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주님의 노예

아빠와 함께 2025. 3. 25. 10:41

주님의 노예

2025년 3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8-11

(34:8) 시드기야 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34:9)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34:10)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힘의 서열화로 구성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절대적 노예로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나타나는 노예정신이,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전에 살았던 애굽 나라와 거기서 빠져나온 후 생겨날 나라와의 본질이 차이가 남을 뜻하는 겁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어떤 모습을 마땅히 보여야 하는지를 설명하시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소위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는 시드기야 왕은 율법에 준해서 같은 이스라엘 동족의 노예를 풀어주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전에 풀어주었던 그 노예를 다시 자신의 노예로 삼았습니다.

율법에서는 노예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민족의 노예와

●여호와로 인하여 민족인 이스라엘 동족에서 얻은 노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노예들에 대해서 다른 룰을 적용하라는 겁니다. 우선 레위기 25:44-45에 보면, “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지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살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 중에서 살아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그 중에서도 그리 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신명기 15:12에서는 이스라엘 노예에 대해서 달리 언급되어 있습니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다같은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달리 취급해야 되지요?

그것은 이방민족에서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주인의식으로 대하게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방세계에서는 힘과의 위계질서가 잡혀 있어서 힘이 있는 자가 합법적으로 힘 없는 자에 대해서 주인이 될 수 있는 관계를 허락하는 사회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 어느 누구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1-23)

즉 이스라엘은 남의 민족에서 얹혀 살았다는 겁니다. 결코 자신들이 주인노릇을 할 수 없는 세계에서 종이 된 채 400년을 지내온 겁니다. 이는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애굽의 힘 질서 체계를 붕괴시키고 빼낼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있다면 오로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법을 세운 겁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인간의 만남은 각자 법과 계약을 만들어 가지고 만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신이 이렇게 해주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에는 필연적으로 벌칙 조항이 만들어집니다. 이 벌칙조항을 실제로 행사하는 과정에서 누구 주인이며 누가 종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누가 주인이며 누가 종인지는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지 않는 쪽은 종이되고 자체적으로 법을 제정하게 되면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드기야 왕이 ‘이스라엘의 노예에 대해서는 풀어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도로 예전 종이었던 자를 도로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종 신분을 통해서 나타나는 자유의미’가 구현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왕의 말대로 종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 맞지요?”라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은, ‘네 자신이 철저하게 나의 종이 될 수 있느냐?’입니다.

풀어준 종을 다시 거두어드렸다는 말은 힘의 질서 체제에 있어 여유분의 힘 가진 자들은 여유분의 힘을 노리는 자들을 노예질서 안으로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인이 원해서 그러하지만 노예된 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옛 주인의 노예가 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본 취지가 나타날 때까지 ‘노예를 7년 만에 풀어주라“는 뜻을 제대로 반영될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나타나는 종과 주인의 개념, 즉 최종적인 종과 주인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소위 ’달란트 비유‘라는데 나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마 25:19,24-27)
여기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당연히 주인은 격분하고 그 종을 종답지 못한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심판해 버립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여전히 자신을 자기에게 주인으로 간주합니다. 곧 주인을 대하면서 자기를 지키려는 법과 계약을 가지고 주인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이 종은 주인의 의지를 전혀 몰랐던 종으로 낙인찍힙2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 봐야 될 사실은, 한 달라트를 가지고 악한 종이 땅에 묻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를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는 것은 주인의 존재가 종 자기 존재를 방해가 된다는 것을 뜻입니다. 즉 주인의 부재(不在)가 금전의 부재로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전에 주인께서 종들에게 자신의 원칙과 처벌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미리 한 달란트를 받은 종에서 ”혹시 힘들고 이익이 남기기가 어렵거든 차라리 그 한 달라트를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챙기게 하라“고 사전에 지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종에게 그 어떤 법과 계약할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종으로 다루시는 그 주인님의 존재 자체만으로 고마움과 감사됩니다. 왜냐하면 종의 인생은 끝내 주인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행할 수 있는 법 말고 새로운 법에 의해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7강-예레미야 34장 8~11절(주님의 노예)2503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4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시드기야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한 후에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그 언약은 곧 사람으로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케 하고 그 동족 유다인으로 종을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 이 언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는가를 발견해야 하겠지요. 실생활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현장을 우리는 실생활이라고 합니다. 발휘되는 현장의 실생활은 하나님 쪽에서는 언약이지만, 인간에게는 언약이라는 것이 없고, 본인이 주도적으로 상대방과 맺은 계약이 성립됩니다.

인간의 만남이라는 것은 필히 그 만남을 통해서 묵시적으로 그 계약이 수립되게 되어 있어요. 강남강의에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은 계약 없이는 어떤 노동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이 있어야 자기의 노동과 행함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의롭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의로움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실시한 그 어떤 것도, 무조건 의로워야 한다는 대원칙과 철칙을 본인들이 굳게 쥐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어떻든 저떻든 간에 무조건 옳아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래야, 자기 노력, 노동이 헛되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헛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의 내세운 계약에 의해서 제시됩니다.

그런데 그 계약에 뭐가 문제냐 하면, 그 계약에 처벌이 따라요. 인간 대 인간의 계약이. 이 계약에 위반하면 당신은 위약금을 내야 한다든지, 이런 처벌이 따른다고요. 그런 처벌이 따름으로 말미암아, 그 처벌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쥔 쪽이 주인이 되고, 그 권한을 쥔 쪽이 자신의 노예가 되고 노비가 되는 구조입니다. 이 세상이.

회사법을 누가 만듭니까? 노동자가 만들지 않아요. 회사법은 회사 주인이 있어요. 이미 회사법이 있다는 그 자체로 이미 그것은 주인 쪽과 노비 쪽이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계약은 힘을 가진 자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위계와 서열이 생기는데, 그 서열은 제일 밑바닥에 힘이 없는 자, 제일 위는 힘이 있는 자, 그 사이는 법적인 계약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 계약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애굽에서 있었던 그 계약 관계와 여호와의 계약 관계가 다르다는 거예요. 애굽의 계약 관계는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어서 그걸 정당화하지만, 언약에서는 인간의 노력은 일체 부정당하고 다 거부됩니다. 주님의 희생과 노력만 계약이 성립되는 구조가 바로 율법을 통해서 드러났어요.

그렇다면, 너희들이 애굽에 살던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유월절 양에 의해서, 거기서 빠져나와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새로운 나라가 구성된다면 적어도 애굽 나라의 구조와 이스라엘의 구조가 달라도 뭔가 달라야 하거든요. 사람이 내가 여기 있고 법을 세웠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법이 먼저 있고, 그 법에 준해서 법에 합당한 나로, 다른 나가 되는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요구했던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에게 노예가 있었다. 그런데 노예를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풀어줬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대로 한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더 나아가야 해요. ‘하나님의 시키는 대로 나에게 노예가 있었는데, 풀어줬잖아. 그러면 됐잖아’라고 할 때, “네가 노예를 풀어주면서 너에게 느껴지는 거 혹시 없나?”

‘느껴지는 거 없는데. 나는 바르게 법대로 풀어줬습니다. 쿨(cool)합니다. 이 정도로 내가 어질고 자비로운 주인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어요. 내가 얼마나 노동자에게 잘해줬는데’라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물으시죠. “네가 하나님의 노예가 될 마음은 없느냐?” 이게 바로 결정적이에요. 마귀로 인해 인간이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죠.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곁에 노예를 줘요. 노예를 주게 되면, 노예와 본인 사이에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의 노비라도 좋소. 내가 누구의 노예라도 괜찮아. 그게 종이라도 저는 대만족합니다’라고 그렇게 자기의 마음 자체가 달라질 수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물으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노예가 되면 좋지.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나서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자신만만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려 봐. 이제는 노예가 뭔지를, 내가 너의 인생을 끌고 가면서 네가 생각한 노예와 하나님이 생각한 노예가 어떤 큰 차이가 있음을 내가 너에게 알려줄게”라는 그 사례가 신약에 와서 실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삼았습니다. 이건 기존 이스라엘을 폐기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는데, 그 열두 제자의 특징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종이 된 것을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 조건하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동네방네로 다닌 거예요. 먼저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누가복음 10장 20절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이건 제자의 마지막 모습인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18절을 먼저 보면, 제자들이 와서 굉장히 흐뭇해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니까, 귀신도 항복하나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라고 했어요. 제자들도 신났지요.

물론 자신들의 능력이나 권능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권능이 와서 예상보다 능가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런 일을 경험하고 난 뒤에, 예수님과 자기와 한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같은 편. 마치 길거리에서 여우가 왕인 것처럼 행세하는데, 뒤따라오는 사자를 의식해서 절했는데, 자기보고 절한 줄 알고 착각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10장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기뻐하실 것을 줘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충분히 주십니다. 으시댈 수밖에 없고, 흐뭇해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있음이, 이건 큰 행운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하시면서, 그럴 때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그것은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거예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기록되었다는 말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노예입니다. 하나님의 노예로 등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것은 이 생명책이라는 것이 우리가 작성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명책을 펴서 자기 이름을 쓴 것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해 버렸다는 거죠.

그러면 꼼짝 말라죠. 자기 평생의 숙명과 팔자, 그런 것은 내 임의로 바꾸려고 해야 바꿀 수 없는 겁니다. 안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그 생명책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노예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자들이 해야 하는 것은 뭘 해야 하는가. 노예는 어떤 삶을 사는지, 이제는 노예의 삶을 그들은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에게 배우는 거죠.

신약을 제가 자꾸 거론하는 것은, 구약의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노예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노예가 되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납득을 못 하고, 기뻐하지도 못할뿐더러, 수긍이 안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2종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와 열 달란트 받은 한 종류, 한 달란트 받은 또 한 종류, 이렇게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이 다섯 달란트와 열 달란트 받은 자들의 모습은 ‘종이란 이러이러해야 종이 된다. 이래야 주인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는 종이다’라는 그런 표면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모델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느냐, 아니면 그 사람 마음속에 이미 주인이 삽입되어 있느냐. 그걸로 구분되는 겁니다.

주인이 먼 타국으로 떠나서 일부러 뚝 떨어져 봤어요. 내가 있을 때 행동하는 것과 내가 없을 때 행동하는 것이 다를까 싶어서, 뚝 떨어져 봤습니다. 종이 뭔가를 알고, 내가 주인의 종인 것을 영광스러워하는 두 종은, 주인이 있든 없든, 부재하든 옆에 있든 상관없이 열심히 종의 노릇을 다했어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옆에 있을 때와 주인이 옆에 없을 때의 행동이 차이가 나면서, 주인이 없을 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뭐냐 하면, 자기가 주인 한 거예요. 주인에 의해서 지배받아야 할 자신의 의식이 주인이 없어지니까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럴 때 주인은 나에게 남, 타자가 됩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예전부터 나답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마태복음 25장 26~27절에 보면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라고 악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지금 악한 종이 주인이 준 동전을 땅에 묻었어요. 여기에, 이 현장에, 이 동전처럼, 주인의 것도 내 앞에서는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의 흔적이 없어져야, 내가 오롯이 나의 의식이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종이,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챙겼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자를 챙기나, 열심히 뭘 벌이나 마찬가지로 주인이 있든 없든 나는 주인에게 끌려가는 종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계속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게 어려운 점이 어떤 점이냐 하면, 주인이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했으면 네가 나에게 처벌받지 않잖아”라는 해답을 주인만 쥐고 있어요. 종은 그 생각을 못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철저히 종이 종다워야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네가 아무리 네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해도 나올 수 없는 그 모든 뜻을, 주인이 나만 단독으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내 뜻만 무조건 집어넣어서, 너는 네 뜻이 아니고 내 뜻만 이루면, 그게 종이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배알도 없죠. 이건 자기 것이라고 할 게 없지요. 중국에서 만든 인공로봇과 똑같은 거죠. 자빠지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지만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요즘 로봇청소기도 그렇게는 안 한답니다. 자기가 알아서 반항한 데요.

요즘 새로운 로봇청소기는 청소하는 척하면서, 주인이 하는 행동을 본부에 다 일러바친 대요. ‘내가 네 눈에는 종으로 보이냐?’라는 뜻이죠. 뭐 그 인간이 만든 그 기계니까, 그 인간을 닮았죠. 주인이 부재함으로써, 도대체 인간이 생각하는 종 말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종이 어디까지 순종해야 종이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이룰 때, 이런 레벨과 이런 데까지 종의 사이즈를 키우는 거예요. 그런데 종인척하면서 지가 주인 노릇하는 사람은 자꾸 눈치보는 거예요. 여러분, 노래방에 가면 노래하잖아요. 노래하게 되면, 노래가 좀 자신이 있다 싶으면, 다른 친구보고 ‘야, 키(고음으로)를 좀 올려’라고 하죠. ‘이거는 원가수와 같은 키인데?’라고 하면, ‘아니야. 내가 그 가수보다 더 고음 낼 수 있어. 가주 임재범보다 더 높게 올려’라고 합니다.

인간은 좀 되었다 싶으면 사이즈를 키워요.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본인이 궁금한 거예요. 자기 속에 품고 있는 자기의 능력이, 노동력이 어디까지 대단한지를, 자기가 만든 계약에 자기가 계속 만족하고, 만족하려는 주인의식입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에서의 계약은, 종은 계약조차도 몰라요. 왜냐 하면 그 계약은 주님이 만들면 되지, 내가 그 계약을 왜 알아야 합니까?

이게 신약에 종의 위치입니다. 언약은 주님이 만들고, 언약은 일방적으로 주님이 완성하면 되지, 내가 꼬치꼬치 언약 알아서 뭐 할 건데요? 그냥 주는 대로 받고 먹으면 되는 거예요. 율법이라는 계약에서 벗어난 게 진정한 주인만을 기쁘게 하고, 그 법을 스스로 만드신 주인만을 높이는 거, 이게 종의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레위기 25장 44~4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의 종은 남녀를 무론하고 너의 사면 이방인 중에서 취할찌니 남녀 종은 이런 자 중에서 살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의 자녀 중에서도 너희가 살 수 있고 또 그들이 너희 중에서 살아서 너희 땅에서 가정을 이룬 그중에서도 그리할 수 있은즉 그들이 너희 소유가 될찌니”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를 대리하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인이라면, 그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다른 민족의 종을 네가 노예로 삼음으로써, 여호와는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방 민족 말고, 이스라엘 동족을 종으로 삼을 수 있느냐.

신명기 15장 12절에 보면,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 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칠 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자유 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목을 누가복음 4장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복음은 인간을 자유 하게 한다고 했거든요. 이 말은 어떤 인간사회에서 계약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계약하면 안 된다는 이 말을 예수님의 표현으로 하면, 누구와도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누구와도 맹세하지 말라. 맹세에 아주 전형적인 관습이 뭐냐. 결혼식 할 때입니다. ‘이제는 부부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라고 하는데, 한 몸 아닙니다.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결혼하면서 왜 한 몸이 아닌가를 실습하라는 뜻입니다. 믿습니까?

진짜 신부는요, 남편다워야 신부이지, 그 남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한다는 것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계약을 체결해요. ‘너는 나에게 밥하고 빨래해 주면, 내가 너를 이뻐해 줄게’ 세상에 남자치고 그런 남자 아닌 사람 있어요? 집사님 안 그러세요? ‘그 대신 돈 벌어줄게. 하지만 너는 모든 봉사를 다 해야 해’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같은 여자를 데리고 사는 걸 영광인 줄 알아라. 이 남자야. 앞으로 내가 원하는 쇼핑할 수 있는 돈은 다 제공해. 네 자식까지 낳아주잖아. 너 아니어도 나한테 오라고 하는 다른 남자들 많았어. 내가 약간 눈이 삐었지만.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충성해야 해. 앞으로 나이 많다고 돈 못 벌면 나가’라고 하면 남자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하죠. ‘이게 내 법이야. 내 법. 내 계약’이라고 여자가 말하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계약을 들고 둘이 만난 겁니다. 그걸 철폐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같은 동족끼리 종을 했다가 놓아주면 되는가. 놓아주면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기꺼이 놓아주어야 해요. 기꺼이. 그게 사랑입니다.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팝송 가사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사랑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지켜야 하는 것이고,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 주는 것이다

누군가에 있어서 사랑은 모든 것이고,

누군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 속에는 아픔으로 가득차 있다.(예수님의 고통이죠)

그래서 사랑이 다 이루어지면, 그 사랑의 추억이 바로 당신입니다’

주님의 사랑, 그 아픔의 사랑의 결과물이 바로 당신입니다. 네가 너를 위해서 법 세우지 마세요. 법은 내가 세우지 네가 세우는 것이 아니다. 뭐 ‘누구 때문에 못 살겠다. 누구 때문에~’라는 그런 거 다 너의 욕심이다. 너는 법을 세울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어. 법은 일방적으로 주님이 세우는데, 그 법의 완성이 사랑이다. 그냥 너에게 보내 주는 것이다. 너는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이 노래가 뭐냐? 우리말로 하면 ‘아마도 사랑’ 영어로는 ‘Perhaps Love’입니다. 존덴버(John Denver, 미국의 싱어송라이터)가 불렀어요.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
아마도 사랑은 휴식처와 같을 거예요

A shelter from the storm
폭풍우로부터의 은신처이죠

It exists to give you comfort
그것은 당신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 존재하죠

It is there to keep you warm
그것은 당신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곳이에요

And in those times of trouble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에

When you are most alone
당신이 가장 외로울 때

The memory of love will bring you home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Perhaps love is like a window
아마도 사랑은 창문과 같아요

Perhaps an open door
아마도 열려있는 문일 거예요

​It invites you to come closer
당신을 더 가까이 오도록 초대하죠
It wants to show you more
당신에게 더 많은 걸 보여주고자 해요

And even if you lose yourself
만약에 당신이 자신을 잃어버릴지라도

And don't know what to do
무얼 해야 할지 모르더라도

The memory of love will see you through
사랑의 기억은 당신을 끝까지 볼 거예요

Oh love to some is like a cloud
오 어떤 이에게 사랑은 구름과 같아요

To some as strong as steel
어떤 이에겐 강철과 같이 강해요

For some a way of living
어떤 이에겐 삶의 방법이에요

For some a way to feel
어떤 이에겐 느낌의 방법이에요

And some say love is holding on
어떤 이는 사랑은 붙잡는 거라 말합니다

And some say letting go
어떤 이는 놓아주는 게 좋다고 말하죠

And some say love is everything
그리고 어떤 이는 사랑은 모든 것이라고 해요
Some say they don't know
어떤 이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Perhaps love is like the ocean
아마도 사랑은 바다와 같을지도 몰라요

Full of conflict, full of pain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 말예요

Like a fire when it's cold outside
밖이 추울 때도 불같아요

Thunder when it rains
비가 내릴 땐 천둥 같아요

If I should live forever
내가 영원히 살게 된다면

And all my dreams come true
모든 내 꿈이 이루어진다면

My memories of love will be of you
내 사랑의 추억은 당신일 겁니다

이처럼 아픔을 경유하지 않는 자는 누구에게도 율법을 강요할 자격이 없습니다. 되지도 않는 자기 법만 내세울 뿐이죠. 우리는 이와 같은 율법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줬다는 이 영광스러움을,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구약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자주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결정하는 주인처럼 행세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픔이, 우리를 콕콕 짚어서, 그게 바로 노예로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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