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십자가의 그림자

아빠와 함께 2024. 11. 17. 18:45

십자가의 그림자   

2024년 11월 1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5-6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8:6) 그러나 이제 그(그리스도)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5.  who serve a copy and shadow of the heavenly things, just as Moses was warned [by God] when he was about to erect the tabernacle; for, "SEE," He says," THAT YOU MAKE all things ACCORDING TO THE PATTERN WHICH WAS SHOWN YOU ON THE MOUNTAIN. "
6.  But now He has obtained a more excellent ministry, by as much as He is also the mediator of a better covenant, which has been enacted on better promises.

그림자란, 폭이나 두께가 없고 이리저리 늘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잡을려고 해서 손에 잡히지가 않습니다. 즉 인간이 그림자를 다루려고 해도 다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림자가 실체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존재가 천사입니다. 창세기 32: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 만남이 있고 난 뒤 야곱은 얍복강에서 본인도 ‘이스라엘의 그림자’가 된 야곱이 됩니다. 즉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하늘의 할 일을 반영하는 그림자입니다.

그 하늘의 할 일이란 같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악마와 그 귀신들과 싸우는 전쟁터 상황으로 강제 징집당한 형편으로 사는 겁니다. 이러한 그림자로서의 규정은 인간은 자체적으로 실체 노릇을 할 수 없음을 언급하는 겁니다. ‘∼의 그림자’로서 사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계획이 용납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실체로서 이 지상의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반면에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누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자신의 심성을 불어넣어 폭과 두께로 부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마차로 부러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이러합니다. “결국 불확실하고 모호한 하나님 때문에 멀쩡한 내가 손해 볼 상 싶냐?” 즉 인간에게는 자기를 위한 기억들이 누적되어 있어 복음 때문에 자신이 죽을 까닭이 없다고 여깁니다. 세상 교회에서는 설교단에서 다음과 같은 외침을 쏟아냅니다.

“성도라면 성도에 합당한 행위를 보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버리지 못하는 너를 내가 버려주겠다”입니다. 바로 이 일을 일으키는 곳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성막’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목숨이 더러운 목숨인 것을 ‘피’로 표현하십니다.

땅에서 피흘림의 사태가 벌어지면 이는 거룩한 곳을 더럽게 만드는 저주받을 짓이라고 규정하는 하시는 겁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의 피 흘림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땅이 더러운 피가 발생했다고 하나님에게 고자질을 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레위기 17장에서 약속의 땅에 결코 인간 피가 쏟아져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피는 오직 성막을 통해서 받아지는 거룩한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기억’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기억으로 사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영원한 지옥불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인간들은 말하기를, “이번 생애에서 하는 것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고 합니다.

즉 지금 이 생애에서 한 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장래가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가복음 16장 성경 말씀을 통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두 사이의 운명을 나란히 평행된다고 여깁니다. 결코 만날 일이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평면이 아니라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은 바로 예수님의 기억. 예수님의 행하심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기억에 의해서 각 개인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억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나다나엘이란 사람이 빌립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이때 예수님에게 나다나엘에게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창세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의 기억이 예수님의 기억과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성막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은 더러운 피를 깨끗한 피로 교제하는 작업입니다.

천국의 생산은 이처럼 분류로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3:47-50에 보면, “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는 자가 곧 예수님의 기억으로 교체된 자이기에 좋은 고기요 예수님의 기억이 없고 자기 기억으로 사는 자는 나쁜 고기가 됩니다. 바둑두는 자들이 돌을 판에 놓을 때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수들은 전체를 보는 안목이 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인간이든 전체를 다 알고 난 뒤에 선택하거나 결정에 나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전체는 베드로후서 3: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를 다 아시니까 기 불 속에 간수된 자 중에서 자기 백성을 자신의 깨끗한 피로 인양하려 하십니다.

이것은 곧 환경 교체를 뜻합니다. 그 환경 안에서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이미지요 현상입니다. 도피성 안에서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기억을 매일같이 삭제하시고 그것마저 주님의 기억에서 나온 현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2강-히브리서 8장 5-6절(십자가의 그림자)24111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5-6절입니다.

히브리서 8:5-6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지난 시간에 ‘모형’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시간은 ‘그림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어떤 폭이나 두께가 없이 표면을 덮는 이미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얼룩덜룩한 것, 얼룩덜룩한 거니까 그림자 자체는 그냥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죠. 위에 본체가 움직여버리면 그림자도 같이 그 현장에서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이 구약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그림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시간엔 모형이라고 했고 이번 시간에는 ‘그림자 같은 이스라엘 역사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데 그 택한 민족이 마치 그림자처럼 활용되다가 사라졌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 같은 경우가 이스라엘 민족뿐만이 아니고 또 있어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이 세상의 천사들이에요. 천사들도 그림자 같아요.

야곱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움직일 때 야곱은 자기가 그림자라는 생각을 못 하고 자기가 실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야곱 앞에 창세기 32장에 보면 천사들의 떼서리가 나타나요. 저는 이걸 천사들의 보따리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 천사들의 보따리…, 12월 말 되면 철새들이 떼를 지어서 하늘을 가로질러 가잖아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천사들이 이 땅에 있을 때 심심풀이나 놀려고 움직이는 게 아니고 특별한 사명을 받고 움직이거든요. 천사들의 그 떼서리를 가지고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군대라고 하는 것은 할 일이 있어요. 전쟁이죠. 적이 있다, 이 말이죠. 천사들이 이 땅에 출현해서 군대라는 기능을 할 때는 이 땅에 뭔가 전쟁을 해야 할 적군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적군 또한 악마와 그 졸개가 되는 귀신 또한 그림자 같아요.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고 도대체 인간이 다룰 수가 없는 대상입니다.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 천사들이 언약받은 야곱을 만났다는 말은 야곱이라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떼서리, 하나님의 군대 떼서리에다가 강제징집 시키는 겁니다. 강제징집 시킴으로써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데 그 이름이 뭐냐? 이 세상의 각종 신들과 인간들과 싸워 이기는 것 그 이름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에요.

그러면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천사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역할과 기능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야곱이 모든 믿는 자들의 샘플이에요. 모든 믿는 자들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뭐라고 했냐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고 했어요. 똑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을 때 아브라함의 노선에 합류가 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 집니다, 라는 뜻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전부 다 하나님의 그림자로서 살아가는데 그럼 그림자는 반드시 실체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실체는 뭐냐? 장차 오실 하나님,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 실체가 됩니다. 방금 그 두 가지를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굴곡진 인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 가신 윤곽을 따라서 그대로 복제판으로 나타난 인생,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인생입니다.

예수님의 숨겨진 윤곽이 그 당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기에는 그들의 인생으로서 나타난 겁니다. ‘그림자는 실체의 이미지다.’, 보이지 않는 실체 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분명히 현존 인물이에요. 오늘날 우리와 같이. 그리고 그렇게 현존 인물이 될 때 그건 신앙의 노선에 합류된 자라고 규정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합류되어 있죠? 여러분은 어떤 인생에 합류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이 누구의 그림자로서 그분 가신 길을 답습하기 때문에 힘든 인생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악바리처럼 설치다가 된통 당하는 나만의 인생일까요?

성경에서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들이 어떠한 변화와 난리를 치더라도 ‘그들은 그냥 그림자야.’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림자는 본인에 대해서 기억할 게 없어야 돼요. 본인의 행함에 대해서 기억할 게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그 이스라엘을 다루었던 원칙이 있거든요. 그 원칙을 똑같이 오늘날 마지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백성이 될 자에게 그대로 그 원리를 적용시킵니다.

적용시키면 여기에 적용시키는 두 개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 기억을 제거하는 절차, 인간이 자기 하는 모든 행함을 제거하는 절차가 그 하나고, 또 두 번째 절차는 그렇게 제거되고 나면 남는 게 뭐냐? 주님의 기억이에요. 나의 기억을 제거함으로써 ‘내 인생이라는 것이 내 기억을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고 내가 몰랐던 주님의 기억의 스토리, 기억의 이야기였구나.’라는 것이 드러나게 돼요.

그래서 내 기억을 제거하는 그 절차, 그다음에 남아있는 게 뭐냐? 주님의 기억으로서의 우리거든요, 우리가 주님의 이미지로서. 그러면 주님의 기억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절차가 남아있는데 그림자와 실체를 구분하는 절차,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다들 연세들이 있어서 두 가지 하면 잊어버리죠.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일 절차가 내 기억을 제거하는 절차가 필요해요. 요한계시록 20장의 심판이 바로 제거 됐는지를 묻는 그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서 14절 보게 되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는 본인이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 기억한 인간은 행위 책에 속한 인간들이고 이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주님의 기억이 삽입된 적이 없기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기 행한 것만 계속 쥐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쥐고 살아가는 인간의 말로가 뭐냐? 지옥의, 저주의 지옥 불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복음을 못 들은 사람들은 방금 이야기 한 거 인간이 기억대로 살고 기억 유지하면서 죽는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약간 문제 있지만 하여튼 기억대로 간다, 이것뿐이고 이게 인생의 다다. 이거 말고 뭐가 있느냐고 한 거예요. 영화 <글래디에이터 2>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이번 생애에 하는 것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일어난 여러분이 행한 것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누미디아’라는 아프리카의 북쪽 나라가 로마와 전쟁할 때 그 로마한테 버림받은 막시무스의 아들이 우연히 로마에, 남의 나라에 살면서 대장이 되는데 대장이 되면서 자기 군사들을 지휘할 때 “지금 너희들이 하는 행위가 영원토록 기억될 테니까 너희들은 목숨을 다하여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낚아내자, 오케이?” 이렇게 독려하는 대목이 나와요.

너무나 상식적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내 미래를 결정한다.’ 아, 이것 말고 학교에서 더 배운 게 있습니까? 여학교 담임 선생님이 말합니다. “네가 지금 안 졸고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시집갈 때 남편이 결정된다. 공부를 잘하면 잘난 남편 만나고 못 하면 못난 남편 만난다. 평생 너는 얻어맞고 살래?” 뭐 이런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죠.

똑같아요. 이번 생에 하는 것이 장차 영원토록 기억되고 남을 것이니 똑바로 살자는 거예요. 이렇게 가르치는 것, 이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직행, 급행 1번입니다. 그냥 논스톱으로 가버려요. 주님께서는 그 기억을, 미리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는 고맙게도 바로 그러한 원리를 삭제시켜 버립니다.

삭제되지 못한 자들이 이제 교회 모여서 이런 설교를 듣게 돼요. 지옥 가는 자리, 교회에서 어떤 설교 듣느냐? “여러분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잘 들었죠? 여러분이 성도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성도에 합당한 행위를 보이세요.” 마귀가 교회까지 접수했으니까 악마적인 발언들이 충분히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던 교인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기억할 것이고, 자기 행위를 기억하니까 내가 지금 행한 것이 영원토록 천국까지 이어진다고 믿으니까…, 하여튼 그거만 믿어요.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이 지옥이냐 천국이냐가 결정 난다고 그게 본인의 신앙으로 확고히 구축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가서 탈레반한테 인질이 된다든지, 아니면 병원에 장기 입원해서 말기암에 걸려본다든지, 또는 내가 지독한 가난에 살기 위해서 무리하게 사업을 벌려 부도가 난다든지, 또는 목사로서 구원 받기 위해서 내가 평생토록 직업을 한번 가져봐서 자기를 부인 해보든지, 어떠한 식으로 노력을 해 봐도 그것으로 자기 부인이 됩니까, 이게? 자기 부인이 안 된다고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네가 버리지 못하는 너를 겨냥해서 내가 너를 버려줄게.” 거기에 관한 말씀이에요. “네가 몸부림쳐도 못 버리는 너 자신을 내가 삭제시켜 줄게.” 이겁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거죠. 인간은 자기가 삭제되지 않고 자기기억이 유지되게 되면요, 맨날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게 ‘내가 선택한 환경이 나를 힘들지 않기를, 내가 결정한 그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해요.

그런데 자기 기억이 있는 사람은 기도 자체가 뭔지를 몰라요. 기도란 응답 받고 하는 게 기도에요. 몰랐죠? 응답 받기 위해서 하는 게 기도가 아니라 응답받고 난 뒤에 ‘왜 이런 응답을 저한테 주십니까?’ 그 원인을 찾는 게 기도에요. 이방인들이 기도한다고요, 이스라엘은 기도해도 다 멸망했어요, 그러면 이방인들의 기도, 이방인들은 기도할 자격 자체가 안 됩니다.

왜? 언약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없기 때문에. 그럼 율법대로 하면 안 되느냐? 율법대로 하는 민족 망했잖아요. 이래도 망하고 율법 없어도 망해요.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 자체가 안 돼요. 왜? 무시할 가치조차 없기때문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다뤘다는 것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율법 말씀 때문에 상대한 것이지 말씀 없으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로 물었어요.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이 내용이 무슨 내용입니까?” 그분이 질문한 대로 저와 여러분이 한번 따라가 봅시다. 누가복음 11장 9절에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제가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다급함이 없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해내지 못합니다.” 이게 답변입니다. 예수님처럼 다급하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에게 이 세상은 이미 불로써 간수된 바 되어 있어요.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온 말씀인데 3장 7절에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보호하시는데 보호하는 이유가 불쏘시개로 할, 불 싸지를 근거와 타당성과 이유가 합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간수된 바 됐다, 여러분, 중요한 것을 집에서 간수하잖아요. 간수하지요. 이 세상은 불 싸지름을 당하기 위해서 간수되고 있어요. 이걸 누가 아느냐? 주님은 알아요. 아는데 주님은 다급해요. 왜? 그 안에서 그 불바다 속에서 끄집어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기때문에 다급한 거예요.

이런 다급함을 알려면 환경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는지 환경을 알아야 돼요. 환경을 안다는 것이 사실은 진리 전부를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이 보면 급수에 관계없이 한 수 한 수 둘 때 자기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둬요. 바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놓은 돌에 의해 형성된 집으로 승부가 가려지는 거예요.

“너는 55집 나는 42집, 내가 졌다.” 이런 게임이 바둑이거든요. 그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급수가 높은 사람이 하수를 보면 그 이유가 되지도 않았어요. 바둑판 전체를 봐서 나온 이유로써 바둑을 둬야 하는데 코 앞에 있는 약간의 그 탐욕과 욕심을 내서 바둑을 두면 상수가 하수 두는 거 보면 ‘아이 저거 다 잡아버려야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 보면 나름대로 노력해요. 노력하는데 수가 하수에요. 코앞에 있는, 눈앞에 있는 자기 이익만 생각해서 행동에 나섭니다. 전체를 몰라요. 수 중에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수는 뭐냐? 너희들 전체는 지금 불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안 뜨거운데? 온난화라더니 그렇게 뜨겁지 않은데?”

그거는 간수된 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라이터 불만 켜지면 되는 거예요. 하늘에서 불만 떨어지면 되는 거예요. 간수된 불 안에 있기 때문에,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뭐 사업을 하고 행동하고 자녀를 교육하면서 말하고 내뱉는 수가 얕아요. 얕다고요.

그러면 전체를 왜 모르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의 그림자로 만들어놨는데 이 마귀가 그림자에다가 후, 후, 하고 악마의 자기 욕심을 불어넣으니까 이 그림자가 두께가 생기고 폭이 생긴 거예요. 그림자가 아니고 얼추 실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나만의 덩어리가 생긴 거예요. 그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악마는 그걸 자기가 타고 다니는 마차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랴, 가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악마는 절대로 복음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전체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고 코앞에 있는 나의 그 어떤 욕망덩어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조종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지은 마음을 그걸 하나로 함축해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하나님 때문에 멀쩡한 내가 손해 볼 성싶냐?” 못 들었으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불확실하고 모호한 하나님 때문에 멀쩡한 내가 굳이 손해 볼 필요가 있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획을 제거할 이유가, 인간은 제거되지 않으면 자꾸 하나님께 보복해요. 하나님께 비협조적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너 그 교회에서 나와. 그거 이단 교회야. 빨리 나와.” 이렇게 하거든요. 그게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림자에 불과한데 실체로 간주해가지고 어떤 이단 된 교회에서 나오면 내가 구원될 줄 아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주님의 뜻은 그거예요.

‘네가 이단이니까 네가 너에게서 나와.’ 이거에요. ‘너 자체가 이단인데 네가 그 이단에서 빨리 빠져나와.’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네가 기도했다는 그 기억에서 빨리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네가 헌금하고 봉사했다는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네가 자녀 잘 키웠고, 얼추 인생 잘 산다는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라는 겁니다. 왜? 그게 생명책이 아니고 행함책에 기억이 될 테니까요. 못 빠져 나오죠.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생 마음대로 열심히 바둑 두듯이 한 수 두 수 두는데 모조리 전부다 하수에요, 전체를 모르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접근하십니다. 그 말씀을 먼저 받았던 사람이 있어요. 그게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 메시아가 올 행차를 앞장서서 길을 트는데 그 길 트는 장면이 누가복음 3장 4절에 보면 나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너의 기억의 뭉치야, 너의 기억에 주님의 기억이 행차해서 그걸 통과하고 잘라 내도록 네가 마음을 허락하라.’ 이 말이거든요. 내 잘난 기억밖에 없는 곳에 칼집이 나도록, 흠집이 나도록, 스크래치가 나도록, 주님의 기억이 그걸 관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선 그렇게 말씀을 해 주셨다, 이 말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내 기억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주님의 기억이었어. 주님의 은혜였어.”라고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 방법이 뭐냐? 5절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쉽게 말해서 “뭐 있나? 뭐 있어?” 이런 뜻이에요.

뭐 대단하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불도저하고 포크레인 동원해서 쫙 밀어버리는 거예요. 어느 학교 출신이고,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얼마나 돈을 모으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고, 어떤 아파트에 살고…, “야 불도저! 밀어버려.” 그건 너의 기억의 화신, 너를 그동안 조종했던 악마의 마차를 그냥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부숴버리면, 6절에 그렇게 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나의 기억에 가로막혀 있던 것을 제거하니까 그동안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느냐가 그때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장 20절에서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 다른 말로 ‘주님의 흥하심이 그동안 나의 나 됨을 완전히 밀어버릴 때 나는 얼마든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주님의 기억이 밀고 들어온다면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요.’

자, 그렇다면 이 나의 기억을 하나님께서 밀어붙이기 위해서 마련한 것이 있어요. 마련한 게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 보면 나옵니다. 그게 성막, 장막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이 장막, 성막이 뭐하는 곳이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제사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제사가 끝났을 때 뭐가 나오죠?

피가 나옵니다. 어떤 피입니까? 사람 피입니까, 아니면 사람 피가 아닙니까? 사람 피가 아니죠. 그렇다면 이 성막 안에서 이뤄지는 이것은, 인간 피를 안 받는다는 하나님의 뜻이 늘 드러나는 곳이죠. 인간의 피를 받지 않는다. 왜? 더러워서 안 받아요.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인간의 피는. 아담의 피는 더러워서 안 받아요.

이미 악마와 한통속 된 그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안 받습니다. 어떤 찬양을 해도 안 받아요. 인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걸 왜 받아요? 죽어 마땅한 걸 왜 받습니까? 안 죽어야 될 분이 죽은 것을 받죠. 죽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깨끗한 그 피를 받죠. 죽어 마땅한 걸 왜 받아요? 여러분이 하나님 같으면 받겠습니까? 안 받죠. 하나님도 안 받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천국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했어요.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떤 거냐? 분류하는 것이다. 어떻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도대체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 차이점이 어떤 차이냔 말이죠. 그걸 구약의 율법적 장막 가지고 집어넣으면 다 해결돼요. 더러운 피를 그대로 유지할 때는 나쁜 고기가 되고, 그 더러운 피가 깨끗한 피로 교체됐을 때는 좋은 고기가 되는 겁니다. 그 기능을 어디서 하는가? 장막에서, 성막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막 달랑 있으면 되냐? 안 되죠. 그러면 누가 필요한가? 제사 지낼 제사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인간 제사장으로 제사를 열심히 드리면 받는가? 안 받습니다. 왜? 제사장 자체가 더러우니까, 인간 제사장 자체가 아담에서 나온 더러운 자니까요. 그러면 제사장이 또 따로 도입되어야 합니다. 누구? 예수님이 흠 없는 제사장으로 도입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 제사로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되어버렸어요.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성막의 기능에 대해서 성경을 아무리 봐도 오해하는 대목들이 발생이 됩니다. 피의 교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들은 ‘그 뭐 꼭 피까지 동원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냥 말씀대로 잘했느냐? 천국. 못 지켰어? 지옥, 이러면 될 텐데 왜 꼭 참혹한 피까지, 굳이 피 생산이라는 그 기능까지 주께서 하셔야 하는가?’ 그런 생각을 여러분들은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를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이 천국이고, 낙원이고 그다음에 부자는 지옥에 갔어요. 그렇게 볼 때 보통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요. ‘부자하고 거지 나사로하고 이 땅에 있을 때도 만나지 않고 평행 되게 노선이 있는 것처럼 나중에 죽어서도 그 평행선은 만나지 않고 각자 간다.’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면 제일 중요한 게 빠졌어요. ‘피가 왜 필요하냐?’가 빠져 있어요. 하나님이 피 흘린 이유가 날아가 버려요.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게 뭐냐?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이거만 달랑 남아있어요. 구원받겠다는 것 이건, 자기가 그림자인 것도 모르고 영원한 실체로 천국 가려는 욕심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평행 되지만 이 평행 된 것이 언젠가는 만난다는 거예요. 분명히 만나지 않을 자가 어느 날 만난다는 겁니다. 어떤 A라는 직선 위에 P라는 점을 하나 찍었다고 봅시다. 그리고 이 P를 통과하는 무수한 직선 가운데서 먼저 그어 논 A라는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이 단 하나는 반드시 있다, 유클리드라는 사람이 바로 『기하학 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어요. BC 3세기 경입니다.

이게 수학에서 평행선 원리입니다. “어떤 직선이 있으면 직선과 영원히 만나지 않는 직선은 뭐든지 하나가 있다. 선로처럼 두 직선은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이게 현대 수학에서 깨졌습니다. 평행선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이게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평행선인데 어떻게 만나느냐? 현대 수학에서는 이걸 증명했어요. “어떤 경우에도 평행선은 없다.” 없습니다. 왜냐면 지구처럼 구, 공, 타원체, 구체에서 어떤 선을 그어도 결국 두 개의 평행선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해요. 리만(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이라는 수학자가 그것을 잘 활용했는데요.

제가 수학에서 그것이 증명됐다고 해도 이게 무슨 말인지를…, ‘구가 있으면 거기 적도가 있을 것이다. 그 적도와 평행 된 것은 없다.’입니다. 수학에서는 ‘없다’인데, 우리 생각에는 ‘적도보다 약간 더 위에 선을 나란히 그어 버리면 나란히 가잖아. 나란하게 평행선 되잖아.’ 그러니까 평행선이 없다는 수학자의 말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구에서 적도 위에 평행선을 그어봤자 평행 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반드시 평행이 되려면 구의 중심에서 나온 측지선(기하학에서 측지선(測地線, geodesic) 또는 지름길이란 직선의 개념을 굽은 공간으로 일반화한 것이다. 많은 경우, 측지선은 표면의 두 지점 사이의 가장 짧은 경로를 나타내는 곡선이다. 위키백과)이 이미 구의 중심이 하나밖에 없기때문에 절대로 두 선은 절대로 평행선이 되지 못합니다.

그거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확인하려면 중심에 가야 되거든요. 제가 수학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중심이 있는데 중심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죄인과 악인이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그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죄인의 모습으로 와서 거기서 평행선을 새로 결정하는 겁니다.

피 있는 자, 좋은 고기. 피 없는 자, 나쁜 고기. 자기 기억을 가진 자, 지옥. 자기 기억이 십자가에 의해 제거된 자, 천국. 아까 기도한 집사님 말씀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내가 죽었잖아요. 내 기억이 죽었잖아요. 이제부터 남은 것은 주님의 기억입니다. 내가 언제 태어났고, 언제 학교를 나오고, 주께서 그렇게 시킨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이끄신 겁니다. 뭐 하라고? 주님의 굴곡진 인생을 따라오라고.

그래서 하나님 마하나임처럼 악마와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강제징집 당하라고요. 우리의 싸움에 나를 위한 싸움은 없어요. 나 잘되기 위한 나 복 받는 싸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귀가 시킨 거예요. 우리의 싸움은 악마와의 싸움이에요. 이 세상 신과의 싸움입니다. 내 인생이라는 게 없어졌어요. 남아있는 모든 인생은 어떻게 살든지 간에 다 주님의 인생입니다. 내가 아파트를 네 채를 가지고 있든, 부동산을 십오만 평을 가지고 있든, 한 달 수입이 3억이 되든 그건 내 거 아니에요. 그거 주님의 겁니다. 그러니까 누리세요. 실현도 안 되는 거 누리는 상상이라도 합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제가 돈 좀 벌었는데요. 사실은 사기 쳐서 돈 번 거고, 비트코인 도박해서 돈 번 거고, 주식 해서 돈 번 거고요, 돈 벌었어도 참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또 겸손한 척하는데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왜? 주님께서 비트코인 하게 하고 도박하게 만든 거예요. 왜 도박하게 만듭니까?

바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나의 기억부터 시작하는데 나의 기억은 바로 더러움부터 시작하거든요. 그 더러움이 어디서 만나서 깨끗한 피가 되었는지를 그 피를 기억하라고, 주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나로 하여금 가족끼리 안 굶어 죽으려고 애를 쓰는 그러한, 내 인생에 몰입하는,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그것 그 자존심의 행위, 그 죄를 주께서 실시하신 겁니다. 왜? 주님께서 죄인인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요.

예수님께 부름을 받기 전에 모든 인간들은 버티기로 일관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다나엘이 나옵니다. 안드레, 베드로, 그다음에 빌립, 나다나엘이 다 그 동네가 그 동네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이끌고, 빌립 이끄니까 빌립이 자기가 아는 사람 나다나엘에게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4절에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하니까 46절에 나다나엘이 하는 말이 정말 실증적이고 실제로 늘 반복되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다나엘 이 사람이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 기억이 관리해서 내 기억으로 관리 잘 된 나로 나는 구원을 받겠다, 하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그대로 표현한 거지요. 그런데 47절에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께서 먼저, 먼저 나다나엘에게 갔어요. 자, 나다나엘의 자기기억과 예수님의 기억이 충돌되는 지점입니다. 충돌이 돼요. 나다나엘 본인은 자기에게 충실했어요. 나에게 충실하는 것이 내가 할 도리의 전부인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둑의 수는 그것밖에 없어요. 전체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나름 노력하면 뭐라도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나온게 뭐냐 하면, “예수가 누군데? 지가 뭔데?” 이렇게 나온 겁니다. “나사렛 출신이라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와?” 나사렛은 어두운 세계예요, 유다는 빛의 세계고. 혈통 자체가 더러운 혈통이에요. 그런 출신인데 뭐가 율법대로 된다는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보고 주님이 먼저 그에게 찾아와서 나다나엘을 보고 ‘그는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할 때 48절에서 나다나엘의 고백이 절정에 이릅니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나를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알았다, 인간아!” 나를 아십니까. 땅에서 하늘로 가려는 그러한 인간적인 시도, 그것이 완전히 묵사발 되는 순간입니다. 하늘에서 먼저 아시고 마중 나오는 시도 이게 주님의 기억입니다. 그 주님의 기억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성막이 들어 있고 거기서 어린양이 피 흘려 죽어 나가는 그 피가 담겨있는 거예요.

레위기 17장에 그 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너희들은 이 땅에 피를 흘리지 마라. 너희들이 흘린 그 피가 땅을 더럽게 한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은 것에 대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땅에 피 흘림에 대해서 땅이 하나님께 고자질을 한 거예요.

“하나님, 이 땅에 더러운 피를 흘렸어요.” 그 핏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찾아와서 “가인아, 네가 왜 피를 유발하느냐?” 해서 가인에게 징벌을 내리지요. 그 원칙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면 민수기 35장에 도피성 이야기가 나와요.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산에서 나무를 할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버렸어요.

도끼가 공중에서 세 바퀴 반을 돌고 저 뒤쪽에 따라오는 엉뚱한 사람이 맞아서 피 흘리고 죽었어요.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의 형제가 일곱이고 아버지 어머니 다 살아계시고 자식은 셋이다. 그 죽은 사람이 이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어떻게 합니까? 아들들은 ‘울 아버지 죽인 인간, 우리 인생 다 끝장낸 인간 복수할 거야! 내 손에 죽는다.’ 하고 따라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피성으로 가거라. 고의가 아닌데 어쨌든지 이 인간사회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 말이지요. 사람이 죽었고 이 땅은 복수와 복수의 고리로 계속 연결되니까 도피성에 가서 피신하라. 언제까지? 너 대신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못 나온다, 그렇게 돼요. 그러나 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는 어느 누구도 너에게 복수할 권한은 없다. 왜? 네가 도끼로 나무하다가 사람 죽인 그것이 바로 이 일상에 벌어진 제사의 부분이기에.

제사가 성막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상으로 확장되고 그 확장된 것이 뭐냐? 억울하게 남을 죽이게 된 그 사태가 억울하게 죽게 된 제사의 희생제물을 반영하는 그림자의 퍼즐조각이 되는 거예요. 나무하다가 졸지에 사람 죽이게 되고 그래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같이 살게 된 그 굴곡진 인생, 윤곽 있는 인생, 그게 바로 실체인 주님의 기억과 주님의 행하심을 반영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겁니다.

폭이 없고 두께도 필요 없는 하나의 이미지, 기억의 현상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형과 그림자에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와 관련된 겁니다. 따라서 제가 오늘 이야기한 것을 전체로 보게 되면 이겁니다. 인간이 전체를 안다는 이것은 환경이라는 것이 내 개체의 행함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거예요.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전체를 주님의 기억으로 그 환경을 바꿔놓는 거예요. 그러면 자, 천국이 뭐냐? 천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기억을 자연에 준 게 아니고 특정 인간에게 줄 때 그 인간 속에서 천국이 이미 시작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지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옥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가 아니라 이미 환경 자체가 지옥이다. 불 속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낼 때 하늘나라 가면 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미 주님의 기억에 의해서 자기를 다시 볼 수 있는 안목, 전체를 통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주님의 일하시는 그림자인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환경이 바뀐 존재로서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환경에 준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환경 따라 더 이상 바뀌지 않습니다. 지옥 환경에서 인간은 바뀌지 않는데 고마운 것은 천국 환경이 되면 인간은 바뀌지 않아요. 어떤 행동, 교도소에 백번을 갔다가 와도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이에요. 왜? 환경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말씀의 환경입니다.

이렇게 해도 여러분은 이게 무슨 말인지를 어렴풋이 알겠는데 그래서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홍잠언이라는 어린 애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 제목이 너무 기억에 남았어요.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제목이 뭐냐? <항구의 남자>예요. 이게 왜 은혜가 되었느냐 하면, 보통의 ‘남자의 항구’에요.

어떤 남자가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받으면 대게로 유명한 강구나 그런데 잠시 들렀다 올 때 그게 ‘남자의 항구’에요. 그런데 그 홍잠언이라는 애가 부른 그 노래는 ‘남자의 항구’가 아니고 <항구의 남자>에요. 환경 자체가 그냥 잠시 들러서 노는 것과는 다른 식이에요. <항구의 남자> 이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갈매기가 사랑한다.’는 거예요.

항구에 아예 사는 그 남자는 술을 먹어도 한 잔에는 하늘을 담고 또 한잔에는 파도를 담아요. 그다음 가사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묻지를 마라, 남자의 사연을” 네가 세상에서 놀던 너의 기억 속의 사연을 나에게 묻지 말아라. 그리고 “묻지를 마라, 첫사랑일랑” ‘너희들이 노는 그 환경 속의 삶의 그 첫사랑 같은 것은 나는 모른다. 갈매기가 날 사랑하면 되고 나는 그냥 항구 자체가 새로운 환경’이라는 거예요.

첫사랑을 묻지 말라. 그리고 “항구의 남자는 바다가 사랑”이고 “항구의 남자는, 항구의 남자는 바다가 고향”이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항구, 천국은? 주님의 피의 그림자로 사는 그것이 성도의 세계,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집에 가시거든 ‘항구의 남자’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환경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환경 속에 우리가 강제징집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세상에 살면서 그동안 마귀가 얼마나 우리를 속여 왔는가를 절실히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더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언약의 차이  (3) 2024.12.01
흠 있는 언약  (0) 2024.11.24
모형  (1) 2024.11.10
빚진 종  (0) 2024.11.03
단번에 쓰레기  (1) 202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