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에 걸린 인생
2024년 10월 20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23-25
(7: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7: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답을 하나님쪽에서 먼저 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제사 시스템에서 제사장들이 계속 해서 죽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답은 인간들의 일상에서 얻고 싶거나 듣고 싶은 답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듣고 싶은 답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데 유리한 것을 듣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시한 답은 존재나 인물이 아니라 직책입니다. 직책에 강저되고 부각되기 위해서 존재는 도리어 모호해야 합니다.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존재가 모호하다’입니다. 소위 ‘비(非)-존재’입니다. 있는 듯 하지만 일반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자, 그분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의 비-존재 안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미리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즉 멜기세덱의 직책과 기능이 완수될 때에 그 혜택을 입을 자들이 미리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직책이 무엇일까요? 그 직책이 바로 제사장직입니다. 제사장직이란 특이한 죽음을 늘 생산하는 일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특이한 죽음 생산’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이미 락lock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자물쇠에 채인 상태요 갇힌 상태에서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늘 자기 존재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나 어떻게 하면 멀쩡하게 건강하고 여유있는 살아남느냐’입니다.
이런 생각은 멜기세덱의 입장에서 보면, 제대로 존재하는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존재에 신경 쓰는 것은 본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아예 조상들 대대로 내려오는 그 죄 상황에 갇혀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유도 모르는채 인간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고 소멸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나는 왜 죽을까”에 대한 질문조차 안합니다. 그리고 같은 인간들끼리만 그리워하고 찾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보탬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존재에 대한 끈질김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존재 지탱방식은 이러합니다. 자기에게 남아 있는 에너지를 사회에 투자해서 거기서 얻은 이익으로 자기에게로 비축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일상생활’이라고 합니다. 이 일상생활이 악마로 인해 락에 걸린 것은 악마가 인간들을 자기 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악마 배 안에 다수의 인간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염소와 늑대 이야기]와 같습니다. 엄마 염소가 없는 사이에 늑대가 아기 염소들에게 찾아와서 집안에 들어가서 6 아기 염소를 다 잡아 먹었습니다.
그리고 포만감에 늑대는 깊이 잠들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집에 도착한 엄마 염소가 아기 염소 6를 찾다가 늑대 배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칼로 그 배를 가르고 그 안에 있는 자기 새끼 6을 건지고 그 배 안에 돌로 가득 채워서 늑대를 물 속에 쳐넣어 죽였다는 동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늑대는 몇 마리인가?” 일곱이지요. 큰 늑대 안에 다수의 늑대입니다. 악마 안에 다수의 인간들입니다. 유다서 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악마는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제사장 언약 코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시체를 빼돌리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는 그동안 악마의 기준에 준해서 죽는 죽음이기를 악마가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반면에 미가엘은 모세의 시신을 언약이 작동되는 그 시스템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다시 살 수 있으니까요.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하는 자들은 비록 잠시 악마 품에 있다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신 분의 능력으로 강제로 자기 품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해내지 못합니다. 조상 아담에 락이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인간 노선의 마지막에 ‘사람의 아들’로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최후의 자식으로서 선조의 사정이 다시금 정립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 안에 갇혀 있음’으로써 필히 늙어 죽어야 합니다. 이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이것이 제사직의 완성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걸린 죄의 자물쇠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참으로 제사직책으로 끌린 자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특이한 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보통 불신자라면 악마가 걸어넣은 락에 의해서 다음과 고백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이 상황에서 바르게 살아야 하고 나쁘게 행동하지 않아야 돼. 그래야 내세 좋은 결과가 나올거야”라고 말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자기가 넘어설 수 없고 도로 자기에게로 돌아와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관된 제사직에 저를 맡깁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간 사정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부렸다면’ 여기에 반드시 이 세상은 악마가 훼방과 땅 속 돌이 방해하고 가시덤불이 방해해서 씨의 열매는 맺힐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사단도 없고 돌도 없고 가시덤불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옥토는 이 세상에 없는 밭으로서 100배, 60배, 30배의 증산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곧 ‘무한의 능력’이 무한히 공급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무한으로 제공될까요? 스가랴 4:12에 보면 기름이 계속 제공되는 파이프에 해당되는 두 감람나무의 등장으로 알려집니다.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같은 왕직책과 여호수아같은 제사직입니다.
이것은 곧 히브리서 7:1에 나오는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직책입니다. 오로지 먼저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바로 예수님께서 마감된 그 직책 안으로 합류되는 자들이 곧 성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신을 살리려하지 말게 하시고 모든 것이 주님의 제사직에서 거저 주신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8강-히브리서 7장 23-25절(락에 걸린 인생)241020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23-25절입니다.
히브리서 7:23-25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제사 직능 또는 제사 방식이 먼저 있을 때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사장이라고 하죠. 그런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제사 방식을 굳이 허락하시고 그렇게 구성하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제사장 방식 안에서만 인간이 계속해서 죽어나갈 수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 숫자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라고 되어 있어요.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들이 계속 죽어 나간다는 말은 인간 입장에서 인간이 우선인 줄 알지만 사실은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죽는 이유를 묻지를 않아요. ‘뭐 살 때까지만 살지. 그다음은 모르겠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거예요.
죽는 이유를 모르면 사는 이유도 몰라요. 왜 죽는지를 모르면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겁니다. 허송세월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서로가 죽어가면서도 자기가 죽는 이유를 아무도 몰라요. 그 이유는 인간은 자꾸 인간만 찾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인간과 만나고 싶어요. 인간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왜 사람이 자꾸 사람이 만나고 싶으냐 하면, 어떻게 죽지 않는 방법이 혹시 있을까, 해서 안 죽으려고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안 죽으려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죽는 이유에 대해 인간은 모르고 있지만 인간 속에 특이한 인간을 집어넣어요. 특이한 인간을 집어넣으면 그 특이한 인간이 모든 걸 가르쳐 줍니다. 그 특이한 인간이 누구냐? 사람의 아들이에요. ‘인자’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실 때 ‘사람의 아’들로 투입되는 겁니다. 이건 끝을 잡는 거예요. 아들이라는 것은 처음의 선조가 자식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쭉쭉 낳으면서 제일 마지막까지 해서 만약에 인간에게 끝이 있다면 끝까지 인간일 거예요. 끝에 나타나는 인간, 더 이상 인간다운 인간이 나타날 필요가 없는 그 마지막 인간이 사람의 아들로 마감을 짓는 겁니다.
“너희는 모르지? 나는 아는데?” 그렇게 오신 분이 사람의 아들 인자,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죽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잘 못해서 죽는 게 아니고…, 죽는다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데 이 죄 때문에 죽는다는 말을 잘 새겨들으셔야 돼요. 인간은 죄 때문에 죽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죄지은 자가 없습니다. 죄지은 자가 없어요. 우리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것은 조상의 잘못 때문에 죽은 겁니다. 이거 시위 한번 해야 돼요, 이거는. 대통령 앞에서 시위하든지 해야 돼요.
인간은 자꾸 자기 잘못 때문에 자기가 고생한다고 하는데 이거 누구한테 배웠어요? 인간의 처지가 어떤 처지냐면, 마치 꽉 끼운 허리띠 버클이 고장 나서, 남자들은 그런 경험이 있어요, 분명히 허리띠를 꽉 쪼였는데 바지를 벗으려고 하니까 벗겨지지가 않아요. 숨도 못 쉴 판이에요. 답답한데 벗겨지지를 않아요. 이걸 가지고 전문 용어로 ‘락에 걸렸다’는 거예요, 락에.
인간은 락에 걸렸어요. 자기가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 못 하니까 기껏 한다는 게 “나쁜 짓 안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구원됩니까, 자유롭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아무리 의롭게 하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계속 죽어 나가는 그 제사장처럼 죽은 우리가 죽어 나가는 이 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락에 걸렸는데 락을 풀 재주는 없고, 답답하니까 살기는 살고 싶고, 그래서 하는 일이 뭐냐? 자기가 자기 사는 방식을 동원하는 것이, 자기 남아 있는 에너지를 투자해서 그 결과로 다시 거두어서 내 것으로 비축하는 그 방식, 그걸 두 자로 ‘일상’ 네 자로 하면 ‘일상생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상생활이란 내게 있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투자해요. 투자를 해서 이익을 남겨서 다시 내 것으로 끌어모으는 것, 비축하는 것, 저장하는 거 그게 일상생활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이것은 락에서 풀 수 있는 재주나 방법이 인간에게 없다는 거예요. 그냥 팔자려니, 하고 감수하고 사는 거예요. 여기 히브리서 7장 처음의 이야기가 멜기세덱 이야기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냐면 직책만 있고 존재가 모호한 인물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제시하되 그 사람의 본질은 직책에 있어요. ‘왕 같은 제사직’ 왕 같은 제사장직을 한다고요. 인물이 중요한 게 아니고,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기능, 직능, 직책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일상생활을 하는 인간에게는 자기 존재가 중요하다 보니까 왜 죽는지, 뭘 질문해야 하는지 생각을 못 하는 거예요. 기껏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뭐 이런 질문을 하는데 그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여, 내게 도움 되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락에 걸렸는데 락에 걸린 줄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내 존재로 계속 버티면서 살 수 있습니까?’ 그 질문 외에는 다른 기도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질문을 안 했으니까 주님께서 답부터 먼저 제시하는 거예요. 그 답이 뭐냐? ‘너희 제사장들은 계속 죽어 나갔다.’라는 그것이 답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게 뭐냐? 주님이 제시한 답과 내 일상생활이 어디에서 단절되어 있고, 어디서 락이 걸렸는지, 우리가 어디에 갇혀있는지, 무엇에 갇혀있는지를 이제는 그 제사장 직을 통해 파악을 해야 돼요. 파악하는 아이디어 중에 하나는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은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기능이 쏟아져 나온다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직책을 살리기 위해서 멜기세덱이라는 그 인물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그 허리 안에 숱한 다수의 인간들이 있을 뿐이에요. 이것은 멜기세덱의 존재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직책 안에 있는 거예요. 멜기세덱도 존재가 아니에요. 멜기세덱의 존재가 ‘없다’가 아니라 그걸 ‘비존재’라고 하는데 존재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존재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멜기세덱이 제사장이 아니고, 구원자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 온 마지막 최후의 인물이 있어요. 예수님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위해서 일찌감치 멜기세덱이라는 모호한 인물이 등장한 거예요.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직책이 더 중요한 인물, 존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셔야 할 인물.
인간은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나 그분은 죽기도 스스럼없이 해야 될 인물이에요. 그 멜기세덱을 만났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고, 아브라함 허리에 다수의 제사장이 있었는데 그 제사장은 오늘 본문 23절에 의하면 계속 제사 방식 안에서 죽어 나가야 되는 거예요. 계속 죽어 나가야 돼요.
그러면 그 말은 뭐냐? 아브라함의 그 직책은 단독 직책이고 제사장은 여러 제사장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게 한 분과 다수의 비교인데 갈라디아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이에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단독적으로 만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으킨 현상은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는 거예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락에 걸렸고, 그 락은 죄인데 인간은 죄에 대해서 모릅니다. 죄지을 줄도 모르고, 죄짓는 방법도 모르고, 그냥 죄에 갇힌 거예요. 그걸 좀 구분하세요. 죄짓는 게 아니고 죄에 갇혀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 락을 걸어놨기 때문에 아담 허리 안에 모든 인간이 죄에 갇혀있는 꼴이에요. 그것도 모르고 일상생활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냥 나만 살면 되지. 나만 숨 쉬면 되지.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서도 점점 늙어가고 있고.
늙어간다는 것은 망가진다는 뜻과 같은 뜻이거든요. 늙어가면서 곱게 못 늙어가요. 지옥 같은 아픔과 상처를 다 겪어야 돼요. 여러분한테 물어 볼 테니까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여러분 나쁜 사람 데리고 사는 게 지옥입니까, 아픈 사람 데리고 사는 게 지옥입니까? 아픈 사람 데리고 사는 게 지옥이에요.
왜냐하면 나쁜 사람은 ‘너 나빠.’ 하면서 자기 의를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아픈 사람은 ‘아프면 안 돼.’라고 하는 데, 자기가 아프고 싶어서 아픕니까? 이건 어떻게 손댈 수 없고 감당할 수 없고, 그래서 아픔은, 병은 감당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저 사람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락이 걸린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도 지옥이고 저렇게 살아도 지옥이에요.
“어머님, 고맙습니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날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런 소리 할 거예요? 아빠 엄마 안 아플 때까지만. 만약에 아빠 엄마 아파 버리면 골칫거리에요. 사람이 자꾸 사람만 찾는 데 효력 없습니다. 죄가 뭐냐? 이것은 유다서 1장 9절에 보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힌트를 던져 준 게 있어요.
유다서 1장 9절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대체가 쌩뚱맞은 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긴지 모르죠. 일상생활밖에, 돈 버는 거밖에 생각 못 하고 하루하루 그저 내 몸만 챙기는 인간들에게서 질문다운 질문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이 이렇게 답을 먼저 주는 거예요. 답이 뭐냐면 천사장 미가엘이 사탄과 만나서 다툰 적이 있는데 그 다툰 내용이 뭐냐? 모세의 시체를 악마가 가져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가엘 천사가 “못 가져간다” 하고 “그렇게 가져가려는 너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망하기를 바란다.” 이 내용이 여기 답으로 나와 있다, 이 말이죠.
모세의 죽은 시체를 악마는 자기로 가져감으로써 모세의 시체가 언약 속으로 삽입되어 들어가는 것을 빼돌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미가엘은 예수님 편이기 때문에 모세의 시체를 가동되는 언약 시스템, 제사직 시스템에 집어넣어야 모세가 부활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인간은 죄라는 락이 걸렸거든요.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세우려는 것이 제사 시스템이에요. 제사 시스템의 작동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그 모든 인간에 대해서 마지막 관점을 가지고 전부 다 평하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이 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그렇게 잘생겼어요?” 정답은 “우리 아버지가 잘생겼거든요.” 그거거든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내 존재가 어떠냐는 것을 내 존재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열심히 화장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요. 아버지-아버지-아버지…, 로 넘겨야 돼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 아담은 락이 걸려서 아담에서 스톱이 돼요. 넘어가질 못 해요.
왜냐면 아담에게 락을 걸은 자가 누구냐? 악마거든요, 악마. 인간에게 걸린 락, 악마의 굴레에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지막 인간, 사람의 아들이 와서 악마가 걸어놓은 그 락을 주님이 제사 직책을 동원해서 그걸 풀어버리는 겁니다. “죽지 마라”가 아니라 꼭 죽어야 되는데 뭘로 죽느냐? 제사 시스템, 하나님의 언약 시스템 속에 들어가서,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꼭 죽어야 돼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죽어야 돼요. 그래야 부활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질문하지 않는 것을 답변 적으로 제시한 성경의 답인데요. 쉽게 말해서 인간의 동화 가운데 이게 있어요. 늑대가 한 마리 있었고 염소가 일곱 마리 있었는데 염소 한 마리는 엄마고 여섯 마리는 새끼에요. 엄마 염소가 먹잇감 구해야 자식을 키우니까 밖에 나가면서 어린 여섯 염소 새끼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수상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 올 때 나 아니거든 절대로 문 열어주면 안 된다.”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엄마 염소가 일하러 간 뒤에 늑대가 입맛 다시면서 왔어요. 똑똑, 두드리니까 “누구세요?” “나 엄마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애들이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 그래서 “손 한 번 내밀어 볼래요?” 손 내밀어 보니까 “손도 엄마 손이 아닌데?” 이랬어요. 애들이 엄마한테 신고할 방법이 없어요. 왜? 집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락이 걸려서.
그다음에 늑대가 목소리를 변조해서 “나 엄마다.” 하니까 새끼들이 “손 한 번 내밀어 보세요.” 하니까 밀가루를 묻혀서 스윽 내미니까 “하얀 엄마 손이다!” 하고 문 열어줘서 늑대가 여섯 마리 염소를 한꺼번에 포식해서 다 잡아먹었거든요. 다 잡아먹으니까 소화 작용에 의해 잠이 와서 푹 자고 있었어요.
나중에 퇴근해서 엄마 염소가 와 보니까 애들은 하나도 없고 늑대가 하나 있는데 늑대가 배 불룩 해서 누워 있단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어떻게 했는가? 그 늑대의 배를 쫙 갈라요. 놀라운 사실은 그때까지 소화되지 않고 염소 새끼 여섯 마리가 다 살아있다는 거예요. 다 끄집어내고는 그 자리에 돌을…, 아주 잔인한 엄마예요. 돌을 다 집어넣고 다시 자크 올리듯이 꾀매 가지고 그걸 물속에 잡아넣어서 죽여버립니다. 잔혹동화.
여기서 질문은 뭐냐? 늑대가 몇 마리입니까? 늑대가 한 마리일까요, 일곱 마리일까요? 늑대가 일곱 마리였습니다. 염소가 늑대 안에 있을 때 일곱 늑대였습니다. 인간은 늑대였습니다. 왜? 인간을 락에 건 악마가 늑대기 때문에. 인간은 악마의 피조물이에요. 악마에 의해 죄지어서 죽게 된 모세의 시체는 그 소유권이 악마한테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악마의 생각이에요.
처음에 마귀가 아담에게 찾아왔을 때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선악과 따 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거든요. 악마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느냐? 죽지 않는다는 표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뜻이라고 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것은 신에게 있는데 네가 신에게 살려주세요, 할 이것을 근원적으로 바꿔 버리면 되잖아. 살려달라고 할 필요 없이 네가 신이 되면 되잖아.’ 이러한 인식은 마귀 자체의 인식이에요.
여기에 유다서에서 모세의 시체 달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탄이 하늘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왜 반란을 했는가? 사탄이 뭘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만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게 질투와 반발을 일으킨 겁니다.
인간이 존재했을 경우에 선악과를 알고 있는 악마 입장에서는 선악을 안 그것,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아니까 선악과를 안다는 그 자체, ‘선악’이니까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를 왜 의롭고 선으로 간주해 주지를 않느냐에 대한 반발을 갖고 있는 게 마귀란 말이죠. 이게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은 것은, 우리가 바로 늑대의 일종이기 때문에 모든 세상이 전부 다 그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요.
이게 마귀가 집어넣은 락이에요. 내가 이렇게 인생을 힘들고 어렵게 사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잘못한 거라는 거예요. 왜? 난 죽을 만큼 그렇게 나쁜 짓을 안 했기 때문에.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돼요? 고생을 하려면 나보다 나쁜 짓 한 사람이 고생하라고 해.’ 남자들은 ‘내가 왜 힘들게 일해야 되는가?’ 여자들 같으면 ‘왜 나는 저런 남편을 만나야 했나?’ 다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자기 성토로서는요, 그 락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는 고립된 개인을 하나님의 아들로 전부다 통합을 시키는 겁니다. 고립된 개인을, 자칭 늑대가 된 개인을, 신이 되어버린 개인을. 그런데 악마가 말을 바꿨어요. 어떻게 바꿨느냐? 처음에는 “네가 하나님처럼 되게 해줄게.” 나중에는 “내가 참된 신인 너를 보호해 줄게.” 이런다고요. 신이 우리를 보호해 준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겠다는 겁니다. 어느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까?
말로만 하나님을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직접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스스로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버림받는 이것이 락을 푸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늑대가 되어서, 마귀가 되어 가지고 자꾸 자기 제사직은 생각 안 하고 자기 존재를 어떻게 지킬 방법을 찾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게 돼요. “하나님 나를 보호해 주세요.” 하나님 나를 지켜 달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이 이야기 하니까 이번에는 뭘로 바꾸냐면 “예수님 저를 지켜주옵소서. 예수님 나를 보호하소서.” 이렇게 나와요.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을 찾는 이유가 그 사람한테 보호받기 위해서, 이용하기 위해서거든요. 똑같은 행세를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사람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예수님, 하나님에게 자꾸 비는 거예요, 부처에게 빌듯이. ‘저분 같으면 날 지킬 수 있고 미래까지 보장된다. 죽고 난 뒤에도 보장된다.’ 그게 바로 마귀 생각입니다.
예수님 보고 비는데,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더 중요해요. 예수님이 지켜주는 게 아니고 십자가 능력이 우리를 지켜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에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 그게 마태복음 26장에 나옵니다.
마지막 인간, 최후의 인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인간 되신 예수님이 결국 우리에게 사람이 되셔서 사람 속에 섞이면서 사람에게 나타난 주님이 하신 일들. 락이 걸려서 무한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걸 유일하게 유한에서 무한으로 빠져 나오는, 락이 풀리는 방식은 마태복음 26장 26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나의 죽음을 먹어라. 나의 죽음을 마시라. 같이 죽자. 내가 내 죽음으로 너희들을 끌고 당길 거야.’ 이게 바로 염소의 엄마예요. 악마의 배를 갈라야 합니다. 배 속에 다수가 들어있어요. 원래 이 다수는 예수님의 허리 안에 있던 다수였어요. 예수님의 허리 안에 있던.
원래 제사직은 누구냐?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잖아요, 히브리서 7장에요. 7장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와서 사람 속에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하늘에서 추상적으로…,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와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너희가 알았던 하나님은 전부 다 마귀가 조작한 하나님이다. 진짜 하나님은 존재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직책으로 오시는’ 거예요. 직책으로 보여주고 존재는 멜기세덱처럼 모호한 존재,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불명확한 존재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는 거예요.
왜 존재가 불명확하냐? 인간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 락이 걸려가지고 내 존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락이 걸렸다는 말은 심적으로 딸꾹질하는 거예요. 읍, 읍! 뭘 하려고 해도 갑자기 나를 잃을까봐 딸꾹질로 스스로 자기 속으로 다시 자기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감당하지 못할 당황스러움에 처했을 때 이런 질문이 나오면 안 되는데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이럴 경우에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안 되잖아? 나쁜 짓이 무엇이지? 무엇이 나쁜 짓이 아니지?’ 인간은 평소에 어떤 경우라도 이 딱 두 가지로 생각해요.
그러나 그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 저를 주님의 십자가 능력에, 그 제사직에 맡기게 하셔서 내가 넘겨지게 하옵시고 나를 이참에 제거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나와야 되는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나쁜 짓을 하면 안 돼. 여기서는 착해야 돼. 착한 것이 나를 계속 살릴 수 있어.’ 이게 딸꾹질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 그것이 악마가 걸어놓은 락이고 자물쇠가 되는 거예요.
자물쇠가 된다는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부터 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무슨 이야기냐면 아무도 들을 자가 없다는 뜻이에요. 왜? 악마가 걸어놓은 자물쇠에 걸려 있어서 주의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여기서 시작이,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거예요. 농부가 씨 뿌린다는 이야기를 왜 초반부터 인간이 못 알아듣는가?
인간의 일상은,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약간은 남아 있는 에너지를 사회에 투자해 거기서 소득, 노동의 대가를 내가 다시 받으면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이게 우리 일상의 전부거든요. 이거 외에 뭐가 있습니까, 하루하루의 삶이. ‘아파서 일 못 나가겠다.’ 남아도는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에너지의 재생산, 그거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씨를 뿌린다는 데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냥 주님이 나 하는 일이나 도와주세요. 다른 소리는 하지 말고. 내가 납득 되게 너 앞으로 잘 될 거야, 하는 그 이야기만 해 달라’는 거예요. 씨를 왜 뿌립니까? 씨를 왜 뿌리냐면 이 세상에 어떤 밭도 생산성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밭도 길가에 떨어지는 밭일 뿐이고, 어떤 밭도 돌들이 막아서고 있는 밭이고, 어떤 밭도 가시덤불이 가득 찬 밭이에요. 그 세 가지 밭 외에는 세상에 어떤 밭도 없어요. 무슨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인간을 방해하는 세상이 아니라 씨를 방해하는 세상, 복음을 방해하는 세상, 이미 십자가를 알고 있는 악마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이 들리지 않도록 락을 걸어놓은 세상, 그 세상에서 복음의 열매, 복음의 증산물, 수확물을 악마가 용납하지 않는 그 세계에 인간은 늑대 배 속에서 다수로서 살고 있습니다.
돌이 없는 무슨 그런 밭이 있고, 가시덤불이 없는 그런 밭이 어디 있어요? 사탄이 침범하지 않는 영역이 없어요. 그런데 옥토는 사탄도 침범하지 않고, 돌도 없고, 가시떨기도 없고요, 무슨 그런 세상이 다 있습니까? 그런 세상이 있습니까? 그런 세상일 경우에만 무한 증산이 일어나는 거예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그 밭은 주께서 씨를 뿌리면서 새롭게 창조해 내는 거예요. 만들어 내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제사직과 겸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상 그리워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를 이야기한 것은 예상 밖이라, 이 말이죠. 인간의 생각 한계 밖이란 말이죠. 락이 걸린 인간 바깥에서 일어나는 밭이다, 이 말이죠. 이건 하늘나라예요.
철저하게 인간이 갇혀있다는 것, 사탄에게 꼼짝 못 하고 복음 전할 때마다 사탄이 와서 다 주워먹는 그런 세계에 우리가 놓여 있고요. 지금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는 것은요, 이거 기적에 속합니다. 말씀 듣지 말고 한강의 소설이나 봐야 돼요. 그게 더 재밌으니까. 말씀을 왜 들어요?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아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요? 하나라도 에너지 절약해서 돈 버는데 여러분, 매진해야 되지 않습니까? 돈도 안 되는 데 왜 앉아 있습니까, 돈도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스가랴 4장에 나옵니다. 있지도 않은 세계, 그 옥토를 어떻게 만드는가? 그건 제사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직이 도대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죽어도 부활이 되고 영생을, 생명을 얻느냐? 인간이 락에 걸렸는데 첫째, 어떻게 그 락이 풀리고, 두 번째, 그 락이 풀린 상태에서 예수님 안에 삼십 배, 백배, 육십 배의 다수로 들어있는, 그래서 예수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그 다수, 그 다수는 천국 백성이죠,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는지 그 원리가 어디서 나오느냐?
그건 제사장직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직이 뭘 했다고 우리한테 그런 혜택을 줄 수 있느냐? 그것이 스가랴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스가랴 4장에서 스가랴가 계시를 받았어요. 계시를 받았는데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같더라”(1절) 라고 하죠.
서울 강의에서 제가 했는데 “인간이 잠을 잔다, 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고, ‘내가 여기 있다’는 인간의 존재 근거가 철회되는 순간이 인간이 잠을 자는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그 강의에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신앙생활이 좋아도 치매 걸리면 과거 다 잊어 버리고 말짱 다 소용이 없어요.
그만큼 인간의 존재 근거는 허약하고 쉽게 언제든지 철회가 돼요. 왜? 인간은 날마다 생각이 변하니까요. 굳게굳게 다짐해서 “믿습니다!” 그거 변해요. 소용없어요. 내가 나의 결실을 믿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이며, 나의 선택의 반복은 결국 유한에 머물지 무한으로, 바깥으로, 그 락(갇힘)의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 예수님이 죽고 산다는 이 존재의 근거는 철회되지 않아요. 영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주무시지도 않는 거예요. 졸지도 않으세요. 지금 조는 분이 있다고 이런 소리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시 121:4) 거예요. 도대체 여러분 자신을 왜 믿어요? 근거도 없는 자신을 왜 믿어요? 근거 있는 것을 믿어야지요. 영원한 것을 믿어야지요. 그게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 항~상 제사장으로 있잖아요, 항상! 자기 안에 많은 다수를 품고, 새로운 다수, 새로운 피조물을 품고.
아담이 잠자고 있을 때 하와를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인간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그 빈 병에다 안에 직책이라는 내용물을 채우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고 지금 여러분에게도 같은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감사하지 않거든 움직이지 마세요.”라고.
벌벌 떨면서 억지로 하는 그것은 마귀가 하는 거예요. 억지로 착한 일 하고, 억지로 하나님 일 하는 거, 그거 마귀 일입니다. 감사라 하는 것은 내가 제거된 상태, 나를 비운 상태, 뭐든지 거저 주신 거예요. 모든 게 거저 주신 겁니다. 거저 주신 것 가지고 서로 찢고 싸우지 마세요. 그냥 거저 주신 거예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 6:8),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바닥을 보시는지.
잠자고 있는 스가랴에게 계시를 보여주는데 그 내용이 성전이었고, 그 성전 안에 일곱 등잔이 있는데 그 안에 두 감람나무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감람나무를 보고 스가랴가 질문을 합니다. 이 스가랴 선지자의 질문…, 자기 에너지 투자해서 돈이나 벌고 밥 먹고 사는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 나와요.
무슨 질문이냐? “천사님?” “왜?” “저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벌써 질문 자체가 수능에 나오는 질문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저 두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천사가 답변을 안 해줘요. 천사 자기도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답변을 안 해줘요. 답변을 안 해주니까 천사가 끈질기게 묻습니다. 천사가 답변을 해주지 않는 것에 어떤 의도가 있어요.
천사와 스가랴가 약간의 어떤 의도적인 충돌을 야기해서 질문해야 할 그 초점,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의 그 초점에 스가랴 선지자가 다가서도록, 어프로치 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성도의 인생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성도가, 또 모든 인간이 고민하고 근심하는 거요, 자기 에너지 고갈되고 몸도 아프고 그럴 때 자꾸 기도하거든요.
주님은 “아니야, 그 기도 아니야. 그런 기도 하면 안 돼. 제대로 질문해야지.” 그러나 락에 걸린 인간은 제대로 질문할 줄 모르고 자기 존재 어떻게 살려달라고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스가랴는 이미 자고 있었고 천사를 만나고서 “감람나무가 무엇입니까?” 하는데 천사가 답변을 안 해줍니다. 자꾸 딴소리를 해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알겠는데 제 질문은, 두 감람나무가 뭔지 그 이야기입니다.” 또 딴소리합니다. 계속 딴소리를 해요. 그래서 스가랴 4장 11절에 다시 묻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그리고 12절에 또 묻습니다.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드디어 14절에 천사가 이야기하는데 감람나무가 무엇이다, 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라고 이야기해요. 14. Then he said, "These are the two anointed ones, who are standing by the Lord of the whole earth."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누가, 어떤 인물이 올 것이라 답해요. 감람나무가 무엇이냐? 두 개의 감람나무에서 기름이 계속해서 무한 공급돼요.
주유소도 그런 주유소가 없습니다. 생명이 계속해서 무한대로 오면서, 생명의 기름 부음이 무한대로 오면서, 예수님의 직책이 무한대로 이루어지면서 십자가 사건의 능력이 지상에 무한대로 퍼지면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끌어당기는 능력이 무한대로 나오면서 자기 생명을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주는 능력이 무한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그 중간 매개, 중보자가 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이어지는 것, 바로 왕같은 제사장, 멜기세덱이거든요, 왕, 왕, 그리고 여기는 제사장, 왕과 제사장이 왕 하나로 통합이 되는 그것이 다윗 지파, 곧 레위 지파에서 다윗 지파로 전환되는 이유였다는 겁니다. 사람의 아들이 이 땅에 놀러 오신 게 아니거든요. 자기 존재나 챙기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직책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러 오신 겁니다. 그 직책은 뭐냐? 예수님 자신에까지 악마가 락을 걸려고 그렇게 애를 썼어요. 마귀가 인간에게 평소에 락을 걸어놓은, 꼼짝 못 하게 걸어놓은 그것, 인간이 하나님께 하는 그 질문을 마귀가 중간에 받아서 ‘네가 기도한 것은 다 나한테 기도한 것이다.’ 하고 그 답변을 줍니다.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도 해요.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모든 인간이, 마귀 안에 있는, 그 뱃속에 있는 작은 늑대들이 늑대보고 하는 이야기가 “돈 좀 벌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직 복음만을 사랑해서…, 하면 마귀가 듣고 있다가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지 말고 ‘복음 사랑했더니 돈 주더라.’ 이렇게 솔직하게, 솔~직하게 해. 그것 바라보고 하잖아. 모든 것은 돈과 연관되어 있잖아. 왜 솔직하지 못해?”
마귀는 이미 자기 뱃속의 사람들이니까 뻔히 알고 있지요. 주님께서는 마귀한테 빼앗겨 가는 우리를 강제로 주님께로 도로 빼앗아 오는데 그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우리 안을 죽게 만들어요. 죽이고 우리 속에, 우리도 작은 늑대니까 우리 배를 째고 그 안에 아무 쓸데 없는 돌멩이를 집어넣어서 “네가 그토록 새벽기도 하면서 구한 것이 이런 쓸데없는 돌덩이였다!”라고 집어넣어 버리지요.
진짜 질문을 제대로 못 하는 거예요. “진짜 주님은 누구십니까? 왜 죽으셨습니까?” 그 질문을 왜 못합니까? “저분은 내 사람이다.” 이 대사는 영화 대사고 “저분은 우리 때문에 죽으셔셨다.” 그 이야기를 왜 못해요? 그것은 우리가 존재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을 못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꾸 보호받으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내 속에서 주께서 하실 일을 하시도록 하는 그 현장, “내가, 그 현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께서 하실 일을 그냥 하시옵소서. 나귀로 쓰시든지 뭘 어떻게 하시든지 주께서 쓰시옵소서.” 이게 바로 감사고 그 감사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한쪽에는 왕, 한쪽은 제사장. 이것은 바로 멜기세덱의 두기능, 동시에 예수님의 두 기능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스가랴 시대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라는 구체적인 두 인물로 내세웠던 겁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단지 인물로 보이느냐, 아니면 직책으로 보이느냐?” 그 질문을 하라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제사장 기능을 통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왕같은 제사장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감람나무다, 그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못 지었어요. 못 지은 이유가, 피를 많이 흘려서 그렇다(대상 22:8)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한다면 피를 흘릴 수도 있는데, 전쟁하면 피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데 피 없이 전쟁할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피 묻었다고 해서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민수기 31장 19, 20절, 또는 23,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는데요, 율법이 뭐냐? 비록 하나님의 전쟁에 나서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승리케 된 군사라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이곳에 오려면 그들은 19, 20절에 “너희는 칠일 동안 진 밖에 주둔하라 무릇 살인자나 죽임을 당한 시체를 만진 자나 제 삼일과 제 칠일에 몸을 깨끗케 하고 너희의 포로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의복과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과 무릇 염소털로 만든 것과 무릇 나무로 만든 것을 다 깨끗케 할찌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23, 24절에는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너희는 제 칠일에 옷을 빨아서 깨끗케 한 후에 진에 들어올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에 살다 보면 온갖 더러운 것은 다 묻는 거예요. 하늘나라 원칙은, 더러운 것은 못 들어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서 지금도 주께서 살아서 자기 뱃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유는 바로 성도로 하여금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더러운 짓만 했다는 것을 알게 해서 십자가의 그 내 살과 내 피의 효력, 그 십자가의 능력에 감사하라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 죽고 버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러운 것 좀 많이 묻으라고.
인간은 죄지을 수 없습니다. 그냥 죄에요. 그냥 죄에요, 뭘 새삼스레 죄를 지어요? 죄 안에 살면서. 그냥 더러운 거예요. 더러운 죄예요. 타고나기를 늑대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잘생겨서 내가 잘생겼다고요? 아버지가 더러워서 내가 더러운 것은 생각 안 합니까? 여러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부터 새로 시작하겠다. 이게 하나님의 제사직이고, 그 제사직의 제사장들도 ‘제사장이 되었으니 뭔가 되겠지.’ 되겠지, 하는 그것 죽여버려요. 제사하게 해놓고 죽여버려요. 이 죽음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성도를 활용해 주셔서 십자가 지신 그 제사직 완성의 증인으로서, 그 현상으로서 어떤 상황 속에 우리를 다 놓이게 하니까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모든일에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고,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오직 감사와 감사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단독으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누구 안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옵소서. 전에는 늑대 같은 마귀 안에 살다가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배 안에 있음에 우리가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날마다 살아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그 기도의 취지가 여전히 우리가 지옥 가운데, 죄 가운데 있음을 전제로 한 기도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