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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시스템

아빠와 함께 2025. 4. 6. 21:27

목자 시스템 

2024년 2월 7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4-10

(11: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11:5)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11:6)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11: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새
(11: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11: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1: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유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만 가혹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 인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축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로 나타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기르시는 양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니다.

당연히 그 외의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복에서 배제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목자로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의 운명을 확정짓는 시스템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이 ‘양과 목자’ 관계는 이스라엘이 멸망 이후에 모든 이방나라까지 확장됩니다. 바로 이 원리를 미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담아두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나라는 여호와의 양이 아닌 입장에서 그들은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갈까요? 그것은 바로 자율성에 입각한 자립형 인간성을 추구합니다. 즉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알아서 헤쳐나가겠다는 겁니다. 사람이란 이런 자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결코 ‘누구의 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양’이라고 지칭되려면 필히 목자에게 철저하게 종속되는 자라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계 14: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바로 이방인들은 이런 식으로 어린양 되시는 주님에게 끌려다니는 존재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되는 시점에서 벌써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이방나라를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본인이 개척하고 싶은 겁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들이닥칠 위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그저 막연히 희망만 창작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위험이 오는지 미리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자기 결정권을 일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저 양에 불과합니다. 즉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형편’에서 삽니다. 열심히 살아봤자 결국 소용없고 헛수고에 불과한 인생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에게 당부했습니다. 양에게 들이닥칠 위험에 대해서 목자가 미리 알아서 양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목자들은 도리어 양들을 노략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3-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선한 목자를 보내셨습니다. 선한 목자만이 참된 양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는 양들은 반드시 악한 목자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목자라면 양에게 들이닥칠 위험을 목자 자신에게 가져와서 자기 선에서 처리해 버립니다. 이럴 경우에는 ‘인간 →양’이 되는 변화를 낳게 됩니다.

이 절차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두 개의 막대기로 보여줍니다. 하나는 ‘은총의 막대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연합의 막대기’입니다. 선한 목자가 오셔서 하실 일은 ‘은총의 막대기’부터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은총의 막대기가 두 조각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게 은혜받았다’는 말은 더는 인간이 인간임을 내세우면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목자를 찾아 따라다니는 양의 삶’ 방식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단독적인 사람이 아니라 목자와 더불어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면 더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주님께서는 ‘은총 끊어진’ 막대기의 상태를 십자가에 보여주십니다. 마가복음 14:27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선한 목자는 이 세상에서 양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식으로 절차를 밟아나가십니다.

모두들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여기서 악한 목자들이 예수님에게 조치를 취합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목자계급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을 재판합니다. 하지만 참된 목자는 바로 거짓된 목자를 거짓된 목자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들 손에 죽게 되므로서 이 세상에 참된 목자도 없고 참된 양도 없음이 확연해졌습니다.

오늘 본문,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당시 전체 목자를 ‘세 목자’로 대변시키고 이들은 양들에게 들이닥칠 위험을 미리 알아서 자신에게 그 위함을 덮어셔야 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마음의 대상들입니다. 이들이 해야 될 일은 선한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 다 뒤집어쓰십니다. 바로 이 끊어짐의 현상이 십자가에게 울립니다. 곧 ‘저주의 죽음’입니다. 양이 되는 자에게 들이닥치는 최후의 위험스러운 상황은 하나님께서 버림받는 저주의 운명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홀로 그 길을 가시고 완성시키신 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두 말씀은 상호 큰 모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절망적인 바로 그 사태가 바로 완성이라는 겁니다. 은총 막대기가 끊어진 바로 그 상태가 연합 막대기의 본 내용이라는 겁니다. 목사의 세 가지 기능이 하나의 양을 살리게 됩니다. 왕과 제사장과 서기관입니다. 바로 이 세 기능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에 담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 모순된 절차는 양이 되는 모든 성도에게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6-37)

바로 ‘어찌할꼬’에 대한 주님의 해답이 “다 이루었다”입니다. 죄절이 곧 완성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더는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양의 삶을 살면서 목자만 졸졸 따라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립하려고 자기 몸만 챙기는 삶이 비- 현실적인 저주의 삶임을 늘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강-스가랴 11장 4-10절(목자 시스템) 2402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1장 4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아멘.

이 본문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양으로 간주하시고 여호와 자신을 목자로 간주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는 시편 23편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이스라엘의 끝부분에 와서 하나님께서, 목자가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양을 자기 양을 잡히게 만들고 구하지 않고 가련한 양으로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9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죽을 자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둔다는 말씀이죠. “망할 자는 망할대로” 전쟁일어나서 외국에서 침범해서 졸지에 망해버리는 자는 그냥 전쟁에 망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이스라엘 내부가 내란이 일어나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일이 있다.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이스라엘은 더이상 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모든 인류, 아담의 후손의 모든 인류의 운명을 하나의 시범으로, 샘플이죠, 하나의 시범으로 이스라엘의 운명과 그리고 나머지 모든 인류의 운명을 시범조로, 모델 케이스로 삼아서 여기 일어나는 일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인류의 역사를 그냥 밀어붙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이기 때문에 ‘뭐 우리나라하고는 별 상관이 없지 아니한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일어난 일 만이 다른 이방 나라가 전혀 알 수 없는 진실된 현실이에요. 지금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문제가 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해서 그들은 다른 나라의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다 포로 잡혀가고 나라 자체가 파괴되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우리 이방인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문제냐? 뭐 그거는 이스라엘하고 문제지, 우리하고는 관계없다. 우리는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을 할겁니다.

그런데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 하시는건 이거에요. 이 세상에 유일한 현실을 제대로 현실로 보여주는 것은 이 광경이고 이 장면이라는 겁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냥 양이에요. 음메, 음메하는 그 짐승, 양. 양으로 간주한다는 거에요. 양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인간의 그 자체적 자율성이 소용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싸대고 활동하고 뭔가 생각하고 문명을 일으켜봤자 그것은 혼자 애쓰는거고 그것으로 진정한 현실을 적립할 수 없다는 겁니다. 현실은 ‘누구든지 인간에서 양이되지 아니하면 멸망한다.’ 이게 현실이에요. 근데 보통 이방 나라에서는 뭐 양 되고싶은 사람 없다 이 말이죠. 양이라 하는 것은 특징이 뭐냐? 자율성이 없어요. 목자가 이리 끌면 끌려가고 저리 가면 저리 끌려가는 거에요.

이 이방인 사람들은 본인들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 인간이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그 근거가 뭐냐? ‘누구의 지시와 명령을 받지 않고 내 인생은 독자적으로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것’ 사람들은 이것을, 이방인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이야기해요. 현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은 뭐라고 하냐 하면, 그런 인간은, 그런 자립적인 자립형 인간형은 하나님에 의하면 저주받을 그러한 존재에 불과하고 우리가 아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에서 양이 될 때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자립적인 인간이라고 까불고 지 잘난 체 하다가 혼자 살지 아니하고 그리고 자기가 스스로 자립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도 아니다, 그걸 자각하게 된 그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인간에서 양이 되는 것. 이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을 이스라엘만 그들은 그러한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받으면 뭐합니까? 지금 자기가 양이라고 우겨도 주님이 양을 내쳐버리는데. 망하도록 이방 나라, 이방 민족에게 망하도록 내쳐버렸어요. 그걸 오늘 본문에 뭐냐? 7절에 보면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서글픈 양, 불쌍한 양, 애처로운 양,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목자로부터 버림받은 양. 그러니까 더이상 하나님의 양이라고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 왕으로 집단적인 왕으로 간주했는데 이제 와서 양을 내쳐버리면 양을 내치시는, 그것도 이방 민족에게 다 잡혀버리는, 여기 임금이 나오는데,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6절에 보면,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 이웃의 손이라 하는 것은 바로 바벨론, 이방 나라. 그 임금이라 하는 것은 바벨론 임금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나라 다 포로 잡혀가게 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뭐냐? 이겁니다. 양은 없었다. 양은 없었다. 이스라엘이 양이라고 해놓고, 그 이스라엘을 해체 시키니까 ‘양 같은 양은 애초부터 없었다’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이제 설명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만들 때 시스템이 목자 시스템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또 목자이시기도 하고 그 땅에 하나님을 대신해서 목자의 기능을 하는 자들을 두심으로써 그 하나님의 지시를 알고 있는 목자의 말을 따를 경우에만 그들은 양이 되고, 그때만 양이 되고 그 양이 될 때 하나님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의해서 하나님 백성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다 실패했다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마지막 모습이 그 실패한 모습을 여기에 확 펼쳐놓고 계십니다. 양 같은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그래서 양을 가련하게 내치는 것은 그거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까 제가 이스라엘이 목자 시스템이라고 해요. 목자를 통해서 가동되는 나라에요. 그 원인을 뭐로 찾느냐 하면 목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양이 가련한 양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목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양은 구차 없이 이방 나라한테 유린 되고 포로 잡혀가고 죽고, 망할 자는 망하고 죽을 자는 죽고 서로 망하고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결국 우리에게 이야기 하시고자 하는게 뭐냐하면 목자가 없이는 양이 없다는 원칙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유지하고 계시는 거에요.

이걸 만약에 하나님 모르는 이방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나 양 되기는 싫고 나에게 목자 달라고 했어? 나 목자도 싫고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거야. 아마 그럴거에요. 명절에 모여서, 경주에 모여서 하면 그 이야기 할거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형님이 돼서 고기 굽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에요. 왜? 나는 자율적 인간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니가 아무리 자율적인 그 행위와 의지가 너로하여금 너의 미래를 보장 못하는 너는 하나의 가련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거에요. 이방인이니까 양이라고 하지 맙시다. 그냥 기계에요, 기계. 아무것도 아닌 기계에요.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될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뭐가 하는 것이 바른 진리인지 아는 것은 전혀 없고 그냥 이상하게 작동되는 기계. 자율주행? 뭔가 움직이는데 의미가 없어요. 왜사는지도 몰라요 그냥. 명절날 모여서 고기 굽고 전 굽고 그러죠. 왜 이게 전을 구워야 되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스스로 자족하고 “뭐 이래 살아도 나는 행복하다.” 뭐 그거 하나 믿고 지금 하는데 이스라엘과 비교해보세요. 그거는 사람 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압니까? 진리를 압니까?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인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그 성경 말씀도 있는데, 진리고 의고 전혀 그들은 관심도 없고 ‘그딴 것 없어도 나는 인간으로 잘 버티고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지’ 하는 식이에요.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았어요. “하나님 저 인간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양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목자 시스템과 맞는 거에요. “그래? 그렇다면 제대로된 목자가 너를 백성 만들 것이다”하는 겁니다. 문제는 그 목자가 제대로 되지 아니하니까 양도 가련한 양으로서 다 팔려간 거에요. 그럼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제대로 온 목자는 엉터리 목자를 먼저 제시하고요 그 엉터리 목자와 제대로된 목자와 비교하는 가운데서 뭐가 등장하느냐? 진짜 양이 등장해요.

양은 없습니다. 왜? 목자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양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은 목자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양이 없다는 말은 제대로 된 목자가 온다면 제대로 된 양이 그제서야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숨겨놓은 원리 원칙을 오늘 본문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 소개하기 이전에 악한 목자부터 소개 되는거에요. 목자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니까요.

그러면 이 악한 목자가 뭐냐? 어떤 것이 악한 목자냐? ‘양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미리 알지 못하는 자가 악한 목자입니다. 아, 참 어렵죠. 양이라는 것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살면 그건 양 아니에요 그거는 마귀들린 인간이죠. “나는 내 식대로 산다.” 하지만 양은 뭐를 모르느냐 하면 자기에게 들이닥칠 위험, 마지막 위험, 종말의 위험을 본인은 모르지만 목자는 미리 알고 있어야 돼요.

목자가 알아서 양을 양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목자가 장차 올 위험을 대비를 해야 되는데, 에스겔 34장 2절에서 5절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나쁜 목자가 양을 등쳐먹는다는 것에만 주목하지 마시고 도대체 양이라는 것이 어떤 위태위태한 사태에 놓여있는가? 병들고 상하고 쫓기고 잃어버리고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게 양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는 우리 양이라는 것이 왜 목자 없이는 안되는가? 목자 없이는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그것을 인식할 때 그게 양이에요.

그러니까 현실은 뭐냐? 이 세상의 현실은 제대로 된 목자가 이미 나타났으면 모든 현실의 진리는 끝났습니다. 목자 나타나고 양 나타나면, 제대로 된 목자, 제대로 된 양 나타나면 현실은, 더는 다른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 사는 게 힘든 것은 진리를 몰라서 그래요. 오늘 이 본문에 그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뭐냐? 목자 시스템, 그게 진리에요. 그럼 우리는? “니는 양”. “왜요?” “니는 앞일을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목자가 다 알고 있잖아.” 목자가.

그럼 제대로 된 목자가 오면 되겠네요. 제대로 된 목자 오기 전에 먼저 엉터리 목자부터 보내서 이스라엘을 와해시켜 버립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께서 목자 언급하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되어있어요.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운 대목이에요.

왜냐하면 악한 목자 있고, 또 선한 목자가 따로 오면 우리는 선한 목자 따르면 되지 않겠느냐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게 어렵고 정말 흥미로운 진실은요, 악한 목자가 선한 목자를 죽여야 선한 목자가 죽어요. 그래서 악한 목자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양들은 선한 목자편에 서겠네요?” 이렇게 생각하죠. 모두 악한 목자 편에 섭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목자 혼자 죽고 양이라고 자처했던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스가랴 13장 7절에 보면,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 스스로 자기가 양이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자부했던 사람. 진짜 목자가 오니까 그들이 엄마야 하고 다 도망가 버렸어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거에요. 이 스가랴 말씀이 마가복음 14장 27절에 보면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했습니다. 14장 27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스가랴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양이라고 하지만 실은 이방화 다 되었어요. 자, 이방화 되었다는 말은 더이상 나는 누구의 양이기를 원치 않고 스스로 자립형, 자율적인 내 의지와 내 행위와 내 노력에 의해서 내 인생을 따로 꾸려나가는 것, 여기에 전부 물들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기 양들이지만 이미 이방화 되었으니까 “그래 좋다. 너희가 이방 나라한테 다 잡혀가거라.” 하고 이방 나라하고 같이 거기에 똑같이 더 강한 이방 나라한테 혼쭐나게 만들어버리죠.

지금 사태가 이런 지경에 있어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약속대로 하나님은 목자 되시고, 양의 목자 되시고 그 목자가 나타나면 이제 양이 되는데 그 양은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생성시키고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가? 이러한 지경에서 모든 인간들이 양 되기 싫어하고 스스로 이방인처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런 입장에서 천국 갈 양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렇다면 천국 갈 양은 어떻게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우리들이 한번 생각을 한번 해봐야 되겠죠.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아까 힌트를 드렸어요. 양은 위험을 모르면 목자를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들에게 위험을 줘요. 그래서 자립성, 자립형 또는 자율성 외치다가 나의 이 자율성인 것, 자립성인 것, 자립적인 것 그것이 전혀 다가오는 이 세상의 위험에 견딜 수 없고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 나라한테 다 망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절차에 대해서 7절에 나옵니다.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은총이라 하는 것은 은혜고 연락이라 하는 것은 연락하면 연락한다(소식을 주고받다) 그러한 뜻이 아니고 ‘연합한다’. 작대기 둘을 해서 은혜라는 작대기, 그리고 연합되는 작대기 두 개의 작대기를 준비해요. 이 두 개의 작대기는 어떤 존재하지 않는 양을 진짜 목자가 와서 없던 양을 어떻게 생산하고 만들어 내는가에 그 절차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 개의 막대기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시작을 뭐라고 하느냐, 은총이라는 막대기부터 시작해요. 그런데 그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 10절에 보면 여기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취하여 그걸 잘라버렸다” 이 말이죠.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은혜를 잘라버린거에요.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은혜가 끊어졌고 은혜가 잘라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원래 생각했던 현실이라는 게 목자 시스템 중심의 은혜로서 다스리고 은혜를 주시는 방식으로 현실을 이끌어왔다는 것을 새삼 생각나게 만드는거에요.

은총이라는 막대기가 잘라졌고 끊어져 버렸으니까 어떤 결과가 나올게 아닙니까? 그 결과가 뭐냐? 하나님의 양이라고 자처했던, 하나님의 은혜받은 백성이라고 했던 그들이 이방나라에 처참하게 죽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나머지는 피차 죽이고.”그렇게 엉망진창, 다시 말해서 ‘내가 있고 양이 있고 목자가 있다,’ 이스라엘이 있다고 했던 그 있음이 뭐로 바뀌느냐? 없음으로 바뀌어버려요.

하나님의 목자 시스템, 목자 중심으로 양을 찾는 시스템이 그 전체가 뭐냐? 하나님의 은혜 주는 방식으로 목자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거에요. 은혜를 줄 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선물 간다. 많이 받아라.” 이게 아니고, 목자 시스템을 은혜로, 선물로 주는 거에요. 왜?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가 독자적인 사람이라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에서 양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현재 가장 인간의 처지를 확실하게 가장 분명하게 정확하게 보여주는 현재 인간의 처지를 정확하게 해주는 표현이 뭐냐? ‘양’이에요.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이사야 53장.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갈 바를 알지 못한다.” 성경에 나오니까 “아, 양은 갈 바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갈 바가 너무 많아요. 골라 먹는 재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는 갈 바를 모르는 게 아니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잘될까 하고 지금 고르는 재미가 있다고요.

고르는 재미. 시합과 경쟁하면서. 요렇게 요렇게 하게 되면 우리는 소기의 목적, 내가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김민재만 수비에 박아 넣었으면 요번에 결승이야.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가 양이 아니라는 거에요.

적어도 아시안 축구대회에서 우승해야 그게 하나님 은혜라고 했는데, 그 은혜를 중간에 분질러버린거에요. “니는 갈바를 몰라서. 요르단한테 2:0으로 질줄 몰랐지?” 갈바를 몰라서. 그걸 참사라고 해요. 아시안게임의 참사. “그게 지금 축구대회가 참사가 아니고 니가 참사야.” 니 인생 자체가 참사에요. 설날 모여서 전 굽는게 이게 참사에요. 도대체 자기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고 지금 현실이 뭔지를 몰라요. 현실은 은혜로 유지하는데 그 은혜 유지 방식이 뭐냐? 형태가 뭐냐? 목자 시스템이에요. 목자 있고 그다음에 양 데려가고.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이게 현실이에요. 요한계시록 14장 4절.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사람들 가운데서 목자를 따라가는 너무나 양이 되었다는 그 기쁨 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고 누구의 목자의 양이라는 그 희열. 그것만이 진리다 정도가 아니고 그것만이 현실이에요. 그게 진짜 내가 지금껏 몰랐던 내 위주의 인생을 살다 보니까 몰랐던 진짜 현실은 뭐냐? 졸졸 따라가는 거에요.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어린양이 어디로 가겠어요? 어린양이 천국 가 있죠. 졸졸 따라가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양, 목자는 뭐를 해야 되는가? 다가올 위험을, 양에게 다가올 위험을, 진짜 선한 목자는 목자 알아서 처리를 해야 될 책임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다시 보게 되면, 10장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서 이 말씀에서 전제하는 것은 양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거에요. 제자들 다 떠나버렸으니까. 양은 없어요. 목자만 있어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떠났는가? 죽기 싫어서. 주님과 함께 죽기 싫어서에요. 그러면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뭐냐? 죽는게 무서운게 가장 위험한 거에요. 그건 인간이 감당 못 해요. 인간의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인간이 감당 못 하는게 뭐냐? 자기 힘으로 죽음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들이닥칠 아버지의 저주와 아버지의 심판을 누가 대신해 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누가 그 위험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내가 선한목자이기 때문에 너희를 지켜줄게.” 그게 아니고. “내가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니가 죽어야 될 것 내가 죽어줄게.”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진짜 목자는 죽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은총 막대기가 끊어지는 거에요. 그 은총 막대기가 끊어질 때 십자가에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선한 목자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에요.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다음에 십자가에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게 얼마나 모순된 말씀이에요?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그 다음에 “다 이루었다”하시고 영원히 떠나신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요한복음 19장에. 어찌하여 자기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그 버림받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자의 목자됨을 성취 하신게 돼요. 버림받은게.

작대기가 두 갠데요. 하나의 작대기, 은총 작대기는 잘라져요. 하지만 나머지 하나, 연합이라는 작대기는 안 잘라져요. 이게 절차이기 때문에 그래요. 앞의 작대기가 잘라지고 그다음에 그 작대기 되신 뒤쪽은 잘라졌기 때문에 다시 합할 수 있는 근거가 목자, 선한 목자에게 그 권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의 목자는 뭐냐? 이것이 진짜 선한 목자가 해야 될게 뭐냐?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 기능입니다. 이게 하나의 양을 얻기 위해서 하나의 인간을 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목자 쪽에서 해야될 기능이 세 가지 있어요. 왕이고 선지자요 제사장 역할을 해야돼요. 이게 율법에서 계속 쭉 나오는 겁니다. 그걸 오늘 스가랴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8절에,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세 목자는 세 가지 타입의 목자, 그 많은 목자 가운데 왜 하필 3명을, 그걸 종합해서 세 목자라고 지칭하느냐? 목자가 목자 기능대로 안되니까 한 마리의 양도 못 건지는거에요.

그래서 이 세 명의 목자를 끊었다는 말은 이 세 명의 목자의 몫을 앞으로 선한 목자가 다 홀로 담당하신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한 달 동안 한다는 말은 신속하게 세 명의 목자 없애는데 한 달만 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세 명의 목자를 없앤다는 말은 기존의 모든 목자를 부정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목자 없으면 뭐도 없어진다? 양도 모조리 없어지는 거죠. 왜? 양은 목자 없이는 양이 없으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가? 목자 기능을 해야 돼요. 어떤 역할을. 이 목자 기능이 바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 해야 될 텐데 그들은 이름만 목자라 해놓고 양고기 뜯어 먹기 바쁜거에요.

명절날 햄 받고 가방 받고 양고기 뜯어 먹는, 그래서 유다에 이런말이 있어요. 유다서 1장 12절에 보면,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했어요. 자기 몸만 챙기는 목자. 아까 에스겔서 이야기 한것도 마찬가지지요. 왜 이제 와서 기존의 목자들을 부정하는가? 새로운 목자가 드디어 출몰하기 때문에 기존 목자와 교체해서 역사 속에 들어 가는겁니다.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현실의 축소판이에요. 이방인들은 현실을 몰라요.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19장 15절에서 이들이 왜 거짓 목자일 수밖에 없는가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9장 15절. 본디오 빌라도가 그 당시에 유다 지도자 목자에요. 유대 나라 종교 체제 자체가 목자있고 나머지 백성을 양으로 취급하는 그런 체제입니다. 그게 자기 율법에 맞다고 생각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 유대 나라의 지도자가 누굴 체포하는가? 예수님을 체포했지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선한 목자는 나쁜 목자한테 죽는 방식으로 죽어요.

예수님 스스로 자살하고 이런 것 없습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빌라도가 그 유대 자칭 목자들한테, “자, 보라. 너희 왕이다.” 너희 왕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하고 예수님하고 그전에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서 이야기한게 있어요. 18장 33절에서,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뭐라하는가 하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왕이냐 했어요, 왕. 이스라엘은 목자의 기능,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이렇게 분할되게 되어있습니다.

각자 왕은 왕이고 제사장은 제사장이고 선지자는 선자자이고 분할되어있어요. 그래서 예수님 보고 “니가 왕이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그렇다고 이야기해도 되고. 사람들이, 빌라도가 가로되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너는 유대인의 왕이지만 유대인들이 너를 왕으로 생각 안 하고 있으니 내가 뭘 하면 되느냐? 이렇게 하니까 36절에서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왕이라 하는 것은 이 나라가 아니고 다른 나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의 왕이라” 한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빌라도가 “네가 왕이냐” 물으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했어요. 이를 위해서 태어났으면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 하니까 빌라도가 그 지도자에게 너희 왕이라 하니까 15절에 유대인들이 드디어 시위를 합니다. “없이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하고 다짐을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하고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했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게 절묘하냐 하면요. 선한 목자는 반드시 어떤 교체가 일어나는데 저쪽에 악한 목자들의 그들의 기능. 자기가 목자라고 우기면서 하는 그 기능에 의해서 철저하게 부정당할 때 그런 모습으로 선한 목자가 오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양은 없어요.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습니다. 양이. 그럼 양이 없는데 여기 요한계시록에 어린양을 따르는 사람은 어찌 된 일이냐? 바로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하는 대목인데, 2장 36절에 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진짜 선한 목자, 진짜 목자가 되게 하셨다 할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 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냐하면 하나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했는데 그 결과가 그걸 그대로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면 “다 이루었다”가 되는거에요. 그렇다면 양이 될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어찌할꼬” 하면서 그다음에 베드로가 준비한 것은 그러니까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니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라고 했어요. 성령을 선물로. 바로 이것이 현실을 압축, 현실이 십자가 안에 압축된 양식이에요. 현재 이 세상에 속한 나라, 이 세상에 속한 나라에서 하늘나라 갈려면 절차가 뭐냐 하면 “어찌할꼬, 다 이루었다”가 되어야 돼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이루었다.” 그 절차따라 가는거에요.

이게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양이 될 수 없고 우리는 저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다음에 거기서 뭐냐? 다 이루었다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진짜 현실 속에 하나님의 양이 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이것 외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현실은 모순으로 오는 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망이죠? 큰 절망이죠. 그런데 그 절망 자체, 좌절이 곧 완성이고 그게 바로 은총이고 그게 연합이에요. 다시 은총이, 부러진 은총이 이어지는 게 연합이에요.

작대기 두 개니까. 우리 자신이 작살나야 돼요. 우리 인간 됨됨이, 자율적인간 작살나고 부러진걸 성령이 와서 세례로서 같이 붙여버리면 우리가 바로 다시 내가 되는게 아니라 바로 양이 되어서 목자만 졸졸 따라다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말씀처럼.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서 신랑 되시는 분을 따라가는 거에요. 이것이 우리의 단순한 희망 사항이 아니고 이것만이 감추어진 진짜 현실입니다. 그것 외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계획 하나님의 그 은총이 목자 시스템을 통해서 가동됨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모순되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양이 될 수 없음을 새삼 느끼면서 이미 양이 된 이 기쁨을 세상에 어떤 기쁨과 바꾸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