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옛 사람
2025년 5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8-9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경고성이 노아 이후에 연이어 세상에 출현합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이 멈출 기색이 없으십니다 기어이 세상을 멸망시키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집념이 언약의 이름으로 세상에 차례차례로 등장합니다. 노아 이후에 거론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노아 때는 방주였습니다. 방주 안에 내용이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속에서 계속 됩니다.
이 방주는 세상 사람의 어느 누구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라는 존재도 이 세상에 아무 쓸모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없어도 하늘나라에서 쓸모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이삭이나 야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혈통적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꽂아주신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 자신이 불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미 pass입니다. 곧 합격입니다.
하지만 이 부르심은 그 사람이 소지하고 다니라고 준 은사가 아닙니다. 도리어 관통하라고 주신 은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면서 점점 지옥불 속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은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를 같이 경험하는 중첩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러합니다. 시간이 쭉 흐르고 공간도 쪽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관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를 규명하는 방식입니다. 1914년 독일의 물리학자인 슈바르츠 쉴트는 큰 별 주변의 시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있게 연구했습니다.
태양처럼 무거운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공간도 늘어난다는 겁니다. 실제로 태양 표면의 시간은 지구보다 백만분지 2초 느리게 갑니다. 어떤 상식적인 이들을 말하기를, 태양 표면에서 시간이 그렇게 흐르지만 다른 곳에서 시간은 어디서나 동일하게 흐른다고 대꾸할 겁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누가 재지요? 인간이 시계를 가지고 말하지요. 각자의 어디에 있는지, 누가 그 시계를 보는지에 따라 다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이 붕괴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블랙홀입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더는 진행될 수 없는 검은 구멍, 빛조차 막대한 질량에 의해서 빨려 들어가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 물리학자는 전쟁이라든지 개인적인 기분이라든지 감정과 상관없는, 객관적인 중립적인 사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는 이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실보다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상대가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오늘 날씨가 좋지요?”라는 것도 빚쟁이에게는 모독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주관성이 무시되고 단절되고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부르심의 세계’입니다.
불랙홀에 어떤 비행기가 접근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금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비행기는 폭발하듯이 불타버릴 겁니다. 하지만 막상 그 시간과 공간의 지평선을 넘어선 그 비행기는 블랙홀 안에서 말짱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블랙홀 밖의 세계와 블랙홀 안의 세계 사이에 정보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인간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에 탕자가 다시 아버지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와 마주하고 대화한다면 어떤 대화가 오고 갈까요?
탕자: “아버지 제가 건방지게 감히 아버지 유산을 미리 챙기고 독립하겠다고 나섰지만 나쁜 친구를 만나고 기생과 놀아나서 많은 다 탕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여기에 대해서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아버지: “ 너는 내가 입힌 옷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네가 낀 가락지도 햇빛에 아름답게 반찍여서 참 보기좋다 야”
부르심의 세계에서는 중첩된 세계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세계, 즉 부르심을 받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 성경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등장인데요, 이 사람의 출현이 중요한 이유는 악마의 태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노골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성령이 없기에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수시로 자기 쪽에서 점검하게 됩니다. 초반의, 예수님의 예언은 가룟 유다의 기대에 부응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모든 희망이 실망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 기대한 만큼 주님에 대한 미움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도 자신도 죽기로 결심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신의 모습이 자기에게는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모습은 제자들의 내면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의 요인은 종교적인 실천과 행위로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차라리 삼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악마의 사주받고 여태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그 악마의 한 통속이 된 그 인간을 예수님의 피에 잠기도록 봉인하십니다. 그리고 준비된 새 사람으로 그 사람을 다루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요 8:10-11)
예수님께서 벌이신 모든 일은 옛 것과 새 것을 말씀에 끄집어내는 대비시킴으로서 이 일을 성사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본인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새 사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주의 이름을 걸고 만드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수시로 성령없던 경우를 보면서 십자가의 죄사함을 늘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7강-히브리서 11장 8-9절(봉인된 옛사람)25051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8-9절입니다.
히브리서 11:8-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노아 때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든 이유가 7절에 나옵니다. ‘경고하심’, 이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기 전에 먼저 경고를 날린 겁니다. 그 경고를 날린 결과가 방주였습니다. 방주는 홍수 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방주 안에는 다른 사람은 안 들어갔습니다. 쓸모가 없는 용도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사는 데는 아무 쓸모 짝이 없어요.
그런데 노아는 ‘방주가 쓸모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방주, 배도 아닌 것이 잠수함도 아닌 것이, 그런데 그 ‘방주 만들기에 적합한 새로운 환경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방주가 없는 세대에 대한 경고’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방주 만들라는 아이디어는 하나님께로서 왔고, 어떤 인간에게서도 그게 나오지 않습니다. 방주 만든다고 누가 노벨상 안 줬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거예요. 아무 쓸모 짝 없는 거니까요.
지금은 쓸모없는 거 맞아요. 항상 1순위가 아니에요. 나중 순위로 밀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주의 존재 자체가 바로 ‘경고하심’이거든요. 노아 때는 방주라는 물체가 경고하심이라면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에 와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자체가 방주 기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방주로 말미암아 방주 안 세계와 그 바깥 세계가 나누어지듯이 아브라함의 인격으로 말미암아 오늘 본문의 ‘외방’, 곧 아브라함은 이 세상 바깥쪽에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자식들이 살았던 것이 이동용 장막이에요. 오늘 본문 9절에 나오죠.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언제든 뜰 준비가 되어 있어요. 여차하면 뜹니다. 노아에게 방주 안에서 일어났던 기능이 이제는 아브라함의 일생 속에서, 생활 속에서 다 제공됩니다.
그러면 일단 누가 난처한가? 아브라함 본인이 굉장히 난처해졌습니다. 쉽게 말해서 사는 게 힘들게 됐어요. 외부에서 간섭하니까요. 방주야 그냥 둥둥 떠 있으면 되잖아요. 노아 때는 방주 만들라고 해놓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했어요.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한테는 하나님이 그 인생에 계속 개입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방주라는 물체가 나중에 메시아라는 인격체로 전환되는 중간 과정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징이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을 부르심’이에요.
아브라함은 벌써부터 불러냄을 당했어요. 이 세상이 멸망되기 전에 남들이 아무 일 없는 속에서도 불러냈단 말이죠. 아브라함 인생을 불러내니까 그 부르심을 취소할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이 개시됩니다. 이 ‘부르심’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허락했다는 거예요.
영어로 하면 PASS, ‘너 합격’이에요. “너 합격이다.” 신약 성경에 보면 이 합격 이야기를 여러 부분으로 해놨는데 그중 하나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바리새인에게 잡혀 왔습니다. 잡혀 와서 예수님께서 뭐 글을 쓰시고 해서 사람들이 돌 들고 죽이려고 했다가 다 돌아갔다는 이야기 아시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보고 이렇게 물어요.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난 뒤에 처음으로 여자와 1대1 대화가 됩니다. 요한복음 8장 10절에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때 11절에 이 간음한 여인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죄 안졌다는 말이 아니에요. “주여, 주께서 하셨잖아요. 나 간음한 거 맞는데 간음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 것은 바로 제 앞에 있는 주께서 하셨잖아요. 주님이 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부르심의 효과에요, 부르심의 효과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간음한 여자들 남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그 여자에게만 그렇게 했느냐?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언급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을 불러주셨던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효과가 이 죄뿐인 세상에서 정죄함이 없는 식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예요, 정죄함이 없는 식으로.
로마서 8장 1절, 그것이 뭐 예수님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이니까 로마서 1장이 해당이 되겠죠. 로마서 1장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쉽게 말해서 ‘여러분, 그동안 뭘 믿고 살아왔습니까?’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도대체 뭘 믿어요? ‘내가 노력했던 것 믿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하시고 있는 것을 믿고 사십니까?’를 묻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 안에 거기 왜 들어가느냐? 불러 줬으니까 들어가죠. 허락이 되니까, 패스가 되거든요. 너는 합격이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위치가 바뀐 겁니다. 위치가 바뀌었다고 할 때 불신자가 들으면 코웃음 칩니다.
‘내가 뭐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매일 같은 동네 사는데 무슨 위치가 바뀌느냐? 예수 바깥에 있다가 예수 안에 와서 무슨 정죄함이 없다는 대상이 되느냐? 불러주기는 뭘 불러줘? 나는 그대로인데 어떻게 불러줘? 불러 줬다는 증거가 예수 바깥에 있다가 예수 안에 들어온 건데, 예수 안에 들어왔다는 그걸 내가 느끼질 못하는데 뭘 예수 안에 들어왔어?’라고 반박할 거예요.
여기에서 위치는요, 공간의 위치가 아닙니다. 사건의 위치에요, 사건의 위치. 이 세상이 시간과 공간으로만 구성됐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시간과 공간의 연결에 의해서 생기는 일들뿐이에요.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먼저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생기는 것은 먼저 저런 일이 원인이 되어 생겼다, 모든 일이 원인-결과, 원인-결과가 시간에서 파악할 수 있고, 공간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이죠. 구름이 있으니까 비가 왔잖아요. 구름이 그쪽에 위치 해있고, 그 순간에 차가워지니까 비가 왔다, 이건 이해가 된단 말이죠.
그러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을 수 없고, 기존의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원인을 찾아서 이 세상에 벌어진 이것이 사건입니다. 그러니 허락이 있어 줘야 불러주는데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빴어요? 성실하지 않았어요? 정신이 뭐 못됐어요? 아니에요. 허락이 없어서 그래요. 누구 허락? 주님의 허락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복잡하지 않아요. 내가 개입하니까 복잡한 거예요. 주님께서 하신 성경 이야기만 들어오면 복잡하지 않아요. 모든 원인은 주님에서 출발 된 겁니다. 그런데 부르심이 없는 사람은 모든 출발을 내 쪽에서 하기에 일이 복잡해집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이 우리를 비난하는데 내가 한마디 할 게. 내가 사람 말 들을까, 하나님 말씀 들을까? 어느 말을 들을꼬? 너희들이 한번 답변해 봐라.’라고 응수했어요.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한 말 중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했다는 겁니다. 사람의 말이 소통되는 세계 따로 있어요. 서로 의견이 잘 맞죠. 서로 소통이 되니까. 인간이 전혀 소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납득이 되고 이해되는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를 내린 게 아니에요. 말씀의 세계에 주님이 불러줬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님이 지시한 일을 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생각하기를 ‘주께서 불러주시면 우리는 구원받지 않습니까? 구원받잖아요.’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자, 부르신 목적이 뭐냐? 제가 수십 년 전에 이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그전까지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불러준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오라고, 그 고난의 길을 따라오라고 불러주신 거예요.
어떤 인간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자진해서 “저 불러주세요.”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고생길을 왜 갑니까? 고생을 왜 해요? 욕 얻어먹는 일을 왜 합니까? 남들이 이해를 못 하는 일을 왜 해요, 그래! 베드로와 요한이 결국 순교하잖아요. 말씀의 세계에 속해서.
자기 안위? 자기의 생계? 생존? 그런 것은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주님 고난의 길을 따라갔는데 그것 때문에 부르심을 입었다는 그 말이죠. 그런데 부르심을 받지 못하고 허락받지 못하는 사람을 왜 흉내 냅니까? 왜 모방해요? 쭉 따라가서 뭐 할 건데요? 방향성이 그쪽이 아닌데요.
그러니까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지금 불구덩이 속에 가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열심히 착실하게 살면서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르심을 받는다는 자체가 구원이잖아, 왜 구원이 아니라고 하느냐?’ 제 말은 이거에요. ‘구원 안 받았다’가 아니라, 구원을 간직하라고 부르심을 준 게 아니고, ‘구원이 네 속을 관통하라’고 하나님께서 불러줬다는 거예요.
뚫고 지나가는 거예요, 뚫고! 아브라함이 구원받고 이 땅에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떠났습니다. 그래서 장막 생활한 거예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은 마치 무빙워크, 가만히 서 있어도 움직이는 기계처럼 하늘에서 부르심이 딱 오게 되고 그 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 위에 올라탔습니다.
그래서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막 빨려가요. 어디로? 불러준 곳으로. 내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줘서 나를 불러준 그 이름, 나는 나를 아브람이라고 불렀는데 그분은 나를 아브라함으로 불렀어요. 내가 부르는 방식을 좌절시키고, 그걸 뚫고 아브라함의 의미가 제공된 그곳으로 그들은 그냥 인생이 빨려가는 거예요.
아브람은 아브라함 됐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됐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은요? 여러분들은 이름이 뭐예요? 이 근호에요? 이근호는 분석해 봐야 땅의 이름이에요, 경주 이씨, 상서공파죠. 그러면 이름은 뭐냐? 주의 이름이에요. 주의 이름으로 불러주고, 주의 이름으로 끌려가는 거예요.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 이름을 갖다 일방적으로 쑤셔 넣어요. 자기 이름을 쑤셔 넣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자기 이름을 불러내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내면 내가 여기서 미국 간다 혹은 캐나다 간다는 식의 공간적 위치가 아니라, 주님에게 일어난 사건, 그 사건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동일한 사건이 우리 인생 속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 사건이 뭐냐? 중첩된 사건이에요. 오는 세계와 그리고 우리 있는 이 세계가 같이 중첩된 세계예요. 이 중첩된 세계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첩된 세계는 이런 거예요. 방금 마당에서 자기 아내하고 이야기했어요. “그래, 그래. 알았어요. 나는 방에 들어갈게.” 하고 문 열고 방에 들어가니까 자기 아내가 방 안에 앉아 있네요.
기겁할 일이죠. ‘방금 밖에서 나와 이야기했던 당신이 왜 지금 방에 앉아 있느냐?’ 이게 납득이 안 되죠. “당신이 왜 둘이야? 둘인 것뿐만이 아니고 왜 당신이 다른 공간에 동시에 있는 거야?” 모순이라는 것은 뭐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상황이 한 사람에게 중첩된 거거든요. 세상에 일어날 일과 이 세상에 일어난 적 없는 일이 한 사람에게 중첩된 거예요.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슈바르트 실트(Karl Schwarzschild, 1873~1916)라는 독일 과학자가 1차 대전 때 이런 연구를 했어요. ‘질량이 많이 나가는 크고 무거운 별 주변의 시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군에 가서까지도 연구를 계속했어요. ‘시공간이 어떻게 변하는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다.’ 상당히 중립적이죠, 중성적이고요. ‘오늘 날씨 참 좋아.’ 사람들 사이에 “오늘 날씨 어때요? 참 좋죠.” “예. 참 좋아요.” 이러면 둘 사이가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하니까 “그걸 왜 나한테 해, 기분 나쁘게?”
빚쟁이한테 그 이야기해 보세요. ‘빚 받으러 온 사람에게 오늘 날씨 좋다는 엉뚱한 이야기를 당신이 왜 하나? 그딴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이야기 치우고 내 돈이나 갚아.’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죠. 지금 이 물리학자는 인간들의 감정이 있는 너와 나의 세계를 벗어나서 인간들을 좁쌀로 보고, 인간을 둘러싼 이 객관적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한 겁니다.
태양처럼 질량이 무거운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공간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알게 되었어요. 태양에서는 얼마만큼 시간이 느려지는가? 백분의 2초만큼 느려져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를 ‘아, 그건 태양에서만 그렇고 다른 곳에서는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지.’ 이렇게 하거든요.
이 사람이 말하기를 “다른 곳에서는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하니까 “시계 보고 알잖아.” 그런데 시계라는 것은 자기가 위치한 공간에 따라 다 다르게 되어 있어요. 제가 서울 강의에서 이야기했죠. 발보다 머리가 먼저 늙는다고요. 지구하고 약간 멀기 때문에, 그리고 발은 가까워서요.
이게 과학적으로 규명이 된 겁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본인의 위치와 상관없이 세상을 절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연구가 점점 더 나아갑니다. 질량이 무겁다-질량이 무거우면 시간이 느려진다. 질량이 아주 무겁다. 그러면 시간이 더 느려지겠죠.
그러면 질량이 최고 무거운 곳은 어디냐? 바로 블랙홀입니다. 블랙홀이라는 것은 너무 질량이 무거워서 어떤 빛도 다 빨아들이는 곳인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블랙홀에 접근하다가…, 접근하는 게 위에서 보면 보이겠죠. ‘이야, 비행기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 계속 들어간다, 어? 곧 넘어가겠다.’
그 사건의 지평선, 공간과 시간의 지평선 넘어 시커먼 구멍속으로 들어갈 때 보는 사람에게는 비행기가 불에 타서 폭발해 버려요. ‘아이고, 죽었구나, 죽었어! 실험을 해도 대충 하지 그게 뭐라고 그 무서운 곳으로 들어가나.’ 그런데 블랙홀을 넘어선 그 비행기는 전혀 손상이 없이 멀쩡해요. 중첩된 겁니다. 이쪽 블랙홀 바깥에서 보는 비행기는 불타 없어졌고 실제로 블랙홀 구멍속으로 들어간 비행선은 거기에 멀쩡하게 아무 일 없이 있는 거예요.
여기서 무엇이 중요하냐? 이쪽 세계에서 아는 정보하고 블랙홀 안에 있는 그 정보가 서로 교환이 안 되는 거예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셨던 그 세계는 두꺼운 성경 가지고 아무리 해도 이쪽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점, 절대적인 관점인 내 관점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그쪽 세상이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여기서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못 알아듣습니다. 성령이 와야 알아들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구약 성경을 보고 또는 오늘날 신약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내 입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 기독교, 천주교, 오늘날 종교입니다. 내가 알아먹는 식으로, 내 관점에 유리한 식으로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해석되지 않습니다.
아까 사도행전 4장 19절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의 말 듣는 것과 하나님 말을 듣는 것이 어떻게 같으냐? 서로 다르지 아니하냐?’ 할 때 그걸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던 그 유대인 지도자 보고 이야기했다고요. 다시 말해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기를 “너희 부르심을 받았어?”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을 경유하고, 십자가를 경유하고 그래서 성령 받고 난 뒤에 지금 주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거야?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리 말, 우리 행동을 못 알아보는 거야.”라는 이야기에요.
제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아버지 그 이야기를 보고는 제가 약간 덧붙여서 각색을 한번 해봤어요. ‘아버지와 탕자 사이의 대화’라고 해서 이렇게 짧게 해 봤습니다. 먼저 탕자가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경솔하게 아버지 유산을 챙겨서 참 나쁜 짓을 했습니다. 나쁜 친구를 만나고 기생과 놀아나서 아버지의 귀한 유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쁜 인간입니다.”
탕자가 이렇게 하니까 아버지는 다른 소리를 해요. “내가 입힌 옷이 참 잘 어울리네? 와, 반짝반짝 빛나는 가락지를 봐라. 내가 끼워준 가락지가 이렇게 예쁠 수가! 내 이럴 줄 알았어.” 곧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주여, 없나이다.” 그 주의 세계가 ‘주 안’이에요. 주 안에 들어온 자는 이 땅에서 탕자가 되든, 기생하고 놀아나든, 돈을 탕진하든, 집구석을 말아먹든 당사자 아버지가, 아버지가 끼워준 가락지와 옷을 보고 잔치를 벌이면서 “넌 내 기쁨에 같이 참여하면 돼. 다른 생각하지 마. 아무 생각하지 마. 이 세계는 그런 세계야.”
그런데 이 인간의 말이 통하는 세계는 뭐냐? 율법 세계고 선악 세계에요. 그게 유대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 지도자와 누가 결탁돼 있는가? 아, 이거 무서운 이야기인데요.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뽑혔지만 제자들과 다른 특징이 뭐냐? 나중에 성령을 안 받았어요. 제자로 뽑혔지만 나중에 성령을 안 받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아무리 근접해서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어도 이렇고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것이 가룟 유다에요.
그리고 성령 받기 전에 여러분 잘 아시는 요한복음 6장 70절에 보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존재가 왜 중요하냐? 사탄이 인격적으로 노골화되어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에요. 그냥 두리뭉실한 사탄의 모든 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성깔이 그 가룟 유다의 모습으로써 노골적으로 압축되어 드러난 거예요.
그런데 이 가룟 유다가 악령 그러니까 성령 말고 악령, 영적 세계와 중첩되어 있는 인간이거든요. 인간과 악령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가룟 유다만 문제가 있다, 이게 아니라 열두 제자 안에 숨어있는 내면을 가룟 유다가 대변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가 모든 아담에 속한 인류를 대변 해줘요. 가룟 유다가 우리 속에 뭐가 있는지 모든 인간의 모든 의견을 대리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가룟 유다의 뜻은 이렇습니다. 자기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몰빵했습니다. 다 몰입했어요. 영끌했죠. 청춘을 거기다가 다 갖다 바쳤어요. 그렇게 바치면서 계속 자기 나름의 점검 또 점검해요. 철저함에 더 철저함, 과연 내가 이 사람을 언제까지 신뢰하고 믿을 수 있나, 이분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계속 점검해 나갔던 겁니다.
그렇게 점검을 해갔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말, 내가 죽는다는 것, 그리고 너희들은 다 흩어질 것이라는 그 미래의 말과 여러 가지 낌새를 볼 때 결론적으로 내 이상에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자기 본전을 어디서 찾습니까? 다 바쳤는데요.
자기는 예수님과 하나라고 봤어요. 열두 제자였으니까. 평소에 주님께서 ‘너희가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늘나라 열두 보좌에 자기 좌석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에 자기 자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큰소리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예수님이라는 그분의 망상일 수 있고, 헛소리거나 과대망상일 수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슬슬 확신이 들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를 믿었던 내가 미워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거죠. 어떻게 합니까? 그분을 죽이고 싶은 거예요. 누구처럼 시댁 식구도 죽이고, 남편도 죽이고 다 죽였어요, 자기도 죽고요. 그리고 가룟 유다는 전적으로 믿었던 그 자기 자신이 미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고,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과 자기가 하나였는데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고 나니까 자기가 결핍되어 있잖아요? 자기 전체의 한 뭉텅이가 떨어져 나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나를 죽이는 거죠. 그 꼴 보기 싫은 나, 만족스럽지 않은 나를 죽이는 거죠. 그게 배후의 사탄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됐다는 겁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가룟 유다는 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에요. 이 가룟 유다의 모습을 제가 이렇게 보편화시켜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어요. 침대에 누워 있는데 침대 밑에 악어가 한마리 있습니다. 우리가 침대에 누워 있는데 밑에 악어가 있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어가 침대 밑에 들어가 있는데 며칠 동안 침대 밑을 툭툭 치는 거예요. 내 침대 밑에 악어가 들어왔다는 생각은 못 하고 ‘내가 요새 잠자리가 안 좋은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악어가 침대를 뚫고 그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 악어가 뭐냐? 우리는 그동안 지표 위에서 안일하게 살았고, 우리 내면에 가룟 유다가, 악마가 악어처럼 잠복되어 있었던 거예요. 잠복되어 있으면서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이상하게 원인도 모르는데 불안을 조성한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악어가 있어요.
자, 여기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악어와 싸웁니다. 뭘 가지고 싸우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런 거예요. “악마야, 저리 가라! 넌 날 넘어지게 한다.” 이렇게 뭐 또 주님 흉내 내면서 싸웁니다. “주여” 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면서 내 쪽에서 어두운 기운이 없어지도록, 그래서 멀쩡한 내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거예요.
이거 가룟 유다가 안 해봤겠습니까? 이미 했던 거예요. 다 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내면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 내면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문둥병자가 있어요. 저와 여러분들이 문둥병자라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문둥병자인데 내가 문둥병에 걸릴 만큼 나쁜 짓을 했습니까? 남들은 멀쩡해요. 그런데 나는 문둥병자예요. 여러분들이 진실하게 한 번 나는 문둥병자라고 그렇게 감정 이입을 해보세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평생을 남한테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얻어먹고 사는,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죠. 몸은 계속 아프고요. 원인은 몰라요. 진짜 문제가 뭐냐? 원인을 모른다는 거예요. 내가 문둥병자가 된 원인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요. 원인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거예요. “훌륭하신 예수님, 병 고치는 예수님” 하면서 자기 병을 고쳐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낫게 할 때 조건이 있어요.
마태복음 8장 4절에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네가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했어요. ‘네가 문둥병에 걸린 것은 내가 그렇게 한 거다. 알아들어?’ 이런 뜻이에요. ‘내가 너를 문둥병자가 되게 했다. 왜? 문둥병자가 되게 함으로서 예수님이 바로 제사장이라는 것을, 완성된 제사장이라는 것을 결부시키기 위해서’에요.
넌 문둥병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이유를 몰랐던 것은 다른 게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르심을 허락하기 위해서 오늘날 최적합한 상태로 우리를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자, 그러면 악어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악어와 싸워도 소용이 없어요. 내면을 모르는 내가 그것과 싸운다? 죄도 모르면서 죄 있는 내가 어떻게 죄를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방법이 뭐예요? 악어한테 삼킴을 당하세요. 죄한테 삼킴을 당해버려요.
삼킴을 당하게 되면 그다음에 어떤 현상이 있느냐? 악마가 있고, 악마의, 아담의 죄로 태어난 이 자체가 주님께서 하신 일이잖아요. 주님께서 악마에게 이렇게 잡히게 해놓고, 그걸 가지고 옛것 또는 옛사람이라고 해요, 그걸 어디다 담그냐? 인삼주나 뱀주 있잖아요. 알콜에 담죠? 봉인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걸 피에다가 담습니다. 그래야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요.
델몬트 주스 병 있잖아요. 거기에 보리차를 넣어 냉장고에 두고 얼마나 먹었습니까. 그 악마하고 한통속인 나의 옛 몸을 피 안에 잠기게 해버려요. 그리고 주께서 그걸 보존해요. 주께서 그걸 보존해야 해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니까. 거기에 라벨을 딱 붙여요. 이것은 우리 옛 이름 ‘이근호’ 이런 식으로 각자 이름을 딱 붙여 버려요.
그래서 지금은 뭐냐? 새 이름,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잘 모를 때는 다시 지하실에 내려가서 봉인된 채 보존되고 있는, 표본이 되어 ‘나는, 악마와 한통속인 나는 십자가 피와 함께 이미 죽었다’라는 사실을 그 델몬트 빈 병 보면서 늘 다시 확인하고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 안’이에요. 예수님 피와 내 죄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내 죄는 영원히 보존됩니다. 그리고 악마도 그 안에서 영원히 보존돼요, 그 안에서, 나의 옛사람이.
제가 강의 시간에 두 번 칭찬했는데 그래 놓고는 ‘이 이야기 들으면 이분 교만해져서 아마 타락할 가능성이 많다.’ 싶어서 다시는 이 본문 가지고 자랑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 오늘 이 델몬트 뱀주, 아니면 인삼주 비슷하게 피에 같이 보존되어 있는 나의 옛사람 때문에 이 본문을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거 안 하면 내가 뭐 잘못하는 것 같아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자꾸 지하실에 가서 한 번씩 들여다보란 말이죠. 불안에 떨던 나, ‘내 인생 왜 문둥병자냐, 나는 왜 이따위로 태어났느냐, 남들처럼 부잣집에서 안 태어나고 왜 가난하게 태어났나, 나는 왜 키가 167밖에 안 되느냐, 난 왜 유전적으로 약해서 자꾸 잔병이 심하냐…?’
그냥 질문만 할 뿐이에요. 원인을 몰라요. 왜? 남보다 착하니까요. 남보다 못됐으면 ‘아, 남보다 못 돼먹어서, 나쁜 짓 많이 해서 벌받았어.’ 그게 아니라니까요. 도대체 원인 불명이에요. 원인을 알 수가 없어요. 왜 알 수가 없느냐? 주님이 그렇게 했거든요. 블랙홀 안에 있는 정보가 이쪽에 있는 나로 인하여 새사람과 옛사람이 중첩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받으면 이제 성령을 소지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제가 아까 미리 말씀드렸어요. 성령은 우리를 관통해요. 관통하면서 우리는 수시로 십자가를 잃어버려요. 아까 기도하신 내용처럼 우리는 수시로 십자가를 잃어버리잖아요. 잃어버릴 때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지하실에 가서 ‘네가 지금 설치는 그것이 이미 옛사람이 봉인된 거’예요. 바깥으로 못 나와요. 제가 이렇게 바깥에 못 나온다고 하니까 걱정이 또 늘어지는 거예요. ‘만약에 악마가 그 병을 깨고 내가 다시 옛사람처럼 나오면 그건 어떻게 합니까?’ 하는 걱정이 있죠.
로마서 8장에 그것까지 또 대비해서 성경 말씀이 주어졌어요. 이게 인간의 말의 세계가 아니라 말씀의 세계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이 권세자들에 악마도 포함돼요.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과거나 미래나 관계없이,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너를 정죄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나이다.” 여기에 앞에 붙여야지요. “주여, 없나이다.” ‘주께서 하셨잖아요, 주께서 하셨잖아요. 왜 자꾸 저한테 물으십니까? 주께서 정죄함이 없게 하셨는데.’ 자, 이 말씀을 줘도…, 제가 여러분을 잘 알거든요. 이 말씀을 줘도, 그래도, 그래도 못 믿겠다, 그래도 못 믿겠다는 것이 우리의 품성이거든요.
그래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로마서 8장에 또 있어요.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 말씀은 ‘제발 여기에 대해서 두 번 다시 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선물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성령이 왔다는 것은, 십자가의 그 피, 피를 너에게 보냈다는 거예요. 피를 보냈으니까, ‘나는 요? 내가 범죄 하면요? 내가 타락하면요?’ 이렇게 자꾸 나, 나 하지 말고 그 피가 아직도 네 안에 있는지 없는지만 검토하면 돼요. 피 있으면 그 피가 있는 현장에 악마와 한통속이 된 가룟 유다 같은 우리가 그 병에 봉인되어 있어요, 봉인되어 있다고요.
봉인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천국 가시면 면류관 빨리 벗어줘야 해요. 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지금껏 내 노력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쓸 면류관이 없어요. 면류관 쓴 것은 위치, 중첩된 위치,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씌워주신 모자거든요. 그 모자는 중첩되어 있기에 쓴 모자고 천국 가면 후딱 벗어줘야 하지요.
그러고 난 뒤에 여러분이 잘 아는 구절,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미리 정하신 자만 불러줍니다. 그래서 허락되지 않은 자는 성령이 오지도 않고 ‘주께서 부르심’이라는 것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안 받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해요. 그런데 그 인간은 어떠냐? 가룟유다거든요. 마귀의 사주를 받는, 지시를 받는 인간과 또 역시 마귀한테 지시받는 인간, 두 인간이 대선에 나왔다. 꼭 그 이름을 거론할 것은 아닙니다만 둘 다 악마에게 사주받는 인간이 이 나라 문제를 해결한다?
아닙니다. 나라 문제는 주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한 대로 갈 뿐이에요.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인간에게 마지막에 이 소리가 들려올 거예요. 생각 있으시면 적어도 괜찮습니다. “방금 당신 사망했습니다.” 방금 당신이 사망했다는 그 이야기가 뭐냐? ‘당신 기분에 깨춤 추던 당신의 인생, 당신의 연극은 끝났습니다.’
제가 깨춤이라는 용어를 최근에 한두 번 쓴 것 같아요. 서울의 어떤 집사님이 깨춤이 뭔지를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깨춤’을 찾아봤답니다. 나도 몰랐지요. 깨를 볶을 때 자기 맘대로 막 뛰잖아요. 중구난방 철판 위에서 막 뛰잖아요. 깨춤 춘다는 것은 인생 기분 따라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듣고 보니 내가 은혜가 되었어요. 나는 그런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쓰던 대로 따라 쓴 것인데 ‘아, 그런 뜻이었구나.’ 중구난방 아무 질서도 없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기분 좋으면 한턱내고 기분 나쁘면 삐졌다가, 그게 깨춤이에요. 당신의 사망과 동시에 그게 다 끝난다, 정도가 아니라 지난 모든 것이 다 무효라는 뜻이에요.
블랙홀 들어가기 전에 모든 정보, 그걸 ‘호킹 복사’라 하는데요. 비행기가 블랙홀에 들어가기 전에 불이 나잖아요. 불이 난 그것을 두고 ‘복사에너지’라 해요. 복사라는 말을 빼면 그냥 열에너지입니다. 터질 때 나오는 그것이 에너지화 되잖아요.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속에는 아무 정보가 없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를 안 해요. 지옥 가게 되면, 블랙홀이라는 천국에 가기 그 전에 인간들이 깨춤 출 때의 그 모든 생각과 정보가 그대로 하나님의 행위 책에 다 담겨 있습니다. 깨 열댓 말 볶아도 깨춤 몇 번 췄다는 그것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하셨는가? 아까 말한 대로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것을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13장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의도적으로 새것과 옛것을 대비시켰어요. 그러니까 자아가 몇 개냐? 두 개예요. 이걸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인정 안 합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주의 이름으로 다뤄지는 새것, 그리고 옛날 태어날 때 받은 내 이름으로 나만 생각하는 내 이름이 옛것이 돼요. 새것과 옛것의 이 말씀을 그냥 들으면 심판이요, 믿으면 구원이에요.
‘아, 그런 설(說)도 있네.’ 이렇게 그냥 들으면 심판이에요. ‘알았어. 내가 기억할게. 하지만 나는 깨춤 출 거야.’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한 것을 종합한 성경 구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특히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입었잖아요. 중첩된 거예요. 블랙홀 속에 들어오면서 바깥도 알고 블랙홀 속의 정보도 알고 둘 다를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머리 좋아서 아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안에 주의 이름,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주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브라함 속에 미리 들어가신 거예요. 아브람 속에 아브라함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야곱 속에 이스라엘이라는 주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여러분 속에 주님이 들어가 계신 거예요.
그래서 중첩된 거예요. 양쪽을 다 알아요. 골로새서의 본문을 제가 말씀드릴 것인데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뭐냐? 관통하는 것, 뚫고 지나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1장 12-17절까지 좀 길어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보이지 않는 거예요. 16절에 계속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고 했을 때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소소한 일도 여러분 탓하지 마세요.
그거 반칙입니다. 우리가 뭔데, 우리가 뭐길래 우리 탓을 하겠어요? 그거 주님께서 일으킨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이 말씀을, 중첩되어 있으니까 세상의 말로 옮겨보겠습니다. 옮길 때 두 노래의 가사를 가지고 옮겨보겠습니다. 첫 번째 노래는 유미리가 불렀던 <젊음의 노트>(1986)입니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그려야 할까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써야만 하나
………………………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채워야 하나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그려야 할까
내 젊음의 빈 노트엔
무엇을 써야만 하나
가사가 심오하지요? 항상 새로운 자기는 주님이 채우지 내 자아는 그저 델몬트 병 안에 들어가 있잖아요. 악마가 준 공포와 더불어 그 피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빈 노트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무엇을 채우기는요, 주님이 채우지요.
그런데 정반대되는 노래가 있어요. 이 노래 가사를 들으면 ‘아,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구나.’ 할 거예요.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이 노래 부른(1957) 가수가 불교 신자인 권혜경 씨거든요. 2008년에 돌아가셨어요. <산장의 여인>이라는 이 노래 가사에는 외부가 없어요. ‘내 인생 아무도 챙길 사람이 없고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챙긴다. 내 인생은 뚜벅뚜벅 꾸역꾸역 내 관리하에 내가 만들어간다.’ 그런데 <젊음의 노트>는 ‘주님이 내 인생을 만들어간다.’ 반대쪽은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내가 만들어간다.’
여러분 ‘빈 노트’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산장의 여인’이 되어서 거기서 남 탓하고 살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좋든 싫든, 우리가 그렇게 믿든 안 믿든 주께서 만드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가 불러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미 패스, 합격시켜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 좋으라고 합격시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다녀가면서 얼마나 많은 욕설과 비난과 모독과 핍박과 오해를 받았는지 그것이 생명의 길인 것을 우리의 새로운 몸 새로운 자아로서 체험하라고 주신 길로 알고, 도리어 주님께서 너무나 감사하고 이미 피흘림으로 정죄함이 없음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