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죽음
2025년 1월 1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27-28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멸망 중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죽어도 왜 죽는 줄도 모릅니다. 인간이 죽어 마땅함은 인간의 처음 존재이유가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인간의 창조보다 죽음이 선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죽음과 연관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에 죽음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기 되었습니다. 출생 자체가 멸망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죽음을 모릅니다.
만약에 인간이 자기 죽음을 안다면 그때부터 인간에게 의미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멸망으로 치닫기에 인간에게는 의미라는 것조차도 없습니다. 죽음에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소의 원리에 준해서 이 땅에 오시고 사셨기에 성소에서 생기는 그 죽음의 의미를 비로소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성소는 인간 세상을 함축시켜 놓은 모형적 구조물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비로소 ‘죄’, ‘죽음’, ‘심판’,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소 차원의 죽음을 통해서 ‘죄’, ‘심판’, ‘시간’의 의미를 완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두 종류의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이러한 개념의 등장은 하나님의 등장으로 비로소 나타난 의미입니다. 당연히 멸망당해야 될 가인은 창세기 4장에서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죽음’을 인간들이 이해하는 죽음과는 차별나는 죽음으로 전환하십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5) 즉 하나님에 의해서 죽는 죽음만이 그 안에 생명이 ‘대신’의 방식으로 나타나게 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그냥 죽어서는 그저 멸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서 죽게 되면 그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소 안에서 움직이는 기능들은 ‘인간을 대신 양’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생명이 되는지를 나타내어 줍니다. 인간들은 목숨은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입니다. 하지만 성소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시간은 십자가로부터 대시 오심까지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탑재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주님을 위한 존재입니다.(롬 14:7-8) ‘자기를 위해서’에서 ‘주님을 위해서’로 바뀐 자들입니다. 이 바뀜은 자신의 죽음에서 주님의 죽음으로 들어갈 때나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님 죽으심’의 가현체입니다.
‘인간을 위해서’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이유는 인간들 안에 이미 뿌리 깊게 박힌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가현체’였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과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매슬로우라는 사람은 다섯까지 욕구의 단계를 소개했습니다. ‘생리적 욕구→안전의 욕구→소속감과 애정의 욕구→자존의 욕구→자아실현의 욕구’가 그 내용입니다. 그저 몸 건강하고 생활비가 넉넉하게 장만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말에 대해서 다 칭송하고 동의하고 격려해주는 삶을 인간은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그대로 지니고 성경 말씀에 대하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요? ‘주를 위한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주’로서 하나님을 신봉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의 구절에 대한 해석 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욕구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자에게 세상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을 당연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여길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9에서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를 과연 우리 인간이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까? ‘내게 주신 자’에서 자기 자신이 빠져 있어도 그래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겠습니까? 비슷한 내용이 요한복음 6:39-40에 나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생이 제공되는 믿음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 본인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룰 수 있는 분은 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믿음은 인간에게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8: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아브람은 비로소 자신이 홀로 사는 게 아님을 알았습니다.
결코 자기 욕구를 자신이 관리하고 달성하는 것을 보람으로 사는 게 아니었던 겁니다. 고기가 일방적으로 낚시에 걸린 것처럼 아브람은 주님에게 걸려서 새로운 피조물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산하시는 교회란 바로 인간의 뿌리 깊은 욕구를 쥐고 있는 존재를 발각되고 난 뒤에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죽으심을 악마가 결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2-23)
누가 악마를 이깁니까? 미리 예수님의 피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과 더불어 제대로 죽은 자만이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일에 현혹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0강-히브리서 9장 27-28절(두개의 죽음)250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27-28절입니다.
히브리서 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한 번 죽는 것을 사람에게 정했다.’라는 것은 창세기 2장 17절에 나와 있는 말씀에 근거한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인간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과의 연관성을 인간 속에 제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왜 만들어졌는가? 인간은 죽음으로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리기 위해서, 죽음으로서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죠. 인간의 ‘있음’보다 더 센 게 뭐냐, ‘죽음이 있다.’라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이 만들어도 죽음한테는 이기지를 못합니다. ‘정녕 죽으리라.’를 이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 입장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왜 만들었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겠죠. 오늘 본문 히브리서 9장 24절의 말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대해서 어떤 세계인지를 알리기 위해 이 땅에 모형을 만들어놨는데 그 모형이 성소입니다. 이 성소라는 것을 왜 만들었느냐? 인간세계, 이미 정녕 죽게 된 인간세계를 함축하고 압축을 시켜놓으면 그게 성소가 돼요. 인간은 살면서 결국 죽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모르니까 ‘결국엔 죽을 건데 왜 사는가?’ 죽는 이유 모르니까 사는 이유도 모르는 거예요.
죽는 의미를 모르니까 사는 의미 없고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모든 게 의미가 없어요. 대통령이 잡혀가든 의미 없고 안 잡히든 의미 없고,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 의미가 없는 이유가 모형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형에 불과한 이 세상은 실체하고 연관을 시켜야 하는데 유일하게 연관시키는 접촉점이 성소입니다.
그러면 성소는 이 세상의 인간세계를 함축한 것인데, 인간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은 기껏 ‘살았다. 결국 죽겠지. 죽는 이유? 모르겠다.’ 이게 다예요. 그런데 성소는, ‘인간은 왜 살고, 그리고 죽은 다음에 뭐가 있다.’ 이걸 그 건물 안에, 구조물 안에 함축을 시켜놨으니까 인간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 ‘죄’와 ‘인간’과 ‘죽음’과 그리고 ‘하나님’,이 네 가지 요소를 결부시켜 만들어놓은 모형이 성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과 28절은 두 절밖에 안 되지만 거기 이 네 가지가 다 나와요. 첫째는 죽는다는 것, 27절. 그다음에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 죽는 이유는 심판하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죽는 것은 심판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다는 거예요. 심판이 있고,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격적인 행함이지요. 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본격적인 것은 숨이 끊어지고 난 뒤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신 그 행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심판입니다.
인간의 죽는 것이 있고, 심판 있고, 그다음에 죄, “죄를 담당하시고” 죄가 있고,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다가 친절하게 그걸 다 품어놨습니다. 그래서 이 성소 안에서는 인간의 시간을 함축, 이렇게 압축을 했기 때문에 성소 안의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흐르지 않고, 성소가 모형의 모형 됨을 다 발각당할 때, 끝날 때가 있어요. 히브리서 9장 26절에, “세상 끝에”라는, 세상 시간이 끝났을 때 모형은 모형으로 끝나고 이제 실체가 드러나서 모형이 실체한테 인수인계하는 그 시점이 되면 모형으로 알려준 것을 실제로 다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려주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이 아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는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가 죽을 때까지만 느끼는 시간, 그 시간은 온전한 시간이 아니고 시간 안에 갇혀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진짜 시간은 뭐냐? 진짜 시간은 ‘예수님이 모형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그게 바로 진짜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것은 가짜 시간이 날아가고 진짜 시간을 탑재한 존재가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시작해서 새로운 피조물 되고,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간격 그 시간을 장착하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시간의 가현체 또는 하나님 시간의 증거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특징은 ‘내가 태어났다. 내가 죽는다.’ 이것은 가짜기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아요. 의미가 없어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성도의 특징은 ‘의미 있는 시작과 의미 있는 끝’을 이야기해서,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시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오셔서 십자가 지심으로 죄를 씻었다.’ 이게 시간의 시작, 그리고 ‘다시 오신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 이미 오신 주님과, 주께서 시작한 일을 다시 마감 짓는 주님의 다시 오시는 그 시간, 그 시간을 보여주는 가현체로서 성도는 이 땅에 등장합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이런 사람의 등장은 보통 인간 보기에 너무나 신기해서 기절할 지경이에요. ‘무슨 그런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끝나는 그런 인간이 다 있느냐?’ 보통 인간은 자기 태어남부터 자기 죽을 때까지 그 추억 이야기하는 게 인간인데 그 인간과 전혀 다른 인간이 여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시간을 건지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마감된 그 사람을 자기 시간 건지면서 그 사람도 같이 건지는 게 뭐냐? 이게 바로 성도의 천국행, 천국으로 가는 모습입니다. 인간의 사적인 시간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마치 낚시에 걸린 고기 같아요. 뭔가 진짜가 와서 가짜인 나를 딱 걸었을 때, 걸어서 낚싯대로 잡아당겼을 때 오는 그 기쁨, 이제 혼자 안 살아도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 고기가 낚싯대에 걸린 그 기쁨, 그게 성도의 기쁨이에요.
그러면 낚싯대에 걸린 그 순간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18장 2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아브라함 부부가 세 사람에게 맛있는 것으로 지극히 대접합니다. 낚싯대에 걸린 겁니다.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주여, 저를 떠나지 마옵소서.” 미친 거 아닙니까? 인간은 본인의 힘으로 살아가는 게 인간이잖아요? 자기 배움과 애씀과 그래서 얻어진 결과 그거 붙들고 평생 살아가는 게 인간이잖아요. 우리가 아는 인간은 이렇게 천사 만난 인간이 아니고 그냥 혼자서 혼자 사는 인간이에요.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인간은 무슨 재미로 사는지, 무슨 보람으로 사는지 한번 이렇게 혼자서 생각해 봐요. 제가 정리한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내가 말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서 내가 말할 때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그런 사람 만나 살아가는 것, 그게 사는 보람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나 칭찬해 주는 건 딱 싫고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옆에 서서 나에게 칭찬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말 다 들어주고 추임새 넣어주는 것, “잘 한다. 훌륭하다, 아이고, 왜 그리 사랑스럽냐? 내가 네 모든 걸 도와줄게.” 이게 세상사는 보람 아닙니까?
제가 평생 살아가면서 사는 보람은, 남이 나를 인정해 줄 때 그냥 막 사는 힘이 쑥쑥 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 기본 바탕 두 개가 보장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첫째는, 건강해야 되고요, 독감 걸리면 안 되고요, 말소리 안 나오고 이러면 안 되고요. 두 번째는, 내가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돈이 있어 줘야 돼요.
그러면 그 세 가지를 합해봅시다. 일단 몸 건강하고, 그다음에 두 번째, 내가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는 돈 있는 것, 그건 기본으로 깔리고요. 정말 본 내용을 차지하는 것은, 내 옆에 서서 훌륭하다, 사랑스럽다, 존경한다, 예쁘다, 대단합니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 하든 내가 다 들어줄게. 두 시간? 세 시간? 하루 스무 시간 내가 다 들어줄게. 다 들어줘서 당신 외롭지 않게 해줄게.”
이거, 이걸 저는 이제 세 가지로 이렇게 정리해 봤는데 이걸 다섯 가지로 늘린 사람이 있어요.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라는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가 이야기 한 건데 제 이야기 들었으니까 그 사람 매슬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인간은 욕구로 사는데 인간의 욕구는 다섯 단계가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입니다. 기본적인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원하는 생리적 욕구, 짐승들이 원하는 거죠. 두 번째는, 안전에 대한 욕구. 추위와 더위, 물론 생리적이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받고, 사기당한다거나 다른 사람한테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보디가드처럼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욕구.
일단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 있지만 그것까진 모자라고 내 곁에 누가 와서 나를 지켜주는 것 어느 팝송 가사처럼 “and I~” 그 욕구, 보디가드 받고 싶은 욕구, 보디가드처럼 나를 지켜주는 욕구. 세 번째 단계가 뭐냐?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이것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말하는데 나는 어디 소속되어 있다, 어느 직장이다, 어느 나라에 산다,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우리 아버지 이런 분이고, 우리 엄마는 이런 분이고, 우리 자식은 이렇게 공부 잘한다는 어떤 가정이라는 소속에서 오는 따뜻한 그 애정.
같은 부부라도 남 보듯이 하지 않고 따뜻하게 늘 결속되어 있는 그것. 어디 가도 잘 있느냐, 하고 안부 전화할 수 있는 것, 아프면 아프냐고 안부 전화할 수 있는 그런 소속감의 욕구, 이게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 하면 벌써 첫째 둘째 다 잊어버렸죠? 첫째는, 마실 물과 기본 먹을 것.
두 번째는, 어디 가서 강도를 뭘 만나든 지켜줄 수 있는, 내 옆에서 보디가드 해줄 수 있는 것. 세 번째는, “내가 지켜줬잖아.” 보디가드로 그냥 끝내면 안 돼요. 따스한 말로 ‘난 너 없이는 못 산다.’는 식으로 말로 옆에서 이렇게 소곤대는 가정이라는 소속감.
또는 자식에 대해 “그래, 너 집 없지? 집 사줄게.” 하는 그 든든한 아버지, “회사 어려워? 나와. 사업 차려줄게. 20억 있으면 돼? 너 하고 싶은 일을 해 봐.” 이렇게 해주는 부모님의 그 소속감, “네가 실패를 하든 어떻게 되든 내 집으로 들어와. 내 거 다 네 거야.” 이런 소속감 주는 그 욕구.
세 번째 욕구만 해도 뭐 대단하죠. 네 번째 욕구는,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욕구에요. “최고예요. 잘합니다. 당신 없이는 교회가 안 돌아가네.” 오늘도 난로 다 꺼졌는데 그럴 때 탁 올려주는 거, “당신 없이는 교회가 돌아가지를 않네. 참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 같아.” 이러한 욕구.
내가 못 하는 걸 다 해주는 슈퍼맨 같은 든든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 스스로 내가 남들 앞에 인정받고 존경받는 욕구, 너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당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욕구. 아직 하나 남았습니다. 좀 기다려보세요.
다섯 번째 욕구가, 남들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보다 내 속에 잠재적으로 내가 최고 신이 되고 싶은 욕구, 이게 매슬로의 욕구설입니다. 자, 인간은 이러한 욕구 없이는 못 사는데 매슬로는 모든 인간이 이 욕구 없이는 못 산다는 거예요. 마치 우리 입안에 있는 치아처럼 꽉 박혀서 어떤 경우라도 이 욕구가 바뀌지 않는다는 거예요. 빠지거나 하는 법이 없대요.
그렇다면 이 욕구를 가지고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럴 경우에 그 사람은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까, 그거 생각해 봤어요? 이런 다섯 가지 욕구에 대해서 우리는 “Ok, 동의합니다. 그 욕구가 마치 이빨처럼 나에게 박혀있습니다. 그런데 이빨처럼 박혀 있는 내가 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 그 욕구가 빠집니까, 아니면 욕구가 그대로 있는 채로 하나님 말씀을 듣는 거예요? 욕구가 있는 채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백프로 이건 가짜잖아요. 그 가짜 어떻게 처리할 건데요? 성경은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버려요. 하나님이 키우는 어떤 나무가 있는데, 옆의 나무가 슬금슬금 가지를 뻗어서 하나님이 진짜 새로운 피조물을 지키고자 하는데 그런 가지가 있다? 텍사스 전기톱 가지고 어떻게 하겠어요? 옆에 있는 가지를 잘라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사정없이 잘라내죠.
어떤 분의 이야기를 제가 전화로 받았습니다. 전화 받았는데 그분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언급해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느냐 하면, 욕구를 가진 채 교회 왔을 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과연 진짜 하나님이냐? 욕구는 욕구대로 살리고 하나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
제1 욕구, 생리적 욕구가 중요합니까, 말씀이 중요합니까? 안전의 욕구가 중요합니까, 말씀이 중요합니까? 소속 안정감과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욕구가 그게 중요합니까, 말씀이 중요합니까? 남한테 존경받는, 존중을 받는 욕구가 중요합니까, 말씀이 중요합니까? 내가 신이 되고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중요합니까, 말씀이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둘 중에 이렇게 물으신다면 우리는 “둘 다 안 되겠습니까?” 할 거예요. 둘 다는 안 돼요. 그래서 욕구를 지닌 채 하나님 믿는 것은 천국 갈 수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에 여기 말씀이 갖고 있는 텍사스 전기톱이 등장해서 욕구를 잘라버립니다. 말씀을 사용해 욕구를 잘라버려요.
자르는 방법은 뭐냐? 간단합니다. 모든 말씀 뒤에 십자가 피가 묻어있는 거예요. 모든 말씀 뒤에 십자가 피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 들이대면 전부 다 다 도망갑니다. 다 도망가요. 그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어디서 한 번 정도는 들어본 말씀이죠? 여기서 욕구를 가진 채,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채, 하나님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채 그 사람이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 들이대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그래서 제가 요한복음 17장 9절을 들이댔습니다. 텍사스 전기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여러분도 같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17장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17장 9절,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니요, “하나님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그러면 뭐냐? “세상에 있는 내 사람을 위함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안에 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 들이대는 사람, 그 텍사스 전기톱 갖다 대야 되겠죠? 하나님은 세상을 위하지 않는다는데 당신은 지금 당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세상을 그리워하고 세상에게 칭찬받고 세상에게 존경받고 살잖아.
그러니까 그 당신의 욕구, 빠지지 않는 이빨을 말씀이 와서, 예수님의 피가 그걸 잘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동안 어떻게 교회 다녔어요, 어떻게? 그 욕구를 그냥 두고 교회를 다녔으면 안 돼죠. 주님처럼 돼야지요.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면 우리도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을 거부해야죠. 우리가 기피해야죠.
그 사람이 또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제가 들이댔죠. 요한복음 6장 38, 39절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믿음의 주인공 주체, 믿음의 시작점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6절 들이대는 사람은 누가 믿음의 주인공이냐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이건 전기톱 가지고 잘라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인 하나님을 내가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거 아닙니다. 그건 세상의 천주교, 기독교가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교회 사업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거.
그러면 영생은 뭐냐?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나오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지막 날에. 인간에게는 마지막 날이라는 게 없어요. 인간은 죽어도요, 죽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에겐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은 시작도 안 했어요. 인간에겐 죽음이 있는 게 아니라 멸망이 있죠.
왜냐하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멸망치 않고”라고 했으니까. 그 “멸망치 않고”가 각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에요. ‘멸망치 않고’ 멸망하는 자,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 중에서 하나님 스스로 믿음을, 예수님이 하신 그것이 일방적으로 제공되는데 그게 바로 믿음이고, 그 믿음 안에 영생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멸망해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닦달 내면 안 돼요. 의미 없는 것이 당연히 멸망 당해야 마땅한데 거기에 이의 걸면 안 되죠.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는데 바다가 쫙 갈라지면서 걸어왔죠. 대단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달라졌습니까? 바다가 갈라져서 그 사이를 통과 한다고 치아 뿌리처럼 박혀있는 인간의 욕구가 빠지던가요? 오히려 바다 건너와서 광야에 있을 때 잠복 되어 있던 애굽의 욕구가 확 일어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욕구대로, 욕망대로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율법 주는 순간 말씀 주는 순간 너희는 이미 죽었다.”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예요.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사는 세상을 주님께서는 하나의 거대한 무덤으로 봐요. 그게 요한복음 5장 28절에 나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 무덤에 보내버려요. 무덤에다 몽땅 다 집어넣어요. 태어났습니까? 그러면 무덤에 가셔야 합니다. 어린애라도, 유치원 애라도 무덤에 가는 거예요. 이 코스는 ‘정녕 죽으리라.’에 의해서 변경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멸망 당한다면 의미가 없는데 그럼 인간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의미가 있으려면 의미 있는 죽음과 결합이 되야 해요. 연결이 되어야 됩니다, 연결. 의미 있는 죽음은 예수님 십자가 죽으심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성소 안에서 죽는 죽음이기 때문에요. 여기서 성소라는 의미가 또 새롭게 부각되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 앞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천사가 부는 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바뀌었습니까? 인간 마음속에 있는 욕구가 그걸로 빠졌습니까? 안 빠졌습니다. 그렇게 보고서도 모세에게 대들던 것이 인간입니다.
그들이 안 바뀌었는데 우리가 바뀐다고요? 사람이 죽는다고 바뀌어요? 인간은 죽는다고 해서 안 바뀝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멸망 요소가 인간의 죽었다는 그 내 인식보다 더 기초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내가 뭘 해도 멸망은 멸망으로 가야 돼요. 멸망으로 가야 될 게 바뀌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성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친절하신 주님, 성소 안에 인간이 알 수 없었던 모든 의미가 성소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소 안의 기능을 제사장을 통해 보여주게 했습니다.
“백성들아, 이 제사장이, 내가 택해서 세운 제사장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그 활동을 하면서 일하는 절차를 주의 깊게 보아라. 너희 백성들이 갖다 바친 양이 일단 성소 바깥 제단에서 피 흘리고 불태워지지? 그 흐른 피가 어떻게 절차를 밟아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보라.”는 말이죠.
이게 우리의 길이고 이스라엘 길입니다. 그게 바로 죽음의 코스에요. 인간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이유가, 처음부터 죽어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살았다고 생각할 때나 나오는 죽음이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욕구가 살아있는 것이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내 욕구를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욕구가 나보다 더 근원적이고 나보다 더 셉니다. 나보다, 내 육신보다 내 욕구가 더 세고요, 내 욕구를 어찌할 수가 없어요. 근데 욕구보다 더 센 게 인간 안에 있습니다. 그건 인간이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걸 알려줬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그 내막이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16장 21-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툭 던집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 안에는 그 안에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죠.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어요.
윤석열 대통령이 구속당한 것은 그렇게 가슴이 아파하면서 예수님이 구속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슴 아파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죽어야 마땅하다고 같이 편승해서 외쳤을 겁니다. 네가 뭔데 내 욕구를 건드리냐는 거예요, 네가 뭔데? “예수 당신이 뭔데 우리 욕구에 대해서, 우리 기본 욕구에 대해서 그걸 험담하느냐? 당신이 죽어라.”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는 것은, 말씀이 뭔가 방향이 있어요. 우리 욕구를 건드려요. 우리 기본 다섯 가지 욕구를 건드리니까 ‘우리는 이거 없이는 살 이유도 없고 재미도 없다. 따라서 날 건드리지 마. 날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당신이 죽어야지.’ 욕구를 건드려서 예수님이 죽었던 겁니다. 구속시켜서 죽이는 거예요. 동조자 아무도 없었습니다. 8차선 도로 가득 채우는 태극기 부대도 없었어요. 그냥 홀로 구속당했어요.
도대체 이 빠지지 않는 욕구, 홍해 사건 해도 안 변하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말씀을 음성으로 들려줘도 듣기만 들었지 변하지 않고, 심지어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예수님이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하고 나타나도 “이야, 멋집니다. 같이 삽시다.” 이런 소리나 했지 베드로의 욕구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이게 이빨이 안 빠진 거예요. 욕구 이빨이 안 빠진 거예요. 누가 욕구를 붙잡고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붙잡고 있는지.
21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고난당한다고 할 때 2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주여, 그럴 일 없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보디가드, 두 번째 안전의 욕구죠. 우리 조직은 소속감의 욕구입니다, 세 번째 욕구.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이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 소속은 안전빵입니다. 지켜주실 겁니다. 또 우리가 지킬 겁니다.” 욕구죠, 욕구입니다.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할 때 24절에서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탄은 하나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람의 일을 생각합니다. 사탄은 이미 악마의 뿌리를, 존재의 뿌리를 잡고 있어요. 사탄에게 백날 발악해 봐도 사탄의 광기를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욕구가 인간의 광기를 만들어내요. 왜 세상은 내 욕구를 안 들어주느냐? 거의 미쳐가고 있어요. 다섯 가지 욕구에 대해서 그게 충족되지 않는다고 미쳐가고 있어요.
자기 욕구가, 자아라는 것이 이렇게 허약할 줄이야! 자아가 자기 마음대로 관리가 안 되는 이유는 욕구가 더 세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욕구의 뿌리를 누가 잡고 있는 줄은 몰랐죠. 예수님이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그건 바로 사탄, 악마가 인간의 욕구를 갖고 장악하고 있었던 거예요. 말씀은 그 악마를 향하여 겨냥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그걸 알죠. 차곡차곡 접근해 주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악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피를, 그걸 농담으로 여기고, 거부하고 나랑 같이 가자. 어차피 멸망의 길인데!” 이미 악마는 멸망의 길이에요. 그래서 악마가 제시한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욕구, 자아 실현의 욕구, 다시 말해 이겁니다. 너는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섯 번째 욕구에요. 자아실현의 욕구, 나의 완전성을 내가 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 있다는 거예요. 나는 나답게 될 수 있는 자격이 나에게 부여되어 있다는 거, 악마가 그런 이야기로 계속해서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매일 같이요. 매일 같이.
회사 때려치우고 사업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아실현의 욕구잖아요. ‘나도 내 사업하고 싶다. 내 장사하고 싶다. 이제 정말 나도 나답게 되고 싶다, 나답게.’ 어떤 연극 제목이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하는 게 있어요. 그 전에 뭐 바다 구경도 안 해본 모양이죠. 그동안 바다 구경을 왜 못했는가?
결혼해서 시어머니 시아버지 섬기고, 애 키운다고 남 좋은 일 시킨다고 했는데 내 바다를 못 본 거예요. ‘이제는 다 때려치우고, 자식이고 뭐고 간에, 가정이고 뭐고 나는 내가 보고싶은 거 보고 내가 하고싶은 거 하고 싶다.’ 그 나이가 50대라는 겁니다. 벌써 40년 전의 연극 제목이에요. 유명한 연극 제목이었습니다. 요새는 뭐 80 돼서 바다 발견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요. 요새는 또 벌써 서른 살 때 바다 발견하겠다고 배낭 메고 유럽 여행 다니고 그런 것도 있잖아요.
베드로는 몰랐던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18절이 아주 결정적입니다. 16장 18절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름이 바뀝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 되어 시작을 예수님부터 하는 거예요. 인간의 시작 말고 예수님의 시간, 하늘의 시간이 드디어 베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 천국 백성에 대한 조건이 이미 확정됐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못 이기면 그건 교회가 아니무니다. 성도가 아니무니다.’ 욕구라는 악마의 광기, 그 광기를 주님의 피라는 광기로서 잠재우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닙니다.
내 안에 다섯 가지 악마의 광기가 설쳐 대는데 백날 설쳐 대도 이미 나는 ‘예수님의 피’라는 광기에 의해서 홀로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안에 이미 들어가 있으면 예수님의 죽음이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작동하는 그 장소가 우리의 육신이 되고 그래서 우리 육신 안에서 그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 거예요. 욕구는 욕구대로 감지하면서 그 미친 욕구를 그보다 더 미친 방법, 하나님의 죽는, 하나님이 죽어버리는, 인간은 상상도 안 되는 미친 방법으로 악마의 미친 방법을 잠재워버리지요.
사랑에 미친 거예요, 사랑에. 주님의 사랑에 미친 자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너 그러다 죽어!” “이미 죽었어, 주님과 함께 이미 죽었어.” 나의 육신은 살아 있더라도 이미 주님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전부 이것은 뭐냐?
인간의 시간 들의 역사를 가지고 그것을 실체로 보잖아요. 천주교나 성공회나 모든 개신교파도 마찬가지고요. 지난 겨울 수련회 강의를 들어보신 분들은 알겠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총신의 도서관에 가면 15만 권의 책이 있다. 그런데 그 가치는 뭐냐? 1킬로그램에 50원 하는 폐지다.” 나이 든 분들 리어카 끌고 폐지 수집하잖아요. 다 그런 폐지들이에요. 다 쓰레기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알려면 그 쓰레기들이 어떤 내용인지를 다 알아야 해요. 그것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내 욕구는 욕구대로 인정받으면서 하나님 믿어서 천국 가려는 자아성, 마귀적 욕구, 그 마귀적 욕구가 글로 쓰인 그것이 15만 권의 책입니다. 그거 공부하고 나온 사람들이 목사들이에요. 그래서 세운 것이 교회고요. 같은 욕구로서 천국 가고 싶은 욕망으로 나온 사람들이 교인들이고요.
그 목사에 그 교인들, 마귀가 얼마나 호탕하게 웃겠습니까? ‘또 성공했다!’ 또 성공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입니다. 텍사스 전기톱이에요. 잘라버립니다. 욕구를 잘라버려요. 죽음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사는 것도 없어요. 그냥 멸망의 형태를 보일 뿐이지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자, 이제 도대체 이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기에 이미 일방적으로 죽은 우리가 사느냐? 성소는 인간세계를 함축시켰기 때문에 그 어린양으로 대변되는 그 인간은 성소 뜰의 제단에서부터 이미 죽어 나갑니다. 죽어 나가는데 놀라운 것과 고마운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죽인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로 낚싯대에 걸린 고기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의 죽음에 의해서 이미 같이 죽었다는 것, 하나님이 이미 죽었고 그 죽음으로 우리를 죽여주신다는 그것,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구약 룻기 1장 1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이방 여인, 요새로 하면 필리핀 여자쯤 되지요, 이방 여인, 이민족 모압여인 룻의 소원이 뭐냐? “우리 시어머니 죽는 곳에 같이 죽게 해주세요.” 이 말은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이 믿는 모압의 신하고 똑같은 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버린 자기 백성을, 그 집안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서 처단하는 것을 보니 진짜 이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서 활동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 언약 위반했다고 죽여버리는 그 하나님만이 살아 있음을 알았으니 그 하나님 앞에 나도 같이 죽임을 당하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이방 여인 며느리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기톱에 내 모가지도 날아가게 하옵소서.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영생이고. 그게 말씀 안에 들어 있는 힘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인간은 그저 늙어서 죽는 줄로만 알고 있어요. 아니에요. 한번 죽는 것을 정했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경험하는 죽음이에요.
모든 인간은 멸망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다 같이 멸망하고 있어요. 죽어도 죽는 것이 그 의미를 몰라요. 살아도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이 죽음, 성소 안에서 어떤 죽음이 일어났는가? 민수기 16장부터 18장까지 나오는 긴 이야기 속에서 같은 레위인인 고라와 다른 레위자손이 모세한테 데모를 했어요. 그게 무슨 죄냐?
내란 선동죄가 일어난 거예요. 고라를 비롯한 족장들 250명이 합세했어요. 국회의원들이지요. 그들이 합세해서 모세를 내쳐버렸습니다. 내친 이유가 “우리가 출애굽 할 때 다 같은 입장에서 홍해를 건너왔잖아. 어디서 우리 위에서 대장질을 하느냐? 민주주의로 가자, 민주주의로. 민주주의가 꽃이잖아.”
고라와 다른 레위자손들은 민주주의로 본 겁니다.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라고 본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의 낚싯대에 걸린 고기인 줄도 모르고 자기하고 똑같은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이 죽으시는 죽임으로 죽입니다. 그게 고라 사건이에요. 땅이 갈라졌습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민 16:3-35).
땅이 살아 있다는 것을 그동안 인간들이 몰랐던 거예요. 땅이 살아있다. 그들이 서 있던 땅이 단단하게 있었기에 움직인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겁니다. 땅이 살아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땅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소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이 직접 거룩한 죽음으로 죽이는 그 죽음을 성소 안에서 체험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누가 더 나오는가?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한테 작당해서 달려듭니다. “250명을 죽여버리면 그다음 차례는 우리로구나. 우리를 다 죽이려고 환장했나? 모세 당신이 우리를 광야로 데려와서 당신이 한 것이 뭐가 있나? 하나님 소개하는데 결국 그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는 하나님이잖아.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이 아니었잖아. 그 무시무시한 하나님을 왜 우리에게 동행시키느냐?” 하면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또 달려듭니다.
민수기 16장 49절에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명이었더라.” 아까 지도자급 250명 죽었지요. 백성들은 전염병으로 1만 4천 7백명이 죽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알았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벌써 죽었다는 사실. 이미 죽은 것을 죽이는 거예요.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죽었는데 인간이 죽었을 때 하나님의 죽음의 의미가 그들에게 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살아도 의미가 없어요. 계엄을 하든 재판을 하든 의미가 없어요. 내가 결혼을 하든 취직을 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멸망 당하는 과정에 불과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취직이 되나 안되나, 애 키우나 안 키우나, 애 공부 잘하나 못하나 그거 의미 없습니다. 의미는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무덤 안에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고 난 뒤에 민수기 17장에서 “모세야! 이 성소의 의미가 뭐냐를 알려라. 언약궤 앞에 지팡이 열두 개를 모아라.” 각 지파의 지팡이 열두 개를 모아서 언약궤 앞에 놓았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 중에서 각 종족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취하되 곧 그들의 종족대로 그 모든 족장에게서 지팡이 열 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종족의 각 두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민수기 17:2-4).
모세는 왜 그 지팡이를 모으라고 하시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민수기 17장 8절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다른 지팡이들는 그냥 죽은 지팡이 그대로였어요.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생명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죽여주는 죽음 안에서만 영생이 있구나. 영생은, 내가 살았다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구나.’ 주님의 피, 주님의 십자가 피, 벌써 그 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 안에 주께서 예상 밖에 주신 생명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천사 세 명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아브라함이 걸려드니까 ‘아브람’에게는 생명이 없는데 ‘아브라함’에는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아브람’ 시절에는 ‘아브라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의미 없는 ‘아브람’을 언약적인 의미가 있는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들기 위해서 천사 세 명을 보내서 아브라함과 ‘할례’라는 피언약을, 계약을 맺은 겁니다.
그것이 다 모형이거든요. 모형이라고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창세기 3장이라면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렇게 나눠놓고 그다음에는 시간을 둘로 나눴어요. 시간을 둘로 나눈다는 말은 죽음을 둘로 나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 죽음은,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 두 번째 죽음은, 하나님의 죽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죽음, 두 번째 죽음, 그것이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은 자기 속에 있는 악마의 욕구를 못 이겨서 그 동생을 죽여버리지요. 자기 욕구입니다. 동생을 죽여야 자기 욕구가 만족하니까요. 자아실현이 달성되니까요.
그런데 창세기 4장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죽은 아벨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이어갑니다.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나오게 하셨어요. 창세기 4장 25절에,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라고 되어 있고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지 셋을 낳은 것이 아니고 죽은 아벨을 새롭게 만들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고 된 거예요.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죽었어요. 그런데 가인이 죽고 난 뒤에는 대신할 다른 씨가 없는데 아벨은 죽고 난 뒤에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이라는, 생명을 부여하는 새로운 이름이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두 번째’라는 의미에요. 기존의 죽으면 그만인 인간의 죽음 말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죽음이 찾아올 때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일찍 찾아오신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찾아오신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사느냐? 그 점은 저에게 물을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에게 물어야 하지요. 로마서 14장 7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여기 ‘사는 자, 죽는 자’에서 예수님을 위해서만 의미 있는 삶과 죽음이 된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것이 된 사람은 자기의 것으로 살던 것이 끝나는 거예요. 사는 것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8, 29절에서는 이 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심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말씀에 요즘 시대에 맞는 감정을 넣기 위해서 이렇게 바꿔 보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윤석열을 밟고 윤석열의 계약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민주당 의원들,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받을 형벌이 얼마나 중하겠느냐?”
지금 느낌이 확 오지요? ‘나를 살려준, 내가 투표한 대통령을 밟고 너희들이 지옥 안 갈 것 같아?’라고 여러분이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생존의 욕구에 속한 겁니다. 이제 욕구라는 그 이빨이 빠지고 거기에 예수님을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성도에요.
누구 하나 구속되는 그것보다 예수님이 구속되고, 예수님이 죽는 걸 더 가슴 아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더 이상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천국으로 낚아챈, 영생으로 낚아챈 우리 주님이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성도라고 이야기하고 그 성도에게만 주께서 재림할 때 찾아오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내 것, 다 내 것, 내 인생 지키자, 관리하자, 그럴싸하게 만들자, 이게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악마의 음성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