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말씀 환경
2025년 1월 1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23-26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인간의 시작은 항상 개별 단위(unit) 부터입니다. 평생 자기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와 구름과 공기 같은 것들은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요구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연 환경에서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이 적용받는 환경이 자연환경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구약을 행태로부터 능가하는 말씀 환경의 조치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때에도 사람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반복적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드러난 것은 바로 ‘모형’이었다는 겁니다.
즉 모형을 깨끗하게 위해 시도한 그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모형인 줄을 모릅니다.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인간이 자기가 모형인 것을 모르게 되면 ‘자기’라는 환경이 전부인 줄 압니다. 이 개별적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 전 생을 소모합니다.
하지만 공기와 바람과 비나 파도는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를 무산시킵니다. 모형은 환경에 종속됩니다. 모형은 환경의 일부일 뿐입니다. 모형을 환경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말씀으로 묶어서 환경을 궁극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환경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죽음=사라짐’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본격적으로 환경상태를 유지하면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도 모형이니까 이 확장된 환경을 따라주면 됩니다. 문제는 인간은 자신을 모형이라고 여기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죽음이 곧 ‘끝’이라고 여깁니다. 모형의 끝일 뿐입니다. 실체에 편입되는 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말씀이라는 새로운 환경이 모형임을 모르는 인간을 깨부수시면서 모형임을 알려주시는 친절을 베푸십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입니다.
개별적인 자아 구원을 위해서 온갖 것을 착실하게 나름대로 준비했다지만 결국 도로 ‘개별적 자아’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걱정을 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사람은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이 못한 일을 해내신다”입니다.
인간들의 개별적 단위의식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주어지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환경에 훼방질이요 방해짓인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서기 1세기 쯤에 지금의 이라크 지방에서 등장한 ‘만다야 교’라는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됩니다.
이 종교는 예수님보다 세례 요한을 더 위대한 선지자로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은 물로서 사람들을 정화시켜 줄 뿐 아니라 인간들에게 열매맺는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한 결과성까지 해내는 방식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침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10-14)
이 만다야 교가 현대 기독교 세계 안에서 살아남는 이유는, 결국 인간의 두뇌에 저장되는 것은 자신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버틸려고 해서 오랫동안 교회 다니면 그런 것들이 다 허망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아무리 자신을 두둔해도 자신이 벗거벗음을 스스로 부인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동안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해낼 자기만의 실적을 의지하고 믿고 싶은 겁니다. ‘교회’라는 역사적 구성물을 모형으로 여기지 않고 실체로 여기는 천주교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집요한 구원욕망을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명쾌하게 물리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현실은 악질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환경 속에서 천국이 있는 곳으로 도피를 시도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몰려올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10) 천국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피 흘려돌아가실 작정으로 인해 기존의 폐쇄적 환경을 벗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모형의 시간 자체가 예수님 자신이 흡수해 버렸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그저 짧은 시간 조각이 된 겁니다. 유월절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체의 시간은 유월절 시간으로 대체했습니다. 그 시점이 바로 밤이요 그 밤은 인간의 밤이 아니라 ‘여호와의 밤’입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모든 아브라함 자손들은 이 시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시간 안에서 비로소 주님의 날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성도의 매일의 삶은 단 하루에 해당되는 주님 안의 시간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시간성’으로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자기 결정과 선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결성과 선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위주의 시간 단위를 벗어나 자신의 모형임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0강-히브리서 9장 23-26절(확장된 말씀환경)25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3-26절입니다.
히브리서 9:23-26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죽음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그동안 숨겨진 하나님의 환경이 확대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축구에 전반전 있고 후반전 있듯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반전이라면 이 전반전을 오늘 본문에서는 모형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형 보고 난 뒤에 이 세상 다 알았다, 하면 안 되겠죠. 모형만 봤을 뿐인데 마치 세상 전체를 아는 것처럼 그렇게 여기면 안 되겠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형에 국한됩니다. 기껏 모형 가지고 주물럭대면서 여기서 인생이 뭐며, 구원이 뭐며,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죠.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두고 끝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반쪽만 보여준, 모형 쪽에서만 끝이죠. 모형 쪽에서만 끝이고 이제 본격적인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본격적인 현실을 저는 환경의 확대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환경의 확대, 환경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공기, 바람, 그리고 비, 구름, 파도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연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태라는 거예요. 공기, 바람, 비, 구름이 우리가 원한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공기는 이제 그만 와.”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 환경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환경의 일부인데 그 환경에 말씀이라는 환경을 집어넣어 버리자, 이 말이죠. 말씀이라는 환경을 집어넣어 버리면 공기와 바람과 비 이런 것을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대상인 것처럼 말씀도 우리가 지키고 자시고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모형 시대에서는, 구약이죠, 모형 시대에서는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지킴으로서 정갈해지고 깨끗해지고 정화되고 우수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건 인제 그만해라.” 이 말이죠, 경상도 말로.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하는 것 있잖아요. “이제 그만해. 모형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 이것은 모형적 태도에 해당됩니다, 모형적 태도. 모형인 주제에 모형인 줄 모르고, 내가 진짜인 줄 알고 내 가치를 높이려고 뭔가 해보는 것,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만하면 됐다.’ 그거 다 실없는 짓이었다는 겁니다. 23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모형은 이런 것들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이제는 모형이 끝나면 그런 식으로 말씀 지켜서 나를 깨끗하게 하는 그 짓은, 하지 마. 할 필요도 없는 거야.’ 이런 뜻이에요. 모형을 백날 깨끗하게 해 봐야 모형이죠. 환경이, 모형적 환경이 다가 아니거든요. 이제는 그것을 확산, 확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확대시키는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었던 그 율법이 스스로 어떻게 이 세상에 비와 구름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환경의 일부로 들어와서, 환경의 일부로 들어온 그 율법이 어떻게 스스로 자기의 몸집을 키우고 그 범주, 범위를 확산시켜 나가는지 그걸 주목하라는 거예요, 그걸.
그것에 주목하게 되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뭐냐? 너는 너를 위해서 정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쓸데없는 짓 했다는 겁니다. 옛날 TV 프로 중에 그런 프로가 있었어요. <개그 콘서트>라고 아주 유명한 프로가 있었는데 거기 나오는 한 유행어가 이거에요.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라는 게 있어요.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 하지 말자.” 따라 한다고 개그 아닌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은 일기를 쓰고 어떤 사람은 일기를 안 씁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쓰는 일기가 무슨 일기겠습니까? 전원 일기죠. 지금은 안 웃지만 집에 가면 웃을 수가 있어요. 이게 뭐냐? 개그죠, 개그. 별로 심각할 이유도 없고 진지할 이유도 없는 거예요. 개그인데, 그냥 아무것도 아닌, 죽으면 그냥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 이건 내가 정한 환경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그걸 위하여 말씀의 환경의 일부로서 우리가 모형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말씀이 주체고 우리는 거기에 따른 모형이라, 이 말이죠. 우리의 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 하나의 개그에요, 개그. 그냥 웃고 치우는 거죠. 원래 실없는 거니까.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성경 히브리서 9장을 안 보니까, 모르니까 인간들은 굉장히 진지해요, 사는 게.
맨날 생일 되면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불러 가면서 그냥 자기 자신을 다독거리려고 애를 쓰는데 이걸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보편적 환경 속에서 개별 유닛’, 개별 단위를 고집하는 것이 바로 우울증과 자폐증의 원인이 되는 거예요. ‘보편적 환경’이라는 것은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 건 따로 있고 그 중요한 것의 여파로서 지극히 개그 같은, 그 환경의 일부로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어요.
일종의 바람? 일종의 구름 조각? 또는 안개 같은 것. 안개, 바람 이거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야고보서(4:14), 전도서(1:14)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시답잖게 보기 때문에 진지한 뜻을 몰라서 그런데. 사람들은 개별적 유닛, 단위, 아침에 눈 뜨면 신경 쓰는 것이 내 인생 어떻게 관리하느냐, 이거에요. 우울증과 자폐증 증세를 벌써 시작해요.
‘내 것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안 다치게, 내 마음 상처 없게. 그런데 본인이 뭔데요? 그게 눈물 나는 개그에요, 그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데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개그라고 하는 것은 뭐냐?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심각한데 모여 있으면 같이 웃음을 띄우고 하는 것, 이걸 단체 사진이라고 합니다. 강제로 웃어야 돼요.
결혼식 때 “자, 웃으세요.” 사진 찍는데 혼자 이렇게 있으면 “다시, 다시. 다 웃으세요.” 혼자 투표 안 하면 “다 투표하세요.” 다 하는데 혼자 투표 안 하면 이건 단체 사진에 위반되는 겁니다. 개별적으로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는 것,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뭐냐 하면, 개인적인 유닛, 단위에 대해서 네가 그동안 어떻게 챙길 것을 챙겼나를 자꾸 외부에서 묻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오답인데 그 오답을 가지고 서로 컨닝 하면서 세월 다 보내고 있어요. 옆에 것 기웃거리고, 저것도 틀린 답인데. 정답이 없어요. 개별적 유닛 자체가 정답이 아니에요, 이건. 오늘 본문 히브리서 9장 25절의 말씀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이 아니하신다는 말이 또 나오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세상 끝에 단번에 하늘에 들어가셨다.’ 그게 모형이 아닌 진짜 하늘에 있는…, 24절에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라는 그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이해하려면 우리가 평소에 개인적인 유닛으로 해서 나 자체 안에서 스스로 환경을 만들어내는 이 자폐증, 우울증 증세의 내막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이 ‘나’라는 개인적 단위만 생각해서는 이 히브리서 9장을 백 독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 잘되라고 주께서 말씀 주셨구나.’ 이렇게 이해한다고요. 그런 짓 이제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가 그것밖에 안 배운 거예요. 내 것 지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교회 와도 또 똑같은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예를 한 번 들겠습니다. 어떤 60대 남자가 50대에는 직장생활 잘했대요. 중소형 백화점에서 매니저 역할 하면서 일도 빨리 처리하고, 대인 관계도, 좋고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그 중소형 백화점이 문을 닫으면서 구조조정을 하게 되어 나왔답니다. 인사 담당이 좀 나가달라 할 때가 50대 때니까 10년 전에 직장에서 나왔어요.
그때는 자신만만해서 “ok, 나갈게요.” 하니까 인사 담당자가 놀랐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니까. 아내한테 전화해서 “여보! 나 잘렸어.”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직장에서 나와서 10년 동안 10가지 일을 했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방향제 사업에 손을 댔다는 거예요. 퇴직금 받은 거 가지고 방향제 사업을 하는데 어떤 사람에게 지인을 소개받아서…, 이 지인이 문제라, 지인이.
이 사람을 소개받았는데 자기가 방향제 사업에 노하우가 많고 경험이 많다고 하면서 “내가 당신에게 생산부터 영업까지 다 가르쳐 줄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당신은 돈만 대고 당신 사업 성공 하도록 해줄게.”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니까 본인과 함께 일할 생각이 있거든 자기만 믿으라’고 그 사람이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자기만 믿으라고 한 거예요.
사람이 친절하게 방향제 이야기 다 해주면서 “생산 공장에서 3개월 동안 일하고 그다음에 제품 나오면 당신 이름으로 출시해서 개인적인 사업으로 할 수 있다. 난 당신 영업을 도와줄게.” 그래서 퇴직금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판매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까 “내가 관공서에 아는 사람 많아. 내가 다 팔아줄게.”
이렇게 해 놓았는데 나중에 살펴보니까, 자기는 말뿐이었어요. “관공서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찾아가서 부탁하면 돼.” 해서 그 동네에 관공서가 총 30군데인데 30군데를 다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이 시킨대로 아는 사람에게 다 부탁해봤답니다. 해보니까, 그냥 아는 사이에요.
그 공무원들이 알아서 구매할 수 있는 입장도 못 되고, 관공서에서 구매를 할 때 전임 구매처 끊어버리고 새로 집어넣는 그러한 편법이 통하지 않는 동네라는 것을 몰랐죠. 이 사람 말만 듣고 소개하면 판매가 다 되는 줄 알았죠. 돈? 그 사람은 말뿐이었고, 돈은 돈대로 다 빼 먹고, 결국에는 그 동업자랑 빠이빠이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교회 가면 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사는 말만 하고, 돈은 교인들이 다 내고요. “구원받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성경 아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집회 나와 보세요.” 나오면 “나도 구원 받았어.” 하는 이런 사람이 군데군데 있으니까, 그 목사 말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으니까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나중에 구원받았다, 복음이다, 진짜 교회다, 하고 한 20년 따라다니니까 퇴직금은 다 날리고 아직도 구원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방향제 사업했다는 그 사람이 끝에 이런 당부를 해요. “내가 과거에 바보였고 지금도 바보다.” 그러니까 나처럼 바보 되지 말라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구원받겠다고, 천국 가겠다고 귀한 말씀 찾아왔는데, 10년 지나고 20년 지나고 배울 거 다 배웠는데 뭐, 뭐 있어요? 구원됐습니까? 구원됐어요?
그동안 돈만 날리고, 뭐 아무것도 없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뭐냐? “과거에도 나는 바보였고, 지금도 바보고, 앞으로도 바보 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거예요, 문제가.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 선택과 결정은 바로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퇴직금 받아서 10년 동안 방향제 사업한다고 할 때 그 결정, 누구를 위한 결정입니까?
‘나’라는 유닛, ‘나’라는 개체, ‘나’라는 개별 단위를 위해서 본인은 선택을 했고 결정을 한 거예요. “나는 돈 댈 테니까 당신은 노하우 해서 우리 동업하자.” 이거나, 교회 와서 목사 붙들고 “나는 헌금할 테니까 당신은 복음 이야기해 주고 우리 동업하자.” 둘 다 사달 날 짓이거든요. 모조리 사기꾼이거든요.
사기꾼의 그 원인이 뭐냐? 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왜 천국을 넘봐요? 주인은 따로 있는데. 주인은 납품 업자 이미 계약이 다 되어 있어요. 끝났어요. 교회 와서 잘 해준다고 천국 넣어주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냥 돈만 날려요, 청춘만 날리고.
“주님이 결정했다.” 하면 “우리도 알고 있어요. 창세 전부터 예정하고 선택했던 그 이야기 다 들었어요.” 그 이야기 말고 주님이 결정했다는 그 결정이 히브리서 9장에서는 뭐냐? ‘자기 피로 영원한 성소로 들어갔다, 끝!’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결정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접촉점, 이 눈에 보이는 세계,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이야기했지요, 인간이 알 수 있는 환경과 보이지 않는 확대된 환경 사이에 분명한 증거를 준 적이 있어요. 말만 하신 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말만 하신 게 아니고 이 땅에 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육신 가지고 남긴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여기 25절에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이렇게 되어 있고 ‘하늘나라 성소에 들어갔다.’라고 했을 때 이 증거가 있어요. 그 증거가 뭐냐?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십자가 피입니다.
어떤 인간이 정치범으로 처형됐다, 이게 아니에요. ‘어떤 인간’라고 개별적으로 하면 안 돼요. ‘예수님도 개별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보편적 말씀이라는 환경의 확대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개별적이에요. 어떤 행동을 하고 결정하든 그 수익과 이익과 결과는 시도한 나에게 도착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하는 결정은 이것이 보편적이라서 모든 개별적 유닛을 오함마나 망치 가지고 다 부수는 겁니다. 자, 인간은 사업을 하든 교회에 와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시도를 하든 인간들의 기본 잘못된 생각은 뭐냐? 개인적인 유닛, 개인적 단위를 시작하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고 실패 없는 구원을 원해요. 실수 하지 않고 실패 없는 구원.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 유튜브에 나오는 모든 것들, “기존의 개역 성경 보지 마시고 킹제임스 번역으로 보셔야 합니다. 다른 교회는 원어, 헬라어 이야기 안 해요. 우리 교회는 헬라어 원어 펴 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 개별적 유닛아, 당신이 결정하고 선택하세요.”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 교회에서.
“선택을 잘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구원받지, 엉뚱한 교회 가면 지옥 갑니다.”라는 말을 그들이 외친다고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약간 보탬이 되는 돈들 갖고 있죠? 그렇다면 내가 전하는 복음과 바꿔치기할까요?” 이런 식이죠. 뭐가 잘못됐다고 생각 합니까?
살아가는 것도 나를 위해 살아가고, 구원받는 것도, 천국 가는 것도 나 좋으라고 천국 가는 이 시도, 이 시작점, 이 시작점 자체를 이걸 박살 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남한테 사기당했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본인이 사기꾼이에요, 본인이. 본인이 본인한테 사기 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좋은 게 그게 환경의 전부입니까? 이건 눈에 보이는 환경일 뿐이에요. 모형을 모형되게 하는 게 그게 진리에요? 모형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모형은 개그일 뿐 따라 하면 안 돼요. 모형이 모형을 위해 하는 것은, 그것은 사기입니다. 우린 태어날 때 모형으로 태어난 거예요. 나 좋으라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누구의 모형이며 어떤 전체 환경의, 그냥 약간의 비구름 정도? 또는 산불 정도? 산불에 있는 불꽃 정도, 그 정도밖에 안 돼죠.
‘LA에 있는 박찬호 저택이 홀라당 다 탔다, 박찬호는 옆의 호텔로 피신해서 살고 있다.’ 참 안 됐다고 하는 건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건지 하여튼 예, 참 안 됐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자기 결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은 산불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
모형인 내가 목숨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기쁨을 줘요. 왜? 우리는 환경의 일부고 하늘나라는 환경의 전부고, 전부가 살아있는 한 환경의 일부는 마땅히 전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일부는 일부로서 하나의 개그로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닙니까?
내가 가짜로 티 나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니에요? 그래야 전체 말씀 자체의 완성된 환경이 살잖아요. 그런데 교회 와서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시작을 이렇게 하니까 뭐 사기꾼들은 좋다고 “제대로 된 선택, 결정을 하시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께 도움 되도록 종교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만다야교’(Mandaeism)인데요. 이 만다야교가 만들어진 것이 A.D 1세기경,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그 이후에 생긴 것이 만다야교에요. 발생지는 메소포타미아, 현재의 이라크에요. 그 종교의 내용이 뭐냐?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3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세례 요한이 와서 물세례를 주니까 그 사람들이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선지자다.”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할 도리, 마지막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으니까 세례 요한이 시키는 대로 해야죠? 뭐 할 수 있는 게 뭐냐? 일단 물세례를 받았어요. 세례 받고 난 뒤에 세례 요한이 “집에 가세요.” 하지 않고 그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이 물세례를 받았느냐?” “받았습니다.”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해. 여기 심판하는 도끼가 놓여 있으니까, 열매를 맺어야 해. 열매 안 맺으면 너희들 끝장이야.” 하니까 사람들이 궁금하죠. 그래서 세례요한한테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으면 됩니까?”라고 묻는 것이 누가복음 3장 10절입니다.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누가복음 3장 11절입니다. 그다음에 12-14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사람들 등쳐먹지 말고 월급받고 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사실로 인하여 이 만다야교를 창설한 사람들은 두 가지만 있으면 돼요. 일단 물세례, 물이 하는 일은 깨끗하게 하는 거니까 물세례 의식을 하고, 그다음에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 만다야교가 그때부터 해서 2025년 지금까지 유럽과 호주, 미국, 전 세계에 7만 명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종교의 특징이 뭐냐? 왜 예수님을 세례 요한보다 무시하고, 세례 요한을 예수님 보다 더 높이는데 그 이유가 뭐냐? 그 종교에 온 사람들이 기존의 기독교를 거쳐서 왔습니다. 기존 교회 거쳐서 뭘 배웠느냐 하면, 사도 바울의 편지를 설교로 들으면서 그들이 뭘 느꼈는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인간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들었는데 그걸 믿고자 하는 거예요.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데 거기서 10년 다니고, 20년 다니고, 30년 다녀봤자 내가 믿고자 하는 것은 그처럼 공허하고 허무한 게 없다는 거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10년, “예,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것도 짜증 나요. 지루해, 도대체! 교회가 지루하다고요. 지루하지 않으려면 정말 나한테 실수 없고, 실패 없는 구원의 종교가 되려면 나에게 남는 게 있어야 돼요. 남는 게 뭐냐? 아까 나왔잖아요, 옷 두벌 있으면 하나 주는 것.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은 굉장히 쉬워 보이고 멋있어 보이지만 결국엔 세월 지나봤자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역시 남는 것은 내가 직접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이 기억, 이건 나에게 저장이 됩니다. 저장이 되면서 나에게 그것이 잊지 못할 일들이 돼요. 그게 적금 붓듯이 누적이 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거예요. 예수님은 맨날 하는 이야기가 “나를 믿어라, 나를 믿어라.”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니까 본인과 일할 생각 있거든 나만 믿으세요.’ 하는 그 방향제 사업 사기꾼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를 믿어라.”
처음에는 나에게 그 믿음이 있는 줄 알았죠. 거기다가 이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을 때는 성령이 와서 믿음을 준다.’라고 하니까 이야~, 성령이 와서 준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있잖아요. 옷도 하나도 안 걸쳤는데 신하들이 멋진 옷 입었다, 아름답다고 하니까 모든 인간들이 다 웃으면서, 단체 사진 찍는 것 같이 다 웃으면서 “임금님 옷이 예쁩니다.”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중에 별로 안 속는, 속는 법을 적게 경험한 어린 애가 “얼레리꼴레리! 임금님이 발가벗었!” 이렇게 된 거예요. 사도 바울 말대로 “믿습니다, 구원받습니다. 믿습니다, 구원받습니다. 믿습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 실컷 수천 번 들었는데 역시 중요한 건 현찰이다, 현찰. 내가 천국 가는데 실수 줄이고 실패를 줄이려면 현찰이 중요해요.
현찰이 뭐냐? 내가 교회에 봉사한 것, 헌금한 거, 내가 기도한 거, 금식한 것. 그래서 지금도 만다야교에서는 정기적으로 금식을 시켜요. 정기적으로 세례로 정화, 또 죄를 지었으니까 자연의 물에 가서 세례식 또 시키고, 그다음에 구제하고, 기도하고 그런 것을 계속 하는 겁니다.
자아의 통장에 적금을 해서 기존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런 소리 할 때 “우리는 현찰이 있거든?”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고 이렇게 했다는 게 있는 이상은 내가 행한 그것이 가장 믿을만한 거예요. 믿을만하고, 성경에서 그냥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그건 결국엔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는 허깨비 같은 것, 남지를 않는 것,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그러한 지경에 빠지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만다야교입니다. 어떻게 그 교회 한번 믿어 보실래요? 그 만다야교 갈 필요 없어요. 오늘날 천주교와 기독교가 다 그래요. 만다야교회에요. 이미 교인들이 ‘믿습니다.’ 하면서 무엇을 쉽게 흉내 내고 있고, 실적을 현찰로 챙기는 것, 내가 이 교회 충성하고 봉사한 것, 과거에 누구 몇 명 전도하고 선교했는가, 그거 챙기고 있다는 것을 목사라는 사기꾼들이 바보입니까, 그걸 다 알고 있어요. 그걸 다 꿰뚫고 있어요.
자,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정말 이 환경, 눈에 보이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확장이 되었다면 그래서 그 확장된 세계의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증거 남기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성소로 가셨잖아요? 가셨다면 그분이 가시기 전에, 십자가도 증거지만 십자가 증거 이전에 남긴 말씀과 행동들이 있을 거란 말이죠.
그것들이 이제 성경에 있으니까 그 예수님의 행동,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십자가라는 최종 증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주님이 자체적으로 자기 육신 가지고 뭘 남기고 뭘 외쳤는지를 우리가 보면 되겠죠, 이렇게 연결되니까.
“너희들을 위해서 율법 지켜서 말씀 지켜서 정화할 생각하지 마라. 그딴 것은 모형이 모형한테 헛짓하는 것이다.”라고 배제 했다면, 그게 모형이라면 유일하게 모형이 아닌 예수님은 자기가 남긴 말씀과 자기를 어떻게 결부시키는가, 이것만 챙기면 되는 거죠. 어차피 우리는 모형이고 개그니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아까 만다야교 이야기했죠, 만다야교 이야기하면서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게 간주하는 이유를 찾았죠. 그런데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환경, 그 반밖에 안 되는 환경을 전부라고 생각해서 자기의 개인적인 유닛, 개인 단위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뭔가 열심히 해내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 다 알고 계신다, 이 말이죠.
16장 16절에 보면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와~, 율법과 선지자로 조성된 환경은 세례 요한으로 끝났고! 만다야교는 “끝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끝났고!” 만다야교에서는, ‘세례 요한을 제껴버리고 세례 요한을 무시해 버리면 우리에게 현찰이 남는 게 없는데요?’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했다는 그 현찰이 무시당하면 우리는 또 무엇을 행하고 움직이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그래서 달리 바보가 아니라 나중에 우리가 쪼다 바보가 되는 일이 생기잖아요. 사도 바울 말처럼 실컷 예수 믿고, 십자가도 다 믿었는데 하늘나라에서 뭘 하느냐? 반품 처리해요. 반품 처리.
기가 막힙니다. 물건 다 나왔는데 반품 처리? “어디 이런 더러운 걸 천국에 넣으려고?” 이렇게 반품처리 당하면 그동안 우리는 뭐였어요, 그러면? 노력한 모든 것이 이래도 안 돼, 저래도 안 돼. 천주교 가도 안 돼. 천주교는 역사적 구성물을 모형이 아니라고 보는 단체에요. 역사적 구성물이 모형이 아니고 실제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천주교입니다.
성경보다도 교회 단체가, 교회라는 이 공동체 단체가 주님이 남긴 것이지 성경을 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천주교에요. 그래서 교회 역사가 그렇게 중요하고 거기서 하는 모든 일곱 가지의 성례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 신부라는 존재, 교회라는 존재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 교황보고 적그리스도라고 욕하는 개신교가 따라 해요. 왜? 역시 교회도 현찰이니까. 아, 현찰을 좋아하는구나. 인간은 현찰에서 현찰로 가는구나. 왜? 개별적인 유닛,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16장 16절에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기 전에 이 말씀을 주셨거든요.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 억지로 인간들은 그다음부터는 천국 가려고 밀려온다는 거예요. 침입한다, 하늘나라에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일 한다고 할까요. 아침 10시에 문 여는데 미리 줄 좍 서 있습니다. 그랬다가 백화점 신상 챙기려고 확 밀려 들어오듯이 대기 하고 있다가 확 밀려 들어온다는 겁니다. 자, 밀려 들어올 때 사람들은 천국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아주 긍정적인 해석으로 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8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허락하지 않는 자는 못 알아듣는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내가 하는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유일한 증거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언을 해도 그 예언은, ‘모형은 모형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하는 그것이 이 땅에 미리 왔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고 특징이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있으니까 들어오세요.” 이게 아니고 하늘나라는 어떤 장벽으로 작동하는 거예요, 장벽으로.
우리 자신을 밀어내는 것부터 하늘나라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늘나라로 도피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하늘나라로, 천국으로, 종교로 도피를 하려고 하느냐? 현실이 악질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현실 삶이 우리에게 너무 악질이에요. 너무 패악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걸 달리 하면 ‘환경이 우리를 못살게 군다.’ 환경이 우리를 못살게 굴어요. <범죄도시 3>에 나오는 그 대사처럼 “왜 자꾸 나를 못살게 굴어!” 세상 자체가 우리를 못살게 굽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합니다. “네가 모형인데 모형은 모형일 뿐 그걸 왜 네가 굳이 살리려고 하느냐?” 이렇게 나와요.
네가 모형을 살리려고 하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도 ‘이 복음을 믿으면 살겠죠?’라는 식으로 선입관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미 시작 자체가 사기를 갖고 있는 거예요. 개별적 유닛은 주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을 나의 미래, 나의 괜찮은 현실이라는 노림수, 시작부터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 거예요.
왜, 이유가 뭔데?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말합니다. “죽으면 안 된다고? 죽음이 이 환경의 일부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죽는 것도 환경의 일부고, 그 죽음을 내가 가져갈게. 어디서? 성소에서.” 성소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기계입니다. 그 시스템이 성소에요. 그동안 모형적인 성소 안에서 백날 짐승의 피 발라봤자 그건 모형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모형적 행위의 반복이에요.
그러면 이 모형과 진짜의 차이점이 뭐냐? 주님은 우리의 개별적 유닛, 나 자신이죠, 내 개체 자아를 주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우리를 하나의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 담아버려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시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돼지고기 쌈, 상추 가지고 보쌈 하잖아요, 보쌈. 우리를 돼지고기 한 조각이라고 보고 배추 가지고, 요새 배추 비쌉니다, 쌈을 싸서 주님 입에 틀어넣어 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육신이라고, 육체라고 봤는데 주님은 육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시간의 조각으로, 순간 같은 시간의 조각으로 봐 가지고 그 시간을 주님이 삼켜버립니다.
이러한 사건을 최초로 보여준 게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에게 적용되는 시간 노선 말고, 유월절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유월절 그 역사로부터 새롭게 카운트하는 시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낮이 아니라 밤부터, 그 밤 ‘여호와의 밤’부터 시간 계산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밤에 동참하고 보쌈당할 때 여호와의 밤에 작동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환경 말고 확장된 환경이 그 안에 개시가 되는 거예요. 확장된 환경입니다. 그 환경을 따라서 마지막에 실체되시는 주님이 오시고, 다 이루시고,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율법에 따라서 그 환경을 완성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지금 개별적 유닛이 되니까 개인은 인간적으로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거예요. 나의 죽음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평소에 세상에서 내가 제일 무섭다는 뜻이에요. 내가 제일 무섭다. 어디 가도 다치지 않을까, 어디 가도 아프지 않을까, 독감 걸리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내 걱정 외에는 다른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이해하는데 내 것, 내 재산 날아가는 게 죽음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 내 자식이 죽고 내 부모가 죽고 내 배우자가 죽는 그걸 죽음의 아픈 체험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공들였고, 충성했고, 투자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
히브리서 2장 14절 16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놓아주면 뭐가 되는데? 놓아주게 되면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은 없어요. 왜냐? 인간들은 ‘아브람’ 자손밖에 없어요. 아브람 자손이 아브라함 되려면 시간을 흡수하고 완성된 새로운 환경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개입될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아브람’ 자손이 가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 자손은 없습니다. 있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 벌벌 떠는 ‘아브람’ 자손, 혈육에 속한 자들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최고의 친절이 뭐냐? 우리를 죽여주시는 거예요, 밟아서! 짓밟아서 죽여주시는 거예요. 말씀으로 죽여주시는 거예요.
어떻게 죽여주시는가? 부자 청년이 주님한테 왔을 때 “랍비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러면서 부자가 이야기하죠.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그래?” “그래도 모자랍니까? 이 정도로 충분히 준비했는데. 실수 안 하기 위해서, 천국 가는데 실패 안 하기 위해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네 모든 것을 다 팔아라.” “그건 못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걸 팔아서 내 것이 사라지면 내가 죽어요. 개별적 유닛, 단위, 내가 죽어요. 내 영생 얻기 위해 왔는데 내가 사라지면 이런 허망한 게 어딨습니까? “나는 내것 포기 못 합니다.” 하고 근심하여 그냥 돌아갔어요. 그걸 보고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근심 되어서.
“아, 주여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께서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이렇게 하니까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 받습니까?”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몰라요. 아직까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자기 생각만 하고 있어요.
모든 걸 버리고 주님 따라가는 이유가, 주님이 오셨다는 그 천국에 자기가 합류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구원 받기 위해서 교회 온 겁니다. 주님 따라온 거예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죠.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은 개인적인 유닛으로 출발해서는 어떤 경우도 구원되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합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방법은 뭐냐? “사람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시거든? 그 하나님 일을 하시기 위해 내가 온 거야.”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죽여줄게.” 뭘로? “언약으로 죽여줄게. 말씀으로 죽여줄게. 시작을 네가 아는 환경 말고 전체 다의 환경부터 출발하도록 내가 너를 새롭게 만들어줄게, 말씀으로!” 환경을 너로부터, 개별적 유닛, 개별 단위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결정과 선택이 얼마나 모든 것을 이루었나, 그것부터 출발하게 만들어요.
네 결정 빼고, 네 선택 빼고, 네 결정 선택 빼면 어떤 결과도 네가 생각할 권한은 없고 그냥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에요, 네게 현재 일어나는 모든 것이. 여러분, 안경 쓰셨어요? 주님의 결과입니다. 주님의 결과에요. 날씨 춥죠? 주님의 결과에요. 오늘 아침에 오니까 갑자기 전기가 나가서 난로 다 꺼지고 온풍기 다 꺼지고 그랬었어요. 그럴 때 뭘 생각해야 하는가?
누가복음 17장 20절을 생각하면 됩니다. 누가복음 17장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드디어 인간의 개별적 유닛의 종교적 구원, 그 모든 시도가 여기서부터 좌절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요.’
교회가 천국의 방해물이고 너 자신이 천국의 방해물이라 그 말입니다. 말씀 활동의 방해물이 말씀 지키려는 내가 방해물이 된다, 이 말입니다. 왜 주어진 결과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쪽에서 뭔가 내가 납득되는 결과를 내 속에서 일궈내려고 애를 쓰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기를 당하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22). 이것은 전체적인 환경이 말씀으로 만들어지고요, 그 말씀이 개별적인 체험으로서 우리 안에 침투가 된다는 겁니다. 환경 전체가 압축이 되어서 우리 안에 미리 담긴다는 이야기에요. 미리 담겨버리면 예수님의 그 언약에 의해 접수가 된 그런 존재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이 말씀하고 맺고자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히브리서 9장 26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세상 끝”,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주님 안에 있는 시간으로 봐버리면 그 시간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던 그 한 날의 내용을 보여주는 환경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날이 분절돼요. 하나의 날과 날의 사이를 슬라이스로 끊어내는 것처럼 매일같이 나눠지는 그런 대상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고 ‘개체’도 아니고 그냥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슬라이스같은 시간으로서 우리 시간을 매일 할당 받는 겁니다, 매일매일을.
우리 자신을 육체로 보지 마시고, 세포의 덩어리로 보지 마시고 시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한 날의 해당되는 시간. 그러니까 첫날이 마지막 날이고, 마지막 날이 십자가 지신 날이고, 그래서 어떤 날이든 그 모든 내용이 새로운 환경 전체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지 내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잘 살았다, 못 살았다’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그런 나는 없고, 주님이 다루시는 시간이라는 환경의 일부로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주에 의해서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해서 우리 안에 말씀의 시간이 들어있고 눈에 보이는 육신은 거기에 대한 가현체, 그냥 전달체, 운반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바로 성소가 되고, 우리 안에 말씀이, 히브리서 9장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뭐 더 이야기해 봤자 더 믿을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 자신에게 사기는 당하지 맙시다. 어디까지나 개그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 가정에서 교회에서 교육받은 것이 우리의 욕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벌벌 떨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띄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서 해결해 보려는 그 자체가 마귀의 사기였다는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안에 이미 완성된 채 들어와 산다는 이 환경을, 새로운 환경, 완성된 환경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