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유언의 효력

아빠와 함께 2024. 12. 31. 08:08

유언의 효력 

2024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15-17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인간의 조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건드렸습니다. 피해 입은 하나님 입장에서 가만 있을 리 없습니다. 말씀을 동원해서 인간을 죽여버리십니다. 그러면서 도대체 인간이 건드린 그 ‘말씀’의 본질과 최종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펼쳐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말씀도 전하시고 각가지 행동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행동하심과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가 예수님을 살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인간들 세계에서는 그저 잘난 척 한 인간이 정치적으로 권력에 휘말려 반역죄로 처형된 것으로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의 살해사건에 관여되도록 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택하여 심어놓으셨습니다. 그 자가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

가룟 유다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ㅏ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된 인물로 선택된 자입니다. 그런데 그 자가 사단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서 영적 세계(사단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이 성립됩니다. 이는 곧 사단의 본질마저 예수님의 죽으심의 계획을 반영하는 재료가 가담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로서 인간 세계는 모두 악마로부터 조종받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 겁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육신 생활에서 아무리 많은 성경 구절과 신학과 복음 내용을 쏟아부어도 전혀 효과를 내지를 못합니다.

이런 현상은 예수님께서 살아 있으시면서 살아 있는 인간들의 만남에서 동일하게 일어난 현상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즉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만났던 모든 이들은 직접 예수님을 만났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이후에 ‘유언 효력’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바로 이 일에 ‘사단’이라고 하는 영적 존재가 깊이 관여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런 육신이 죽고 난 뒤에 사단과 한 통속임을 증명하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을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그런 유언의 효력을 받은 자를 생각해두셨는데 이들이 바로 천국 백성이요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이 그러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이들 천국 백성들의 특징은 그들이 지닌 육신적 몸의 한계성을 비로서 발견하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감격하면서 보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11제자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 자체가 모두 불신적인 모습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가 바로 불신 그 자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나올 것은 오직 ‘불신적 태도’ 뿐임도 알게 된 겁니다. 바로 이런 결과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성령받은 자들은 이해하게 됩니다. 말씀을 써먹고서 그것으로 자신의 몸을 천국에 입성 가능한 몸으로 전환하려는 이 모든 시도가 너무나도 악마적이고 욕망적인 시도였던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뭘 욕망해야 하는 지를 모릅니다. 욕구는 만족해서 욕망은 만족할 수 없는 겁니다. 젖먹이 아이가 젖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우는 것은 엄마도 모르고 아기 본인도 모릅니다. 커서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 지도 모르면서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가룟 유다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절 사랑해주시고 절 인정해달라는 것”이 지옥 백성들의 최종적 모습입니다. 반대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아는 자들이 천국백성입니다. 이 두 문장의 차이점은 바로 ‘자기 부인’여부입니다.

천국 백성들에게는 자기에 대한 지독한 미움이 작용합니다. 뭘해도 자기 인정, 주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바로 마귀와 한통속되어 움직이는 행위임을 알고 사력을 다하여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옥 백성은 반대로 나갑니다. 즉 자신의 죄임을 향하여 ‘말씀’이 날아오니 어떻게 하든 그 말씀은 안 들으려고 합니다.

이는 곧 성경에 나오는 무슨 말씀, 즉 처녀가 남자없이 아기를 낳는 것이라든지, 유월절 피를 발라서 천사의 심판을 면제 받은 일이라든지, 나중에 공중에서 올라가 천국에 들어간다든지, 모세가 40일 동도 물도 마시지 않고 떡도 먹지 않고 살아남은 일이라든지,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라는 하는 사실들이 실생활 가운데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신의 60조 개의 세포로 된 육신이 유일한 육신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두 번째 육신은 세포로 조립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조립되는 육신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말씀을, 사력을 다하여 밀어내고자 합니다. 이로 인하여 마치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울 속에서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피! 피로 다 이루었어!”라고 외치면 거울 밖에 있는 인간들은 “뭐라는 거야? 뭐 돈? 돈이 있다는 다 된다고?”라고 반응을 나타냅니다. 악마는 돌을 떡되게 하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떡을 돌로 되게 하십니다. 육신의 모든 것을 흙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무의미성을 악마에 있는 자들은 못견뎌합니다.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주님에 의해서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주님의 것’이 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6) 이것이 ‘유언의 효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 능력으로 말씀을 못 지키게 되는지 알고 마음껏 주님의 죽으심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8강-히브리서 9장 15-17절(유언의 효력)24122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5-17절입니다.

히브리서 9:15-17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없애주시려고 몇 가지 중요한 개념, 단어를 여기다가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렇게 집어넣고 문장을 만들었어요. 그게 ‘새 언약’이라는 단어, ‘중보’라는 단어, 그다음에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이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태어난 자이기 때문에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인식이 없어요.

그다음에 ‘영원한 약속’이라는 개념, 그다음에 특별히 오늘 본문에 ‘유언’이라는 개념을 여기에 집어넣고, 유언이 효력이 있는 시기와, 그다음에 효력이 없을 때를 구분해서 유언을 기준으로 유언한 후에는 유언의 효과가 살아있고, 유언을 하기 전의 그분은 아무리 유언을 하더라고 죽지 않고 살아있을 그때는 효력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단어의 조합, 하나님이 선택한 개념, 이러한 문장이 어떻게 지옥 가는 자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그걸 이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분이 죽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을 간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죽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어떤 분이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올 계획이 없다면 모든 인간은 천국에,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봐야 돼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아무리 착해도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죽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죽어도 천국을 못가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유언은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유언만이 효과가 있지 우리가 살아생전에 했던 모든 걸 집대성해 봐야, 그래서 유언을 남겨봤자 그 유언은 나를 천국으로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것은, 유언이라고 해서 다 효과 있는 것이 아니고 효력이 있는 그분이 죽게 되면 죽고 그분이 난 뒤에 그 효과로 인하여 죄의 용서가 성립이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분의 죽음과 무관할 때 우리는 죄용서와 상관없는 자여야 하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죄인 이어야 해요. 그분의 죽음만이 죄의 용서가 되니까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앞에 죄인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뭘 해도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이해했는지 제가 잠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죄입니까, 죄가 아닌 겁니까?”라는 질문을 여러분에게 해보고 싶어요. 하도 엉터리가 많으니까요. 예수를 믿는 게, 예수님이 저쪽에 있으니 내가, 내가,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죄인인, 오류가 있는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우리나라 2천만 교인들이 모두 발끈하고 일어섭니다. 그들이 교회 다니고 성경 공부하는 이유가 죄를 줄여보려고, 죄를 덜 지어보려고 그러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죄가 더욱더 죄로 뚜렷하게 노출되고 드러나야 되는데…, 그것 때문에 말씀을 주셨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아담이요, 손으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신세도 망치고, 나라도 세상도 망쳤어요. 그리고 주의 뜻대로 아담과 하와는 죽었습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이제는 하나님께서 뭘로 죽이냐 하면 말씀으로 죽여요. 네 손으로 버려놓은 이 세상을 주의 말씀이 오함마가 되어서 때린다고요.

때리니까 못돼 먹은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 죄인인지 “말씀을 지켜줄 테니 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말씀을 지켜줄 테니까, 예수 믿을 테니까 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나와요. 이 심보가 무슨 심보에요? ‘나 죽어도 죄인 되기 싫다.’라는 심보에요. 달리 이야기해서 남들은 지옥 가도 상관없지만 나는 죽어도 지옥 가기 싫다는 겁니다. 왜? 왜 지옥 가기 싫은데요? 무슨 어떤 근거가 있어요? 근거는 없어요. 무조건 지옥 가기 싫다는 겁니다.

어떤 정신 분석학자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거기서 해명되지 않는 것을 발견했어요.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왜 해명되지 않느냐? 어린아이를 조사 했거든요. 어린아이가 배고플 때 울고 있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줬습니다. 어린아이가 배고프니까 자기의 동물적인 본성에 의해 젖을 달라고 할 때 정신 분석학자가 그걸 영어로 Need, 필요 또는 욕구라고 표현해요.

그다음에 젖 달라고 우는 것을 Demand, 요구라고 이야기했어요. 젖을 자기 욕망으로 본 겁니다. 내가 젖을 먹고 싶어서 “젖을 주세요.” 내게 필요한 욕구가 있어서 젖 달라는 욕망이 생겼으니 그걸 요구합니다, 이렇게 구분을 하면서 이걸 발견했어요.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엄마가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 젖을 줬는데 그게 아이의 욕망의 끝이 아니었던 겁니다. 욕망의 끝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 정신 분석가가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걸 욕망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젖을 주어서 욕망이 멈추는 게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뭘 욕망하는지 본인도 모르면서 계속 욕망하는 거예요.

그 어린아이가 커서 뭐 하겠어요? 출세를 욕망하죠. 출세했으면 끝입니까? 아니에요. 돈을 욕망하죠. 돈 가지면 끝입니까? 아니에요. “너 커서 뭐 될래?” “대통령” 그럼 대통령 되면 끝입니까? 아니죠. 또 대선 내다보고 있죠. 도대체 인간은 본인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본인이. 이게 바로 인간의 지식의 한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죠. 이게 뭐냐? 바로 인간은 죄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뭘 욕망하면 안 돼요. 욕망은 해도 인간을 향한 주님의 욕망만 있으면 되지 주제넘게 피조물 주제에 지가 왜 욕망을 합니까? 지가 뭔데 요구를 해요? 왜 자기 분수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말씀으로 인간을 깨다가 그 말씀의 완성으로서 인간의 죄가 무엇이냐를 들춰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그 들춰내는 것은, 말씀이 다 이뤄졌을 때 인간의 죄는 다 들춰집니다. 그 죄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었어요.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이고, 너도 별 볼 일 없네. 살다가 죽으면 끝이네.”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효과를 냅니다. 어떤 효과를 내느냐? 예수님이 죽을 때 예수님이 그냥 산속에서 홀로 자살하신 게 아니고 인간과의 만남, 인간과의 부딪힘에서, 그 부딪힘의 강도에 의해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에게 부딪힌 이유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하셨는데 인간은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죄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살아생전에 인간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까요? 역시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아, 예수님 말씀의 취지가 이거구나.’ 하고 알아듣는 새로운 인간을 성령을 통해 이 땅에 만들어내는데 그 만들어낸 자가 천국 백성입니다. 주의 말씀을 어떤 인간도 못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총동원해 봐라. 내 말을 성취할 수 있는지’, 인간이 가능성을 전부 동원해도 불가능한 말씀만 주께서 주신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주의 말씀을 붙들고 자기가 죄인 안 되기 위해서 뭘 하느냐? 말씀을 믿는다고, 자꾸 믿는다고 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자꾸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예,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 영생을 얻고,” “예, 믿습니다. 이제 영생 얻었죠?” “나를 믿는 자는 천국의 백성이다.” “예, 믿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백성 되는 거 맞죠?” 본인에 어떤 오류가 있다는 걸 모르고 주의 말씀에 대해서 굴종하고 복종하는 척하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이 뭘 욕망하고 있는지 너희들은 모른다.’라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은 천국 가지도 못하지만 갔어도 천국에서 결핍을 느낄 거예요. 자기가 뭘 욕망해야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게 죄에요. 인간은 죄만 짓는 것을 욕망해요. 죄 짓는 걸 욕망하는 겁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요.

잠언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다.’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잠 9:17) 그냥 먹는 사과는 맛이 없어요. 먹지 말라고 할 때 그게 진짜 맛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처음 따먹을 때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요. 따먹지 말라고 할 때 그 따먹지 말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따먹었잖아요. 그게 인간의 마음에 욕망으로 자리 잡은 겁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천국 백성을, 있지도 않아요, 없는데 주님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만들어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작업을 하셨는가? 인간 세계에 있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계 말고 영적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작업부터 주께서 하셨어요. 인간은 아무리 눈이 있어도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니까 영적 세계에 대해서 소경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소경의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고 그중에 누구 하나를 집어넣었느냐 하면, 바로 사탄을 선택해 버렸어요. 요한복음 6장 7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마귀는 영적 존재에요. 영적 존재가 열두 명 속에 왜 끼어들죠? 그것은 인간들이 영적 존재에 막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완전히 막혀있어요. 자, 이 영적 존재에 막혀있다는 것을 제가 예시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오함마처럼 우리가 죄인 됨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공중에 들려서 올라간다, 이게 공중 재림이거든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말씀이에요. 그 말씀이 여러분의 아침 식사, 혹은 직장 생활할 때 무슨 도움이 되던가요? 영향력이 있던가요?

공중 재림하는 이거 체험하려면 부산항에 가면 돼요. 부산항에 가면 골리앗 크레인이 있어서 그 무거운 컨테이너를 지면에서 위로 올려요. 올려야 화물선에 실을 거 아닙니까. 올릴 때, 중력과 상관없이 올라갈 때 그 컨테이너 안에 여러분이 탔다고 생각해 보세요. 타서 일상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지상에 있는 거야, 공중에 있는 거야?’하고 굉장히 황홀할 수도 있고, 들뜨기도 하고, 아래쪽 보면 사람들이 개미같이 보이기도 하죠. 바로 그런 기분으로 여러분들이 9시에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제가 묻는 거예요.

말씀이, 공중 재림한다는 그 성경의 말씀이 여러분들이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어떤 영향력을 주던가요? 또 예를 들겠습니다. 엘리야는 죽을 때 불 수레 타고 올라갔습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물도 안 마시고 양식도 없이 하나님과 독대했고 만났습니다.

그게 실제 성도의 모습이라면, 그리고 여러분들이 성도라고 한다면 평소에 식사나 물 마시면서 ‘어서 모세처럼 되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들의 실생활에 투입이 되던가요? “여보 당신 지금 무슨 요리 하는 거야?” “나 지금 공기를 요리 하는 거야. 공기 맛있지?” 뭐 이런 게 되던가요?

“당신 무슨 요리해?” “미더덕찜!” 미더덕찜 해서 그거 먹어봐야, 그거 먹는다고 해서 내가 죄인입니까? ‘아, 나는 미더덕찜을 먹고 죄인인 줄 알았다.’ 뭐 그런 게 있던가요? 주님은 말씀으로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는데 우리는 말씀은 밀어내버리고 맛있는 음식 먹는 것으로 자기를 규정하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게 내 욕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욕망. 그러면 한 달 내내 미더덕찜 해주면 내 욕망에 족합니까? “다른 반찬 없나? 여보, 다른 반찬 없어?” 왜 욕망이 또 다른 데로 비껴갑니까? 욕망의 화신, 그건 마귀 때문에, 영적 존재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아까 정신 분석학자 그 사람은 욕망의 대상을 영적 존재에서 찾을 줄 모르고, 그 사람은 말씀을 안 믿기 때문에 모르고, 공중 재림 같은 거 안 믿어요. 마리아가 남자 없이 태어난 아기를 잉태했다는 걸 그 사람은 안 믿어요. 정신 분석학자 그 사람은 안 믿는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은 믿습니까? 그 사람은 안 믿는다고 욕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 여러분은 믿어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 남자 없이 태어난 사람, 남자 없이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새로운 피조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요. 돌아가신 네 엄마 기억하지 않는다고 닦달 내는 가족 보면 기가 차요.

“근호야, 네 엄마 돌아가신 지 몇 개월 되었는지 알아? 80개월 됐다.” 내가 기가 차서요. 솔직하게 “제사비 줘. 돈 줘.”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불쌍하구나.’ 주겠는데 그게 아니고 “엄마 돌아가신 지 80개월 됐는데 엄마 기억하냐?” 여러분, 인간의, 우리의 몸은요, 60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어요.

그러나 천국 백성의 몸은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 챙기기 위해서 맛있는 거 먹을 줄 알았지, 말씀은 여러분들이 먹습니까? 아예 먹더라도 털어 내잖아요. 교회 문 열고 나오면 털어 내기 바빠. 먼지털이 드릴까요? 막 먼지털이로 털어 내, 공중 재림이고 뭐고 간에, 홍해가 갈라진 거, 다 털어 내고요,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 그들이 살았다는 것도 다 털어 내요. 하여튼 말씀이라고는 다 털어 내요. 왜? 누가 그렇게 시키던가요? 여러분, 누가 그렇게 시키던가요? 말씀은 자기 욕망의 대상이 안 되기 때문에 털어 내는 거예요, 인간들이. 사력을 다해 말씀을 털어 내요, 사력을 다하여.

주님이 오신 이유는 뭐냐? 너희들이 나를 믿지 않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겁니다. 믿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그건 악마의 노림수고요, 예수를 믿지 않는 게 사랑이에요. 왜? 그게 나의 진면목이기 때문에. 예수 믿지 말라고 예수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지 말라고! 왜? 당연히 안 믿을 거니까. 세포로 된 우리 육신이 그래요. 배후에 악령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악령이 있다는 걸 어떻게 사람들이 아느냐? 모르죠. 모르니까 주님께서 열두 제자 속에 사탄을 집어넣은 겁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가룟 유다의 그 위상, 처지가 뭐냐 하면 유일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채 선택된 사람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라고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선택된 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도록, 팔도록 그 기능을, 역할을 주께서 부추기는 사람이 가룟 유다예요. 가룟 유다가 사탄이거든요, 사탄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눈에 보이는 세상 자체가 사탄이 있는 지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줄 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일부러 열두 제자 중에 심어놓은 거예요.

사탄이 없다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사탄이 있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 속에 내가 선택해서 이걸 꽂아 넣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악마까지 집어넣어 줘야 예수님의 최종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 인생을 감당 못 해요.

왜? 이미 악마와 결탁되어서 악마의 조종을 받는 상태에서 내 육신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알 수 없는 욕망이 있는데 채워도, 채워도 결핍을 느끼는 욕망에 후달리고 시달리기 때문에 한평생 살면서 내 인생 내가 감당을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걸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들춰내는 거예요,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 된다, 이거 인간이 가능합니까? 주님께서 하는 이야기는 전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걸 총동원해서 내 말씀을 한번 지켜봐라, 이게 가능한지?”라는 겁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하라는 이거 가능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하지 않고 이 말씀이 불가능한 이유가, 육신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이 세포로 되어 있는 눈에 보이는 육신, 이게 전부기 때문에 도덕을 총동원해도 우리는 주의 말씀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도록 그렇게 하셨어요, 주께서. 그걸 알아채면 그게 주님의 사랑을 알아챈 사람이에요.

천국 가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사랑이다.’ 이게 천국 백성이에요.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이에요. 욕 얻어먹을 이유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마귀 백성, 지옥 백성이냐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이라고 간주 해주시고 저를 인정해 달라.’ 이게 지옥 백성입니다.

못 들은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도 설교 어렵다고 욕을 얻어먹어서 유난히 오늘 친절을 베풉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하나님을 안 믿고, 하나님을 욕하고, 비난하고, 세 번씩 부인하고, 뭘 해도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백성이에요. 그런데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 잘했다고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이 이게 지옥 가는 지옥 백성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자꾸 자기를 방어해요. 자기를 변명한다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해야 됩니다. 그것도 기쁘고 즐겁게 미워해야 돼요. “저리 떨어져. 가룟 유다야.” 우리 자신, 악마와 내통하고 있는 이 육신이 주님한테 허락받은 육신인 줄을 알고 우리는 마음껏 기를 써서 우리를 미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백날 말씀 들어도 못 지키고 아니, 말씀이 들리면 ‘안 들으련다~’ 하고 귀 막는, 말씀만 하면 무조건 잠자고, 귀 막고, 딴짓하는 그 자신, 말씀 듣는 것보다는 딴짓하는 게 더 좋은 것, 내 육신의 야망과 욕망을 마저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보는 것을 삶의 유일한 낙으로 여기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정확하고 참된 우리 모습입니다. 이걸 무슨 수로 알겠어요?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오고, 은혜가 오고,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 15절에 나옵니다. 그 사람을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했어요.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죠. 부르심을 입은 자, 출생하면서 그런 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요. 없는데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면서 한 제자 가룟 유다를 마귀로 섞어 넣었어요. 마귀 빼고, 그 한 제자 빼놓고 열한 명은 주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어서 나중에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줍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 너희들을 구원하는 효과가 효력이 없는 걸 너희들은 기억하지? 내가 이제 죽었잖아. 죽었으니 비로소 내 유언이 효과가 있어서 너희에게 성령 보낸다. 그래서 너희들은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된 거야. 부르심을 입은 자가 되었거든, 내가 전에 너희들에게 살아있을 때 이야기했던 그 행위와 내 모든 말, 너희의 육신 자체가 어떤 육신인지 이제는 제대로 눈 떠서 알겠지, 그렇지? 너희들이 가룟 유다였어. 네가 마귀와 내통했어. 이걸 발견하는데 기쁘지 않아? 즐겁지? 감사가 되지?” 그게 주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게 어떻게 열한 제자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로마서 1장 6절에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아, 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너희들이 나에게 나와봤자 나는 너희를 인정 안 하는데 내가 불러줄 때만 너희는 천국에 오게 되었다는 그 증거를 담보로 가지고 있는 사람, 이게 부르심을 입은 자예요.

집사님은 어떻게 구원되었습니까? “부르심을 입었어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됐죠? “주님이 개입해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모세, 예수님 오시기 1200년 전의 사람이고, 그리고 엘리야는 8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두 사람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났죠? 정답은, 예수님 자기가 그들을 호출한 거예요.

그걸 제자들은 “와, 부럽다.” 주님께서는 “부러워 하지 마. 너도 부르심을 입을 거야. 이처럼 부르심을 입어야 구원받는 거야. 내가 너를 불러줄게.” 그래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안 불러주면 구원이 안 되니까. 안 불러주면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줄 알아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내가 예수를 믿고, 사랑하고, 교회를 다니고 별짓을 다 해요, 별짓을. 구원이 가능하지도 않는 짓거리를 한다고요. 우리나라 교회 많잖아요. 교인들 한 번 보세요. 전부다 인간이 가능한 일을 해요. 헌금 내고, 기도하고…, 전부다 인간이 가능한 일을 한다고요. 가능한 일은 소용없어요. 안 받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볼 수 있어야 되죠,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세 번씩이나 부인했잖아요. 못 알아듣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은가? 거울 안에서 주님이 외칩니다. 거울 속에서 주님이 외치니까 거울 밖에 있는 인간들이 그 소리가 안 들리죠.

거울 안에서 주님이 외쳤어요. “피, 피!” 하니까 거울 밖에 인간들이 “돈? 돈 말입니까? 돈 버는 게 복이라고요? 열심히 하고 돈 벌고 있어요. 예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복 주셔서 돈 벌고 있어요.”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아니고 “피!” “주식 투자요? 이걸로 재미 봤어요. 기도해서 응답받았어요. 재미 봤어요.”

주님께서 “내 피의 죽음에 동참해라.” 인간들은 “건강한 거요, 건강?” 입천장에 바른다는데 그런 게 뭐가 있어요. 비타민 C보다 500배의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건강이요? 건강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우리 장로님도 어깨 탈골되어서 수술해서 오늘 못 나오셨어요.

그러니까 세포로 된 나, 옛날 나죠. 흙이 되어야 될 나, 이 나가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겠습니까? 새로운 욕망이 생겼어요. 뭐냐? ‘빨리 몸이 건강해야 할 텐데.’ 새로운 욕망이 나온 거예요. 세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난번에 했던 대로 단벌 신사죠, 몸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마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돌이 떡 되게 하라.” 예수님을 유혹할 때 돌이 떡 되게 하라고 했거든요. 주님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떡이 돌 되게 만들어줄게. 네 몸을 흙으로 만들어줄게.” 이게 이미 주님의 확정된 결론입니다. 아무리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해도 못 알아듣는 것은 기본이고 그보다 더 속 터지는 것은요, 아예 안 들으려고 해요. 듣지 않으려고 해요.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뭐냐? 누가 시켰어요. 가룟 유다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의지대로 움직인 게 아닙니다. 마귀가 시킨 대로 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요. 인간에게 두 종류의 가스라이팅이 있어요. 가스라이팅이라나는 것은 강제로 강요하는 것이지요.

하나는, 세포로 된 인간의 육신은 악마가 가스라이팅 했어요. 그런데 새로운 몸, 주의 부르심을 입어서 만들어진 몸은 주님이 가스라이팅 해요. 주님의 말씀대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아까 봤던 로마서 1장 6절에서는, 부르심을 받는데 구원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가스라이팅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거예요.

마치 우리의 옛 육신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부림을 당하듯이 새로운 사람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부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이런 말씀 하십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누굴 불러주느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 나옵니다. 인간은 내가 없을 때 존재해야 합니다. 내가 없을 때 존재했어야 해요,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이름’이라 하거든요. 이게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자꾸 설교가 어렵다고 하는데 설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성경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 전입니다, 그리고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전입니다, 이미 한쪽 야곱은 사랑받기 위해서 야곱이 되어야 하고, 형인 에서는 미움 받기 위해서 형이 되어야 해요. 로마서 9장 10-13절까지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제 설교가 어렵다 하지 마시고 성경의 본문이 어려운 거예요. 어제 어떤 분이 카톡으로 저에게 질문을 했는데 이 질문을 여러분을 향한 숙제로 여기고 여러분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그분에 저에게 한 질문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본인이 사랑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겠죠?” 이게 질문입니다.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사랑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겠죠?” 이게 질문이에요. 꽈배기 있지요. 꽜는데 또 꼬는 것. 이중부정을 집어넣어서 꼬는 것. 한 번 더 해서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답변할 기회를 드립니다. “본인이 사랑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없겠죠?”

어려운 질문의 극단적인 사례가 되겠죠, 되겠쬬~! 나름대로 여러분의 답변을 갖고 있다 치고 제가 후딱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가 오면 자기가 죄인 됨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게 답변이에요. 질문하는 이 사람은 뭘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60조 개의 세포로서의 내가 뭘 알아야 이 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국교회를 비롯해서 천주교든 모든 교회 교인들이 지금 이런 마음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 예수님을 안 믿는 것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단이라 하는 거예요. 그거 보고 이단이래요. 이단이라 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그런 사랑 아직 안 왔어요.” 왜 솔직하게 말을 못 해! “마귀가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 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그 감격스러운 고백을 왜 못합니까? 성령이 없어서 그래요, 성령이 없어서. 부르심을 받지 못해서 그래요, 부르심을 받지 못해서. 자꾸 말씀을 기피하고 자기 인생, 하나밖에 없는 단벌 육신 그걸 즐길 생각만 하고, 자기 이익과 손해만 생각하고.

제가 그렇게 하면 “목사님, 그게 우리가 아담으로 태어난 육신의 본성 아닙니까?” That’s right! 바로 제가 그 고백을 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고백을 바랄 때 얼굴 표정이 기분 나빠서 하면 지옥 백성이고 기분 좋아서 하면 천국 백성이에요. “우리가 주의 말씀 듣기 싫어하고, 주의 말씀 털어 내기 바쁘고, 주의 말씀만 보면 천리만리 도망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마귀 자식이라서 그렇잖아요.” 활짝 웃으면서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제가 감격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하겠습니다. ‘여기 성도 하나 또 생겼네.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 또 생겼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 자체가 이거예요. 살아 있는 인간이 살아 있는 하나님을 만나봐야 말짱 소용없다. 그 본문이에요. 하나님이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서 백날 말씀 전하고, 물 위를 걷고,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라는 걷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봐야 인간은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니, 인간은 달라지면 안 돼요.

죽을 몸이라면 죽어야 하고, 다만 죽을 때 악마와 가룟 유다로서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어 줘야 해요. 우리의 육신은 폐기 대상입니다. 없어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없어지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뭘 하느냐? 주님께서는 마음껏 허락을 해요. “네가 육신 가지고 교회 오랫동안 나오면서 네가 할 수 있는 그 짓거리 있지 않느냐? 그 짓거리 다 해봐라.”

성경 달달 외우고, 언약 다 알아봤자 직장생활에 전혀 보탬이 안되고 영향력이 없어요.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다. 예수님이 죽었다 사흘 만에 살아났다.’ 그게 직장생활의 점심시간 탕비실에서 커피 마시는데 무슨 도움이 돼요? 거기서 막 눈물 흘립니까? ‘주께서 돌아가셨구나. 그런데 사흘 만에 부활 되었다. 기쁘지 아니한가!’ 그게 12시에 커피 마실 때 무슨 영향을 주던가요?

‘아이고, 몸은 깨져도 벌어야 밥 먹고 살지. 아이고, 내 한 몸 벌어야 식구들 먹고살지.’ 그렇게 그냥 사는 거잖아요. 돌이라도 떡이 되었으면 하는 거예요. 이거 마귀가 시킨 거잖아요. 우리는 마귀한테 가스라이팅 당해서 그것만 하는 거예요. 닭을 튀기든 뭘 튀기든 튀겨야 살지요. 그래야 애들 유학이라도 보내지요.

할 수 있는 재주가 그 재주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전제로 하고 그런 썩어빠진 흙을 주께서 불러내서 내 주제 파악하게 해준 이 은혜가 이미, 이미 천국 백성이잖아요, 그게! 얼마나 고맙습니까, 주님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겠어요? 내년에도 교회가 유지된다는 조건하에 교회 목회 목표는 이미 정해졌어요. “everybody 가룟유다”에요. ‘전부다 가룟 유다.’

그 가룟 유다부터 출발해야 해요. 왜? “너는 사탄이야.” 그것부터 출발할 때 사탄에 속하고, 사탄에서 못 빠져나오는 나를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의 그 위력,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효과가 발생되는 그 유언의 살아있음, 살아 있는 유언이 사탄에 박혀 있는 나까지라도 빼내서 기어이 두 번째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새로운 천국 백성으로 만드시는 그 위력에 감사하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룟 유다부터, 바닥부터 늘 매일 같이 새로 시작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얼추 성경 좀 알고 뭘 좀 안다? 그것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 욕망이에요. 유언을 유언답게 하겠다는데 그게 나빠요? 그게 나쁜 겁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죽으심답게 드러내겠다는데 왜 그걸 헐뜯습니까? 갓난아이가 젖을 줬는데도 울어요. 엄마는 갓난아이의 욕망이 뭔지를 몰라요. 갓난아이의 욕망은 뭐냐?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것에 동조해 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욕망이에요. 그래서 아까 그 문장을 제가 다시 한번 읽어드릴 테니까 이제는 분명히 구분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천국 백성은 뭐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자는 천국 백성이에요. 그런데 뭐가 지옥 백성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게 지옥 백성이에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따라서 마귀 백성은 어떤 노력을 다해도 사력을 다하여 말씀을 밀어냅니다. ‘안 들으련다~, 난 못 들었다, 안 들은 것으로 친다. 동정녀 마리아? 난 책 덮었다.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올라간다? 난 모르는 이야기다. 유월절 피를 바른다고? 난 모르는 이야기다.’

며칠 전 광주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월절을 설명하면서 히브리 백성들의 집에 발랐던 그 피가 자기 맏이의 피가 아니라고 했어요. 자기 아들 죽여서 천사가 오는 길목에 바른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무슨 피를 발랐는가? 이미 아들을 죽이는 어린양의 피를 바른 거예요. “이 애는 이미 죽었습니다. 천사님, 갋지 마세요. 이미 죽었습니다. 이 애는 이미 죽어 마땅하니 내가 대신 죽습니다.” 그게 유월절 어린양이에요. 예수님이 그것 때문에 오셨던 거예요.



그런데 살아 있을 때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나 죽고 난 뒤에 유언으로 성령이 오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죽으러 오셨구나. 왜? 말도 안 되게 악마와 한통속이 된 나, 자기 야망만 채우면서 잘 산다, 나는 건전하게 산다, 바르게 산다, 이 자랑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마귀 자식, 이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살리기 위해서 죽었던 그 피, 그 피 이야기’를 하는 게 성령의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속죄, 죄를 사한다, 유언의 능력이 죄를 사해주거든요. 그러면 그 죄가 뭐냐? 우리는 그 죄를 알게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주께서 원하시 는 믿음은 아까 읽은 교독문에 나오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세포로 된 나의 몸에서 나는 믿음이 아니고, 악바리가 아니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담아준 그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믿음이 얼마나 불신적이고, 이기적이고, 자신의 구원받고자 하는 종교적 야망에 불과한 불순한 악마적 믿음인 것을 아는 겁니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면서 우리가 죄인 됨을 주께 더욱더 감사하는 한 해로 마무리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에,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는지, 이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러한 죄인 중에 괴수를 주님께서 어린양으로 용서해 주시고 죽기까지 하면서 그 효과를 내주신 그 속죄의 능력을 이제는 증거하는, 주님에게 가스라이팅 당하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대전강의 20241230 주일오전오후 설교 요약-이 근호 목사


오후부터 요약하겠습니다. 왜 오후부터 하느냐? 이게 나중에 했기 때문에 기억력이 좀 살아있거든요. 주일 오후에 핵심부분이 뭐냐 하면, 옛날부터 제가 궁금했던 거예요. 출애굽기 20장 5절에 분명히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는다 했잖아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래서 한때 기존 목사들이 그걸 이용해서 목회에 성공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당신의 가계, 당신의 족보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세요. 책도 여러 권 나왔거든요. 그러면 그걸 보고 자기 집구석에 아주 화딱지를 내고 있는, 여자 같으면 친정과 시가집 두 집 아닙니까, 이 저주를 어떻게 끊어야 될지. <김약국의 딸들>처럼 저주를 어떻게 끊어내느냐.

거기에 대해서 푸는 방법으로 낙관적인 희망 그런 게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이제 빠지는 거예요. 출애굽기 20장 5절에서 당신 대에 끊어버리면 이게 삼사 대까지 안 가고 이 대에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애가 장애자라든지, 애를 낳았는데 공부를 잘 못한다든지 하면, 이건 저주 받았구나. 또는 건강이 안 좋다든지 이럴 경우 있잖아요. 그리고 또 임신한 여자가 DNA가 잘못됐나 싶어서 미리 또 기도로… 모차르트 음악가지고는 성에 안 차요. 임신했을 때 기도빨로 은혜가 충만한 애가 나오기를 기도할 때 일단 자기 집안을 자기가 잘 아니까 이제 내 대에서 저주는 끝! 끝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심보 그 자체가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를 위하여 신을 섬기지 말라’할 때, 그들은 나를 위해서 우상 섬기면 안 되고 나를 위해서 여호와 섬기면 되는 걸로 여겼던 거예요. 그래서 저도 신학교 다닐 때 그 대목을 보면서, 왜 ‘삼사 대 저주’라는 그 말씀을 하셔가지고 인간들을 주눅 들게 만들어서 교회를 세우면 100% 기복신앙으로 왜 빠지게 하시는지… 이거 안 빠지게 하려면 이 본문부터 뭔가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것 같은데 모르겠다고 저도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지난 주일 오후 때, 주님께서 시간 전략을 짰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뭐냐 하면, ‘안 가르쳐주지~’ 작전이었어요. 완성된 것을 안 가르쳐주고, 완성된 것의 부분적인 것을 언급하면서 완성된 것을 후(後)에 배치한 거예요.

그래서 ‘저주’라는 말을 한 것은 이런 뜻입니다. 앞으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부분적으로 율법을 줄 때는 ‘잘못한 게 있으면 삼사 대 저주받는다.’ 이렇게 되죠. 그러나 나중 언약이 오게 되면 ‘몽땅 다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라는 언약이 주어질 것이다.

그때는 뭐 “우리는 삼사 대 저주 받은 게 아니다. 너희 집은 저주받았어. 빨리 끊어.” 이런 소리를 너나 나나 할 자가 없게 만들어요. 그게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야 돼요. 왜? 하나님을 몰랐으니까. 하나님을 모르면서 율법 붙들고 지켜야겠다는 것은 출제의도도 모르면서 나 문제풀었다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시간 전략에서, 어제 오후에도 이야기했듯이 ‘인간이 현재를 산다는 것은 미래 자체가 장벽이다.’ 인간은 뚫어내지를 못해요. 뚫어내지를 못합니다. 막혀있어요. 막혀있으니까 마음 놓고 주께서는 새 언약을 미래에 준비한 거예요.

그렇게 하고 다시 해보면, 모든 인간은 저주받는다. 저주받는다는 말은 아버지 때문에 내가 저주받는다는 그런 입담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토막을 내버려요. 피자를 토막 내듯이 토막을 내서 모든 영혼은 각자 내가 알아서 내가 심판하는데 어떤 심판? 부모 죄 때문에 저주받는다는 그것은 폐기처분하고, 모든 인간은 모든 자기 죄로 인하여 처벌은 본인이 받는다는 새로운 새 언약에 입각해서 처벌해버립니다.

그게 십자가죠. 처벌을 해버릴 때 인간은 더는 의롭다 할 수 있는 입장은 이제 못 됩니다. 그런데 새 언약, 다음 주일에 새 언약 하는데요. 예레미야에 새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 각자가 죄인이 되고요, 새 언약이 주어지고 완성이 되지 않습니까.

그 완성은 바로 인간들 몽땅 저주받게 하는 위에 새로운 층을 만들어요. 그걸 ‘부활층’이라 합니다. 새로운 층. 이 층은 일단은 누가 만드시는가? 이 땅에서 죄 없이 살다 가신 분이 만든 나라, 부활의 나라가 되고요. 부활의 첫 열매니까. 그 다음에 그 첫 열매에 참여해야 될 사람 모집을 지상에 죄인 가운데서 뽑아내는 거예요. 죄인 가운데 뽑아내버립니다.

뽑아낼 때 조건이 하나 있어요. 일단은 네 죄 값을 치러야 되고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내 죄 값을 누가 치르느냐? 내(예수님)가 대신 치른다는 조건을 네가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 네 안에 십자가가 들어가는 조건 하에 부활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품에 안아야 되지, 십자가 빼놓고 ‘나는 십자가 지나갔으니 난 부활되었다.’ 이런 사람은 그건 새 언약 백성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하도 그런 사람이 많아가지고요. 십자가 내놔야 될 것을, ‘나 구원받았다’를 내놓는 사람이 많아가지고 많이 답답해요. 그게 바로 오후 설교의 내용이었어요.

이것은, 나는 이 땅에 죄 짓고 나보다 앞선 시간은 내 모든 죄를 다 이루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7분 지났는데 3분 동안 또 하겠습니다. 주일 낮 설교 중에서 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되어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몸 안 받습니다. 왜? 떡을 돌로 돌아가게 한다는 말은, 떡을 먹어 사는 인간의 육신을 흙으로 돌려보내는 그 작전에 의해서 주께서는 흙으로 돌려보낸다는 거고요.

아담에 속한 형상이니까 돌려보내고, 말씀 완성을 위한 육신을 따로 준비해놨어요.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조건 하에 말씀으로 재조립된 몸을 주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받습니다.

그럼 말씀을 주는 그 작업은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말씀을 준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말씀 안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자기 활동이거든요. 예수님의 자기 활동을 말씀 안에 담았기 때문에 ‘아, 예수님 활동에 입각해보면 우리 때문에 죽었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살아나셨구나.’ 라는 것을 포함해서 말씀을 늘 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문만 나가면, 말씀이 실제 생활에 영향력을 줘야 되는데… 제가 오죽했으면 ‘먼지털이개 빌려드릴까요?’ 했잖아요. 이거 뭐 돼지갈비 먹고 냄새 날 때 페브리즈 뿌리는 것처럼 말씀을 다 희석시켜요. 세상에 돈 버는 일에 매진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거울 안에서 “피! 피!”, 쉽게 말해서 “오겡끼데스까?” 하는 것처럼 “피! 피!”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말씀을 떨어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뭐? 돈 벌라고요? 주식 투자해서 요번에 대박 났어요. 비행기는 떨어져도 주식은 올랐습니다.” 뭐 이런 거. 모든 몰입을, 이 세상은 남의 나라인데 내 나라 아닌데 떠날 이 나라에서 내가 인정받는 데에 전부 다 올인해서 몰입하고 있어요.

그럼 대책이 뭐냐? 그 이유가 우리가 영적 존재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단 말이죠. 그럼 영적 존재가 되는 방법은 뭐냐? 주께서 영과 육을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가 있어요. 사자성어로 가룟 유다. 내년에는 everybody 가룟 유다 되는 거예요. 바닥부터 새로 시작. 가룟 유다보다 더 못된 사람이 사도 바울.

그러니까 선을 넘은 자까지라도 이 하나님의 유언의 효력은 어느 정도로 세냐? 지옥 품, 마귀의 품 안에 ‘이건 안 내놓는다. 내 사람이다.’ 해도 주께서는 그 인형을 빼앗아갈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시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씀드린 것은 자기를 미워하자. 말씀을 안 듣고 결사적으로 나를 미워하는 그러한 즐거움을 누립시다. 이게 어제 설교 결론이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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