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말씀의 죽음

아빠와 함께 2025. 4. 20. 19:14

말씀의 죽음 

2025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6:20-26

(36:20)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로 왕의 귀에 고하니
(36:21)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36:22)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36:23)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36:24)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36:25)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36:26)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말씀을 무시하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대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온갖 분노와 비난을 자진해서 불러일으키는 일이 됩니다. 예레미야나 바룩이 여호야김 왕에게 말씀을 전하고 들리게 한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위험한 일이 됩니다.

마치 다니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야 하는 법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평소에 왕이 세상을 어떠한 자세나 태도를 갖고 있느냐를 뻔히 알면서도 바룩은 구애받지 않고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습은 왕이 품고 있는 본심을 밖으로 터트리는 계기가 됩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느냐를 유감없이 반영해주게 됩니다. 사람은 자체적으로 판단력과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평생토록 자신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판단력으로 무사히 살아가고 있고 자신에 대한 신뢰성에 충성을 보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성경을 끌어당겨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경에 대한 실효성과 유혀성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판정내린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됩니다. 즉 말씀은 듣고 보되 말씀 자체의 활동이나 작용력에 대해서 전혀 믿을 의도가 없는 겁니다. 참고는 할 수는 있지만, 전적으로 성경에다 목숨을 마음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존중해주겠지만 성경 내용을 평생 살아온 자기 인생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마음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결집되어 여호야김은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 앞에서 반응이 극히 정상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왕 뿐만 아닙니다. 신하들까지 말씀을 비웃고 말씀 제거에 찬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말씀 없이 잘 살아온 데서 오는 자신감 아닐까요? 쉽게 말하면, “나는 그동안 말씀없이도 잘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것은 말씀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한 겁니다.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겁니다. 즉 “나는 그동안 말씀을 사랑했지만 어태껏 살아있다. 정말 이상하다”라고 이 상황을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말씀은 말씀 쪽에 선 자들은 말씀과 더불어 죽이는 일을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결과는 조기 죽음이었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6-17)

예수님의 말씀 해석은 그 안에 구원자의 죽음이 들어 있어 거기서 나오는 해석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그들이 잘 살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면해 줄줄 알았던 겁니다. 서러움없이, 오해없이 잘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 설 때, 예수님의 육신과 활동 그 자체가 말씀이요 해석이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잘 해석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면 심판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모세 율법은 바로 자신이 잘 살고 행복할 조건을 전제로 말씀 해석하는 자들을 도리어 심판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요 5:45)

‘살겠다’는 인간의 본심이고 본능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경을 모독하는 것은 일관성있는 그들의 본질입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2:24-34에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즉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고 부활의 능력도 들어 있는데 인간들은 이것을 빼고 해석한 겁니다. 왜 이 요소를 빼버린 걸까요? 그것은 다들 살아 생전에 살았던 그 방식을 자신의 행복조건으로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기 싫은 것은 기존의 것 안에서 못벗어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새로움’입니다. 자신이 상상도 못한 새로움입니다. 말씀 안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너는 벌써 죽었기에 너는 네가 죽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로 부활되었다”는 겁니다. 곧 성도는 죽음의 대기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 곧 대인관계로 형성된 삶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살려냄을 당한 방식의 세계로 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즉 사랑이란 부활의 능력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사랑은 죽음마저 이깁니다. 성도가 사랑을 갖고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성도를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편지, 곧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이 사랑의 편지는 그저 문자 해석으로 고갈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지로 보낸 편지처럼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이 새로움’이 솟아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 땅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고후 5: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죽은 적이 있는 사랑의 편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51강-예레미야 36장 20~26절(말씀의 죽음)25042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6장 20~26절입니다. 구약성경 1111페이지입니다.

“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로 왕의 귀에 고하니,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왕과 그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하여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성경책을 작을 칼로 찢어서 화롯불에 던졌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왕과 신하들이 옷을 찢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걸 왜 두려워해야 하죠. 옷을 왜 찢어야 하죠? 잔소리인데, 그 잔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인간이 들을 말이냐, 아니냐는 본인이 판정하잖아요.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왜냐면 내가 최종 판정관이니까요.

어느 것이 의미 있다, 이것은 진리다 아니다를 내가 판정하는 거예요. 꼭 성경 말씀을 한다고 해서, 꼭 다 믿어야 해요? 그걸 다 채택해야 합니까?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이 없어지잖아요. 내 고유의 내 인생이 없어지잖아요. 내 인생이 없는데, 내가 왜 살아야 하죠?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가면서, 내가 살아야, 사는 것을 버티는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오히려 감히 말씀 듣고 옷을 찢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이 ‘감히’라는 성경에서의 말을 사람들은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감히 네가 뭔데 나에게 잔소리를 해?’라고 ‘감히’라는 말을 성경 쪽에 퍼부어서, 내가 원치 않는데 나에게 잔소리하는 최후의 모습은 ‘이 꼴 난다’라고 화롯불에 작은 칼로 찢어서 넣으면서 ‘잘 봤지? 누구든지 나 건들면 이 꼴 나는 거야’라고 분명히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서 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게 이상한 일입니까? 이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일까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말씀 듣고 두려워하거나 옷을 찢지 않느냐’라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도리어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우리가 자기 자신도 모르지만, 이 세상 자체도 모릅니다. 그냥 대충 남들 따라 살면 되는데, 언제 이 세상에 실제 모습과 본질이 드러나느냐 하면, 복음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그 현장에서 그동안 꼬깃꼬깃 숨겨놓은 자기의 본모습이 거침없이 튀어나와 버리죠.

그러면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뭐냐. 말씀에 담긴 내용은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죽는다” ‘말씀은 이 세상에서 죽는다. 짓밟힌다. 무시당한다. 핍박받는다. 제발 꺼져다오. 이제 내 앞에서 없이 해다오. 없게 해다오’ 이런 대상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유대인들은 말씀을 열심히 했는데요’라고 이렇게 반박할 거예요.

유대인들은 왜곡했지요. 율법을 왜곡한 거예요. 자기의 잘남과 의로움에 필요하다 싶어서 그들은 말씀을 열심히 실천에 옮긴다고 그렇게 용을 쓰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해석한 것과 그들이 스스로 율법을 해석할 때,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너희 아비는 악마이고, 너희는 죄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갇혀있다”라고 그렇게 요한복음 8장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서 우리는 죄에 갇힌 적이 없다. 지금도 말씀과 더불어 산다고 외쳤습니다. 그럴 때, 이런 게 어려운 건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당신이 우리를 지적하는 근거를 대라’라고 한 거예요. 우리를 그렇게 함부로, 성경해석, 율법 해석을 잘못했다고 예수 당신 쪽에서 이야기하는데, 그 근거를 대봐라.

당신은 어느 근거에서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그런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느냐.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굉장히 도발적입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거든” 이게 근거입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내가 일하는 것은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이거든. 그런데, 너희들은 모세를 통해서 아버지를 안다는데, 그 모세를 통해서 아버지가 너희를 심판할 거야.

여러분은 도대체, 대화가 성립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화가?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돼요. 지킬 것을 잘 지키고, 넘어서지 않아야 할 선을 안 넘으니까. 그런데 예수님 쪽의 말씀은 예수님 쪽에서 말씀하잖아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나는 말씀인데, 너희들 동네에 와서 나(말씀)은 죽었다. 너희들이 나(말씀)을 죽였다. 죽었으니까 죽음부터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내 볼게”라는 이게 성경해석이고 율법 해석이에요.

“말씀의 주인공을 너희가 죽였다. 그래, 나는 죽임을 당했어. 자, 죽임을 당한 자가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들어볼래?”라고 말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의 죽음을 말하지 못하는 자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은 말씀에 의해서 진정 나처럼 죽어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말씀이 나 대신 새로운 목숨이 되고, 나는 그 말씀에 대해서 죽어버렸다는 그런 과거완료가 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10장 16절에 보면,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뒤에 17절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라고 되어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라는 거예요. 그냥 목숨을 안 버리고 너희를 구할 수 있는 어떠한 토대가, 현재 나에게는 없다. 나는 양을 구할 수 있는 그런 근거가 없다. 다만 근거가 있다면 내가 죽어야 그 죽음이 양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토대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사실을 구원받는 양은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이게 이상한 일이에요. “예수님은 안 죽으면 나를 구원 못 해요.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해요. 왜? 내 죄는 주님의 죽음 외에는 사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이 고백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냐?’라고 역정을 낼 겁니다. 당연히 여정을 내죠. 그러면 그런 고백을 하는 자가 무슨 대기(待機)냐 하면, 죽음 대기조에 포함되어 있어요.

왜 이 세상에서 복음과 말씀을 끄집어내냐.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왜 하냐. 죽으려고 환장했지. 그 이야기를 눈치코치도 없이 왜 내놨냐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이 나와요. 사랑이 뭐냐. 고린도전서뿐만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초반에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초반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편지’라는 말을 해요. 편지.

많은 대목에서 이 편지라는 말이 초반에 들어갑니다. 요한2서, 요한 3서도 그렇고, 요한계시록도, 고린도전서 16장 3절, 디모데전서 1장 1절, 빌립보서 1장 1절, 골로새서 1장 1절, 에베소서 1장 1절, 여기에서 ‘편지’라는 말을 해요. 그리고 골로새서 4장 16절에서는 내가 쓴 편지를 너만 읽지 말고 돌아가면서 읽으라고 합니다.(“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왜 편지라고 하면서 돌아가면서 읽으라고 하느냐. 그건 그 편지 속에 말씀이 죽은 예수님이 살아있어서 활동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 예수님이 눈에 안 보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바울에게 사도, 또는 베드로에게 사도라 하고 그들에게 뭘 남기는가. 편지를 남긴 거예요.

지금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고,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바룩은 하나님의 말씀을 글, 편지죠, 편지 형식으로 줬는데, 여호야김이라는 왕, 곧 죽어요. 그리고 다음 왕인 시드기야도 곧 망하고 그러는데,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에게서 온 편지를 칼로 도려내서 다 불살라버립니다. 감히 내 앞에서, 내가 왕인데, 왕 앞에서 지적한다는 것은 왕의 권세가 용서치 않는다는 태도로 보란 듯이, 아직도 내가 권세 있고 힘이 있다는 식으로 성경을 불에 없앴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이 편지를, 하나님의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본인 나름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권세가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힘으로 내가 스스로 살겠다’라고 버티는 거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마음을 찢어야 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해’라고 이렇게 자꾸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왜냐 하면 그럴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무시의 대상이지 윽박지를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당시도 그렇지만 예수님을 동정할 사람이 거의 없어요. 당연히 말씀에 대해서는 ‘왜 두려워해야 하지? 왜 그걸 가지고 옷을 찢어야 하지? 우리가 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그런 건 아니잖아’라고 당연히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에서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도대체 인간들은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대해서 아주 대담하게, 담대하게, 자신만만하게, 겁 없이, 성경을 물리칠 수 있는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게 되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대듭니다. 얼마 전에도 언급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 붙들고 가르치는 거예요. ‘예수 당신, 잘 들어봐. 만약에 부활이 있다고 치자. 그런 건 없는데 있다고 치자. 만약 어떤 여자가 시동생 7명, 남편 합해서 7명과 혼인했다고 치자. 했는데, 여자도 죽고 남자도 죽고, 다 같이 부활의 날에 들어갔다고 치자’

전부다 ‘치자. 그렇다고 치자’예요. 안 믿으니까. 당신 논리에 의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때 여자 입장에서, 물론 억지로 혼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랑하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남편이 7명이란 말이죠.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부활해서 살림 차릴 때, 그 일곱 명 중에서 누구와 살림 차리겠는가.

그러면 정답은 그 일곱 명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 사랑했던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부활의 세계에서 부부로서 살 것이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시비겁니다. 그러면 나머지 6명은 뭣이냐. 둘이 동시에 살 수는 없고 셋이 동시에 살 수 없으니,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머지 여섯은 남편이냐~~~~ 아니냐? 1번, 남편이다! 2번, 남편 아니다! 똑바로 이야기해!

이렇게 예수님께 윽박지릅니다. 말씀을 거부하는 자의 사고방식은 세상 쪽에서 본인이 알고 있고 습득한 지식의 확장이에요. 지식의 확장을, 그대로 자기 아는 지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없고, 사람은 결혼해야 행복하다면, 천국 가도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유지시켜줍니다. ‘뭐 사두개인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게 이야기했겠지요. 무시합시다’라고 하는데, 저는 장례식장에서 이걸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울지마라. 아빠는 하늘나라에서 만난다’라는 거죠. 만납니까? 하늘나라 가면 진짜 돌아가신 엄마 만납니까? 진짜 만나는 거 맞아요? 이 땅에서 엄마와 행복하게 살고 아빠와 행복하게 사는 그 시절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유지되어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고, 만약에 아빠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없어지면 천국 생활이 그렇게 불행한 시간입니까?

성경을 아예, 생각을 안 해요. ‘뭐 대충 이렇겠지’라는 정도만 생각해요. 주님이 말합니다. 네가 성경해석을 잘못했다는 거예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너희들은 부활을 모른다는 겁니다. 부활은 내가 죽었다가 다시 내가 되는 게 부활이 아니에요. 안양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부활은 새로움입니다.

나에 대한 새로움,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에요. 내가 전혀 낯선 내가 되는 겁니다. 왜? 내가 알던 나는 죄 덩어리이고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로 처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나는 어떻게 조성되는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구성된 제2의 나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만들어 낸 ‘나’가 아니라, 예수님의 주의 이름의 가치와 그 자존심을 걸고 만든 거예요.

따라서 새로 만든 피조물 안에는 주님에 대한 공로만 영원토록 외쳐도 마름이 없어요. 다함이 없습니다. 계속 영원토록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7명 남자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림 살 건데, 나머지는 어떻게 되느냐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숫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도 되고 이삭의 하나님도 되고 야곱의 하나님도 된다”라고 했어요.

야곱이 이삭 만나는 것이 아니고, 이삭이 아브라함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나(하나님)를 만나는 거예요. 나와 더불어 만나는 거예요. 이건 성경을 모르니까 모든 것이 오해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이 찢겨서 죽는 그것은, 말씀 자체가 앞으로 남아 있는 말씀 자체 되시는 예수님의 할 일을 미리 그 시대에 보여준 거예요.

이 말씀인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이 말씀대로 편지에서 끝. 끝은 맞는데요, 그 말씀이 담긴 내용은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계속 끄집어내고, 끄집어내도 늘 새로워야 해요.

끄집어내도 늘 새롭다고요. 왜 새롭냐. 부활의 능력으로 준 말씀은 그동안 내가 안 죽고 버티기 때문에, 내가 제한했어요. 내가 해석하고 내가 판단하고 성경 말씀을 내가 유리한 대로 조치했기 때문에, 말씀이 새롭지를 않았어요. ‘그 말씀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데. 뭐가 이익이 되는데’라고 맨날 자기 이익과 도움이 된다고 말씀을 해석했기 때문에, 말씀이 늘 터져 나오는 그 무한한 깊이를 내 쪽에서 커버했습니다.

‘그 말씀 지키면 내가 더 행복해지나? 불행이 더 되겠지’라고 되거든요. 이 세상 노래에도 그 비슷한 내용이 나와요.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보냈는데, 보내고 난 뒤에 많이 성에 안 찬 거예요. 왜냐 하면, 쓴 글자보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거예요.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 당신도 나에게 편지할 때, 편지로 끝~하지 말고, 편지로 담을 수 없는 그 많은 그리움을 담아서 편지를 나에게 하고, 다 쓸 수 없거든 어떻게 편지하느냐, 그게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온 말씀이에요.

사랑을 받은 우리 성도의 몸 자체가 하나님의 편지라고 되어있어요. 네가 내 사랑의 편지다. 3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그러면 편지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 백지로 쓰는 거예요. 그 많은 그리움을 편지로 쓰는데, 사연이 너무 많이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 주세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 거예요~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낸 당신의 마음~끝이 없어라~

1959년에 태어나서 2016년에 죽은 김태정이라는 여자 가수가 불렀던, 우리나라에서 음색이 제일 좋은 여자가수 김태정이가 불렀던 ‘백지로 보낸 편지’의 가사 내용이에요.

언제라도 생각이 생각이 나거든
그 많은 그리움을 편지로 쓰세요
사연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주세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거에요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백지로 보내신 당신의 마음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을거에요

가사 내용이 그때는 유행가라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요한복음 21장 25절 말씀이에요. 담을 수가 없어요. 성경, 신학 공부한다고 될 것이 아니에요. 이제 끝으로, 우리가 사랑의 편지잖아요. 우리가 사랑의 편지라면, 계속 부활의 새로움이 나오려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예수님처럼 죽음 대기상태에 들어가야죠. 그게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옵니다.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과 방언이 사랑을 대신할 수 없죠. 9절에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부분적으로 알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왜? 사랑은 부분이 아니니까.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그래도 결국은 예수님의 얼굴과 마주 보게 되도록 만드시는데, 그 동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사랑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희미한 우리를 사랑의 대상인 주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세 가지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면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이 사랑이 있어서 나는 ‘내가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라는 이 둘 중에서 8절에 보면“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게 나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사랑에 이끌리는 데로, 주님과 함께 방해받지 않는 모습으로, 사랑이라는 그 날(raw) 것, 그 영원한 것이 샘솟는 것을, 그대로 사랑의 줄로 주와 함께 하나 되어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한 거예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그게 사실이냐, 그게 팩트냐? 그게 진짜냐?’라고 하실 때, 그게 사실인 것이 어디로 판정되는가. 바로 어린양 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말씀으로 자폭했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인간에게 무시받고 죽었다는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엄청나게 우리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냐로 오해했습니다. 죽을 생각하지 않고 버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을 알면, 사랑의 영원성을 안다면, 그 영원성의 밧줄에 계속 딸려 가고 끌려가는, 그래서 늘 방해받지 않는 새로움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소식으로 우리 몸을 통해서 사랑의 편지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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