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소원
2025년 3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2-5
(34:2)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34:3) 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 손에 붙임을 입고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34:4)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34:5)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본문에 한 인물이 나옵니다. ‘시드기야’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누구에게 지목하여 연급하신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점에서 관련있는가 하며는 언약을 버리면 ‘이렇게 망한다’를 보여주는 것으로 관련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언약을 성취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세계는 부단히 전쟁을 벌리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로 인하여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자원’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정된 자원을 두고 끊임없이 그 자원을 획득하여 부를 일구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자원을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종족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겁니다.
따라서 가만 앉아서 죽어나 나가 싸워서 조기에 죽으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겁니다. 대학입시나 공무원 시험, 취직 시험도 마찬가지이고 아파트 청약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 전쟁을 하는 이유는 명예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그 예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것은 형 본인의 명예가 손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바벨론 앞에서 버틴 것은 그 당시 정치 기류가 바벨론 외의 국가들이 연맹을 조직해 같이 대들면 바벨론을 이길 수 있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애굽나라가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도 어쩔 수 없이 주변에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홀로 점잖고 착하고 조용스레 살 수가 없습니다. 자원(=돈)을 잔뜩 모아놓았다고 해서 안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13:24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돈에 해당되는 걸까요 아니면 명예에 관련 일일까요? 명예에 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부모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할 의사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마 자식을 때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말씀을 안 자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사이가 됩니다.
즉 “자식을 못 때리겠다”, “아니야 자식을 때려야 해”를 두고 양보없는 투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망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상대가 율법을 거부하는 경우가 일어났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므로서 언약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즉 시드기야의 존재는 본의 아니기 하나님의 율법을 명백하게 잘 나타나는 역할을 감당한 바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세상에서 전쟁을 없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세계 전체를 언약과의 전쟁터로 몰아세우시려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일찍이 충분히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25과 31-35에 보면, “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양상의 예언의 결말이고 그 과정을 전쟁을 통해서 진행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전쟁은 인간들이 늘 공포로 다가옵니다. 좀 평안하고 살고 싶어도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서 있는 입장에서 그 누구도 이 전쟁에서 벗어날 자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언약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쟁을 마주하면서 이 모든 전쟁이 자원 확보와 인간들의 명예심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 예언된 언약의 내용과 관련된 사항인 것을 증거해야 될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망하면서도 그 끝 모습까지 남김없이 예언된 대로 진행되는 겁니다. 따라서 나의 명예와 내가 살 자원(=돈) 확보와 상관없이 언약만이 돋보이면서 그것으로 족하다는 자들이 발생됩니다.
나의 이익과 상관없이 언약의 활발한 활동에 충실하게 호응하는 것을 원하는 자들이 출현된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언약에 충실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미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께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양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문설주를 바르는 방식입니다. 자신에게 넘쳐나는 욕망을 인정하고 자신의 욕망으로 언약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유월적 대신 죽음에 자신을 합류해서 세상에 나서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도리어 언약의 활발성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모습은 시편 27:1-4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 사람이 조금도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목적이 언약적으로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사모하는 것’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전쟁이 치열해도 그 치열한 모든 전쟁 양상도 성전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전쟁으로 이해합니다. 즉 사적으로 실패해 보여도 언약의 완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효력을 이미 죽고 난 뒤에 분명해집니다. 잠언 15:11에 보면,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고 난 뒤에 모여져 있는 그 세계에서 비로소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복음인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생전에 이미 부여받은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의 요란함을 도리어 언약의 분주함으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6강-예레미야 34장 2~5절(한가지 소원)25031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4장 2~5절입니다. 구약성경 1108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네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사로잡혀 그 손에 붙임을 입고 네 눈은 바벨론 왕의 눈을 볼 것이며 그 입은 네 입을 마주 대하여 말할 것이요 너는 바벨론으로 가리라,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드기야라는 인물 등장합니다. 왕입니다. 왕인데, 무엇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느냐. 이스라엘이, 끝내 이스라엘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거, 있었던 나라가 없어지는 거, 있었던 나라가 없어짐으로써, 그동안 이스라엘을 있다고 여겼던 모든 자들을 실망시키는 역할, 그 역할을 시드기야 왕이 마지막으로 보여줍니다. 갑자기 공중으로 사라져서 없는 거?, 광야 땅에서 꺼져서 없는 거?,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적으로 생각했던 이방 나라에 완전히 함락당해서, 그 나라에 지배를 당함으로써 없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곧 세상 나라에 일부였었음을, 세상 나라의 한 모퉁이에 불과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대만은 중국의 한 부분이었음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한 부분이었음을 보여주는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대통령 젤렌스키, 이렇게 되는 거죠.
쉽게 말해서,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에서 인간은 악마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악마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역할을 시드기야가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시드기야 입장에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거는 완전히 손해 아니냐. 챙길 것도 없이 그냥 주저앉고 망해버리는 것뿐이라면,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뭔가 얻고자 하는 이익은 뭐냐.
이익은 없지요. 없는데, 망하는 역할에서 아주 제대로 망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뭔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드러나는 게 있어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1번, 2번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1번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이 이긴다. 2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이 이긴다.
몇 번이겠습니까? 질문을 한 취지부터가 벌써 노골적이니까, 뻔하죠.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의 계획이 인간의 사적인 야심과 야망보다 더 세게 이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사적인 욕심과 야망은 누가 우리 안에서 불을 지폈고, 일으켰는가. 이거는 마귀가 우리 안에서 욕심을 일으킨 거예요.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이 이긴 것이 뭐냐.
우리 자신이냐, 마귀냐. 하나님은 악마가 우리보다 세고, 주님은 악마보다 센 것을 아십니다. 그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시작은 어디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마귀 들린 인간부터 시작해요. 마귀 들린 인간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나의 자존심은, 나의 위신은, 나의 명예는 어디 가서 찾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남에게 내세우지?’라는 거.
갓난아기부터 해서 시작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람이 전쟁하는 이유는 두 가지 요소 때문에, 이 세상에 전쟁이 있어요. 그것도 무수한 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은 딱 두 가지 이유인데, 첫 번째는 자원이 부족해서 전쟁을 일으켜요. 고려 때 주몽, 주몽이라는 드라마도 나왔죠. 그리고 우리나라에 거대 역사극, 역사극을 쭉 보면, 전쟁이 일어나야 드라마가 재미있으니, 싸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임진왜란은 일본과 한국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이순신이 함께 싸우죠. 그 싸움은 도대체 왜 싸우냐는 겁니다. 주몽 때 싸웠던 그 고구려의 전쟁은 소금 때문에 싸워요. 인간이 옛날부터 귀하게 여겼던 물질이 소금이었습니다. 소금 그리고 철광석과 같은 이런 자원의 문제 때문에 계속 싸웠던 겁니다. 그래서 전쟁은 왜 하는가? 자원 때문에, 히토류[전자, 자동차, 항공우주, 국방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필수적인 원료로 사용되는 자원] 때문에 싸우고 석유 때문에 싸운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미국이 후티 반군을 왜 쳤느냐. 그 자원을 제대로 수송하려고 하는데, 방해하니까 전쟁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럼, 자원이 풍부하고 넉넉한데 왜 전쟁하느냐. 두 번째가 있습니다. 명예 때문에 싸웁니다. 명예. 인간의 자존심 때문에 싸워요. 이게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형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이유는 자존심 상해서 죽인 거예요.
트럼프가 왜 그린란드나 파나마운하를 건드리느냐. 자원과 또 미국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안 싸우느냐. 자존심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안 싸우는 거예요. 북한은 왜 자꾸 싸움 준비하느냐. 김일성, 김정은 계보의 자존심 때문에, 그걸 가지고 국민들 현혹해서 쥐고 있는 겁니다.
이건 지금 국가를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개인은 어떻습니까? 개인은 왜 싸웁니까? 자존심 때문에 싸웁니다. 누가 차를 박으면 화가 나서, 나와서 싸우자고 하지요. 사이드미러 조금 부딪혔는데, ‘아이고 모가지야’라고 목 잡고 내리잖아요. 자존심으로 싸우는 거예요. 그러면 해결은 어떤가. 자원으로 해결합니다. ‘십만 원 내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싸움은 다 자원과 명예 싸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간에 유산 싸움한다. 왜? 자원 때문에 싸우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뭘 위해서 싸우는 거죠?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 언약 자체가 갖고 있는 그 가치를 위해서 싸우라고 이스라엘을 남겨뒀는데, 이스라엘 말고 다른 민족들은 뭐냐. 자원과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는 나라예요. 그 나라와 이스라엘이 붙습니다.
붙을 때 나중에 이스라엘이 한결같이 언약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위해서 싸우면 될 텐데, 그들이 도중에 그 자존심을 포기를 했어요. 포기를 했다는 것은, 언약을 버렸습니다. 언약을 버리고 그들고 마찬가지로, 이 약속의 땅은 우리 땅이라는 자원확보, 자기의 명예심, 자존심 때문에 버티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에요. 무슨 축복이냐. ‘아, 하나님 말씀이 살아있네’라고 되는 거죠.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가 시답잖게 여겨서 ‘뭐, 지키나 안 지키나 그게 무슨 관계가 있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구나. 하나님이여, 저는 망가져도 괜찮은데, 하나님의 말씀이 저의 욕망보다 더 앞장선 강한 주님의 의지고 욕망이라고 나타난다면, 그걸로 족합니다’라는 고백이 있어 줘야 해요.
내 가진 자원, 돈이죠, 그리고 내 팔자는 자존심이죠, 이런 거 다 망한다고 할지라도 주의 말씀만 살아있다면 그걸로 저는 인생 성공으로 보겠습니다. 제 역할 제대로 한 걸로 여기고, 주께 감사한다고, 이렇게 나와야죠. 표정들을 보니까, 전부 다 그렇게 할 마음이 되어 있는 거 같아요. 마음이 되어 있다는 건 말로 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제가 예를 들어볼 테니 마음이 되어 있는지 아닌지, 여러분이 이 말씀을 가지고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잠언서 13장 24절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 언약을 위해서 여러분은 뭘 해야 합니까? 자식을 초달(회초리)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미워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거예요. 방금 우리는 마음속으로 각오했습니다. 내가 망하더라도 주의 말씀만 나를 통해서 나타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가졌는데,
주님께서는 “그래? 그럼 말씀 하나 줘봐?”라고 하시면, 우리는 ‘주세요. 자신 있게 받겠습니다’라고 하지요. 그러면 “네 자식이 잘못했을 때, 가차 없이 회초리 들어서 때려라”라고 너의 자식을 때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거예요. 그런데 잠언서 13장 24절이 왜 나오느냐 하면요, 인간치고 남은 거리 가다가 시비붙고, 다투고, 욕하고 해도, ‘내 명예를 더럽혔다. 네 명예를 더럽혔다’라고 하며 싸우지만, 아무리 남과 싸워도 결국 부모는 자식과는 못 싸웁니다.
그걸 주께서는 다 아시고, 이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남에게는 죽일까, 살릴까 달려들면서, 네 자식이 잘못했을 때, 네 자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했을 때, 너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든 적이 있느냐는 말이죠. 왜 그렇게 자식에게는 관대하고 어질고 정이 많은지. 정인지, 아니면 방치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식에게는 그렇게 약하디약한 모습을 보이는 겁니까?
그것은, 자식은 나의 연장이고 분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약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모조리 다 거짓말입니다. 나에 대한 명예를 내가 버린다는 말은 괜히 헛소리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의 명예 가치를, 심지어 돈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 오기로 버팁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어떤 조치를 하느냐.
시드기야처럼 완전히 망해버리고 맙니다. 시드기야는 왜 이 사람이 망했느냐 하면, 그 당시에 바벨론 쳐들어왔을 때,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이 말렸어요. ‘항복하세요. 항복하는 것이 사는 겁니다’라고 하니까, 버틴 거예요. 버틴 이유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꼴에, 제가 하나님의 택한 나라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건 육적인 언약이죠, 다윗 가문의 혈통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신다는 거죠. 이게 명예심입니까, 아니면 자기 공명심입니까. 이건 자기 공명심이고 명예심이에요. 겉으로야 그렇죠.
그러나 속으로는 바벨론이 쳐들어왔을 때, 바벨론이 갑자기 강해져서 쳐들어오는 거 같은데, 그 당시 쳐들어올 때, 바벨론이 어떤 상태였느냐 하면, 그다지 주변의 나라를 정복할 만한 힘이 없는 걸로, 그렇게 주변에 정치 상황이 알려져 있었어요. 바벨론이 있던 자리가 옛날 앗수르가 있던 자리인데, 앗수르는 대단히 셌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그렇게 센 나라로 성장할 줄을 주변 나라들은 외교상으로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뭐가 형성되었느냐 하면, 바벨론이 강해서 우리나라를 칠 수 있다고 할 때, 다른 나라가 연맹을 맺으면, 다시 단합하되, 그 우두머리가 애굽 나라인데, 그 나라가 ‘어이, 동지들, 친구들, 저 바벨론 겁먹지 마. 내가 나서서 바벨론을 이길 수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편, 애굽 편들어. 바벨론 편들지 말고 내 편 들면 내가 알아서 지켜줄게’라는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머물지 않아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게 다잖아요. 눈에 보이는 정치 상황을 해석하면서, 기본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버티면 예전처럼 내가 건사할 수 있느냐. 오로지 그 한 가지뿐이에요. 언약? 말씀? 십자가? 복음?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 복음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기쁜 소식이거든요.
기쁜 소식의 토대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유월절에서 나왔어요. “유월절에 양의 살을 먹고, 양의 피를 발라라. 그러면 산다”라는 이게 바로 언약의 핵심이고, 복음의 내용이에요.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했을 때, 죽었다는 그걸 인정할 때, ‘내가 이 땅에 살 가치는 없어. 어제부로 죽어도 우리는 상관없어. 언제 죽어도 소용없고 가치 없어. 명예? 자원? 필요없어. 나는 이미 죽었어’라고 할 때 뭐가 보이느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왜 기쁜 소식이냐면, 내가 자식 잘 키운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 쪽에서 뭔가 만들어낼 수 없는데, 어떤 소식이 들려오는데, 내 쪽 말고, 저쪽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란 말이죠. 그러면 과감하게 내 쪽 버리고, 내 쪽 위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들려오는 소식, 복음 위주로 살아가겠다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복음의 정신을 버린 거예요. 스스로 살려고 한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가 있어야 하겠지요? ‘형편은 이렇다. 해봐야 못 이긴다’라고. 시드기야는 애굽 믿고 까불다가, 눈도 뽑히고요, 자식 둘 다 죽고, 마지막은 장님이 된 채 바벨론에 가서 경건히, 별 탈 없이 마지막에 죽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네 끝은 편안하게 죽을 것이다. 어느 정도냐. ‘네 선조와는 달리 죽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선조가 어떤 선조냐. 여호야긴, 여호야김, 이들 작살났어요. 애굽을 의지했던 선조보다는 너희들이 낫지 아니하냐. 우리 보기엔 시드기야도 처참한데, 덜 처참하게 인생 마감하게 해준다는 거죠. 주께서 시드기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신 겁니다.
결국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왜 내 말을 안 들어. 망한다고 했잖아”라고 하신 거죠. 그러면 주님의 조치가 뭐냐. 시편 27편 1~4절에 보면, 원래부터 하나님이 주신 언약은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 구절 읽고 나면 여러분은 생각이 들지요. ‘이 인간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냐’라고.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그러니까 뒤가 궁금해지지요. 편안한 이유는? 그 이유는? 4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보세요. 목적이 다르지요. 목적이 다르잖아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목적이 다를까요. 우리나라가 북한에 잡힌다? 걱정 안 해요. 내가 갈 곳은 이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늘나라이기 때문이죠. 걱정을 안 해요.
왜 걱정을 안 하느냐. 이거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왜 걱정을 안 하고, 왜 하늘나라 가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 잠언서 15장 11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다시 한번 읽으면,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가는 곳이 음부입니다.
죽은 자들이 모인 곳이 음부예요. 이생이 아니고 저승인데, 그 저승(생)이 누구에게 노출된다고요? 누가 모집한다고요? 여호와 앞에 환히 다 드러난다고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언약은, 말씀은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사느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죽고 난 후에 죽은 자들이 모여있을 때도, 효과 있게, 능력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먹혀들어 간다는 겁니다. 언제? 죽고 난 뒤에도.
그러니까 너는 뭘 생각하느냐. 내가 살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내 손발 다 묶였을 때, 그때 하나님을 위해서 네가 어떻게 살 건가를 생각해 봐라. 그때 그 기쁜 소식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뭐 재주 있고, 남에게 큰소리치고, 이렇게는 복음이 안 들어오고 먹히질 않아요. 두 손 다 묶이고 뭐 할 게 없어. 이미 죽었어. 죽었는데, 내가 바라는 것은? 전쟁? 안 무서워! 실패? 안 무서워! 성공?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럼 뭔데?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 하는 것이다. 이게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아셔야 합니다. 살아있으니까 자식 챙기고, 뭐 챙기고, 손자 손녀 챙기고, 다 챙기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이야기를 쭉 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있어야 하느냐.
내가 죽었다고 쳤을 때, 죽었다고 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었을 때, 여기 시편에 나온 말씀처럼, 진짜 나의 한 가지 소원, 시편 27편 말씀처럼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그것이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복음만 있으면 족하다는 주님 언약의 역할이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나의 육신에 가리지 않고 발휘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주님 앞에 늘 내어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상 사람들, 그중 하나가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그토록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어도, 또 남에게 기죽지 않고 남에게 으스대는 쓸데없는 전쟁에 몰입하고 있지 않은지. 죽었다고 치고 우리 소원을 확정시키신 주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