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언약의 차이
2024년 12월 1월 본문 말씀: 히브리서 8:12-13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망상에 가까운 소위 신앙이라는 것은 항상 명백한 현실에 밀립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돈 없이는 못산다는 사실과 그 돈을 오직 자신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소중하다고 말할 때마다 돈과 재력의 끌림을 애써 가리고 싶어서 내뱉은 소리입니다. 딸하서 오늘 본문에 말하는 ‘첫 언약’이란 사실 관심밖의 일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노력에 근거해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줄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파괴했습니다. 멸망시켰습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집단을 괴멸되지 오래며 순수함을 찾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파괴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첫 번째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때 다른 민족으로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잘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파괴시키시면서 하필 율법을 모르는 이방민족을 동원시켰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은 본성상 똑같다는 겁니다. 하지만 똑같이 않고 하직 이스라엘이 해야 할 중대한 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악마의 본성을 똑똑하게 드러내는 일입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최고자는 둘 이 될 수 없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의 흔적으로 걷어내려 했습니다.
악마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좋게 하시는 일로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언약의 완성단계에 도달했다는 신호입니다. 특히 유대민족이 종교적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내린 일상의 모든 결정과 선택을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과 관련시켰던 자들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정립된 천국, 지옥, 부활, 의로움, 자비, 이웃사랑, 제사, 예배, 찬양, 전도, 기도, 구제, 금식, 안식일 준수 및 할례, 성전, 영생 등등의 개념을 모두 ‘자기를 위하여’와 관련시켜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점을 지적하는 예수님의 발언을 듣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실은 배후에 악마가 유대민족으로 앞잡이 삼아서 그렇게 한 겁니다. 종교마저 악마는 자기 세계의 박스 안에 담았고 덮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박스 안에 갇히지 않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절차가 새언약의 내용을 형성합니다. 옛언약에서 죽으신 분이시기 비로서 ‘새 언약’을 언급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일방적으로 천국갈 자가 지옥갈 자를 전적인 자기만의 결정으로 확정지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의견을 들을 필요조차 없고 그 어느 인간의 개입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 분류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는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결정하신 겁니다.(아버지와 사전에 약속하신 대로)
이렇게 되므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같은 취지는 일찍 율법 안에 들어 있었던 내용입니다. 레위기 1:9에 보면,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원하시는 것은 불 속에서 다 태워지야 마땅한 존재의 정당성입니다.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이기에 마땅히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을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불판 위에서 다 태워지기에 사실상 인간이 다 태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되는 믿음과 은혜와 긍휼은 그 다음 차례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도는 예수님께서 가신 절차대로 편승됩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옛언약 속, 곧 악마의 장악력 속에서 사는 인간들은 율법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습니다. ‘성경을 보다→죄를 알다→반성하고 통회하다→그래서 보다 착하고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한다’입니다. 이것이 옛언약 안에서 악마가 원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 어떤 개념이나 용어가 나오더라도 옛 인간들은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참조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많고 많은 죄가 있지만 오직 단 하나의 죄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반대로 말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두 언약의 등장은 갈라디아서 3:23-24에 의하면 한 가정에서 태어난 두 자식의 아내로부터 출발합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즉 옛언약을 거쳐야 새언약에 도달될 수 있기에 옛언약, 즉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렇다면 되면 다음과 같은 절차를 겪게 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예수님에 의해서 추수물 내지는 열매로만 얻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시되 율법에 의해서만 죽게 하십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은 육신상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죄를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자아를 모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받겠다고 나서지만 주어지는 것은 저주뿐입니다. 한 아들에게는 복의 모자를 씌우고 다른 아이에게는 저주의 모자를 씌울 때, 나타난 현상은 무엇이겠습니다. 천국 구원은 본인들이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났음에 대해 천국의 모자를 쓴 자식은 이런 사실을 두고 감격합니다.
반대에 저주의 모자를 쓴 자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 소식에 알 수 없는 반발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는 되기 싫다는 노골적인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이렇게 됩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4강-히브리서 8장 12-13절(두언약의 차이)241201-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12-13절입니다.
히브리서 8:12-13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여기에 ‘새 언약’이 나와 있고, ‘첫 것과 낡아지는 것’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첫 것, 낡아지는 것, 쇠하는 것을 없애고 새로 등장한 언약입니다. 첫 것, 낡아지는 것, 쇠하는 것. 그런데 언제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이걸 받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 뭐 받았어요? 뭐라도 받았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내가 노력해서, 돈 벌어서 얻은 거 아니에요? 아파트, 차, 자식들 입는 옷…, 내가 노력했잖아요. 하나님께 뭐 받은 거 없지 않습니까? 없어요.
분명하게, 명확하게, 속이지 말고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분명히 이야기해야 돼요. 태어나서 돌봐주는 것은 부모가 돌봐준 거고, 좀 더 커서 내가 공부했고, 나중에 취직해서 월급받는 것도 내가 한 달 동안 애써서 한 거고 뭐, 그 외에 뭐 있어요? 생명 보험도 내가 넣었고요, 뭐 있어요?
딸자식 시집보낼 때 하나님이 뭐 해주던가요? 내가 다 한 거잖아요. 이 명백한 사실을 교회라는, 종교라는 이유 때문에 외면하지 마세요. 종교는 환상이고, 상상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회는 나갔다가 안 나가면 끝나는 거예요, 그거는. 교회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고 그건 내 마음대로고 중요한 것은 내 몸뚱아리 이것은 내가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겁니다.
지금껏 이 내 몸뚱이를 키운 것은, 내가 노력해서, 노동해서 번 돈 가지고 한 겁니다. 그래서 이만큼 살아온 거예요. 언제 하나님이 뭘 줬어요? 교회 와서 또 아닌 척, 하지 말고 분명한 것은 분명한 거지 뭐가 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서 첫 것, 낡은 것, 쇠하는 것 그거 우리한테 주신 적도 없어요.
없는데 그걸 누구한테 줬느냐? 이스라엘한테 줬어요. 우리한테 준 게 아니고 이스라엘한테 줬다고요. 그걸 첫 번째 언약, ‘옛 언약’이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새것과 구분해서 옛 언약이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옛 언약을 이스라엘이 받을 때 이스라엘 외에 다른 민족, 우리 단군의 자손들, 우리 민족은 뭘 했느냐?
자기가 농사지어서 자식 다 키우고, 시집장가 보내고 자기가 죽을 장례까지 다 준비 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옛 언약 뭔지도 몰라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옛 언약이라 하니까, 옛 언약을 받은 유일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거든요.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옛 언약 받고 어떻게 되었는가?
살펴보면 되죠. 옛 언약 받았던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았어요. 하나님께 저주받았습니다. 왜?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보니 이스라엘, 그리고 남은 유다 민족, 이스라엘이 깨지고 조그맣게 남은 유다 민족이 됐는데 그 유다 민족이 악마의 온상이었습니다. 마귀의 온상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던, 하나님과 직접 접촉했던 유일한 민족이 뭐로 드러났는가? 유일하게 악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민족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받을 때 모세가 와서 직접 율법, 십계명을 줬거든요. 그 십계명 받고, 제사법 다 받고, 성막, 성전 짓는 법 다 받아서 성전까지 지었는데 전혀 언약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에 의해 불태워졌습니다. 다 태워졌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율법까지 줬으니까 하나님이 친히 다른 민족은 안 지켜도 우리 민족은 지켜주겠지.’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지켜준 게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한테 처참하게 짓밟히게 만들었어요.
그들은 그래도 오기가 있어서 ‘비록 우리가 남의 나라에 짓밟혔지만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잖아. 하나님은 한결같은 분이니까 여호와 하나님 믿자.’ 해서 나온 그들의 행동이 바로 마귀의 본성이었어요. ‘하나님 믿자.’가 마귀의 본성이었던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으면 복 준다고 교회 왔는데 하나님 믿는 그것이 마귀의 짓이라는 것, 마귀가 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셨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마의 온상이 된 것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샘플로 ‘인간이 진정 뭐란 말인가? 인간 속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가?’ 그걸 대표해서 보여준, 그 역할을 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하나님을 알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악마의 온상이라면 나머지기는 말할 것도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악마의 온상으로 드러났는가?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서 왔는데 죽였어요. 죽여 버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는 대표자 역할을 한 거예요. 죽일 때 배후에 누가 있었는가? 악마가 시켰어요. 하나님 죽이라고. 죽일 때 그냥 안 죽였죠? “자칭 하나님이 어디서 깝죽대?” 이래서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는데 현장에서 그 예수님의 말을 들었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귀신 들렸다고 죽였습니다.
왜 죽였는가? 지금 인간들이 하는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쓸데없는 소리만 나열했기 때문에 죽였어요. 평소에 우리가 꾸준히 했던 일에 저 예수라는 작자가 방해를 한다고, 이게 한둘의 생각이 아니고 전체로 합의된 의견에 의해서 ‘예수라는 자는 없애야 마땅하다. 죽이자.’ 그래서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말은, 그 당시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이방인의 대표자가 본디오 빌라도거든요. ‘아, 찜찜한데.’ 그런데 유대인들이 “당신이 안 죽이면 당신 대빵 가이사한테 이릅니다.” 하니까 세숫대야에 손 씻으면서 “나는 죄 없다. 나는 저 사람 풀어 주려고 했는데 너희들이 부추겨서 죽였다. 난 죄 없다.” 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데 최종 판결을 내렸죠.
이러한 행위,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이나 언약이 없이 자기 노동으로 평생 살았다고 우기는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마귀한테 사로잡혀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모든 죄는 단 한 가지 죄밖에 없어요. 그 죄가 뭐냐? 자기를 위해서예요.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뭐 간음, 살인, 도적질 등 여러 가지 죄들이 있지만 그 모든 죄는 딱 하나에 다 모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이거는 원래 죄를 유발했던 마귀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찾아올 때부터 악마의 자기 마음을 인간에게 넘겨준 거예요, 심어준 거예요. ‘무슨 행동을 하고 뭐든지 생각할 때 너한테 이득이 되느냐, 손해냐, 그것만 생각하라.’ 이걸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게 너한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좀 다녀보고 손해된다고 생각하면 나오지 마.’ 이거에요. ‘하나님 믿다가 이익 없다 싶으면 안 믿어도 돼. 왜? 네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니까.’
이런 마음은, 이런 사고방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에요. 그렇지 않다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어볼까?’ 하는 것은 말을 똑바로 해야 돼요. ‘하나님 믿어볼까?’가 아니라 ‘하나님 이용 해볼까?’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하나님을 이용 하면서 내 이익대로 한 번 믿어볼까?’ 이겁니다.
하나님 믿고 종교를 만들 때 악마는 ‘잘한다. 잘한다! 교회 세워야지. 성당 세워야지. 절 세워야지. 거기서 빼먹을 거 빼 먹어야지.’ 이런 식으로 뒤에서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교회 나와서 뭐 하느냐? 성경책 펴놓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다 끄집어내요. 천국, 지옥, 피, 의로움, 교회, 전도, 헌금, 예배 참석, 성경 공부, 예수님의 재림, 십자가 피, 언약, 새 언약을 전부 다 거론합니다.
그 개념들을 왜 거론하느냐? 이런 개념들을 알면 내가 나중에 살아서도 복 받고 죽어서도 천국 갈 줄 알고 자기를 위해서 활용해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 백날 다녀도 ‘나를 위해서’가 변하지 않아요. 예배 참석하고 헌금 해 봐도 ‘나를 위해서’가 안 변한다고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니까,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하나님은 불편해도 내가 불편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은.
교회 나와서 얼굴 한 번 쓱 보이고 전에 했던 것처럼 돈벌이에 나섭니다. 돈을 벌어야 밥 빌어먹고 사니까. 그런 거 보면 참 우스워요. 아까 불렀던 찬송가에도 나오거든요. 찬송가 307장 가사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농사하지 않으며 곡식 모아 곳간 안에 들인 것이 없어도 세상 주관하는 주님 새를 먹여주시니 너희 먹을 것을 위해 근심할 것 무어냐.” 이걸 불렀단 말이죠. 오늘 교회 나와서 307장 분명히 불렀거든요. 안 믿습니다. 안 믿어요.
‘노래 불렀으니까 좀 봐주소.’ 이 식이지, 믿지는 않아요. 믿을 것은 내 노동밖에 없어요. 내 노동과 내 힘, 돈, 돈벌이 하나밖에 안 믿습니다. 좀 고상하게 해볼게요. 요새 고상하게 하는 일이 뭐냐? 주식 투자입니다. 주식 투자하는데 뭘 고민하느냐 하면, 주식 거래량, 내가 투자한 어떤 기업의 매출, 영업 이익, RnD(연구 개발 비용), 그다음에 금리, 미국의 환율 등 이런 것들을 고려해요.
이걸 수학의 용어로 ‘독립 변수’라고 합니다. 변수들을 한곳으로 모으는데 이걸 ‘종속 변수’라고 해요. 종속 변수가 뭐냐 하면, 내가 투자한 주식 가격이 종속 변수입니다. 여러 가지 독립 변수들을 계산해서 어느 기업에 주식을 투자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죄입니까?” 또는 “주식 투자가 뭐가 나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사람의 머릿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영업 이익, RnD, 지출, 금리, 환율 이런 내용들, 지식들이 차 있어요. 유튜브 보고 배워서 이런 지식들이 있다고요. “이런 지식이 나쁩니까? 이것이 죄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죄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 주식 투자, 누굴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하잖아요, 나를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저한테 물어요. “목사님, 요즘 갱년기인지 밤에 잠이 안 와요. 밤에 잠이 안 오는 이것도 죄입니까?” 저는 답변하죠. “누굴 위하여 잠을 못 주무십니까, 누굴 위하여? 주님을 생각해서 주님과 함께 잠자지 마세요.” 인간의 육신은요, 자아를 모욕합니다. 젊을 때는 뭐든지 하고 싶죠? 나이 들면 나이 든 내 육신이 ‘나는 멀쩡하다’고 여기는 이 자아를 모욕해요.
인간은 나를 위해서 살고 싶은데 내가 믿을 대상이 못 됩니다. 믿을 대상이 못 돼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 우리가 성경 보고 읽고 했잖아요? 그 많은 개념들, 오늘도 성경 본문 봐야 할 것이 굉장히 많은데 이것들을 다 배우고 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부 다 어디로 통하는데? ‘나를 위해서’로 통한다면 마귀가 우리보고 성경 보라고 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목적이. “너 천당 가야지.” 이게 마귀 주장 아닙니까? 이게 마귀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옛 언약은 뭐냐? 그런 나를 덮쳐서 쇠하고 망하게 만드는 것이 옛언약이에요. 우리가 마귀의 종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들춰내는 것이 성경의 단어고 개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 내용에 들어갈 생각은 안 하고 머릿속에서 잊지 못하는 것이 왕왕거려요. 내 건강, 내 구원, 내 가족, 내 돈, 내 위신, 내 명예, 성경 보면서 잊혔던가요, 이게?
“잠이 안 옵니다.” 왜 잠이 와야 돼죠? 잠이 안 오면 내가 육신이 아파서 못 살겠다. 그러면 죽으면 되겠네요. 근데 왜 못 죽죠? 못 죽는 이유가 뭡니까? 무엇이 당신을 못 죽게 만들죠? 이게 내 위신과 내 명예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게 바로 죄잖아요. 악마는 인간들을 이미 장악했고 인간들은 악마가 장악했다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줬어요. 옛 언약을 줘 버렸어요.
언약을 줘 버리니까 인간들은 본인이 이미 악마에 의해 절대적 존재로 작용해서 내 팔 내 흔들기로 평생을 살기로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이 옛 언약, 율법을 통해서 다 노출되고 폭로 당하기 시작한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이런 식으로 율법을 통해서 다 들춰진 거예요.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개성이 있다. 나는 나대로 살래. 내 방식대로.” 이걸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어요, 믿는 척하다가 망했듯이 율법도 없는 모든 인간들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나는 내 식대로 사니까 너는 네 식대로 살아라. 간섭하지 말자. 이게 다양성이잖아, 끝. 이게 민주주의잖아, 끝.” 이방인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어차피 절대적인 것은 이 세상에 없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이 절대적이니까 내가 나를 위해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내 돈 벌어서 내가 살겠다는 게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내가 트랜스젠더가 되든, 동성애를 하든, 국가가 뭐 왜 간섭 하냐?” 이런 식이에요. “내가 술을 마시든, 마약을 하든, 담배를 피우든 내 돈 주고 담배 사서 피우겠다는데 네가 왜?”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을 주셔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옛 언약 안에서 마귀가 인간에게 넘겨준 심보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 들춰낸 겁니다. 들춰냈을 때 특히 저와 여러분이 유념해야 될 것은, 그 유대인들이 극히 종교적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돼요. 그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을 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겁니다.
예수 죽인 그 일이 하나님을 더욱더 잘 섬기기 위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랬잖아요.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귀신 들린 예수 믿는 사람을 내가 잡아주겠습니다.”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고, 스데반 집사도 그래서 죽었잖아요. 종교적이라는 거예요.
종교적이라는 말은 뭐냐? 성경에 나온 말 고상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모든 개념을 나의 의로움과, 나의 거룩함과, 나의 구원 그걸 다 합쳐서 내 이름, 내 이름을 위하여 거기다 꽉꽉 채워 넣는다는 거예요. 그 짓이 바로 마귀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하는 짓이에요. 어떻게 그 짓을 하느냐?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죄를 고발하니까 ‘아, 이게 죄구나. 이제 죄를 알았다. 죄를 알고 반성하고, 반성 다음에 회개하고, 회개하고 난 뒤에 전보다 더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이게 바로 옛 언약 가운데, 다시 말해서 악마의 세계 가운데서 악마가 그렇게 종교 생활하라고 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뭐냐? 지난번에 설교 들었죠? 두 개의 프로젝트. 한 주 지났는데 시간 따라서 다 잊어버렸겠지요. 옛 언약을 완성을 시켜요. 옛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인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이 마귀 짓이고 죄가 됩니다. 충분하게 옛 언약 속에서 인간이 거룩한 종교를 동원하든, 성경 개념을 동원하든, 어떤 걸 다 동원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 짓 다 해봤기 때문에. ‘그래 이건 죄야. 다시는 이런 짓 안 해야지. 그래 앞으로 새사람 되어서…’ 성경에 새사람 얼마나 많이 나와요? ‘…새사람 되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지.’ 그게 마귀 짓이라는 사실을 그 누가 알겠어요? 자기가 들어도 기분 좋은 일인데. ‘아, 내가 발전하는구나. 내가 전에 교회 안 나갔을 땐 인간 말종이었는데 인간 됐구나.’ 이걸 남한테 자랑질하고 싶고, 교회 내에서 자부하고 싶은 이걸 누가 말립니까? 못 말려요. 인간은 안 달라진다니까요!
주님께서는 충분하게 이걸 무르익혀요. ‘인간은 옛 언약 속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 했냐? 이제 다 했지? 할 거 다 해 봤지?” 하나님을 죽여 버렸으니까 나올 거 뭐 있어요, 그게 끝인데요. “다 했지? 자, 그러면 이제 내가 나타난다.” 해서 나온 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 옛 언약, 언약이 두 개인데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는데 자식이 둘이 나왔어요. 하나는 이스마엘 하나는 이삭. 이스마엘을 하갈에게서 나왔고 이삭은 사라에서, 죽은 태,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게 이삭이에요. 임신도 못 하는데 태어났어요. 자식 하나는 임신이 안 되는 데서 태어났어요.
임신 안 됨, 그런데 애는 태어났네? 말도 안 되는 연결점이에요. 이 모순되는, 연결될 수 없는 단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태어난 자식이 이삭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두 언약이 여기서 나와요.
이걸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애를 둘 낳았는데 나올 때 하나는 저주의 모자를 씌우고 하나는 복의 모자를 씌웠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모자를 씌운 거예요. 저주의 모자를 쓴 아이는 살아가면서 악마가 나와요. ‘네가 절대자다’ 해서 뭘 해도 악마가 나와요. 그런데 축복을 씌운 쪽에서는 뭐가 나오냐? 십자가가 나옵니다. 이게 두 언약이에요.
악마의 모자를 씌운 쪽에서 나온 것이 악마가 나오기 때문에 악마가 하는 것은 뭐냐? 나의 선택, 나의 결정, 나의 기대, 나의 희망, 나의 노력, 나의 노동 이런 것에 대한 긍정적인 것만 나와요. 나의 사랑, 나의 믿음, 나의 소망 전부다 나에게서 나온 것을 긍정하는 쪽이 저주에 쓰인 쪽에서 나와요. 저주 모자를 쓴 쪽에서 나와요.
예를 들어봅시다. 마지막 때에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분류할 때 이게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너는 좋은 고기, 너는 나쁜 고기’의 분류를 우리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누가 이의를 걸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다 이뤘어요, 이 새 언약을. 옛 언약 속에는 자신의 노력과 기대와 희망과 애씀 이런 것들, 자기의 결정과 자기의 선택성과 결정성 이런 것이 옛 언약의 세계라면 새 언약은 예수님 홀로 다 이뤘어요.
히브리서 10장 7절에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율법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고 율법 안에 율법이 이야기할 다른 사람을 하나 심어놓고 율법을 준 거예요. 심어놓은 그분한테 율법이 집중되고 그분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겁니다.
그분은 홀로 이루셨어요. 홀로 이루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너는 좋은 고기, 너는 나쁜 고기’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우리가 이의를 못 겁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부루퉁하게 입이 튀어나오는 사람이었어요. ‘아이고 하나님이 혼자 했다는데 뭐 어쩌겠어. 뭐 당하게 되면 당해야지. 인간은 뭐 개코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부루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이제 종을 편히 놓아주시는군요. 이제 이 자아가 나를 괴롭히지 않게 해주시는군요.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하지 않도록 해주시는군요. 내 미래, 운명에 대해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게 하시는군요.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부루퉁 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 잘났다, 그래. 난 내 식대로 살 거야. 내 식대로 할 거야. 내 미래는 내 노동에 의해 살 거야. 돈 벌어서 살 거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착하게 살면 도와주겠지.’ 참, 마귀가, 마귀가 얼마나 교육을 잘 시켜놨는지요. ‘성경에 보니까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데 내가 믿어줄게.’ 이러고 있다고요.
그 개념들이 마귀가 준 개념들이라니까요.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안 받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목도 이제는 막 부정해요. 에베소서 2장에 나온 말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아니란 말이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어져요, 선물로. 내 믿음이 왜 거기 나옵니까? 내 믿음도 아닌데요.
우리 이름은 파쇄돼야 되고 쇠해야 돼요, 옛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 안에 보면, 우리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하나님의 긍휼과 믿음을 선물 받는지가 나와요. 레위기 1장 9절에 보면 번제, 제사하는 과정입니다. 제물을 태워 제사를 드리는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불로 태우는 제사라, 이 말이죠.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했어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란 뭐냐? 하나님께서 코를 대는 거예요. 코를 대게 되면 “뭔가 좋은 냄새가 나오네?” 흠흠, 하고 냄새를 맡으시는데 보니까 제물이 홀라당 다 타요. 인간을 대신해서 양을 태우잖아요. 양을 태운다는 건 인간 자체를 태운다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벌건 불판 위에서 자기 몸을 다 태울 때 주님께서 “아, 이 맛있는 냄새!” 이걸 받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불이 하늘로 올라가듯이 불 속에서 나의 몸은 소멸되면서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받는다’에요. 우리 행함도, 우리의 죄도 불태워서 올라가는 거예요. 모든 것들은 이 불 속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불 속에서 시작이 되어서 주께서 흠향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줍니다. “이제 너 없지?” “없습니다.” “너는 없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 심어서 말씀 열매 맺게 해줄게. 네가 모르는걸 내가 먹여서 살려줄게.”
그게 만나에요.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먹던 것 가지고 광야를 통과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이게 뭐지?” 그래서 이름도 만나에요. 전혀 먹어보지도 못해본 것을 그들은 먹었어요. 그게 만나, 다른 말로 말씀이에요. 말씀을 먹고 살아난 거예요. 위에서 내려온 말씀의 완성을 먹고 그들은 새사람 된 겁니다.
출애굽기 16장 13절 15절에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이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이름이 뭐냐? something “뭐지? 이게 뭐지?” 그 ‘뭐지?’를 매일 같이 먹는 거예요.
매일 같이 만나, “뭐지 이게?” ‘뭐지’를 먹었던 것이 축적이 되어서 내가 모르는 나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알던 내가 아니에요. 내 안에 말씀이 들어와서 내가 된 겁니다. 이게 복의 모자를 쓴 사람의 특징이에요. 복을 찾는 자는 저주받고요, 저주를 찾는 자는 복을 받아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성도가 살아가면서 뭐 감격에 쌓였어요. 이걸 아는 감격에 싸여서 ‘아, 내가 저주받는데 저주받는 이유를 한 번 찾아볼까?’ 그런 식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내가 저주받는 방법은 간단해요. 나를 위해서 살면 돼요, 나를 위해서. 보험 좀 들어놓으시고, 뭐든지 나를 위해서 사세요. 그게 저주니까요, 그게. 그게 마귀의 심성이니까요. 그게 불태워질, 또는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할 그 육신이니까, 육신의 본성, 악마의 본성이니까요.
내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 때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께 와서 “주님, 어떻게 도움받을 수 있습니까?” 하니까 주님이 참 매정한 이야기 하셨어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지 너 같은 이방인, 네 노동밖에 모르는, 네가 일해서 네가 살았다고 하는 이런 너에게 줄 거 없다.” 했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먹다 남은 것, 먹다 버린 떡이라도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거라도 주세요, 멍멍!” 자기를 개로 본 거예요. 나는 인간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를 개로 보는 거예요. 삽살개든 뭐든지 좋아요, 개예요. 그런 자칭 자기를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긴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마태복음 8장 12절에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그다음 단어요. “이를 갊이 있으리라” 부득부득 이를 가는 거예요.
‘왜 내가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를 왜 진작에 몰랐을까? 나는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내가 예수를 믿어서 더 착한 사람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착한 줄 알았는데 이 착하다는 내가 마귀의 가현체라는 사실을 내가 왜 진작에 몰랐을까? 구원받겠다는 내가 악마의 가현체라는 사실을 왜 내가 진작 몰랐을까? 죄 덩어리, 악마 덩어리로 살면서 진작에 왜 그걸 몰랐을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과 일체 협의하거나 의논하지 아니하시고 홀로 다 이뤘다고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것이 로마서 11장 36절에 나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여기에 인간이 어디에 낍니까? 인간이 낄 데가 어디에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충분히 이용할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든지, 무슨 일로 작살이 나든지 하여간 우리는 충분히 이용되기에 우리는 옛언약이라는 그 안에서, 그 옛언안에서 살면서 충분히 그걸 경험할 필요가 있어요. 죄를 더욱더 풍성하게 경험하는 겁니다. 살아생전에 우리의 죄를. 죄를 더욱더 풍성하게 경험해 줘야 우리가 졸지에 망해도 우리는 박수칠 수 있는 거예요, 주님한테. 졸지에 부도나고 망해도요.
있는 돈 2천8백, 보이스피싱 전화 한 통에 다 날아가도 박수를 칠 수 있는 거예요. 이 저주받은 인간에게서 뭘 더 빼앗아 간다고 해도 ‘다 빼앗아 가세요 다!’ 다 빼앗아 가도 주께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겁니다. 인간이 언약도 모르고 새언약도 모르고, 그런 인간들 하는 짓은 뭐냐? 평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자기의 무덤을 제작하는 거예요. 평생 자기의 무덤을 만들어요. 자기 무덤 제작하는데 몰입합니다.
그러다 습설(濕雪),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요. 습기를 머금은 눈. 무게가 점점 쌓여요. 자기가 무덤을 만드는데 그 무덤과 함께 폭삭, 자기가 평생 노동한 모든 것이 다 무너져서 깔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믿었던 가짜 하나님과 더불어,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우상으로 드러나면서 완전히 납작하게 되었어요.
자,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새언약으로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옛언약이 무르익을 때까지 새언약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좀 어려운데요. 다른 것도 어렵지만 갈라디아가 많이 어려워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3, 24절에 “믿음이 오기전에” 아까 말한 대로 ‘믿음이 선물로 오기 전에’, ‘내 믿음을 작살내고 주님 자신의 믿음이 오기 전에’ 그런 뜻이에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이 ‘몽학선생이 되어’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뜻입니다. 스무살 때까지 아들을 잘 키웠는데 이제 입영통지서가 날아왔어요. 예쁜 머리카락 다 날아갑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엄마와 이별 인사하는데 엄마가 대성통곡합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험한 꼴 안 보게 고이고이 키웠는데. 엄마 아빠도 없이 훈련소에서 어떻게 지낼까?’ 그 생각하니 애처롭기 짝이 없어요. 머리는 벌써 홀라당 깎아버렸지요. 모자 뾰족하게 해서 푹 눌러쓴 조교가 “자, 이제 들어옵니다! 시간 다 되었습니다.” 할 때 다 끌려가지요. 엄마는 아들 다시 못 볼 것처럼 울고불고 하지요.
그 조교, 그 조교가 옛언약이에요. 우리가 이스라엘로 가야 해요. 옛언약으로 해서 우리가 하는 족족 모조리 다 죄만 짓고 마귀 짓만 한다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해야 돼요. 아주 혹독하게. 그래서 몽학선생이 끌고 갑니다. 훈련소에서 “네가 이 군대에서 훈련받다가 죽어도 너는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죽은 것으로 생각해라. 현충에는 보내준다.” 그래 놓고는 유격장에 가면 “죽어도 좋습니까!” “죽어도 좋습니다!” 네가 그렇게 복창했으니 줄 타다 끊어져서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 소리 듣고는 20년 동안 자식 키워온 부모 가슴이 찢어지지요. 우리 자신과 헤어져야 됩니다. 그냥 헤어지지 말고 실컷 평생동안 죄지은 그 나와, 내가 몰랐던 새로운 나와 교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단불에 불태워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맛있고 흠흠, 냄새를 맡으십니다. 그렇게 불태워져 없어져야 돼요. 뭐 교회 나와서 구원받겠다? 다 불태워져야 해요.
그게 각질이죠. 각질은 죽은 세포예요. 겨울 되면 각질이 막 올라오잖아요. 산 세포가 각질을 밀어줍니다. 새언약이 우리를 밀어줘요. 그러면 몽학선생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갈라디아서 3장 이야기가 뭐냐? 27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1년 뒤에 휴가를 왔는데 딱 각이 잡혀 있어요. 군복을 보니 엄마나 아빠가 백화점에서 사줬던 그 옷이 아니라 엉뚱한 옷을 입고 있어요. 군복을 입고는 엄마 아빠 앞에서 “충성!” 말리고 싶어요. ‘얘가 와이카노? 내가 키운 애는 얘가 아닌데?’ “보고 싶었나?” 하니까 “어머니, 보고 싶었지 말입니다!” 말투도 달라졌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말입니다!” ‘말입니다’ 그걸 말끝마다 왜 붙이냐고. 물론 군대 같아야 군대지 군대 같지도 않으면 군대랄 것도 없겠지요.
이게 뭐냐? 내 인생을 김으로, 김 알지요, 김해의 그 먹는 김, 연탄불에 구우면 맛있는 그 김처럼 인생을 직선으로 보지 않고 면적으로 봐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주께서 이용할 대로 이용하기 위해서 한 장의 김으로 만든 거예요. 돌이켜 보면 어느 구석도 주님의 거저 주심이 아닌 일이 없는 한 장의 김으로 우리를 만들었던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의 옷이 된 거예요. 예수님을 보여주는 옷이 된 거예요. 주님이 우리 잘났다고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주님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증인 되기 위해서 우리가 성도 된 거라는 말이지요. 이게 새언약의 효과입니다. 옛언약의 인간들은 교회 나와서 하는 짓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명정을 만들어요, 구명정.
위급할 때 타는 보트. 자기가 방주 만들 것도 아닌데 방주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십일조 하고, 목사 섬기고, 예배 참석하고 교회 봉사하고 했으니까 이게 나를 구원하겠지.’ 교회 바깥에서는 돈 벌고 교회 와서는 말씀대로, 신학과 교리로 이거 만들면 구원하겠지, 하는데 십자가가 구명정에 총을 쏴버립니다. 구멍 내 버려요.
구멍을 내버리면 그걸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구멍 난 내 구명정이 물아래 가라앉습니다. “네 구명정도 그냥 마귀한테 도로 갖다줘 버려라. 내가 날 구원하기 위해서 했던 모든 짓거리를 마귀가 다 한 거니까 그냥 마귀한테 돌려줘라.” “그러면 저는요?” “너는 예수님의 절차를 따라서 그대로 네가 구원될 것이다.”
예수님의 그 절차가 뭐냐? 이 세상은 예수님마저 죽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 세계가 박스라면 예수님을 박스 안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박스 안에서 사흘 만에 탈출했어요. 사흘 만에 부활해서 탈출했습니다. 그래서 이 박스 안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무슨 무덤이냐? 빈 무덤이에요, 빈 무덤.
그게 예수님의 절차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에 보면 우리의 무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빈 무덤으로 만들어줘요.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이 땅에 있는 우리는 이 땅에 있는 한 장의 주님의 김이 되어서 빈 무덤 남기고 주님 절차 따라서 주님의 공중 재림과 함께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의 절차 따라갑니다. 따라가면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옛 언약에 의하면 번제와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시편 51편에 따르면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이 상한 심령에게 긍휼이 입힙니다. 상한 심령이 해야 될것은 불태워지는 것이고 긍휼은 주님께서 냄새를 맡고 긍휼을 입혀주는 거예요.
“너 다 태웠구나. 내가 긍휼을 줄게. 이제는 사랑만 줄게.”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일치감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와서, 한 장의 김이 되어서 주님을 감는 주님의 옷이 되는, 또는 그리스도의 옷으로 감싸져서 주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곧 죄를 경험함으로써, 마귀를 경험함으로써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내 죄가 주님의 의로 바뀌는 그 장치, 새언약의 장치, 십자가의 피, 그 피를 증거하기 위해서 마음껏 원 없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평생토록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무엇 때문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죄지어놓고 착하다고 우기는 저희들, 착한 일 좀 했다고 의롭다고 우기는 우리, 그게 마귀의 체험이고 마귀가 우리에게 준 체험인 것을, 새언약세계의 멸망당할 이유인 것을, 그것을 슬퍼하지 말고 도리어 그런 체험을 주신 주께 감격함으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