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있는 언약
2024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7-9
(8: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8: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언약에 흠이 있다’는 발상은 급진적으로 느껴질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흠이 있다면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만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인간 뿐만 아니라 천사나 하나님마저도 성처를 받고 약점을 보이고 죽습니다.
즉 이 세상은 그 누구도 살아서는 안 되는 공간인 겁니다. 이런 공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들고 오셨다는 것 자체가 도발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24에서는 벌써 하나님께서 인간을 생명에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토지에게 하나님께서 죽기를 바랬던 겁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생명의 기회처럼 간주되도록 언약, 곧 율법을 알려주신다는 것은 인간을 버린 하나님의 일관성과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기획을 생각하셨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언약에 흠을 넣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언약에서는 그 흠 자체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생명이 생산되게 하시는 겁니다.
언약에 흠이 있다는 것은 언약에 흠을 실으신 당사자이신 하나님 자체에 흠이 있다는 말입니다. ‘흠 있는 하나님’ 이것은 경건을 자처하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흠 있는 하나님’으로 이 세상을 찾아오신 이유는, 인간들이 ‘흠없는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간주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완전을 추구하는 악마의 통제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세상은 그 어느 구석 할 것 없이 악마의 점령지입니다. 악마의 세력권 안에서 벗어날 수 없이 그 악마의 사상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바로 이런 겁니다. “흠 있는 인간은 흠없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 자신에게 ‘흠’이 있다면요? 하나님께서 약점을 노출시켰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점 노출이 악마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노출이었다면 말입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후속 조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 선악을 아는 과실은 유난히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까지 합니다. 마치 “아직도 안 따먹었니?”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뱀이 낙원에서 설쳐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약점을 주목했고 그리고 인간에게 선악과 따먹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그 성공이 악마가 덫에 걸려든 꼴입니다.
도대체 인간에게 마지막 중요한 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마지막 소중한 분이 왔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필요치 않는 인물이라고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그 예수님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요?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의 뜻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악마의 점령지에서 인간들은 흠있음을 흠없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애씀은 역사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져야 되게 됩니다. 흠있는 언약이 인간이 사는 공간에 들어와서 흠없기를 소원하는 인간과 계약은 맺지만 인간쪽에서 있는 악마의 수작으로 언약의 흠만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망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 역사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유대나라 사이에는 악마는 또다시 역사를 이어보려고 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두 개의 기획을 준비해 두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흠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입시켜 그들의 역사마저 이 세상에서 멸망케 하는 기획이 그 첫 번째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모세의 경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다 죽여버리는 취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노아의 식구는 살아 났지만 방주 안에서 살아 있기에 땅에서는 실은 이미 죽은 식구입니다. 그 식구들이 땅에 도달하자 노아에서 저주의 자식 노선이 개시됩니다. 함과 가나안의 족보가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 인간 세계에서 차마 그럴 수 있는 일을 행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겁니다. 이는 기존의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일방적으로 자기 혈육 유지를 바탕으로해서 나온 믿음인가를 말해줍니다. 어느 가족이든 늙은 부모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그다가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식이나 어린 손주가 아프면 눈에 뵈는게 없이 됩니다.
이게 평소의 인간 내부에서 활약하는 믿음입니다. 무조건 내 자신을 살려내고 보겠다는 겁니다. 즉 소중한 것이 본인이 모르게 이미 안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이삭의 경우, 하나님께서 지목한 아들(야곱)은 버리고 하나님께서 버리고자 하시는 아들(에서)를 선호했습니다. 하나님의 취향과 맞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경우, 그는 감히 하나님께 싸웠습니다. 죽으라고 싸웠습니다. 거기다가 튕겨져 나와서 환도뼈가 나가서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21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흠있는 자로 알려주는 그 지팡이가 하나님의 흠에 같이 참여된 자됨을 말해주는 겁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지팡이가 나옵니다. 이는 보이지 않으신 주님이 친히 모세를 이끄는 목자라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출 4:2-3)
모세와 지팡이를 놓고 하나님은 지팡이를 주목하시는 겁니다. 모세보다 지팡이의 존재가 주도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 뒤 모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세 전체가 저주받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흠있음을 드러낸 언약은 역사와 더불어 소실됩니다. 그리고 그 흠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자체에게도 드러납니다.
도마가 만졌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그러합니다. 흠을 만저본 도마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하나님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이미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힘에서 만들어진 결정체라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나온 그 흠으로 조성되어서 입에서 달지만 속에서 쓰고 불편한 그런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3강-히브리서 8장 7-9절(흠있는 언약)241124-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7-9절입니다.
히브리서 8:7-9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여기서 언약이 두 개라는 겁니다. 언약이 두 개라는 것은 처음 세상을 만들었던 그 근원, 원천에 대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던 그 이해, 하나님이 천지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그 이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자체가 이미 아담의 후손이고, 아담은 마귀로 인하여 하나님이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어떤 희귀병에 빠졌어요.
어떤 희귀병에 빠졌느냐? 하나님이 알고 있던 창조 전의 원천, 근원과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 된 인간들이 하나님과 그 창조를 이해할 때의 그 원천이 서로 갖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병에 걸렸는데 악마가 이해하고 있는, 악마가 인간에게 넘겨준 정보, 알려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칙이라고 그렇게 여기고 인간들은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인간에게 신이라는 것,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벌써 왜곡되어서 잘못된 인식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두 개를 주는데 하나는,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그 점을 들춰내기 위한 언약. 두 번째는, 언약 뒤에 숨어서 그 언약 외에 다른 언약은 인간들에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첫 번째 언약에 의해서 구원이 실패했음을 분명히 했을 때 그때 투입되는 언약, 이게 바로 두 번째 언약인 겁니다. 언약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하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을 때 어떤 질문을 주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답을 요구했어요. 질문을 주지 않고 답을 요구해버리면 인간으로서는 자기 자체가 답이 되어서 자기 자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식의 질문을 일부러 만들어낼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시험을 치는데 선생님께서 “자, 시험 쳐라.”하고 주는 시험지에 문제가 아무것도 없어요. 선생님이 “시간 한 시간 줄 테니까 답 적어내라.” 뭐 질문을 해야 답을 하죠. 질문이 없는데요? 질문이 없는데 답을 내라? 그러면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그러면 답은 뭐냐? ‘답은 내가 답변하기를 원하는 그것이 답이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거든요.
‘질문을 하지 않는데 우리보고 답을 내라? 그러면 내가 답변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나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답일 거야.’라고 해서 자기가 답으로 시작해서 내가 답이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그 질문을 가지고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잖아요.’라고 이렇게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하겠죠.
그것을 첫 번째 언약이 한 거예요. ‘인간은 왜 만들어졌을까?’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모세 언약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고 그걸 만들어내는 거예요, 성경 보고. 그게 모세 언약, 모세 계약이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걸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이 범죄 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났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고, 완전한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는 흠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한 것, 마귀와 한통속 돼서 죽게 된 것을 불쌍히 여겨 대신해서 죽으시는 하나님의 희생을 준비하셔서 우리를 건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택한 이스라엘 되게 해서 천국 백성되게 했다’라는 것이 이스라엘 쪽에서 만들어낸 질문과 답의 연결성이에요.
그들이 결정적으로 그들 답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쪽에는 흠이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흠이 없다.’라는 이것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장담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악마의 생각이라고요. 방금 이야기한 그게 성경을 보고 착안한 악마의 생각이에요. 악마가 성경 도사거든요. 인간이 성경을 보면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기껏 그 정도가 다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7절에 보면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이거에요. 2000년 동안의 모든 인간 다 동원하고, 2000년 동안의 모든 신학자의 신학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추정-1274), 칼빈(Jean Calvin, 1509-1564), 루터(Martin Luthe, 1483-1546), 칼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등등 유명하다는 신학자들 총동원되고, 철학자들까지 총동원해도 그들이 밝혀내지 못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첫 언약이 흠이 있다는 거예요. 첫 언약이 흠이 있다. 인간에게 흠이 있다는 것은 인간들이 기껏 생각해 낸 거지만, 하나님 자체에 흠이 있다는 이건 불경스러운 생각이라서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인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인간들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자들이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의 압제에서 고생하는 것은 조상과 우리의 잘못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대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성경, 시편의 성경대로 선하시고 올바르고 하자가 없고 항상 옳게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흠이 없다.’ 그것을 그들의 존재를 통해 끄집어낸 정답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체에 흠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건 상상도 못 하죠.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치고 상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흠이 있는 것은 악마가 흠이 있지 하나님이 흠이 있을 수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흠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흠 없이 와야 된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거예요.
구약 다니엘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구름 타고 오신다, 영광스럽게.’ 그런 분이 흠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 속에 오신 하나님은 그들 보기에 흠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용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기고 쓰레기처럼 버렸어요. 버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엉터리 정답을 냈다면 이번엔 이방인들이 그 유대인들의 절차를 또 밟아요. “유대인들에게 버려진 예수를 우리가 받아들이겠다.” 그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심사숙고해서 예수는 믿을 필요가 없다고 버렸는데 이방인들이 무슨 재주가 있고 무슨 지혜가 있어서 그걸 거둬들입니까?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왜? 유대인들이 선배니까요. 후배가 선배 따라가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연세 많은 아버지가 요양병원에서 골골하다가 돌아가셨다. ‘아이고 아버지 이제야 돌아가시는군요. 보람상조하고 연락해서 가시는 길 고이, 휘리릭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돼요.
그런데 자식이 폐렴 걸렸다, 손주가 몸 아프다? 눈 돌아갑니다. 미쳐 버립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이게 우리 믿음입니다. 이게 우리 믿음이에요. 그동안 뭘 믿었죠? 그동안 뭘 믿었습니까? 내 자식 내 손주 아픈 거, 못 참습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지금 애 낫는 게 급선무에요.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내 자식은 살려내고 싶어요.
이게 감추고 감췄던 우리 믿음이에요. 하나님은 우리 믿음에 속을 의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안 받아요. 어떤 아빠가 부산부터 서울까지 걷습니다. 등 뒤에 글씨 써서 붙이고 터벅터벅 대장정을 해요. “우리 딸내미 불치병에 걸렸는데 약값이 46억입니다.” 유전자 치료해야 돼서 해외에서 오는 약값이 그렇게 비싸요.
자기 딸내미가, 그 3살 먹은 애가 근육이 빠지는 병에 걸렸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딸 살리고 나 죽자, 그런데 죽을 때 죽더라도 아빠 노릇하고 죽자.’ 해서 생각한 것이 뭐냐? 호소하는 거예요. 전 국민에게 호소 하는 겁니다. 그 아빠의 직업은 목사예요. 깨끗한 우리 딸내미를 위해서 내가 온갖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딸내미가 깨끗합니까? 목사가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자기 딸이 깨끗하다고?
어떤 형사가, 범죄자가 모아놓은 그 돈에 손을 댑니다. 왜냐? 자기 자식이 불치병에 걸려서 매달 약값이 400만 원씩 나갈 때 ‘아버지로서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내 자식만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더러운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 형사가 그 더러운 돈에 손을 댔어요. 이건 영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얼마나 허다하겠어요. 명분과 구실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망가지면서도 정당하게 망가졌다는 구실을, 어떤 고상한 것을 명분으로 설정하고 자기는 거기다 존재 의미를 두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뭐 믿겠습니다, 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나는 여태껏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믿었습니다.’라는 그게 인간들이 하는 믿음이에요. 그 믿음에서 성경을, 창세기와 레위기를 해석해 보라고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는 죄가 많은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셔서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이런 아이디어를 정답인 줄 알고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걸 정면으로 뒤엎어 버립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다는 거예요. 흠이 있는 걸 내가 줬다는 겁니다. 그 흠이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을 벌주는 거예요. 아, 이건 상상도 못 하는 거죠.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거기 섞여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성경을 참조해서 ‘아마 하나님은 이럴 것’이라고 여겼던 그 더러운 세계에 하나님이 끼어들었으니까 “나 너한테 벌 줄 거야.” 아버지가 아들에게 벌주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벌준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아들부터 비롯해서 하나님이든 아들이든 인간이든 이 세상은 어느 누구도 살아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살 가치가 없게 만드는 공간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여기 어떤 선택지도 없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해?’ 우리가 이 살아서는 안 되는 이 공간에서 하루 이틀 살아가고 있다는 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또 살았네. 이게 무슨 조화지? 하나님도 죽어야 되는, 하나님도 일찍 죽으신 이 세상에서 내가 왜 또 살아가고 있지?’ 여기서 우리는 어떤 답변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은 인간에게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질문하고요, 답변도 하나님만이 답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거기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마치 아는 것처럼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흠 있는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유는 간단해요.
흠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에덴동산에서 너희들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 를 완전히 따먹도록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 이유를 네가 알아? 따먹지 말라고 하면서도 어떤 안 따먹을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준 약점이에요. 하나님이 약점을 노출시킨 세계가 창조된 세계예요.
그래서 약점이 되었고, 그리고 인간도 하나님의 약점으로 만들어진 거예요. 악마가 와서 인간을 건드려도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인간, 마치 그 약점을 하나님이 부추기는 것처럼 그 선악과나무는, ‘저걸 왜 따먹어?’ 이게 아니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마치 네가 언제까지 안 따먹고 버티는가 보자’는 식이에요.
하나님의 약점으로 만들어진 존재, 그게 인간이라는 존재예요. 악마가 덥석 물었죠. ‘걸렸다, 인간에게. 이 악마야.’ 악마는 덫에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악마는 완전한 존재라고 자처하기 때문에요. 악마의 주장은 이겁니다. ‘신은 완전해야 된다.’ 아닙니다. 신은 완전하면 안 돼요. 이게 이미 타락한, 그래서 희귀한 정신병, 희귀병에 걸린 인간들이 생각해 낸 신이 완전한 신이에요. 그걸 하나님이 엎어버립니다.
인간은 ‘완전한 신을 내가 앎으로서 나도 완전에 합류할 수 있다’는 그런 기대와 희망을 갖는데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런 고질병으로, 정신병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내 흠에, 내 약점에 합류하라.’ 내 흠에 합류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불편함에 너도 같이 참여해서 너도 하나님의 불편함과 함께 살기.’
우리는 내 불편을 떼어 내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임하면 ‘하나님의 불편에 함께 살기’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내가 불편해요, 내가. 나보다 더 불편한 존재가 또 없어요. 불편한 존재는 나밖에 없어요. 이 덩어리가 불편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 갈 백성에게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약점이고 하나님의 흠입니다.
그게 진리이고, 그게 생명이고 그게 소중한 거예요. 주님께서 소중한 것을 마지막으로 여기게 하고, 그 소중한 마지막 것으로 인하여 네가 인간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떼어 내는 작업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이 정도 했으면 성공했잖아.’ 그걸 떼어 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중함, 그것도 마지막 소중함뿐이고 그 마지막 소중함은 바로 하나님의 흠 안에 우리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점 안에 끌어당기시는 겁니다.
그 방법을 이제 말씀으로 하는데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악마가 가르치는 말씀은 이겁니다. ‘말씀은 입에 달다. 네 속에서도 달다.’ 이게 악마가 이야기한 거예요. 악마의 해석법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말씀은 달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너는 죽었어. 너는 이제 죽었어. 네 속에 들어간 말씀이 너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너의 본색을 드러낼 거야. 결국은 너를 죽일 거야. 오케이? 왜? 너는 엉뚱한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치 않는 믿음이 네 안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네 믿음을 다 갉아먹을 거야. ‘하나님은 선하시다.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갉아먹을 거야.”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 가보면, 교회가 하는 작당들을 보면 아까 제가 말한 악마가 인간에게 가르쳐 준 거, ‘성경 말씀 그대로 말씀 그대로 믿어라. 그러면 너는 산다.’ 악마가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성경을 보고 인간이 자기 이성으로, 지식으로 정리를 해보니까 ‘하나님은 선하시고 잘못은 우리가 잘못했고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 많아서 구원한다.’ 이거죠. 그걸 믿는다는 거예요. 그걸 믿어서 생긴 단체가 교회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다니느냐? 살고 싶어서, 말씀으로 살고 싶어서. 저는 그것을 다섯 자로 표현합니다. ‘마약 공동체’ 도대체 언제까지 악마한테 농락당할 거예요? 성경에서, 특히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하나님이 던진 질문은 딱 하나였습니다. “너희들은 이 하나님의 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질문이었어요. 하나님의 흠,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들은 흠이 없기를 바랐어요, 악마의 조종에 따라서. 그런데 빌립보서 3장 6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비로소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자기는 어떻게 살아왔냐 하면, 현재 완벽하기 짝이 없는 이 유대 나라의 하나님관(觀)에 대해서 자기는 이것을 사수하는 책임을 지는 것, 그리고 이것이 완전한 하나님에 완전하게 봉사하고 순종하는 뜻이라고 봐서 교회를 핍박했어요. 물론 그 교회는 지금의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으로는 어떻게 되느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거예요. ‘율법으로 흠이 없던 자였다.’ 자였,었,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으로 흠이 없다고 자부하면서 그것으로 구원 받아내는데 자신만만했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새 사람 되었잖아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뭐냐?
하나님의 흠의 결정체에요. 하나님의 흠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없어야 될 존재가 새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비로소, ‘흠 없음이 바로 흠이었다는 것, 이게 바로 마귀의 작당이었다.’라는 것을 비로소 증거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하나님이 준 예수님의 흠 안에서, 하나님의 흠 안에서 둘러싸여서 살아가고 있다고 그것을 자랑하죠.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인간은 하나님을 못 박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못 박혔어요. 그래서 생긴 것이 두 번째, 바로 흠이 없는 두 번째 언약입니다.
첫 번째 언약이 없다면 두 번째 언약이 나올 수가 없죠. 첫 번째 언약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와 악마의 사주가 없다면 두 번째 언약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의 절묘한 전략이었어요. 절묘하기 짝이 없는 전략이었습니다. 악마가 얼마나 완벽한 존재인지 인간에게 심어준 악마의 마음은요, 그래서 성경이든 불경이든 신에게 찬양하는데 정신 팔리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찬양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니까 우리는 완전자가 맞죠?’라고 자기 긍정을 위한 빌미로서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바로 두 개의 기획이었어요. 기획, 프로젝트(project)에요. 하나는, 하나님 자기 아들을 악마가 점령한 점령지에 보낸다, 이게 첫 번째 기획이고요.
두 번째는, 그 첫 번째의 그것을 몽땅 박물관으로 만든다. 기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박물관으로 ‘너희 옴팍 잠겼어. 잘됐다. 너희는 완전히 덫에 갇혔어.’ 그 덫 자체를 지옥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으로 만드는 기획이에요. 거기서 누가 빠져나오느냐? 거기서 자기 아들을 거기서 빼내는 그것이 두 번째 기획입니다.
그래서 그 기획이 히브리서 9장 27절, 28절에 나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첫 번째 언약, 프로젝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 데 그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선택지가 없어요. ‘살까, 죽을까?’ 이것은 시건방진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살까, 죽을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내 딸내미 어떻게 살까?’ 그런 거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일단 이미 정해진, 결정된 사항이에요.
태어났습니까? 죽으세요. 태어났으면 죽어야 돼요. 이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결정된 거예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받으세요. 그다음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두 번째 기획이 등장해요. 두 번째 프로젝트, 두 번째 나타나는 거예요, 두 번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획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상에 준비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의 단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로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요. 없는데 유대 나라가 나타나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를 그들이 이어가겠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먼저 세례 요한을 보냈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서 “누가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계속 끌고 가? 역사는 끝났어.”
그게 뭐냐면 “회개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인간의 역사는 끝났다고. 왜 네 마음대로 끌고 가?” 오늘 설교는 이거에요. 노선입니다. 흠 없는 노선. 두 개의 노선을 만드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었는데 하나는 역사라는 노선을 만들고요, 역사라는 노선은 모든 역사를 대표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었고, 그 이스라엘 역사를 끝장냄으로써 역사는 이제 끝났어요.
끝나고 다른 활주로, 두 번째 기획이 바로 역사가 끝난 지점에서 예수님이 새롭게 성령으로 시작된 노선을 또 하나 만들어요. 그 두 번째 노선은 어느 정도냐 하면, 세례 요한의 외침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한테 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이렇게 해요. 아주 독한 욕설을 날립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즉 “너는 끝났어, 역사에서 태어났어? 그러면 진노 받으세요. 그러면 저주받으세요. 마귀와 한통속 된 조상의 후손이면서 뭘 생각해? 뭐 우리를 구원하고? 그건 마귀가 가르쳐 준 거야.”
끝났어요. “임박한 진노를 누가 피하라 하더냐” 여기서 “너희들이 뭐 아브라함 조상이라고?” 할 때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굉장히 재밌어요. 마태복음 3장 9절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러니까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라고라고? 이 돌멩이도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한다, 이 돌멩이를.”
그래서 두 번째 노선은 뭐냐? 돌멩이를 아브라함 자손 만드는 작업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자들이 누구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입니다. 노아 때는 모든 인류 다 죽였습니다. 깔끔하죠. 그냥 다 죽였어요. 노아도 죽었어요. 노아도 죽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다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확실합니다. 땅은 하나님이라도, 인간이라도 어느 누구도 살 수 없는 공간. 그런데 노아는 살았네? 그건 언약 때문에, 노아 언약 때문에 살았다. 그러니까 “노아야, 너희는 실은 죽은 것이다.” 이 말이에요. “무흠한 언약이 살아난 것이지, 흠 있는 데서 흠 없겠다고 노리는 네가 살아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려운 말이에요. 참 어려워요. 그래서 노아에게서 저주가 나오잖아요. 함과 가나안을 저주하잖아요. 왜? 땅에서 계속 사니까 계속 저주가 나와야죠.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이에요. 자식이 죽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사랑하는 자식입니다. 폐렴같은 것은 걸리지도 않았어요, 멀쩡해.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버렸어요. 하나님의 지시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아버지가 자식 죽이는 것이 바로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이걸 역사 속에서 네가 행하라는 겁니다. 무슨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에요? 악마의 이성을 갖게 된 인간 속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게 도리지, 부모가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아예 들어있지를 않아요. 세 번째 이삭, 이삭 같은 경우에는 취해야 될 아들을 버리고 버려야 될 아들을 취해버렸어요.
누가? 이삭이. 야곱을 취해야 되는데 야곱은 버리고 에서를 취해버렸어요. 그게 이삭입니다. 그런데 누가 개입했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했죠.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정답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주제에 뭐 구원을 받아요? 천국을 가? 더 살아야 하겠다고요? 네 번째 야곱, 야곱은 하나님하고 한 판 싸웠던 자입니다. 축복을 준 자를 죽이려고 달려든 자예요. 개기다가 튕겨 나와 가지고 환도뼈가 나가서 다리를 절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절묘하게 그 대목을 바로 야곱의 새 생명의 본질로 간주합니다. 새 생명의 근원이 야곱에게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흠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흠 때문에 네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야곱은, 21절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지팡이 머리’ 야곱에게 지팡이가 왜 필요하죠? 내가 하나님한테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계속 그 흠을 새로운 근원, 원형으로 생각해서 흠이 만들어낸 흠의 결정체로서 야곱이 새롭게 된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흠을 갖고 있습니까? 다섯 번째 모세, 모세는 더 황당합니다. 출애굽기 4장에 모세가 양치는 목부니까 지팡이를 들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네 지팡이를 보라는 거예요. 모세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보고 하는 말이 “네 지팡이를 봐라. 나는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지팡이하고 상대할 거야. 네가 지팡이를 들고 있다고 생각하나? 지팡이가 널 데리고 다니고 있다.” 하는 겁니다. “목자는 네가 아니라 그 지팡이, 보이지 않는 목자의 지팡이가 너를 인도해야 해.”
그래서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3절) 라고 해서 던지니까 지팡이가 뱀이 되고 말았어요. 네가 출생한 그 땅이라는 것은 이미 뱀이 지배하고 점령한 땅이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때 인간은 빠집니다. 하나님과 악마의 싸움이에요. 인간이 낄 자리가 없어요.
뭐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요? 자기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고, 네가 낄 자리도 아닌 데 거기에 왜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끼는 이유가 뭐냐? 악마에게 사주를 받아서 그래요. 네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그것은 마귀의 사주예요. 자기 자식 아픈 것보다 덜한 그것이 예수예요? 자신에게 손해난다 싶으면 언제든 팽개칠 그 믿음이 믿음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런 믿음에 하나님은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믿지 못하는 존재인 것, 하나님이 내 믿음은 안 받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믿음과 소망을 안 받아요. 끄집어내 놓을 것이, 드릴 것이 없어요, 드릴 것이. 그냥 주께서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미쳤어. 내가 왜 또 살아있지?’ 이런 거요.
그다음에 6절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내 멀쩡한 손바닥? 이게 어떤데요? 괜찮은 손바닥인데?’ “넣어보라니까!” 시커먼 연탄 속에? 연탄 말고 네 품속. 깨끗한 손, 그리고 품속, 오늘 아침에 샤워도 했겠다, 이 깨끗한 품속에 넣었다. “빼 봐!” 저주가 한껏 묻어 있는 손, 손이고 안이고 바깥이고 전체가 저주받아야 합당한 몸,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기획은 뭐냐? 언약이 이 땅에 왔다. ‘너 이 땅에 살지? 언약도 땅에 왔어. 땅에 온 것들은 다 흠 있자. 우리가 그 흠을 만끽하자.’ 그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 뜻. ‘너 안 망가지고 싶지? 내가 앞장서서 망가뜨려 줄 게. 같이 망가지자.’ 이거다, 이거, 이거거든요. 이게 진리잖아요, 이게! ‘구원 같은 소리 하지 말라. 너는 죽어야 해. 나랑 같이 죽자.' 이거다 그 말이지요.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면 모세가 자기 아들을 할례를 안 했다고 하나님께서 아버지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모세는 출생해서 바구니에 실릴 때부터 이미 죽은 자였어요.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지팡이처럼 옆에 딱 붙으셔서 모세와 그리고 모세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흠 있는 언약으로 이 세상 인간이 끄집어내는 어떤 신학, 어떤 발상도, 성경해석도, 교리도 다 악마의 교리고 신학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를 가야지요. 마귀가 그동안 신학교에서 뭘 가르쳐 왔는지 알아야지요. 이렇게 돼버리면 인간은 흠 있는 언약으로 인하여 그 흠에서 탈출할 길이 없습니다. 탈출할 길이 없으니까 악마를 당회장으로 모시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 11장 13, 14절에 나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광명의 천사, 빛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이걸 알 길이 있습니까? 교회 당회장으로 와서 사람 끌어모으려 하는데 고객들 기분 맞춰줘야 할 것이 아닙니까? “구원받고 싶어요?” “받고 싶어요!” “내가 시키는대로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깔끔하게 끝났지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아멘!”
며칠 지나서 “목사님, 믿음이 떨어졌는데요.” “그것은 정성이 부족해서 그래요, 정성이. 기도가 모자라고 돈을 너무 밝혀서 그래, 돈을! 목돈을 내라고요, 하나님 섬기는데.”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커진 것이 뭐냐? 신천지. 신천지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 싶어서 환장한 단체에요. 그 신천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일반교회에서 나왔지요. 똑같지요.
인간은 어떤가? 인간은 도저히 벗을 수 없는 희귀병에 걸려서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식이에요. 악마가 씌워준 그 선글라스를 우리 힘으로 벗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정리하면 네 글자입니다. ‘대책 없음’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는데 고리도후서 4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커먼 선글라스를 꼈는데 복음의 광채가 어떤 효과가 있느냐? 그 검은 선글라스를 뚫고 눈부신 광채를 보이게 하는 그런 효과로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두 번째 기획이에요. 그 두 번째 기획의 수혜자가 요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도마인데요. 주님께서 도마에게 내가 구주인 것을 보여주는 방법은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는 거예요.
흠이지요. 하나님이 된 통으로 인간에게 맞아 죽은 흠이 있잖아요. 창 자국을 보여주고, 못 자국을 보여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간 손에 죽었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때 도마가 하는 말이 28절에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 바뀌었어요, 하나님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이에요,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 악마가 끼워놓은 그 모든 선글라스, 신학과 교리라는 선글라스를 진짜 뚫는 것은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에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구원 안 해줘야 돼요. “하나님, 저 구원 안 해줘야 해요.” 창 자국 못 자국이 전부 다 같은 종류의 인간들 때문에 발생 된 거잖아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갖다 버린 예수님을 그들의 신학으로 연구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행전 13장 48절, 저는 이 말씀 보고 놀라버렸어요. 이게 진짜 사실인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47, 48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 때문에 제가 놀랐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이 실패가 없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흠 자체가 실패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점이 실패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점이 유일한 성공이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이 약점을 들고 왔기 때문에 인간은 그 약점을 보고 하나님을 기피 할 거예요. 그런데 그 약점에서 나오는 그것을 외면해야만 악마에 사로잡힌 인간은 나답거든요. 우리 자신다워요, 우리가. 우리가 마귀에서 태어났으니까 약점이 있는 것이 싫잖아요. 나한테 도움이 안되는 것을 왜 믿어요?
그런데 그 약점에서 나오는 복음의 광채가 우리에게 올 때 우리에게 있을 수 없는 기쁨이 나오고 찬송이 나온다는 말은, 이게 원인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만이 하나님의 흠과 약점과 매치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성공하셨다, 그게 두 번째 기획이다 그 말이지요. 거기에 무슨 신학이 필요하고 교리가 필요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천국 갑니까?” “몰라!”
끝으로 한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오랜만에 장례식에 가면 일가친척들이 다 모였어요. 그중에 수십 년 동안 안 만난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각자 산다고. 어떤 분은 30년 만에 만났고요, 조카 같은 경우에 어쩌다 결혼식에도 참석 못했다면 어릴 때 보고 나이 40 되어서 만난다면 30년 만에 보는 거예요. 혹은 4년만에도 만나고요. 그래서 보면 누군지 몰라요.
“누구십니까?” “제 딸입니다.” “아, 시집간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때 제가 참석을 못했습니다.” 이렇게 돼요.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자기는 살아있다는 거예요. 장례식에 왔다가 “다음에 또 봅시다.” 하면 되는 데 장례식에 와서 술도 한 잔 먹고는 같이 살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어요. 촌에서 올라와서 “아재요! 제가 조그마한 일을 시작했는데요.”로 시작해서 결국은 “보험이나 하나 들어주세요.”
애가 뭐 어쩌고저쩌고, 또는 “정수기 하나 들여놔 주세요.” 그럴 때 성도로서 이야기할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조카야! 네 눈에는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아니야. 나는 돌멩이야. 그냥 있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는 거야. 그냥 있는 것. 나도 이상해. 왜 살아있는지 나도 이상해. 너도 그냥 대충 살다 죽어. 살아 있음, 여기서 ‘살아’ 이걸 빼고 그냥 죽어. 그냥 ‘있음’으로 살다가 가는 거야. 아, 장례식장에 왔는데 되게 달라붙네.”
먼 친척이 오랜만에 본다고 자기 사연 구구절절 두 시간 동안 떠들어놓고는 결국 마지막에는 뭐 하나 사달라 하는 그 이야기죠. 제가 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가 그만큼 위험해요. 정말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그 십자가라는 지팡이로 나를 때마다 패주지 아니하면 말씀 세계 안에서 패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꾸 편하게 살려고 하는데 십자가와 더불어 불편하게 살기,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있는데, 살 가치도 없는데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주님 증거, 흠 있는 주님 증거하고, 이 땅에서 같이 고생하신 주님 증거하라고, 그분이 영생이라고 저희에게 살게 해주셨사오니 우리 안에서 날마다 말씀이 후려패는 것 가운데서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고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