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교체된 기준

아빠와 함께 2025. 2. 2. 22:24

교체된 기준

2025년 2월 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0:5-7

(10: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율법은 모형입니다. 그리고 인간도 모형입니다. 모형이란 실체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체가 등장하면 아낌없이 스스로 포기하고 자진 철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 말고 우리를 구원하려 다른 몸을 준비하셨다고 고맙네”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으시고 배제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번세나 소제나 속죄제 드릴 자격이 안되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는 구현해야 하는 취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제사의 기본 취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정신병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옷을 안 입고 벌거벗은 것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옷을 해입는 처신이 본래의 인간에서 이미 이탈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는 선언 안에 이미 인간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죽음은 따로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 두신 모든 제사, 즉 속죄제나 번제나 소제는 그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죽음이 담겨 있어야 하나님께서 만족하십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시고 하나님께서 따로 한 몸을 하늘에 대기하셨다가 지상에서 출격시켜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의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상대하지 않으심이 분명해졌습니다. 기존의 인간들은 이미 ‘눈을 뜬 상태’에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 행함이 끼어드는 나름대로 절차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시편 40:5-7에서는 인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필연적 절차를 미리 예고하십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이런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 인간들쪽에서 알아야 될 것은, 그동안 기적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기적(=우연)은 그야말로 기적(=우연)이 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기대나 희망이나 행함이 배제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의 계획이 공포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공포에 짓눌러 삽니다.

공포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삽니다. 공포는 왜 생기는 겁니까? 그것은 망하기 싫어서입니다. 왜 망하기는 것이 싫지요? 그것은 망하믄 것이 창피스럽기 때문입니다. 왜 차잎를 느껴지요? 그것은 인간은 스소로 생각하시를 자신들은 누구의 행동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존재는 자신의 행함에만 종속되는 것으로 정신적인 독립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너는 더는 누구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 마치 이 ‘주인됨’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걸쳐 노력합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외에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음에 나오는 짧은 시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바로 그 낫으로

즉 주인은 종을 종으로 여기기를 강요했지만 종는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종이 아니야”라는 면면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마태복음 21:38에 보면,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낫에 피가 묻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묻은 낫’을 유일 천국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이를 위하여 기존의 모든 인간을 제치고 다른 몸을 하늘에서 대기시켜 놓았다가 지상에 파견하신 겁니다. 인간들이 제사 주도자로 나설 수 없는 이유는, 제사 자체가 제사 드리는 자를 버리도록 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8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구원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버림받은 그 곳입니다. 그곳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우연 중에 우연이고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체포되어 죽기 위해 로마가 간 이유는 철저하게 인간을 모독하는 하나님을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는 ‘십자가 앞’에 있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 속’에 있는 자입니다. (갈 6:14)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만이 ‘내 책임’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악마’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타고난 정신병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취한 것은 쉽게 표현해서 ‘주님의 탕냄비’입니다. 음식을 쪼아 닳려서 원래 얻고자 하는 것을 맛있게 조리하는 주방기구입니다. 예수님도 넣으시고 그리고 구원될 자도 거기에 넣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걸쳐 주님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성도가 자립성과 책임감과 자기 자랑을 다 증발시켜 버립니다.

남는 것은 ‘피 묻은 낫’ 곧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평생토록 닳여주시고 소모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생각한 모든 필연은 다 휘발되어야 합니다. 남은 것은 ‘주님 홀로 해내신 필연’ 뿐입니다. 말씀이 품고 있는 나에 대한 모독이 전달되는 것이 곧 선물이요 기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준 교체에 저희들을 참여시켜 주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2강-히브리서 10장 5-7절(교체된 기준)250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5-7절입니다.

히브리서 10: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의 진정한 완성은 우리 인간을 제끼시고, 인간에게서 찾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뜻을 구현할 완벽한 분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느냐?’ 하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 10장 5절에 보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제사법을 준 게 있어요. 제사와 예물을 나한테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제사와 예물에 대해서 주님께서 한 몸을 준비하고 난 뒤 그다음의 조치가 “나는 너희가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한다. 너희의 번제와 속죄제를 나는 받지 않겠다.” 이렇게 나오신 겁니다.

제사와 예물을 나한테 드리라고 해놓고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에서 신명기에서 그렇게 해놓고는, 누구든지 제사와 예물을 드리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확답처럼 여겨지는 말씀을 해놓고는, 주께서 시편 40편에서 예언하시기를 따로 한 몸을 딱 준비해 놓고서 “나는 너희들하고는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드린 제사와 예물을 안 받는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아, 안 받는구나.’ 이렇게 할 게 아니고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해요. 그 이유가 시편 40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40편 5절에 보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생각과 기적에 대해서 우리를 그 원인 제공자에서 뺀다는 거예요. 네가 바르게 하면 기적을 주겠다는 이런 식의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풀었는데 그 기적은 우리가 뭔가 바르게 행해서 주어진 기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기적을 행할 때부터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빼시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내가 너의 번제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내가 한 몸을 준비했는데 그 한 몸에 의한 하나님의 제사만 받겠다.’라는 거죠.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기적은 뭐예요? 은혜는 뭡니까?

이것은 우리가 바르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법대로,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기적은 아니다, 이 말이죠. 아닌 거예요. 기적이라고 했는데 그 기적을 요즘 현대말로 바꾸겠습니다. ‘우연’이라고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모든 기적은 우리하고 거래를 안 하고, 우리하고 소통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줬기 때문에 받는 우리 입장에서는 우연히 받는 거예요, 우연히. 그냥 선물로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적을.

선물을 받는데 그 선물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는 아니거든!” 그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너하고 상대하기 싫거든? 너는 그런 가치밖에 안 되거든?” 그것이 안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이 말이죠. 선물 주면서 “선물 받아라.” “예. 잘 받았습니다.” 그러면 끝날 문젠데 그게 아니고 선물 안에 뭐가 들어 있냐 하면 “너는 X거든. 너는 엉터리야.”

인간은 평소에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필연’을 생각해요, 필연. 나의 스케줄을 생각한다고요.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고, 이렇게 이런 원인을 제공해서 이런 결과를 획득하고 있고, 나는 내가 투자한 만큼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 어떤 결과를 기대합니까? 왜 기대하죠?

이걸 하나님은 문제 삼는 거예요. 아주 단출하게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를 생각 안 하는데 천국 간다?’ 세상에, 그래서 갈 수 있어요? 십자가를 모독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천국엘 가요? 그런 일은 없어요. 주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받고 천국 가는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다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데 인간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은 뭐냐?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 밖에 할 줄을 몰라요. 자기 자신을 왜 지킵니까? 왜 내 인생을 내가 사수해야 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 그게 인간에게는 필연이에요. ‘내가 사는 방법은 내가 하는 것을 열심히 함으로써 그 결과로 내가 산다. 내 노력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나는 산다.’ 이것 말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안 갖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네가 번제 드리고 제사드린다고? 네가 제사하고 번제 드린 그 결과로 네가 하나님의 복을 따내고, 마지막에는 네가 하나님과 함께 구원받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나는 그런 너와 더 이상 상대 못 한다. 나는 너를 뺄 거야. 너 말고 교체로 들어가는 분이 있을 거야. 네가 생각하는, ‘나는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구원받는 그것까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는 그 기준, 그 기준 난 안 받겠어.”

그 기준을 난 못 받겠다는 겁니다. 네 수준에서 알고 있는 필연적 원인과 결과이기 때문에, 순서기 때문에 안 받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뭐냐? 어떤 인간도 알 수 없는 기준을 주께서는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습니다. 모든 인간을 제끼고, 모든 인간을 거절하고, 거부하고,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한 몸을 준비했거든요.

그 몸이 준비한 그 일은, 어떤 인간도 그 일에 대해 알아먹을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요. 인간은 왜 자기만 생각할까요? 자기를 망치는 것이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왜 망치면 안 되죠?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인간은 왜 자기 인생이 망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느냐?

그건 창세기 3장 7절에 나와요.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예요.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인간은 부끄러운 거예요. 뭘 부끄럽게 봤는가? 자기 존재에 대해서 부끄럽게 보기 시작한 것을 두고 눈이 밝았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벌거벗은 것을 두고 “야, 너 옷 좀 입어라.”라고 그렇게 지시한 적이 있었던가요? 명령한 적이 있었던가요? “네가 만약에 옷을 입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렇게 이야기했던가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옷 벗은 채로 그냥 살아.” 하나님이 원했던 건 그거예요. 너는 눈이 밝으면 안 돼요.

왜? 인간이, 눈이 밝아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이 된다는 말은 나에 대한 평가를 내가 최종적으로 담판을 짓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익인지 소실인지 내가 평가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평가하는 목적은, 내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내가 창피당하기 싫어서.

눈이 밝은 내가 창피당하기 싫은데 그 창피가 무엇으로 오느냐? 그것은 공포로 와요. 무서움으로 와요. 망하는 것이 인간은 제일 무서워요. 안 망하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은 공포로부터 나옵니다. 무서움으로부터 나와요. 무서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를 지키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어요.

그걸 ‘방어기제’라고 하고 그 방어기제가 모든 정신병의 원인입니다. 모든 정신병은 나를 극도로 지키는 데서 시작하는 거예요. 따라서 정신병자 아닌 인간이 없어요. 모두가 정신병자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뭐냐? 필연이에요, 우연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서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내가 잘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냈다는 것은 바로 그 인간을 모독하는 겁니다. 아주 창피를 줘 버려요. 아주 모독을 해버려요. 모독을 하니까 이미 자기가 누구의 종이 아니라 누구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악마가 시킨 거였죠. “네가 스스로 주인이 되리라. 네가 스스로 신이 되리라.” 이렇게 했어요.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이 이스라엘 역사 구약에서 뭘로 바뀌느냐? ‘나의 주인은 영원히 나다.’라고 바뀝니다. 내가 주인 노릇할 수 있는 그 신을 가지고 구약에서는, 여러분 잘 새겨들으세요, 그걸 ‘바알’이라고 합니다, 바알. ‘바알’의 뜻은 내가 주인이라는 뜻이에요.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체포된 죄목이 뭔 줄 아세요?

사도 바울이 잡혀서 로마에 처형받으러 가는 그 죄목이 뭐냐? 인간을 모독하는 신을 외쳤기 때문이에요. 이미 범죄한 인간은 자기가 각자 주인입니다. 그 주인 됨을 모독했다고 해서 사도 바울은 체포된 겁니다. 제가 시를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이런 시입니다.

낫(김남주, 1946-1994)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둘째, 주인이 종을 깔보자. 셋째,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마지막 넷째, 바로 그 낫으로. 다시 하겠습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낫으로 베어버렸어요.

이 시를 이렇게 고치면 딱이에요. 십자가 앞에 놓고도 십자가를 모른다고 언급하자 종인데도 불구하고 자칭 주인 노릇하고 있는 그 노예들이, 종이 주인의 목을 쳐버렸어요. 그런데 그 낫에는 뭐가 묻어있는가? 종인 주제에 주인 노릇하면서 목을 칠 때 그 피가 묻었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이게 어느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기준입니까? 어떤 인간이 그 기준을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기준 모르고 기준도 모르는 채 구원을 받아요? 기가 차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주님이 주신 기준, 이 피 묻은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기준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거 때문에 인간 제끼고, 모든 인간 제끼고 따로 한 몸을 준비한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그 짓거리들이 뭐예요? 피 묻은 십자가 이야기가 교인들 간에 안 나옵니다. 뭐가 나오는지 알아요? ‘나는 나를 이렇게 지켜와서 이제는 창피스럽지 않은 인생을 보낸다.’ 이거 나와요. 그런 거 나와요. ‘나는 덜 창피스럽고 덜 공포스러운 미래를 마련했다.’ 이런 게 나온다고요. 그래 놓고는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성경 보면서 느끼는 것은, 성경은 분명히 매 순간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주신다고 되어 있어요. 성경 내용이 은혜에요. 우연이고 기적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삶은 뭐냐? 매 순간 내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안 챙겨준다는 식으로 살아가요. 여기 무슨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게 어떻게 소통이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 제끼고 예수님을 보낸 이유는 모든 거꾸로 세워진 기준을 다시 거꾸로 세우기 위함이에요. 그냥 종은 종으로 살면 되는데 주인 노릇을 한다는 말이죠, 선악과 따먹고. 그러니까 이걸 다시 종으로 바꾸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종으로 오신 거예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알다시피 내가 온 것은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그런데 마태복음 21장 3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이렇게 나와요.

이게 바로 이미 말아먹은 인간, 이미 하나님에게 범죄한 인간, 서로가 서로에게 주인 노릇한다고 아주 환장한 그 인간들의 생각이, 그 의지가 어디로 집결되느냐? “상속자니 죽여버리자.” 하는 쪽으로 힘이 쏠리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그 시처럼 낫 놓고 기역자(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뭐라고 하니까 종이 되어서 기분 나쁘다고, 창피스럽다고, 당신 존재가 나의 존재를 모독했다고 그 낫으로 주인의 목을 쳐버렸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선 그 낫을 귀하게 가져와서 ‘그 낫에 묻어있는 피, 바로 너희가, 너희 삶의 기준이 나의 삶의 기준을 죽였다.’고 그걸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준 없으면 아무도 아들의 나라 천국 못 갑니다. 이게 바로 성경 전체 내용을 압축한 거예요.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외칠 때에 그때 많은 사람들이 “네가 신에 대해 이야기 안 해도 우리가 이미 신을 믿고 있고 신을 알고 있어. 자꾸 다른 신을 언급하지 마.”라고 해도 사도 바울도 답답해요. 내가 외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에게는 이게 뭐냐 하면, 새벽 탁송 배달부예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누굴 구원하려고 외치는 게 아니고…’,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 “왜?” “저 집 맞아요?” “그래. 저 집이다.” “예. 갖다줬습니다.” 띵동! “여기 새 카드 나왔는데 사인하시죠. 받았죠? 저는 갑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그냥 주님의 종이에요. 자기가 남을 구원하는 주인이 아니고,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해요. 왜? 누가 구원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도 바울은 움직이니까. 사도 바울은 그저 주님의 십자가를 전하는 거예요. “십자가 기준 외에는 천국 가고 구원받는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인간들이 죽였던 그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습니다.”라고 외쳤거든요, 사도행전 4장 12절.

사도 바울도 알아요. ‘이걸 내가 외쳐봐야 누가 알아듣겠느냐?’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보면 나와요. ‘들어도 깨닫지 못하더라. 역시 말씀 그대로 된다.’ 자기 경험상 보니까 이건 뭐 들려줘도 소통이 안 되니까요. 그렇게 할 때 사도 바울 때에 있던 그 유대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름대로 주장했던 신이 있어요.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지켜준다.’라는 그 신입니다. 아, 아주 교묘하죠?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사람들은 혹 갑니다. 왜? 뭐가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창피스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은 나의 존재를 모독하지 않을 거야. 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뭐가 빠졌는가? 십자가가 없는 소리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느냐?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 그 차이예요. “저 십자가가 나를 구원할 것이다.” 그거 아니거든요? 그게 십자가 취지가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교체가 일어나요.

‘왜 나 아니고 주님이냐? 왜 한 몸을 따로 준비했느냐?’가 이제 드러나는 거예요. 주께서 한 몸 준비했다는 말은, 이 한 몸 되시는 그분의 피(낫)에 네 피가 묻어있다는 것, 그게 묻어 있어줘야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하나님을 죽게 했다.’라는 것과 결부되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우리가 수모당해야 마땅함을 아는 그러한 기쁨이 바로 주께서 성령으로 주신 선물이에요. 우리의 필연, 우리가 생각했던 그 필연이 전부다 하나님께서 정말 인간을 쓰레기 취급할 만한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제가 구약 성경을 말씀드릴 테니까 여러분들도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구약 성경 사사기 19장 1절에 보면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유다 베들레헴에 레위인의 첩이 있어요. 남편이 그 첩를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 첩의 아버지 장인어른이 하루, 이틀, 사흘…, 계속 붙들고 있어요.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 그러면 이튿날에 “하루만 더 자고 가라.” 이런 식으로요.

7-9절에 보면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첩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하더니 다섯째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여자의 아비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돕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그 사람이 첩과 하인으로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첩장인 곧 여자의 아비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해가 저물어가니 청컨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찌기 그대의 길을 행하여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사사기 19장 10절에 드디어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떠나서 해가 저물 때 여부스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둘과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왔을 때에 해가 지려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그런데 기브아 지방의 불량배들, 깡패들을 만나서 그 첩이 밤새도록 강간당하고 아침에 보니 살해당해 있었어요. 죽어버렸습니다. 첩의 시체가 있었단 말이죠. 그러자 남편인 레위인이 이렇게 했습니다. 사사기 19장 29절에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하나님 믿는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화가 나서 토막 낸 시체 덩이를 열두 지파에 다 보냈습니다. 이 대목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죠? 이 대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인간이면 다 똑같은 생각 들어요.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냥 보냈으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장인이 무려 사흘 동안이나 붙들고 있다가 5일째에 겨우 풀어주니까 이런 사달이 나잖아.’

그때 그냥 떠났으면 자기 아내가, 첩이 안 죽었잖아요. 성경은 왜 이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인간의 기본에 필연적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어떤 비행기 조종사가 착륙하다 실수해서 사고를 일으켰어요. 버튼을 잘 못 눌러서 우당탕 착륙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습니다.

비행기회사에서 조사에 나섰습니다. “왜 버튼 조작을 잘못했느냐” “어젯밤에 아내가 이혼 하자고 해서 밤새도록 잠을 못 잤습니다.” “아내가 왜 당신 보고 이혼하자고 했는데?” “내 친구가 증권 회사에 있어서 주식 투자를 했는데 새로운 금융 정책에 의해 주식이 폭락했습니다. 손해가 커서 아내가 ‘이제 주식 투자하는 당신하고 못 살겠다.’ 하고 이혼 하자 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만약에 나라에서 금융 정책을 안 바꿨으면 내 주식이 폭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내 아내가 이혼 하자고 잔소리 안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잠을 푹 잤을 거고, 잠을 푹 잔 상태에서 업무에 복귀했으면 버튼 조작에 실수가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그 사람을 면직시키고 내쫓아버렸어요. 보세요. 인간이 자기가 망하는 게 싫어서 평생 나 지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내가 모든 것을 조사해 보면, 전부다 원인-결과, 원인-결과, 원인-결과…, 이것밖에 없잖아요. 우연은 없지 않습니까? 전부다 원인 결과에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를 더 끌어가 봅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중에 이혼당하고 결국 퇴직당했습니다. 비행사지만 노숙자로 살다가 우연히 또 마약을 하게 돼서 길거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뭐요? 그래서요?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안 따져도 너라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원인-결과 따지지 마. 너는 죽게 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지금 기준을 바꾸는데 천국 가는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되시는 분이 죄 있는 육신을 입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아들 되시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그 자리, 그 자리가 유일한 구원의 자리에요.

쉽게 말해서 죽어야 마땅함을 아는 자리가 유일한 구원의 자리에요. 예수님이 아는 원인-결과는 자기가 죽는 결과를 낳을 때 거기에 연결, 연결, 연결된 그 원인들이에요. 물 위를 걷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고 그 모든 일, 그 모든 일이 어디로 모아지느냐 하면, 십자가 죽는 일까지 연결,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게 주님에게 필연적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요? 그 필연을 이해합니까? 자기 몸뚱이 지키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어차피 인간은 망하게 되어 있고 저주받게 되어 있는데 이걸 강하게 부정하는 거예요. 강하게 부정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6장 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언제 간수한테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이 효과가 있었느냐?

사도 바울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옥문이 열렸어요. 옥문이 열리고 덩달아 다른 죄수들도 탈출을 했습니다. 죄수를 탈출시키면 간수가 대신 죽거나 옥에 갇히게 되어 있어요. 그때 바울과 실라는 찬미하고, 찬송하고 죄수들은 도망을 쳤죠. 사도행전 16장 27절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간수가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아까 생각한 것 다시 해봅시다. 사도 바울이 안 왔으면 옥문이 안 열렸을 것이고, 옥문이 안 열렸으면 죄수들이 도망을 안 쳤을 것이고, 도망 안 쳤으면 간수는 공직 생활을 계속했을 겁니다. 그런데 옥문이 열리면서 죄수들이 도망쳤으니까 그 책임은 자기가 지고 이젠 옥에 갇히거나 아니면 사형당해야 해요.

내가 남한테 사형당하는 그런 모욕감 대신 차라리 마지막 순간만큼은 나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존중하기 위해 내가 알아서 죽겠다고 자결하려 했던 거예요. 그때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 절차 빼놓고 다른 절차로 구원받는 절차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자기를 포기해요? 미쳤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인간이 자기를 사수 안 한다고요? 인간이 자기 의를 버린다고요? 그런 일은 없어요. 세상이 아무리 망해도 인간은 자기한테 절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옆 사람이 죽어 나가도 자기만 살아있으면 그만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왜? 나한테 주인은 나니까, 나밖에 없으니까요. 하나님 믿는 거요? ‘하나님이 지켜줄 거죠? 내가 귀하니까 하나님은 나를 지켜줄 거예요.’ 우리가 아는 종교는 이 종교에요. 하나님 믿으면 나를 지켜준다는 것. 하나님은 말합니다. “왜 너를 지켜야 해?” “무서워요. 공포스러워요.” “뭐가?” “내가 망하는 게.” 그런 식으로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닌 거예요. 뭐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인간에 대한 모욕감이 들어있는데 그걸 전혀 발견하지를 못하고 ‘주께서 지켜주실 거야. 주님을 사랑하니까 구원할 거야. 믿을 거야. 천국 보내줄 거야.’ 무슨 필연적 논리를 행사합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한다, 이거 필연이잖아요. 우연 아니에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이 절망할 때까지.

본인이, 내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인간은 하나님 믿는 자신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믿는 내가 하나님 기준을 방해하기 때문에요. 구약의 예를 하나 또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쳤어요. “왜 훔쳤습니까?” 그런 질문이 참 꼴사납죠? 왜 훔쳤습니까? 아, 탐이 나니까 훔쳤겠죠. 왜 탐이 났는데요? 내가 저걸 가져야 내 장래가 보장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들은 살든 못 살든 관계없지만 나는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물건을 훔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는 내가 여유롭게 산다는 그런 논리가 계산이 딱 나오는데 그걸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아간이 훔친 게 뭐냐? 여호수아 7장 21절에 보면,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돈 많아요,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 오십 세겔 금덩어리 그거 수천만 원 합니다. 그 물건을 훔쳤습니다. 이 물건을 누가 찾아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이걸 누가 찾아내는가? 사람이 찾아내지를 못해요. 그리고 인간은 필연이라는 바탕, 발판, 그 판 자체가 나 잘되기 위한 필연적 연쇄적 논리 고리로 짜여 있기 때문에 이 판을 내가 스스로 문제 있는 것으로 뽑아내지를 못해요. 그냥 꿍, 하고 입 다물고 전부 다 숨기고 있는 거예요. 이걸 누가 찾아냈습니까? 필연에 대해 우연이 찾아내요. 우연이 찾아내는 방법이 제비뽑기하는 겁니다, 제비뽑기.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천국 보냅니까?” “제비뽑기했다? 우연이 너를 찾아간 거야. 너의 필연을 모독하면서.”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 존재의 판을 뒤집어 버렸어요. 내가 이렇게 애써서 살아왔다는 그 판을 두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다. 나라의 금융 정책으로 인하여 내 주식이 날아가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아내가 ‘이혼하자. 당신이 내 돈 날렸으니까. 내 필연적이고 합리적 조치에 의하면 당신하고 더 살면 내가 빌어먹겠다. 이 필연적 조치에 의해서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내 장래에 이익되겠다.’라는 말을 한 것도 주님의 말씀이었다, 주님의 말씀.”

그래서 그 비행사 면직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나서 빌어먹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여러분 믿겠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에요. “제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니 좀 소모해라. 소모 좀 해라.” 소모하란 그 말이죠. 왜? 천국보다 좋은 게 없고 지옥보다 무서운 게 없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0.1초도 생각 안 하고 매일 같이 그냥 넘어갑니다. 천국보다 좋은 게 없고 지옥보다 무서운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의 무서움을 뭐로 덮느냐 하면, 남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그 외로움으로 덮어버려요. 내가 외로울 때의 무서움으로 덮어버려요. 나의 쓸쓸함으로 덮어버립니다.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나 하나 굶어 죽는다는 내 죽음의 무서움이 지옥의 무서움을 덮고 있어요, 방해하고 있어요,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필연적 일이, 스케줄이 꼬이면 이럽니다. 늘 듣는 이야기에요.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이러다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하죠. 숨넘어갈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 뭣하냐?” 전라도 말로, “너 뭣하냐?” “보다시피 저 죽습니다.” 주님이 말합니다. “너 안 죽거든! 아니 너 못 죽어. 네가 살고 죽는 것은 네 판에서 결정 나는 게 아니야. 내 판에서 결정하는 거야. 네 판이 틀려먹었어. 숨 끊어지면 죽는다고? 내가 너를 무덤 속에서 불러낼 거야.”

인간에겐 더 이상 죽음이 없습니다. 인간은 못 죽습니다. 죽음보다 더 센 게 있어요. 그건 영원한 저주입니다. ‘정녕 죽으리라.’의 그 죽음의 의미. 눈 뜨고 난 뒤에 아는 죽음의 의미는 가짜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아이고, 살다가 힘들면 죽지 뭐.’ 아닙니다. 인간은 안 죽습니다. 못 죽습니다. 저주받습니다. 저주가 우리 죽음을 대신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도서 7장에 보면 기꺼이 죽기를 재촉하고 있어요. 아, 존재에 대한 심한 모독이죠. 전도서 7장 3절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왜? 모든 사람이 결국엔 이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리 존재에 대한 모든 시도가 얼마나 헛짓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제가 젊을 때 본 영화가 하나 있어요. <007 골드 핑거>(Ian Fleming's Goldfinger, 1967). 제 기억으로는 007시리즈에서 제일 먼저 나온 영화예요. 그 영화를 보고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장기기억 속에 있는 장면이 있어요.

어떤 여자가 죽었는데 그 여자 온몸을 금으로 칠해서 죽였어요. 어릴 때는 과학을 잘 몰라서 ‘금칠을 했는데 사람이 왜 죽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때는 피부에도 숨구멍이 있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피부가 금칠로 다 덮이니까 그 여자가 죽은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고 말씀을 보잖아요. 그 말씀이 <007 골드 핑거>에 나오는 장면의 금칠이에요. 그 말씀이 우리를 죽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주님이 다 가져가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다 가져가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다. 그냥 우리는 내 멋에 살다가 저주받도록 놔두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마음 자세가 자기가 주인이라고 자꾸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성경 말씀 전한다고 먹혀들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자기 자신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이미 망가져 버린, 이미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좋은 말씀 가지고 설득한다고 개과천선하겠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평소에 하는 일은 뭐냐? 치매 노인들이 하는 거예요. 골목 많은 동네에 치매 노인이 살고 있다. 동네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집안에 끌어들입니다. 자기 몸뚱이는 요렇게 오므려서 자고 안방부터 해서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찼어요. 치매 노인 가까이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봤습니다. 온 동네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가져와요. 골목에 굴러다니는 스티로폼 같은 것들 다 가져옵니다. 예뻐 보인다고.

그런 노인들이 서울 골목골목 많이 있어요. 치매 노인은 말해도 못 알아먹고 설득 자체가 안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청 직원이 1톤 트럭 몰고 옵니다. 자율봉사하는 청년들과 함께 와서는 집안의 쓰레기 다 가져가지요. 그 치매 노인은 아주 발악을 하지요. 죽겠다고.

우리네 인생이 바로 치매 인생이에요. 치매 노인도 정신병 걸렸고, 멀쩡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정신병 걸렸고. 끌어모으면 그것이 골드 핑거에요. 성경 말씀 좋다고 끌어모으고, 성경 공부하는 것 끌어모으고, 그 끌어모은 것으로 자기 숨구멍이 막히는데요? ‘성경 공부해서 예수 믿게 되었다. 예수 믿음으로 나는 구원받는다.’

이게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필연이지요. 그거 교회가 주특기로 발휘하는 사기지요.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구원받고,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오늘 본문이 상대 안 하는데요?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의 뜻은 뭐냐? 번제와 속죄제 드릴 자격 자체가 박탈당했다는 거예요. 왜? 왜 우리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서, 예배드려서 구원을 못 받느냐? 왜 박탈되었는가?

번제와 속죄제가 뭐냐 하면, 우리를 제거하는 기능이 있었던 거예요. 번제와 속죄제가! 우리로 하여금 그 죽음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는 ‘나는 제사 드렸습니다.’ 이렇게 자기는 내빼는 경향을 보였던 겁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속죄제 드리라 해서 드렸습니다. 이제는 죄 씻어주세요. 번제도 드렸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십자가 믿으면 죄용서 해준다면서요? 저 십자가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주에서 빼주세요.’ 하고 자기 몸뚱이 챙기는 식으로 나가니까 이것은 번제와 속죄제 그것 가지고는 그 인간이 제거가 안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가 죽임당할 것을 말씀하니까 베드로가 말렸지요.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어요. 그럴 때 마태복음 16장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인간이 하는 일은요, 인간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하는 일이에요. 어떤 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유재석이 물었어요. “잔소리가 좋아, 충고하는 것이 좋아?”라고 하니까 “잔소리하는 것도 싫지만 충고하는 것은 더 싫어요.” 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내가 한 그 일에 내가 책임짐으로써 자기 존중이 돼요. 그것을 자존감이라 하는데, 내 일을 내가 알아서 책임짐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그 책임감, 필연적인 것을 계속 내가 갖고 있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에게 뭐가 없느냐 하면, 악마라는 존재가 없어요. 악마가 왜 끼어들어요? 내 잘못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면 되지 악마가 왜 끼어드느냐?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탄아!” 자기 제자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여기 악마가 나와요. 그다음에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악마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다시 말해서 ‘악마는 내가 하는 일을 훼방하고 방해한다.’ 그다음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쪽에 있고 그 반대쪽에서 누가 누구하고 한패를 먹었느냐 하면, 인간과 악마가 한패 먹으면서 예수님이 내세우는 천국 가는 기준, 예수님이 다 이루신 그 기준을 이쪽에서 방해하는 그 일을 인간들이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해오고 있다는 거예요.

짐승의 마음을 각자 개인이 다 할당받은 겁니다, 짐승의 마음을. 국화빵을 제가 구워봤거든요. 국화빵 구울 때 밀가루 짜 넣고 그다음에 그 국화빵 틀을 계속 돌리면서 앙꼬를 집어넣듯이 인간이 태어나는 족족 악마가 짐승의 그 자기 마음을 “너는 신이야. 네가 주인이야. 네 인생 네가 책임자야. 네가 알아서 하면 돼.”라고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하고 인간하고 한패가 되어서 전부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갑자기 오늘 설교의 제목 “세상에 임하시다.”처럼 갑자기 왜 주님이 끼어듭니까? 왜 끼어드는데요? 우리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하나님 잘 믿고 있는데. 하나님 믿는 것도 내가 책임지겠다는데요, 뭐. 성가대 지난주에 참석 못 했다? 그러면 이번 주에 헌금 5천원 내면 마음이 시원하잖아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잖아요. 나쁜 짓을 했다? 그러면 성경 더 보고, 기도 더 빡세게 해고, 그것으로 커버되지 않습니까? 왜? 나는 소중하니까. 누가 감히 나를 모독해요?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필연적인 모든 노력을 누가 허사로 만듭니까? 주님께서 “정신병! 치매 노인!” 네가 한 것을 끌어모아서 그 안에서 네가 신인양 착각하는 그 삶, 그것이 통째로 단합이 되어서 뭘 방해한다? 예수님만이 해야 하는 그 주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해 왔던 겁니다. 지금까지. 지금까지예요.

이제 슬슬 설교를 끝낼 때가 되었지요? 바짝 내려앉은 다크서클 없애줘야 하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날 때부터 정신병, 미치광이기 때문에 실컷 끌어모아서 자랑하는 것, 그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자체가 저주에요. 그 자체가 저주의 삶인데 이 공포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에 부담을 주는지요.

그래서 인간은 과로사하는 거예요. 공포가 내려앉는, 그래서 내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그 앞에서 뭐라도 해야 하거든요,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고, 그래서 암 걸리잖아요. ‘뭐야? 나 자체가 이것밖에 안 돼? 뭐야 이거.’ 이게 다 눈이 밝아져서 그런 거예요.

주님께서 뭔가 대책이 있잖아요. 그것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우연을 선물로 줘요, 우연을. 우연을 선물로 주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탕냄비, 이게 우리의 모든 걱정과 시름을 다 날리게 만들어요. 우엉조림이나 고등어조림 할 때 냄비에 물을 잘박하게 붓습니다. 거기에 이것저것 양념 넣고 끓이면서 졸이지요.

그러면 계속 끓어서 다 졸아들면 남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만 남지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탕냄비를 계속 졸이고 또 졸여주니까 남는 게 십자가에요, 남는 게. 그래서 피묻은 십자가! 그 기준을 품은 자만이 구원을 받아요, 그 기준을!

그러면 여러분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언제까지 졸여야 합니까?” 여러분 돌아가실 때까지 졸입니다. 믿었던 자식들 다 배신하고, 믿었던 아내, 믿었던 남편, 부모님, 치매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빨리 안 돌아가시나?’ 말로야 “올해도 만수무강하세요.”하면서도 ‘좀 알아서 빨리 안 돌아가시나? 코로나라도 와서 돌아가실 분들은 좀 돌아갔으면 좋겠다. 왜? 부모가 내 앞에서 망가지면 내가 창피스럽거든.’

모든 것이 공포가 주는 그 억압, 압박, 그걸 감당 못할 때 주님은 졸이기에 나섭니다. “어이! 제단에 소제, 번제 준비했어?” 예수님 집어넣고 구원 받을 자를 함께 집어넣어서 “예수님만 남고 나머지는 다 졸여버려!” 나 잘났다, 나 훌륭하다, 내가 알아서 이렇게 훌륭했다, 이것. ‘내가 이렇게 마귀에게 벌벌 떨었다. 나는 망할까 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거 다 졸여버려라!” 그렇게 졸이는 그 기간이 우리 숨 끊어질 때까지입니다.

그걸 소모한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매일같이 우연적으로 소모당하고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이 열심히 일한다고 여겼습니다. 믿었던 모든 것 날아가게 해주시고, 내가 믿었던 주님도 날아가게 해주시고, 남는 것은 그냥 선물로 주신 영생, 새벽탁송으로 온 듯한 영생, 제가 뭔데 이렇게 피 묻은 십자가를 다시 돌려보내시는지, 그것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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