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피
2025년 1월 2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1-4
(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뭘 주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냥 하늘에 가만계시고 땅에서 우리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가만계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망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자기 위주인가를 들추어내기 위함으로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말씀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앞장 세워서 인간들의 인간 관심을 삭제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안에 ‘죄 사함’요소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점에 대해서 대단히 하나님께 고마워했습니다. 죄가 생각나고 죄를 지었다 싶으면 율법대로 시행해서 죄사함 받아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 자체만 해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 과연 율법도 모형이요 본인 자체도 모형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겠습니까? 모릅니다.
왜 모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그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가는데 있어 이스라엘의 멸망이 필수적이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 악마가 심어준 심성, 즉 선과 악 사이에는 균형을 맞추고 조절하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악적 중심점은 새로운 상황이 오면 여지없이 다 무저져 버립니다. 경제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럽고 수입이 줄어드는 처지에서 그전에 약간은 넉넉했던 그 시절의 선과 악 사이의 균형감각은 아무짝도 소용없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남아공화국에서 주변 이민자들이나 못사는 현지민들이 폐광 구멍으로 내려가서 2km 아래에서 금쪼가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서 76명이 죽고, 300명 가까운 자들이 탈진상태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독가스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굶어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작업을 강요하고 식량과 식구를 바깥 세상에서 파는 것 5배를 강요하는 갱단 뿐이었습니다. 돈 안내고 갱도 밖 육지쪽으로 올라오면 총으로 쏴죽였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일상 생활에서 힘들게 살도록 강요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갱단을 누구지요? 그동안 자체적은 선악 지식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한 저주나 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요령을 부렸잖아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경제적 압박과 병마와 육신적 압박으로 인해 자꾸만 새로운 선악 사이의 균형점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즉 육신의 요령보다 더 센 갱단이 이 세상이 이미 가득 덮고 있었던 겁니다.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보지만, 자아만큼은 어떻게든 포기를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 20장에서 십계명 줄 때는 복과 저주가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하지만 신명기 28장에 오게 되면 복과 저주 사이의 간격이 도저히 건널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져있습니다. 더구나 신명기 32:15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운명에 운명을 단정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즉 선과 악 사이가 벌어져야 합니다. 벌어져야 그곳에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빈 터가 생겨납니다. 선과 악 사이를 어떻게 통제해보려는 모든 노력은 다 허사로 끝나고 가랑이가 찢어지듯이 찢어져 버려야 선과 악 사이가 연속되어 있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산인지가 드러납니다.
선과 악은 인간으로서 봉합되어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선과 악의 지식은 뭔가를 그 가운데서 감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냥 ‘죄’입니다. 인간은 ‘죄인’ 정도가 아닙니다. 오롯이 죄를 품고 삽니다. 바로 율법과 말씀은 인간들을 하여금 추락케 합니다.
말씀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백을 강요합니다. “너는 뭐냐?” “나는 난데요?” “이게 아직 멀었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율법 안을 수직적으로 관통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영광을 버리시고 추락의 바닥까지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죄’그 자체임이 드러납니다.
즉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죄의 자리에서 비로소 구심점은 결코 인간 본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냐? “주님은 ‘피’입니다.” 이게 바로 약속의 내용입니다. 레위기 1::5-7에 보면, “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와 피와 불의 만남, 이것만이 참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게하시라는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입니다. 그는 옆에서 엘리사 선지자하는 것을 다 보았고 선지자가 시킨대로 다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 옆에 있었던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나하만 장군의 문둥병이 그에게 임하게 됩니다.(왕하 5:27)
특히 열왕기하에 나오는 수넴 여인의 사건에 있어서도 역시 게하시의 한계가 나타납니다. 스승이 시킨대로 스승의 지팡이를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 위에 놓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아들 위에 두 번찍이나 자기 육신을 일치시키자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습니다.(왕하 4:34)
즉 엘리사는 죽은 자와 자기 육신과 일치시킵니다. 빌립보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의 복음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더는 우리 자신이 무의미해집니다. 이 무의미함이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큰 선물이요 자유가 됩니다. 죽고 사는 것도 자기 소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 계신 것을 확인케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1강-히브리서 10장 1-4절(죄의 피)250126-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1-4절입니다.
히브리서 10:1-4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여기 이 율법을 앞장세웠을 때 인간들 쪽에서 내세우는 “바르게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것은 율법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은 이런 것이다, 율법은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의도나 어떤 시도 같은 것은 율법 앞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율법의 완성, 그게 하나님의 관심사에요. 우리한테는 일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율법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만약에 율법에 관심이 없으면 나도 너한테 관심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죠.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에 제시하는 그 중간에 내세운 게 “율법은…”이에요. ‘너는 이렇다.’가 아니라 율법에서 너를 지워버려야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지워 버려야 돼요. 율법이 ‘있음’이지 ‘나 있음’은 율법 안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라고 하나님께 먼저 운을 뗄 때 어떤 자만 이 말씀을 받느냐?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이 율법을 제시할 때 굉장히 궁금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뭘 제시한다는 그 자체가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하는 자에게만 해당합니다.
‘그냥 하나님은 하늘에 가만 계시면 될 텐데 인간 세계에 왜 하나님은 뭘 건네주시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서는 인간들이 그냥 살면 그만이잖아요?’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율법은…” 이렇게 나오니까 “아, 율법! 그거 굉장히 궁금했었어요.” 하고 신경을 쓰고 율법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갖는다는 이 자체가 이건 정말 기적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더 없어져 가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에 관심을 가질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나도 살기 바쁜 데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왜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겠습니까?’ 하고 코웃음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이 세상을 그냥 밀어붙이죠. 포크레인처럼,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밀어붙인 그 결과가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한 것은 율법이 들이닥쳐서 그 나라를 아주 뭉게 버렸어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 나라 사람 본인들은 율법에 관심을 두었느냐?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하고 똑같아요. 그냥 자기들 밥 먹고 사는 데 관심을 뒀습니다. 그뿐이에요. 밥 먹고 사는 데 관심 있고, 자기 여생에 대해 관심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면서 하는 말이 “그거 봐. 너희들이 행해서 가진 것에는 관심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너희에게 준 것에 대해서는 봐, 너희들은 관심이 하나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 세상을 너희들 세상처럼 여기지만 아니야. 율법의 세계야. 내가 그거 증명해 줄까? 증명해 줄게. 율법으로 망해라.” 그래서 망해버린 겁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 율법을 통해서 제사장들이 죄 씻어 준다는 말에 대해서, 그 율법에 대해 호감을 가졌어요. 죄를 씻어 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으로 죄 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하나님한테 속은 겁니까, 아니면 본인이 율법에 대해서 곡해한 겁니까?
율법에 대해서 곡해했죠. 율법이 우리의 죄를 씻어 준다고 할 때 빠진 게 있어요. 그들이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 못 한 거예요. 그들에게 뺄 게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내 죄를 씻어 주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게 아니고, 내 죄를 들춰내기 위해 율법이 있다는 사실을 감히 그들은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내가 죄를 지으면 율법을 가지고 내 죄를 씻어 준다. 그 참 좋은 하나님이네.’ 해서 율법에 대해 잠시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사람들이 뭣도 모르고 교회에 오는 이유처럼. ‘교회 나오면 천국 보내주니까 얼마나 좋은 곳이냐. 교회 가자.’ 이래서 교회 나온 거예요.
그런데 교회 나오면서 뭘 포기를 못 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은 구원받겠다는 자기 자신의 여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계속해서 좋게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그래서 망하는 단체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씻겠다는 인간들 자체에, ‘내가 굳이 죄를 씻음 받고, 구원을 받아야 되는지 그 근거가 너 자신에게 있을 수가 없다’라는 거예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죄 씻음 받고, 그래서 깨끗한 몸으로 천국 간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뭐 마귀가 와서 인간을 속였지요.
하나님은 율법 중심이에요. 우리 인간 중심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마는 “율법 봐,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잖아. 그러니까 너 좋으라고 있는 거야.”라고 계속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리는 교회 나와서 또는 율법 앞에서, 말씀 앞에서 챙길 거 챙기고 이용할 거 이용하고 얻을 거 얻고 챙기면 나한테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분이 성경을 이렇게 봐요. 성경을 보길래 제가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서 “성경 왜 보십니까? 성경을 봐서 본인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보십니까?” 질문을 했죠. 답변 못합니다. 답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대목을 봐도 나 좋으라고 성경을 줬다는 주님의 뜻이 없어요.
성경은 우리를 제거하려고 준 거예요. 우리 자체를 제거하려고 준 겁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앞으로 여러분들 어떤 아저씨 만날 때 “아저씨!” 하지 마시고 “무의미씨!”라고 하세요. 어떤 아주머니 만나면 “아주머니!” 하지 말고 “무의미씨!”하고 불러야 돼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성경 앞에서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 앞에서 율법 앞에서 의미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율법을 준 것은, 성경을 준 건 ‘너의 진짜 의미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끊임없이 한평생 얼쩡거리면서 계속 장해가 되고, 방해를 놓고, 훼방 놓는 존재’라는 거예요, 인간이. 끊임없이 방해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나한테 어떤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또 이득 준다면 챙기면 그만이니까요,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내가 얻을 거 챙길 거 챙겼는데 굳이 평소에 성경책을 들출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을 못 한 거예요. “왜 성경을 보십니까?” 답변을 못한 거예요.
“안 봐도 되는데 심심해서 봅니다.” 기껏 “안 봐도 되는데 심심해서 봅니다.” 그 답변 외에 다른 답변은 나올 수가 없어요. 내가 멀쩡하면 그 자체로 나에게 이득인데 그다음에 뭐가 더 필요합니까? ‘나 자체가 멀쩡한데 나만 멀쩡하면 됐지 성경이 왜 아쉬워야 돼?’ 이 성경책이 왜 아쉬워야 됩니까? 어떤 연관성이 있어요? 몸 건강하고 밥 먹고 살면 됐지, 성경이 왜 필요해요? 그게 왜 필요한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이렇게 나오면 ‘나 안 들을래. 관심도 없는 걸 왜 들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초반에 율법이 관심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 살던 사람이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에 오면서 하나님이 선지자로 해서 조건을 붙여 놨어요. “율법 지키면 앞으로 잘될 거야.”라는 조건을 붙여놨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기적으로 제사 드리고, 정기적으로 율법 보면서 선지자 통해 율법해석을 들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 해 두 해지 가만히 보니까 율법 없이도 더 잘 사는 나라가 주변에 좍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뒤부터는 “우리는 선지자 제사장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가 사는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율법 없어도, 여호와 없어도 잘만 삽디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우리는 왕이 없는데 그들은 왕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여!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우리끼리 살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통령 주소서.”와 똑같은 말이에요. 서서히 결별 선언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결별 선언하고, 율법하고 결별 선언에 나선 겁니다. 그리고 결별 선언에 나서면서 죄 용서 한다는 제사 율법에 대해서는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거예요. ‘용서해 주시겠지.’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부정어가 한두 개 들어간 것이 아니고 굉장히 많이 들어가서 이 무슨 취지로 굳이 2절을 집어넣어야 했는지 성경을 한글로 읽어도 그 취지에 대해서 난감해요.
이게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이게 무슨 말이냐, 이게. 누가 관심이나 뒀어? 우리가 뭐 율법에 대해 관심이 있었느냐?’ 하는 말이죠.
율법 자체에 관심이 없는데 율법이 모형이고 모형 된 이유가 2절에 나온다는 거예요. 1절을 보고 나서 2절에 가서 성경 덮어버립니다. ‘나 안 보련다.’ 뭘 알아들어야 주고받는 대화가 성립이 되지. 못 알아듣는 이런 식의 대화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특히 2절에 “그렇지 아니하면” 그렇지 아니하면, 이 말은 율법을 줬는데 만약에 율법을 안 준다고 했을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1절, 2절에서 ‘율법은 모형이다. 율법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겠냐?’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지금 하나님 혼자서 지금 춤추고 있는 거예요. 아무도 답답한 사람 없어요. 인간들은 말씀에 대해 아무도 답답해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 혼자 답답해요. 혼자 스스로 논리를 만들어내고, 이 논리를 적용하면 이런 모순이 생기고 저 논리 적용하면 이런 모순이 생긴다고 혼자 독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요. 무슨 뜻이냐?
율법을 줬는데 한번의 죄 씻음으로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따라서 또 죄가 생각나면 제사장에게 제물을 바쳐서 제사 또 드려야 되고, 그래서 ‘이제 깨끗하게 됐다. 고맙습니다.’ 해놓고 집에 가서 또 죄지으면 또 그런 걸 되풀이, 반복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반복을 했으니 율법은 모형이라는 거예요. 온전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면, 아무도 하나님 일에 관심도 없는데 하나님 혼자 답답해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래요. ‘혹시 죄 생각나면요, 그 때 다시 하나님께 죄 용서 해달라고 교회 올 테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좀 내버려두세요. 하나님, 죄 용서해 주는 거 제가 고맙다고 하잖아요. 그건 고마운 거고 평소의 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뜻이에요. 우리의 마음입니다.
답답한 쪽은 하나님 쪽에서 답답한 거예요. 그리고 2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만약에, 만약에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만약에 율법이 모형이니까 모형은 제끼고 실체가 온다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다시는 죄를 깨달을 필요조차 없는 일, 깨달음이 필요치 않는 그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모형을 지나 실체가 올 때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야기를 2절까지 듣고는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것이 주제입니까, 아니면 죄가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입니까?’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그 점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한테 관심이 없어요. 우리를 지배하는 죄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거울 보면 비쳐요. 거울에 비치는 보이는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거울을 봐도 비치지 않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혼자 답답해하는 거예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전혀 답답하지 않아요. 율법도 관심 없고, 말씀도 관심 없어요. 육신, 육신 하나 멀쩡하면 그걸로 우리는 “오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등장시켜 놓고 ‘모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보다 더 센 게 오는데 그건 육신보다 더 센 게 네 안에서 너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추락 중이라는 거예요. 떨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떨어지는 이유가, 죄가 너희들을 아래쪽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도록 추락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인간 자체를 추락하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그렇게 추락을 할 때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추락되는 그 지점에서 인간은 없고 죄만 나와요. 인간은 죄의 모형이었던 겁니다. 인간 자체가 죄였던 거예요. 그래서 이 율법은 인간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겁니다. “너 뭐야? 너 뭐니? 너 이름이 뭐니?” “제 이름은 ○○인데요.” “아직 추락을 덜 했구나. 율법을 더 줘야 해. 말씀을 더 줘야 해.”
또 묻습니다, 말씀 앞에 내세우면서 “너는 누구야?”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저는 어느 고등학교 나왔고요…” “아직 멀었어. 너 아직 멀었어. 너 더 살아야 해. 더 살면서 죄를 더욱더 추가해야 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중국의 북경대학교라고 요즘 우리나라 같으면 서울 대학 출신, 북경대 석사 과정을 이수했던 여자 분이 취직을 했어요. 그 회사 사정이 어려웠는지 서류 정리하라고 취직 시켜놓고는 그래픽 디자인까지 맡기니까 힘들어서 못 견디고 나왔거든요. 나와서 다시 들어갈 일자리가 마땅치 않으니까 택배 회사에서 물품 선별하는 그 일을 했어요.
시급이 얼마냐? 10위안, 시간당 2,000원 받고 그거 하는 거예요. 또 중국에 어떤 사람은 이력서를 몇 군데 넣었냐 하면, 800군데를 넣었어요. 그런데 단 한 군데서도 연락이 안 와요. 도대체 누가, 누가 내 뜻을 위에서 억누르고 있는 겁니까? 이 세상 누가요?
헌재 한국에서는 지금 공무원 퇴직시한을 늘여 준다는 거예요. 늘리면 젊은 사람들이 취직할 자리가 모자라서 세대 간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투쟁이에요. 그런데 무엇을 위한 투쟁이죠?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요? 누가 우리의 삶을 위에서 억누르고 있느냔 말이죠. 누가? 누가 이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누르고 있느냔 말이죠.
이유는 없어요.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육신에서 모든 의미를 찾기 때문에 육신보다 더 센 걸 몰라요. 그러니까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어 죽는 거거든요. “왜 힘드십니까?” 몰라요. 그냥 힘들어요. 사는 게 그냥 힘들어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광산이 있습니다. 수지가 안 맞아서 폐광 처리했어요. 광산업자가 폐광 처리하면서 200군데나 뚫려 있는 그 구멍들을 좀 막아줘야 하는데 돈 아까워서 그냥 내뺐어요. 주변의 일자리 없는 사람들, 또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까지 와서 금 캐내겠다고 그 탄광의 구멍으로 들어가요.
그 구멍 길이가 수직으로 2km입니다. 2km 속까지 기어들어 가서 금을 캐내서 기어 올라와서 그걸 팔아먹고 하는데 얼마 전에 거기서 76명이 죽어 있었고, 276명이 구조됐답니다. 그들이 그 2km 밑에서 죽은 이유가 공기가 나빠서, 독한 가스 때문에 죽은 게 아니고 굶어 죽었어요. 왜냐하면 갱단이 불법 이민자들을 모집해서 시세보다 다섯 배나 비싸게 식수와 식량을 팔아먹으면서 돈 안 주고 그냥 바깥으로 나오면 위에서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2km 갱도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죽었어요.
이 세상 구조가 그 폐광 구조에요. 자꾸 살려고 기어오르면 위에서 갱단이 총 쏴서 죽여 버립니다. 그 보이지 않는 갱단이 누구죠? 눈에 보이는 갱단 말고 보이지 않게 나를 압박하는 갱단이 누구입니까? 그걸 인간들이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맹목적, 이유도 없이 그냥 밥 먹고 사는데 힘들어 죽겠어요, 갈수록. 몸은 아프죠, 생활비는 들죠, 대책도 없어요.
그게 바로 이방 민족인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은 관심이 없어요. 이스라엘도 율법 관심 없었습니다. 그냥 내 몸 하나 건사하면 오케이, 였어요. 그런데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계속 압박을 해오는데 거기서 버티고 버티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떤 아이디어를 생각했느냐?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 신명기 28장 또는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 나와요. 십계명이나 신명기 28장을 보면 네가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잘 먹고 잘산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그다음에 네가 말씀을 어기면 저주받는다, 그 대목을 생각해서 그들은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안 버리고 율법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애를 썼는데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선과 악 사이에 가랑이가 찢어지는 거예요. 이쪽으로 가면 저주받고, 반대로 이쪽으로 가면 복을 받기 때문에, 내가 복 받는 나가 되기 위해서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노력을 다해서 악에 몰리지 않고 선한 쪽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복을 타내려고, 배급 타는 것처럼 복을 타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애를 쓰고 있는데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선과 악 사이라는 그 사이에 끼어서 균형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수평적인 균형감. 선은 찾고 악은 멀리하고, 그러면 내가 살만한 가치 있는, 무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내가 된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우리 안에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죄였던 거예요. 그게 악마의 마음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악마의 마음 가지고 본인이 악마의 무기에서 탈출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선과 악의 균형은 인간이 맞출 수가 없어요. 율법을 가지고 선과 악 자체가 악이라는 것,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선과 악 바르게 살아서 복 받겠다고, 교회 나와서 복 받겠다고, 하나님 말씀 지켜서 복 받겠다는 그 생각 자체가 바닥으로 떨어져야 돼요,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떨어지게 하는 또 다른, 율법보다 더 센 것, 우리의 육신이 행할 수 있는 착함보다 더 센 것, 그 센 것을 주님께서는…, 율법은 모형이니까 백날 회개해도 또 죄 짓고 또 제사하러 와야 하니까 그것은 안 되고, 단번에 복음으로서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은 수평적 균형감이 아니고 수직적인 구심점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어요, 구심점.
위에서 아래로, 어떤 레벨에 있더라도 마음을 관통하는 구심점이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 구심점. 이번 수련회 때도 강의했습니다만, 정신병이라고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구심점이 없는 게 정신병이에요. 왜 그러냐? 인간의 구심점은 균형감각이에요. ‘이만큼 내가 선하면 됐다. 이 정도까지 안 망가졌으면 그걸로 난 위로받아.’ 이렇게 수평적인 선과 악 사이의 그 균형감을 우리는 중심이라고 보는데 이게 경제 상황 바뀌어버리면 다시 해체되어 버립니다.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내가 조금 전에 수입이 이 정도 됐을 때 ‘뭐 이 정도면 인생 선방했다.’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했던 그것이 더 내려가니까 정신이 완전히 혼란스러워지는 거예요. 그게 정신병이에요. 땜빵으로 평형감을 유지했는데 그 땜빵이 계속되는 모든 경제 상황에서 버틸 수가 없는 거예요.
멀쩡했던 이 마음이, 내 몸이 아프다? 추락을 합니다. ‘나 와이카노? 조금 전까지 건강했는데 와이카노? 내 이빨이 와 부서지노?’ 하는 것처럼 ‘내가 왜 이래?’ 점점 내려가는 거예요. 점점 내려가면서 인간이 고집 같은 게 있는데 아무리 내려가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안 봅니다. 내 쪽에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착하면 되지, 뭐.’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쁜 짓 안 하면 되잖아.’ 선과 악의 균형감각으로 버틸 대로 한번 버텨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게 모형이야. 너 자체가 모형이야. 인간 자체가 모형이야.’라고 자백을 강요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자백을 강요해요.
“너 뭐야?” “전 납니다.” “아직 멀었어. 너 아직도 멀었어. 너 뭐야?” “전 전데요?” “아직도 네가 무의미한 줄 몰라? 더 추락해야 해. 너는 뭐야?” “죄입니다.” “진작 이야기하지. 그러면 나 뭐지?” “피입니다.” 죄와 피의 만남이에요. 이게 바로 모든 말씀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동안 나라는 것이 정신병자이면서도 끝까지 정신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나는 내가 지킨다고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는 것, 그러면서 계속 추락하고 자기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이 정도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 저 섭섭하게 하지 마세요. 나름 애썼습니다. 애쓰고 있습니다. 더는 못 합니다. 힘듭니다, 저도!” 주께서는, “아직도 네가 있구나. 아직도 너라는 게 살아있구나.”
성경의 빌립보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성경을 이렇게 펼치기가 두렵지 않습니까? 성경을 펼쳤는데 우연히 빌립보서 1장 21절이 눈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가 딱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뭐가 돼요? 신앙인이요? 개코입니다. 뭐가 신앙인데요? 무엇이 신앙인데요? 주님께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주께서 일부러 만들어내는 상황에 적합한 요소가 신앙이에요. 주님께서 이 세상을 모조리 무의미로 불바다 시키는 그 상황에 딱 적합한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신앙은 우리 내부에서 나를 무의미하게 규정하는 그것이 신앙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그것이 신앙이에요. 최후의 모습을 보자, 이거에요. 주님은 지금 혼자 바빠요. 율법 줬다가 십자가 줬다가 혼자 바빠요.
“너 율법 줘도 매일 오잖아. 이제 십자가 주면 그럴 필요 없어. 왜? 네 안에 사는 것이 나기 때문에.” 죄라는 껍데기 안에 사는 것은 피기 때문에 그래요, 피! 죄로 살기 때문에 죄지으면 되잖아요. 그걸 왜 안 지으려고 합니까? 그게 악마가 집어넣은 선악 체계 때문에, 죄지으면 나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가 있어요. 작품이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는데요. 『비』(rain)라는 단편에 보면 어떤 선교사가 있어요. 데이비드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섬에 와서 선교를 해요. 그 섬에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도 안 믿고 하나님도 안 믿는 어떤 창녀 같은 여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데이비드라는 선교사는 사명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기도하고 실망도 하고 울면서 “하나님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종말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가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제 교회에 모아 놨어요. 그런데 교회에 모아놓은 남자들을 몸 파는 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는 그 창녀가 계속 꾀어서 자꾸 세상 재미에 빠지게 해요.
그러니까 참다못한 데이비드 선교사가 그 여자에게 직접 가서 “당신 이 섬 떠나라.” 실제가 아니고 단편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당신 이 섬 떠나라. 당신 때문에 이 청년들 남자들 다 버리겠다. 당신이 떠나.” 그렇게 핍박을 했어요. 그리고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저 여자가 이런 여자이니까 여러분 가까이 하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그 창녀가 물속에 빠져서 죽었어요. 죽으면서 자기 집에 유서를 남겼습니다. 유서 내용이 “남성들” 그다음에 “!”(느낌표). “더러운 돼지들” 그리고 “!”(느낌표). 그다음에 “너희들 똑같아” 그리고 “!”(느낌표). 이게 뭐냐? 결국 그 선교사가 그 창녀를 건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선교사가 창녀를 왜 건드렸는가? 바로 선교하는 작업이 좌절되고 결핍을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 누구 하나 집요하게 표적 삼아 공격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타인에 대한 증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교사는 자기가 추락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가 추락해야 한다는 것. ‘나는 선교사다. 복음을 전하는 귀한 종이다. 그러니까 남은 다 망가져도 나는 멀쩡해야 한다.’라는 거예요.
구약 성경 호세아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호세아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음란에서 사랑이 뽑혀 나온다.’ 그 책이 호세아입니다. 음란에서 사랑이 뽑혀 나와요. 호세아 1장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게 뭐냐 하면요, 인간의 그 아담에서 난 육신이라는 것은 말씀이고, 성경이고, 율법이고 관심 없고 이미 자기 안에 들어온 ‘선과 악’이라는 그것이 자체적인 말씀과 율법의 기능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거기 균형감각만 갖추면 되는 거예요. ‘악한 일 안 하면 되잖아.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면 되잖아. 그걸로 나 구원받으면 되잖아.’
그런데 그런 시도를 하는 최종목적이 뭐냐? 자기 자신이에요. 내가 나를 살리겠다는 겁니다. 내가 중요하니까요. 설교를 하고 말씀을 전해도 안 듣습니다. 안 듣고 도망쳐요. 외면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이거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어릴 때 시집와서…, 옛날이야기죠.
어릴 때 시집와서 시댁의 학대를 못 이겨서 그 어린 새댁이 밤중에 아기를 배냇저고리 입힌 채로 그 애만 붙들고 도망을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와서 지적을 하게 되면 딴 건 두고 자기 자아를 붙들고 도망치는 거예요. 자기 자신보고 말해요. ‘내가 너 실망하지 않게 해 줄게. 내가 너 지켜줄게. 선이 뭐고 악이 뭔지 내가 알거든. 이것 가지고 우리 자신을 지킬 대로 한번 지켜보자.’
왜 그 새댁이 밤중에 도망갔을까요?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걸 선과 악 사이의 ‘이항 체제’라고 해요. 서로 다른 항끼리 체제인데 그 밑이 갈라지는 거예요. 찢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가랑이가 두 개지요. 가랑이가 찢어지는 겁니다.
그 찢어지게 하는 그것이 주의 뜻인데 찢어져야 거기서 공백이 생기고 빈터가 생기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오므려요. 다리를 안 벌리고 이렇게 꽉 오므려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바르게 사는 것으로. 그 다리를 찢어본다면 그것은 나의 죽음보다 더 센 거예요. 왜? 내가 무의미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무의미,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이미 우리 안에 공터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자꾸 격려를 해줘서, 용기를 북돋아 줘서 그 빈터가 안 보이도록, 다리를 오므리도록 해서 ‘바르게 살아, 열심히 살라고! 착하게 살면 하늘에서 복 주는 거야.’ 그런 식으로 계속 속여왔던 거예요, 악마가!
가랑이 찢어지는 경우는 여러분이 십계명과 신명기의 차이를 보면 돼요.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복과 저주에 대해서 간단하게 나왔어요. 그리고 뭘 하라, 하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는 복과 저주는 점점 더 세밀화 되어서 복과 저주 사이에 간격이 더 벌어지고 신명기 32장에는 아예 결론처럼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너희 가랑이는 다 찢어졌다. 너의 반석을 잊었다. 곧 ‘너희들이 율법을 지켜서 복 받겠다는 그 가운데서 너희 선과 악 사이에 끼어있는 여분의 공터를 너희는 놓쳤다.’ 그 여분의 공터가 뭐냐?
너희는 선악의 그 죄를 윤리적 의식으로 가린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방해물이고 장해물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보기에 그걸 벌려야 하는데 “그거 뭐야?” “죄입니다.” 죄 자체를 벌려야 하는데 오므려서 죄 자체를 감추는 거예요. 바르게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죄를 가리는 거예요.
죄를 가리니까 피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식으로요. ‘자식 키우고, 열심히 일하면서 이만큼 이 나이 되도록 살았는데 뭐? 뭐, 뭐? 누가 나 보고 죄인이래? 나처럼 열심히 한 번 살아봐. 죄인인지?’ 우리는 큰소리 칩니다.
어떤 선교원에서 사진을 한 장 봤어요. 애들이 한 다섯 살 정도입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애들에게 가르쳤어요. 그걸 찍은 사진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을 내는 그 증거가 무엇일까? 최종 증거가 무엇일까?
통성기도? 아닙니다. 헌금? 아니지요. 전도? 아닙니다. 성경 공부? 아닙니다. 예배 참석?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증거가 뭐냐? 피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하나님 자기 쪽에서 짜냈어요. 피는 어디서 흘리는가? 하나님의 추락에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추락.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대로 하나님이 저 높은 곳에 계시지 않고 뚝 떨어진 거예요(6-8절). 인간이 떨어진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앞당겨서 먼저 십자가에서 자진해서 아버지에게 저주받는 존재로서 뚝 떨어진 거예요. 그게 유일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피 흘리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들은 그 피를 좋아하지 않아요. 자기만을 좋아하기에,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자기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그 죄 자체로 여기기 않기 때문에 그래요.
열왕기하 4, 5, 6장 죽 보면 거기에 엘리사가 나오고 그 옆의 게하시가 나옵니다. 특히 열왕기하 4장의 경우에 수넴여인 나올 때 게하시가 조수로 활동을 많이 해요. 그 게하시가 평소 24시간을 자기 스승 되는 엘리사와 한 묶음 되어서 시키는 대로 다 움직입니다. 그럴 때 게하시가 과연 변화되었는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신기해요. 수넴 여인의 경우에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엘리사 일행에게 너무 잘해줍니다. 너무 고마워서 “소원이 있거든 이야기해 보세요.” “소원같은 것 없습니다.” 굉장히 겸손해 보여요. 겸손“해” 보입니다.
엘리사가 말하기를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 4:16). 과연 아기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다가 갑자기 변고가 생깁니다.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왕하 4:19-20).
갑자기 애가 죽어버렸습니다. 원래는 자식이 없었어요.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수넴 여인이 자식을 얻은 겁니다. 그러면 애초에 없었던 자식이니 있다가 없어져도 그만이 아닙니까? 원래 없었잖아요. 수넴 여인이 자식을 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지도 않은 자식을 줬던 거예요.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와서 달려들지요. “여인이 가로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왕하 4:28). 요새 같으면 목사님이라고 해야지요. “목사님, 제가 언제 아들 아쉬워서 아들 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한 적이 있던가요? 없지요? 없는데 왜 죽이십니까?”
본인이 말을 하면서도 모순되는 거예요. 그리고 더 모순되는 것은 “내가 아들 없다고 해서 섭섭하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이야기 안 할 것 같았으면 갈멜산까지, 수백 킬로 떨어진 그곳까지 왔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긁은 거예요. 하나님이 수넴 여인을 긁은 겁니다.
수넴 여인은 수평적인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요. ‘이렇게 내가 자식이 없고 어려워도 하나님 믿는 데서는 내가 자신만만하다. 내가 하나님을 버릴 일은 없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믿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상황 바뀌어 보세요. 그 믿음이 뭐가 되는지. 죄가 되지요.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상황을 바꿔요.
아들이 없는 데다 아들 주고 도로 다시 뺏는 겁니다. 상황 바뀌니까 ‘나는 의미고, 나는 믿음이 있다.’ 하는 그것마저 죄가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지요, 꿈에도! 내 안에 남은 것은 없어요. 죄만 있어요, 죄만! 죄만 있어 주셔야 해요. 그래야 피가 살아요, 피가! 자꾸 뭐가 남아 있으니까 말씀을 안 보는 거예요. 성경도 안 보는 거예요.
내 가정만 챙기고, 내 돈만 벌고요, 경제 사정만 생각하게 되고요. 세상만 기웃거리고 그런 거예요. 성경을 안보니까. ‘성경이야 뻔히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십자가 사랑을 주니 십자가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지.’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내가 죄가 될 때 비로소 발견되는 거예요. 내가 죄가 될 때.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때 아까 본 빌립보서 1장 21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리스도 입장에서 죽이신다면 기꺼이 감사함으로 “주님, 맘대로, 멋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기쁜 것이 내 기쁨입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자기의 사적인 기쁨은 날아갔지요. 죄인인데요. 그때 엘리사가 게하시 보고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왕하 4:29).
그래서 게하시가 그대로 했는데도 꿈적도 안해요. “게하시가 저희의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가로되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왕하 4:31). 역시 그대로 죽어 있어요.
애 누워있다. 지팡이 그 위에 있다. 그 지팡이는 분명히 엘리사 지팡이인데 게하시가 전달해 주는데 아무 일도 없어요. “게하시! 내가 시키는대로 했나?” “했습니다.” “어떻게?” “지팡이를 얹었습니다.” “비켜라” 엘리사 선지자가 나서서 자기의 눈, 코, 입을 죽은 애한테 그대로 가져다 댑니다. 복제를 해요.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왕하 4:33, 34). 엄마는 바깥에서 달려들 기세고요. 선지자를 대접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대단한 신앙이었어요.
하나님은 “그것은 신앙도 아니다.” 선지자 옆에서 게하시가 종으로 설치니까 대단한 신앙인 것 같지요.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사의 신앙은 뭐냐? 죽은 아이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내가 죽은 자로서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죽음을 앞장세우지 않고는 일하는 법이 없느냐? 우리가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죄 값은 죽음이거든요. 죄가 살아있기에 우리는 살아 있는 거예요. 죄가 살아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죽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껏 살아 있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살아 있고, 저주가 살아 있고, 죄가 살아 있는 거예요.
이것이 피 앞에서는 신나고, 신나고, 신나는 일이에요, 피 앞에서! 왜? 피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피만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열왕기하 5장으로 넘어갑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렸어요.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만나주지도 않고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나아만이 시키는대로 해서 나았습니다. 낫고 난 뒤에 만나주지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왕하 4:18).
‘나아만 장군이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른 신을 믿더라도 여호와 섬긴다,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나라 림몬신당에서 절하면서도, 몸을 굽히면서도 그것을 여호와께 몸을 굽히는 것으로 본다는 말은, 나아만 장군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안 순간 죄에서 나오는 어떤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의미 없는 것으로 보고 거부한다는 것을 기쁘게 수납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의미 없는 것으로 쳐주시는 그것이 얼마나 나한테 내 짐이 가볍고 고마운 일인지. 뭘 해도 의미 없다는 그것, 그것보다 더한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사도바울 본인이 주님의 계시를 받고 알아서 이렇게 전한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약속이 약속답게 “예스!”가 되기에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아니오’는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가정에 누가 몸이 아프든, 내가 몸이 아프든, 죽어가든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할 문제고 무의미가 무의미로 들춰지는 그것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최고로 고마운 일인데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해 주는 이런 사랑, 어떻게 말로 표현 못하지요.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가 ‘나는 아무것도 안 받겠다.’ 했는데 여기에 게하시가 끼어듭니다. “실은요, 우리 주인님이 개인적으로 당부했는데 그 선물 준비한 것 다 주고 가랍니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고 게하시가 받은 것은 나아만 장군이 들렸던 문둥병을 게하시가 받은 거예요. 저주받은 거예요.
하나님의 종 엘리사 옆에 붙어 있는 문둥병자 게하시, 게하시는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그걸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요? 그러면 죄인 되면 되잖아요. 죄인 되면 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이 말씀이 우리에게 24시간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또 개인적인 자신의 욕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이 됩니다.
레위기 1장 6, 7절에 “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리고 레위기 1장 5절에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피와 죄를 태우는 불의 만남이죠. 피와 죄의 그 만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그 약속이 우리의 모든 선악 체계, 그 이항 체계보다 더 세게 우리에게 작용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성경 봐야 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게 아니고요, 성경을 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이뤄진 이 상황과 성령 안에 있는 상황이 얼마나 일치되는 상황인가를 확인하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수단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쓰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게 아니고 성경을 보게 하시고, 말씀을 보게 하실 때 여러분, 도망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성도인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혼자 설치고 혼자 열심 내는 그 일에 저희가 아무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저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으면 끝이라고 여겼던 우리, 그런데 그것이 바로 마귀에 속한 죄 자체인 것을 이제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저 죄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그래서 피만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