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순

산 위의 설교

아빠와 함께 2024. 12. 1. 21:39

산 위의 설교 241201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 주일 학교 설교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산상설교라 하는 것은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부터 율법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이 산상 설교는 율법을 주신 분 문제 출제자가 답 해답도 같이 겸하여 주시는 거예요. 해답도. 문제 던지고 잘 지켜라가 아니라 해답까지 주시는 그런 설교, 산 위에 올라가서 설교하실 때 모세가 준 그 위에다가 모세는 받아서 전했지만 중간 생략하고 율법을 주신 분이 직접 와서 율법을 말씀하시는 그 대목입니다.

십계명 그림 나와 있죠. 제자들에게 등불을 보여주면서 니는 이제로부터 빛이 되어야 된다. 빛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이 어둡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어둡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무언가 책을 본다 또는 과일을 본다 할 때는 그냥 우리는 어두워요. 어둡고 빛이 와서 그 사과에게 빛이 와서 사과를 때려주고 비친 그 빛이 우리 눈에 들어와야 비로소 우리는 사과가 저기 있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빛이 없다면 사과가 있든 탁자가 있든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은 그걸 어둡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물에다가 빛을 때리면 여러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예요. 광전 효과. 다 알고 있는 이야기. 광자를 때리면 에너지 변이가 생겨가지고 전자가 튀어나오죠. 그래서 거기서 전기가 발생되고 하는데 그 광자는 또 이쪽으로 튀어나오고. 어둡다는 것은 니가 있다. 근데 비칠 때는 내가 있다는데 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을 곧 바꿔야 해야 돼. 니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이 있다. 이래 봐야 돼요. 어두움 1번 출석한다. 어두움 2번 어둠을 출석해야지 니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어두움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만약에 두 명이 있다면 성도 하나 성도 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도 할 때는 하나 둘이 카운트가 되지만 성도 아닐 때는 한꺼번에 이야기해요. 이 동네에 어두움이 있네. 이 어두움 밖에 없어. 내가 뭐 니하고 상관할 거 뭐 있노? 나 다른 반에 갈란다. 다른 반에 가버렸어요.

다시 말해서 말씀이 말씀 안에 빛이 있고 빛이 오게 되면 너희는 이제부터는 빛의 등불같이 빛의 사람이 된다. 등불은 전제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깜깜하다. 어둡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등불이 등불답게 비추는 겁니다. 그럼 비추려면 빛 자체가 정답이 되는 거죠. 빛 자체가 정답이 되는데. 예를 들면 아까 낯 설교에도 했지만 여기 새들을 이렇게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 새들을 봐라. 그들은 창고도 짓지 아니한다. 여러분 새들이 창고 짓는다는 발상은 못 하잖아요. 시멘트 있어야 되지요. 콘크리트 있어야 되지요. 건축 허가 내야 되지요. 이거는 안 되지요. 새는 그리고 들풀 보세요. 들풀 보고 새를 봐라.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그 들풀이 먹여 살릴 때 새들이 살 때 들풀이 자랄 때 자꾸 질문을 그들에게 하지 마. 새야 넌 어떻게 살았어? 들풀아. 어떻게 니가 이만큼 키가 자랐어? 지금 그들에게 물을 질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물을 질문이 아니고 누구한테 해야 돼요? 그거는 중간에 끼어들어요. 내가 키웠다. 내가 살렸다. 왜? 왜 엉뚱한 질문을 내보고 해야지 왜? 새나 풀보고 이야기하느냐? 주께서 따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를 할 때 다른 사람이 “아이고. 세상에 이 아파트가 도대체 몇 평이야? 이거 어떻게 돈 주고 샀어요?” 그걸 왜 내한테 물어 주께서 친히 기르시기 위해서 아파트 샀는데 그걸 나한테 왜 묻냐 이 말이죠.

“갑자기 뭐 주식해서 뭐 10억을 얻었다면서요?” “그걸 왜 내한테 물어? 주께서 10억을 줬어.” “근데 나한테는 왜 안 주지? 나는 이번에 10억 꼴아 박았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왜 질문 나는 내 자체가 답인데 왜 답보고 정답을 해보라고 하느냐? 답보고. 주께서 하셨겠지. 정답은 따로 계시다 이 말이죠.

그다음에 이제 산상 설계에 해야 될 것이 여기에 반석에 지은 집과 완전히 무너진 집. 집을 지을 때 사람들은 단단하게 지어요. 바보같이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단한 집을 짓지요.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집을 짓겠다고 말씀 위에 집을 지어요. 말씀 위에 집을 지는데 자기가 동원한 그 말씀이 모래사장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요. 왜 집을 본인이 짓기 때문에 그래요. 집을 주님이 지어줘야 되는데 본인이 살겠다고 구원받겠다고 본인이 말씀 성경 공부 말씀 공부해가지고 지은 집이니까 이거는 뭐 주의 말씀 마지막이 되면 다 허물어지지요.

반석은 누구냐? 반석은 누구냐? 예수님이 반석이 돼야 되죠. 주께서 지을 겁니다. 우리 집을. 내가 주님 이용해서 짓는 게 아니죠. 이 이야기하니까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가만히 있겠어요. “죽이자. 죽이자.” 하고 막 광화문에 촛불집회 막 하고 막 없애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나를 죽여? 내가 하나님이라고 몇 번 이야기했어?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고 몇 번 이야기했어? 근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해? 그렇지 그게 바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내가 해야 될 마지막 남은 일은 너희들 손에 내가 죽는 거다.”

해답도 아닌 자들에게 주님은 죽지요. 죽는데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겟세마네 기도에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할 때 여기에 소녀 소년이 나왔습니다마는 이건 사실은 이거는 가려야 되고요. 소녀로 하지 말고 여기에 잠자고 있는 제자 3명이 와야 돼요. 제자 3명하고 와가지고 주님께서 일부러 밤샘 기도를 이렇게 하자고 갔을 때 제자 3명은 잠을 잤어요. 푹 잤어요. 왜? 기도할 게 없어서. 이게 다시 말해서 내가 굳이 깨어날 이유가 없어서. 인간은 굳이 기도할 거 없습니다. 인간은 기도해봐야 밤새 커피 넉 잔 마셔가면서 기도해 봐야 기도 아닙니다. 인간은 기도할 게 없습니다. 왜? 니가 무엇을 기도하느냐 하지 마라. 네게 필요한 것은 다 주께서 다 줬잖아. 인간아. 다 줬는데 뭐가 필요하고 뭐가 필요하고 그러지 마. 기도는 내가 주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기도해. 그래서 그들은 기도할 때 그들은 기도할 게 없어서 잤어요.

기도할 것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기도한다는 말은 제자들이 나중에 구원받는 그것도 누구의 기도 덕분이다? 제자들의 기도 덕분이다? 제자들의 중보기도? 아니지요. 누구 덕분입니까? 예수님 홀로 지금도 하늘에서 홀로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응답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감사해야 되죠. 주님께서 하면서 뭐라 했느냐? “하나님이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말도 안 되는 이 인간 좀 제가 버리면 안 되겠습니까? 주께서 “안 된다.” “그럼 내가 걔들을 끌고 가겠습니다. 죄인이지만 죄만 짓지만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 품으로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는 바로 이 제자들을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기도를 하시고 드디어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갑니다. 그들은 잘 됐다고 드디어 체포했다고 좋다고 하는데 주님도 좋다고 합니다. “니가 이 악마야. 니는 늪에 빠졌어. 인간아. 내 계략에 빠졌어.” 주님의 작전에 그들은 주님의 작전은 주님이 죽는 작전이었어요. 왜? 모든 인간은 안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죽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으려는 사람이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안 죽는 세계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죽어서 아버지께로 가시잖아요. 부활해서.

이제 그 절차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계획대로 내가 보니까 아무 nothing,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지금 계획대로 잘 되고 있습니다. 취직도 안 되고 있고. 지금 계획대로 잘 되고 있습니다. 지금 결혼도 안 되고 있고, 계획대로 잘 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혹시 신랑 신부 만나거든 이것도 계획대로 내 계획은 전혀 내 계획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범사에 주님의 계획대로 됨을 미리 당겨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모르는 저희들을 주님의 옷자락에 무늬로 끼워 넣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옷 속에 들어왔사오니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증거하시는 것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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