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쓰레기
2024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26-28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음을 못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제작한 신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작자가 따로 있기에 그 원리 원칙도 외부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그 원리 원칙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방민족은 이 율법이 없기에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자기 역량껏 살아갑니다.
즉 자신의 수고와 자기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것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그동안 인간들은 헛된 노력을 해왔습니다. 자기 것을 건사하고 유지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면서 생을 살아갑니다. 과연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기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인간들이 타인을 감당 못한다는 말은 자신도 자기가 감당 못한다는 말입니다. 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더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의 기회가 다 상실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한 시간이 다 된 겁니다. 왜 사는지, 왜 죽은지, 그 이유조차 모르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더는 자아의 자율성을 지킬 수 없는 형편에 대해서 대단한 공포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들의 삶은 국소(局所)적입니다. 인생이란 자아 형성과정입니다. 살아가면서 오로지 ‘내가 누구며 어떤 존재로 구성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각자 개별적으로 자기만 챙기는 것을 평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은 ‘약점 가진’존재가 인간인 것들을 들추어줍니다.
애초부터 인간은 약점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번에’라는 말에 대해서 ‘자기 구원적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내포되는 있는 약점으로 인해 이 생각은 엉터리입니다. ‘단번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약점가진 모든 인간을 단번에 죽이고 없앤다”라고 말입니다. 구약의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욥 14:14)
난데 없는 고난을 자신의 약점과 연결시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욥을 조롱합니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욥 15:7) 그렇습니다. 여기에 제일 처음이 된 분, 혹은 산들이 있기 전에 산을 도리어 만드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숱하게 죽어나간 대제사장들과 이 예수님을 비교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방민족과는 특이함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수많은 제물들이 제단 위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제사 작업 속에서 그 제물들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는 지는 레위기 9:7-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그 속죄제 희생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 그 고기와 가죽은 진 밖에서 불사르니라”
약점이 없는 제물들이 인간들의 죄를 실어나서 제단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 제사입니다. 그 제물들의 육체는 결코 ‘진밖으로 불사르니라’로 마감됩니다. 재물 안에 인간의 약점이 스며든 결과입니다. 히브리서 13:11-13에 이 과정이 예수님의 최후 과정이 됩니다. “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즉 제사지낼 때마다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리고 그 버려진 쓰게 더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도저히 인간이 예상 못한 메시야입니다. 진정으로 천국에 합격된 자들은, 자신이 요구한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이 거부하고픈 메시야가 참진짜 메시야를 아는 자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그 메시야께서 율법을 자신에게 가져와서 새로운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새 성전’입니다. 그 새로운 성전을 통해서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것이 자아 구성에 나선 우리들의 육신입니다. 그 쓰레기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해왔던 겁니다. 자신도 감당못하고 남도 감당못한 주제에 말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사람의 손이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만들어진 성전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국소적이고 개인적으로 살던 자가 평균적으로 일관되게 성령이 하시는 일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단번에 일어내신 새로운 단번의 공간인 새성전입니다. 옛성전과는 달리 새성전이 생명수가 감당 못할 정도로 쏟어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성전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초막절을 그냥 물 붓는 이벤트를 벌릴 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새성전은 다음과 같은 신기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단번에 이루어진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반복적으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쓰레기인 것을 되풀이 되어 알게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함께 있음은 예수님 터진 배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 안에서 함께 있는 상황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9강-히브리서 7장 26-28절(단번에 쓰레기)2410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26-28절입니다.
히브리서 7:26-28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이 단어들이 바로 구약의 역사를 진행해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의 평소 생활을 구축했던 핵심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에게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이라든지, 백성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든지, 특히 28절의 ‘율법’이라는 단어, 이게 이방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말씀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굳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했던 그 단어를 우리 인생 속에 꼭 가져올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이런 율법이라든지 제사장 그거 빼고 바로 직접 다이렉트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구원이 되지 않겠느냐는 요령 같은 것이 발생됩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 통용되는 제사장이라는 것, 율법이라는 것, 그 단어들의 개념을 구성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도대체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이죠,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 우리와 차이점이 뭔가를 우선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했던 민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찾아온 적이 없는 민족이 이방 민족이고 우리 민족이에요.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빈손으로 찾아온 게 아니고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찾아왔고,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안 찾아왔기 때문에 자기가 인생 살아가는 것을 자기의 자아를 끄집어내서 그 자아를 견제하고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 수고가 내 한 것들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이 이방인들이에요. ‘내가 하는 노력이 나를 지킬 수 있다. 나 아니면 아무도 날 안 지켜준다.’ 이게 이방인들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준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한 그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했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율법이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했어요. 제사를 드리려면 대제사장이 필요하고, 또 대제사장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필요하고, 그 제사장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성전에서, 전에는 천막에서 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드렸는데 결과가 어땠는가? 똑같아요. 똑같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이거 지키면 복 받고 나중에 천국 간다.’ 이렇게 희망을 가졌는데 그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끝난 이유가 28절에 나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에 세웠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율법이 들어올 때 그 이스라엘 사람, 제사장들은 자기의 약점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는 생각을 못 하고 ‘열심히 하면 되잖아요.’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나의 노력과 나의 수고가 나를 지킨다는 데서 못 벗어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만 그 율법이 옴으로서 오히려 나의 약점만 노출될 뿐이고 나는 그 약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점에서 똑같은 겁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문제가 되는데 시편 127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여기 ‘헛되다’, ‘허사로다’, 두 번 나오거든요.
내 집 지키는 것, 내가 수고해서 지키는 것 다 헛짓이고 그다음에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세 번 나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내 영토를 지키는 것도 헛되다, 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싸대지 말고 그만 잠이나 자라, 이 말입니다. 잠자고 나면 내가 세우는 것, 하나님이 세우는 것이 네 곁에 있을 것이라는 뜻이에요.
이방인들의 헛수고도 지적하지만 하나님을 빙자해서 말씀 지켜서 내 것 해보겠다고 애쓰는 것도 헛수고로 끝났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의 멸망을 통해서 증명이 됐다, 이렇게 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전부 실패밖에 없다면 그럼 오늘 히브리서 7장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율법까지 줘 가면서 하시고자 하는 게 보여주고자 한 게 무엇이냐?
그게 바로 27절 끝에 나옵니다.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이루었다는 게 나와요. 이뤘는데 이룬 게 뭐냐? ‘단번에’ 단번에 이룬 거예요. 단번에 이루어졌다니까 이 ‘단번에’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해당되고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았던 이방인에게도 이 ‘단번에’라는 것이 그렇게 효과 있게 주어지는 겁니다.
어떤 교회에 나름대로 다녔던 어떤 딸이 갑자기 교회 다녀오더니만 좋아서 엄마에게 자랑합니다. “엄마, 나 구원받았어! 엄마 나 천국 합격했어.” 뭐든지 합격하면 좋잖아요. “엄마, 천국 합격했어.” 좋아서 고함지르면서 엄마에게 했어요. 엄마가 묻지 않을 수 없어요. 네가 교회 가서 무슨 소리를 들었기에 네가 천국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느냐, 라고 물으니 그 딸이 하는 말이 이사야 53장 3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즉 “내가 흠모하지도 않았고 내가 귀이 여기지도 않았던 바로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였어.”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에 의하면 내가 흠모하지도 않고, 내가 멸시했고, 내가 관심 두기도 싫고, 외면하고 싶은 그분이 구세주인 것을 아는 순간 그 딸은 천국에 합격 된 거예요. 그날 밤에 죽으면 그냥 천국 가는 겁니다. 이건 나이 구십, 팔십 되도록 교회 80년을 다녀도 소용없는 일이에요.
그 딸이 하는 이야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물론 그 딸은 제가 지어낸 딸이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싫어했어요. 내가 흠모하지 않았어요. 내가 기피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나를 합격시키고, 나를 구원할 사람을 내 쪽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먼저 생각한 게 문제였습니다. 나한테 약점이 있다는 것을 내가 발견을 못 한 거죠. 나는 열심히 하나님 말씀 지키고 율법 지키면, 하나님 찾으면 구원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교회 60년 70년 다닌 거예요.
목사가 시키는 거 다 했죠. 교회가 시키는 것도 다 하고. 백날 해 봐야 본인이 본인을 감당을 못 하는 겁니다. 추가되는 요구사항, 추가되는 이 법적인 그러한 질책, 자기가 자기를 패는 자기 평가, 아,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이 땅에서 힘들죠. 그런데 율법을, 성경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방인들도. 자기 감당이 안 돼요. 자기 감당하는 게 너무나 위험해요, 이 땅에서. 인간의 자기 감당이 너무나 위험하고 ‘그러면 죽으면 되잖아?’ 죽는 것이 더 위험해요. 왜냐? 죽어 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선택의 기회는 그걸로 끝나기 때문에. 제대로 선택도 못 하고 주저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사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제한 시간 끝났습니다.” 인생 끝나 버리면 숱한 세월, 백 살 가까운 인생을 다 소비했는데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르고, 왜 사는지 이유도 모르고, 해답도 모르고 그냥 멍청하게 그동안 긴긴 세월을 보낸 겁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하죠. “뭣하냐?”라고. “그동안 뭣했어, 인생? 뭣하냐 너? 우리가 싫어하는 그분이 구세주인 것을 그것도 몰랐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분, 내가 밀치고 싶은 분이 나의 구세주인 것을 그동안 몰랐어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구세주 찾아서 교회 나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내 마음에 드는 구세주.
약점은 자기한테 있다는 걸 모르고 자기 완전과 완벽을 추구하는 그것, 여러분, 그런 나, 그렇게 만들어가는 나.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형성 과정이거든요. 내가 만들 때 나는 어때야 하는가, 그 형성 과정이 인생입니다. 세 살 때, 네 살 때 애들 하는 행동 보세요. 일곱 살 때 하는 행동 보세요. 전부 다 내가 만드는 자아 형성 그것을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아의 무게를 여러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되어야 마음에 드는 내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이스라엘이 율법 가지고 얼마나 자아 형성했겠어요? 온전한 거룩한 자아,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 나름의 자기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양심에 준해서 남한테 해코지 안 하면서 완벽한 인생, 그런데 그렇게 했던 그 인생이 자기한테는 톤(t)수로, 무게로 다가와요.
물리학 기초에 이런 게 있습니다. “질량은 물체가 가속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이다.” 이게 물리학의 기본입니다. 자기 물체 무게가 자기가 운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으로서 작동하는 거예요. 내가, 내 움직임을 내 몸무게가 내 자아의 무게가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갈수록 힘들어지는 거예요. 나중에 자기의 물체가 이제 고장 가서 삐걱거리고 아파요. 허리 아프고 여기저기 아파요. 그러면서도 자아의 레벨은 또 유지하려고, 체면 유지하려고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하려니까 도대체 얼마나 자기가 망가지는지요. 인생 하루하루가 망가지는 연습이에요, 망가지는 연습.
그래서 인간의 몸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망가졌어요. 그런데 고마우신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말씀으로 널 망가뜨릴게. 말씀으로 내가 죽여줄게. 그리고 없애줄게. 네 문제가 뭐냐? 네가 있다는 게 문제잖아. 내가 말씀으로 없애줄게. 없애고 그 현장에 말씀 덩어리 만들어줄게.” 그게 새로운 사람이에요.
욥기에 보면 바로 욥이 우리가 살아야 될 그 과정을 미리 보여줍니다. 보여주면서 욥이 고백하는 하나하나가 우리가 평소에 내뱉는 한숨, 한숨을 말씀으로 응축시켜서 내뱉어 줘요. 사는 게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사는 게. “나는 착하려고 애를 쓰는데 왜 하나님은 저를 그냥 못 잡아먹어서 억눌러 버립니까, 짓밟아 버립니까? 내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게 욥의 탄식이에요. 우리 대신 탄식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욥이 자기 한계를 몰라요.
욥이 욥기 14장 14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거예요. 과연 죽으면 끝일까요? 욥기 15장 7절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데 그 공격하는 대목이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어요.
욥에게 이야기하기를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라고 물어요.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라고 조롱하듯이 욥에게 묻습니다. “네가 아는 게 뭐 있다고, 네가 제일 먼저 태어난 사람이야? 조상중에 조상이야? 네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이 산, 산맥, 이 산보다 먼저 출생했어?” 이렇게 조롱하면서 공격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런데 이 대목, 제일 첫 번째 나온 사람, 아니 사람보다 먼저 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왜 나중에 태어난 인간에게 그렇게 미움을, 밉상을 받아야 되는지 주님께서 알고 있어요.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인간 본인이 그걸 몰라요.
악마는 인간을 개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자아는 집단적이 아니고 개인적이에요. 자아는 궁극적으로 지킬 것이죠. 나의 모든 수고와 애씀이 마지막 지킬 게 있는데 그게 나 자신이에요. 이걸 국소적이라고 해요. 국소적, 딱 집어서 어떤 특징을 아주 점 같은 걸 꼭 집은 것, 국소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아의 형성 과정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일곱 살, 여섯 살 애들 행동을 한번 보세요. 국소적이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그래서 이 우주의 목적, 세상의 목적,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거 몰라요. 그저 일시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고 그 일을 벌인 상태에서 그다음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놓고 그다음에 내가 내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뭘 또 움직일까, 하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삶입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두 가지 요소인데요, 하나는 시간적 요소와 또 하나는 공간적 요소 두 개의 요소가 들어와요. ‘지금 오늘까지는 이거 했는데 내일은 뭐 하지?’ 시간적 요소죠. 공간적 요소라는 것은 ‘이게 지금 내 영토인데 내 영토를 보다 확장 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내가 살 수 있는, 이 자아가 건재할 수 있는 이 공간을 확장시키겠는가?’ 이 두 가지.
장사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장사를 잘 해서 내 가게 매장을 넓힐까?’ 동시에 ‘일 년 후에도 단골손님이 어떻게 더 늘어나는가?’ 시간적 요소죠. 그다음에 이 매장, 공간적 요소죠. 공간적 요소, 시간적 요소 안에서 자아를 더욱더 키워나가는 자아 형성의 요소만 인간들은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걸 합해서 국소적이다, 딱 하나의 장소에 집착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입니다. 그게 인간들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어떻게 하는가? ‘국소적’의 반대말이 글로벌, 이걸 평균화 시켜버렸어요. 너 말고 다른 사람하고 해서 평균화시켜버렸습니다. 보편화시켰단 말이죠. 글로벌이라는 것은 세계적이다, 크게 범위를 넓혀버렸어요. 넓혔을 때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율법을 준 것은, 어떤 인간이든 다 약점을 지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개인의 사정을 봐주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는 전체를 한꺼번에 적용이 되는 내용으로 주어진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약점을 지녔다. 어떤 약점이냐? 더럽다, 이 말입니다. 더럽다. 버려야 될 거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치 않아서 지옥으로 갖다 버려야 될 거다, 이런 뜻이에요.
국소화된 정신에 빠져있는 우리는 그걸 모르죠. 그걸 인정을 안 하죠.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밉죠. 싫어 버린 바 된 거예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은 기피하고 보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에요. ‘국소’에 빠져있다가 보편, 주님이 보시는 안목으로 바뀐 겁니다. 평균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라는 사람이 최초로 등장한 물리학자인데 그 사람이 이런 발언을 했어요. 이런 조로 이야기했죠.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종이를 위에서 떨어뜨리면 어떤 것이 빨리 떨어지겠는가?” 사람들은 “두꺼운 책과 나풀거리는 한 장의 종이, 당연히 한 권의 책이 더 빨리 떨어지지.”
갈릴레오 그 사람은 똑같이 떨어진다고 했어요, 공기 저항이 없으면 똑같이 떨어진다. 모든 인간은, 약점을 가진 인간은 똑같이 지옥 갑니다, 똑같이. 죄를 지으나 안 지으나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모조리 다 약점을 가진 평균화된 존재에 불과해요. 평균화됐다는 것은 개성이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그것을 율법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이 눈치챘어야 됐어요. 눈치챘어야 돼요. 그런데 율법을 받은 그 사람들도 율법대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뿐이지 그 제사를 드려도 소용없고 오히려 제사를 드리는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들춰내고 우리를 마땅히 죽여버린다는 그런 취지로서는 율법을 못받아드렸어요. 그렇게 율법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개인 중심으로,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율법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단번에”라고 되어 있는데 일단은 “단번에”에요. 본문 7장 27절에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었다’할 때 여기서 두 가지 해석이 나와요. 뭐냐 하면 자기 구원론 쪽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어요. 뭐 대부분이죠, 그런 사람이.
‘아, 율법으로 죄인 됐구나. 그러면 나 어떻게 천국 가지? 옳지. 주께서 대신해서 단번에 들으심으로 구원받았구나.’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거예요, 구원론적으로. 이 ‘단번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어떻게 하셨는가?’를 해석해야 하는데 이걸 자기 구원 중심으로 해석해 가지고 ‘아이고, 예수님 고맙다. 그런 예수님 같으면 내가 믿어줄게.’ 이런 식이에요.
내가 기피하고 싶고, 내가 거부하고 싶은 그런 예수가 안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단번에’라고 하시는 것은 공간적 단번과 시간적 단번,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어떤 운동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단번에’에 의해서 이미 쓰레기라는 사실, 약점을 가졌기에, 더럽기에 하나님께서 버릴 대상이라는 것을 주께서 단번에 보여주신 거예요. 쓰레기가 구원받아요? 성립이 안 돼요. 있을 수 없죠.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어떤 운동도 의미가 없는 운동만 나온다, 자아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 존재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쓰레기고 소용없는 거예요. 그 존재를 주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제사를 드렸던 제사장들이 계속 죽어 나가는 그 장소가 제사드리는 공간이거든요. 그 공간에 제사장들이 있지만 늙어서 자꾸 죽어 나가요. 그러니까 다른 제사장이 또 투입돼야 되고, 투입된 제사장이 또 죽어 나가고, 그래서 계속 죽어 나간다는 그 말이죠. 그래 놓고 그들은 눈치를 못 챈 거예요. 인간은 제사드려도 소용없다는 걸 그들이 눈치를 못 챈 겁니다.
여기 지난 시절에 했던 본문 23절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단번에 한 사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를 통해 나오는 사건이 ‘단번에’ 대한 사건이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사건이라 붙일 것도 없어요. 계속 죽어 나가는 데 영원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 하나밖에 없는 사건에 인간이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박탈당합니다. 너 살아도 소용없고 나 살아도 소용없어요. 감당하지도 못하는 존재 가지고 결국 버려질 존재인데 그걸 왜 감당해요? 잘못된 거죠.
또 인간은 살기 위해서 남하고 만나는데 사람은 자기도 감당 못 하는 주제에 남들도 감당 못 해요.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감당 못 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감당 못 합니다. 인간은 타인이 오게 되면 반갑지만 오래 있으면 감당하기 힘들어요. ‘좀 빨리 가줘, 집에서. 오래 있었잖아?’ 이런 식이에요. 자기 몸도 간수 못하는데 남까지 온전하게 간수하려고 하니까 힘들어 죽어요, 인간은.
주님께서는 그 내력, 그렇게 된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사건, 예수님 자신의 존재를 죽음에 넘깁니다. 죽음에 넘기고 주님께서는 그 아들을 부활시켜요. 아까 욥은 뭐냐?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그게 욥의 한계에요. 인간의 한계이고 구약 이스라엘의 한계요, 이방인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 다시 산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다시 산다면 그 다시 산다는 속에서 인간은 꼭 죽어야 된다는 이유가 부활 속에 들어있어요. 하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고등학생이오랜만에 동네 목욕탕 갔어요. 사람이 별로 없는 넓은 탕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탕에 들어왔죠.
물론 둘 다 발가벗었는데 자기 혼자 있는 욕탕에 누가 들어와서 고개를 들어 보니까 자기 담임 선생님이에요. 남의 반 선생님도 좀 그런데 자기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아이가 부끄럽겠습니까? 자기 담임 선생님이랑 인사하는데 갑자기 물 색깔이 벌겋게 변해요. 담임 선생님 몸에서 나오는 그 피가 점점 욕탕의 물 전체를 피로 범벅을 만들어 버린 거예요. 피로 함께 있다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의미잖아요.
“선생님 몸에서 피 나오는데요?” “잘난 척하는 너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내 쪽에서 네 죄를 위해 내 피가 쏟아져야 된다. 그러니 우리는 피안에서 같이 목욕하자.” 이게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게 율법의 완성이에요. ‘내 살과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영생이 없다’(요 6:53).
그러니까 그 담임 선생님과 그런 것도 참 부끄럽죠. 부끄럽지만 함께 하겠다는 그 공간은 단번에 이루어진 공간, 두 번 다시 또다시 나만의 자아를 챙기기 위한 나만의 다른 공간을 시간을 따로 뺄 이유가 없어요. 그게 ‘단번’이에요. 뭐가 단번이냐? 피 흘린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이미 확보되었다는 것, 그게 단번이에요.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단번의 시간이고, 단번에 이루어진 공간이 있어서 그 공간이 단번에 대한 공간입니다.
거기는 개인적인 국소적 견해는 소용없어요. 새로운 평균화가 거기 주어집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 에베소서 2장 20절 2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게 뭐로 되냐면 성령으로 돼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스가랴 4장 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어요, 나의 신으로. 이 말씀이 뭐할 때 말씀이냐? 하나님께서 스가랴, 학개를 통해서 또는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인간의 손으로 수고해서 지을 수 있어요. 성전을 지을 수 있는데 그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새 성전 안에 옛 성전의 취지가 담기게 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옛 성전, 인간의 손으로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재주로 할 수 있는 성전을 해놓고, 이 성전은 새 성전 앞에서 허물어져야 되고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옛 성전과 새 성전에 차이를 두는 겁니다. 차이를 두면서 ‘인간이 내가 나를 건사하기 위해 스스로 수고하고 노력하는데 그런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은 공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세워진 새 성전만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새로운 완벽한, 이젠 두 번 다시 그런 공간이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공간, 이것이 새 성전이고 이걸 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는 성전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새 성전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요. 그 새로운 교회, 단번에 이뤄지는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은 반복적으로 새 성전의 그 구조와 그 원칙과 성격, 새 성전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바로 옛날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우리 육신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짓인 것을 새 성전 안에서 계속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 돼요. 율법 안으로 들어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율법 안으로 한번 들어가 보죠. 에스겔 43장 11절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만일 그들이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새로움이 단번에 다 이루어진 입장에서 율법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시 모든 걸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주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예수, 내가 원하는 구세주, 내가 원하는 삼위일체가 이게 마귀가 그렇게 나를 조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내가 흠모하고 싶지도 않은 분이 나의 구세주인 것을 모르고, 내가 나를 좋아하듯이 그 나를 좋아하는 그 연장선 위에서 메시아를 찾고자 했던 이 모든 시도, 그동안 교회 나오면서 50년, 60년 했던 그 시도가 바로 나를 지옥으로 보내고 있었다는, 지옥으로 나를 가도록 촉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겁니다.
교회만 그렇겠어요? 이 세상 직장생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직장생활 왜 합니까? 나를 부끄럽지 않도록 위해서 직장생활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뭡니까? 반대에요. 너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다는 거예요. 너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그게 바로 옛성전의 기능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는 쓰레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새성전의 특징은 뭐냐? 그 쓰레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쓰레기에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부끄러운 가운데 이걸 기뻐해야 하고 감사해야 되지요. 사람들이,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거요? 그거 쓰레기가 쓰레기 사랑하는 거예요. 반복해서 쓰레기를 치워주는 이 고마움, 이것이 성령 안이라는 새로운 새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거예요. ‘단번’에서만 이루어지는 거예요, ‘단번’에서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도 살았고 함께 있는 사람은 쓰레기의 모습을 계속 드러내면서 살아있는 거예요, 쓰레기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래서 감사와 기쁨이 계속 살아나는 거지요. 국소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평균적이고 새성전 안에서 보편화된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점을 이미 말씀을 통해서 예언을 했었어요. 차분하게 처음부터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에 갈 때까지 조금씩 이러한 내용을 분명히 말씀을 해주셨고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 4장 14절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생이 물로써, 샘물로써 나온다는 거예요. 영생이 나를 우물로 사용해서 끊임없이 솟아난다는 겁니다. 그 물이! 물이 솟아난다는 것은 ‘단번에’라는 사건이, 그 ‘단번’ 내 안에서 계속 반복이 된다는 것인데 무엇의 반복이냐? 바로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난 그 일이 반복되는 거예요. 따라서 그 시작은 뭐냐?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반복해서 죽어 없어져야 돼요. 내가 죽어야 없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못 견뎌 하지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죄를 지적하면서 “네가 너에 대해서 좀 부끄럽게 생각하라. 더 이상 너에 대해서 어떤 집착이나 어떤 미련을 갖지 마라. 네가 너를 변명하지 말고 너를 방어하지 마라. 부끄럽지도 않나, 인간아!” 하고 계속해서 사태를 상황속에서 일으켜 주는 겁니다.
말씀을 네 속에 담지 말고 말씀이 되려면 너를 죽여야, 너를 쓰레기로 만들어야 비로소 말씀이 네 안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자기도 괜찮다고 여기면서 말씀 이야기하는 것, 그것 다 사기입니다. ‘나 이렇게 말씀 많이 안다. 신학 공부 많이 했다.’라는 이것 다 사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끄러웠었어?” “아니?” 그러면 사기지요. 어디서 쓰레기가 쓰레기값을 한다고….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보고 “네가 남자 다섯 명 사귀었잖아.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여섯 번째 남자지?” 이것은 그 사마리아 여인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자기의 치부, 부끄러운 부분이라 해서 꽁꽁 숨겨놨는데 이제 영생하는 물이 나오면서 같이 쓰레기가 툭 튀어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메시아를 만났다. 내가 원했던 메시아가 아니고 메시아가 나를 원했어, 이제!” 내 앞에서 쓰레기 노릇 많이 하라고 주님께서 원했을 때 심 봤다, 하는 식으로 메시아 만났다고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도 잊어버렸어요.
동네로 가서 메시아 만났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미친 사람이에요. 졸지에 미친 사람 되어버렸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더 심화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약점을 노출시키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노출시켜서 우리를 죽여서 없애는 기능, 우리 자아를 없애는 기능, 없애고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그 작업을 말씀이 하십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드디어 성전을, 주와 합류하는 공간을 단번에 완성된 공간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37, 38절에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에스겔 40장 1절부터 계속 나오는 것은 새성전 건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47장에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 흐르는 물이 발목에 찼다가 다시 무릎까지 오르고 그 물이 허리에 오르면서 나중에 강같이 되어서 헤엄쳐도 건너지 못할만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지은 옛성전은 뭐냐? 물이 안 나와요. 물이 안 나오니까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서 물이 나오는 그 폼을 잡는 거예요. 초막절에 물이 안 나오는 성전에서 물 나오는 폼 잡는 그 행사를 한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는 “뭣허냐?” 이런 식으로 하지요.
“물이 안 나오지요! 그래서 물이 안 나오니 물 길어다 붓고 있어요? 지금 소방훈련중이야?” 하시면서 “영생은 인간들이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인간의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손이 추가된 곳에서는 나오지를 않아요. 인간을 죽여버리고 인간을 없애버리는 그 현장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단번에, 그것도 단번에 나와요. 그게 뭐냐? 성령에 의해서, 새성전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새성전에서 나오는 그 육신에서 영생의 물이 계속 나와요, 영생의 물이. 요한복음 7장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영광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할 ‘단번에’ 단번의 사건, 죽었다가 부활하는 사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단번’을 반복할 그러한, 곧 인간의 육을 이길 힘이 아직 자기 백성에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것이 바로 새로운 기준점입니다. 새로운 기준점이에요.
인간이 인간하고 비교하는 기준점이 아니고 인간이 예상 못 한 기준점, 흠모할 것도 없고 싫어 버린 바 된 그 분의 기준점, 그분의 기준점으로 다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게 성령의 안목, 성령 받은 자의 안목이며 그 사람은 새성전 안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미 합격한 사람이에요.
합격해서 보니까 비로소 ‘아, 옛날 제사장들이 죽어 나갔구나.’ 제사장들이 죽어 나간 것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죽어 나가는 그것, 인간은 나중 문제고 제사장보다 먼저 죽어 나가는 것이 있어요. 제사드릴 때마다 죽어 나가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께 바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짐승이 죽어나갔으면 그 다음은 인간차례에요.
그게 주보 뒤에 나옵니다. 레위기 9장 7-11이 주보 뒤에 있으니 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단에 나아가 네 속죄제와 네 번제를 드려서 너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하고 또 백성의 예물을 드려서 그들을 위하여 속하되 무릇 여호와의 명대로 하라 이에 아론이 단에 나아가 자기를 위한 속죄제 송아지를 잡으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그 속죄제 희생의 기름과 콩팥과 간 꺼풀을 단 위에 불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고 그 고기와 가죽은 진 밖에서 불사르니라.”
진 밖에서 불사른다고 되어 있어요, 진 밖에서. 쓰레기가 나오는 거예요, 쓰레기가. 희생제물 드릴 때마다 쓰레기가 계속 생산되어서 그것은 어디로 가느냐? 진 바깥으로 쓰레기가 되어 나오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에 바로 그 대목이 나옵니다. 11-13절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능욕을 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쓰레기장에서 만나자, 그 말입니다. 주님하고 같이. 그게 개인적인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직장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 생활을 통해서 ‘왜 우리는 쓰레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그리고 우리 말고 머리 되시는 몸통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가 있는 거예요. 머리 되시는 분은 하나님께 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로서 이 땅에서 쓰레기의 삶을 사는데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감사한 일인지.
더 이상 개인적으로 자기의 완전과 완벽을 구할 어떤 행함도 필요치 않아요. 뭘 잘해보겠다고. 잘할게 뭐가 있어요? 타고난 게 자기 개인주의밖에 없는데 뭘 잘해볼 게 있습니까? 기준점이 그동안 나에게 있었다면 이제 기준점은 바로 단번에, 단번에 이룬 그 십자가 사건이 기준점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행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바로 여러분을 합류시킨채 지금도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 ‘단번’이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를 감당해 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대체 그동안 뭘 믿었는지,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었다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고 오류였는지, 그런다고 사정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것을,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마귀한테 속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단번에 우리가 쓰레기로 변하여 쓰레기 취급당하는 이 즐거움, 그 모든 것이 단번에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깨닫는 능력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