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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 사유

아빠와 함께 2025. 4. 13. 16:35

징계 사유 

2025년 4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4-8

(36: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36:5) 예레미야가 바룩을 명하여 가로되 나는 감금을 당한지라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은즉
(36:6) 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36:7)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듯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크니라
(36:8)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무릇 선지자 예레미야의 자기에게 명한 대로 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니라

예레미야나 바룩이나 둘 다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말씀을 담았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굳이 아무 것도 아닌 미약한 존재를 채용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천지만물을 동원해서 처벌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사람에게 따로 특별히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늘 나라에 초대한 자기 백성 건지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하시면서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주시는 겁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경우도, 스스로 도저히 이 일을 감당 못하겠다고 사표내려는 것이 한 두 경우가 아닙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왜 예레미야가 이런 수모를 당하느냐하면 누가 봐도 예레미야는 그냥 인간이면서도 감히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굴복할 의사가 있지만 같은 인간에게 굴복하기는 죽어도 싫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이 인간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비난을 받는 사례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와 결심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감금 상태에 놓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 전하는 자가 감금 당했다고 해서 말씀마저 감금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통해서 두루마리 책을 쓰게 하여 금식일에 성전 문에서 발표 하도록한 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룩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말씀은 어떻게 전달되는 겁니까? 구약 못지 않는 딜레마에 놓이게 됩니다. 성도 개인의 딜레마가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가 난처한 입장에 놓입니다. 따라서 사회를 예전처럼 질서잡기 위해 당연히 말씀 전하는 자를 처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 전하는 자가 자신의 말하기를 철회하게 되면 신상에 해가 없을 게 아니겠습니까? 신약에서 자기 마음대로 철회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에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분명 사람이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점과, 또 한가지는 그 말씀이 그냥 지식으로 자기 머리에 담아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말씀이 그 사람 전부에 휘젖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통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본인도 본인을 말릴 수 없다면 주변 사람이나 공동체도 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지는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또한 이런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눈치코치도 없이 말씀을 전했더니만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사울 바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처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그곳 공동체에서 징계 당하는 징계 사유가 뭐지요?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적이 있는지를 검토해봐야 합니다. 오셨다면 그 하나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지요? 하늘로 올라갔다고요? 그렇다면 깜끔하게 마무리 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오셨지만 사람들이 죽여 없앴기에 더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활동 못하게 된 것이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로 가신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십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사도 바울이나 많은 성도들이 징계를 받게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23에 보면, 사도 바울이 징계당한 이유를 스스로 밝힙니다.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 즉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의 성격이 인간들을 라이벌로 여기시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즉 사람들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당시 사람들에게 고소당해 죽으신 것처럼 그런 대우 받을 징계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바로 이점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목숨 바칠 곳을 비로소 찾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남들에게 자신이 자랑거리를 말하는 것에 삶의 활력소를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산다는 것’은 타인에게 보여줄 자랑거리를 제작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6:33의 말씀처럼, 성도는 그 나라와 그 의를 이제는 오직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주님의 의가 못난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서 인간들의 자랑거리로 전환되지 않는 차별화된 해석을 말씀하십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라고 하십니다.

기도할 때는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아서 주셨지만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도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금식에 대해서는, 주님에 대한 고마움이 내부에서 치고 올라와서 금식하는 것과 자신의 신앙 과시를 위해 행하는 금식을 구분해주십니다. 따라서 이런 말씀이 내부에 작용하는 자는 사도 바울처럼 그 어느 시대든 징계 대상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주님 햇빛과 공기와 물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0강-예레미야 36장 4~11절(징계 사유)25041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6장 4~11절입니다. 구약성경 1111페이지입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의 구전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 예레미야가 바룩을 명하여 가로되 나는 감금을 당한지라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 수 없은즉, 너는 들어가서 나의 구전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유다 모든 성에서 온 자들의 귀에도 낭독하라,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듯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크니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무릇 선지자 예레미야의 자기에게 명한대로 하여 여호와의 집에서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루마리라 해서 가죽에 칭칭 감아놓은 것이 있어요. 그때는 종이가 없어서 가죽에다 감으니까, 2미터도 있고, 1미터도 있어요. 지금도 유대교에 보면 두루마리를 사용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렇게 그 말씀을 바룩이라는 비서가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오는 그것대로 다 적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전하고, 예레미야는 그것을 바룩에게 전하고, 바룩은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성전에 나가서 금식일에 그것을 전하고, 그렇게 몇 단계를 거칩니다. 거칠 때, 주의할 것은 예레미야는 현재 눈에 보입니다. ‘나는 너의 과거를 알아. 너는 그렇고 그런 인간이지’라고. 바룩도 알아요.

일가친척, 동창생들도 다 아는데, 이렇게 보이는 인간에게 전하게 하는 말씀은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전달되었다는 이것이, 인간에게는 건너갈 수 없는 딜레마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씀이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서가 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난 너희가 하나님 말씀의 비서가 되기 때문에, 그때는 두루마리라는 가죽에 적었지만, 지금은 말씀을 너희 마음이라는 책에다가 직접 하나님께서 말씀을 적게 해서, 이 적은 말씀을, 말씀이 들어온 본인이 통제를 못 합니다.

‘안 전해야지. 이건 빼고 해야지’라는 이게 안 됩니다. 그걸 가지고 안에서 역사한다는 말은, 힘 있게 작동한다는 말이에요. 우리 욕망이 우리 마음대로 못 하듯이, 욕망보다 더 센 하나님의 의지와 욕망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하는 사람에게는 말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동창회 가서 ‘나 구원받았다’라고 하면 분위기가 싸하죠.

동창이나 친구들 모임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나에게는 이런 자랑거리가 나의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라고 그것만 끄집어내요. ‘나에게는 이런 자랑거리가 있는데, 이 자랑거리 때문에 나는 지금 존재한다. 너는 어떤 자랑거리가 너를 존재하게 하지? 당신은?’ 이게 뭐냐 하면 내 자랑거리가 내 안에 역사한다고 하고 활동한다고 하죠. 기죽지 않아야 하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도 그래요. 하지만 바룩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바룩은 아직 구약시대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비서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역사하니까, 이걸 말릴 수가 없네요. 그러면 그 비슷한 예를 위해 신약으로 한번 가보면, 사도행전 23장 6절에 보면, 1절부터 나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징계위원회 열려서 징계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징계받지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도바울이 징계위원회 열려서 징계받아요. 공개적으로 심판받습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고 대중적으로. 사도바울 고소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무슨 감정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일반 사람들이에요. 사도행전 21장 30절을 먼저 보면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옛날에는 재판소가 어디냐? 성전 밖이었습니다. 그게 공회인데, 공동으로 광장에 여론이 수렴하는 장소. 그게 광장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을 징계해야 한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왜 징계받습니까? 주식내부자 거래해서 그렇습니까? 주식 거래해서 회사 징계위원회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거 평소에 사도바울이 징계받는 이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왜냐 하면 이게 말씀에 나오니까 그래요. 그 징계 사유에 대해서 사람들이 징계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왜, 일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차이가 나느냐. 그것 때문에 징계해요. 이질적이고 뭔가 아웃사이더(Outsider)같은, 뭔가 우리 공동체에 어울릴 수 없는 그런 소리를 하더라. 우리가 싫다는데, 왜 자꾸 이야기하는데? 이런 것 때문에 징계받는 거예요.

‘우리가 듣기 싫다잖아. 그만하라고 하잖아. 왜 자꾸 이야기하는데. 너의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라고 하니까, 22장에서 사도바울이 자기 고백을 합니다. 1절에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내가 변호하는 말 한번 들어봐라. 들어보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해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4절에서부터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열심을 냈는데, 그렇게 열심을 내는 이유가 그 예수라는 분이 전하는 도가 하나님의 교훈과 어긋나기 때문에, 내가 참지 못해서, 당신들보다 더 내가 격분해서 그 사람들을 결박하여 옥에 넘겼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어, 내가 땅에 엎드리니까, 그분이 직접 나에게 이야기하더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7절)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나를 고발하고 징계하는 그 부분을 내가 충분히 납득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니 당신들보다 내가 더 분노했을 거라는 거죠. 사회 공동체 질서를 어지럽힌 자, 그런 자를 내가 나서서 그런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니까.

그런데 내가 당신들이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23장에 보면, 최종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6절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자기의 이처럼 심문받는 이유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전하매, 심문을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지금 살아계신다는 그 이야기를 해서 당신들에게 징계를 받는다고 이야기해요.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징계받습니까?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하나님이 사람 사는 세상에 오셨습니까? 오셨죠.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습니까? 오셨으면 눈에 보여야 하는데, 지금 오셔서 뭘 하고 있어요? 왜 조용해요? ‘하늘로 가셨답니다’ 그러면 끝났네요. 끝났으면 아무 일도 없었네요. 본격적으로 신약성경이 쓰인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활동을 다 마무리하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본격적으로 이 땅에 활동을 계시한 겁니다.

그걸 아까 말한 대로, 말씀의 계시를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서 작동하고, 우리 마음을 장악해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아까 말한 논리에 의하면, 그렇게 말씀을 전했던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 가는 곳마다, 징계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앞뒤 논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논리가.

‘주님이 어디 계신 가. 보고 싶다. 내가 보여주면 믿을게’라는 말 많이 듣던 이야기죠. 여러분, 철 가루 밑에서 손을 흔들거리며 움직이면, 사람들은 손은 보이지 않지만, 손 모양을 한 윤곽이 드러나죠. 철 가루 속에서. 그러니까 이 세상은 이미 오신 하나님을 제거했잖아요. 제거했다는 말은 없앴다는 말이죠.

없애면, 두 번 다시 하나님은 인간세계에서 설치거나 인간세계에 나타날 일이 없다고 인간은 그렇게 정리했어요. 그게 철 가루라면, 철 가루 속에서 누군가 들어가고 나오고, 들어가고 나온다면, 이건 굉장히 특이한 사항이기 때문에, 철 가루 속을 한 번 후벼봐야 해요. 그 안에서 무엇이 그렇게 작동하고 무슨 힘으로 그들이 움직이는지를 한 번 생각은 해봐야 한단 말이죠.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인간이 사는 이유는 서로가 모여서 사는 이유는 자랑거리를 내놓기 위해서. 그러면 인간이 타인들에게 자랑거리를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다면, 나는 어떻게 사는가. 자랑거리를 만드는 삶을 살지요. 나라에서 법을 하나 만드는데, 뭐냐 하면, 일곱 살 고시를 폐지한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일곱 살 때부터 고시 시험 쳐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는 고시 시험을 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도 사람들이 돈을 들고 와서 넣어달라는 비율이 많아서 그래요. 시험에 합격해야 영어유치원에 들어가요. 유치원에 들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사립학교 나오고, 사립학교 나오면, 그다음 사립 중학교, 사립 고등학교, 그리고 의대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법으로 막는다는 말은, 그만큼 인간들의 방향성, 삶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우리 집안의 자랑거리를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방해하면 모조리 없앤다. 이 정신이 바로 인간이 담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데살로니가전서는 특이함이 나타났죠.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이미 내 속에는 내가 자랑거리 만드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주님이 살아계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은 ‘말씀 듣고 기쁩니다’가 아니라, 본인도 이 세상에서 징계 대상에 포함되어도 좋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뭐냐. 성도는 자기 목숨 바칠 곳을 비로소 찾은 사람이에요. 내 목숨을 바칠 곳을 찾아버리면, 진리와 바꾸게 되면, 뭐도 날아가게 되느냐면, 내 자랑하는 그런 시도도 같이 복음 안에서 소멸한 겁니다. 복음이 내 자랑을 대신한 겁니다. 그걸 가지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활동을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또는 바룩에게 그런 일이 있지만, 구약성경 앞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활동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천사들에 의해서 분명히 나타났어요. 천사들의 활동 특징이 뭐냐. 천사들의 활동은 개인행동이 없어요. 개인의 가치라는 것이 천사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천사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애굽 땅에 가서 맏이는 다 죽여라”라고 지시를 내렸다면, 천사가 밤에 애굽 땅에 찾아가서, ‘이 집은 죽여야 해. 내가 보니까 장남이 못 됐어. 죽여야 해’ 그런데 그다음 집에 가니까, ‘어, 이 집 장남은 착해. 효자야. 마음씨가 너무 고와요. 죽이기 아까운데. 이 사람은 살려놓으면 남에게, 이웃에게 큰 사랑을 베풀 텐데’라고 하면서 천사가 살려줍니까.

천사가 그런 거 없어요. 인정사정 같은 것이 없어요. 아주 냉혹하고 냉정합니다. 그 문설주에, 문지방에 피가 없으면, 그냥 시킨 대로 죽여요. 아주 냉정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걸 줄여서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헌금, 전도, 이런 것이 주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은 목숨을 바쳐서 기꺼이 즐겁게 하나님의 일과 내 일을 바꿔치기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본인이 의도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주의 말씀이 와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에스겔 1장 9절에 보면 방금 이야기한 내용이 나옵니다.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일제히. 하나님의 보좌가 천사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데, 천사들은 개인행동이 없습니다.

주님의 지시가 딱 떨어지면 일제히 쫙 나가요. 주민센터에도 보면 그런 게 있거든요. 라인댄스라고. 여러분, 라인댄스라고 보신 적이 있으세요? 라인댄스로 유명한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by Ray Charles)’라는 팝송이거든요. 우선 노래를 틀어놓고, 앞에 리더가 키가 크고 날씬해야 해요. 그 춤에 특징이 뭐냐 하면, 앞에서 추게 되면 뒤에 있는 눈에 잘 안 띄는 사람들은 앞에 있는 사람 따라가요.

‘I can't stop loving you~~’라고 노래 나올 때, 옆쪽으로 동작을 하며 한번 쓸고 나면, 그다음 뒤에 있는 사람이 쓸어요. 그다음에 옆에 쓸고, 반대 옆쪽으로 쓸고, 뒤로 가서 한번 찍고, 다리 바꿔서(이게 춤의 묘미예요) 방향 틀고 앞으로 나오면, 뒤에 유니폼도 안 입은 뚱뚱한 사람들 있잖아요. 살 빼려고 들어온 라인댄스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똑같이 따라 해요.

뚱뚱하든, 젊든 간에, 라인댄스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행동을 안 하고 집단행동을 그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곳은 미국이든, 이라크든, 이스라엘이든 관계없어요. 모든 성도의 행동은 그 공동체 내에서 동일한 말만 해요.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라고. 나도 살아있고 예수님도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아있음이 나의 살아 있음을 대신 해버렸다.

‘나는 내 안에서 죽었는데,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산다’라고 되는 거예요. 이것을 마태복음 5장에서는 주님이 이렇게 알기 쉽게 이야기해요. 내가 너희를 살리는 것은 하늘의 햇빛과 비를 내려서 살렸다는 거예요. 6장에 보면 참새도 내가 키우고 너희들이 무시하는 들풀도 내가 키운다.

그러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거, 의성에 산불 났을 때, 비 좀 오니까 깨끗하잖아요. 하늘에 비 내리고, 물 주고(인간은 물 없이는 못 사니까), 농사지으면 농사 잘되게 하시고, 건강하게 해서 일하도록 하고 돈 벌게 하시고, 이 모든 은혜가 그 나라 ‘의’에서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살리게 하신 그분이 지금 이 땅에 오셨다가 죽었지만 살아있다는 그 관계,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게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내용입니까? ‘나는 주님 때문에 삽니다’라는 것이 감사와 기쁨으로 이어지지 않을 이유가 있어요?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나는 진작에 죽었습니다. 주님, 늘 고맙습니다’라는 이런 고백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그 나라와 그 ‘의’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하나님이 저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주님의 나라와 의로 인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어느 모임에서라도, 분위기 싸하더라도,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집단에서 징계받겠지요. ‘당신 나오지 마! 앞으로 나오지 마! 나오면 내가 당신 죽일 거야!’

마태복음 6장 내용 전체가 그 내용인데, 오늘날 말씀이 신약에 있는 우리에게 적용될 때, 주님께서 친절하게도 이 6장을 통해서 그것을 언급했어요. 1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오늘 설교한 거 압축하면 딱 이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라이벌로 여기라는 이겁니다. 너를 망하게 하는 라이벌로 인간을 꼽은 거예요.

살리는 것은 내가(하나님) 살리는데, 너희 인간이 살리는 것이 아니잖아. 너희 일가친척이 살리는 것이 아니고 너희 남편 아내가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 자식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자식이 무슨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햇빛을 줍니까? 안 그렇습니까? 교회가 어디가 썩었고, 지금 남의 교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 놓고 하시는 말씀이 라이벌로 해놓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성경해석의 잘못된 예를 쭉 제시하는데, 딱 3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 그리고 금식하는 거, 이 세 가지를 들어서, 인간들은 이렇게 해석했다는 겁니다. 왜? ‘나 지금 구제한다! 나 지금 기도한다! 나 지금 금식한다!’라고 티 내려고 하는 것이, 이것은 또 하나의 종교공동체에서 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티 내려는 자신의 사적인, 개인적인 자랑 가지고 그 자랑이 집단에서 권력으로 행사해요. ‘내가 너보다 낫지? 그러니까 내 말 들어’

그래서 구제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라”라는 겁니다. 기도할 때 ‘주여, 주여~’라고 보란 듯이 하는데, 그 기도는 그렇게 기도하지 마라. 이방인들처럼 달라고 기도하지 마. 네가 달라고 하기 전에, 내가 이미 너에게 적절하게 꼭 필요한 것은 다 주었어. 준 것에 대해 감사기도나 해라. “주여, 감사합니다”

금식할 때, 불편한 기색을 하면서, 금식의 폼을 내면서, 찡그리면서, 그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금식하지 마. 요즘 금식 많이 하잖아요. 이재명도 하고. 그런데 그런 너의 금식이 타인에게 티 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금식이 왜 이리 기쁘지’라고 이건 자진해서, 주님이 너무 좋아서, 밥맛이 안 날 정도로 금식하는 거요. 여러분도 늘 하잖아요. 아침과 점심 사이에 늘 금식하잖아요. 가끔 간식 먹겠지만.

그리고 19절에 보면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그다음은 제가 말씀드린 33절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는데, 그것은 네가 사는 것이 너의 소관이 아니라, 나의 소관이야. 바로 이런 말씀이 우리 안에 작동하고, 능력으로 작용할 때, 여러분은 이 세상에 징계 대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할 때, 그는 이미 체포된 상태이고, 감금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예레미야 선지자를 감금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감금했고,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을 싫어하고 있는 요소가 우리 안에 엄연히 들어있다는 것을 비로소 까발려지는 그런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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