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오직 하나님의 피

아빠와 함께 2025. 1. 5. 17:23

오직 하나님의 피

2025년 1월 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18-22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은 오실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즉 인간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모형은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모든 의미의 최종성을 자기에게 둡니다. 모든 가치는 자기에게 와서 마감을 짓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죽음에 애도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죽음에 애도할 가치도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 죽음의 한시적 모형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사실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만 인간이 왜 꼭 죽어야 하는 그 이유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서 모든 것을 덮어 버렸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피흘리심’의 의의만 드러내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이러한 자신의 생각과 움직임은 자신의 양심에 입각해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양심이란 자기로부터 출발하기에 옳고 그름의 판정을 본인이 내리게 마련입니다. 즉 ‘양심에 비추어볼 때, 내가 옳다면 옳은 것이고 내가 그르다면 그른 것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서 이스라엘 외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 규범으로 삼는 그 토대 자체를 율법으로 바꿔야 함을 지적하십니다.

율법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준수 여부나 율법에 의해서 바르고, 그르다하는 것은 율법을 지킨 그 당사자가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마감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할 경우에 어떻게 될까요? 그 내용을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운을 떼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리고 이 율법 체계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시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3-26)

즉 지옥의 실제성은 율법의 실제성으로만 설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하고 완벽하게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가차없이 지옥행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온전한 의미 달성을 위해 필연적 조치인 것입니다. 그냥 인간 사정 봐달라고 하면서 대충 넘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는 이미 하나님편에서 일방적으로 확정난 사실입니다. 율법이 제공할 때부터 이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모든 율법을 온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제단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백성들은 그냥 관람객이요 구경꾼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장단 맞춰주는 식으로 ‘율법을 준행하겠나이’라고 합창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모세는 사람들이 예상 못한 일을 추가적 행위를 벌립니다. 그것이 발고 백성들 머리 위에서 제물의 피를 뿌리시는 겁니다.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6-8)

당연히 피 범벅이 됩니다. 이 하나님 이벤트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큰 소리쳐도 결국 인간은 율법을 위반하게 되는 족속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희생물의 죽음처럼 너희들이 이 죽음 속으로 들어와야만 언약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이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전 인류는 ‘피 속에 있는 인간’과 ‘피 밖의 인간’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인간들의 자기 양심으로 버티는 자들은, 자신의 모든 의미를 무효화하고 일괄적으로 무의미로 바꾸게 하는 피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합니다. 평생에 걸쳐 지겹도록 공격해 댑니다. 피 밖에 있어야 여전히 자기 존재의 의미가 자기쪽에서 유지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은 아담과 같이 예수님의 모형이기에 결코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대비되어 그동안 육신으로 살아온 것의 종말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육신’으로 살아온 겁니다. 결코 영적으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는 것은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청했습니다.(요 6:26)

주님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지적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사람들은 모세처럼 하늘의 만나가 오기를 원했지만 조상들이 만나 먹고도 죽은 것을 거론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마태복음 12:31-32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간은 아담의 본성상 예수님을 거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절차를 빼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거짓된 믿음입니다. 육신의 어쩔 수 없는 무가치함을 충분히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바로 ‘오직 하나님의 피’만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참으로 값없이 주는 것이 영생이면 성도는 강제로 이 영생 안으로 들어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12제자의 복된 운명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동안 몰랐던 우리 모습을 알게 하시고 나의 죽음마저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에 해당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히브리서 9장 18-22절(오직 하나님의 피)250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8-22절입니다.

히브리서 9:18-22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면 핏속에 푹 잠겨야 됩니다. 모든 물건들이 피에 발림을 당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는 상황이라면 이 말씀을 보고 있는 우리들도 이 피 안에 들어와 있어야 이 말씀이 이해됩니다. 그것을 ‘피가 있는 인간’ 또는 ‘핏속에 있는 인간’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핏속에 들어 있어서 살아가는 인간과 그 언약의 피 바깥에서 살아가는 인간, 두 종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피 바깥에 사는 인간은 한결같이 일관되게 이 핏속에 세계를 심하게 공격하고, 지겨울 정도로 지치는 것도 없이 계속 평생을 두고 이 피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습니다.

왜 피에 대해 저항하느냐 하면 핏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냥 들어올 수 없고 자기가 죽어야 그 핏속에 합류가 되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자기에 대한 모독감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피 언약은 인간들이 반항한다고 해서 수정되거나 취소될 그런 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하늘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피의 사실성 또는 피의 실재성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피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피에 대해서, 언약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하는 쪽은 무엇의 실재성이냐? 그건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가지고 이 피의 실재성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났다. 그리고 인간은 탄생했다가 죽는다.’ 이게 실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했다. 예수님이 죽는다.’ 이게 실재라는 거예요. 이 두 개의 실재가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한 모든 것에 대해서, 심지어 인간이 죽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가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 제물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죄를 사해주는 그 제물에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다 투자해도 그 안에 섞이지를 않아요. 튕겨 나와 버립니다.

여기 나오는 언약의 피, 모든 염소의 피, 이 모든 피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 한 분에게 몰입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향하여 이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간에 철저하게 배제당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죽는 것이 진짜 죽는 것이다.” 아니거든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맛도 없고, 색깔도 없고, 소리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래서 정말 자기가 예수님의 피만 의미가 있는걸 아는 사람 같으면 본인이 죽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걸 아는 순간에도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내가 죽는 마당에서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도 않고 ‘나를 죽게 만드는 이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새삼 알았네.’ 그동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재성으로 알다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죽일 정도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을 한다는 것을, 그동안 자기가 살려고, 살려고 버티다 보니까 훼방이 되는 거예요. 방해 놓은 거예요, 그동안 평생을.

무의미한 내 죽음, 나라는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 토대가 따로 있어요. 그게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것만 하나님이 의미 있게 받아요. 우리는 죽어도 안 받아요. 하나님께서 죽어도 우리를 안 받는다고요. “내가 죽기까지 자식 키웠습니다.” 그거 안 받습니다. “죽을 때까지 조국을 위해 살았습니다. 투쟁했고, 죽을 때까지 교회를 위해 충성 봉사했습니다.” 주께서 안 받습니다. 자기가 무의미한 것도 모르고 교회 충성을 왜 해, 쓸데없이 교회 충성을 왜 하느냔 말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알아야 돼요. 왜 모든 것이 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분의 피, 전부다 피의 파티인가, 피 판인가? 왜 피뿐인가? 전부다 피를 뿌리거든요. 그 외에는 인정을 안 하니까. 그동안 우리는 뭐 하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피만 이야기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예수님 피 중심으로 몰아갔는데 우리의 정신머리는,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습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이 말씀 속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죽지 않고서는 이 말씀 속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죽지 않고서는. 살아보려고 말씀 지키는 것은 말씀에 의해 거침없이 하이킥, 거침없이 두들겨 맞고 쫓겨나옵니다. “네가 그런 자세로서 말씀 속에 들어와? 말씀 믿고 어디 뭐, 천국 가려고 와? 어딜 건방지게 네가 이 말씀 세계가 어떤 세계인 줄 모르고?”

그냥 교회 다니며 구원받겠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이 말씀에 들어온단 말입니까? 안 되죠. 교회는 들어올 수 있어도 그 교회가 지옥 같은 덴데요. 전부 다 자기 잘났다고 하는 곳인데 교회 20년, 50년 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말씀 속으로 들어와야지,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그거는 자기 자랑거리 하는 마당입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시합하는 곳이 교회지 말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전부 다 펄펄 살았는데.

우리의 본성은 나한테 의미가 있어요. 말씀은 나한테 의미가 있는 것은 안 받아주고.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생기겠죠? 우리가 말씀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고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이 우리한테 어떻게 작용해서 우리를 말씀 속으로 강제로 끌어당기느냐?’ 그쪽으로 생각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18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어요. 옛 언약, 첫 언약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도 피로 세웠다, 피로 세웠는데 하나님께서 이 피로 세운 율법을 나중에 스스로 하나님 자체적으로 철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피로 세웠던 이 율법도 인간의 어디까지는 못 들어오느냐 하면, 인간의 마음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인간의 마음까지는.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이 이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도 이렇게 강력하게 저지했던 겁니다. 여기 히브리서 9장 19절에 보면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이 대목이 나오잖아요. 이 대목이 구약 성경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나옵니다. 출애굽기 24장 초반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다 이야기해요(출 24:3).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한 대로 인간들은 “말씀 이야기해 봐라. 네가 지껄여봐라. 당신 말하는 것과는 따로 내가 생각하는 계획이 있어.” 하고 안 듣습니다.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거예요. 말씀에 대해서는 일체, 그냥 듣기는 듣겠지만 내 마음속까지 와 닿는 것을 강력하게 저지하는 힘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 결과로 어떻게 되느냐? 말씀을 듣게 해놓고 사람들 다 모아놨어요. 모세가 다 모아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백성들은 모세가 하는 걸 보고 ‘저 양반 또 무슨 짓 하는 거야? 우리 한번 보자. 도대체 저걸 왜 드리지? 한번 지켜봐, 지켜봐.’ 그렇게 지켜봤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린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우리하고는 별로 관계없이 모세 너 혼자 하나님하고 하나의 일을 벌이고 자기 업무를 하는 걸로 그렇게 쉽게 처리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팔짱끼고 한번 지켜나 보자.’ 하는 식으로 지켜봤단 말이죠. 봤는데 모세가 그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놓고, 거기서 그 피가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출애굽기 24장 6절에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피를 가지고 사람 머리 위에다가 확 뿌려버려요. 사람 머리 위로 확 뿌린다고요.

그 말은 뭐냐? 너희들은 이 율법에 대해 준행하지 않을 거고, 그 결과, 그 대가는 하나님의 엄격한 율법에 의해 너희들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결국은 다 죽는다는 거예요. 여기서 두 가지를 알아야 돼요. 하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늙어서 죽는 것, 내가 나이 들어 늙어 죽는 것, 이건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의 육신에 의해 출발해서 이해하는 나의 죽음이에요.

그런데 내가 늙어서 내가 죽는다, 결국 죽는다, 내가 이렇게 준비하는 죽음 말고 외부에서 강제조치로 “너는 꼭 죽어야 해.”라고 하면서 어떤 외부에서 타격을 가하는 그 죽음은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그 말씀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알아서 죽을 테니까 말씀은 저리 가소.’ 하고 자꾸 밀어내는 경향이 있는 거예요.

‘내가 건강관리 잘 해서 살 만큼 살았다. 이제 할 일도 없다. 요양병원 가서 죽자, 하는 그 죽음만 나는 수용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멀쩡하고, 잘나고, 건전하게 살고, 남한테 욕 얻어먹을 짓 안 했는데 누가 외부에서 나를 강제로 죽이는 것은 도저히 용납 못하겠습니다, 라는 결과를 반드시 율법이 일구어내고 말리라.’ 하는 뜻이에요.

인간의 육신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드는 경향들을 갖고 있어요. ‘평생토록 내 인생 내가 만들어가고, 내가 구성하고 있는 이 괜찮은 내 인생, 하나님이면 다냐? 하나님이면 다야? 내가 얼마나 내 인생 산다고 애를 썼는데!’ 이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쳐서 죽여버릴 때, 이것은 평소에 율법에 대해서 반발했던 내 자세, 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거예요.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도대체 우리의 육신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우리 육신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기겁하고 그걸 강력하게 거부를 하느냐? 육신이 말씀을 반대하는 전형적인 방법이 출애굽기 24장에 나와 있습니다만 “우리가 율법을 준행하겠나이다.” 이러한 고분고분한 자세, 이 자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도발입니다. “제가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율법은 우리가 말씀 못 지키는 자로 이미 규정을 하고, 결국은 넌 나한테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매 맞기 싫어서, 지옥 가기 싫어서 불행이 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 앞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지금 모르고 있는 겁니다. 너는 말씀을 안 지키게 되어 있다고 하면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합니까? “맞습니다. 못 지킵니다.” 이렇게 나와야죠. 그런데 무슨 고집이 세서 “이제부터 교회 나와서 목사님 말씀대로 잘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하나님이 “너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는 태생 자체가 못 지킨다, 이 말이야.” “아닙니다. 지킬 수 있습니다.” “못 지켜.” “지킵니다.”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두고. 그러면서도 자기가 늙어 죽는 이유를 몰라요.

로마서 5장 14절에 보면 ‘아담은 오실 분의 예표다, 모형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이 말은, 인간 자체가 비유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실체가 아니에요. 오실 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상체로, 임시적으로 만들어놓은 모형같은 겁니다.

그런데 모형이 실체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나라는 것이 누구의 모형이어야 되는데 그 실체된 주님을 밀어내고 ‘나는 나다.’가 되어버린 겁니다. ‘못나도 나고, 잘나도 나고, 실패해도 나고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의미는 나로 귀착된다. 나로 모든 것이 최종 모아진다.’ 이렇게 주장하며 살아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넌 그냥 비유…, 네가 무슨 주장을 하든 난 모르겠고 예수님이 누군가를 위해 모형으로 사용하겠다.” 중요한 것은 너의 죽음이 아니라…, 너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세계가 관리되고 지배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신년 초 설교에 제가 지금 강조하고 싶어요. 제발 말씀을 지키지 마세요. 말씀을 지키게 되면 여러분들이 그 잘난 나가 된다니까요! 죄인인데 주께서 은혜로 살게 했잖아요, 죄인인데. 말씀 하나도 못 지키는 죄인인 주제에, 기도하신 집사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줬잖아요. 그런데 왜 선물의 가치를 내 잘난 것으로 훼방합니까? 왜 방해해요? 뭐 잘났다고? 그냥 불쌍해서 던져줬는데 ‘이건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다.’

이건 로마서 4장에 나와요. 뭐 기억나지 않으면 제가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4장 4절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한 것이 없이” 그러니까 믿음은 뭐냐? 믿음은 일에 속하는 게 아니고, 믿음은 일하지 않음에 속해요, 믿음이라는 게.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이게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어떻게 말씀 하나 안 지키고 나쁜 짓만 했는데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그러니까 간 그 이유가 예수님의 죽음에 있다, 이 말입니다. 너의 열심에 있는 게 아니고, 네 충성 봉사에 있는 게 아니고, 바르게 사는 데 있는 게 아니고. 그러면 “우리의 바르게 사는 것, 열심히 하고자 하는 것은 이건 어디에 해당됩니까?”라고 물으면 그건 양심에 해당 돼요, 양심에.

그런데 그 양심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라고 하고, 이방인에게는 양심이라고 하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신 이유가 그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외의 모든 이방 나라의 생각과 행동을 그 의미로 번역을 해버리는 거예요, 번역을.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없어요. 받은 게 없어서 어떤 행동을 해놓고 이 행동 잘했느냐, 못 했냐의 최종 평가하는 채점자가 본인이에요. 내 행동에서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이걸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결정해 놓고 ‘나 이번엔 착했어.’ 혹은 ‘아, 이번엔 나쁜 짓 했어.’ 본인이 결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야기하거든요, 이스라엘 율법으로. 율법으로 이야기해 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말이 통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안 되면 우리가 천국 가도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천국에서 통하는 언어로 기존 인간의 자기 위주의 언어를 바꿔치기 해나가야 하는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네 양심이라는 것을 전부 재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이제 양심이 율법으로 바뀌었으니까,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양심은 나한테서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너무 관대해요. ‘그 정도 했으면 됐어. 적당해. 그 정도 하면 난 최선을 다한 거야.’ 맨날 최선을 다했대요.

그런데 율법은 하늘에서 줬기 때문에 인간이 최선을 다한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그걸 ‘무한채무관계’라고 합니다, 무한채무관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지옥을 설명할 때 율법을 가지고 무한채무관계로 지옥을 설명해요.

마태복음 5장 25, 26절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옥이 지옥이거든요. 고소자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우리한테 고소를 할 때 ‘적당하게’가 통하지 않아요. 왜? 예수님 말씀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적당하게’가 없어요.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죄에 해당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해야 돼요.

뭘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면 전부다 지옥 갑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지옥 가요. 왜? 주의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면 어느 인간도 못 지켜요. 못 지키니까 못 지킨다고 넘어가는 게 아니고 무한채무관계, “못 지켰으니까 지옥 가라.”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하늘의 언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뭐로 커버하냐 하면 ‘양심대로 했을 뿐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맨날 이러고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천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지킵니까? 그냥 봐주소.’ 막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16세기 베네치아에 샤일록이라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있고 또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입니다. 안토니오가 무역하는 사람인데 결혼하는 친구 돕는다고 샤일록이라는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어요. 샤일록이라는 이 사람이 “만약 약속한 날짜에 돈을 갚지 않으면 1파운드(약 500그램 정도) 되는 살을 당신에게서 떼어 내겠습니다.” 하는 조건을 달고 돈을 빌려줬어요.

안토니오는 원래 돈이 많은 사람이라서 무역선이 들어오면 갚는다, 했는데 오던 무역선이 파선해서 돈을 못 갚았게 되었어요. 샤일록이 재판장에게 고소를 해서 약속대로 살 1파운드 떼 내겠다고 나온 겁니다. 뭐 판사가 많이 구슬렸죠. 그건 너무 야박하니 나중에 이자 쳐서 받으라고 해도 계약대로, 율법대로죠, 계약대로 “살 1파운드를 떼 내겠습니다.”

이것은 <베니스의 상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재판장이 하는 말이 “그래? 그렇다면 너도 계약대로 해야 한다? 살 1파운드만 가져야지 그거 꺼내다가 만약에 1g의 피라도 흐르면 내가 모든 계약을 무효로 하고 너를 추방하겠다.” 이렇게 하니까 그 샤일록이라는 사람이 포기했죠.

그런데 그냥 포기라는 게 없어요. 그 베네치아 법에 보면 계략으로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 이방인들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 샤일록의 재산 반은 안토니오에게 주고 반은 국가에 기부하고, 이런 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그때 재판장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안토니오의 부인인 포셔라는 사람이 남장을 하고 재판장으로 변장해서 재판한 거예요. 일종의 부부 사기단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봐달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이걸 봐줘 버리면 율법이 지니고 있는 온전한 거룩이 훼손돼요, 훼손된다고요. 인간은 딜레마에 빠진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는 조건하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이라는 온전한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인간은 기껏 내세우는 게 양심으로 살다 보니 ‘힘든데 대충 넘어가자’ 하는 식이고,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인간 쪽에서는 대책이 없죠.

인간들이 율법에 대해 자꾸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 때 의도했던 그 결과와 동일해요. 인간 자체를 의미 있게, 최종적으로 나라는 인간을 의미 있는 것으로 확정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인간들은 그래서 율법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거예요.

“피? 나 피 없이 살래. 나 피 바깥에 살래.”라는 식으로 인간들은 피 바깥에서 나라는 인간을 새롭게 규정한 거예요. 나라는 것을 두고 하나님이 ‘너’라고 해야 하는데 내가 나 살기 편한 대로 양심에 부딪히지 않고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는 쪽으로 내가 나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일방적으로 내가 만들었어요.

그렇게 만들고는 ‘죽는 거? 살다가 죽으면 죽지. 죽은 뒤에? 그건 모르겠고.’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이게 바로 첫 번째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취지, 뜻입니다. 빠져나갈 데가 없어요.

자,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건 첫 번째 언약입니다. 첫 번째 언약은 조건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째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에 첫 번째 언약이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율법을 쫓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그다음의 말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이 뭐냐? 인간이 스스로 착하다, 바르게 산다, 의롭다고 하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착하게 바르게 산다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이 취지가 뭐냐? 외부에서 온전한 피 흘림이 주어진다면 그때 비로소 사함, 용서하면 깨끗함이 성립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외부에서 그렇게 주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나’는 그 두 번째 언약,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는 그 원칙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체가 삭제되어야 하죠. 그래서 하나님의 두 번째 언약은 나를 삭제하는 방식의 언약으로 주어졌습니다. 내가 있더라도 이것을 망상으로 또는 환상으로 처리해 주는 그런 두 번째 하늘에서 주신 언약이 있어요.

이건 우리가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그렇게 만든 언약이, 내가 있더라도 없는 존재로 쳐주시는 그런 두 번째 언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죽음을 비교해서 예수님의 죽음만이 사실성 또는 실재성의 죽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두 번째 언약이 성립된 거예요.

인간은 죽어도 자기가 죽는 게 아닙니다. 죽어도 죽는 게 아니에요. 그건 죽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죽음이거든요. 그 예수님의 죽음에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죽음을 이렇게 연계, 링크, 연결시키면 돼요. 내가 죽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의 일부분을 반영해 주는 죽음이라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그래요. 석가모니가 부활했습니까? 마호메트가 부활했어요? 철학자가, 과학자가 부활했습니까? 이 세상에 부활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부활과 링크되어 있는 거예요.

부활과 링크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뿐이고, 우리가 그 예수님의 죽음을 믿고자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차단해요. 왜냐하면, 내가 십자가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버리면 이것은 내가 삭제된 상태는 아니거든요. 내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시다바리로 여기는 거예요. ‘나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예수님 믿자, 하나님 믿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건 가짜죠,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꼼수에 넘어가지 않아요.

“기다려봐. 기다려보고 내 죽음과 너의 아무것도 아님을 엮어줄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죽는 것 이건 눈물 흘릴 가치도 없어요. 중요한 건 예수님의 죽음이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어떻게 우리를 찾아옵니까?’ 살아있는 것 같으면 뭐 비행기 타고 오든지, 점심 식사를 나눌 텐데 죽은 분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기 때문에 찾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았으면 못 찾아가는데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3일 동안 다녔잖아요. 그 열두 제자가 아무도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왜? 예수님이 죽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오해한 겁니다. ‘아, 저분이 우리를 구원할 분이다. 저분을 따라다니면 우리는 구원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훌쩍 떠났어요. “내가 너희들 생각에 같이 동조하고 넘어갈성 싶으냐? 너희는 너희 자신을 너무 몰라.” 주께서 제자들과 결별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안 되겠다. 고기나 잡으러 가자.” 해서 다들 고기 잡으러 간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이 고기 잡을 때 부활한 채로 왔어요.

또 ‘예수님의 시체가 잘 있나?’ 향 뿌리려고 갔던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부활한 채로 나타났거든요(마 20:16). 그러니까 마리아가 반가워서 만지려고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마라”(마 20:17). 이게 뭐냐? 인간의 육신을 초과하는 세계에 지금 예수님이 계시는 거예요. 우리의 현 육신 가지고서는 그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영광된 나라에 이 육신이 장애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이 육신 자체가. “만지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40일 계시다가 떠났어요. 주님께서 떠나기 전에 “내 너에게 약속할게. 또 올게. 다시 올 테니까 기다려라.” 그리고 떠난 뒤에 10일 만에 예수님 제자들이 있을 때 예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 뭐냐? 예수님의 마음을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찾아온 거예요. 이게 실재성입니다. 이게 사실성이에요. 인간이 육신으로서 열심히 돈 벌고 하는 것은 사실적이 아닙니다. 다 이게 허구에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돈 벌어서 애 키워서 대학 보내고,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전부 다 허구입니다. 육신에서 육신으로 뭘 하는 것은요, 율법이라는 무한채무 바깥으로 못 빠져나가요, 무한채무에서.

캐나다에 계신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딱 맞는 질문을 하셨어요. 지난 설교에서도 누가 질문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이번 시간에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목사님, 마태복음 12장 31절의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마태복음 12장 31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성령의 훼방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었어요.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12장 32절 가지고 답변을 해드렸어요. 그분은 31절을 가지고 물었는데 32절을 가지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 이 대목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면 용서함을 받는다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의 법칙을 끄집어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해도 용서받는다.’가 돼요. 예수님을 거역해도 용서를 받는다는 거예요. 왜? 그게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몰라서 그래요. 교회 나와서 앉아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자기 본성을 알아야지요. 교회 나와서 하는 일이 하나님 거역하는 일이에요. 예배 참석 자체가, 찬송 자체가, 설교 듣는 자체가 전부 다 하나님 거역하는 일입니다. 왜 이걸 기뻐하지 못합니까? 왜 이걸 감사하지 못해요?

뭐 때문에 교회 와서 행세를 합니까? 교회 와서 뭐 했다고요? 뭐 했다고 교회에서 큰소리를 쳐요? 하나님 거역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놓고는 뭘 했어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30년 동안 교회 나오면 30년 동안 거역한 거예요. 왜 내가 주님을 거역했다는 그 절차를 빼놓고 하나님을 믿어요? 정말 답답해요.

이게 고칠 문제가 아니고, 성격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태어난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배후에 악령이 있으니까요. 우리의 목숨은 생명을 흉내 내는 건달이에요. 거들먹거들먹, 까불까불, 까불…. 목숨 붙어 있으니까 관저 앞에서 태극기 흔들고 탄핵 반대, 또 한쪽에서는 탄핵하라고 난리하고요.

인간의 그런 행동과 생각은 율법이라는 단어의 통역이 안 되니까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율법을 집어넣어 버리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돼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신년 초가 되어서 또다시 제가 참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교회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너무 신기한 거예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만 모였는데 교회가 이게 돼요.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해서 유리창 깨고, 교회 욕하고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내가 최종의미에요. 하나님 이용해서, 하나님께 복 빌어서 나 잘되면 끝이라는 거예요. 무엇이 진리인가? 나에게 이익이 되면 진리고 나에게 손실이 오면 그게 진리가 아니라고 본다. 이게 인간들의 기본이에요, 기본.

이것은 교육으로 고칠 문제가 아니고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거역하세요. 그게 우리 본성에 맞는 태도니까. 실컷 과거에 내가 이렇게 했고, 또 바르게 살았고, 뭐 주께 봉사하고 선교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그래 봤자 죽잖아요, 그래 봤자, 그래 봤자 죽는다고요. 우리의 죽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과 링크, 연결되어야 해요. 연결되면 되는 거예요, 연결되면.

연결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자를 거역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이 선물로서 이 땅에 살려주시고 살려주시는 거예요. 어제도 살았고 오늘도 살고 내일은 모르겠고요. 내일은 알 수가 있어요? 누가 장담합니까? 그럴 때 우리의 목숨은 뭐가 되는가? 생명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의 목숨은 생명의 일부가 돼요.

성경이 어렵지 않은데 왜 어렵게 들리는가? 왜 자꾸 거부감이 나타나느냐 하면, 내가 끼어들어서 그래요. 내가 끼어들면 내가 평소에 알던, 세상과 학교의 교육에서 배웠던 의미 있잖아요, 그 의미를 가지고 끼어들어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은 내 목숨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성경 하나하나가 다 그래요. 요한복음 6장에서 생명은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생명이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구약적 율법이 통역이 안 되어서 자꾸 오해가 생기는데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5천명을 먹이니까 사람들은 ‘야~, 이분이라면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겠다. 우리 목숨 줄 이제 살았어.’ 하고 “그분 어디 가셨지? 빨리 따라가서 우리 임금 삼자!” 해서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가 시작되잖아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올 때 예수님께서 끝까지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왜 따라오느냐? 나 알아? 너희가 따라온 이유를 내가 이야기해 볼까?”

요한복음 6장 2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너희에게 예수가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너희가 나를 따라오는데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육신이라고 해요, 육신, 그걸 육신이라고 한 거예요.

자기 육신 좋아라, 하지 않는데 한국에 교회가 이렇게 많습니까? 교회가 많다는 것은 모든 교회마다 오직 육신을 위해서 교회가 만들어졌다 그 말입니다, 육신을 위해서. 육신을 버리고자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살찌우고자 나온 거예요.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네가 나를 따라오는 것은 너에게 도움 될까, 쓸모 있다고 여기기에 나를 믿는다.”라는 거예요.

교회가 어디 보람상조입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6장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육신을 위한 양식 말고, 영생과 목숨을 분리시킵니다. 네가 지금 목숨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 날 찾는 모양인데 목숨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쓰레기거든요. 쓰레기예요. 갖다 버릴 쓰레기라니까요.

그런 쓰레기를 위해서 날 찾지 말고 영생을 위해서 하라. 그 말을 현장에서 들었으면 사람들은 주님을 떠나면 안됩니다. ‘아, 내가 육신적으로, 본능적으로 찾는 것은 이 몸이 쓰레기라는 거구나. 그런데 이 쓰레기 말고 영생, 생명이 있다고? 그러면 생명이 뭐지?’라고 생명쪽으로 관심을 둬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야, 가자, 가자. 우리 원하는 것 안준대. 우리 다른 교회 가자. 내가 뭔가 노렸는데 그 노리는 것이 나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손실이야. 손실되는 것은 우리가 싫잖아, 그렇지? 이익이 되는 것을 원하잖아. 그렇다면 다른 교회로 가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31절에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이 광야에서 만나 먹었다 그 말이지? 그런데 그 만나 먹고 다 어떻게 되었지? 광야에서 다 죽었잖아. 너희도 다 내가 죽여줘?”

만나를 먹는다는 것이 굉장히 신기한데 그 신기한 것을 먹어도 죽었잖아요. 이게 모세에 속한 옛언약입니다. 옛언약은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율법대로 다 지켜야 해요. 그런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리고 요한복음 6장 3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사람들이 “야~, 그런 떡이 있어요? 그 떡 주세요.” 하니까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떡이라는 겁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멘붕이 온 거예요.

요한복음 6장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할 때 ‘우리가 정육점에 와 있나? 우리가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었지?’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능치 않은, 불가능한 이야기만 하느냐 그 말입니다.

“가능해야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든지 할 텐데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버리는 말씀을 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얻습니까? 집에 가자!” 해서 다 갔어요. 집에 다 갔다니까요. 교회가 어디 있어요? 집에 다 갔는데 무슨 교회가 돼요? 그런데 열두 명은 안 갔어요. 안 간 것이 아니라 못 갔어요. 딱 못을 박아 놨기 때문에.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 6:70)라고 되어 있어요.

강제조치입니다. 사탄 하나는 빠지고 열한 제자, 너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무조건 너희에게는 무조건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네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생명은 네가 먹는 것이 아니고 내가 먹여주는 거예요. 내가 너에게 주는 거예요. 만나처럼 내가 너에게 집어넣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집어넣을 때 어떻게 집어넣는가? 우리는 매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그걸 인정하는 것으로. 내가 지킨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거예요. 감사와 고마움 외에는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감사와 고마움 외에는.

내 의미가 산산조각나고 무의미해지는 그것조차 감사할 일이에요. 내 존재 의미가, 내 목숨이 지푸라기가 되는 것조차도 감사해요. 왜? 자체 내에 어떤 의미도 없으니까요. 마태복음 12장으로 돌아와서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네 눈이 관찰해서 보이는 나를 무시해도 좋고, 나를 욕해도 좋은데 장차 성령이 올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을 직접 그 사람 속에, 그 사람의 저항을 뚫고, 인간의 모든 방해를 뚫고 직접 집어넣으면 예수님의 피흘림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 피흘림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나의 의미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의미가 내 속을 장악해요. 마치 하마스를 장악한 이스라엘 같아요. 외부의 점령군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천사가 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 버리면 그것은 ‘다 이루었다’ 다 용서가 되어버리고, 그럴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언어가 그대로 통역이 돼요. 그대로 소통이 돼요.

딱 하면 다 알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예수님이 하셨다.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었다. 성경을 다 알아들어요. ‘다 주께서 하셨잖아요, 주께서 하셨잖아요.’ 내가 못나도 이것도 감사하고, 내세울 것 없는 이것도 감사하고, 나의 못남과 죄인됨을 주께서 드러내셨잖아요. 이 작업이 내 작업이 아니고 주님의 작업에 우리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그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성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자아성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까? 종교, 기독교,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 소용 없는…. 진짜 실제로 있는 것은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셔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이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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