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의 시공간
2024년 12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9:1-5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9: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인간들은 성막을 거부해도 친히 설계하신 하나님께서 이 성막의 원칙을 취소하시지 않습니다. 이로서 성소는 이 세상에 대한 고발용으로 제작된 겁니다. 그 성소와 지성소를 제작한 취지는 그대로 새언약 속의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새 언약으로 인해 인간들이 사는 시간과 공간은 멸망 대상으로 등록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망해야 마땅한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멸망과 더불어 우리 인간도 같이 망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간성, 곧 역사성은 하나님의 비-역사성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절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그 누구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지요?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는 나’를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나’와 ‘내가 미처 모르는 나’ 사이에 단절지어져야 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기거하던 고래 뱃속과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안 죽고 살아있는 공간으로서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작용합니다. 즉 죽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낯선 땅입니다. 요나는 분명 같은 배 탑승원들로부터 버림받아 바닷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었기에 비로소 고래 뱃 속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산 채로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죽음 뒤에라야 비로소 ‘구원되는 나’가 되기에 나로서는 살아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억의 축적으로 서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6에서는 이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즉 인간의 자아는 사망으로부터 공격받고 쏘임을 당하는 대상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네 죄 짓고 있으니 빨리 선을 행하는 자로 전환하라”는 식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늘 죄의식으로 추궁하는 존재는 악마입니다. 악마는 인간 내부에 악마의 말을 무시 못하고 가스라이팅 당하게끔 칩을 심어놓고 계속해서 추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선악체계의 권능을 능가하는 율법이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제대로 본격적으로 율법으로 인간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끝장 볼때까지 밀어붙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에 의한 조기 사망’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살아도 율법으로 볼 때 이미 사망자가 될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악마는 인간으로 하여금 나쁜 짓이라는 인식으로 몰아세우지만 율법은 이 원칙을 극단적으로 사용하여 아예 인간을 이미 죽은 자로 규정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7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한 일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는 끊어져 있습니다. 성소는 바로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비역사적 효과’을 보여주는 것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역사가 흘러가도 일관된 원칙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는 자꾸만 자신을 포기 못하고 현명하게 행동하고자 합니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자아를 죽어서 천국까지 밀어넣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18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 시도를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즉 기존 자아를 붙잡는 자는 미련하기 싫은 겁니다. 자신이 성경으로 끌어모은 그 지식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옛언약의 성소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 구경하는 식으로 버티는 겁니다.
성소 안에는 제사장이 이미 제단에서 죽어버린 그 어린양의 대행자가 되어 그 피를 자기 몸, 자기 옷에 바르고 성소와 지성소 안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성소의 배치된 모든 기구들은 역사적 존재자가 접촉해서는 결코 그 효과가 열려서 작동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요나와 같이 이미 죽은 자로서 활동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죽음은 곧 자신을 조기에 죽게 한 그 비역사적 조치 속에서 새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예로 물두멍이 있습니다.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출 30:18-20)
즉 물두멍에 씻지 않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필히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역사적으로 이미 죽은 어린양이 비역사 속에서 비로소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살아 있는 겁니다. 떡 12개를 놓은 북쪽 테이불 위의 떡이나, 그것은 마주 보며 비쳐주는 등대는 가운데 통로를 어린양이 지나가는 위치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나 교회가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12-13) 성도는 자기 구원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원을 제공한 분의 비역사적 존재 위치를 증거하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역사를 통해서 고장난 기계에 불과합니다. 자체적으로 일어키는 그 어떤 작동도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역사 안에서 깔아놓은 바리게이트이 걸려서 그들은 그저 구원됩니다. 그것을 ‘낚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구원이 되는데 있어 그 조건도 철거하도록 오늘날 성령으로 날마다 고발하시고 책망해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피흘리시는 어린양의 모습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5강-히브리서 9장 1-5절(어린양의 시공간)241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9장 1-5절입니다.
히브리서 9:1-5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옛 언약은 낡아지는 겁니다. 낡아지고 새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는데 그 새 언약의 기본 취지가 옛 언약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낡아지는 것이니까 우리가 몰라도 된다.’가 아니라 낡아지는 그 언약 안에 있는 내용이 새 언약에 그대로 이어져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는 겁니다.
옛 언약의 이 성소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성소의 구조를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데, 그 안에 이런 게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의 마음 구조가 이 성소 구조로 되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우리 마음 구조가 성소 구조로 자리 잡아야 옛 언약이 폐기 되면서 우리 자신도 폐기될 만한 그만한 정당성이 확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마음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간다, 이는 옛 언약 가지고 천국에 못 가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구조, 구조가 폐기될 언약 구조와 더불어 함께 있게 되면 이 언약, 옛날 성소와 지성소 구조 안에 뭔가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떤 게 통과하냐 하면, 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비역사적인 것이 통과하고 있어요.
성소라는 것이 공간이 있고, 어떤 구조물이고 그 안에 어린 양이 통과하고 있는데 이 어린 양의 특징은 뭐냐? 제단, 제단에서 이미 죽은 어린 양이 피라는 것으로 응축되면서 그 어린 양의 모습을 제사장이 대행하는 모습으로 피를 담고 제단에서부터 성소로, 성소로부터 지성소로, 지성소로부터 언약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린 양의 내용이 움직이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옛 언약은 파괴되어도 옛 언약에서 살아남는 그것,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은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 마음을 폐기될 옛 성소로, 지성소로 사용한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무엇인가 통과하고 있는 것이 있어야 돼요.
아까 장로님 기도 하셨는데 그 기도 내용을 함축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의 공로로 구원됩니다.’ “목사님 아직도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이게 헷갈리고 자신감이 없습니다. 믿기는 믿겠는데, 아주 악바리같이 믿겠는데 과연 내가 구원받았는지, 오늘 밤에 내가 죽는다면 천국 가는지 안 가는지 그게 되게 모호합니다. 어떤 대책이 있겠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아마 물을 거예요. 다 그런 마음이 있어요.
그럴 때 딱 한 가지만 알면 돼요. 예수님의 공로만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 받기 때문에 따라서 구원에 대해서 내 쪽에서 어떤 조건도 걸지 마세요. 죄를 회개한다든지, 나쁜 짓은 안 한다든지 그런 시시껄렁한 조건들을 걸지 마세요. 바르게 산다든지, 그거 다 철거해야 됩니다. 이게 철거 안 되니까 자꾸 마귀가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어제 제가 들은 이야긴데 이 동네 사는 사람인데 원불교에 다녔던 모양이에요. 원불교에 다니니까 그 원불교 담당자인 중이 그 사람에게 각별히 했겠죠. 그런데 그 사람이 좀 다니다가 안 다닌다고 하니까 원불교 중이 와서 하는 말이…, 잘 들으세요. “원불교 다니다가 안 나오면 자녀가 불구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끝까지 참고 원불교 안 다녔답니다. 그 이야기 듣고 속으로 제가 얼마나 웃었는지요. 왜 웃었냐면 우리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한테 제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말할게요. 우리 교회 다니다가 안 나오는 사람, 그 사람 정신 차린 사람이에요. 불구자가 된다느니 뭐 같은 소리 안 합니다.
정신 차린 사람인데 왜 그러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미련하지 않아도 돼요. 십 년 동안, 이십 년 동안, 삼십 년 동안 교회 나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십자가의 공로가 나를 구원한다? 이런 미련한 짓을 아직도 내가 믿어야 해?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정신 차려.’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거예요. 정신 차려서 교회 안 나온 거예요. 계속 미련하기 싫어서.
아직 여러분들 교회 나오잖아요. 정신 못 차려서 그래요. 주님께서 미련하라고 하는 거예요. 너희들의 지성으로, 지혜로, 선악 체제로 어떤 경우라도 이 십자가 주님의 공로를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미련한 자만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미련한 자만. 계속 미련하시기 바랍니다. 미련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똑똑한 체 하지 말고요. 교리 이런 거 신학, 거론 하지 말고요.
왜 똑똑한 사람에게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이느냐?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설 때 하나님을 대비 하면서 내세울 게 있어서 그래요. 반듯하게 살았다든지, 뭔가 착실하게 살았다든지 내세울 게 있어요. 아직도 그걸 못 놓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뭐 연구를 하죠. ‘똑똑한 내가 하나님까지 연구해서 그것까지 알면 난 더욱더 똑똑해지니까 나중에 내가 하늘나라 갈 때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게 얼마나 정신 차린 생각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그러한 생각을 아시고, 유일하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십자가 피 흘리고 있는 하나님 외에 일체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그래서 다 내뺐어요. 다 도망쳤습니다. ‘내가 예상한 하나님 아니네?’ 하고 다 도망갔어요. 제자들도 도망갔어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절).
그 말은, 그 당시 똑똑한 지도자도 다른 하나님을 생각한 거예요. 인간들이 똑똑한 체 하면서 생각하는 하나님과 실제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진짜, 진짜 하나님은 그냥 인간에게 매 맞아 피 흘린 하나님입니다. 이거, 이거 아셨으면 일평생 하나님께 받을 거 다 받았어요. 다 받았습니다. 이거 알거든 춤춰도 괜찮아요. ‘내가 뭔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어, 내 주제에, 무슨 이런 복이 다 있어? 평생을 신학 공부해도 모르는 하나님을 어떻게 나에게.’
“피 흘리는 십자가, OK?” “오케이!” 그걸로 끝나버린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그 앞에서 미련하고 미련한 자가 되는 기쁨을 주시고.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옛 언약이 성소 구조로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성소 바깥의 인간들은 역사적 존재에요. 자기 과거에 대해서 자꾸 되새기면서 자기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 성소 구조 내부를 지나가고 있는 그 어린 양은 이미 역사에서 어린 양으로 제단에서 죽었던 적이 있는, 역사적으로 사망한 적이 있는 그 어린 양이 피라는 흔적과 형체를 가지고 성소 구조 한복판을 통과할 때 그게 비역사에요. 역사적인 인간은 그 성소 구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기에 금향로, 제단, 진설병, 언약궤, 등대 이 모든 성소 구조에 접촉하면 그게 작동이 안 돼요.
성소 구조는 비역사가 다가서야 이게 그 효과가 열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역사적인 존재가 그 성막 속의 내용을 알려고 하면 그 성막과 더불어서 망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망한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늘 과거 미래 생각하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비역사적 존재가 될 수 있느냐?
간단해요. 죽으면 되죠. 죽으면 되는 거예요. 죽으면 내가 살아서 하는 모든 기억과 과거 다 날아갑니다. 내가 잘한 것 못한 것, 내 선도 날아가고, 내 악도 날아가고, 그래서 선악 지식도 같이 날아가고. 마귀가 준 선악 체계가 같이 날아가요. 죽으면 되거든요. ‘그냥 죽으면 안 되잖아?’ 안 되지요. 주님께서는 죽은 채로 산 사람이 되게 해요. 살아있는 내가 아닌 죽은 나를 하나님의 어린 양과 결합시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걸 어렵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아는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나를 구원해요. 내가 아는 나는 내 역사 속에, 기억 속에 있는 역사적 나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를 부리면서 이걸 천국까지 밀어붙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나에게서 끊어내는 작업에 동원될 ‘나’가 필요한 거예요. 이 말이 좀 어려운데요, 성경은 제 말보다 더 어렵습니다. 더 어려워요.
아까 원불교 중이 엄포를 놓은 게 그거잖아요. “원불교 계속 안 나오면 당신 자녀가 불구가 된다.” 이게 바로 역사적 나를 악마가 계속 물어뜯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제가 말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렵게 이야기 했어요. 자, 어느 정도로 어렵게 했는가? 55절에서 56절을 제가 읽어드리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The sting of death is sin; and the strength of sin is the law. But thanks be to God, which giveth us the victory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왜 사망을 어떤 살아있는 인격체처럼 그렇게 대우를 해요. 그것부터 어려운 이야기에요. 다시 보면, “사망아” 사망 보고 이야기를 걸어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우리는 ‘아, 죄어서 죽는구나.’ 그건 이해가 되겠는데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겁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제가 아주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역사적 존재를 비역사적 존재로 바꾸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율법은 비역사에요. 천국도 비역사고 지옥도 비역사에요.
지옥불은 영원하기 때문에 거기서 시간 재봐야 소용없습니다. 지옥에는 시계 풀고 가야 돼요. 시계가 소용이 없는 거예요. 천국도 마찬가지고요. 천국도 비역사고, 지옥도 비역사고, 하늘로부터 출발 되는 율법도 비역사에요. 역사는 지금 땅에 사는 기억이 있는 나뿐이라는 말이지요.
주보 잠깐 봅시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기거하던 고기뱃속과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요나하고 요나가 들어간 고래 뱃속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이 말이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요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당신은 물속에나 들어가라.” 하고 던져버렸잖아요. 그 <버림받은 자가 안 죽고 살아있는 공간>,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요나는 그 배 위에서 바다로 빠져 죽었어요. 그 배 위에 있는 선원과 사람들은 이미 죽은존재에요. 죽은 존재이기에 갈 수 있는 공간, 안 죽으면 못 가는 공간 그게 고래뱃속이에요. 그게 율법 속입니다. 왜? 율법은 비역사니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이걸 쉽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데 이겁니다. 악마가 우리한테 선악 구조를 심어놨잖아요. 우리 안에 악마의 칩을 심어놨다고요. 칩을 심어놓고 악마가 뭐라고 부추기냐 하면 ‘넌 그거 하면 죄야. 죄라니까? 회개해야 돼. 반성해야 돼. 죄라니까? 좀 더 잘해야 돼. 그 정도 해서는 안 돼. 더 잘해야 돼. 기도 할 때 손 모으고 무릎까지 꿇어야지. 하루 한 번 했다고? 두 번 해야지.’
아까 그 장로님 기도한 대로 ‘이웃을 사랑해야지. 사랑 안 했어? 그거 죄야. 똑바로, 사랑을 해도 성의껏 해야지. 그냥 대충하지 말고 건성으로 하지 말고.’ 누가 이런 짓 하는 거예요? 사망이 이런 짓 합니다, 사망이. 마귀가 계속해서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것을 우리가 의식하게 된 거예요. 왜? 마귀가 심어놓은 칩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마귀하고 서로 대화가 되고 통하는 칩을 마귀가 우리 안에 집어넣었어요. 이거 수술해서 우리가 뺄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집어넣었냐 하면, 그걸 빼주는 게 아니고 비역사적인 율법을 우리한테 줘버립니다. 율법을 주면서 이렇게 합니다. “너 사망으로 조기 처리 하자. 숨 끊어질 때 사망으로 간주하지 않고 율법으로 조기에 처리 해줄게.” 조기에 처리하면서 율법도 같이 처리 해버리는 거예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마귀가 정죄한 것을 이제는 마귀 자리에 율법을 하나님께서 집어넣어서 마귀의 정죄 정도가 아니라 율법이 직접, “마귀 저리 가!” 하고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직접 정죄해서 어디까지 가느냐? “너는 이미 사망했어.”까지 끝까지 가게 만들어요, 끝까지.
율법이 이야기하는 건 그겁니다. 넌 뭘 잘 못 한 게 아니고 태어난 자체가 잘못이에요. 태어난 자체가 죄악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네가 나쁜 짓 안 하면 착한 사람 되고 네가 착하게 살면 더 착한 사람 된다.’ 자꾸 우리로 하여금 ‘너는 여전히 역사적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한 네가 착하게 살아야 죽어서 하나님 볼 때 지옥 안 가고 천국 갈 수 있는 거야.’라고 마귀가 종교라는 걸 만들었어요.
이 교회, 성당, 열혈사제, 열혈사제가 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얼마나 지금 마귀 짓을 하는지 본인도 몰라요. 왜? 그들은 정신 차렸으니까. 목사나 신부들은 다 정신 차린 사람들이에요. 공부 깨나 한 사람들이에요. 이성적인 사람들이에요. 촛불 집회 참석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부다. 미련한 사람들 한 사람도 없어요. 어떤 말을 해야 교인들이 모일 걸 아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들이 와야 교회에 돈이 모일까를 아는 사람들이에요.
요한복음 1장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여기서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율법과 예수님을 서로 마주 보게 해요.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율법 지키다가 예수 믿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율법이 하는 일과 예수님이 하는 일을 단절시켜 놨어요.
율법이 하는 일은 내가 알고 있는 나를 구원 받고자 시도하는, 악마의 종이 되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를 천국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이 악마의 작전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개입시켜서 “구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는 율법을 어느 하나 못 지키는데, 다 지키고 하나만 어겨도 저주받아. 너는 끝났어. 안 돼. 끝났어, 너.”
하나님의 구원은요, 내가 아는 자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야곱 언약의 복을 셀라, 막내아들에게 이어질 줄 알았잖아요. 베레스와 세라까지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옆에 양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어요.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 이유는요, 자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 라헬의 자식이기 때문이에요. 라헬의 첫 번째 자식이 요셉이잖아요. 그 요셉 볼 때 사랑하는 여인이 일찍 죽은 그걸 생각할 때마다 자기 본심대로 채색옷을 입혀 특별대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요셉이 죽었습니다. 짐승한테 물려 죽었어요.
야곱은 요셉 죽고 난 뒤에 자기도 드디어 살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빨리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없는 세상은 끝난 세상이다, 요셉 없이 어떻게 사느냐. 사랑하는 아들은 짐승에게 죽었고 그 증좌로 요셉의 형들이 피 묻은 옷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가 없어서 이게 짐승 피인지 사람 피인지 DNA 조사를 못 해요.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예상하지 못 한 일이 벌어졌어요. 요셉이 살아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었어요. 야곱은 그 이야기를 듣고 요셉이 살아있는 걸로 여기지 않았어요. 말씀이 살아있었던 겁니다. 꿈이 살아있었던 거예요, 꿈이. 아, 말씀을 사랑해야 될 텐데. 옛날 자아가 좋아했던 그 내 아들을 좋아했던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 요셉을 통해 바꿔주는 겁니다.
“야곱아, 너를 구원하는 게 아니야. 네 속의 말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야.” 이게 구원이에요. 내가 아는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온 주님의 어린 양, 비역사적인 어린양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구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피 흘리는 방법으로. 그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으니까.
뭐 성자도 있지만 아버지 성부도 있고 성령도 있다, 삼위일체라고요?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하나님은 피 흘린 하나님, 그게 끝이에요. 끝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분의 아버지가 성부에요. 그분의 영이 성령이고. 그러나 인간에게는, 피 흘린 그분 하나님이 전부에요. 나머지는 다 우상이에요.
그래서 그걸로 끝입니까? 아니죠. 그 어린양이 옛 언약의 성소와 지성소를 통과하듯이 지금은 우리 속을, 옛 자아를 폐기 되어야 할 성소와 지성소로 사용하고 있다고요, 이 공간을. 그러면 우리의 공간은 역사적인 공간인 동시에 비역사적인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거예요. 살아서 못 들어갔어요. 죽었는데 살았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아는 나는 죽었고 내가 모르는 나는 고기 뱃속에 살아있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그 요나의 기적이 지금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고, 오늘 본문 히브리서 9장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설명 다시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마귀가 ‘너 똑바로 살아라. 자꾸 죄짓지 말고. 그러면 네가 알고 있는 인생 실패해.’라고 하는 것을 율법이 나서서 뺏어서 “마귀야, 선악을 안다는 마귀야. 내 율법이 그 선악을 사용할게. 내가 할 게.” 해서 율법에서 죄의 권능이 나오고, 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조기에 그 인간은 사망 처리 해버려요.
그렇게 해놓고, 요한복음 1장에서 모세하고 예수님하고 대조시키니까요, 율법은 모세에게 준 거예요. 그 뒤에는 뭐냐? 율법을 아는 나는 그리스도로 옮겨올 수 없게 단절시켜 놨어요. 역사가 비역사로 못 오게 단절시켜 놨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아는 그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역사로 찾아가서 그들이 결코 비역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게 요한복음 전체 내용이에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 13:36). 모르죠.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 설명해도 모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보여달라. “내가 하는 일을 봐. 이거 외에는 없어. 이게 하나님의 일이야. 정신 차려.” 진짜 정신 차려야 돼요. “이게 하나님의 일이야. 내가 죽는 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제자들도 못 알아들어요.
요한복음 16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다시 말해서 “내가 떠나가서 역사적인 너희의 사고방식과 네가 알던 너 자신의 역사적 인식과 기억과 그리고 나의 비역사,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관철하는 비역사, 이 사이에 내가 너희와 단절되고 떠나가야 비로소 너희에게 유익이다.”라고 했어요.
내가 떠나지 아니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 그래서 떠나가는데 떠나면 그 빈자리에 보혜사 성령이 오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 단절, 역사와 비역사 사이에 어떤 인간도 역사적 존재가 비역사에 참여할 수가 없어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는 비역사적인 존재가 역사 속에 죄인으로 오셨잖아요.
똑같은 일을 누가 하느냐? 성령은 비역사인데 예수님 떠나신 그 자리에 성령께서 역사적 활동을 개시하시는 거예요. 하시고 그 역사적 성령이 개시가 되는 그 담당자는 택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된다면, 그다음에 8절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가 와서” 그가 와서 뭐 할 일이 있어야 되잖아요, 할 일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했어요. 성령이 와서 하시는 일이 고발하는 거예요. 성소와 지성소, 고발용입니다. “거기서 제사드리면 구원 해줄게.” 그런 거 아니에요. 고발용이에요. 심판용이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역사적 존재, 네가 아는 너는 구원 대상이 아니라는 것, 도리어 조기에 사망 처리되어야 될 대상이라는 사실. 왜? 선과 악을 알고 있기때문에, 마귀의 칩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 책망한다는 것은 뭐냐? 예수님의 재판을 근거로 했을 때, 예수님이 죽으신 일을 근거로 했을 때 예수님이 죽으러 오시면서 인간들이 갖고 있던 그 선악 체계에 의한 그 의롭다는 것이 엉터리 기준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죄도 ‘너를 죄라고 규정한다.’ 그 죄도 하늘나라에 전혀 먹히지도 않는 죄에요. 마귀한테는 먹히는데 하늘나라에는 먹히지 않는 죄에요.
심판에 대해서 심판 해버려요. 너희들의 심판 자체를 심판하는 거예요. 자기 눈의 들보는 모르고 남의 눈의 티는 본다고? 말씀대로? 심판을 심판 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책망을 들을 때 성령 받은 성도는 신났어요. 신이 난 거예요. 내가 신경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이제는 버리게 되어서 신이 난 거예요. 더 이상 나 자신을 신경 쓸 것도 없는 게, 괜히 더러운 거 깨끗하게 한다고, 이걸 이제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는가? 미련한 거예요. 그게 미련한 거예요. 정신 차린 인간이 보기에, 세상이 보기에, ‘교회에서 복음 좀 안다고 완전히 미련곰탱이 됐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바보야. 네 인생 네가 알아서 깔끔하게 인도하고 관리해야 돼. 네가 너 관리 안 하면 나중에 지옥 가. 정신이 어디로 가서 이렇게 이상하게 됐나?” 그렇게 되겠죠.
이제 오늘 히브리서 다시 9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9장으로 돌아와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해야 할 게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했는데 이것은 뭐 설명할 필요 없이 많이 했다는 이야기거든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걸 설명해야겠어요. 여기 기구 하나하나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해야 하겠습니다.
설명을 하는 방법은 바로 출애굽기 28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28장, 29장, 30장 그리고 거기에 26장 하나 약간 추가하면 됩니다. 우선 출애굽기 28장 2절에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제사장이라는 특수한 인물을 하나님께서 선택합니다.
제사장, 제사장은 뭐냐? 아까도 언급했지만 제단에서 어린 양이 죽었어요. 어린 양은 죽었는데 그 어린 양이 죽는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제물의 흘린 피를 자기 몸에 발라야 돼요. 자기 피를 바르는 게 아닙니다, 죽은 제물의 피를 바르면 그 사람은 죽은 제물의 대행자가 돼요, 대리자가.
몸은 역사적 존재인데 그 피가 묻어버리면 그 사람은 비역사적 존재로서 성소와 지성소 안까지 들어가서 일할 수 있고, 일을 하게 되면 그 기구들이 본래의 효과가 작동이 돼요. 작동이 되면 그 성소 바깥에 있는 백성들의 죄가 용서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공간이 네 가지란 말이죠. 첫째, 인간이 사는 이 역사적 공간 하나, 공간 둘이 뭐냐? 성소와 지성소 합해서 성막, 성막이라는 공간. 세 번째 공간은 뭐냐? 성소와 지성소라는 공간을 또 구분해요. 제가 구분하는 게 아니고 오늘 히브리서 9장에서 구분했어요. 성소와 지성소, 공간 쓰리입니다. 세 번째 공간이죠. 네 번째 공간은 뭐냐? 언약궤라는 네 번째 공간이에요.
그 상자, 상자 공간. 그 상자 공간이 열리면 작살납니다. 멸망해요. 세상 멸망하는 날이 언약궤 상자 뚜껑 열리는 날이거든요. 사무엘상 6장 19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어디 감히 역사적 존재가, 내가 아는 나의 죽음 처리가, 조기 사망 처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역사 속을 들여다보면 비역사는 고발용이기 때문에, 심판용이기 때문에 비역사가 역사 존재를 죽여 버려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설교 들었으면 딱 한 가지 기억하세요. 이 성소와 지성소 제작은요, 인간들이 무시해도 하나님 쪽에서 이걸 취소 안 시킵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나 교회 안 다녀. 나 성경 덮었어. 성소니 지성소니 나 그거 모르고 살래.” 성소가 있었다, 지성소가 있었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 우리 쪽에서 개무시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직접 주님께서 제작하고 설계했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 취소가 안 돼버리면 이 멸망은 그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지옥 불로 주어지는 겁니다. 현실 문제에요, 이거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취향? “나 종교라는 걸 취미로 해볼까?” 이게 취미 문제가 아니에요. 실제 현실 문제입니다.
다시 한번 28장으로 돌아가서 제사장이 특수한 복장을 입습니다. 그다음에 옷을 만들고 난 뒤에 옷 입을 사람을 정해 놓고 29장에 옷을 입힙니다. 옷을 입힌 채로 그 사람을 끌고 가요. 출애굽기 29장 20, 2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너는 그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그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사장이 걷고 있는 그 길은 어린양의 피가 떨어지는데 그 피 따라, 피가 묻은 그 길을 따라가는 거예요. 왜? 피 흘린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만나는 거예요. 출애굽기 30장 18절에 물두멍이라는 게 나와요.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히브리서 9장에서는 물두멍은 나오지 않지만요. 여기 소개 안 되어 있는 성소의 기구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분향단, 등대, 떡을 얹는 상, 속죄소, 언약궤, 번제단이 나오지만 그 외에도 재를 담는 통, 부삽, 삽, 제물 담는 대야, 제물 옮기는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등이 다 필요해요. 그 모든 기구들이 오직 하나를 위해서, 하나의 기능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예요.
역사적 존재를 죽여서 비역사로 넘기는 거예요. 요나를 죽여서 물고기 뱃속에 죽은채로서 살아 있게 넘기는데 그 기능입니다. 그래서 물두멍이라는 것을 왜 만드느냐? 19, 20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성막 바깥에 있는 백성들이 볼 때 …, 성막의 담 바깥에서 보면 그 안에 보인다고요. 저도 이스라엘 갔을 때 성막 모형 바깥에서 보니까 폴짝 뛰면 그 안이 보여요. 회막 안에서 제사장이 활동을 하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살아있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살아 있는 인간은 회막의 기구를 만지지 못하게 해요.
왜? 죽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씻는 거예요. 손과 발을 씻어야 해요. 제물을 씻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씻는 거예요. 제사장 씻으라고 물두멍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바들바들 떨면서 문 열고 회막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히브리서 9장 2절에 “예비한 첫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라고 되어 있잖아요.
여기 상과 진설병이 있는데 상과 진설병이 뭐하는 도구냐? 그 역할이 뭐냐? 출애굽기 26장에 나옵니다. 33-35절에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성막 입구가 동쪽이 입구에서 보면 북쪽은 오른쪽이 되겠지요.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할찌며” 이렇게 배치하고 정중앙에는 분향단을 놓습니다. 이 말은 뭐냐? 등대와 그리고 떡 열두 개가 놓인 떡상이 하는 일이 뭐냐? 길을 비켜라, 하는 거예요. 길을 비켜라. 등대와 떡상이 마주 보면서 “이쪽 방향입니다. 이쪽 방향이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간 과정으로 놓여 있습니다.”
분향단 거쳐서 커튼 열면 진짜 하나님을 만난다는, 그래서 그 안은 조각된 천사, 노골적인 비역사적인 존재 천사,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천사, 거기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하는 그쪽으로 가기 위해서 양쪽으로 비켜서 있게 놓는 그 기능을 떡상과 등대가 하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제사장이거든요. “십자가에서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처리됨,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해서 ‘이미 너는 죽었어’라고 처리된 자로서 살아 있는 자는 옛언약의 성소 안에서의 기능은 어떤 기능, 곧 비역사적 존재라고 치고 어떤 기능을 합니까?”
그 점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장 12, 13절에 나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는데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에 보니까 사도 요한의 위치, 또 사도 요한이 증거하는 일곱 교회의 위치가 인자가 환히 보이는, 인자의 그 인자 되심을 중앙에 두고, 그 바깥에 배치되는 그 역할을 일곱교회가 해야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교회를 증거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장소를 비워줘야 돼요. 텅 빈 공백이 되어야 해요. 어떤 분의 증인이 되어야 해요. 내 증인 말고 어떤 분의 증인 노릇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상은 뭐냐? 상은 성막의 북쪽에 있고 열두 개의 떡이 여섯 개씩 나누어져서 쌓여 있다고요. 그것을 안식일 때마다 교체를 해줘요. 곰팡이 피면 안되니까.
그 상에서 바로 빈공간을 바라보는 거예요. 열두 개의 떡이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열두지파, 완성된 이스라엘, 역사적 이스라엘 말고, 그것은 망했고, 비역사적 이스라엘로서 완성된 이스라엘이 할 일은 상에서 빈공간에 계시는 인자의 모든 다 이루심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걸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오늘날 일곱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옛언약 속에 있는 성소의 기구가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이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말입니다, 완성이 된 모습으로. 사도행전 20장 28절에도 교회를 소개할 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언약궤지요. 언약궤가 남아 있습니다.
자, 언약궤는 마지막 최종적인 공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역사 속에 있는 공간이 아니고 언약궤는 희한하게 역사의 모든 물리법칙에 관여하지 않는 특수한 공간, 그게 언약 속의 공간입니다. 그 언약 속의 공간에 대해서 오늘 히브리서 9장의 말씀대로 전하겠습니다. 4, 5절에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천사)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언약궤 안의 세 가지를 한 마디로 해서 “너는 죄지었고, 죄지었고, 죄지었고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너를 구원하는 그것도 죄짓는 일이고.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공로만이 죄를 사해주는 그 기능을 하는 당사자, 존재자가 바로 나 하나님이다.”라는 뜻이에요. 하나님 자체를 증거 하는 거예요. 너는 죄짓고, 그 죄를 씻어주는 그분이 바로 진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에요.“그러니까 제발 좀 너 자신에 대해서 미련해라. 미련곰탱이가 되어라. 똑똑하지 말고.”
제가 TV를 잘 안 보는데 우연히 보는데 <탑건 2:매버릭>이라는 영화를 해요. 잘 된 영화라고 상까지 받은 대단한 영화라고 하는데 끝부분만 봤어요. 얼마나 복음적인지요. 적의 전투기에 공격을 받아서 주인공이 탄 전투기가 고장이 났어요. 그래서 항공모함에 착륙을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비상착륙을 해야 하는데 엔진도 멈춘 상태입니다.
그때 주인공(톰 크루즈)이 뭐라고 무전을 하는데 그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바리케이드를 준비하라고 한 거예요, 바리케이드. 주인공이 탄 구식 전투기가 F18인데 모든 작동장치가 다 고장났어요. 그런데 바리케이드 쳐놓고 착륙한 거예요. 그걸 보면서 마태복음 5장이 생각 안 날 수가 없었어요. 18,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아하, 십자가에 달리신 그 하나님이 천국 갈 자기 백성은 구원될 자가 어떻게 설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고장난 기계, 몽땅 망가진 기계, 아무 쓸모짝이 없는 기계인데 성령의 책망에 낚일 때, 보혜사에 낚일 때 ‘네가 율법이 아니라 이제 성령 안에서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성령으로 인하여,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낚일 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게 새언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교회 나왔습니까? 성경에서 똑똑하게 많은 정보를 알아서 그걸 채워서 그것으로 믿어보려고, 천국까지 가려고 시도한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러니까 오직 주님의 공로만 보이는 이 사실이 구원된 자요, 주님의 증인 된 자라는 사실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