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속죄의 혜택

아빠와 함께 2024. 12. 22. 19:27

속죄의 혜택 

2024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 11-14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옛언약에 대한 부정은 그 옛언약이 창조에 속했고 그래서 또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제조해 낸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취지에 대해서는 새언약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창조에 속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일절 안 받습니다. 하지만 그 취지는 완성해야 하기에 이 완성을 위해 하늘에게 누군가가 오십니다.

하지만 그 오시는 방식이 과격합니다.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단절’되어 있는 관계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막 1:10) ‘하늘의 찢으짐’을 동반해서 성령이 임해야 한다는 말은 앞으로의 예수님의 활동성이 과격함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말씀에 대해서 이 땅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알아먹지 못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요 3:21-22)

땅에 사는 자들은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대체로 건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자기가 그동안 꾸려온 인생에 대해서는 이 건전함을 유지하는데 있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이 꽉 막혀 있고 단절되어 있음을 전혀 모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굳이 내려오셔야 하는 지를 그들을 모릅니다. 당연히 노아의 물 심판과 장차 온 세상의 불 심판의 이유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과 말씀은 인간들로 하여금 이 안일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더럽고 추잡은 모습인 것을 말ㅇ해주십니다.

마태복음 7: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여기 나오는 ‘개와 돼지’가 어떻게 가축보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사람들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이런 욕설을 들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릅니다.

최고의 쌍욕은 바로 ‘속죄’입니다. 이 속죄작업을 위해 인간들은 철저하게 죄인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와 뜻은 속죄의 본질에 손상이 가지 않겠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이유는 이 속죄작업을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출생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죽음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위해’삽니다. 그래놓고도 자신을 건전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속죄작업의 과격함은 옛언약에 속한 성소의 존재에서도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전뜰에서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의 불 위에서 제물들은 한 줌의 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개·돼지 정도로 대우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체로 취급받아야 합니다.

단순히 창조에 속했다고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겁니다. 속죄작업이 시작은 바로 제단불에 의해 한 줌의 재가 된 것들을 쇠꼬챙이와 부삽을 가지고 긁어내는 일입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파괴시켜버리는 겁니다. 더럽고 추잡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인간이 살려고 마련한 모든 기반 자체가 무효라는 겁니다.

가정, 직장, 각가지 모임 및 교회까지도 모두 더럽고 추잡스럽니다. 하나님의 깨끗함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할 수준이 못됩니다. 이 더러운 수준의 시작은 “차라니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면 그게 나에게 나은 사정이었다”고 해당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멸절시키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막이 있습니다. 이 성막 안에서는 죄를 의로 바꾸는 작업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예가 마가복음 8:22-26에 나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 소경을 눈을 뜨게 하시는 작업을 통해 일단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단절을 분명히 하십니다. 침을 뱉는다는 것은 하늘의 침이 그 소경에게 묻혔다는 말입니다. 이 단절로 인해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눈 뜨게 된 자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와 속죄를 아는 이가 없다는 겁니다.

소경을 다시 안수하매 비로소 만물이 보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안목으로 장착된 자가 된 겁니다. 단순히 시각적 장애 이전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

이 대목을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자가 아니라면 모두가 땅의 일만 아는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얼마나 추잡고 더러운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한 일’과 ‘창조에 속한 것’을 받지 않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소경 사건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9:17-18에 나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즉 사울이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한계로 넘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도리어 핍박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선 너머까지 오셔서 사울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납니다. 그래서 등장한 안목이 바로 에베소서 1:18-19에 나옵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창세 전의 내용까지 성령을 통해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제 성도의 남은 삶은 이 세상 자체가 여전히 예수님을 시험한 악마의 마당인 것을 알고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속죄작업으로 인해 의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로 차고 넘치게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속죄작업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7강-히브리서 9장 11-14절(속죄의 혜택)241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1-14절입니다.

히브리서 9:11-14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옛날 이스라엘에 성소라는 게 있었고, 지금은 그 성소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더 나아가서 이 세상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것과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 여기서 사람이 지은 것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생각해야 되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성소였습니다.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지으라고 해놓고 ‘사람이 짓지 않은 성소’, 이 세상에 있는 물건을, 재료를 가지고 성소를 만들어 놓고 ‘이 창조에 속하지 않는 것’ 이렇게 따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시켜놓고 자기 자신의 일에 진척을 보이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 자체, 사람의 손으로 지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는 뜻이죠.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은,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선 스스로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건 인간에 대한 강력한 부정입니다. 인간이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자체가 상당히 과격한 말로 연결되어 있지만 거기서 가장 과격한 말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바로 예수님이 자기가 하늘에서 살다가 이 땅에 왔다는 그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내가 살던 곳은 이 지상이 아니고 하늘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 31절에 보면, 스스로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세계에서 알던 것과 너희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살아가는 너희들 아는 것과는 확연하게 연결될 수 없고 끊어져 있다,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어요. 이 말은, 너희들이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늘에서 내려온 내가 하는 모든 말, 내가 이제부터 그 말을 할 테니까 너희들 중에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보라.” 없다는 겁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말을 하지만 땅에 속한 사람의 말은 하늘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땅에만 맴도는, 땅에 있는 자기들끼리만 소통되는 말을 한 거예요. 이건 단절된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분이 단순히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이 말 하려고 일부러 오신 건 아니고요.

땅에 속한 것, 인간에 속한 것은 다 부정하고 “이것은 추접하고 더러워서 안 받는다.” 이 말만 하시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땅에 속한 인간들이 어떻게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 주께서 그것까지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하늘과 땅이 단절되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그 일 처리는 깔끔해요. 물로 다 심판하면 되니까, 물로 심판하면 그만이에요. 장차 남아있는 것은 불로 심판하면 그만이고.

물로 심판하기 전에, 불로 심판하기 이전에 먼저 이 땅에 주께서 하실 일이 있어요. 불로 심판되기 전에 먼저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하늘에서 오신 겁니다. 하늘에서 오신다는 이 이야기도 참으로 과격한 말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 쪽에서는 하늘과 땅이 끊어져 있고, 단절되어 있고, 막혀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했다, 이 말이죠.

막혀있는 쪽을 인간 쪽에서 뚫어내지 못한다, 이건 당연한 거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늘과 땅의 막혀있는 것을 무슨 수로 뚫어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는 ‘뚫어낸다’고 하지 않고요, 제가 아까부터 과격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하나님 쪽에서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내려왔다.’ 아주 순하게 이야기한 대목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막혀있는 것을 찢어버린다.’라는 표현을 해요. 그게 마가복음 1장 10절에 나옵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갈라짐’이라는 표현을 했는데요, 이 갈라진다는 표현이 찢어지는 거예요.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온다는 거예요. 닫혀있다, 막혀있다, 이건 찢지 않으면 절대로 열릴 수 없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 내려왔다.’ 그것도 구멍 뚫듯이, 찢듯이 내려왔다는 말은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예수님의 활동은 하늘과 땅을 통과하는 그 대목만 찢는 게 아니에요.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찢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남기는 겁니다. 그 말씀을 남기면서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연속적인 과격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가롯 유다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너에게 좋을 뻔했다’(마 26:24), 이런 관점, 땅에 있을 때는 그런 관점을 누구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사는 게 고만고만하고 너 사는 거나 나 사는 거나 그저 그런데 너는 너대로 살다 돌아가세요, 난 나대로 살다 돌아갈게요.’ 뭐 이렇게 하면 끝나는 문제인데 뭔가 위에서 봤을 때 모든 사정을 알고, 하늘 사정 땅 사정 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분에 한 해서만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에 있던 성소입니다. 성소와 율법이었어요. 이스라엘의 성소, 율법, 오늘 히브리서 본문이 그걸 의미하는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성소 있는 거 외엔 전부 추잡하고 더럽다는 겁니다. 다 더럽다.

“더러운데 왜 하나님은 이 땅에 성소를 지으라고 했습니까?”라고 우리가 대들면 하나님께서는 “다 더러운데 더럽지 않은 정결한 정화된 장소를 공간을 내가 따로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이 땅에 너희들 속에 함께 왔다. 성소와 함께 있다.” 더러운데, 더러운 곳에 오면서도 더러움에 때 묻지 않고 깨끗한 장소를 따로 설정하는데 그 장소가 성소입니다. 성막이라는 곳이에요.

그런데 이 더럽다, 불결하다, 추잡하다, 하는 안목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갖고 있을 안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인생을 볼 때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아요. 우리는 상당히 건전하게 하루 삶을 그냥 살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자부합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 신앙인들을 쭉 보면, 구약부터 신약까지 신앙인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 가운데서 특이한 마디가 있어요. 그 마디가 뭐냐? 내가 건전하게 일상적으로 그냥 안일하게 살아온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잡하고 더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러한 결정적 마디 같은 게, 순간 같은 게 있어요. 이게 건전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순간에 도달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쌍욕을 해도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더러운 인간아!” 그보다 백배 천배의 욕을 나한테 해도 “맞습니다. 마땅합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는 사람 맞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순간적인 시간적인 마디가 있어요. 그런 순간에 온다고요.

그 쌍욕 중에 최고의 쌍욕을 이 시간에 여러분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게 뭐냐 하면, 속죄입니다. 최고의 욕설입니다. ‘속죄’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너 그냥 그대로 있으면 너는 죄야. 죄 덩어리야. 뭘 해도 소용없어.’ 이런 뜻이에요. 속죄라는 말이 왜 우리에게 최고의 강렬한 욕설로 들려야 마땅하냐면요, 속죄라는 말은 ‘네가 지금까지 해온 게 전부다 죄를 쌓는 일밖에 안 했다.’라는 겁니다.

죄가 있어야 속죄가 가능할 것 아니겠습니까? 뭐 죄도 없는데 무슨 속죄가 있어요. 건전하게 사는데 무슨 속죄가 성립됩니까? 주님의 뜻은 주님의 관심사는 이 속죄의 원질, 원 성질을 훼손하지 않는 것, 해방되지 않는 게 관심사에요. 속죄 작업이 손상되지 않는 것, 속죄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 것, 주님의 모든 일의 초점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속죄가 속죄답게 되기 위해서, 그 가치, 취지가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은 철저하게 뭘 해도 죄가 돼요. 어느 정도 죄가 되느냐? 인간이 자기 딴엔 건전하다고 여기는, 우수하다고 여기는 모든 삶의 기반 자체가 무효가 돼야 돼요. 직장, 가정생활, 심지어 교회, 세상의 모든 모임(커뮤니티), 자기의 학력, 재산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속죄를 위한 죄가 돼요.

인간은 죄를 끌어모으는 일을 해 왔던 겁니다. 추잡하고 더러운 짓거리만 계속해 왔던 거예요. 속죄 앞에서, 속죄 작업 앞에서. 도대체 내세울 게 없을 정도로 그 죄를 짓는 기반, 환경을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죄지었다는 말을 못 해요. 그런 안목이 없어요. 왜? 땅에 속했으니까.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뭐가 나쁘냐?’ 맨날 뭐가 나쁘냐, 에요. ‘더 이상 어떻게 하라고?’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소를 만드시고 성소라는 텐트와 그 바깥의 뜰로 구분합니다. 물론 텐트안 도 성소와 지성소 둘로 구분하지만 일단 그 바깥뜰에 제단을 세워놨어요. 제단을 세워서 그 안에 불을 피워놓고 거기서 인간을 대체했다는 제물을 인간을 죽이듯이 뭐 여지없이 다 태워버립니다.

제물을 태우면 거기서 제가 나오겠죠. 오늘 본문 13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13절을 제 표현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여서 그 재를 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야 그 사람은 추잡하지 않고 더럽지 않고 그래야 비로소 깨끗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물론 여기 암소와 송아지, 방금 제가 사람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흠 없는 사람이어야 가능한데, 이 땅의 구조가 땅에 속한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흠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흠이 있고 추잡하고 더럽고, 하늘나라는 깨끗하고 나를 대체한 흠 없는 인간은 땅에서는 찾을 길이 없고, 그러니 인간은 절망이죠. 절망입니다.

창조에 속한 어떤 인간이나 창조에 속한 어떤 사람도 자기 죄를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정도에요. 이렇게 일단 속죄 작업이 되려면 이 땅에 속한, 이 창조에 속한 어떤 것도 창조 자체를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소재는 없음을 분명히 해놓고 이제는 하늘에서 개입해서 속죄 작업에 나섭니다.

속죄 작업에 나서는데 이걸 아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에 5, 60년대에 우리 할머니가, 시골도 마찬가지고 대구도 마찬가지인데, 군불을 피우거나 밥을 지을 때, 어릴 때 제가 봤거든요. 보니까 나무를 사다가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요. 부지깽이라든지 쇳조각 가지고 안쪽으로 쑤셔 넣어야죠. 그래야 방이 뜨끈뜨끈 하니까 아궁이 안쪽으로 쑤셔 넣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다 탔을 때는 부삽을 대고 부지깽이로 다 타버린 재를 다시 저 안쪽부터 긁어모았어요. 그걸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겁니다. 성소 뜰의 제단에다가 제물을 태우고요, 다 태우면 재가 남잖아요. 재를 부삽과 쇠꼬챙이 가지고 긁어내요. 그러니까 속죄라는 말은 뭐냐? 추잡하고 더러운 우리는 성전 바깥에서 마땅히 죽어야되기 때문에 마땅히 죽여주시는 것, 이게 속죄 작업의 시작입니다.

더러운 인간, 사람의 손으로 하지도 못하고 창조에 속한 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 정화 작업이라면 그 정화 작업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하느냐? 군불속에 들어가서 다 타야죠. 존재를 으깨고 존재를 불로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겁니다. 재가 되고 난 뒤에는 쇠꼬챙이 같은 걸로 긁어내는 거예요. 이게 다 성소에 있는 기구들이에요.

기구들은 뭘로 구성되어 있는가? 율법의 완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린다는 거예요. 존재를 으깨버려요. 자꾸 존재를 살려두니까 “나 건전하게 살았습니다.” 되지도 않는 소리가 자꾸 나오는 거예요. 율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쪼갠다, 우리의 존재를 쪼개는 거예요. 쪼개고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이 창조에 속한 것, 단지 창조에 속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하고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친히 마련한 거룩한 공간에 있는 그 재단 뜰에서, 제단 위에서 우리는 마땅히 한 줌의 재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한 줌의 재인데 건전한 재가 있어요? 시꺼먼 재인데 뭐 깨끗한 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본질은 시커먼스에요, 시커먼스. 시커먼 재입니다.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왜냐 하면 창조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고 필요하면 우리 손으로 내 인생을 살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한 것은 더러운데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이 땅에서 내 손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그걸 내세우면서 “하나님 나름대로 깨끗하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하늘에 있는 쌍욕은 다 들어도 마땅한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 돼지한테 복음 전하지 말라”는 말이 나와요. 진짜 우리가 아는 개, 돼지보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사람 보고 이야기한 거죠. 사람 보기를 주님께서는 개, 돼지로 보는 거예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절) 이 개와 돼지가 나오는 표현, 어느 인간이 진짜 개, 돼지한테 던지겠습니까? 사람한테 던지는데 주님께서는 “개돼지한테 왜 던져, 그 복음을? 개, 돼지보다 못한 거에게 왜 복음을 던져?”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이게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욕설이 아닙니까? 그 욕설을 제단으로 설명한 거예요. 성소에서 제단 뜰에서 제단에 불 피움으로써 태워버리는 식으로 표현을 해준 거예요. 네가 개돼지보다 못하다는 것을요. 너는 일괄해서 짐승보다 못하고, 이미 너는 죽은 존재라는 거예요. 더럽고 추잡한 주제에 무슨 성경을 보고, 무슨 천국을 가고, 그게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자꾸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살면 솔로고요, 같이 살면 부부사기단이에요. 어느새 같이 물들어가지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인간아.” 그 자리, 그 자리로부터 속죄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속죄 작업이 제단 불로 “더러운 인간, 더럽게 가거라. 재로 만들어버리겠다.” 이걸로 끝나야 하는데 제단 뜰 있고 그 뒤에 성소, 텐트, 성소와 지성소, 그 성막은 왜 있는 거죠?

그걸로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압도적인 거룩함이 우리를 압도적으로 밀어붙여서 재로 만들어서 하나님 속이 시원하면 그걸로 끝나잖아요. 그러면 성막은 왜 있느냐는 거예요. 죄의 속죄 작업에서 제단 뜰에서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규정을 했어요. ‘한 줌의 재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속죄니까 죄는 됐고, 이제는 그 죄가 어떻게 속죄, 없어지느냐, 그 죄를 어떻게 거룩한 양태로 바뀌는지를 위해서 이제는 성막이 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오늘 본문 12절 13절의 말씀처럼 염소 송아지 피, 그다음 13절의 염소와 황소의 피 암송아지의 재로,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나 이건 분명히 언급했듯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거고 이건 창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걸 하나의 예시로 보여준 겁니다. 이건 샘플이죠. 모형에 불과한 겁니다.

따라서 모형에서 일어나는 일의 연속성으로서 나중에 창조에 속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땅에 있는 인간들을 하늘로 보내기 전에 속죄 작업을 해서 의롭게 만드는 작업을 땅에 속하지 않은 방식으로, 창조에 속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일이 일어날 때가 있으니 그 예시를 앞당겨서 성막 안에서 보여줄게, 그래서 성막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그 작업의 적용에 대해서 신약 성경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 22절에서 2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이 대목이, 예수님께서 성막 속에서 일어날 기능, 창조에 속하지 않고 사람에 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작업을 하시는데 일단은 그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어요. 소경을 만들면 소경의 특징은 소경 된 나와 타인과의 단절입니다. 소경이 되었다는 말은 단절되어 있는 상태에요. 단절되어 있는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 그 공동체 마을로부터 따로 격리시켜서 단절되지 않는 사람을 단절되게 만들어요. 데려와서 침을 뱉어요. 이 침은 주님 자신의 침이에요. 하늘에 속한 침입니다. 침을 뱉으면 단절된 인간이 하늘의 단절 요소로써 뒤집어쓰면서 이제는 주님 쪽에 속한 단절된 인간으로 정립이 돼요.

정립이 되면서 “뭐가 보이느냐?”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것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이 인간을 볼 때에 그 인간이 보는 안목을 이제는 소경 된 자의 안목과 연계시켜서 소경 된 자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나무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은데 사람 같습니다.” 나무 같은데 사람 같다.

일차적으로 인간들에 대해서 나무 같은 것들이 보이는, 인간들과 그리고 다른 창조물과의 차이를 못 느끼고 일괄적으로 한통속인 것을 알려주면서 그런 식으로 고백이 나오도록 유도를 하죠. 다시 한번 안수를 또 해요. 두 번 안수를 하면서 이제 어떻게 보이는지. “이제 만물이 보입니다.”하는 거예요. 만물이 보입니다.

지금 이 소경 된 자가 타인과 나름대로 단절이 됐는데 그 단절을 위 레벨까지 올려서 위에서 봤을 때 인간이 단절됐다는 말은, 인간은 땅에 있으면서 모조리 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의 것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모조리 다 소경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은. 전혀 하늘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왜? 눈이 갔으니까. 눈이 가버렸으니까. 만물을 새롭게 정립하는 거예요, 예수님 관점에서. 두 번째 소경의 예는 요한복음 9장입니다. 요한복음 9장 1절에 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주께서 데리고 와요. 제자들이 참지 못 해서 자기의 속내를 확 드러내죠. “예수님, 이 소경 된 자는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자기의 속을 언급해요.

이때 제자들은 본인들이 소경인 것을 몰라요. 소경이면서도 소경인 줄을 몰라요. 하나님 보시기에 소경인 주제에 자기가 기껏 아는 그 범주 안에서 이야기를 해버립니다. 그 제자들이 하는 이 말,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는 그 뜻에 무엇이 담겨있느냐 하면, 제자들은 본인이 눈 멀쩡하게 뜨고 있는, 소경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인간이 자기가 소경이 아니게 되면 어떤 오류를 범하냐 하면, 내가 멀쩡한 생각으로 멀쩡하게 천국 가고자 하는 종교적 노력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본인이 추잡하고 더럽다는 걸 몰라요. 그 종교적인 행위 자체가 추잡하고 더러운 줄을 몰라요.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이게 더러운 것이고 마귀 짓인 것을 몰라요. 본인이 소경인 것을 모르니까, 눈 뜬 적이 없으니까. 기껏 크리스마스 노래나 부르고 있을 뿐인데 뭐 소경은 소경의 눈으로 그 사람은 노래 못 부를 줄 알죠? 잘 불러요. 그거 부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기 주제 파악부터 안 되는데 크리스마스 노래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껏 하는 말이 “아, 우리는 멀쩡하다. 소경들 참 안 됐다. 예수님, 참 안 됐죠? 참 안 됐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면 부모 죄 때문에 저주받아서 그렇습니까?” “너다, 너, 너, 너! 너도 마찬가지야.” 일괄해서 추잡하고 더러운데 한 줌의 재가 될 주제에 어떻게 다른 죄가 더 더럽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딨어요? 다 똑같은 죄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데요.

주님께서 실로암에 보냅니다. ‘하나님이 보낸 자, 하나님이 보낸 자를 네가 대행해라.’ 왜 이 땅에 하나님이 날 보냈는가? 소경으로 하여금 눈 뜨게 만들어주느라고. 그럼 눈 떴다고 치자, 뭐가 달라지는데? 눈 뜨게 되면 나의 모든 일상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금껏 인생을 이만큼 살아왔다는 겁니다.

내 죄 때문이 아니고,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어느 곳에 태어나서 천구백몇 년도에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온 게 모두 주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 영광이 구체적으로 뭐냐? 예수님의 속죄 행위를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이 땅에서 살아온 거예요. 나는, 우리들은 속죄 행위의 일부로 가담되고 있는 게 이게 바로 영광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의 속죄 작업에 말려든 것, 이거보다 큰 기쁨이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소경, 사도행전 9장 17절, 세 번째 소경은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선을 넘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선을 넘었느냐? ‘예수는 확실하게 이단이고, 그 이단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관점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용서가 안 된다. 그런 이단은 그냥 두면 안 된다. 처단해야 된다.’ 하고 선봉장에 나섰던 자,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관여했고 그 연타로 계속 이어서 제2의 제3의 스데반 집사를 만들기 위해서 몸소 앞장섰던 인물, 이름은 사울.

그 사울이 다메섹으로 살기등등해서 갔죠. 다메섹은 다마스커스, 이스라엘 폭격 맞았던 그 동네까지 올라갈 때 주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왜 중요하냐 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이미 구원의 선을 넘어버렸어요.

마귀 짓도 안 하고, 그냥 예수를 싫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뭐 종교에 별 관심 없어. 열심히 돈 벌고 살다가 요양원 거쳐서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평범한 사람은 ‘혹시 복음 들으면 다시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 평범한 선이 아니고 그 선마저 넘어버렸어요. 지옥 가도 마땅한, 예수님 쪽에서 보면 지옥 가도 마땅한 이미 버린 자식으로 그 선을 넘어섰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 선 너머까지 오셨다고요, 선 너머까지. “안 됩니다. 가능성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난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합니다.”라고 외쳤던 그 선 너머까지, 그것은 인간들의 인식이고 주님께서는 “그 선 너머도 내 백성 있다. 내 속죄 작업은 그 선 너머에서도 멈추지 않는다.”라고 그 선 너머, 내 인식은 그 선을 넘어도, 내 속죄 작업은 악마 속에서, 악마의 품속에서도 능히 성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사울이에요.

하나님 만나고, 주님 만나고 눈이 갔습니다. 소경이 되었습니다. 되고 난 뒤에 아나니아에게 안수 기도 받게 하니까 사도행전 9장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왜 멀쩡한 인간을 눈멀게 만들고, 그 눈먼 인간을 왜 다시 눈을 뜨게 만듭니까? 다시 눈을 왜 뜨게 만들었어요? 그것은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인간에 속하지 않은, 창조 그 이전의 내용까지 알아먹는, 창조 이전까지에 눈 뜬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사도바울이 말했던 그 창조 전의 사정 그게 에베소서 1장 18절에 나옵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라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속죄 작업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구원받는 당사자가 삐져서 ‘나 이제 교회 안 나온다. 복음이랑 빠이빠이 했다.’ 천 번, 만 번을 반항하고 반발해도 주의 속죄 작업은 반드시 그 인간을 천국으로 보냅니다. 누가 그 능력을 말립니까? 구원받는 본인도 말릴 수가 없는데요?

“나는 절에 갈거야.” 절에 가세요. 절에 가서 백팔배를 하든 네 마음대로 하세요, 네 마음대로. “나 라스베가스 갈래.” 라스베가스를 가서 도박을 하든 네 마음대로 하세요. 거기는 속죄 작업이 안 일어나요? 이 속죄 작업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전화 차단’입니다. 주께서 우리가 전화해도 안 받아요. 개돼지 주제에 무슨 기도를 해요. 안 받습니다. 괜히 종교계에서, 기독교에서 사람 꾀이려고 신이 우리 기도를 받는다는 그런 말에 여러분 속아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께 일체 인간의 손으로 한 것을 받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행함도 받지 않는다, 인간의 어떤 마음도 받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속죄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이제 눈으로 보는 것 네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눈으로 보는 것의 마지막이 있어요. 요한일서 2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고 또 어두움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도대체 이 어두움이 뭐냐? 어두움은 요한일서 4장 20절에 나옵니다. 여러분이 이걸 들으시고 이 말씀대로 내가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어두움이 속한 거고요, 내가 이 말씀대로 못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두움에서 벗어났고 어두움에서 벗어난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장착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이 대목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인간들은 자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사랑한다고 왜 자꾸 우기느냐 그 말이지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해요.” “그래? 진짜 그래?” “진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해?” “사랑하지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요.” 그런데 요한일서 3장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예수님이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목숨을 버린다고 해서 형제간에 돈이나 좀 빌려주고 그게 사랑인 줄 압니까? 차 박았는데 “그냥 가세요” 이게 사랑이에요? 그게 사랑입니까? 학교에서 남의 자식이 내 애 때렸는데 “애들끼리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데 그냥 모른 척합시다.” 이 정도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뭣도 모르고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주고 받은 경우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이것이 사랑이에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는데 형제가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율법사가 예수님한테 이웃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웃은 이 땅에 속한 인간들, 소경이 된 인간들은 이웃이든 형제든 본인이 골라잡은 거예요. 본인을 위해서. 따라서 결론이 이거예요.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다 추접하고 더럽다는 그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요.

그런데 그게 어둡다는 겁니다. 그 어두움이 너의 눈을 멀게 했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나의 눈을 멀게 해서 추접하고 더러워도 그것이 추접하고 더러운지를 몰랐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옛언약과 새언약을 계속 대비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새언약의 주님께서 일부러 하늘을 뚫고 이 땅에 오셔서 일한 그 취지가 뭐냐를 알려면 이스라엘에게 준 옛언약이 왜 폐기처분 되어야 하느냐는 그것을 아셔야 해요.

옛언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뭐가 있느냐? 성전이 있었거든요. 성소가 확대된 것이 성전이잖아요. 성전이 왜 중요하냐? 성전에서 율법대로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용서한다 해서 그들에게 제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제사를 왜 드리는가?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죄가 씻어져서 더러운 자기 몸도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는 그것 믿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그렇게 귀하게 여겼던 겁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난 뒤에는 남의 나라, 아람 사람들이 성전을 크게 지어줬는데 그 헤롯 대성전이라는 거예요. 헤롯 대성전을 지었으니 유대인들은 ‘누가 지었든지 성전이 있으면 되었지.’

그런데 그 성전을 누가 폭파하느냐? 베들레헴 출신이 폭파해요. 그게 크리스마스에요. 베들레헴이 예루살렘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파괴해 버려요. 미가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유다 족속 중에” 그다음에 “작을찌라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 담긴 뜻이 뭐냐 하면,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울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언약대로 새로운 왕을 뽑는데 뽑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한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에요. 사무엘상 16장 4절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그 베들레헴에 이르러서 한 것이 4절부터 죽 나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여기에 차기 왕을 뽑기 위한 기름 부음 받을 자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곳 베들레헴까지 왔다.”고 하니까 이새가 자기 애들 일곱 명 좍 세웠어요. “그렇다면 일곱 중 한 사람이니까 골라잡아 보세요.”

그런데 그게 누군지 사무엘 본인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왜? 사람 손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창조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미 창조에 속했고 인간이 하는 일도 다 추잡하고 더러워서 하나님이 안 받는데 시간 속에 어떤 마디가 있어요. 하나님이 내 생각들을 거부해 주는 시간 속의 어떤 마디, 대나무 마디 같은 어떤 마디 같은 것이 있어서 ‘아, 하나님의 뜻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계획과 내 뜻을 전부 거부하는구나.’ 그런 마디 같은, 시간이 단절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거예요.

이새가 아들 일곱을 다 세웠습니다. 인간의 뜻이지요. 아버지의 뜻이고 사무엘의 뜻이에요. 사무엘이 기름 부으려고 하는데 ‘멈춰라, 걔 아니다.’ 그러면 그다음 ‘걔도 아니고!’ 사무엘도 몰라요. 분명히 이 중에 있을 텐데, 일곱 아들 다 모았는데 거기 없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물어요.

“아저씨! 이 애들 말고 아들이 또 있습니까?” “걔는 아직 어립니다. 다 안 자라서 지극히 작아요. 그 애는 철도 없고요, 왕 그런 것과는 멀어요.” “그래도 한 번 데려와 보세요.” 데려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애다!’ 해서 기름 부어 버립니다. 이것은 뭐냐? 하늘의 영원한 예루살렘이 있어요. 영원한 성전이 있거든요.

그 성전을 지상에서 공간 자체가 따라가면서 만나는데 하늘의 영원한 뜻이 움직이면 밑에 있는 베들레헴 공간이 움직여서 드디어 그 거리가 좁혀지면서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마 2:6) 하면서 구유에 태어나는 거예요, 구유에. 하늘의 뜻에 부응해서 베들레헴이 마중을 나오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다리가 된 거예요. 만난 겁니다.

그걸 보는 눈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는 눈이요. 계엄 이건 문제도 아니에요. 계엄 그게 뭔데요. 그건 장난치는 거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은.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서 뭐해요. 마찬가지인데요. 그게 깨끗하지 못하게 만드는데요. 무슨 집회를 하는데 천만 명이 모였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천만 명이 모일 장소도 없을뿐더러 천만이 아니라 오천만이 모여도 이 창조에 속한 나라 자체가 추잡하고, 더럽고, 하나의 개돼지고, 한 줌의 재가 되어야 할 우리 몸이고, 그게 세상이에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해요. 성령이 임한 자는 사도바울처럼 움직임이 있어야 해요. 그 움직임이 하늘의 뜻과 아다리가 되는 거예요. 딱 만난다니까요. 딱 만나요.

그게 바로 베들레헴 고을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미 5:2) 여기서 작다는 것은, 인간들의 안목에서 크다는 것을 다 제껴버리고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제사장,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베들레헴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에요. 하늘의 뜻이 땅과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1장 1,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데 그 바깥 터는 어떻게 하는가? 바깥의 터는 지옥 가는 이방인들에게 내줘버려라. 마음껏 짓밟히도록.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오늘날 성령을 받아서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어떻게 하느냐? 마음껏 이 세상에서 짓밟혀야 해요. 어떻게 짓밟히는가? 주님이 먼저 짓밟혔거든요. 마귀의 세계에서. 그게 바로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또 사람은 인기 없이 못 산다, 남들 인정받아야 산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세상 권력의 맛을 보고 그 맛에 늘 이끌리는 것. 이 세가지의 악마의 시험을 예수님이 먼저 받았다는 말이지요.

성령 받은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요. 주님의 속죄 작업에서 죄를 지으면 전부 다 의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죄를 어디서 짓는가? 바로 마귀가 지배하는, 우리 육신이 있는 이 땅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본성이 그러니까요, 본성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이 문제가 아니고 속죄의 본성이 더 중요한 거예요, 속죄 작업의 본성이.

어떻게 죄가 의가 되는가 하는 거예요, 죄가 의가 되는가? 이런 창조에 속하지 않은 것은 다 치우고 예수님 자신이 남긴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부어서 그 죽음의 진수, 진짜 끝 죽음, 끝 죽음을 체험하셨어요. 끝 죽음을 체험하셔서 그 끝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약 때의 성소, 속죄 그것이 아니라 자기 하나로서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처리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미 성령을 통해서 그 속죄 작업에 합류되어 있으니까 속죄 작업의 완성이 우리에게 오지요. 완성이 오게 되면 아까 말한 대로 우리 할머니가 쓰던 부지깽이, 그걸 제가 율법의 완성이라 했거든요, 그 율법의 완성으로 우리 일상을 쑤셔대는 거예요. 갈비 끄집어내는 거예요, 갈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뭐냐?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겨울에 거리에 오뎅 팔잖아요. 오뎅 먹고 난 뒤에 한 개만 먹을까, 했는데 자꾸 더 당기거든요. 그러면 내 앞에 수북이 뭐가 쌓이는가? 오뎅 작대기가 쌓여요. 우리의 일상은 뭐냐? 죄가 이미 의로 바뀌게 된 것, 죄는 이미 용서가 되고 그 작대기, 작대기만 죽을 때까지 수북이 쌓입니다.

“주여,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추접하고 더러운 짓거리만 했습니다. 내 생각 자체가 너무나 세상 적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고, 나는 내 것만 좋아하고 이기주의, 나만 위해서 삽니다.” 하는 그것, 아직 안 죽이고 살아 있는 한 그런 작대기만 계속, 계속 쌓여요.

어린아이는 그 숫자가 좀 적고요, 손주나 손녀는 좀 적어요. 그 애들은 기니피그 사달라고 해요. 그게 뭔지 어른들은 모르잖아요. 애의 작대기는 기니피그라는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죄는 세요. 고가예요, 비싸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작대기 모으는 것. 참 쉽습니다. 뭐든 모조리 다 죄 밖에 안되는 이 작대기, 작대기를 남겼다는 말은 이미 모든 죄는 의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멋도 모르고 남 따라가면 건전한 삶인 줄 알았습니다. 이 정도 살았으면 남에게 욕 안 얻어먹을 줄 알았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 지옥까지, 주께서 넘어오셔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속죄 작업이 이루어지는 성소로 만들어준 것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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