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형
2024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3-5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모형과 그림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타민족과는 달리 ‘모형적 민족’이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그들 민족 안에서 성막이 있고 그리고 거기서 제사장들이 제물의 피를 내고 육체는 태워지는 율법적 작업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막이 없는 이방민족은 어떻게 될까요?
에베소서 2:12-13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민족에 대해서 아예 ‘하나님이 없음’으로 단정짓습니다. 그들 이방민족은 하나님이 없기에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곧 ‘나는 결코 누구의 모형이 아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 누구의 모형으로 살기 싫다. 나는 나로서 살고 싶다’를 주장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문학이나 과학이 발달된 겁니다. 그들의 모든 업적이나 노력은 미래지향적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5:12에서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최초의 사건에 주목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자, 죄의 왕노릇의 사례나 경우는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현대 유전생물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DNA의 두 가닥 가운데 한 가닥이 풀어져 따로 나와서 m-RNA가 됩니다. 이것이 핵 밖으로 나오면 핵 밖은 세포질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 소포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단백질 합성 공장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리보솜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집니다. 만드는 방식은 DNA가 단백질을 만드는 레시피라면 그 레시피대로 핵산의 염기 중 세 가지를 한 조를 이워서 단백질의 재료가 되는 아미노산을 지정하게 됩니다. 서열순서에 따라 아미노산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아미노산의 서열은 단백질의 기능과 연결됩니다.
리보솜은 이 아미노산을 이어붙여 폴리펩타이드(나란히 연결형) 사슬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분자의 전기적 성질에 의해서 접히고 말려서 단백질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자체적으로 에너지 안정화를 추구하고 구조를 갖추고 이 구조의 차이에 의해서 단백질은 모양의 기능을 갖추게 됩니다. 1차원적 염기 서열이 3차원적인 단백질의 입체적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즉 ‘서열→구조→기능’이 되는 겁니다. 생물학에서 이런 연구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처음 아담과 얼마나 다른가를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즉 부모의 속성이 그대로 자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근소한 차이나마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보다 진화된 오늘날 자신들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즉 인간은 뒤로 돌아갈 줄 모릅니다. 존재의 배후, 존재의 뒤편에 뭐가 있는 줄을 모릅니다. 그저 보다 인간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데 유리한 존재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누구의 모형이기를 강력하게 선천적으로 거부합니다. 이 선천성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것은 최초의 사건으로 비롯됩니다.
최초의 사건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인류의 역사가 진척되어 왔습니다. 그 최초의 사건은 다름 아닌 ‘인간 자체가 모형’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
여 본문에서 모형이 아닌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반면에 모형인 자는 아담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머지 모든 인간 존재는 아담의 복제물입니다. 남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담만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단일 모형인 아담의 사건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모형과 실체 사이에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도 있습니다. 로마서 5:16에 보면,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로서 의로우심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와 사망은 선물이 아니라 아담의 행위 하나로 자동적으로 덮쳐져서 그 아담 안에서 인간은 출생하고 짝짓기하고 살다가 결국은 몽땅 죽게 됩니다. 모형과 실체가 같은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사람의 행위가 결과를 낳았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분의 의로움으로 끝나는 것이다는 점에 모형과 다른 점이지만 그것이 은사로 주어져 다수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입니다.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따라서 성도는 존재의 뒷쪽으로 가야합니다. 거기에는 오늘날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모형 안에서 우리는 결코 의로울 수 없음이 결정났기에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본래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런 죄인이 하늘나라의 실체가 합류되기 위해서는 생명되시는 주님쪽에서 움직이십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5-7)
주님의 일방적 사랑으로 인하여 합류가 되는데 이를 위해 주님은 스스로 인간에게 버림받는 발에 덮힌 때만도 못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일방적 사랑을 받은 자만 압니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
우리가 어떤 형편에 쳐해있든지 모형을 실체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멈춰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끈질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는 존재에 현란함에 우리가 스스로 속아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히브리서 8장 3-5절(모형)24111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3-5절입니다.
히브리서 8:3-5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찌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든 것이 모형이다. 그러면 실체는 아니다. 그냥 모형적 기능을 발휘할 뿐이다.’ 구약에서 성막이 만들어졌던 그것을 모형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진행되는 그 일들, 제사장이 제사하는 그 일도 모형이었습니다. 구약 때는 성막 중심의 제사, 실제로 양을 바치고 소를 바치는 행위를 함으로써 실체가 따로 있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보여줬다면 신약에서 성막이 폐지되고, 성전도 없어진 입장에서 신약도 과연 모형인가?
신약에는 제대로 된 모형이 나타납니다. 구약 때의 모형은 성막이 모형이었다면 신약의 모형은 성막 이전에, 이스라엘 이전에 최초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그 최초의 인간을 모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4절에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표상이라는 말은 모형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 어떤 식의 모형이냐? 그 모형에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죽는다는 겁니다. 사망이 왕노릇 하기 때문에, 살다보면 죽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왕노릇 했다는 그것은 출생할 때부터 사망이 덮친 채로 살아오다가 힘이 빠지면 ‘아, 사망이 왕이었구나.’ 하는 것을 요양병원을 거쳐서, 장례식장을 거쳐서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은 모형인데 사망이 왕노릇 하는 상태를 통해서 모형에 충실하게 인간은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오실 자의 모형이라, 예수님의 모형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예수님도 이 모형을 거쳐서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도 사망의 왕노릇 속에 들어오셔서 본래의 모습, 실체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인간이 모형이라면 실체는 어디 있느냐, 실체는 누구냐? 우리가 실체도 같이 알아야 되겠지요. 실체는 성경에 요한복음 1장부터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실체가 있었습니다. 태초에 실체가 있었는데 그 실체 되시는 분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때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어요. 나는 스스로 있으니까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모형이 되는 겁니다. 배후에 스스로 있는 계신 분이 있어서 그 앞의 모든 인간들을 모형적으로 다루시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 세상의 내막입니다. 다른 내막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형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실체를 드러내는데 이 모형을 가지고 모형답게 하실 일은 무엇인가?
본문 히브리서 8장 5절에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해서 모형과 그림자는 땅에 있고 그 실체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사는 뭐냐? 땅에 있는 모형이 무슨 수로 하늘에 올라가느냐? 무슨 수로, 무슨 방식으로? 땅에 있는 것이 모형이다. 그러면 모형은 모형으로 끝나는 거지요. 모형인데 어떻게 그 모형이 하나님의 실체와 만나게 되는가?
그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이 함께 있는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으로 진행되었어요.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전차 안에 계시고 이스라엘은 전차가 되어서 이방나라를 밀어붙였지요. 그럴 때 이스라엘에는 거룩한 분이 계셨기 때문에, 거룩한 분의 모형인 성막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고, 그 거룩한 성막이 없는, 모형이 없는 그 민족을 더러운 민족, 저주 받아야 마땅한 민족, 이방민족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이라는 이 유대민족이 모형으로서 모형과 실체가 결합이 되어야 될텐데 모형이 모형값을 못 하고 실체 되시는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여기서 헤어지게 되지요. 갈라지게 됩니다. 죽임으로써 제대로 이스라엘이 모형값을 못 하게 된 거예요. 죽이는 이유는 간단해요. 자기들은 누구의 모형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나다 그 말이지요. 나는 나 스스로 있는 존재지 누구의 모형, 그것은 자존감이 굉장히 떨어지지요.
‘배후에서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나는 그것 싫어. 나는 내 인생 내가 살 거야. 내가 만들 거야.’ 그래서 인간은 누구든지 모형이 아닌 채로 현실 속에 끼어듭니다. 그래서 본인을 위한 현실을 따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뭐냐? “너희는 모형이다. 너희들이 만들어내는 현실은 너를 위한 현실이 아니고 함께 하신 하나님을 위한 현실이야.”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게 당부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의 그 취지를 알지 못하고 이방나라와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이익이냐 손해냐를 늘 따지는 거예요. 무엇이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광야에 있을 때부터 따지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안에 있는 이미 확정된 사실이 무엇인가를 너희들은 증거해야 될 사명을 지닌 민족이다.” 네가 따로 무엇이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것은 모형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모형은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질 어떤 권한이 없어요. 나는 잘 살았니, 못 살았니, 그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따질 입장이 못 됩니다. 세상의 대인관계에서 제일 싫은 것은 뭐냐? 건방진 거예요, 건방진 것. 회사에서 요새 남자 직원보다 여직원을 선호하느냐 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건방짐이 덜해요. 고분고분한 요소가 있어요.
그런데 남자는 취직해서 처음에 좀 실적이 오른다 싶으면요, 건방을 얼마나 떠는지. 자기가 아니면 회사가 안 되는 것처럼 그것을 ‘현란한 존재의 스텝’이라고 합니다. 온천지 자기가 회사 다 살릴 것처럼, 마땅히 진급되어야 하는 것처럼 찧고, 까불고 하는데 이것은 회사뿐만이 아니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제일 꼴 보기 싫은 것이 건방진 거예요.
건방짐의 반대말이 뭐냐? 자기를 지우는 겁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인간 자체가 모형이기 때문에 이 땅을 살아오면서 내가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 느낀 것, 소유한 것 내 죽음과 더불어 다 날아가요. 내 것이라는 것들은 다 날아가요. 없어요. 건방 떨 건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죽어요.
그런데 가룟유다 같은 경우를 보세요. 자살까지 하면서 자살하는 순간까지라도 자기가 누구의 모형이라는 것은 당돌하게 거부하잖아요. 이것은 뭐냐? 모형은 죽어도 제대로 못 죽어요. 모형은, 인간은 하나님의 죽는 죽음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죽음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죽음에 모형으로서 끼어든 자에게만 영광된 부활이 보장돼요. 영광된 부활이.
하나님의 죽음에 참여되지 못한 자는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더러운 부활로만 계속 영원하게 될 겁니다. 지옥에는 사형이 없어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남 죽일 때 ‘너 죽고 나 죽자’ 하지요. ‘까짓거 잡혀서 사형당하면 그만이잖아. 나 사형당할 각오로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인다. 나하고 안 사귀면 장모 될 사람 죽인다.’ 이런 식으로. 데이트폭력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저주스러운 모형은 영원히 죽 가요. 지옥에는 사형이 없습니다. 가룟유다가 헛짓한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초, 중, 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사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한다.’
아닙니다! 우리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만든 줄 알아요? 우리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이게 미치는 일이에요, 이게. 저주의 그릇이 될 것인가, 영생의 그릇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죽는다고 영생의 그릇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으셔야 돼요. 하나님이, 생명 되시는 하나님이 선악과 쪽으로 다가와서 선악과의 그 ‘정녕 죽으리라’에 합류해서 선악과에서 의를 이루어서 부활할 때 그 때 합류하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영광된 부활은 없습니다.
이 모형에 대해서 로마서 5장을 다시 봐야 합니다. 로마서 5장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작심하고 쓴 거예요.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과학의 문제점은 과학이 율법에 어긋났다는 거예요. 과학이 죄라는 겁니다. 이걸 과학하는 사람은 몰라요. 문학하는 사람도 이걸 몰라요. 문학이 죄라는 것을 몰라요. 목회하는 사람도 몰라요. 목회가 죄라는 것을 몰라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뭘 해도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뭐냐? 한 사람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유전(遺傳)병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유전 자체가 없어요. 한 사람으로 가요. 최초의 한 사람에게 무슨 사건이 있었는가? 그 사건이 복제가 되면 같은 사건의 복제로 같은 내용이 복제가 되고 그것이 역사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뱀을 만났던 사건, 그 사건이 반복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악마는 죄를 낳고 인간은 죄 값으로 죽고, 그거예요. 그것을 인간들은 모릅니다. 인간의 무구한 역사가 있지만, 많은 사람이 지구상에 흩어져 살면서 지역마다 문화와 전통이 다르지만 똑같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태어나고 자라서 짝짓고 살아남기, 끝! 세종대왕 때나 피라미드의 이집트 그때나 똑같은 것이 뭐냐 하면, 태어나고, 몸체가 자라나고, 남녀가 짝짓기를 해서 어쨌든 간에 자식 키우고 살아남고, 죽고 끝!
그게 뭐예요? 시대가 21세기나 기원전 7세기나 조사해 보세요. 똑같아요. 달라질 것이 없어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조선시대의 그림을 보고 놀랐다고요. 조선시대 그림 속의 개 모습이나 오늘날 21세기의 개 모습이나 터럭 하나 차이가 없어요. 어떻게 그리 똑같아요. 똑같아요, 똑같아! 개나 인간이나 사슴이나 멧돼지나 똑같아요. 달라진 것은 없어요.
옛날 드라마 보세요.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해요. 요새는 휴대폰으로 해요. 그러나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똑같아요. 공중전화 누르는 것에서 휴대폰으로 전화한다고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뜨거운 돌로 다림질하는 것이 전기다리미로 하는 것이나 똑같아요. 문명의 이기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하게 하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아담이 아니라고. 아담에서 많이 변형되어서 달라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옛날의 아담 중심, 하나님의 모형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형으로 만들어진 아담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안 하고 우리는 아담에서 멀리멀리 더 떨어져서 미래로, 달로,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는 시대라는 겁니다. 자꾸 앞으로 가려고 해요. 뒤로는 갈줄을 모르고.
성경은 인간이 모형임을 드러내는 모든 사건들의 서열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이제는 모형을 찾아서 뒤로 가야 해요.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내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 보지 마시고 뒤로 가야 해요. 인간은 뒤로 갈 줄을 몰라요. 구닥다리라고, 낙후되었다고. 이것은 인간이 자기가 주체가 되고 모형이 아니고 스스로부터 시작한 내가 주인공, 어릴 때부터 주인공이고 지금도 주인공이고 자기를 자꾸 주체로, 실체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처음에 차 사서 운전할 때 후방주차 잘 못합니다. 후방카메라를 잘 볼줄 몰라요. 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서 후방카메라 딱 볼 때 그 순간에 뭘 잊어버려야 하느냐? 전방 주시하던 그것을 없애고 후방카메라가 보여주는 노란 선, 빨간 선, 파란 선 그 화면을 내 전방이라고 생각한다면 후방조차 그냥 들어갑니다. 그게 전방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우리가 이걸 모르냐 하면, 존재의 뒤편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을 못 알아본 이유가, 예수님은 배후에 계신 존재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존재의 앞만 보는 시선 때문에 뒤에 주님이 계시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주님이 뒤에 있다가 앞장서서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죽음을 먼저 겪으시고 인간이 겪을 수 없는 부활을 먼저 겪으셨어요. 추월해서 앞으로 나가버렸다는 그 말이에요.
뒤에 계신 분, 인간이 배제시킨 분이 인간존재보다 앞장서서 다른 노선으로 가버렸어요, 다른 노선으로 가버렸다 그 말이에요. 모형이 실체를 만난 거예요. 잠시 모형으로 오셨다가, 죄인된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이제는 진짜 실체로 하늘나라 가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밟으면 되는 겁니다.
내가 뭘 할 거냐, 가 아니고 내 뒤에 뭐가 있느냐를 봐야 되겠지요, 내 뒤에 뭐가 있느냐를. 인간이 자꾸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왔다는 그 생각에서 ‘하지만 아담은 이미 지난 것이고 앞으로 내 미래가 뭐냐?’ 그렇게 자꾸 앞을 보는 시선인데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뒤를 돌아보라고 합니다.
뒤로 돌아보면 거기에 인간을 모형으로 간주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 아담 자체, 우리 존재 자체를 모형으로 간주하고 모형과 실체가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8장의 내용은 로마서 5장의 이야기로 다 채울 수가 있어요. 어떻게 연관되는가?
예수님의 피로만 연관이 돼요. 피! 그 피 이야기를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이스라엘과 이방인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나서 이방민족과 자기들과의 차이 나는 것, 그 차이 짐이 뭐냐에 이스라엘은 철두철미했어요. 이스라엘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신은 뭐냐?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우리는 수십배로 갚는다는 그 정신이었습니다.
헤즈볼라, 작살났지요. ‘이게 어디서 이스라엘을 건드려?’ 하마스, 작살났습니다. ‘어딜 감히 이스라엘을 건드려? 너희에게 율법이 있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되어 있어. 하나님하고 끊어진 인간들이 감히 우리를 쳐? 이란? 기다려, 핵폭탄 날릴 테니까.’ 김정은은 말만 할 뿐이지만 이스라엘은 말만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작살냅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UN? UN 같은 소리 하고 있네. UN이 뭔데요? 그랬던 그들, 이스라엘은 하나님 편이에요. 이방은 뭐냐? 하나님의 약속이 없어요. 언약이 없는 것은 개 같은 저주받을 자에요. 영원히 저주받을 자입니다.
그랬던 그들, 그랬던 그들이 에베소서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맞지요. 이말 맞지요! 이말 맞는 거예요. 언약이 없으면 하나님나라에 합류가 안 됩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주님의 실체가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피사건, 피로 나타나는 겁니다, 피로. 하나님의 죽음으로 나타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죽음 안에 비로소 지옥이 만들어지고 천국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자기한테 사기 치는 사람보고 ‘지옥이나 가라’ 하지요. 인간은 지옥을 거론할 자격이 안 돼요. 어느 누구도 지옥을 거론할 자격은 없습니다. 아무리 나한테 악한 일을 했다고 해도 지옥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한테 착한 일을 해도 천국 가지 않습니다. 천국 지옥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피 흘린 자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지옥과 천국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인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완성하지도 못한 주제에 이방인보고 개라고 이야기했어요. 제대로 율법을 완성한 것은 예수님이고 완성했다는 뜻은 피 흘림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피 흘림으로 율법이 완성된 거예요. 그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확정된 이스라엘과 확정된 이방나라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피 있는 자는 진짜 백성이고 피 없는 자는 다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전까지는 이스라엘도 이방인도 모형이었어요. 인간 자체가 모형이었습니다. 인간에서 구성된 역사, 인간에서 구성된 이스라엘과 이방이라는 민족의 차이가 다 모형이었습니다. 실체는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이방민족을 하나님의 천국 백성으로 하늘에 오르는데 뭔가 막혀 있다는 것이고, 그 막혀 있는 것이 뭐냐? 모형은 모형으로서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실체와 모형이 서로 막혀 있었던 거예요. 실체라고 주장했던 이스라엘도 기껏 모형이었어요. 최초의 인간이 아담도 모형이었습니다. 아담은 결코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실체와 모형과의 관계 속에서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어요. 모형이니 아담은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이지요. 한쪽은 모형이고 다른 한쪽은 실체기 때문에 다른 거지요. 다른데 그 다름 속에 같음을 집어넣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이제 로마서 5장을 봐야 해요.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모형과 실체와의 관계에서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무엇이 같은가 하는 겁니다. 우선 무엇이 같지 않은가를 로마서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상당히 어렵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선물이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않다는 말이 오히려 납득이 안 돼요. 왜 그런가? 그 뒤에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리고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러면 같은 것 아니에요? 같잖아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 된 그 원리와,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 된 그 원리, 이것은 누가 봐도 같은 것 아니에요?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런데 같지 아니하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16절을 다시 잃어보면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여기서 왜 같지 아니하다는 말을 하는가? 이게 선물이라는 겁니다, 선물. 한쪽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돼요. 아담의 범죄는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자동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에요. 변형되는 것이 아니고, 변형의 요소가 스며드는 것이 아니고 똑같아요.
생물학을 참고해 보면 1953년 5월에 왓슨(James Dewey Watson, 1928-)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 1916-2004)은 인간 속에 부모가 자식을 닮은 유전물질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어요. 물론 그전에도 낌새 정도는 알았습니다. 제가 저 연도를 기억하는 것은 1953년인 제 출생 연도와 같기 때문입니다.
DNA(디옥시리보핵산), 핵산이라는 분자 물질을 발견했는데 그게 DNA라는 거예요. 방사선회절(파동이 진행 중 장애물을 만나면 장애물을 에워 돌아 나가고, 작은 구멍을 통과할 때 넓게 퍼지는 현상)로 해서 DNA의 그 구조를 밝혔습니다. 보니까 두 개의 선이 사슬 모양으로 회전식 계단을 올라가듯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게 어떻게 부모의 형질을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가? 요리로 치면 DNA 안에 레시피가 들어있어요. 복사할 수 있는 레시피가 들어있는데 왜 두 가닥인가? 한 가닥이 따로 떨어지게 되면 이게 메신저 RNA(mRNA)가 됩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RNA가 되면서 세포핵 안에 있는 DNA가 바깥으로 나옵니다. 소포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리보좀(Ribosome)이 있습니다. 거기서 메신저 RNA레시피를 염기서열 세 개를 잘라서 한 조로 만듭니다.
즉 리보좀은 세포질 내 단백질 합성 장소입니다. DNA에서 전사한 mRNA에 붙어 유전정보에 따라 운반 되어온 아미노산의 펩티드결합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단백질인데 그 1차원 구조를 3차원의 단백질로 만들면서 이때 전기적작용에 의해서 가장 안정적인 원리에 의해서 접히고 구부러집니다. 올해 2024년도 노벨화학상이 이걸 정리한 내용입니다.
인간의 과학적 관점은 ‘아담은 어떤가?’가 아니라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얼마나 멀어져 왔는가? 왜? 우리는 우리니까. 안 돌아갑니다. 앞을 보는 시선이지요. 후방카메라를 전혀 생각 안 합니다. 뒤로 주차할 생각을 안 해요. 주차거든요. 아담에 머물러야 해요.
다시 말해서 ‘내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죄로 나는 지옥 간다’가 확정된 그 사건, 인간과 뱀의 만남, 그 사건에 우리를 주차해야 돼요. 후방주차! 그 주차를 안 하니까 인간들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뭐 슬픈 일이 있으면 울고. 인간은 울 권한도 없어요. 모형이 왜 울어요, 모형이. 모형이 왜 웁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것 같아!
“난 망했어!” 무슨 모형이 망한 게 있어요? 모형인데. 모형이 뭘 망한 게 있어요. “난 월급도 못 받고 회사에서 쫓겨났어. 망했어.” 그게 뭘 망한 거고, 그게 뭐가 울 일입니까? 현란한 존재의 스텝에 불과하지요. 그냥 몸부림치는 거지요. 여러분,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후방카메라를 찾는 거예요, 후방카메라.
집에 차 없는 사람은 후방카메라가 뭔지도 모르겠지요. 유-튜브 찾아보세요. 후방기어를 넣으면 화면에 세 가지 색으로 선이 나와요. 노란 선, 빨간 선, 파란 선. 그거 보면서 주차해요. 일상의 세세한, 시답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서, 사돈간의 상견례 하는 그 자리에서도 후방카메라를 찾으세요.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 이미 우리는 악마와 한통속이라는 것, 우리는 모형이기를 거부하고 내가 주인공이라고 설쳐대는 것, 그걸 찾아보세요.
그거 찾아보면 주님의 십자가는 노란 선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핸들을 삐딱하게 해서 엉뚱한 데로 가고 있어요. 딱 그 자리 아담의 모형의 자리에 정석으로 주차가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모형에서 비켜 가 있어요. 악마가 우리를 가만 놔두지를 않아요, 악마가. 악마한테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2024년도 노벨화학상 받은 내용에 뭐가 있느냐? ‘염기서열을 제대로 구조화시키는 그 여하에 따라서 새로운 단백질 기능을 우리 손으로 조절할 수 있다. DNA레시피를 조절하게 되면 단백질기능을 조절하게 되고, 그러면 태아단계에서 선천성 질환이 있는 단백질을 빼내고 정상단백질을 집어넣게 되면 그 애는 선조, 아담에서 내려오는 모든 질환으로부터, 저주를 끊어낼 수 있다는 이걸 연구해서 노벨상 받는 거예요.
투자 안 받겠습니까? 회사들 달려들겠지요. 그러면 아름다운 선진조국 되겠지요. 돈으로 남길 만한 그것이 이 세상이 유일한 진리잖아요. 그런 회사에 취직하기를 바라고요. 취직해서 돈 벌고 자식새끼 키우고. 태어나서 자라서 짝짓기해서 자식 낳고 살다가 죽고. 인간은 그것 외에 뭐가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요! 지금 제가 거짓말하고 있습니까? 그거 외에 뭐가 있어요, 그거 외에?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서열부터 시작합니다, 서열. 서열이 언약이고요. 서열, 구조, 모형, 모형은 패턴입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패턴. 서열, 구조, 모형. 이걸 거꾸로 하면 서열…, 약속 속에 있는 언약, 최초의 것은 약속이고 그 약속을 세분화하면 그것이 언약이에요. 언약에서 그다음에 구조, 구조는 뭐냐? 십자가로 다 이루는 것.
그다음에 남아 있는 것은 기능, 기능은 우리 인간들의 행위, 행동, 주님이 피 흘려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 그 기능을 구약의 모형, 성막에서 했다는 것 아닙니까, 성막에서. 제사장이 거기서 한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8장의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성막이 모형과 그림자였다.
세상이 생각하는 것, 세상이 자기 편의로 자연에 다가가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탐색하는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과 거꾸로 뒤집어야 후방카메라를 통해서 아담에게 최초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아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최초의 사건은 동일한 내용으로 역사에 반복이 되고 복제가 돼요. 아담의 복제에요.
여기에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그냥 아담의 복제에요. 여자도 늙으면 남자 같고 남자도 늙으면 여자 같아요. 그냥 아담이에요, 아담. 학교에서 너무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교육만 받아 놓으니까 성경의 세계를 모르잖아요. 존재의 뒤 편의 세계에 전혀 깜깜한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는 그 아담의 반복 속에서 어느 누구도 헤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헤어날 수 없다.
그러면 모형과 실체에서 같은 것은 뭐냐? 고맙게도 아담이 죄를 지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께서 죄속에 먼저 들어와서 죄인 입장에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어떤 인간도 아버지를 모르니까 아버지 앞에서 아담이 했던 방식 그대로 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이것은 자동적으로 아담 안에서 복제니까 저주가 반복되는데 예수님 한 분이 나섬으로써 아담에 있던 그 모형을 닮은 실체…, 아, 세상에 이런 일이! 원래 모형은 원본을 실체로 해서 복제판인데 주님은 반대로 모형부터 시작해서 실체로 접근해 버렸어요. 한 사람이 의인이 되어서 아무 의를 행한 적도 없는 사람이 졸지에 천국을 가는 거룩한 백성, 완벽하게, 손댈 필요도 없이 완벽한 의인으로 선언되어 버렸습니다. 확정된 사실이에요.
그 방식이 동일한 방식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모형으로 오셔서 실체가 되신 그 과정이 우리 안에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선물로. 선물로 주어지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서죠. 그게 요한복음 13장 5-8절에 나옵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상식적인 분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여겼던 사람이에요. 랍비여, 스승이여, 나의 길을 인도하실 분이지요. 베드로는 자기 앞길을 인도한다고 생각했지 자기의 뒤로 갈 줄을 몰랐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자기의 뒤로 보내버립니다. 그것도 혼자 가지 않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죄를 씻겨준다는 말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밑에 붙은 먼지가 되시겠다는 뜻이에요.
상상도 못 했죠. 인간이 내 것 아니면 다 떨어낸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잖아요. 그걸 아시고, “네가 떨어내는 그 습관밖에 없는 너에게, 네가 떨어내는 이 구세주가 너에게 다시 처음부터 달라붙는 그 노선을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는 거예요. 예수를 누구 좋아합니까? 여러분, 밤에 잘 때 벌레가 달라붙어 보세요. 놀라 자빠져 떨어내죠. 예수님은 그런 존재입니다. 내 하는 일을 방해하는 존재예요.
그러나 우리가 모형이 되려면 주님께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야 돼요. 안 떨어집니다. 안 떨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계속 떨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렇게 느낍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뭉개지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왜 아무것도 아닌데요? 우리가 정말 대단하다고 여기는 악마와 결탁이 되어서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 그걸 구체화하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교회를 10년 나오고 20년 나오고 복음을 알아도 돌아서면…, 진짜 돌아서지 말아야 돼요, 돌아서지 말아야 돼요. 돌아서면 갑자기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란 뭐냐 하면, 사랑은 우리 죄를 발굴 해주는 게 사랑이에요.
“너는 지금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나는 아담으로 돌리려 하는데 그래서 너는 처음부터 죄였다, 사망이었다, 저주였다.” 그걸 이야기 해주고 “너는 하나의 모형이었어. 너는 아담에서 못 빠져나와.” 그걸 알려주는데 우리는, “옛날 사람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 있습니까~? 나는 내 인생 알아서 삽니다.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결정도 내가 할 거예요. 교회를 나오든 말든, 예수를 믿든 말든 내가 결정할게요.” 이 고집, 존재의 현란한 스텝, 발악하고 있네요, 발악…, 과학이든, 문학이든, 무슨 노벨상이든 내가 보기에는 미친 사람들의 발악이에요. 그냥 오락이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순간은 와요. 그게 사랑입니다. 구약의 ‘아가서’는 바로, 자기 앞길만 보면서 잘난 체하는 인간을 어떻게 뒤로 빼돌려서 그것을 하나의 자기 몸으로 연합시킬 수 있는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가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이야기해요. 처음에 사랑을 이야기할 때, 역시 이거는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먼저 씻는 것처럼 솔로몬왕이 먼저 술람미 여인에게 다가갑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가 1장 3-4절,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이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왕이 친히, 이미 확정되었어요, 너는 내 신부로서 내 궁에서 나와 함께 영원히 살 존재라는 것을 확정시켜 줍니다. 확정시켜 놓는데, 누가 빼느냐 하면 이 술람미 여인이 빼요. 뒤로 주춤합니다. 사랑에 대해서 일단 거부해요.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오빠가 나를 포도원에다가 나를 집어넣고 일을 시켜서 얼굴이 시커멓게 탔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여자는 임금님이 차지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가요(아 1:6). 아가서는 내용이 그 신랑 안에 솔로몬 이야기, 술람미 여인 이야기, 주고받고, 주고받는 희곡이니까.
그렇게 하니까 신랑 되는 솔로몬왕이 “그 포도원 어딘데? 그 포도원 어디야? 얼굴이 시커멓던 뭐든 간에 나는 그런 거 생각 안 해. 내 사랑을 찾아서, 나는 멈출 수가 없어. 내가 찾아갈게. 내가 네 포도원 갔을 때 나를 외인으로 상대하지 마라. 단박에 나를 알아봐.”라고 이야기해요. 아가 1장 7절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내가 너에게 얼굴 모르는 사람같이 간주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이게 바로 솔로몬왕은 술람미 여인을 육체적으로 사랑해서 자기 궁 안으로 들이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개 같은 이방인들에게, 자기를 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방식은, 생명나무에서 선악과로 와서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로 이끌기 위해서 자기가 갖고 있던 생명을 아낌없이 저주받을 자를 위해서 내어줬어요. 그게 바로 피입니다.
피를 내어줘서 그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그 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하나가 된 것처럼 하늘의 하나님과 저주받은 쫓겨난 인간과 연합되는 것은 중간에 끼어든 ‘내 피밖에 없다.’ 이 피가 이제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로 발을 씻어 주는 방식으로 찾아온 거예요.
“베드로야, 지금은 네가 발 씻는 이유를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리라.” 나중에는 알리라. 이 피가 구약 때부터 성막에서 계속 일어났던 거예요. 어떻게? 모형적으로, 모형적으로. 이미 마귀와 한통속이 된 인간을 분명히 추방시켜 놓고, 어떻게 그걸 생명나무가 넘실대는 천국에 같이 살게 하십니까? 그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원수 된 자여, 하나님 없는 자여, 저주받을 자인데.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피를 흘렸잖아. 네 죽는 죽음 말고, 내가 죽은 죽음에, 질퍽질퍽한 죽음에 네 죽음 생각하지 말고 이 핏속에 들어와라, 이 핏속에” 구약의 제사장들은 실패했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모형이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이미 천국에 합류된 사람이에요. 나는 모형이었다!
‘내가 주인공인데 어떻게 예수 피를 찍어 발라서 천국에 가?’ 이거는 모형이 아니에요. 이거는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자기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는 소리예요. 자기가 모형이라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주인이었다.’라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삭제당하는 겁니다. 피 앞에서, 이미 확정된 십자가 피 앞에서 내가 썩는 거예요. ‘나는 죽어도 이거는 죽는 게 아니야. 그냥 모형으로서 죽는 거야.’ 태어나도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형이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모형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거예요, 모형 태어난 것을. 주님의 모형.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그걸 가끔은 느껴요. 바로 애인이 있을 때. 애인 있을 때 그걸 느껴요. 애인 있을 때 어떤 고백을 하느냐 하면은,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입니다. “내 눈에만 보여요.” 그러니까 아가서의 그 포도원 앞에서 솔로몬왕이 찾아왔을 때, 얼굴 시커메 가지고 이거 뭐 세수도 안했어요.
일하다 걸려들었으니까. 기초화장도 못 했어요. 아침에 그 민낯 다 보여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안 꾸며도 괜찮아요. 그냥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의 모형이니까. “네가 있어야 내가 돼. 네가 있어야 내가 메시아가 된다고. 왕이 된다고 왕이. 그냥 그 자리에서 와.”
그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술람미 여인이 아가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 둘께요.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여기서 음 이탈을 주의해야 합니다. “알고 있죠~” 여기서 음이 이탈되기 쉬워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이은미가 큰일 했어요. <애인 있어요> 영원한 모형인 걸 몰랐는데 이제는 모형인 걸 알게 된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까도 말했는데, 일상에 돌아가셔서, 뒤로 가든 앞으로 가든 가세요, 세상에 가셔서 바로 후방주차, 내가 처음부터 모형의 복제물이라는 거,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사실, 그 죄를 이제 피 안에서만, 예수님과의 동일한 관점 안에서만, 공유된 관점 안에서만 내가 모형이고 그 피, 그 피가 생명이라는 사실이 그때 보일 겁니다. 그때 바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모든 것이 감히 우리가 생각할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왜 올라갔는지, 우리는 남의 일처럼 여겼습니다.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똑같은 내용으로 복제를 하고 있는 이 복과, 이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서 늘 감사로 보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