명’과 같이 됩니다.

곧 죽습니다. 맞아죽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결코 너의 것을 안 받는다고 단정내린 그 자‘로부터 죽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을 야속하게 생각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편을 죽이시느냐 섭섭한 감정을 품어본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이시는 것은 아벨을 복원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의 노선 안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그 세계 안으로 들어놓기 위함입니다. 이는 죽지 않고서는 그 누구든지 여호와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5-26)

인간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닌 존재’,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한 힘에 붙잡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5:6-9에는 “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귀신의 이름은 ‘군대’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즉 이것은 기능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그냥 모여있는 집합체를 묘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은 자기 고유성을 따로 갖지 못하고 배후의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힘들이 인간들 내부를 장악합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붙잡혀서 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하지만 창세 4:26에서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됩니다. 이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게 맞아 죽은 바로 아벨의 가치를 복원하므로서 비로소 여호와의 세계가 구성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진 집단에 속한 자들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실상이고 그 실상이 지상에 사건화된 것이 아벨이 드린 예물입니다. 기름의 의미는 ‘차별남’, 혹은 다른 것과 구분지음입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야굽에게도 같은 성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이 기름부음이 점차 모세 제사법에서는 아에 사람 몸이다 발라버립니다. “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출 28:41) 예수님께서는 이 기름부음이 성령으로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등장은 곧 “와 나는 지옥에 왔다. 이 세상은 어둡다”가 성립되는 겁니다.(요 1:5)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는 와 “깡패”라는 말과 같은 말과 같습니다. 즉 ‘나는 너희들의 본질을 평가하고 규명하는데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예수님만이 참된 기름부은 대제사장이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문동병 열 명이 예수님에게 옵니다. “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2-19)

인간은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반드시 자기 행함에 관심둡니다. 가인의 노선에 속한 라멕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아홉명의 문둥병자들은 자기에게만 관심 둘 뿐입니다. 그래야 자기 잘남의 증인으로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단 한 사람은 진정한 죽음과 태움을 거쳐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시는 대제사장은 예수님 뿐임을 알았던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그 기름부음이 주어집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태워짐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 공동체로서 하늘의 증인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구원의 능력이 내려오는 십자가 빈 통로만 소개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4강-히브리서 11장 4절(기름의 의미)25042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지난 시간에 보이지 않는 실상의 증거가 허상뿐인 이 세상에 툭툭 던져지듯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가 하는 일이 뭐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오늘 본문에 ‘아벨’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벨이 얼마나 훌륭한가, 착한가?’ 그게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가 아니고, 여기 4절에 보면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가 나중에는 믿음의 주인공 되시는 분으로서 직접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 그걸 앞당겨서 아벨 시대에 아벨이 드리는 예물을 통해서 그 오실 자를 미리 보여준 겁니다.

그러면 믿음이 뭐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운명이 일치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아벨 자기가 바치는 예물이 갈 코스, 그 절차, 제물을 바치는 아벨이 운명적으로 같이 간다, 같은 결말에 도착한다, 이렇게 결합 된 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불쑥불쑥 이 땅에 나타나는데 나타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운명공동체라는, 결속된 하나가 되어 있는 식으로 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여기 아벨 말고 가인이라는 인물이 하나 더 등장하죠.

그러니까 가인에게는 뭐가 없느냐? 보이는 것은 있는데 나타난 것은 없는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주보 뒤에 요약되어 있는데 〔아벨의 믿음은 그 반대입니다.〕 해놓고 중간에 〔가인의 믿음은 허상, 보이는 것이라면 아벨의 믿음은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인의 믿음은 보이는 것이지만 아벨의 믿음은 나타난 것입니다. 나타났다는 것은, 보이는 쪽에서 해석하는 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가인은 특별한 기능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타났는가?

아벨이 예물을 바치고 난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나타난 것이 아니고 보이는 쪽에 속하는, 가인 쪽이죠, 보이는 쪽에 속하는 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니까 이 아벨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라는 것을 뭐로 확인할 수 있느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 없는 자한테 맞아 죽었잖아요. 그 죽음이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확실하게 있다는 증거는 죽는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 마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두 살 아래 아이들은 다 죽었어요. 누구 때문에요? 나타난 분 때문에. 예수님이 아기로 나타났다는 그 이야기를 접하고 아기 예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살해하기 위해서 넉넉하게 두 살 밑의 베들레헴 근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죽음이죠. 자기 아이가 죽었으니까 울 수밖에 없죠. 우는데 우는 자를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야곱의 부인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의 부인이 자기 자식을 잃어서 운다.’ 이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거예요. 애를 낳았는데 난데없이 베들레헴에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갑자기 권력체로부터 죽임을 당할 때 “남의 애는 안 죽는데 왜 내 애는 죽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의 보이는 세계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핍박을 받는 과정속에서 네 귀한 아들이 죽게 되었다.”

딸은 아니고 아들만 죽었어요. ‘따라서 네가 애를 잃어버린 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련성이 있다.’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2장 18절에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여기서 ‘라헬’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인 야곱의 부인 이름이에요. 본처 이름이 라헬이에요. 이 라헬의 운명이 오늘날 교회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전체 내부에 이런 현상이 자꾸 일어나는데 사무엘상 4장 17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는데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다 죽었어요.

그리고 18절에, 홉니와 비느하스 둘 다 죽고 난 뒤에 나이가 구십 팔세가 된 엘리가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자식 둘 죽었죠. 늙은 아버지는 자식이 죽었다는 소리 듣고 의자에서 자빠져 목 부러져서 죽었죠. 그다음에 며느리가 자기 남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받아서 죽었죠(19절). 사무엘상 6장 19절에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 죽었어요.

도대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죽어 나가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의 죽음 현상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꾸 살아야 하겠다고 악을 씁니다. 내 존재의 용도가 하나님께 어떻게 다뤄지는가는 생각을 안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어딨어? 보이는 세계가 전부지.’ 이렇게 되어 버리면 ‘죽고 난 뒤는 난 모르겠고 살아있을 땐 악착같이 사는 게 남는 거다.’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면 살아남기 위해서 가인은 뭘 했는가? 하나님을 찾았죠. 성경에서 난해한 구절들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이 대목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라는 이 사실이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게 아니에요. 신의 존재를 내가 아는 거예요.

알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상상하니까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게 뭐가 어려운가? 문제는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고, 보이는 세계인 인간의 세계에서 노벨상 받고 똑똑한 것들을 다 동원해도 뭐가 해명이 안 되는가?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안 받았다는 인식이 생겼다는 그 사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 있다. 제사를 드렸다. 별 효과가 없네? 그럴 수 있지.’ 이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넌 아니라는 통고를 받았다는 그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제사를 드립니다.’ 하는 내 쪽의 의도, 기대감, 우리는 그냥 기대감으로 끝나면 되죠.

‘교회 왔다. 그리고 기도 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한 주 다 지났다. 그런데 별 응답이 없네? 뭐 그럴 수도 있지. 확실히 계시는지 아닌지 난 모르니까 복 주려면 복 주겠지.’ 이 이야기가 보통 우리 사람들의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네 예배 안 받아.”라고 확실한 통고를 받는다는 이 사실이 가인에게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그냥 입 다물고 있으면 천국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한 건 내가 있다는 거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고.’ 이건데 분명히 계셔서 분명하게 나한테 이야기를 했어요. “너는 내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정적인 통고를 받는단 말이죠. 얼마나 신기합니까? 정말 신기하죠.

우람한 형사 마동석이 나오는 <범죄도시>라는 영화에서 형사가 범죄 현장에 출동합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와! 깡패다!” ‘저 깡패가 열심히 병든 부모에 효도하든 말든 난 모르겠고 내가 보기에는 그냥 깡패다.’라는 이 말은 ‘난 너를 평가하고 규정짓는데 자신감이 있다.’라는 뜻이에요. “와! 깡패다.” ‘하나씩 와서 내 핵 주먹 맞아봐.’ 이런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왔을 때 “와! 지옥이다! 한 놈씩 와.” 마태복음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와! 독사의 자식들이다!” 이렇게 했어요.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세례 요한이 아주 신이 났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온 걸 보고 말하기를 “와! 독사의 자식들이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용어가 약간 더 격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와! 독사의 새끼들이다.” 마태복음 23장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여러분들이 아벨 계통에 속한다면 세상에서 누굴 만날 때 “와! 가인족들이다!” 이래야 해요.

제가 상상을 해봐요. 서울의 어떤 큰 교회에 초청받아서 설교를 한다면 “와! 이단들 봐라!” 교회 와서 성경은 안 듣고, 그냥 폼만 내면서 앉아 있고,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하면서 교회 나가고, 악착같이 밥 먹고 사는 일에 매진하는 “와! 이단들이다.” 전혀 말씀이 그 사람 속에 먹히질 않아요.

그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방수 효과’라고 합니다. 물을 한 트럭을 부어도 마음속으로 들어가질 않아요. 안에서 뭔가 말씀에 대해서 반발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가인족이에요.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을 살해하지 않습니다. 죽입니다, 죽여요.

하나님이 인간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은 가인을 살려줘요. 아벨은 죽었는데 살인자 가인을 살려줘요. 이상하죠? 왜 가인을 자꾸 살려줍니까? 하나의 라인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분류 체계가 일어나는데 그 분류 체계는 보이는 세상 쪽 그게 전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라인을 구축할 그런 인간들이 계속해서 생산돼야 하기 때문이에요.

또 한쪽은 아벨 계통인데 보이지 않는 그 세계가 진짜 실상의 세계고 가인이 보는 세계는 허상의 세계인데, 아벨 계통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거하기 위해서, 또는 보이지 않는 분의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증명, 증거하기 위한 노선을 따로 분류하는 거예요.

분류 체계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그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벨 쪽에서는 너무 손해지 않느냐? 제사를 잘 드려 놓고 그냥 죽어버리면 어떡하냐?’ 창세기 4장에 보면 그 죽은 아벨을 복원해요. 죽은 아벨의 복원입니다. 창세기 4장 25절에 나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가인과 아벨은 둘 다 아담과 하와의 씨거든요. 그 씨 말고 그 씨를 탈피하여 아담과 하와의 씨 말고 하늘에 속한, 보이지 않는 실상에 속한 씨로 말미암아 죽은 아벨부터 새로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그 죽은 아벨 대신에 나온 것이 셋인데 이름은 셋이지만 아벨의 재현이에요. 아벨이 그 셋의 안에 살아있습니다.

아벨의 계통 후손 가운데 에녹이 있는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냥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가 삼백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3-24). 그가 365년 동안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건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세계죠. 실제로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하면서 이론상으로는 다 알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기적을 베풀고…, 다 아는데 정말 섬뜩섬뜩 놀랄 정도로 ‘내가 정말 예수님을 아는 것이 맞는가?’를 예수님 쪽에서 자꾸 시험하고 파악하시는 것, 검증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예요.

마가복음 6장 48-49절에 보면 밤 4 경쯤에, 새벽 3~4시쯤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와요. 물 위를 걸어오니까 제자들이 유령이라고 했어요, 유령. 예수님인 줄도 모르고 유령이라고 했는데 유령은 인간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 속하는 거잖아요. 죽은 자의 세계 아닙니까.

이 세계는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세계 속에 나도 포함이 되어 있어요.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이 세계 속에 속하지 않는 다른 물체, 다른 인물이 물 위를 걸어오니까 이건 유령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까 누구냐? 예수님이었습니다.

옛날 18-19세기쯤 유럽 사람들이 남태평양 탐험을 할 때 아주 미개한 섬들에 있는 원주민들이 보니까 수평선 너머에서 뭐가 다가와요. 큰 배인데 연기가 일어나는 증기선이 오는 거예요. 그 토인들이 그 낯선 세계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왜 저 바다 끝에서 우리가 구경도 못 한 다른 물체가 다가오느냔 말이죠.

그러니까 밤중에 제자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보이는 세계에 자기와 같지 않은, 물 위를 걷는 이상한 인물이 올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에게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데요. 그래서 이 가인 같은 경우도,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과 의견이 소통되면서 “나는 네 제사를 안 받아.” 이렇게 규정을 받을 때 우리 현대인으로서는 ‘아벨이 어떻게 되든지 그건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너 내 쪽 사람 아니야.”라고 통고를 받는 희한한 현상, 넌 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이게 너무나 신기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응답이 없다면 내 쪽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 내리면 그만이거든요. 아무 문제 없어요. ‘하나님은 원래 없는 거야. 그건 죽어서 가 봐야 아는 거고. 중요한 것은 나야.’ 이렇게 단출하게 정리하면 되는데 분명히 계시는데 너 아니라는 통고를 받을 때….

이 비슷한 예가 현대에도 있어요. 수사 기관에 혐의가 있는 사람이 취조실에 들어갑니다.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많이 나와요. 들어가서 마주 보고 있는 형사나 검사한테 취조받으면 되는데, 취조받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까만 창을 쳐다보면서 “야, 그 거울 속에 있는 인간들! 똑바로 이야기해라. 너희들 나 잡은 거 다 정치적인 조작이지? 너희 검사들 말이야. 너희부터 내가 다 쳐내겠어.”

형사가 “잠깐만요, 저기 시커먼 거울밖에 없는데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하십니까? 당신 정신병자예요? 거기 아무도 없잖아요.” “있다고! 뻔히 알면서 이러네.” ‘아, 이 사람 정신병원으로 처넣어야 하나?’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참 희한한 세상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내가 이 세상에 왔으매, 빛이 왔으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전체를 어두움으로 봐요. 효도를 하든, 뭐 열심히 살든, 바르게 살든 관계없어요. 그냥 이 세상은 전체가 어두움이에요, 그 전체가.

전체가 어둡다는 하나의 예가 마가복음 5장에도 나오는데 거라사 지방의 어떤 청년이 귀신 들려서 무덤에서 설치고 있단 말이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가는데 그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7절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이렇게 딱 이야기해요. 이건 예수님께서 그 귀신에게 나오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오라고 할 때 먼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그때 그 귀신이 이렇게 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입니다.” 이 말은 ‘저요? 그냥 기능입니다, 기능. 집합적인, 복합적인 기능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배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악마죠. 사실은 악마가 배후죠. 그래서 그 귀신이 청년에게서 나왔어요. 그런데 귀신이 부탁하기를 돼지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돼지에 들어가더니 돼지들이 비탈을 내려가 다 죽었다는 이야기, 여러분 아시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아무것도 아닌 곳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떼쓰리로 들어가 있다가, 아무것도 아닌 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왔어요, 이름이 없으니까. 그냥 이 세상이 어둡다는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귀신들의 활동을 허락했으니까요.

결국 이 어두움에 있는 우리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들어오니 농락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게 보이는 세계에요. 그 어두움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유월절 출애굽 할 때 낮에 일어난 게 아니에요. 밤에 일어났어요.

밤은 그 특징이 어두워요. 지옥의 특징도 어두워요. “야, 지옥이다!” 주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야, 뱀의 새끼들 봐라. 와~! 온통 뱀 새끼들뿐이네.” 이렇게 장담할 수 있고 그런 규정에 자신감이 있는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예물을 안 받았으니까 가인은 자기 제물로 증거할 게 없어요. 가인의 제물을 안 받는 이유는 네 몸통 자체를 거절하니까요. 하나님께서 그 가인의 족속 라인을 살려둠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물로 무언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없어요.

없으니까 예물 대신 자기를 나타내요. 그것이 라멕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6대 후손이 라멕이에요. 자기를 나타내는데 자기의 말을 나타내요. 인간은 자기의 말을 증거합니다. 곧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는 거예요. 보이는 나를 증거하는 거예요. 인간이 본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울을 무한 투영하면서 발산된 그 투영을 자기가 늘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측정하고 보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가인족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라멕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모든 모임은 왜 모이죠? ‘내 말을 들어라. 내 소리를 들어라. 나는 나의 증인인데 이 증인의 소리를 들어라.’ 이게 바로 보이는 세계의 본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안 받으니까, 인간이 어떤 찬양, 기도, 예배, 헌금 그 어떤 것도 안 받으니까요. “와, 이단들이다!” 그 이단에게서 뭘 받습니까? 아무것도 안 받아요.

교회 와서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안 받습니다. 안 받으니까 그 대신 “날 좀 봐. 내 소리 좀 들어봐. 내 음성 들어봐. 이렇게 난 잘나가고 있어.” 이것만 무한반복하고 있어요. 요즘 그중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명을 거론하면 경희대학교 물리학 교수 김상욱 박사에요.

김상욱 박사가 양자역학을 이야기해요. 방송에 나온 김상욱 박사 보고 물었어요. “양자역학이 그렇게 어렵다는데 그걸 어떻게 잘 설명하면 납득이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아주 재치 있게 답변을 해요. “일 분 버전으로 답할까요, 3분 버전으로 듣고 싶습니까, 30분 버전으로 할까요?” 그렇게 이야기해요.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1929~2019)이라는 노벨상 받은 이 물리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양자역학 모르는 사람은 원숭이보다 못하다, 이 말입니다.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강원도에서 옥수수 키우고 강냉이 파는 할머니한테 한번 물어보죠. “할머니 양자역학이 뭡니까?” “난 모르겠는데?” 금붕어보다 못한 존재예요. 원숭이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제가 양자역학을 10초 버전으로 말씀드릴게요. “양자역학은, 내가 보낸 편지를 내가 읽으면서 만족하는 게 양자역학”이에요.

인간은 철저히 나타난 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나타난 것 중에서 내가 측정해요. 내가 측정하는 겁니다. 내가 측정한 그것으로 양자역학에 의해서 만든 게 휴대폰이에요. 그래서 교회와도 맨날 휴대폰 쳐다보고 있어요. 어디 가도, 버스 타도, 거울 보듯이. 휴대폰에 있는 유튜브를 들여다봐요. 왜? 거기 내 모습이 나오니까.

예물? 예물은 몰라요. 하나님께선 그거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가인이 화가 나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 너 지금 악마가 너 갖고 놀려고 한다. 그거 이겨내야 하는데?” 하지만 못 이기죠. 그 말은, 모든 인간은 아벨에게 갈 수 없고 가인의 세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인을 통해서 아벨이라는 새로운 실상의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백성으로 들어설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예가 시편 65편 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나와요.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들어가는 입구가 뭐냐? ‘내가 죄를 이길 수가 없다.’에요. 아담의 씨를, 그 DNA를 타고났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자에요. 죄를 이길 수 없으면 당연히 지옥가야 되지 않느냐?

중간에 뭐가 들어오는가? 하나님의 예물이 들어와요. 이제부터 예물을 설명하겠습니다. 아벨이 드린 그 예물을 설명하는데 그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에요. 오늘 본문의 핵심을 말하자면 이겁니다. 그 기름과 본체 부분을 구분했다는 점이에요. 히브리서 11장 오늘 본문에서 4절에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그 예물을 보니까 기름 부위 따로, 몸체 부위 따로가 되어 있어요. 바치려면 다 바치지 의도적으로 분류 시키는 이유가 뭔지를 창세기 4장만 가지고는 몰라요. 그 뒤에 연이어 이어지는 율법 세계 안에 들어가서 그 예물에 대해 계속해서 해석을 해줘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해줍니다.

복잡하니까 우리는 일단 결론부터 먼저 보게 되면 히브리서 1장 9절에 나옵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기름 부음이 있는 자는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더라도 격이 다른 세계에 속하도록 내가 기름을 통해 차별화를 시켰다는 그 말이에요. 기름이 있는 자는, 이 눈에 보이는 세계만 쳐다보고 있는 가인의 라인과는 다른 라인에 속한다는 그 말이에요.

본격적으로 출애굽기,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이 제사할 때 하나님이 “스톱! 제물을 그냥 바치면 안 되지? 기름 부위를 따로 떼 내야지.” 기름 부위를 따로 떼 냅니다. 그러고 난 뒤에 나머지 제물을 잡아서 피를 내고 몸통은 제단에서 태우는데, 그때 기름을 몸통과 따로 떼어내고 다시 합해놓고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서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그 기름을 보고 기뻐하신다고 나와요.

몸통은 뭐냐? 고체예요. 피는 뭐냐? 액체입니다. 기름은 뭐냐? 기체에요. 고체로 오신 분이 기체가 되어 다시 본래 왔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예물의 기름 부위와 몸통 부위를 분류하면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기름 태우고, 몸통도 따로 태워 드리면 그걸로 끝나는 데 중간에 웬 피냐?

하나님이 인정하는 예물은 이 땅에서 죽어야 해요. ‘피’라고 하는 것은 죽임을 당해야 나오니까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 아예 일체 그들의 예물을 받지 않는 그 대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예물을 위해 아벨은 누구한테 죽었는가? 형 가인한테 죽었어요. 형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은 아벨을 급하게 살리질 않았습니다. 왜? 자기가 받는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아벨이 운명공동체, 같은 운명의 길을 가야만 했기 때문에 그래요.

기름 부위를 독특하게 드러내면서 고체가 바로 기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는 예물과, 그리고 예물을 드린 자도 이 땅에서 예물화가 됨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히 있고, 그 어둠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빛으로 오셨지만 그 빛은 어두움 때문에 필히 죽어야 한다는 거예요. 약속대로 죽어야, 그래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창세기 4장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점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 형한테 맞아 죽었을 때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시나? 좀 살려주지. 하나님이 예배받으시는 자가 죽었다는 말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무슨 용기와 격려가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나의 예배 잘 받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교회 가기 싫은 생각이 팍 들죠.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하시느냔 말이죠. 왜 그렇게 죽이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 창세기 4장 25절처럼 죽지 아니하면 복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는 것처럼 죽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계속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그것과 같은 운명공동체가 안 돼요.

창세기의 아벨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등장합니다. 15-18절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기름을 부었어요. 기름 붓는 그것을 두고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름을 붓는 거예요.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과 그리고 다른 보이는 공간을 차별해서, ‘이 공간은 보이는 공간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데서 나타난 공간, 하나의 사건화 된 공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엄연히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타난 그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하나님의 집이다.’ 그래서 기름을 붓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공간이었지요.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것은 공간이 아닙니다. 인격체가 돼요. 기름 부은 인격체가 된다고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상을 해 본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교회에 오기는 왔는데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 때, 그래서 말씀도 잘 안 들어올 때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십니까? 어떤 생각으로 남은 생을 살게 될까요?”

보통 사람들은 “그야 그냥 그대로 살지요.” 하겠지요. 인간은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미 규정을 해놓았어요. 자기의 행함을 붙들고 살아요. 광주강의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행함을 붙들고 살아요. 예를 들어서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동대구역에서 본 장면이에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가요. 꼬마는 작고, 끌고 가는 캐리어는 소녀보다 더 커 보였어요. 그게 인생의 무게잖아요. 제가 강의 중에 “그 캐리어 안에 뭐가 들어 있겠습니까?” 했어요. 자기의 행함이 몽땅 거기에 들어 있어요. 오늘도 그 행함을 계속 만들어내요. 만들어내고 캐리어에 담고, 만들어내고 캐리어에 담고….

누가 뭐라고 하면 캐리어를 탁 열면서 ‘나 이렇게 잘 살았다.’라는 그것을 자랑질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가 아니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요. 무슨 열심? 자기 행함을 정당화하는, 의롭다고 여기는 그 일을 멈추지 않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되어 있어요.

행위는 반드시 뭐가 따르는가? 율법에 의해서 그 행위에 판정을 내리는데 그 판정내린 결과는 뭡니까? 지옥 불이에요, 지옥 불입니다. 가인 족속이 다 그래요.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내 행함에 근거할 뿐이에요. 내 행함에 근거해서 라멕처럼 뭐라고 하느냐? “내 소리를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무슨 말인데?” “내가 …게 행했거든!” 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백날 해봐야 뭐합니까? 어두움에서 와서 어두움의 세계에 영원히 정착하게 되는데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생명체, 인간이지요, 생명체의 생, 생애죠, “생명체의 생은 영원 위에 감겨있는 시공간의 펼침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감겨있는 것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펼쳐짐이다.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측정 대상이에요. 보이는 거예요. 인간은 보이는 세상에 영원히 감겨있는 신세입니다. 그 보이는 세상에서 자기가 노동해서 얻은 것을 가지고, 그 행함으로 뱀처럼 감겨있는데 영원히 감겨있는 그것 채로 어디 가느냐? 지옥 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왜? 행위 책에 기록한 것, 아카이브(Archive), 곧 네 행위 한 것을 주께서 다 기억하면서 알고 있으니까요.

“너 내 생각 안 했잖아. 나 없다고 생각했잖아. 너 내 말씀 버렸잖아.” 너의 모든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말씀을 버릴 때 나오는 행동. 사람이 말씀을 버릴 때 무슨 행동 할까요? 자기의 행함을 돌아보는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버리면, 말씀 안 보면 자기 행함에 집중합니다. 그게 자기의 유일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성도는 뭐냐? 아벨의 노선은 어떻게 되는가? 실상의 세계, 또는 실재의 세계와 보이는 환상의 세계가 접합부를 이루는 거예요. 그 영원의 접합부를 이루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로서 자기가 어떤 배역을 맡은 배우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의 역할을 맡은 거예요. 아벨 역할 따로 있고요, 노아 역할이 따로 있고요, 에녹 역할이 따로 있어요.

아벨을 똑같이 흉내 낼 필요가 없어요. 남들 보고 믿음이 좋으니 안 좋으니, 내 믿음이 어떠니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의 역할은 뭐냐? 실상의 세계가 나타나는 사건으로 인하여 그 공간이 우리가 아는 이 눈에 보이는 공간과 다른 특별한 새로운 공간이라 해서 거기에 기름을 발라버리는 역할이었습니다.

레위기 14장 15-18절에 “제사장은 또 그 한 록의 기름을 취하여 자기 좌편 손바닥에 따르고 우편 손가락으로 좌편 손의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으로 그것을 여호와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요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는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 위에 바를 것이며 오히려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바르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15.  And the priest shall take some of the log of oil, and pour it into the palm of his own left hand:

기름의 역할 더러운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하는 막이에요, 피막이에요.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아론을 제사장이 되게 할 때 아예 사람 몸에다 기름을 쳐버려요(출 30:30). 기름을 고체인 아론의 몸에 발라버립니다. 그리고 또 뭘 바르는가? 피를 발라버려요(출 29:20). 그러면 제사장은 무슨 역할이냐? ‘피 + 기름’으로 범벅이 된 채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가?

아벨의 죽음을 보이는 세계에 나타내는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야 기름 부은 자, 곧 제사장이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부터 나오는 이것은 같이 찾아보면 참 좋겠어요. 그냥 듣기만 해도 괜찮습니다. 11-13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때 예수님이 답변이 14절에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자, 지금까지 설명했지요. 제사장에게 특수한 기능이 있지요. 기름 부음의 기능입니다. 기름 부음이 뭐라고 했습니까? 실상과 허상의 그 접합부에 해당하는 존재, 그게 바로 제사장이지요. 그런데 14절에 보면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아직 제사장은 만나지도 않았어요. 만나러 가는데 가는 중에 문둥병자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은 겁니다. 레위기 14장에 의하면 제사장의 진찰에 의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에게 바르고 뿌리고 하면서 아예 기름으로 떡칠을 해요. 왜냐? 기름이 무엇의 경계인가 하면, 더러움, 곧 저주와 복의 그 접합부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다.’ 하는 뜻이거든요.

그 일을 하는 제사장에게 문둥병자들이 몸을 보이러 가는데 다 깨끗함을 받아버렸어요. 그럴 때 아홉 명은 신나게 갔어요. 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보이는 자기 몸이 저주받은 몸이라는 것이 짜증 나잖아요. 보이는 내 몸이 문둥병에 걸렸고 남들이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이것은 보이는 나에 대해서 측정이 가능하고, 보이는 나에 대해서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가 없었다는 그 말입니다. 자랑거리가 없다는 말은 내 존재가 정당하지 않은 거지요.

그런데 주의 말씀을 듣고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았으니 ‘나 복 받았다’ 하는 그것이 나의 자랑거리, 나의 잘남의 증거로서 확인이 되는 거예요. 이 보이는 세계에서 자기를 자랑할 수가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 멀쩡하게 된 마당에 두 번 다시 예수를 찾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홉 명은 제 갈 길 갔어요.

그런데 한 명은 가지 않고 돌아왔어요. “너는 왜 돌아오지?” 15-16절에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마리아인, 이방인이에요. 17-1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뻔히 아시면서도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요. 답변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너 지금 너 자신의 증인이 된 거야?’ 그게 아니고 진짜 제사장은 저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에게로 가라’ 한 그 음성, 들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던 그분, 마지막 때 모든 기름 부음의 결정체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 이방인이 알았다는 겁니다.

가짜 기름 부은 자 말고 제대로 기름 부은 자, 그분에게 이방인이 고침을 받았을 때 ‘나 아팠었는데 병 나았다.’ 다시는 이런 자기 잘난 증거 안 해요. ‘예수님이 나를 낫게 했다.’ 그 앞에서 자아는 죽어요. 자아는 죽고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가지요. 다시 말해서 ‘나와 네가 운명공동체라는 그 관계가 너를 구원한다.’라는 그 말이지요.

요한일서 2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한 분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언약을 완성했어요. 고체인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액체가 되었고, 기름 부음으로 인해서 하늘 아버지께로 가셨어요. 아버지께로 가고 난 뒤에 이제는 성령이 오셔서 그 기름 부음이 죽은 예수님을 복원시켜요. 왜? 기름 부은 자 안에서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야 하니까요. 그래야 이 보이지 않은 세계에서 증인으로 살아나니까요.

그 기름 부음이 있는 자는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어떤 법이라든지 어떤 어두움에 속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왜? 빛 안에 살기 때문에. 그래서 끝으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성도의 특징은 이 보이는 세계에서는 허공을 바라봅니다.

왜 허공을 바라보는가? 허공에서 눈이 내리기 때문에 그래요. 마가복음에 의하면 하늘이 찢어졌다(막 1:10)고 되어 있어요. 갇혀 있는 그 어두움에 유일하게 통로가 열리면서 하늘나라에서 날마다 성령과 주님의 음성과 지시가 내려오면 주님과 운명 공동체기 때문에, 믿음이기 때문에.

“오늘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증거해. 알겠지?” “예!” 그런데 이것은 각각 사람마다 다 달라요. 남 따라쟁이 할 필요 없어요.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먹는 것 입는 것을 전부 다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똑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우리가 식사기도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유치원 애들도 기도 잘해요.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께서 주셔서 먹습니다’ 하는 것, ‘내가 살아야 하겠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가지고 ‘교회’ 하나의 덩어리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죽으심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죽으신 분이 우리에게 기름 부음을 주시니 우리가 감히 예수님의 증인으로 새롭게 새사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세상 염려 걱정하지 말고 주님이 하나의 통로를 사수하고 그 통로만 소개하고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50428 주일오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주일 낮 설교에서 ‘실상’과 또는 ‘허상’ 그 대목부터 앞으로 히브리서 11장 내내 정리되어야 됩니다. 실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계속 안 보이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없죠.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라 해놓고 보이는 세계에 이게 나타나버려요.

‘실상: 보이지 않는 세계’ 이렇게 해놓으면 이 자체는 없어요. 안 보이는데 무슨 실상이 있어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세상, 성경에서는 보이는 세계죠, 이 보이는 세계에 실상으로 등장했을 때, 이것을 ‘나타난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나타난 것.

나타난 것이니까 나타난 것은 보이는 세계와 결합이 안돼요. 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표하기 때문에 나타나더라도 보이는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가 나타난 것으로 왔을 때… 보이는 세계, 또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보고 있는 세계’. 내가 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주일 낮에 설명한 것은 이것을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이라 했죠. 양자역학. 양자역학이 요새 모든 과학의 총화입니다. 모든 과학, 모든 학문의 마지막은 양자역학에 도달하게 되어 있어요.

양자역학의 큰 특징이 뭐냐 하면 ‘보면 사라지고 안 보면 나타난다’ 이게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학문의 끝자락, 인간 모든 학문의 끝자락입니다. 공부 꽤나 하는 사람들은 이 양자역학에서 짐 싸야 돼요, 이제는. 아, 이 세상은 내가 연구할 대상이 아니구나. 내 말을 안 듣는 세상이에요, 내 말을 안 듣는 세상.

이 양자역학에서 내놓은 결론이 있어요. ‘나도 양자의 일종이다.’ 양자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나도 입자의 일종이다. 그리고 파동의 일종이다.’ 입자와 파동을 합해서 ‘양자’라 이야기합니다. 입자와 파동에 대해서 이걸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정보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라는 이스라엘 학자가 <사피엔스>, <넥서스>라는 책을 지었잖아요. 최근에 한국에 와서 강연도 했는데요. 인간은 뭐냐? 정보다. 인간은 정보, 이것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실컷 공부하니까 어디로 가요? 양자역학, 물리학이 불교와 만나는 거예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은 있다, 뭐 이런 식의. 부처가 이야기한 것도 있지만 부처 말고 부처의 말을 그 뒤에 탐구한 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불교가 자체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측정하면 있는데 측정 안하면 없어지는 것. 그런데 더 나아가면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나 자신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나 자신이. 그래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 1918-1988)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김상욱 교수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버전 이야기했지만, 저는 10초 버전으로 이야기를 했죠. 양자역학은 뭐냐? ‘지가 자기한테 문학편지 보내놓고 좋다고 읽는 것.’ 그때 제가 설교에서 언급한 용어가 있는데 ‘무한한 투영’ 또는 ‘무한한 투영의 반복’.

이 양자역학이 발달해서 만들어진 게 휴대폰입니다. 휴대폰, 현재는 AI. 이게 양자역학에서 나왔어요. 양자역학이 아니면 전자의 흐름을 포착 못하기 때문에, 전자 흐름을 통제 못하면 휴대폰이라든지 AI, 인공지능이 안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휴대폰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맨날 쳐다보죠. 예배 시간에도 막 보고 이러죠. 본다고요.

보면 뭐가 나오냐? 무한한 투영. 누구의 투영? 나의 투영. 나를 닮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기껏 아무리 연구하고 해도 인간은 인간 속의 인간에서 그냥 자기들끼리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내 모습에서 내가 달아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 모습에서 달아날 수가 없어요.

내 속에 있는 다양한 면을 타인을 통해서 봅니다. 그게 유튜브에요. 내가 이 모습일까, 저 모습일까? 내가 저거하고 싶고 이거하고 싶고 이런 거요. 유튜브를 통해서 그걸 보여줍니다. 동영상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내 욕망이 되고 싶은 것들의 무한한 반복적 투영이에요. 나의 이미지에요. 여러 각도에서 본 내 자아의 모습이에요. 그게 지금 휴대폰 세계, AI 세계, 유튜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뭡니까? 정보의 흐름이다.

이것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돼요. 이런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된다고요. 왜냐하면 인간은 결국 서로서로를 보면서 서로서로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데, 낯선 게 있어요. 아주 낯선 것. 그 낯선 것을 보이는 세계의 일부로 생각하고 보면 그 낯선 것은 내가 보고 있던 나로서는 해석이 안돼요.

그게 뭐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증거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은 보이는 세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히브리서 11장 3절의 말씀이 앞으로 히브리서 내내 반복될 거예요(“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세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불쑥 나타나버린 거예요. 어제 그 첫 번째 예로 나타난 것이 아벨의 예물이었어요. 아벨의 예물. 예물로 말한다면 그 예물은 어디 있나?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죠. 몸통+기름을 따로 분리했어요. 의도적으로 기름을 부각하면서 따로 분리를 했다 이 말이죠(창 4:4).

몸통은 보이는 세계에서, ‘아, 저건 양이야’, ‘저건 염소야’, ‘아, 저건 인간이야’ 몸통은 누구든지 이해가 되죠. 그런데 보통 기름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몸통 안에 들어있어서 몸통의 일부로 생각하는데, 아벨은 제사드릴 때 몸통과 ‘이건 몸통의 일부가 아니야.’라는 것을 부각하는 것처럼 기름 부위를 따로 분리시키는 거예요.

자, 기름이 뭔데 따로 분리를 시키느냐? 히브리서 1장 9절, 기름은 나타난 것으로서 그 속에 보이는 세계, 이 허상, 가짜죠, 가짜 세계 말고 진짜 세계, 이보다 훨씬 격상된, 차원이 다른 진짜 세계의 흔적이 기름이라는 그러한 개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고속버스 탔는데 후딱 타다보니까 내가 탄 이 버스가 대전에서 서울까지 가는지, 아니면 대전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앞에 놓인 고속버스 택배 수하물을 보니까 ‘서울 도착’이라고 되어 있더란 말이죠. 아, 이 물건 가는 곳이 서울이라면 나는 이 버스 탔으니까 지금 서울로 간다.

기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 진짜 하나님께 갈지 안 갈지 어떻게 아느냐? 인간은 진짜 하나님께 가기를 원해요. ‘하나님이 계시면 저의 정성을 받아주세요.’ 가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은 가인의 예물을 안 받습니다. 왜 안 받는가? 도착이 하나님께 도착할 게 아니에요. 뭐가 빠졌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될 요소, 기름을 앞장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달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름은 뭐냐? 히브리서 1장 9절(“…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 보이는 것 말고 나타난 것 속에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했고 결국 자신에게 도달되는 그 요소를 예물에 섞어 넣은 겁니다. 섞어 넣었어요, 기름을.

그러니까 예물, 소나 양이나 그런 거죠, 염소 예물, 이 예물이 그냥 있을 때는 눈에 보이니까 고체가 되겠죠. 그런데 예물을 이렇게 고체로 드리면 안 받습니다. 잡아야 돼요. 죽음을 당해야 돼요. 예물이 죽임을 당하면 거기서 액체가 나오죠. 피가 나오죠. 피를 흘린 이 고체는 그럼 버리느냐? 아니에요. 기름 부분을 따로 떼 내요. 기름을 따로 떼 내면 이 기름은 제단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기체가 됩니다.

고체에서 시작해서 죽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바로 예수님 자신의 일대기에요(요 3:13-14). 육신으로 왔으나 나는 죽고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요? 들려야 되는 거예요. 나는 하늘로 들려야 되는 겁니다. 왜? 기름부음을 받았으니까.

나는 너희들하고 놀 군번이 아니니까. 이 가짜 세상에 살러 온 자가 아니고, 가짜를 가짜라고 폭로하는 기능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들려야 돼요. 들리고 가짜가 가짜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냥 ‘구경 잘했다’하고 가는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맞아죽어야 되죠. 죽임을 당해야 돼요.

이게 기름 부은 자의 가는 코스입니다. 이걸 ‘메시아(Messiah, 기름을 바른(또는 기름을 부은) 자’라 해요. 기름 부었다. 메시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름 부은 자의 코스,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 나타난 것으로 주셨다 할 때 여기서 가인은 보이는 세계의 대표자로서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는 결과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왜 내가 드린 예물은 안 받습니까?’ Question mark에요. ?, 물음표. 왜 내가 드린 예물은 안 받습니까? 가인은 몰랐어요. ‘아, 인간 것은 다 안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동생 것은 받았습니다. 자, 여기서 가인은 큰 충격 받습니다. 내 예물을 안 받은 것에 대해 충격 받은 게 아니고, 내 예물은 안 받는데 동생 예물은 받는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었다는 그 점 때문에 충격 받았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드린다고 다 받는 게 아니고 안 받는 하나님인데, 안 받으면 다 안 받아야 될 텐데 아벨이 드리는 제사는 받는 거예요. 아벨의 제사는 왜 받는지, 가인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악이 너를 지금 지배하고 있으니까 현재 네가 해야 될 일은 악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치지 못했어요. 악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시편 65편 3절을 제가 설교에서 분명히 언급했어요. 65편 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아, 이거……. 다시 말해서 실상의 세계에서 볼 때, 우리는 어두움 그 자체였다는 겁니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죄가 우리를 이기는데.

그럼 우리는, 아벨 되면 되잖아. 아니, 아벨 못 됩니다. 출발을 가인부터 출발해야 돼요. 가인과 우리의 공통점은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시편 65편 3절에 나오죠.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나쁜 짓한다고 죄가 아니거든요. 나쁜 짓 안하고 착하게 살면 네가 복 받는다,도 죄가 돼요. 네가 바르게 사는 그것도 죄에요. 심지어 어디까지 죄가 되느냐 하면 ‘네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라는 그 말, 그것도 마귀가 이야기한 죄가 되는 겁니다. 모든 종교, 기독교든 천주교든 어떤 종교든 그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를 안 받죠. 그러면 아벨의 제물은 왜 받느냐? 아벨의 예물 속에는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에 이게 죄가 아닌 거예요. 그럼 우리도 기름부음 있는 것으로 아벨처럼 드리면 되지 않느냐? 이게 드리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믿음’이거든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물과 예물 드리는 자가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에요. 예물이 가는 운명, 그 운명대로 예물 드리는 자 아벨이 따라가야 돼요.

지금 예물은 피 흘려 죽잖아요. 그럼 예물 드리는 자가 누굽니까? 아벨이죠. 아벨은 가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죽임을 당하면 예물 드려놓고 손해가 되지 않느냐 생각하겠죠. 주님께서는 아벨을 복원시켜요. 사실은 준비하기 전에 제목을 ‘아벨의 복원’으로 할까 이렇게까지 생각했어요. 아벨을 복원시킵니다.

아벨이 복원된다는 말은 아벨의 이름은 보이는 세계의 이름이기 때문에 날아가고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름으로 바뀌어져요. 그게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벨의 이름은 이제 육신의 이름은 그만두고 여호와 이름 안에 쑥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왜 들어가느냐? 예물 되시는 주님과 아벨이 믿음으로 같은 운명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실은 아담에게도 이게 있어요. 분명히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아내 이름이 뭐로 바뀌죠? ‘생명’이잖아요. 흙으로 돌아간다 해놓고 아내 이름은 생명이다. 죽이려면 다 죽이지, 어떻게 한쪽은 흙이고 한쪽은 생명이냐? 그 일은 네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거예요. 생명의 후손으로 오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이야기가 다시 한 번 기억이 쉽게 되려면 여러분들은 마동석 영화를 보셔야 돼요. <범죄도시3>인가 초반에 나오는데, 마동석이 신고 받고 드디어 갑니다. 가면서 “와! 깡패 봐라. 와! 깡패다!” 되게 반갑다는 표정을 합니다. 와! 깡패다.

제가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마동석 눈에 저 인간들은 내 평가와 내 판단, 내가 내린 신분 규정에 내가 자신감을 갖고 있다 했어요. 너는 뭐래도 내 눈엔 깡패야.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세상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와! 마귀 새끼들이다!” 되게 반가운 것처럼.

굉장히 반가운 거예요. 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다른 말로 하면, “와! 어두움이다!”, “와! 지옥이다!”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걸 약간 틀었죠. “와! 이단이다! 와! 여기 이단이다. 반갑다, 이단아. 그동안 이단하고 지옥 간다고 교회 나와서 수고 많습니다. 지옥 가려고 교회 나오고 지옥 가려고 성당 나오고 아이고, 반갑습니다.” 성당 다니고 지옥 간 사람 있죠, 얼마 전 죽은 교황 같은 경우.

딱 그 한 마디에요. ‘보이는 세계가 헛된 세계’입니다. 물리학자도 자기를 모르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누군지 모르고. 자기가 죄의 작품인 줄을 아무도 몰라요. 그걸 알려줄 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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