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레갑 족속

아빠와 함께 2025. 4. 6. 18:57

레갑 족속

2025년 4월 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5:1-11

(35: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35:2)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35:3) 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 형제와 그 모든 아들과 레갑 온 족속을 데리고
(35:4)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방백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더라
(35:5)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35:6)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35:7)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35:8)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35:9)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35:10)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대로 다 준행하였노라
(35:11)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가 두려운즉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거하였노라

하나님 계시 내용에 이스라엘 족속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들어간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들은 이방족속인 레갑족속입니다. 이 이방족속은 가나안 족속에 속합니다. 이들은 정복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부터 정복당한다는 생각보다는 합병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정복당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깁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충분히 동감하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방민족이지만 자기 민족의 정체성이나 존재성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러주심을 맡깁니다. 즉 ‘나의 나됨’을 지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당부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왜 예레미야의 계시 전달 현상에서 그들이 거론되는 겁니까? 그것은 현 이스라엘의 상황과 비교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당시 나라의 본 자손이라 자처하는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유다 민족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을 지켜주시기를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릴 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도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건질 자들이 따로 존재하는데 그들이 바로 레갑 족속이라는 겁니다.

레갑족속의 특징은 자신들의 존재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우선한 민족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식으로 말씀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자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들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그 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 본인들이 흔들릴 이유가 없던 이유는,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자인지를 본인들이 결정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레갑족속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 네 가지를 당부받았습니다. 1.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 2. 농사 짓지 말 것. 3. 포도원을 재배하지 말 것. 4. 집 짓지 말고 천막 생활 할 것. 도대체 이러한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짐’, 그리고 ‘소유’라는 것이 결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냥 벌거벗은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은 제대로 우리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목숨을 우리가 부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목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늘 피어나는 나의 가치와 자존심과 잘남 같은 것도 우리가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이득을 얻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득이 없으면 자신의 가치를 구현할 수가 없고 남들에게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 만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할 만큼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들은 유월절 밤의 심판과 그 피로 구원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쪽에서 뭘 하든지 상관없이 이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커지고 높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즉 자신들의 것들이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레갑 족속은 비로소 이방인의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게 된 것을 최대의 자랑으로 여겼는데 이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로 여긴 겁니다.

레갑족속은 자기 주도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 그런데 이러한 역전이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But many who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그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롬 11:16-19)

즉 뿌리가 두 개인데 어느새 지표면 위에서 두 나무가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엉켜 있게 됩니다. 연리지 같아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뭡니까? 로마서 11:26-28에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28.  From the standpoint of the gospel they are enemies for your sake, but from the standpoint of [God's] choice they are beloved for the sake of the fathers;

 

즉 이스라엘 본 자손들은 율법에 의해서 작살나고 멸망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 역사를 통해서 후대로 전달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택하심’입니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의 윤곽은 인간 자체의 역사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을 전제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되는 나의 역사도 나에게 가치 있다’가 아니라 나와 결부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택하심 앞에서 ‘가치 없음’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반복으로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하심받음을 드러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은 자꾸 어떤 원칙이나 법을 동원해서 자기 가치에 놀아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특히 로마서 11:28에서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로 인하여 원수된 자요’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살해하므로서 그들의 속 마음을 유감없이 폭로했습니다. 다시는 구원될지 못할 자의 면면을 유대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노골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자신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택하심을 따라 차별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결코 우리 자신에게 찾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9강-예레미야 35장 1~11절(레갑 족속)2504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5장 1~11절입니다. 구약성경 1110페이지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때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레갑 족속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우라, 이에 내가 하바시냐의 손자요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 형제와 그 모든 아들과 레갑 온 족속을 데리고,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 익다랴의 아들 하나님의 사람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였는데 그 방은 방백들의 방 곁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더라, 내가 레갑 족속 사람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너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거처할 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두지 아니하고, 장막에 거처하여 우리 선조 요나답의 우리에게 명한대로 다 준행하였노라, 그러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땅에 올라왔을 때에 우리가 말하기를 갈대아인의 군대와 수리아인의 군대가 두려운즉 예루살렘으로 가자 하고 우리가 예루살렘에 거하였노라”

상당히 긴데, 무슨 내용이냐 하면, 여기 예레미야 나오고, 레갑 족속 나옵니다. 레갑 족속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같이 연결시킨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지요. 레갑 족속과 따로 연결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레갑 족속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레갑 족속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와 그 당시 이스라엘, 유다죠, 유다의 태도와 한번 견주어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 지를 한번 견주어 보라고 레갑 족속을 이 말씀의 현장에 불러들인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관심 있는 것이 레갑 족속은 누구냐는 겁니다. 레갑 족속은 이방인입니다. 미디안 족속인데, 이들은 약속의 땅에 원래 거주했던 열 족속 가운데 한 족속입니다.

그 미디안 족속 중에서도 겐 족속에 속한 자들이 레갑 족속인데, 레갑 족속이 이스라엘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은 이방인이고 외부 침입자잖아요, 침입자인데, 그 침입자 이스라엘의 움직이는 동기를 그들은 뭐라고 이해했느냐 하면, 그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여호와가 있는데, 그 여호와가 우리 민족이 믿던 하나님과 달리, 천지창조를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맞다고,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를 믿었거든요. 여호와는 천지창조를 하시고, 그다음 인간을 만드시고, 모세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홍해를 건너왔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애굽에서 유월절에 나올 때,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서 애굽이라는 세력권에서 빠져나온 대단한 민족이라는 그 점에 대해서, 레갑 족속이 부담 없이, 모든 기득권 다 내려놓고 그냥 받아준 거예요.

받아주게 되면 이게 뭐냐면, 이건 정복이 아니라 합병이 되는 겁니다. 이건 조선 사람들에게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일본에 신이 있는데, 일본의 신의 이름을 불러서 조선을 쳤다고 합시다. 그때 조선에 사는 조선 사람이, 우리 신은 핫바리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를 침략한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순하게 받아버리면, 이건 자연스럽게 합병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나 그 뒤에 사도바울이나,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복을 주고자 하는 백성은 이미 따로 정해놓은 거예요. 따로 정해놓고, 그 민족들을 배후에서 다루었던 다루심, 사건들, 그 역사에 아무 소리 하지 말고 합류하게 되면, 너도 복 받는 민족이 된다는 이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로마서 11장에 보면 나오지요. 떡 덩어리가 있는데, 떡이 하나 있고 그 떡에 붙은 떡도 거룩해진단 말이죠. 또 감람나무가 있는데, 참 감람나무 있고, 돌감람나무 있는데, 돌감람나무라 할지라도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그 참 감람나무 진액의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롬11:16~17) 그리고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 제안을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는지 절로 나와야겠지요. 저절로 나와야 해요. ‘우리가 뭘 하면 됩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잘렸습니까?’라는 그 질문이 먼저 선행되어야 해요. 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이, 왜 잘렸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로마서 11장에 “율법 때문이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느 인간도 구원될 자격은 애초부터 인간 속에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걸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율법 때문에 우리가 못 들어간다면, 율법 말고 또 전달해 준 것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로마서 11장 26절에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라는 겁니다. 구원자가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은, 구원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오고 다른 역사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두 가지를 생각할 겁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때문에 잘렸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데, 이스라엘을 잘라내는 방법으로 잘라내시면서, 구원자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내비쳤다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으로는 잘라내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율법 말고 달리 우리에게 제시하는 거, 내미는 게 있을 거예요.

그 내미는 것을 로마서 11장에는 “창세 전의 비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창세 전의 숨겨진 비밀. 그 비밀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게 바로 로마서 11장 28절에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복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라고 나옵니다.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이스라엘에서 나온 구원자는 무엇과 원수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와 원수 관계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원수 아닌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원수가 된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택하심’을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이것은, 우리 쪽의 행함으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아니에요.

잘려도 택하심이 그들을 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율법으로 잘려도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잘린 가운데서도 그들은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이 그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어야 해요. 그 두 가지 중 하나만, ‘택하심으로 구원받는다’라는 그것만 자꾸 붙들지 마시고요, 둘 다를 알고 있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잘라낸다. 왜냐 하면 우리에게는 구원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잘라낸다.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를 한번 내 볼 테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 )와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 )와 같이 말씀하셨다’라고 할 때, 그 괄호 안에 여러분들은 어떤 내용을 적어넣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이야기할 때,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겠습니까? 더 이상 뜸들일 필요 없죠. “나는 너희를 심판한다”

저번 주 수요일 설교에 그런 설교 했지요. 하나님께서 정녕 너희를 죽인다는 그 사실, 그 사실로부터 성경해석을 좀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는 말은, 내가 굳이 살아있을 이유는 없고, 하나님만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직접 알려주시는 내용이, 그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하시기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을 받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시편135:4) 하나님, 내가 택하여 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이걸 합쳐보면 공식은 간단해요.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걸 전제 바탕에 깔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게 되면, 택한 자는 그때부터 누구의 소유냐 하면,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온 이스라엘이라고,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참된 이스라엘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바잖아요. 원하는 바인데, 우리 쪽에서 실시하는 참된 이스라엘 되기는 실패하는 겁니다. 그 실패의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이건 우리가 다 아는 문제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그다음 문제는, 레갑이라는 족속이 왜 여기 이 계시에 굳이 들어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개인의 문제가 어떻게 하나님 문제와 결부되고, 하나님 문제와 결부된 그 상태에서 어떻게 그게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는지를 주께서 보여 주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개인처럼 남들에게 다뤄진 거예요. 나는 나고, 당신은 당신이다. 개인 대 개인을 다루는 것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다뤄지게 해놓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주님 개인에게 종속되고 선택받은 새로운 개개인들을 이 땅에 남겨두신 겁니다. 그걸 연리지로 보면 되지요.

여러분 ‘연리지’를 아십니까?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붙어서 하나가 된 거랍니다. 즉 뿌리가 두 개인데 어느새 지표면 위에서 두 나라가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엉켜 있게 되는 이게, 온 이스라엘의 구조와 너무 딱 맞아요. 이 말은 내 개개인이 개인의 가치와 개인의 의미를 내세우는 뿌리(개개인)는 이미 절단이 난 겁니다. ‘나는 이렇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옳다. 나는 바르다’라는 소리를 일체 못합니다.

반대로 이야기해요. ‘나는 죄인이다. 나는 못났다. 누구든 나를 함부로 해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반발하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주님의 소속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레갑 족속은 어떤 족속이냐 하면,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에게 당부한 것이 4가지 있습니다.

첫째, 포도주 마시지 말 것. 포도주 마시지 마라. 레갑 족속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포도주 마시지 말라고 하셨다고 이렇게 그들은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그들은 오해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신명기 29장 6절에 보면,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게 지금 신명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한 거죠. 특히 제사장에게도 이야기한 거예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거기 온 천지가 포도예요. 노아도 포도주 만들어 먹었어요. 그들은 약속의 땅을 자기의 즐거움과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 땅을 주셨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 하나님의 율법이 딱 들어가 버립니다.

제사장부터 너희 백성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아니, 아예 내가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만들 거야. 왜? 약속의 땅은 너희들이 생각한 약속의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너희가 견뎌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농사짓지 말라. 참, 이건 뭐 어떻게 살라는 건지. 첫 번째는 포도주 마시지 말고, 두 번째는 농사짓지 말고, 세 번째는 포도원 재배하지 말고, 네 번째는 집 짓지 말고 천막생활 하라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들으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는 길이 생각나지 않던가요?

마태복음 10장 9~10절에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청빈하게 살까요? 무소유로 살까요? 그러면 가난하게 살면 구원받는 겁니까? 예수님 열두 제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너 자신을 위해서 어떤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너에게는 이미 박탈되었다는 겁니다.

돈을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어떤 것이 있더라도 이미 소유권이 너를 택한 분에게 넘어가 있다는 것을 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오늘 예레미야에서 두 민족을 대비하고 있어요.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던 유다 민족과 레갑 족속, 이 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레갑 족속에게 예레미야가 시험합니다. “야, 포도주를 마셔. 포도주 어서 마셔”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레갑 족속이 “우리는 조상 요나답 때부터 포도주 마시지 말라고 했고, 아까전에 이야기한 그 네 가지를 지키라고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이 말의 취지가 뭐냐 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당시 유다 민족 좀 들어보란 말이죠.

이 레갑 족속이 하나님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주었던 그 의미를 그들은 어떤 경우라도 계속 대대로 유지하고 있잖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뭐냐. 그들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자부심이 없어요. 이건, 자기들은 공짜로 구원받은 거예요.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서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서, 이스라엘을 떠올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특별한 어떤 역할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들을 불러다가 “야, 포도주를 마셔. 아무도 탓할 사람이 없어. 마셔도 돼”라고 해도 안 마신다고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예레미야가 ‘너희들이 감히 내가 먹으라고 했는데 안 마셔?’라고 나무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조상 때부터 우리에게 지시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했어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너희들은 살리라”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이 공격받을 때, 너희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피신이 가능한 것은 예루살렘 근처에 정착한 것이 아니고 떠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빠르게 거기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레갑 족속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예루살렘을 폭파하고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흩어지게 될 때, 그들은 어떤 나의 공간이나 소유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가 어떤 상황,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과 그들의 택함 관계는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자기 생활보다도 더 우선되게, 귀하게 여겼던 겁니다.

그러면 끝으로, 오늘날 우리는 누구와 비교해야 할까요? 같은 교인? 특정 교회? 희망 없습니다. 인간은 똑같아요. 그러나 그중에서도 택하심을 받은 자가 있을 거예요. 택하심을 받은 자는 특징이 있어요.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고 어떤 무시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미 선택했고, 나는 이방인인데, 천국은 꿈도 못 꾸는 자인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택하여 주셨기에, 비로소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 십자가의 일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아는 자, 그자를 가지고 베드로 전서에서는 “이 땅에 흩어진 열두 지파”(베전 1:1~2)라고 했어요.

흩어진 열두 지파는 피로 거룩함을 입은 열두 지파.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흩어진 열두 지파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보통 세상이 아닙니다. 정말 위험한 세상, 힘든 세상, 살고자 할 때 더욱더 껄끄러운 세상, 하지만 그 모든 원인과 이유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한 데서 비롯됨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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