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종
2024년 11월 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8:1-2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8: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8: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8: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제사장은 자꾸만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지만 막상 메시야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리지 않습니다. 이로서 두 층의 의미-무의미가 성립됩니다. 하나는 시간 속에 있는 인간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은 대제사장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따라 제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하는 장소도 성막과 성소입니다. 이 성막과 성소는 창세기 2:17에 나오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사실을 집결해서 공간화한 곳입니다. 물론 이 성소 외부에도 당연히 ‘정녕 죽으리라’가 맹렬하게 작용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인간들이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를 모르는 곳입니다.
반면에 성소는, 인간이 죽는 이유가 하나님의 율법 위반으로 성립된 결과임을 시각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의 활동만이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활동입니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그 대제사장의 존재도 메시야 앞에서는 무의미로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히 8:3-4)
아직도 뭔가 하늘을 향해 드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임을 반복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나 곱게 갈은 곡물을 제단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제사장마저 무의미하다면 나머지 모든 자도 무의미합니다.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의미있는 것으로 여기고자 애쓰는 이유는, 자기 쪽에서 행하는 의미있는 그것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붙잡을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와서 하나님 믿고 그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자신이 보다 향상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쓰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깨끗하고 진심어린 영혼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심이나 솔직함은 도리어 진리의 반대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정녕 죽으리라’의 평가에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이 힘으로 비축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줄곧 자신을 신뢰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자기가 보기에 신뢰할만한 자가 되기 위해서 평소에 신뢰할 만한 것들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앞길을 열고 가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생각의 틀은 ‘정녕 죽으리라’에 합당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생각의 틀을 무엇일까요? 로마서 11:33-36에 나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렸다는 그 행위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럴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조차 비축될 힘으로 여기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약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인간들의 기본 틀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찾아들었습니다. 이 찾아드는 과정에서 이 인간 세계 자체가 죽음의 힘으로 가득찼기에 생명되시는 주님께서도 이 땅에서는 죽음의 속성을 나타내면서 나타났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조성된 나라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계로 하나님에게 묶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5:55) 즉 죽어야 하는데 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종에게 무한한 빚을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값을 치르고서 노예를 사오듯이 말입니다. 이 빚은 감히 인간들이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 빚을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선전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경악스러운 최후를 맞이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베드로도 평소에 주님과 생활하면서 자기 존재쪽의 허무함을 모르고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여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자기가 삭제된 채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발굴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삭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무한한 세계란 단순히 탐구하고 찾아간다고 해서 도달될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무한한 빚은 진 자가 종이라는 인식이 기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 18:32-34) 즉 내쪽에서 하나님과 관계설정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죄가 발굴되어 주님과 종의 관계에서 무한한 은혜에 대한 빚을 있음을 인식하는 자가 천국 백성입니다.
이 빚은 값은 인간쪽에서는 값없이 탕감되고 예수님쪽에서는 인간쪽에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생명으로 그 값을 갚아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값없이 하나님의 것이 된 것에 대한 감사마저 나의 힘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0강-히브리서 8장 1-4절(빚진 종)2411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8장 1-4절입니다.
히브리서 8:1-4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찌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여기 ‘대제사장’ 이야기가 나오고, 그다음에 ‘성소’, ‘장막’ 그 이야기 나오고, 예수님은 땅에 계시지 않고 지금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2절에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라고 되어 있거든요, 친히 하나님께서 베푸신 작품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장막입니다.
성소와 장막, 성소와 장막은 이 시간 중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제사장도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 시간이 흐르는 곳에는 대제사장의 활동과 성소와 성막이 의미가 있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는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앉았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 그리고 지상에 있는 성막, 성소, 제사장, 그것 빼놓고 다 의미가 없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 빼놓고는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말은, 어떤 것도 소용없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짓이다. ‘하나님 믿고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겠다.’ 이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 시간 속에서 인간들이 자기한테 의미를 주려고 애를 쓰는 그 노릇, 그러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에는 주님이 계시고, 땅에는 제사장이 있고 그 외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예수님과 관계되어 있는 제사장만이 의미가 있다면 그 말씀을 오늘날 보면서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되고, 또 내가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이것이 의미가 없다면 어느쪽에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내가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도 내 쪽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의미 없는 것으로 간주하시는지, 그 이유가 뭔지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예수님과 대제사장, 하늘에 계신 분과 땅에 있는 사람의 그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데 하늘에 계신 분은 땅에서 뭘 드릴 것이 없다는 거예요. 반면에 3절에 보면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땅에서 의미 있는 제사장은 뭘 하나님께 바치고 드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4절 끝에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셨다면 그 예수님은 예물 드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의미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 있고 또 의미 있는 대제사장이 땅에 같이 있다면 둘 중 누가 의미가 없느냐?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대제사장 쪽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대제사장이 의미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같은 인간끼리에서 인간은 아예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따르는 제사장은 의미가 있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합류해버리면 제물을 드릴 것이 있는 대제사장도 예수님 앞에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이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볼 때 시간이 있는 모든 것들은 시간과 더불어서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는 겁니다. 헛짓하고 있는 겁니다. 헛짓하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헛짓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율법을 줘서 제사를 드리는 기능, 직능을, 의미도 없다는 그 직능을 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믿고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이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한테는 성립이 안 돼요. 하나님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이 사고방식 자체가 틀려먹은 거예요. 뭔가 인식, 생각의 틀이 고쳐져야 해요. ‘6일 동안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 왔습니다. 말씀 듣겠습니다. 듣기만 하지 않고 지키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가 언제 죽더라도 천국에 넣어줄 거지요?’라는 그 생각, 그 생각 자체는 애당초 하나님께서 거부하는 사고방식이에요. 그런 사고방식을 안 받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의미 있는 행동을 하는 제사장이 왜 예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가? 그들은 하나님께 뭘 자꾸 바쳐요. 성소, 성막에서 양을 바치고, 염소 바치고, 소 바치고, 자꾸 뭘 바친다고요. 그렇게 바칠 때 같은 인간들 입장에서 대제사장에 대해서 ‘야, 저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라서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에 하나님께 자꾸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는구나…, 또 받으시는구나.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 제사장을 믿으면 그 제사장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겠다.’라는 것을 제사장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 8장 4절처럼 막상 구원자가 오니까 구원자 되는 예수님께서는 뭘 안 바쳐요. 대제사장은 바치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안 바치고. 그전에 사람들은,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어서 양 바치고, 소 바치고, 염소 바쳐서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이 맞다.’ 이런 식으로 자기 확정을 했는데 막상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이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안 바치는 거예요.
본문 4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왜? 제사장은 자꾸 바쳐야 되고 예수님께서는 안 바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쳐서 구원된다는 이것은 애당초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되면…, 여기서 인간은 뭘 기대하느냐? 전보다 더 순전한 마음, 깨끗하고 진실한 정신, 착한 영혼 이런 것으로 자기가 달라지게 되고 그 달라진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오, 그래 깨끗해졌구나. 천국에 와야지. 너같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천국 가겠어? 내가 받아줄게.’ 이러한 계획을 인간들이 기대하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기 전에는 더러웠는데 말씀을 지키면서부터는 전보다 더 깨끗하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항상 진심으로 솔직하게 나와야 한다. 솔직하게 살면 하나님이 다 응답하신다.’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진심, 진심의 반대가 진리에요. 진심이 반대가, 솔직함의 반대가 진리입니다. 한강이라는 작가가 쓴 책의 내용에 인간의 진심과 진실이 담겨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영혼 안 받습니다. 순전하고 순진한 마음 안 받아요. 아예 안 받아요. 아예 안 받습니다. 뭔가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그 인식의 틀 자체가 교회 몇십 년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그거 다 헛방이었던 겁니다.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목사가 속여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이미 그런 선입감을 가지고 억지로 거기에 성경을 끼워 맞췄던 겁니다.
그러면 그 인식의 틀, 생각의 틀을 뭘로 바꿔야 되는가? 로마서 11장 34절에서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간단하지요.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 니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너희들 몰라! 너희가 인간이야?” “예” “그러면 너희는 내 마음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주의 마음을 안다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누가 내 마음을 알아? 몰라!”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의 계획을 알아 맞췄어요? 누가 주님의 계획을 눈치챘습니까? 아무도 눈치챌 수 없어요. 그다음에 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주님께 드리면 주께서 갚아준다고? 뭐~? 어느 사기꾼이 그런 소리를 해요, 어느 사기꾼이! 순전한 영혼을 받는다고요? 깨끗한 마음을 받는다고요? 성실한 마음을 받는다고요? 안 받아요. 십일조 받는다고? 안 받습니다.
마귀가 사기를 쳤지요, 그동안 마귀가. 목사 입을 통해서 마귀가 사기를 쳤지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제사장이 바치던 소와 양이나 염소도 안 받아요. 왜 그걸 받는다는 생각을 왜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몰라서 그렇고 주님의 마음을 몰라서 그렇고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그래요.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해요. 뭘로 바꾸는가?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주님으로부터 새로 나온 만물만 천국에 갑니다. 주님으로부터 새로 출발, “우리 출발 새로 하자.” 다시 말해서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도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주께 드리고, 다시 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여러분이 한 번 판단해 보세요. 내가 주께서 드리고 나머지 내 것으로 남겨진 것이 있는지를 한 번 보라 그 말이지요.
일요일은 주께 드리고 월, 화, 수, 목, 금, 토는 여러분 것입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에 헌금 한 5천 원 하고 나머지 수입은 자기 것입니까? 내 것으로 되돌아오는, 내 것이라고 남길 것이 따로 있느냐 그 말입니다. 따로 있다면 그것은 내 쪽에서 하나님을 다루겠다는 거예요. 우상이지요. 귀신 섬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 쪽에서 하나님을 다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고, 이것은 주님이 한 것이라고 하는 그 사이에 말씀이 와서 벽을 쳐버립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고 주님이 한 것은 이것입니다, 라고 그것이 갈라질 때 이미 그것은 두꺼운 벽이 있어서 내 쪽에서 그걸 통과를 못해요. 왜 인간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받지도 않은 것을 두고 혼자서 받으신다고 생각해서 ‘순전하고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지?’
왜 그런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계속 자기가 신뢰하는 것만 남기고 신뢰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파기하면서 자기 앞가림, 자기 길을 개척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믿을만한 것은 남기고 믿지 않는 것은 피하는 방식으로 자기 길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요.
그러면 인간은 어떤 것을 신뢰할까요? 힘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신뢰하는 거예요. 힘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마태복음 26장 51, 52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 중 하나가…, 그게 나중에 보면 베드로였어요. 베드로가 칼을 빼서 그렇게 하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힘을 추구하는 자는 다 그 힘으로 망할 것이다. 어디에서요? 이 세상에서요? 아니요. 영원히 지옥에서. 힘 추구하거든 그것은 지옥 가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이런 식으로 지옥 가고 있다는 겁니다. 힘을 추구하는 것. 그런데 인간은 힘을 추구하는 것만 반기고 나머지는 안 돌아봅니다. 돌아보지를 않아요.
힘을 추구하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도무지 안 믿고 있는 거예요.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은 이 모든 인간들이 강한 것, 힘의 강한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피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너무 약해서 찾지 않는 분으로 오신 거예요, 너무 약해서.
뭔가 찾고 추구하려고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나한테 힘 되는 것만을 얻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힘이 안 돼요. 구약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힘이 있는 하나님인데 막상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힘을 다 뺀 하나님이에요. 그 힘을 빼서 쓸모없다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쳐서 십자가에 죽여버렸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믿어요? 개코도 힘도 없는걸! 힘도 되지 않는 십자가를 왜 믿어요? 후딱 지나가지요. 힘없는 것은 실재적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어요, 인간은.
어제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여기에 혼주분도 계시는데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해요.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는데 신랑 신부 둘이 짰어요. 그동안 들어왔던 주례사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을 다 적어 왔어요. 그래서 스스로 셀프 주례를 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주례를 하는 거예요. ‘나는 신랑으로서 맛있는 반찬을 해주겠고, 절대로 아내를 속상하지 않게 하겠고, 늘 웃게 한다’라고 평소에 들어왔던 주례사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나한테 주례할 생각 마세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알아서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미리 다 적어 왔어요. ‘할말 없지요? 주례하는 분들?’ 이런 식이에요. 신부는 또 ‘남편이 하는 일을 적극 후원하겠고 간섭하지 않고 잘 도와주겠다.’라는 등등 저희끼리 주고받으면서 주례를 다 해버렸습니다.
그 말은 뭐냐?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제가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고맙습니다.’라는 것인데 속으로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내가 이렇게 장성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할 때 제가 신랑 신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네가 누구지? 내가 뭘 해서 이만큼 이뤘다는 그 힘의 구축 말고, 힘의 비축 말고 네가 누군지를 네가 알아, 네가 누군지를? 힘만 찾고 있는 네가 누군지를 알아? 그게 정상이야?”
같은 인간들끼리는 아무도 정상적인 인간이 없기 때문에 같은 인간들끼리 비슷하게 살면 그게 정답인 줄 알고 있어요. 내가 누구냐를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남들 비슷하게 살면 그게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말라기 2장 2, 3절에서 이렇게 합니다. 인간은 악마가 퍼질러 놓은 악마의 똥이에요. 악마의 배설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니까 말라기에서 “그 똥을 네 얼굴에 처발라 버려라.” 했어요. “어디서 그 더러운 것을 나에게 바치려고? 네가 누군지를 알아?”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줘도 듣지도 않고요. 힘 모아서 그저 인간 비스무리하게 살면 인간 대우받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은 그런 인간들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 22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1절에 단서를 이렇게 딱 붙여놓고 22, 23절에 무시무시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가 교회 60년 다녔습니다.” 혹은 “50년 다녔습니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그것은 네가 조작한 네 모습인데 누구시죠? 네가 내 앞에 나온 적이 있어? 없잖아. 같은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과 비교했지. 네가 내 앞에 나온 적은 없잖아.”
1865년에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이 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소설이 있어요. 영국의 수학자가 쓴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책이지요. 잠결에 토끼가 지나가면서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면서 “아이쿠, 늦었어, 늦어!” 하는데 엘리스가 ‘저 토끼가 어디로 가지?’ 하고 토끼를 따라서 굴속으로 들어가서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그 토끼 굴 속의 세계가 엘리스라는 소녀가 자라온 인간세계하고 전혀 달라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다른 법칙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거기서 갖가지 모험을 하면서 곤란을 겪습니다. 버섯을 먹으면서 몸을 조절하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은데요 그중에 어떤 이야기가 제 주목을 끌었느냐?
꽃밭에 갔는데요, 꽃이 엘리스를 보고 하는 말이 “얘? 너 무슨 꽃이야?” 꽃의 세계에서 꽃들이 보기에 이상한 꽃이 들어왔다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들처럼 생기지 않은 이상한 꽃이 오니까 “얘! 너 무슨 꽃이야?” 그러니까 엘리스가 기가 차서 “내가 왜 꽃이야?” “너 잡초구나.” “나 잡초 아닌데?” “그러면 네가 누군지를 설명해 봐.”
엘리스는 그 자리에서 할말을 잃었습니다. 내가 누군지를 내가 설명을 못한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설명할 거예요. 나는 몇 학년이고, 나이는 몇 살이고, 학교는 어디 다니고, 어디에 살고…, 그런 것이 돼요. 그러나 꽃들의 세계는 그런 것이 완전히 무의미한 거예요. 의미 없는 거예요.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이 세계가 과연 진리의 전부냐 하는 것을 묻는 겁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만 그 내부에 뭐가 자리 잡고 있는가? 힘이 자리 잡고 있어요. 힘에 준해서 모든 것을 법적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그 책 끝부분에 보면 토끼를 찾아야 빨리 빠져나올 수가 있는데, 엘리스는 빨리 빠져나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거기에 아주 난폭한 여왕이 있고 그 여왕은 빨간 장미만 정원에 있기를 원해요. 그런데 정원사가 실수를 해서 하얀 장미를 심었어요. 거기에 빨간 페인트칠 해서 빨간 장미를 바꾸는데 그만 한 송이를 놓쳤어요. 그게 들켜서 죽어버립니다. 엘리스가 “그것으로 사람을 죽이느냐?” 할 때 카드 병정이 “저것도 죽여라!” 할 때 “으악~ 안돼!” 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꿈속에서 엘리스라는 소녀가 느꼈던 것은 지금 오늘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내가 열심히 힘을 모은다고 해서 나답게 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갇혀 있는 이 세계, 아무 의미 없는, 무의미한, 시간만 때우는 이 세상에서 나는 적합한 인간으로 살려고 헛짓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그 말이지요. 헛짓.
말씀은 왜 있습니까?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말씀 따라 주님이 오신 거예요. 우리는 애초에 말씀을 버리고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구원을 받아요? 이 인간이 드린 것을 하나님이 받는다고요? 안 받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뭐냐? 엘리스는 토끼를 만나야 빠져나오는데 여기서 어떻게 방법이 있겠는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그 책에 보면 마지막에 힌트가 있어요. 카드 병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 “안 돼!” 하면서 막다가 꿈에서 깨어났잖아요. 성경에서의 방법은 뭐냐?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 죽임을 당할 때 죽는 이유를 알아야 해요. 그냥 자살하는 것과 차이가 나야 돼요. 말씀이 와서 죽여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주님께서 친절하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해주시는가?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그것을 예시했던 거예요. 레위기 25장 55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종으로 삼았다, 종으로. 품군, 종으로 삼은 거예요. 종으로 삼았는데 이 종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값을 치렀어요. 그게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마땅히 지옥 가야 될 인간을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값을 치러서 잠시 하나님의 종으로 천국에 대해서 실습용으로 약속의 땅에서 살게 하신 거예요. 실습생입니다.
값을 치렀기에 여기에 뭐가 성립되느냐? 빚이 성립돼요. 빛이 성립됩니다. 관계를 보세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아닙니까? 지금 이 세상은요, 이런 성경의 이야기, 이스라엘의 이야기하고 전혀 상관없는 세상이에요.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애쓰고 노력해서 얻은 그 힘으로 내가 살 만큼 살고, 죽고 난 그 뒤는 난 모르겠고 사는 동안 내 노력으로 살면 그만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자유인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사는데 누가 뭐래? 바쁘면 교회 안 나올 수도 있지 뭘 어쩌라고? 내 인생이야, 내 인생.’
내 인생은 종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주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부터 시작하거든요. 이스라엘부터 시작할 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줬는데 그 율법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느냐?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렇게 했지만 “정녕 죽으리라”가 들어있어요.
생명 되시는 주님이, 주의 이름이 죽음 안까지 침투해 들어온 거예요. 죽음뿐인 세계에 생명 되시는 분이 들어와서 “이제부터는 너는 나의 노예, 나의 품군, 나의 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살다가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죽는 너무나 당연한 그 세계와 생명 세계의 그 경계선, 그 대기권을 뚫을 때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뚫었어요.
생명 세계가 우리 바깥에 있고 이쪽에는 죽음뿐인데 죽음 세계에 있으면서 인간은 늙어 죽는 것만 생각했지 그 자체가 죽음의 세계인 것을 못 느끼고 있으니까 저쪽 생명 세계에서 투입될 때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투입된 거예요. 그 죽음의 원인을 집약해서 모아놓은 그 장소가 성소고 성막이에요. 넓게는 성소, 그 안에 성막이 있어요. 성소와 성막.
그 성소에서 제사장이 뭐 하는가? 계속 퍼 날라요. 계속해서 나른다고요.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계속 잡아요. 새도 잡고 곡물 갈아서 드리고 5대 제사를 늘 하고 있는 거예요. 제사장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안 받는다는 겁니다. 대신해서 양을 값으로 받는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빚져 있는 겁니다. 이 죽음의 빚을 우리가 수고한다고 갚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못 갚아요. 마태복음 5장 25절에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결단코 이 지옥에서 너는 못 빠져나온다. 너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빚진 자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취지가 베드로의 질문과 더불어 아주 친절하게 설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1절에 “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했어요.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뭘 지금 베드로에게 이야기를 하느냐? “베드로야, 너는 지금 너 자신이 삭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살았다고 착각하는 상태에서 ‘남이 나에게 죄를 범하면 살아있는 내가 저 사람에게, 형제에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할 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 질문을 할 때 내가 죽어서 이미 삭제되었다는 그 자체, 내가 누굴 갚아줄 입장이 못된다는 그 자체를 모르고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모르고 질문하게 되면 뭐가 힘이 되느냐 하면, 자기가 남을 용서하는 것도 내 구원에 비축된 힘이 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좀 길지만 제가 짧게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4, 25절에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하니까 “아이고, 저는 못 갚습니다.” 해서 그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그걸 탕감을 해줬어요.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탕감을 받아놓고는 28절에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그래서 “못 갚습니다.” 하니까 30절에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했을 때 진짜 주인이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2-34).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셨어요. 이게 뭐냐? 현재 빚을 짊어지고 있는 그러한 존재인 것을 너희들이 왜 모르느냐 그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는 빚을 갚아야 하고 또 하나는 빚을 졌다는 말은 이것이 주종관계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 그 말이에요. 정녕 죽었어야 해요. 죽었는데 생명을 표현하고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주인과 종의 관계로 생명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빚을 우리가 무슨 수로 갚아야 구원을 받든지 천당을 가든지 하는데 무슨 수로 갚습니까? 갚을 돈 푼이나 있어요?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돈도 한 푼 안 들고 “너 다 갚았잖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이 값없이 의로움이 유효하려면, 이게 우리 안에 효과 있게 작동이 되려면 우리는 빚진 자 입장에서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리고 두 번째,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재주가 없다는 것부터 출발되어야 해요. 내 힘으로 내 인생 살았다고요? 우리가 바르게 살겠다고요? 네가 누군지를 지금 모르잖아요.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뭘 하겠습니다’ 하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에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고 땅값의 반은 자기 것으로 돌리고 반은 하나님께 드렸다가 사이좋게 한날에 부부가 다 죽었어요. 동아일보에 안 나왔는가 몰라요. 여기 사도행전에는 나왔어요. 5장에.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3절에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것은 “네가 지금 사람한테 헌금을 바쳤구나. 그러나 어디서 성령을 속이느냐?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바쳤다는 그 사실이 바로 바쳐놓고는 ‘나는 바쳤습니다’라는 그것이 나에게 남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 따로 있고 내 쪽에서 설정한 관계가 따로 마련한다는 그 자체가 사탄의 짓”이라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그것이 사탄의 지시라고 되어 있어요. 사탄이 너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렸구나.
따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진실하다, 의롭다, 착하다’ 할 건더기를 따로 남겨두는 것, 그것으로 주님의 빚이 갚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데 이 내용이 이미 구약에도 나와 있습니다.
구약 호세아는 요새 말로 목사님인데 누구하고 결혼했는가? 정결하고 깨끗한 귀한 집 규수하고 결혼한 것이 아니고 창녀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창녀라도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창녀가 아니라 여러 남자를 찾는 창녀입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당신만을 사랑해’ 이런 부인이 아니고 결혼하고서 또 다른 남자를 찾아다니는 그런 창녀, 하나님께서는 그런 창녀와 의도적으로 혼인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이 호세아 1장에도 나오지만 압축된 내용이 8장 8-10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저희가 홀로 처한 들나귀처럼 앗수르로 갔고 에브라임이 값 주고 연애하는 자들을 얻었도다 저희가 열방 사람에게 값을 주었을찌라도 이제 내가 저희를 모으리니 저희가 모든 방백의 임금의 지워준 짐을 인하여 쇠하기 시작하리라.”
호세아라는 선지지가, 이 목사가 의도적으로 남편을 버릴 요량으로 결혼한 여자, 또는 남편 말고 다른 남자만 찾는 그런 여자와 의도적으로 혼인한 이유가 거기서 자식을 낳습니다. 거기서 음란한 자식을 낳기 위해서 일부러 혼인을 하게 한 거예요. 그러면 호세아 선지자의 자식들이 음란한 자식이라면 그게 호세아 선지자가 필히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인간아, 네가 누구냐? 저 음란한 자의 자식입니다.” 이렇게 고백이 되도록. 피는 못 속이잖아요. 아담이 본성, 악마에 물든 아담의 본성, 그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요새 동성애 때문에 시위한다고 2백만이 모였다고 하고 기독교 신자들도 모인다고 하는데 동성애의 문제의 기본은 뭐냐? 동성애 속에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반골의 힘이 들어 있어요.
반골의 힘이라는 것은 뭐냐? 일단 반발하고 싶은 충동, 그 기질, 그게 반골이고 반항이에요. 동성애에 반대하는 그 내용이 로마서 1장에 나옵니다. 26, 27절에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그런데 동성애는요 아담의 죄 중에서도 약간 일부가 비어져 나온 부분이고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반골의 기질 악마의 기질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 반항하는 기질을 하나님께서 들추어내는 방법은 힘없는 메시아를 보내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힘이 뭡니까?
‘내가 모은 힘대로 내가 살겠다는데 네가 왜?’ 이게 힘의 방향이거든요. ‘내 인생 내가 살겠다는데 하나님 네가 뭔데?’ 이거라는 말이지요. ‘하나님 믿고 안 믿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기다려보세요. 내가 믿을 테니.’ 이게 힘이라는 말이지요. 출발점을 자기로 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정성을 다 바칠 테니 하나님은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천국 보내달라.’
이게 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 하는 하나님의 뜻과는 배치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은 너를 똑바로 알라는 겁니다.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바쳐라. 내가 망하게 해줄게.” 그거예요. 제사장이 양 바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의 틀은 메시아 오실 때까지 아무도 알지를 못해요. 그냥 그저 제사만 드리지 생각의 틀은 그대로예요.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자인하도록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 빚진 존재라는 사실을 발굴해 가는 식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미 ‘정녕 죽으리라’는 그 공간 속에서 인간들은 죽음을 향하여, 죽음 안에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뭘 해주는가? 네가 나쁘다, 가 아니라 네가 속해 있는 이 공간 그 자체가 이미 죽은 자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2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6절에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관원이라 하는 것은 힘의 집결체지요. 통치자니까.
7절에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감추었던 것. 이 죽음밖에 없는 세상에서는 감추어진 거예요. 그래서 관원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에요. 오직 주님만 아는 이야기에요.
주님만 아니까 주님 오시기 전에 인간들은 하나님앞에서 잘 보여서 구원받겠다고 기껏 바치고 또 바치고, 율법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고 그래서 그것만 하는 거예요. 왜? 말씀대로 살면 사는 만큼 나에게 의가 누적될 것이고, 나에게 누적된 그 의를 가지고 천국을 뚫을 수 있다는 그런 종교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겁니다.
생각의 틀은 안 바뀌었어요. 내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을 안하고 있는 거예요. 과연 율법에 그들이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고,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가지고 이미 내 쪽에서 다 해소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그런 대목들이 나와요.
아까 레위기 25장 55절 보셨잖아요. 5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희년까지 남은 해가 적으면 그 사람과 계산하여 그 년수대로 속하는 그 값을 그에게 도로 줄찌며” 이스라엘 백성 자체가 하나님 앞에 종입니다. 종인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제사로 말미암아 잠시 그 빚을 해소해서 값없는 은혜를 주셨다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이 사실을 이스라엘 내의 구성원들에게 인간들의 처지와 직업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갑자기 자연재해가 와서 재산을 날리고 어쩔 수 없이 자기 몸을 팔고 남의 종이 되어야 해요. 또는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고 난 뒤에 수입원이 끊어졌으니 역시 애들과 함께 남에게 종으로 팔릴 수밖에 없습니다. 옆 집 잘사는 사람에게 종으로 팔려간다고 보면 되지요.
그럴 때 딱 7년간만 종노릇 하고 7년 후에는 풀어주라고 되어 있어요. 그게 안식년이고 그 안식년의 7배 하면 희년이고요.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종에서 아들로 해방 시키는 원리원칙이 이미 이스라엘 율법 속에 감춰두듯이 이미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해방되는 그날이 오거든, 물론 네가 주인으로서 권리가 있는 줄은 아는데 그 권리를 포기해서 돈 받지 말고 그냥 값없이 줘버려라. 값없이 그냥 자유인으로 만들어버려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마지막 베풀 수 있는 전부요 최고의 복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값없이 준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값없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되어 있어요. 생명을,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받는데 그것도 값없이. ‘값없이’라는 말을 왜 했느냐 하면 우리는 빚진 자일 수밖에 없고, 종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는 이유로 자기가 값을 치러서 우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 20절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요, “너는 내 종이었고 내 것이었었어. 창세 전부터. 그런데 너희는 죄의 노예가 된 거야. 그런데 내가 내 피를, 내 목숨을, 내 생명을 값으로 내놓고 너를 그 악마로부터 해방시켜서 이제는 영원히 내 것이 되었으니까 내가, 이 예수님이 너에게 한 것을 증거하라.” 그 말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그냥 태어나서 열심히 살다가 결혼하고 애도 낳고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죽는 그 노선 이야기하지 말고, 태어나기는 죽음으로 태어났는데 이 세상 자체가 잠깐이고 이제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안목, 그런 레벨에서 남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의 노예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줄 모르고, 하나님께 막대한 빚을 졌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드릴 것 드리고 내 것 따로 챙기면 하나님께서 복 주는 줄 아는 그런 종교적 인식의 틀 가지고 그동안 하나님 생각하고 주님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것조차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그것조차 주님의 몫이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감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