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둘째 장막법

아빠와 함께 2024. 12. 15. 21:34

둘째 장막법

2024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6-10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인간들은 첫 번째 장막법, 즉 옛언약 법에 갇혀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율권을 외치지만 실은 법 아래에 놓여 삽니다. 인간들은 악마와 한 패 먹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법을 철폐하고 그런 법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발하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 이후의 사정을 책임질 신조차도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행한 것에 대해서 선과 악에 의해 판정내리는 신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선과 악으로 나중에 심판받기 전부터 자신에 대해서 신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합니다.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이런 정신말고 달리 무슨 마음이 있어 종교기관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자세조차 모조리 옛언약 안에 다 가두어진 상태의 인간 모습입니다. 창세기 4: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놓고서 법을 무서워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가인을 당장 죽이시는 처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법 아래에 놓인 존재’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하십니다. 즉 이 세상 전부는 다 법 아래에 놓인 세상이요 그 세상은 그보다 더 높은 언약에 의해서 물로서 몰살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보호달라고 호소하면서 누락한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성소에 관한 법, 곧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불신자는 이것조차 거부합니다. 문제는 불신자뿐만 아니라 소위 신자라는 자들도 하나님의 상소 취지를 안믿습니다.

성소의 취지는 첫 단계와 두 번째 단계를 나누어 내부적으로 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첫 번 단계, 즉 첫 번 장막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성화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내가 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없다”즉 내가 뭔가를 남겨야 뭔가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반면에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언약 안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일어난 일이지 내가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결코 나의 일이 나타나게 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은 옛언약과 새언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옛 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50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이 말씀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계속 이런 식으로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 예가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님에게 돌을 던지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 스데반 집사님은 다음의 말을 끝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끝말을 듣는 태도가 특이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스데반 집사님은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행 7:53-55)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은 옛언약 안으로 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둘째 장막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못듣는 것이 아니라 저항합니다. 마치 다락방에 설치된 아동용의 인디언 텐트는 다른 어른 가족들에 대한 아동의 대항적, 혹은 대칭적 공간인 것처럼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바로 이 낯선 공간이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그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안 들을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통하는 소위 ‘산 사람 끼리’의 언어의 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데반 집사님은 이미 죽었다고 여겨지는 분과 언어 소통이 됩니다. 마치 일본 영화 [러브 레터]에서 죽은 약혼자와 눈 넢인 산 속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여주인공과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둘째 장막으로 성사됩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 우편’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란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미 하늘에 계신 주님과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옛언약을 거쳐 유일하게 둘째 장막에 들어가신 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분이 현재 가 계신 곳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주님이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올가셔야만 비로소 가능해지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 우편’입니다. 그곳만이 실재로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모든 공간은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란 실체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붙어있고 연락되는 사이를 말합니다. 에베소서 2: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즉 성도는 이미 하나님 우편에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육신 자체가 이 땅에서 비유로 작동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한 그 안에 숨은 실체의 증상과 징후가 드러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자신을 평하든지 타인의 평이라는 양심에 호소한다든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함께 계신 주님의 증상과 비유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성도 안에는 이미 성경이 통째로 들어와서 각가지 증상으로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도착점이 이미 확정된 사실과 거기서 주님을 모시게 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히브리서 9장 6-10절(둘째 장막법)241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6-10절입니다.

히브리서 9:6-10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간 육신의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데 왜 자꾸 인간은 죽어서 좋은 데 가려고 하는가? 무엇을 빠트렸어요. 첫 번째 장막, 두 번째 장막, 이 성소라는 장막의 존재를,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죽어서 좋은 나라 있을 것인데 들어가자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염라대왕이 있고, 염라대왕 나중에 만나게 되면 착한 일, 업보를 많이 쌓은 사람은 극락에 가고 나쁜 짓 많이 한 사람은 중량 따져서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빠뜨린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소입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의해 주어진 성소, 하나님 쪽에서 먼저 제시된 하나님의 뜻, 하나님 자신의 속마음, 본심 이런 것들을 누락한채 ‘하나님이고 뭐고 우리 원하는 데로 밀어붙이자.’ 하는 식으로 착하면 극락, 나쁜 짓 많이 한 사람은 지옥 불,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성소의 존재의 취지에 의하면 인간은 천국 갈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육신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인간의 육신에. 주보 뒤에 보면 고린도전서 15장 50절 말씀 나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육신을 가지고 있고 혈과 육이 있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방인들은 천국 가지 못하고 지옥 갑니다.’라는 뜻이에요. 율법을 줬고 그 율법대로 산 사람 이스라엘, 일단 가능성이 있었던 게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외지 사람들, 이스라엘 외에, 아브라함 자손 외에 이방인들은 태생 자체가 천국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여, 너희는 불교를 만들든지 뭘 만들든지 극락 염라대왕을 설정하든지 너희끼리 종교 만들고 살다가 지옥이나 가라.” 이런 식이죠. 지금 제 말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되는 사람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지상에 이스라엘 통해서, 성소라는 그런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미리 주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그쪽에서 하는 말이 못 믿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선별적으로 미리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못 믿겠다는 겁니다.

성소, 이스라엘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것이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 보증이 뭐가 있느냐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 주장이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을 성소라는 것으로 줬다는 걸 난 못 믿겠다는 이 말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쪽은 “나 지옥 가게 되면 지옥 갈게.”라고 자신만만하게 하는 사람들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 믿는 우리들은, 뭐 믿습니까? 뭐 믿어요? 혹시 간 보는 거 아닙니까? 뭐 믿는 게 있어요? 교회 나와도 믿을만한 것은 자기 육신밖에 없어요. 안 믿습니다. 그쪽은 노골적으로 안 믿는다고 하고 우리는 노골적으로는 아니지만 속으로 안 믿고, 내가 내 육신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최근에 인터뷰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인터뷰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은 오늘날 교인이건 교회 안 다니건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주 대표적으로 말해준 사람이라서 굉장히 저는 기쁘게 생각하면서 그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추적하며 새기고 있는데 그 사람 이름은 ‘한강’입니다.

노벨 문학상 받은 한강 그 사람이 나이가 54살인가 그쯤 되는데, 그 사람의 주장을 한 번 들어보세요.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지 혹은 우리도 포함되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내가 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내가 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오케이? 동의 됩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해요. 한강이 현재 모든 인간들의 개별성을 대표해서 이야기했다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자식을 낳든, 집을 샀든, 직장 생활을 하든 내가 한 일은 어떤 경우라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믿음이 없어요. 교회 나와도 한강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이랑 똑같아요. “하나님 제가 뭘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똑같은 이야기에요.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한강 이야기나 성경 빼놓고 나머지 사람들 똑같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었을 때 그걸 보여준 거예요. “내게 일어난 모든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께서 일으켰습니다.”라는 이야기. 내가 돌에 얻어맞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그들을 향해 설교한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한 일은 어떤 경우라도 이 땅에 일어난 적이 없다, 이거에요. 모든 일어난 일은 주께서 나를 통해서 일으킨 일이에요, 나를 통해서.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난 일이죠. 내가 한 일이 아니고 나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몸이 아프든 수술을 받든 모조리 이건 주께서 하신 일이에요. 그래서 그 한강이라는 작가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여기면서 정말 저 사람을 우리 교회 데려와서 간증 집회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런 이야기 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 땅에 사랑이 없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일리 있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봉사하지 않으면 봉사는 없고, 우리가 희생하지 않으면 희생은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 온 인류는 사랑과 사랑의 금줄로 연결되어야 하는 데 거기에 내가 작가로서 일조하겠습니다.’ 지금 그 강연을 한 거예요, 그 노벨상 받으면서. 박수가 뭐 난리가 났죠.

그 말에 대해서 토 달고, 어어어어!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자, 방금 한강 작가가 그 이야기 했는데 반박해 보세요. 반박할 근거 따로 있습니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불신자하고 신자 차이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왔을 때 ‘우리는 뭘 해서, 뭘 더 해야 구원받는가?’ 하는 이 생각은 불신자로서 앉아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면 신자로서 앉아있는 건 뭐냐? ‘주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거예요.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니까, 주께서 지금도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소를 두 공간으로 나누어서 첫 번째, 오늘 본문에는 ‘첫 장막’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6절에 ‘첫 장막’ 제사장은 첫 장막에 들어가요.

첫 단계로 볼 수 있는데 첫 장막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성화시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성화시켜요. 열심히 제사장이 율법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으니까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마음으로. 인도에서 아주 극한 직업에 속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강물을 따라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대나무 뭉치를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보수가 4.2 유로, 5천 원이나 6천 원쯤 주는 그 일을 해요. 6천 원 받고 25킬로를 강물 따라서 운반해 주면 운송비용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입니다. 그 대나무를 뗏목처럼 묶어서 옮기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어요. “두르가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두르가 신은 힌두교 신이니까 이름 빼 버리면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왜냐하면 강물이 불어난다든지, 흙탕물이 되면 옮기지를 못하니까 그날 하루 일당은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하고 꽃잎에 촛불을 강물에 띄워서 일단은 기도하고 그다음에 작업에 나섭니다.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이게 모든 교회의 구호 아닙니까? 모든 앉아있는 사람들의 염원 아니에요? 똑같네요. 뭐 기독교의 특징 복음 아는 자의 특징은 어디 가고 없네요? 똑같잖아요. “신이시여, 나를 보호하소서.”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 뭔가 죽이 안 맞아요. 성경에서는 “너는 구원 받지 못한다. 너는 천국 가지 못한다. 왜? 네 육신 때문에.” 이렇고 힌두교 믿는 그 힘든 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여, 내 육신을 보호하소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 육신 중심인가를 하나님께서 뻔히 아시고 “그 육신,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못 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안 믿는 것도 안 믿지만 애초부터 믿을 생각이 없어요, 이 점에 대해서.

내 육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육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그런 신에게 나오는 어떤 말도 나는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 신들은 직무 중지하도록 투표로 가결해야죠. “신 그만해. 하지 마.” 우리 육신을 보호하지 않는 신이 그게 무슨 신인데요? ‘나를 보호하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굳이 믿어야 돼?’

여기서 첫 번째 장막에서 주님께서 제사장을 활성화시키는 이유는, 첫 번째 장막의 공간과 두 번째 장막의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면, 첫 번째 장막에 들어온 제사장은 폐기될 첫 번째 언약 안에 잠식됐어요. 잘 걸렸다, 덫에 걸린 거예요. 첫 번째 언약 안에 딱 걸린 거예요. 첫 번째 언약의 몸은 갈 곳이 없습니다.

제가 그냥 ‘우리 몸은 천국 못 간다.’ 이렇게 했잖아요. 하나님은 그걸 구체적으로 성소를 두 공간으로 나누어서 첫 번째 공간에 오게 되면 ‘너 잘 걸렸다.’ 해서 첫 번째 공간에서 일하는 너는 두 번째 공간으로 갈 수 없음을 너희들은 첫 번째 공간에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열심히 율법대로 살아도 구원받지 못하는 몸을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육신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아까 힌두교에 있는 어려운 직업을 하는 그 사람은 어느 공간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 사람은 첫 번째 언약의 체제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돼요. 한강도 마찬가지예요. 열심을 해요. 할 수 있는 게 육신의 노력 외에 없어요. 육신에서 발현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나를 살린다.’ 이 원칙 외에 다른 원칙은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아가실 때 그 현장 르포가 나와 있어요. 현장의 상황이 생중계하듯이 나와 있는데 거기 보면 스데반 집사가 죽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니까 돌 치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보여주느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행 7:27) 귀를 막았다고 했어요. 스데반 집사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들은 그 소리를 안 들으려고 귀를 막았을까요?

그 내용이 이런 거였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5, 56)라는 이 문장,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 있다는 이 문장에 대해서 돌 던진 사람이 그 소리를 ‘안 들으련다.’ 하고 귀를 막았다, 이 말이죠. 귀를 막은 거예요.

여러분들은 평소에 이야기할 때 남이 이야기하면 귀 막습니까? 귀 막을 이유가 없죠. 귀 안 막을 이야기죠. 전부 다 소통되는 이야기죠. 그게 옛 언약 안에 소통되는 언어입니다. 옛 언약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 소통되는 언어는 옛 언약 안에 유통되는 언어에요. 귀를 막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뭐 신발 예쁘다고 하는데 귀를 왜 막습니까? “아이고, 참하네.” 그 이야기 하는데 막 안 들으련다, 이러지 못한다는 말이죠. “댁의 자녀가 참 공부를 열심히 했네요.” 귀 막을 필요 없죠.

그런데 “그딴 게 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있으니까”라고 그 뒷말을 붙이게 되면 자동적으로 손이 올라가죠. ‘어어어어, 안 들으련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스데반 집사는 벌써……, 중요합니다, 언약도 알고 새 언약도 알아요. 그러니까 옛 언약에 반드시 들어간 자에게만 새 언약이 되어서 하나님 우편과 소통이 돼요. 연락이, 대화가 된다고요, 대화가.

그게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성소를 두 공간으로 나눠서 하나는 첫째 장막에서 모든 인간이 여기 갇힙니다. 두 번째 장막은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제사장이 들어간다고요? 제사장 들어가는 것도 피 들고 들어가야 돼요. 죽은 자로 들어가야 돼요. 첫째 언약은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서로 통하는 대화입니다. “너 살아있지? 내 말 들어 봐.” “너도 살아있어?” 둘 다 살아있는 것을 염원으로, 살아있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화, 그 대화가 첫 언약 안에 있는 겁니다. 첫 언약 안에 다 있어요.

그런데 그런 일상의 인간 세계는 첫 언약 안에 갇혔다고 왜 첫 언약을 거론하느냐? 인간이 뭐로 사느냐? 어떤 사람은 고집으로 산다, 어떤 사람은 감정으로 산다, 어떤 사람은 정으로 산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인간은 법으로 살아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상도 싫다. 나는 뭐 인간도 싫다. 깊은 지리산 속에 자연인 돼서 살고 싶다.’ 뭐 그런 사람 있을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첫째, 아스팔트 밟으면 안 돼요. 왜? 나라에서 돈 주고 한 거니까. 개울가의 다리 건너면 안 돼요. 이것도 시에서 정부 예산 가지고 한 거예요. 그다음에 전기 사용하면 안 돼요. 그리고 수도 사용하면 안 돼요. 자기가 손으로 우물 파든지 이렇게 해야 돼요. 특히 남한테 얻어맞았다? 112 신고하면 안 돼요. 그 경찰들 봉급 나라에서 나와요. 누가 와서 자기를 잡아간다? 고소하면 안 돼요. 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최초에 법이 있었어요. 그것은 ‘모든 인간은 정녕 죽어야 된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서 그 법을 선악을 따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는 그 법에 데모를 해서 그 법 없이 살자고 마귀와 같은 마음이 된 거예요. 그 법을 아주 개무시하고 살자고, 나는 살기 위해서 살겠다는 새로운 법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실패로 끝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4장 14절에 보면 가인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진짜 오묘합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잖아요. 가인이 동생을 죽였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동생 죽였지? 너도 죽어라.” 이렇게 하면 우리 같으면 간단한 문제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벌을 내리는 데 그 벌이 뭐냐 하면, 법이 이 땅에 인간보다 우선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 계기를 나타내기 위해 써먹기 위해서 가인을 살려줘요.

네가 여기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니까 가인이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남들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외지 사람이니까, 법의 혜택을 못 받으니까요.

이처럼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법이 엄연히 인간보다 우선하고 먼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그 법 아래서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또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자유라는 게 없죠. ‘법을 지키는 한 약간의 자율권은 보장해 줄게.’ 인간이 사는 지금 형편이 그런 형편이에요.

한강 작가가 월북해서 김정은한테 가보세요. 아오지 탄광입니다. “우리 조선 인민 공화국 법 지킬래? 아니면 죽을래? 맞아 죽을래, 탄광에서 죽을래?” 이게 법이에요. 자유 민주주의 법이라는 것이 평소에 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데 탈북한 사람은 그걸 느껴요. 만두 만들어가면서,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지. 뭐가 좋아요? 성질난다고 술 먹고 계엄 하는데 그게 뭐가 좋아요? 그러나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은 이런 좋은 사회가 없다는 거예요. 데모를 왜 하냐, 이 말이죠.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왜 여기서 갑자기 나오는지.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도 ‘네가 지금 죽지 말고 법이 얼마나 냉정하고 너의 감정, 너의 이미지 관리, 법은 일체 그와 관계없이 너무나 냉혹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살인자로서 한번 충실하게 경험하라’고 그들의 세계에 보냈는데 그 법의 세계를 가지고 가인의 세계라고 합니다. 저주받을 가인의 세계. 결국 노아 홍수에 잠겨 죽어야 될 그 세계, 그 멸망의 세계 그게 옛 언약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그 옛 언약에 소통되는 단어 외에는, 그러한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둘째 장막이 있어요. 여러분, 이 본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셔야 돼요. 첫째 장막에 갇힌 육신은 분명히 성경 뜻대로 하늘나라 못갑니다. 하늘나라 못 가는데 왜 둘째 장막이 필요합니까? 내가 하늘나라를 갈 수 없고 이 육신을 우리가 벗을 수가 없거든요.

여러분, 인간 자체가, 옛 언약에 육신이 있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의 육신 안에 어떤 시계가 장착되어 있는데 시한폭탄이에요. 째깍째깍째깍…, 시한폭탄과 더불어서 빵 터지면 육신도 죽는 겁니다. 숨 거두는 거예요. 그래서 옛 언약, 법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육신은 일종의 상복을 입고 있는 거예요, 상복을. 인간 육신 자체가 어떤 옷이라면 이건 상복이에요. 죽음, 빵 하고 터져 버리고 해체되는 그 옷을 내 육신이라 여기면서 그걸 입고 다닙니다. 그 옷가지고 보디빌딩하고, 필라테스하고 그러죠, 이거 상복인데. 나중에 허물어지면 우리가 죽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 못 갈 육신을, 천국도 못 가는 육신을 왜 가지고 있냐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장막의 일 때문에 육신이 필요한 거예요. 두 번째 장막에 들어갈 때는 뭐로 들어가느냐? 여기 7절에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피는 첫 번째 언약에서 벗어난 자의 피입니다. 첫 번째 언약에서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피.

여러분 짐작하죠? 첫 번째 세계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는 옛 언약에서 첫 번째로 탈출에 성공하신 분의 피, 그분의 피가 길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그대로예요. 길이 된다면 그렇다면 이 성소, 첫 번째 언약의 성소, 그냥 없애 버리고 예수님 오셔서 피 흘리면 될 텐데 왜 귀찮게 성소 만들어서 제사장 활동하고 그거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건 제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피 흘리신 그분이 첫 번째 장막, 옛 언약을 경유해서 두 번째 장막으로 가셨기 때문이고, 그렇게 가셔야 될 이유는, 첫 언약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첫 번째 언약에 갇혀 있는 인간은 그걸 통과했던 분의 효과나 능력이 아니면 첫 번째 언약에서 두 번째 언약으로 넘겨질 수가 없어서 그래요. 믿으셔야 됩니다, 이거는. 이게 현실이에요. 이게 팩트라니까요.

법에서 법으로 옮겨가는 그런 데모 같은 것, 민주당이니 국민의 힘이니 이건 지금 아주 시답지도 않은 이야기예요. 그거 백날 해봐야 옛 언약 안에 갇혀 있잖아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그 시한폭탄 육신끼리 뭐 하는 짓입니까? 한 표 두 표가 뭐 중요하다고요. 지금 옛 언약 말고 다른 언약이 있어야 돼요.

일본 영화인데 한국에 호감을 준 영화가 있어요. <러브레터>라는 영화에요. 제가 최근에 다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동일한 이름의 남녀와 또 닮은 두 여자가 나와요. 주인공(히로코)의 죽은 연인인 남자 이름과 그의 중학교 동창생(여자) 이름이 같았던 거예요. ‘후지이 이츠키’라고.

이것을 제가 약간 각색 하겠습니다. 이름도 동일하고 똑같은 인간인 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사이에는 어떤 교류가 생기겠는가? 이런 교류가 생깁니다. ‘오겡끼데스까’가 가능해요.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거기 잘 계십니까? 나는 이곳에 잘 있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서신 왕래가, 대화가 통하는 영화 ‘러브레터’라는 영화입니다. 이미 죽었는데 대화가 돼요.

복음이 주는 내용이 뭡니까? 주님은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사람과 대화가 된다는 것이 복음이거든요. 이걸 누가 믿어요? 한강은 안 믿죠. 이걸 누가 믿어요? 첫 번째 옛 언약에 속하면서 이미 두 번째 언약으로 넘어온 사람과 더불어서 같은 성소 안에서 대화가 돼요. 소통이 된다는 말이죠.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대화가 안 되는 사람은 귀를 막죠. 귀를 막아 버려요.

어떤 분이 저한테 묻는다면, “목사님 도대체 복음이 뭡니까? 복음이 말하는 현실은 뭡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마태복음 17장 5절의 말씀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말할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가 풀이하면 “네가 너를 규정하지 말라. 네가 너에게 내리는 평가를 다 무시하고 남들이 너에게 내리는 평가를 다 무시해라.” 왜? 너나 남이나 다 옛 언약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의 양심, 네 양심도 듣지 마.” 왜? 여기 오늘 히브리서 9장 9절에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온전케 할 수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요. 어린아이들한테, 유치원에 있는 아이나 그 전의 아이에게 부모가 방 안에 혹은 2층 다락방에 인디언 텐트를 쳐 줘요. 텐트를 쳐 주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아빠 엄마하고 같이 있는 공간과 자기만의 은밀한, 고깔 모양의 인디언 텐트 속의 그 공간을 차별화시킵니다. 차별화 돼요. 자기만의 공간이에요.

이걸 ‘대항 공간’, 현재 기존의 공간과 대항하는 대항 공간 또는 ‘대칭 공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 공간은 없는 공간이에요. 그냥 텐트 속이에요. 기존 공간의 연장선이죠.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그 공간은 기존 어른들의 공간과 다른 차별화 된 새로운 공간이 있죠. 어린아이는 인디언 텐트를 믿습니다. 물론 크면 그 텐트 발로 차죠. 그러나 어린아이의 세계는 그 공간을 믿어요. 그 공간 안에서 자기만이 통하는 대화를 누군가와 할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궁금하죠? 새 언약에 속한 인간, 도저히 이 육신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는 그 육신을 두 번째 공간으로 이동하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하셨는가? 그게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개시점이, 시작점이 나와 있어요.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보면 유월절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여러분 유월절 아시죠? 어린 양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탈출이 가능했던 그 유월절,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어쨌든 빠져나오고 보는 그 행로를 시작한 그 시점의 사건이죠. 그 사건을 반복하는 게 유월절입니다.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본토인이나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예외 없이 할례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 언약 속에 할례라는 언약을 줬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목사님 할례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아니 뭐 할례를 지키라면서요?” “이것은 비유니” ‘비유’라고 했어요. 오늘 본문 9절에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비유’라는 말은, 실체는 아닌데 나타나는 징후, 증상, 현상 이게 비유예요.

옛 언약 안에서는 비유고 그 비유가 연결되어 있는 새언약 안에서는 진짜고, 실재고 그래요. 실재가 옛 언약 안에서 비죽이 튀어나왔다, 뻗어 나왔다고 보면 돼요. 여러분 부부가 잘 때 나란히 자면 되는데 피곤하게 되면 배우자의 몸에 발을 얹게 돼요. 그러면 치워라, 하게 되면 후딱 치우지요. “당신 때문에 잠 깼다. 왜 다리를 얹나?”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이것은 비유니, 내가 네 옆에 있다는 비유니.”

하도 발을 얹다 보니 아내 다리가 멍이 들었어요. 지금 제가 드는 예가 좀 오버하고 있습니다.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아내의 그 멍을 보고 “다리에 그게 뭔데?” “이것은 남편이 내 옆에 있다는 비유니.” 약간의 오버입니다만 어쩔 수 없어요. 쉽게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육신을 갖고 놀아요, 주님이 우리 육신을 갖고 논다고요. 이 육신이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스데반의 육신은 스데반 본인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믿습니다, 하는 그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실체적으로 주님께서 그냥 비유에 불과한 시한폭탄 육신, 그냥 죽으면 없어질 육신을 가지고 충실하게 ‘하나님의 우편에 너는 이미 앉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비유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믿음까지도 초월하지요. 믿습니다,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신학교 다닐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 계속 풀리지 않던 그 본문, 에베소서 2장 5, 6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앉히시니” 하는 이 대목, 이미 구원받은 너희는 지금 하늘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이 대목, 이 대목을 내가 신학교 졸업한 뒤에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 참…, 한숨밖에 안 나왔어요. 너무너무 어려웠어요. 물론 속으로 여러 생각이 들었지요. ‘나도 못 알아듣는 것인데 어차피 교인들도 못 알아들을 것을 굳이 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면서 ‘교인 관리? 사람 관리?’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요.

구원받는 사람은 주께서 택한다고 했기 때문에 사람을 건지려고 목사 된 것이 아니거든요.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그 말이지요. 그분들에게 봉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함부로 네가 믿는다, 안 믿는다, 못 믿을 거야, 단정지을 것도 아니고요. “실제로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성경 그대로 읽은 것밖에는 안 되고 뭘 설명을 해야 된다니까요.

“에베소서 2장 6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해놓고는 믿음으로 넘어갑시다,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넘어갈 문제입니까? 설명을 해줘야지요. 이제 그날이 왔습니다. 설명을 할 때가 왔어요. 사실은 제가 이걸 한두 번 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했어요.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 세례요한이 그 설명을 먼저 제시해 줬습니다. 제가 아까 할례 이야기를 했잖아요. 일단 옛언약 가운데서 유월절을 지키는 사람들은 육신에 할례를 행해야 해요.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유고, 하나의 비유인데 어떤 징조냐? 옛언약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통해서 둘째 장막으로 넘어가시는 그 일을 할 분이, 하나님의 일을 할 그분이 지금 우리한테는 그분의 죽음으로써 우리 육신 안에 삽입을 시키는 겁니다.

‘나랑 죽고자 하는 자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자.’ 그런 뜻이에요. ‘오겡키데스카’(거기 잘 계십니까) 하는 것은 죽은 사람보고 할 소리가 아니지, 하거든요. 영화에서 ‘후지이 이츠키’라는 남자는 등산 갔다가 이미 죽었어요. 죽었는데 장난삼아 편지를 보내봤는데 답장이 온 거예요.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어? 죽은 사람인데 서신이 교환된다? 뭐 이런 일이 다 있지?’ 보니까 같은 이름의 다른 여자분이 있었다는 내용인데 우리가 구약적으로 또는 신약적으로 옛언약에 이미 사로잡혀 있는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할 일이 있어요. 그 일이 뭐냐? 이 땅에 계시다 가신 분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셔서 지금도 나를 사용하고 있는지의 그 내력을 증언해야 하고 그걸 말해줄 의무를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내가 구원받을까, 그 이야기 아닙니다. 내 감정, 내 규정,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가치 있을까, 그런 것 없어요. 그런 것은 없고 주님이 나에게 하는 것은 이미 최종적으로 가치가 확정된 그것만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열처녀 비유, 그 비유의 내용은 딱 한 가지에요.


‘혼자 있으면 무가치하다.’ 그겁니다. 혼자 있으면 무가치하다. ‘등 없고 신랑 없으면 그 열 처녀 소용없다.’ 그런 뜻이에요. 신랑과 함께 있을 때만 그게 가치 있다 그 말입니다. 구약적으로 가면, ‘네 몸이 할례받을 때 비로소 유월절의 피가 너를 살린다는 그것이 가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할례가 뭐냐?

할례는 “언약적으로 죽었다는 그 죽음에 네가 참여해야 되고, 동참해야 한다. 네 안에 할례를 행하라는 법, ‘너는 할례를 행해.’라는 그 법을 주신 분이 네 안에서 이 비유가 되는 할례가 어떻게 실체로 완성이 되는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꼭 보여주도록 내가 너희를 이끌게, 인도할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 앉히시는 그것은 어떻게 되는가? 그걸 요한복음이 1장 33절에서는 세례요한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기 전에 2장 3, 4절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네가 생각하는 옛언약의 세계는 내 일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이 없는데 상관이 없는 그 일을 주께서 가져가니까 주님과 상관이 있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뭐냐? 그냥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물이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천국 갈 수 없는 육신이 천국 갈 수 있는 육신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내 일을 주님이 가져가서 주께서 일을 일으켜 버리면 그 일은 나에게 주님과 서로 대화가 된다는 하나의 비유로서의 우리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대화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이야기를 죽 하거든요. 이것은 자기가 일으킨 일이 아니에요. 주께서 일으킨 일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12장 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것도 자기가 일으킨 일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킨 일입니다.

자, 이러한 성도인 사도바울에게 일어난 일이 세례요한에게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요한이 시키는대로 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어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줘야 한다는 그 지시를 받아서 하고 있는데 그때 자기가 세례 주는 그 일에 누구 하나가 개입을 해요. 어떤 아저씨가 개입을 하더라는 말이지요.

세례요한은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고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옛언약에 속했으니까, 시키는대로 하기는 하지만 옛언약에 속했으니까 새언약에는 안속했다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2절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다른 사람에게는 머물지 않고, 세례요한에게도 머물지 않았어요. 유독 그분에게만 머물렀다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1장 33절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몰랐어요.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이 말은 나중에는 알았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면 처음에 알지 못했는데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그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그다음에 34절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어느 누구도 땅에서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 우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그분이 하는 일의 연장선에서, 그분이 하실 일 때문에 최종 도착 지점이 성령이 오시는 그 지점, 하나님 우편에, 성령 받은 자가 예수님 자리에 같이 합세해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을 해내시는 분, 곧 그 일이 누구 일이냐? 하나님 아들로서 꼭 하셔야 되는 일이 자기에게 임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거지요.

제가 말을 길게 했는데 짧게 하면 이래요.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면 누구도 그 천국에 못간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인도하심이 무슨 인도하심인가?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왜? 성령은 그 출발지가 이미 하나님 우편이 출발지기 때문에 인도함을 받으면 그 도착지점이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 도착지점이 결정되어 있는 것을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한 거예요. 하늘에 앉히시니. 아무리 둘러봐도 하늘이 아닌데, 지금 교회에 와 있는데 무슨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그 말은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그 내용에 비유로서 우리는 이 옛언약의 세계 안에 놓여 있는 겁니다.

하늘에 앉히는 그 경로를, 두 번째 장막에서나 실시할 수 있는 그 경로의 징후로서, 징조로서, 비유로서 우리는 이 몸을 가지고, 옛언약의 육신을 가지고 아직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면 되지요.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도 안에는 성경이 통째로 들어옵니다. 성경 전체가요.

통째로 성경이 들어와서 우리가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경대로 우리에게 발자국을 남기고 증상을 남깁니다. 감기 걸리면 기침 나고 콧물 나지요. 이건 감기바이러스가 들어왔다는 뜻이잖아요. 성경전체가 다 들어와 버리면 하나님 우편에 계신 분이 그 성경 가지고 우리 안에서 성경을 발현시키고 증상을 남기면서 우리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을 때까지 주님 가신 그 코스대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대로 옛언약의 우리 육신은 바로 새언약에 계신 주께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비유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착 지점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스데반집사처럼 우리에게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과 소통되는 말씀이 서로 나타나고 교환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옛언약의 양심이라든지, 법적인 것이 쓰레기처럼 느껴져서 방해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저희들에게 제대로 정리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잊어버리고 내 안에서 주께서 어떤 프로젝트와 계획을 가지고 실시하고 있는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된 자체를 영광으로 여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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