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진 하나님
2025년 3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4:17-22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34:18)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34:19)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백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34:20)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34:21)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34:2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단히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쪼개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쪼개짐’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해하는 신이란 자신의 멀쩡함과 우수함을 확인해주고 격려해지고 칭찬해주는 그런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우상을 선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은 ‘쪼개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멀쩡한 것처럼 하나님도 멀쩡하기를 원합니다. 건강하고 우수하고 온전한 존재끼리 서로 통하게 있다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135:16-18에 보면, “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굳이 우상의 눈과 귀가 코와 입이 살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눈과 코와 귀와 입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당되기 때문입니다. 즉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신을 만들어 믿는 인간 자신에게 있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신이란 인간에게 있어 자기 내면을 투영해서 상상의 대상입니다.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같다’는 말은 인간이 곧 자신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송아지를 갈라놓고 그 가운데로 들어서라는 겁니다. 쪼갠다는 것은 그 안에 틈을 마련하는 것이고 그 틈에서 비로소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겁니다. 즉 쪼개지지 아니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사랑이란 대상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에 것에 묶여 살던 자는 그 새로움에 기꺼이 굴복하게 됩니다. 이전에 내가 몰랐던 바가 상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신을 섬기는 모든 인간들의 자연적인 자세요 태도입니다.
하지만 제물이 쪼개지고 그 쪼개진 사이, 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자는 것은 신을 섬기는 그 인간도 쪼개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쪼개짐이 없이는 참 하나님과 만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런 사례가 구약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 4:5-9에 보면,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자칭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고 자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이기에 자신의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생각을 변경시켰습니다. 이 변경에 의해서 요나의 본심이 여지없이 들통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가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마음을 자신이 쪼개지 못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사용하십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역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시공간을 통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성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쪼개지므로서 이 세상의 모든 시공간을 통해서 예수님만을 솟구치게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의 현실만이 참된 현실임을 알리십니다.
요나는 이점을 몰랐습니다. 그가 진정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시면서 필히 자신의 쪼개짐이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나의 자리에서 ‘송아지 사이와 틈’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사례를 들면 이러합니다.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 1:23-26)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알고 계시는 맛디아를 바로 지정하지 아니하시고 ‘제비뽑기’를 위해 다른 후보자를 세우시는 겁니까? 이것은 그 어떤 인간의 판단과 결정과 선택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움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속이 깨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여기에 관해서 보편적인 원칙이 세워집니다.
하갈은 잉태했고, 이스마엘은 태어났습니다.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보입니다. 하갈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본인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낄까요? “너는 왜 잉태했고 너는 왜 해산하면서 배가 아파했는가?”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있기 위해 필히 잉태해서 해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26-28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왜 너는 사라처럼 잉태치 못했느냐”고 하갈보고 따진다면 하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처구니 없이 느낄 겁니다. ‘잉태치 못했기에 비로소 약속의 자녀’라는 겁니다. 이는 쪼개지지 않는 인간에 의해서 가리워진 실제 현실을 ‘잉태치 못하고 태어난 자’로 인하여 다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모든 선택권을 앗아가서 일방적으로 결정하신 하나님은 나의 쪼개짐을 유도하고 그 현장에 조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전히 몰랐던 주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날마다 우리 자신이 쪼개져서 나를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8강-예레미야 34장 17~22절(쪼개진 하나님)2503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4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110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일련의 조치를 취하시는데, 이 조치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18절에 보면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라는 이 하나님의 초점을 모으고, 이것만 하나님께서 계속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흔히 교회 나온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굉장히 궁금해하면서, 목사나, 집사를 만나서 묻는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송아지를 쪼개고 그 둘 사이’라는 이게 뜻이에요. 송아지 쪼개고 둘 사이에서 만나자! 나는 너를 만나고 싶은데, 쪼개는 것이 있어 줘야 만날 수 있다는 겁니다. 송아지를 쪼갠다는 것은, ‘나는 너를 쪼갤 거야’라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주님은 우리를 쪼개기를 원합니다. 쪼개야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마귀가 들었는지, 성령이 들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쪼개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현재 쪼개기 전의 나를 그대로 천국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오기(傲氣)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잘할게요. 잘 살게요. 성실하게 말씀 지킬게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잖아요’라고 하면 하나님이, “아닌데. 그게 뜻이 아닌데. 나는 네가 쪼개지기를 원해”라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이 쪼개짐에 대해서 먼저 쪼개진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들은 지킬 수가 없는 언약입니다. 왜냐 하면 쪼개짐이 없이는 율법 하나도 못 지켜요. 쪼개짐이 없이 율법을 지킬 때, 그들은 결국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어있습니다. 이건 완벽한 구조예요. 하나님이 철두철미하게 배치된 구조에서, 빈틈을 보이지 않습니다.
“쪼개지 아니하면, 나랑 만날 일 없다. 그런데 너희는 쪼개기를 싫어한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과 안 만난다. 너희들은 뭘 섬겼느냐 하면, 쪼개짐이 없는 신을 찾는다. 그게 바로 우상이다”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신이 저기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하는데,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통해서 쪼개지기를 원하고, 진짜 우상은 내가 원하는 신, 내가 선택한 신은 내가 전혀 안 쪼개지고 이 자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임을 구약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쪼개지면 싫어요. 참 싫은데, 주께서 일하는 것이 그거예요. 너희가 쪼개지게 되면 비로소 안정적인 상태를 맛보게 될 것이다. 쪼개질 때 안정적인 상태, 이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안정적인 상태, 천국이죠, 천국은 우리가 쪼개지지 않은 상태 때문에, 그게 가려진 거예요. 천국이 보이질 않는 겁니다. 물론 인간 나름의 천국과 지옥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만, 그런 아이디어는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쪼개지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던 그런 사례가 있어요. 그게 요나 4장 8절에 나옵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경우냐 하면, 요나가 삐져서 하나님께 막 대들었어요.
하나님 앞에 대든다는 말은, 내 속에 미운 사람이 있다는 뜻이죠. 내 속에 미운 사람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안 깨졌다는 징후입니다. ‘저 인간 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요구하는 인간이 있다면, ‘너는 죽어라. 나는 안 죽으련다’라는 다른 우회적 표현입니다. ‘너는 박살 나고, 나는 멀쩡해야 한다’라는 거죠. 그 멀쩡한 신이 바로 가짜 신이잖아요.
우상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시편 135편 17~18절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우상을 만들 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귀, 눈, 코,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신을 믿는 나에게 귀가 있고 눈이 있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신이 꼭 눈과 귀가 있어야 해요? 내 눈, 내 귀, 내 코가 더 예민한데요. 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죠. 왜? 나는 쪼개지기 싫으니까. 그런데 그 우상을 만든다는 뜻은 이런 뜻입니다. 내 속 내면에 있는 나의 의식이 바깥으로 이미지화된 게 신이에요. 내 속에 있는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바깥으로 들어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내 마음이 투영된, 내가 원하는 신이 됩니다.
뭐, 명칭이야, 하나님, 십자가, 예수님, 성령님, 다 붙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진짜 하나님은 쪼개진 상태에서 그 쪼개짐이 ‘이제는 너의 차례야’라고 하면서,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다는 겁니다. “내가 율법에 의해서 쪼개졌거든! 이제는 네가 쪼개질 차례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라고 하시며 쳐들어오는 겁니다.
쪼개지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그걸 쪼개느냐. 쪼개짐의 끝에 비로소 복음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쪼개지지 않으면 아버지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천국 보좌를 설명하면서, 그냥 예수님의 보좌라고 하지 않아요. 반드시 어린양의 보좌라고 되어 있어요.(계7:9~10) 어린양이 뭐냐 하면, 쪼개지는 대상이 어린양이에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사랑이 뭐냐 하면, 사랑은 그 사람 속에 내가 모르는 새로운 가치가 발견될 때, 그걸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모르는 새로운 가치가 발견될 때. 왜 이게 사랑이 되느냐 하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가치가 상대에게서 비치게 되면, 그 순간 나를, 나의 가치를 내가 삭제시킬 수가 있어요. 사람이 사는 게 제일 힘든 것은, 내가 삭제되지 않아서 제일 힘들어요.
그래서 삭제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을 입고, 사랑을 받게 되면, 나는 기꺼이, 미련 없이, 나에 대해서 제거가 됩니다. 그대 앞에 나는 작아져도 괜찮아요. 사랑이 오게 되면.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가 느즈막이 사는 보람이 뭐냐 하면, 손자 보는 거예요. 물론 손자가 집에 있으면 곤란하다만은, 손자가 집에 있으면 진짜 쪼개질 수가 있어요.
가끔 아이들이 집에 오면, 며느리 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손자 손녀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늙었다는 것을 잊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 이제 끝났어. 나는 쓰레기야’라는 이 쓰레기를 잊을 수 있는 거,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손자 손녀들의 존재가 나를 대신할 때, 우리는 ‘아, 내가 더 살아야지. 얘들아, 용돈 줄까? 얼마? 천원? 알았어, 알았어. 오만 원 줄게’라고 기꺼이 그 큰돈, 오만 원을 기꺼이 내놔도 그것이 기분 좋은 이유는,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그냥 왔을 때, 제자들이나 그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못 알아봤어요. ‘저분은 이용 가치가 있다’라는 걸로 끝났어요. ‘저분은 이용 가치가 있어서, 병들었으면 기도하면 응답 되는 거야. 저분은 능력자야’라는 건 사랑이 아니죠. 왜? 그분 때문에 내가 안 쪼개졌으니까, 사랑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실컷 주님 배신하고, 저주하고, 고기 잡으러 갔을 때, 그때 주님이 다시 찾아옵니다. “너 나에게 뭐라고 했어?”라는 딱 그거죠. 제자는 ‘면목 없습니다’라고 하죠. “그래? 너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시니까, ‘저는 이제 이야기 안 할게요’라고 주님께 일임했습니다. 주님께 넘긴 거죠. ‘주께서 사랑하시는지를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왜? 찾아왔으니까’
못난 놈 찾아왔으니까. 인간도 아닌 거 찾아왔으니까. 배신한 자에게 찾아왔으니까.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미워하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미워할 수가 없다는 말은, 그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할 때, “네가 원치 않는 마지막 길을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죠. 이 대목에서 송아지를 쪼개고 그사이를 통과하게 되면, 결국 그 끝에는 갈라짐이 생기죠.
두 개로 쪼갰으니, 마지막은 갈라짐이 있죠. 그 갈라짐에 대해서, 그 갈라진 세계에 본인이 이미 쑥 들어간 거예요. 내가 안 갈라지면, ‘나 이거 하고 싶습니다. 나 저거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길로 가고 싶습니다. 더 살고 싶습니다. 지금 죽기 싫어요’라는 뭔가 내 결정 같은 것이 오롯이 내가 안 갈라졌으니까, 내가 고집을 부리게 되는데, 만약에 갈라져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주님께 일임이 됩니다.
일임하면, 거기 사도행전 1장에 보면, 가롯유다가 빠지고 난 뒤에 비어있는 열두 번째 제자에 대해서, 사도행전 1장에서 사도를 뽑습니다. 뽑을 때, 제비 뽑아서 맛디아를 얻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냥 ‘맛디아’라고 하면 돼요. 우리 생각에는 뭐 이렇게 제비 뽑을 필요 없이 주님께서 ‘맛디아가 제자다’라고 하시면, 우리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꼭 마지막에 갈라짐이 있어요.
두 사람을 딱 대놓고, 두 사람 속에 다른 제자들을 노출시킵니다. 그 상황에 그들을 몰아세워요. 그러면 이것은 사무엘이 다윗을 선택할 때와 똑같이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갈라짐을 통해서 내가 뭐를 결정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박탈되었음을 알려 주는 현장을 조성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하는데, 전혀 문제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내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그것이 나에게 문제다’라는 거 아닙니다. 이건 우상 섬기는 자들이 하는 거예요.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아직도 내가 안 갈라졌다는 뜻이에요. 지옥 보내 주면, 지옥 가는 거고, 천국 보내 주면 천국 가는 거죠. 이것이 로마서 9장 3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원함에서 나는 이미 주님의 원함으로 넘어섰다는 거예요. 주님이 먼저 갈라졌고, 그 갈라섬에 내가 쑥 들어갈 때, 나도 갈라진 채 그 현장에 들어오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내가 갈라진 채. 그러니까 매사가 주님의 선택이 되어 진 그 결과물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떻게 요약할 수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시공간이 있거든요. 인간의 시공간을 인간은 어떻게 의식하느냐 하면, 나를 위한 시공간으로 여깁니다. 3월 24일이 무슨 날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날은 제가 군에서 제대한 날이에요. 이건 다른 사람은 몰라요. 3월 24일 날, 눈 펑펑 올 때 제대했는데, 34개월 복무하고요, 그게 나에게는 아주 절실한 날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수십 년 뒤에 찾아가 봤어요. 그때 기분 드는가 싶어서 가보니, 개발되어서 엉망이 되었어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이 아는 역사가 있어요. 그 시공간은 그게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시공간 가게 되면, 여전히 자기는 안 쪼개지고 그 시공간이 자기 시공간으로 추억으로 계속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쪼개졌잖아요.
쪼개지고 자기 백성을 그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 모든 시공간에서 주님께서는 선택을 강요합니다. 너의 시공간이냐, 너의 추억이냐, 너의 기억이냐, 너의 자아냐, 아니면 이 시공간에서 불쑥 솟아나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팍! 솟구쳐 올라오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느껴지는 시공간이냐, 주님이 내가 있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이냐, 아니면 너의 추억이나 즐기는 시공간이냐를 우리에게 늘 묻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시공간에 끝은 무엇인가.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공간에 끝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 26절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 어머니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어머니라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를 다시 창조했던 기반이다. 모태가 된다는 겁니다.
아까 요나 이야기 계속해 보면, 요나가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요. 믿긴 믿는데, 자기가 안 쪼개진 상태에서 믿어요. 그러니까,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하나님과 우리와 서로 아는 사이 아닙니까? 뜻이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하나님 말씀 전하고, 나는 그대로 알아듣고 그것을 실시하는 선지자고, 그러면 되잖아요’라는 식이죠. 저는 감히 성령 받은 여러분들을 주님의 부 교역자로 여깁니다.
월급은 여러분 하시는 그걸로 그냥 때우고요, 저는 돈 없어요. 부 교역자가 뭐냐 하면, 주님과 요나와 똑같은 입장이에요. 이게 자꾸 삐지는 거예요. 교역자가 시키는 뜻이 무슨 뜻인 줄을 모르고, 자기가 안 깨진 상태에서 자꾸 예수님과 한패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 저와 한편 맞죠?’라고. 그런데, 이게 부 교역자 아닌 게 아니에요.
주님께 화내고 대든다고 주님께서 너는 내 사람 아니라고 쳐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요나를 겨냥해서 요나가 쪼개질 수 있는 시공간을 주께서 부 교역자 주변에 활성화시킵니다. ‘나 삐져서 나 죽을래요’라고 할 때, 주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성 사람들이 졸지에 변화된 것을 보여줘요. 여러분에게 잠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답변은 속으로 하시든지.
이런 경우가 많거든요. 내가 어릴 때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니고, 나쁜 짓 하다가, 사업해서 말아먹고, 병들어 말기 암 환자 되어서 이제 손들고 옵니다. 그 사람이 ‘이제 회개하고 주님을 찾습니다’라고 할 때, 과연 신자일까요? 참 중요한 문제예요. 하도 그런 간증들이 많아서. 집구석 망하고 나서 이제 탕자처럼 돌아왔습니다. 탕자도 질이 한두 종류가 아니니까요.
이걸 아셔야 해요. 세상 보고 낙담해서 예수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망해버린 내 상황을 보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격 자체를 보고 회개가 되어야 해요. 인격 자체를. 내가 주님 안 믿어서, 내 형편 박살 났으니까 이걸 만회하고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노림수를 가지고 있어요. 그 사람은 아직도 어머니가 엉뚱한 어머니예요.
아직까지 이게 쪼개지고 난 뒤에 비로소 진짜 내 소속이, 어머니는 소속이거든요, 소속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 소속은 주님의 쪼개짐에서 나오는 자녀가 될 때, 성령으로 새롭게 잉태한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보면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라고 했어요.
육체 자체를 주께서는 잉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잉태하신 것은 예수님의 언약을, 예수님을 잉태해 버리죠. 우리 몸에다가. 그러니, 우리가 안 쪼개지려고 해도, 주님이 먼저 쪼개졌기 때문에, 우리도 같이 쪼개져서, 언약 안을 통과하는 거예요. 오늘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우상 때문에 멸망해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고 옛날에는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지금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고, ‘송아지 쪼개진 그 사이에서 만나야지, 너는 엉뚱하게 왜 쪼개짐을 잊어버렸냐’라는 그 이야기를 한다고요.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오늘날 우리도 못 알아들어요.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만나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안에 주님이 임신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16장인데 그건 찾지 않겠습니다. 임신한 뒤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해산한 후에는 기쁨이 온다는 대목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갈라디아서 마지막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언약이 두 개예요. 이걸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일부러 갈라지게 해요. 갈라지게 하는데, 한쪽은 아이가 있어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있단 말이죠. 시작을 그것부터 한다고요. 하갈과 이스마엘 입장에서는요, 자기가 온전해요. 자기가 아무 문제 없어요. 그리고 하갈 같은 경우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단 말이죠.
이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이스마엘 생각하고 하갈 생각하면 뭐가 문제가 돼요? 문제는 문제 안 되는 걸 쪼개는 식으로 누구 쪽에서 만드는가. 하나님이 문제를 만들어버려요. 이스마엘보고 하는 말이, “너는 이삭이 아니잖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게 생뚱맞는 일이에요. 하갈보고 말하기를, “너는 아기 못 낳는 여자가 아니잖아”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기를 낳아도 문제예요.
“왜 너는 아기를 낳아? 잉태치 못해야지! 육신은 아무것도, 생명, 영생, 천국 갈 수 있는 아무것도 못 낳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는 인정할래?” ‘인정 못 합니다’ 그걸 인정하려면 육신을 부정해야 하거든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육신이 있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하면, 우리는 죄인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TV에서 어떤 사람은 극 중에 전과가 240범이랍니다. 이름이 고태산이라는 탤런트인데, 극 중에 전과 240범. 얼마나 악역을 많이 했는지. 사람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멀쩡할 줄 알고, 육신이 왜 쪼개져? 안 쪼개요. 안 쪼개고, 잉태치 못한 쪽으로 넘겨오면서, 새로운 어머니, 하늘의 예루살렘이 너의 어머니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어떻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는가를 알게 되는 사람, 그게 바로 쪼갬을 통해서 나타나는 언약의 생산물, 언약의 자녀라는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미리 예언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쪼개지지 않으면, 필히 거짓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있다는 이 원칙을 우리는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 육신 말고, 새롭게 만든, 복음으로 만든, 우리 자신을 두 개를 같이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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