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20713a (몸)―이 근호 목사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살전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 마게도냐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 지명이 나올 때는 그 지명이 그냥 지명이 아니고 그냥 장소가 아니고 그냥 공간이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공간, 장소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마게도냐가 어디 있느냐 하면 여기에 이탈리아 있고 아드리아파타가 있고 이쪽에 마게도냐가 현재 그리스라는 나라 거든요 북쪽을 마게도냐라 하고 남쪽을 아가야라고 합니다. 건너는 뭐냐 하면 지금의 터키죠. 터키를 옛날에는 뭐라 했느냐 하면 작은 아시아, 소 아시아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는 소아시아라고 할 때는 전체 중국, 일본, 인도를 다 합쳐 아시아라 하지 않고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하고 시리야 쪽을 아시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지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떤 일이 거쳐 지나간 거예요 일이 벌어진겁니다. 여기 마게도냐라는 이 곳이 뭔가 어떤 일이 벌어졌었어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마게도냐라고 일방적으로 보면 마게도냐라는 지역에는 나무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쥐도 있을 것이고 고양이도 있을 것이고 건물도 있을 것이고 마게도냐라고 하면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통합해서 마게도냐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그렇게 보지 않고 성경다 포함시킬 수 있는 사건화된 마게도냐, 여기서 사건이라는 것은 무슨 사건을 말하느냐 하면 복음 사건입니다.
이게 언제냐 하면 AD 42년에서 50년, 60년 가까이 됩니다. 서기 이전에는 뭐가 마게도냐를 차지 했느냐 하면 인간들의 사상이 헬라철학이라는 것이 마게도냐를 도배를 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조선 시대때에 사람들이 맹탕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뭔가 사상적으로 하나로 결속되어 있었죠. 조선시대의 사상을 유교사상이라 합니다. 물론 그 중에서 유교사상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대충 유교사상이라 보는 겁니다. 그러면 통일신라 시대는 대충 뭡니까? 그것은 유교가 아니고 불교가 되는 거예요 분위가 불교 분위기에요 그러면 통일신라 시대말고 고구려 주몽시대는 분위기가 뭡니까? 그것을 가지고 토속종교, 제천의식, 신을 섬기는 토속종교가 있었던 거예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일 때 소수림왕 이전에는 그냥 토속종교, 무속종교, 그것을 가지고 샤머니즘이라 합니다.
무당을 통해서 신의 계시를 받고 그리고 무당을 통해서 신에게 하소연하고 무당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소통이 되는 그런 시대라면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마게도냐는 헬라철학말고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고 봅니까? 복음 사건이 벌어진거예요 그 복음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여러분 아시죠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 9절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할게 없음이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그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형제 사랑이 이미 그 안에 포함된 것을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지요? 하고 반박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처분을 맡기는 게 사랑입니다. 함부로 사랑하면 안 되지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처분을 맡겨 버리면 뭐가 삭제 됩니까? 내 결심, 내 기대, 내 희망, 내 결단, 내 선택 전부 다 무엇에 빠져야됩니까? 사랑에서 다 제거 되야 되지요 나는 이렇게 했는데 당신은 왜 어떻게 합니까? 이게 들어가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그것은 흥정, 거래죠.
예수님께서 복음 사건을 가지고 사랑을 전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사랑을 전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 우리 모든 처분을 맡긴 거예요 죽이던지 살리던지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맡겼다 이 말이죠. 만약에 맡겨 놨는데 아무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죠.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있는데 조용해요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일상 그저 흘러가는 게 똑같아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듣고 겁이 나서 주를 사랑하기로 작심을 했다 이 말이죠. 사랑합니다. 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 강의 초반에 사랑이란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처분을 몽땅 넘겨지는게 사랑이다 라고 들었다 말이죠. 그렇다면 주를 사랑해야 저주 안 받고 사랑을 해야 되니까 그러면 사랑이 뭐냐 주님 앞에 나의 존재를 모두 맡기는 것이다. 처분에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작심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으면 변화가 없으면 어떻게 할거에요? 주님 앞에 사기당한 겁니까? 속은 거예요? 사람 같으면 찾아가서 멱살 잡고 하는데 주님이 너무 높이 있어서 구름타고 올라가야 되니까 멱살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 말이죠. 어떻게 해야 될까요? 꼭 속은 기분이 들어요.
주를 사랑했는데 사랑한다고 다짐을 했고 심지어 끝까지 주를 사랑한다고 십자가 마을에 공개적으로 썼는데 아무 보상이라든지 댓가가 전혀 없어요. 똑같아요.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똑같아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은 바로 방금 이야기한 사랑이 주님의 처분에 맡긴다는 말을 사랑한다고 하는 그 당자사가 지금 안 믿고 있는 겁니다.
처분에 맡긴다는 것은 내 선택과 내 기대와 내 희망마저 철수를 해서 이미 저쪽으로 넘긴 상태에요 넘긴 상태에서도 아직도 꿍하고 덜 넘긴 게 있어요. 이렇게 사랑해 주면 주께서 뭐 해 줄 건데요? 이러한 기대와 포부를 갖는 것은 아직도 뭐가 살아있다는 겁니까? 분명히 넘겼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게 뭡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꼴까닥하고 우리의 목숨이 끊어집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 놓고 아직도 우리의 세포는 펄펄 뛰잖아요 사랑한다고 말은 공개적으로든 혼자서 하든지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했는데 뭐는 아직도 남아 있어요?
뭐가 남아 있느냐 하면 어렵게 가보면 몸이 남아 있지요 사도 바울은 뭐라 했느냐 지금 차라리 내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 몸을 벗어버리고 내가 죽은 몸이 되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 마치 변화산의 엘리야나 모세처럼 내 몸이 이 몸은 껍데기이니까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새로운 하늘의 몸을 입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은 것이 지금 마지막 소원이다.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말은 뭐냐? 사도 바울이 왜 그 몸을 귀한 몸인데 벗으려고 해요?
여러분, 저녁 먹었지요? 왜 먹었지요? 몸이 밥을 달라는 거예요 몸이 있으면 몸 위주입니다. 엄마던 아빠던 심지어 자기도 자기 몸한테 이기지를 못해요 나는 깨끗하게 살아야지,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해도 몸이 뭔가 달라고 한다면 자기 몸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지금 힘들다는 거예요 어떤게 힘드냐 하면 남이 나를 괴롭혀서 힘든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이단이라고 공격해서 힘든게 아니고 내 몸이 나로 하여금 발목을 잡는 겁니다. 몸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몸은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나쁜 것이다. 더러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입니다. 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쁘고 좋고의 관계가 아니고 몸이 있는데 누가 있게 하느냐 내가 있게 한게 아닙니다. 주님이 있게 하신 거예요 몸이 있게 하고 그 몸은 점점더 아파가고 늙어가고 뭔가 자꾸 달라고 요구하고 그리고 나에게 내 뜻과 정신과 내 소망과 다른 것을 자꾸 요구하는 그런 몸을 주께서 여기다가 박아놓은 거예요
그리고 ‘나’라 하고 하는 것은 내가 몸을 가진 것이 아니고 박힌 몸을 나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 그냥 ‘나’, 영어로 ‘I' 그냥 나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의 자아는 안보입니다. 여기 한목사님의 자아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내가 보이는 것은 한목사님의 몸밖에 없어요. 몸만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몸밖에 없는데 한목사님이 만약에 거울을 보고 거울아! 거울아! 나는 어떠냐? 거기에 나를 집어 넣어요 나는 없는데 나를 집어 넣어요 그래서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이 몸을 이제는 용도폐기해서 없애 버리고 이 몸하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있는 몸, 그 몸을 저는 얻고 싶습니다. 이게 내가 마지막 남아있는 나의 욕망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이 어려운 이유가 그 욕망이 어디서 나온 욕망이냐 하면 기존에 있는 몸에서 나온 욕망이죠. 내가 갖고 있는 욕망이 아니고 몸에서 나온 욕망입니다. 그러니까 없어야 될 욕망이 내 뿜는 욕망이 뭐냐 하면 내 몸좀 교체좀 시켜줘 하는 겁니다. 이 몸이 나한테 호소하는 거예요 ’어이, 몸 좀 빨리 교체해 줘‘ 불판 갈아라 이 말이죠. 힘들게 유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몸이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을 알았는데 만약에 그리스도의 몸, 우리가 입을 몸이 없다고 여긴다면 이 몸은 성령을 안 받은 이상 예수님을 안 믿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하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을 때려 죽여도 못 믿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몸은 안 믿어요 이 몸은 자기 몸만 믿어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몸이 최고에요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서 한 소리 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 믿는다 하니까 이게 몸 따로 나 따로 노는 겁니다. 몸은 안 믿는데 내가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한번 물어 보세요 ‘어이 몸! 너 예수 믿냐?’ ‘보여야 믿지’ ‘그래 안보이지?’ ‘나 못 믿는다,’ ‘알았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 몸이 안 믿고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위선적인 행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 몸을 거쳐서 그리스도를 봐야 되는데 이것은 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을 바로 습득하려고 해요 아무리 지식으로 습득해도 몸이 튕겨버려요
예를 들어서 여기 14절을 봅시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이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면 안되고 내 몸을 거쳐가는 누가 좋아해야 돼요? 내 몸이 좋아야 돼요 ‘야 죽어도 산데’ 내 몸이 빨리 죽어서 빨리 살고 싶어해야 할 텐데 내 몸이 환장해야 될텐데 ‘아, 이 몸을 어떻게 갈아치우지 불판 갈 듯이,,,,’ 이렇게 하고 있는데 몸은 ‘밥 줘!’ 이렇게 하고 있다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몸을 치고 가더라 ‘아 기분 나빠’ ‘니도 한 대 쳐라’
내 몸은 지금 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튕기고 있더라 말이죠. 내 몸이 이 성경 말씀을 안 받아줘요 너는 그냥 정신적인 놀이 문화로서 취미 활동으로서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해라 하지만 내 몸은 이 성경말씀을 그냥 다 튕겨 버려요 이게 내 몸을 그냥 유지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 소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여러분, 단무지를 상품으로 공장에서 만들 때 단물이 다 잘 스며들도록 해야 되는데 어떤 악덕 업체가 단무지에 노랑 염료를 넣고 단무지라고 하면 분명히 색깔은 노란데 씹어보면 단맛이 안날 때 그게 뭡니까? 그것은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이죠. 바로 우리가 매일같이 내 몸이 나의 신앙과 나의 소망과 사랑을 지금 우롱하고 있어요. 나는 믿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 져요 몸이 그 딴거 믿어서 뭐할 건데? 그게 뭐 배가 부르나? 그게 뭐 나한테 부자를 되게 해 주나 그게 뭔데? 몸은 이야기합니다. 신앙이 필요한 이유를 대라 신앙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될 이유가 뭔데? 근거를 한번 대봐라 신앙이 있으면 이런 것들이 내 맘한테 유리하다는 근거를 대봐라 근거를 대보라 하면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립니다. 인간의 몸은 육인데 육은 누가 다루느냐? 육은 행함으로서 의로워 지려는 그런 노선에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 졌어요 미리 이야기하면 우리의 몸은 율법이 얼마나 무섭고 율법의 저주와 심판이 무엇 때문에 저주 심판하는가를 알려주는 재료로서 이 몸이 우리에게 주어진겁니다. 우리 이전에 몸이 먼저 있고 차후에 우리는 그것을 ‘나’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나는 이 몸은 어디에 저촉을 받습니까? 율법 저주의 저촉을 받아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이 나오죠. 거기 해골이 왜 해골이 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어긋나서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짝 마른 해골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뼈 하나하나가 그냥 필요 없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여기 위해서 몸을 만들고 그것을 뼈다귀 전환시킨 겁니다.
BC 586년에 하나님께서 유다나라를 침공할 때 바벨론 기계같이 움직이는 바벨론 그것을 황충이라 하는데 황충처럼 질서정연하게 앞뒤 봐주는거 없이 그냥 공격하면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그런 군대를 보낸이유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서는 봐 주는게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율법에 기준했기 때문에 봐주는게 없어요. 인물 이쁘다고 하나님께서 봐주고 키크다고 봐주고 하는게 없어요. 공부 많이 했으니까 내가 살살 때려줄게 이런게 없다 이 말이죠.
애굽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 나라 각 지방마다 맏 아들을 칠 때에 그게 독자라고, 형제가 없이 아들 하나라고 그냥 봐주고 넘어간 일이 있습니까? ‘아이고 이 집은 아들 하나밖에 없구나! 대를 못 이으니까 그냥 넘어가주자 어이 천사야 넘어가주자’ 이런 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어요. 이것은 무조건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다 죽이는 거예요 바로 우리의 몸은 그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이유는 죄값 때문에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 몸에서 나오는 것이 율법에 주어져서만 뭐가 되느냐 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이것은 내가 우리를 판단하면 안 나타나고 율법의 하나님 판단에 볼 때는 기어이 우리는 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죽어야 되는겁니다. 왜? 끊임없이 욕심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은 욕심도 아닙니다. 율법으로 봤을 때 욕심이에요.
바리새인들이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하고 그게 다 욕심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헌금하고 전도하고 기도 하고 예배 참석하고 하는 것들이 이게 욕심입니다. 아이 목사님! 욕심 아닌게 어디 있습니까? 그럼 어떤 것이 욕심이 아닙니까? 몸이 있는 한 욕심 아닌게 없습니다. 그러면 욕심 아닌게 없으면 그러면 욕심 없이 살면 어떻게 됩니까? 이 몸이 욕심 내게 되어 있는 몸인데 무슨 딴 소리를 하십니까? 이 몸이 욕심을 내게 되어 있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욕심을 안내려면 어떻게 삽니까? 욕심 내야 될 몸이 내야지 그것을 욕심 안 내려면이란 조건이 거기 왜 붙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몸은 선천적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몸 자체를 사랑하고 주님의 저주 앞에 서서 그것을 함구하고 ‘나 같은 인간은 죽이면 안 돼! 나는 휼륭해야 돼’하는 것을 내 뿜어내는 그러한 본성의 몸을 이미 우리는 부모로부터 하나씩 타고 났어요
어떤 사람은 강도로 살다가 어떤 사람은 세리 창기로 살다가 그 몸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은 몸을 다루어서 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까? 그 어린 양이라는 것이 누구 집에 살던 어린 양입니까? 옆집입니까? 자기 집에 같이 살았죠 자기 집에 하나의 식구처럼 살던 그 몸을 그 식구를 다른 식구를 위해서 대신 죽는 몸의 역할을 하라고 어린 양을 잡는 겁니다. 이것이 또 율법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러니 율법 안에 들어 있던 것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알아서 전부 다 완전히 폭격하고 지키고 구원하고 버릴 것 버리고 알아서 다 해 주는 거예요 알아서 다 훌고 지나 가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은 욕심만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인입니까? 그러면 자기 신앙을 스스로 제대로 깨고 우리가 기독교입니까? 우리가 기독교를 제대로 비판 할 수 있어야 돼요 평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무에 노란 페인트 칠하면서 매일 같이 살고있음을 감 잡고 눈치 채야 됩니다.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우리의 몸이 어떤 몸이냐 하면 여기에 A가 있고 뒤쪽에 B가 있으면 만약에 B가 좋은 나라, 천국이라면 우리의 몸의 성질은 이것을 기어이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정상에 올라가서 저 산 뒤에 있는 이런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것이 우리의 몸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선배 되는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실시 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 지켜서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어디를 못간다 했습니까?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몸이 추구 하는 노선을 다 알고 그 길로 갈 것을 알고 그 길 위에 먼저 가서 지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그 부분에 있거든요 어느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의 의가 제일낫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바리새인들 엉덩이 밑에서 반복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노력하고 애쓰고 기도 하고 금식하고 백날 해 봐야 이미 그 짓 다 해 본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해 봤습니까? 어느 누구도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제일 선봉자는 누구에요? 바리새인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해 봐라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오야봉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사도 바울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보낸거예요 해 봤다는 거예요 너희들 네 몸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이미 사도 바울이 다 해 봤어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성경말씀은 단어로 되어 있어요. 문장, 언어, 단어로 되어 있어요. 두부 만들 때 정 사각형으로 구분하잖아요 구분할 때 선을 긋잖아요 그을 때 A,B,C,D,E,F가 있을 때 여기에 있는 콩가루가 있다면 자르기 이전에 이쪽에 있는 이 콩가루하고 이쪽에 있는 콩가루하고 둘이 친구사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라 버리니까 한쪽은 F에 한쪽은 D에 속합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평분화, 동일화, 같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이제부터 5분 동안 기도 합시다. 하면 분명히 기도가 다 다른데 저는 다들 5분 동안 기도 하셨네요? 이렇게 합니다. 어떻게 봅니까? 여러분들이 기도 한 것을 개인을 무시하고 하나로 묶어서 두자로 ‘기도’라고 한 겁니다. 평준화시키는 겁니다. 두 부부가 드라마를 봅니다. 아내보고 ‘재밌나?’ ‘나도 재미있어’ 아들이 있다가 아빠, 엄마 어떤 게 재밌어? 재미있다고 하니까 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까 재미의 포인트가 달라요 깊이가 달라요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같이 재미있다고 둘다 재미있다고 보면 안 되고 재미있다는 단어가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무시하고 잣대를 자기 마음대로 그어놓은 거예요 우리는 그 그어 놓은 그 단어를 나한테 입히는 겁니다. 나는 오늘 기도 했다 전도 했다, 오늘 바르게 살았다, 오늘 죄 안 지었다,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을 왕년에 억지로 폭력을 사용해서 오늘 기도 한 몸이야 하고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운겁니다. 그 기도 하는 시간에 2분동안 잤는데? 5분동안에 딴 생각 3분 했는데? 그래도 기도 한 거야 그때 놀았는데, 재미나게 놀았는데? 이게 한국사람입니다. 말도 안돼요 내가 일방적으로 생각한 성경 단어가지고 내 몸한테 그렇게 강요하면 안돼요 강요하면 안되는데 왜 강요하느냐? 우리는 구체적인 모델을 만들어 내요 억지로 내 정신에 합당한 내 몸의 길을 억지로 만드는 겁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몸이 안따라 주지만 내 마음이 사랑한 것으로 몸이 같이 따라 온 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 억지가 남한테 통하지만 우리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합니다. 오히려 교만과 위선이라고 인정하지요
다시 해 봅시다. 산 넘어서 천국이라면 우리는 바리새인이 이렇게 산을 넘어서 넘어갈 때 이 지점이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이라면 넘어갈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드디어 지옥 안녕, 나는 이제 천국백성 이 넘어가는 지점을 우리는 갖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이 지점만 넘으면 이 지점을 품에 안고 자격증 만들어서 이것을 가지고 나 구원받았다고 누구한테 내 밀고 싶은 충동이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산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네 속에 들어 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뭐가 더럽다? 네 몸에서 더러운 것이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이 끝까지 자기 몸을 포기를 못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마음과 몸이 하나인줄로 자꾸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주님이 나한테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몸은 점점 더 치졸하고 더럽고 우리에게 나올 것은 죄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몸은 자신의 몸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그 외에 어떤 몸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점점 느낍니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도 바울이 최선봉에 있을 때 무슨 사건이 벌어졌습니까? 누구를 죽였습니까?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자기가 증인 섰지요 저 인간은 죽어야 돼 내가 증인 할 게 내가 하나님 앞에 대표해서 증인할게 해서 옷을 맡기면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거기 있었잖아요 예루살렘에 유학 와서 거기에 가담해서 유학티 낸다고 그렇게 한 모양이에요. 유대인의 열심을 내서 나는 배운 것을 실천한다고 거기에 간 겁니다. 자 이 지점에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 데 가담을 했습니다. 이 지점에 왔을 때는 사울은 자기의 최고 정점에 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최고 정점에서 예수님은 뭐라 하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것이 곧 누구를 죽인 것이라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 했습니다.
그 말은 사울보고 나무라는 게 아니고 사울이 갖고 있던 몸을 증오하는 거예요 너는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몸이 어떤 몸인지를 너는 예수님 없이 니 몸을 평가 한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그냥 남들하고 비교하니까 남들보다도 더 괜찮은 몸, 나쁘지 않은 몸, 착한 일 많이 한 그 몸이었어요. 그런데 그 몸을 가지고 스데반 집사란 성령 받은 사람과 맞다뜨리니까 그 스데반 집사 안에 뭐가들어 있어요? 성령이 들어 있지요 그 성령이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예수님의 영 앞에 설때에 비로소 들통난겁니다. 내 자기의 몸의 정체가 들어 난거예요 그 몸 가지고 천국가겠다고 깝죽된 겁니다. 이게 사울이 받았던 축복입니다. 뭐가 축복이냐 내 몸은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자로 하면 ‘손 놔라’ 이 말이죠. ‘손 떼라’ 이 말입니다. 누구에서? 내 몸에서 손을 떼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만 관리하면 돼요 말을 더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
우리의 정신만 관리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몸 따로 정신 따로 놀 밖에 없음을 수긍하고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주여, 제가 이렇게 주 앞에 기도하는 것 아시죠. 정신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것 아시죠. 하지만 내 몸이 배고프다고 할 때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감사할지 안할지 제가 몸에 따라가지 제 정신에 따라 가지 않습니다.’하는 것을 고백하라 이 말이죠. 주여, 지금은 제가 기분 좋습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하지만 내 몸이 이빨이 아플 때는 내가 내 정신도 어떻게 화를 낼지 그것은 내가 장담 못합니다. 하는 것을 인정하라 이 말입니다. 정신의 내막과 몸의 내막 두 가지 이야기를 다 해 봅시다.
정신의 내막은 그림으로 설명하면 바리새인이 여기 있고 사울은 여기와 있고 중간에 깨졌고 스데반 집사는 죽고 그 뒤에 우리가 뒤 따라 가는 거예요 왜? 같은 몸이니까 내 몸이니까 네 몸이나 다 아담에서 나온몸, 아담의 몸이 말하는 몸은 다른 코스 없습니다. 이 코스로 다 가는 겁니다. 가는데 여기에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한다고 몸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한다고 몸이 갑자기 욕심을 버리고 돈 안 좋아 하는 그런 일은 아예 없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했으니까 정신적으로 무엇을 조정해 나갑니까? 돈을 좋아하지만 ‘안 돼’ 하고 지적하죠. 로마서7장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합니까? 내가 무엇이 악하고 무엇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뭐가 안 받쳐줍니까? 이 몸에서 나오는 다른 법이 이 정신을 내 참된 취지를 받아줘요? 안 받아줘요? 안 받아줘요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어떤 아이디어일까요? 몸은 계속해서 눈치 코치 없이 계속가요 만약에 주님을 사랑했다면 이 몸은 그 만큼 점수가 또 올라가요 야 내가 생각해도 니가 기특하다 네가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구나! 눈만 뜨면 바리새인 따라 가는데 이 몸은 감당이 안되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정신을 낮추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산을 넘을 생각을 안 하고 몸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가는 거고 말릴수도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가는 거예요 정신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두게 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 방법 사용하면 구원됩니까? 그래 나는 죄인이야 나는 부족해 그래 나는 마음을 낮춰야 돼. 몸은 고집불통이라 자기 마음대로 가는데 내 마음은 주여 절대로 안 그렇다는 거 아시죠? 구원되겠어요? 이 고개를 넘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지요 그것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느냐 하면 이 몸을 옆으로 비켜 가는 방법이 있거든요 이것은 무엇을 포기해야 됩니까? 최고의 자리를 포기해야 되겠죠. 내가 남보다 앞섰다 나는 남한테 뒤지기 싫어 저 나보다 못 배운 것이 잘 풀린다 속 터진다 이런 이런 최고의 자리를 없애 버리고 바로 옆으로 오고 싶은 거예요 이게 누구의 아이디어이냐 하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이렇게 된 겁니다.
자기의 몸을 띠를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편안히 예수 믿다가 내 몸도 편하고 고민도 안하고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고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 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그것만, 찬양하는데 별로 힘들지 안잖아요. 찬양 찬양하면 되니까 자기 몸은 자기 마음대로 편한대로 두면서 구원은 구원대로 되고 마음은 낮춰줬으니까 더 이상 하자 없다 하면서 이런 식으로 반대편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 그것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것도 안됩니다. 바리새인 1번 2번 3번 전부 다 이게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면 그러면 어떤게 되느냐? 제가 몸을 이야기하면서 하나 의도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은게 있습니다. 그것을 적어 볼께요 ‘몸은 수동적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몸은 사탕주면 헤헤거리고 독을 주면 뱉어버리는 몸은 독자적으로 자기 환경을 못 만들어 내요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몸이 거기에 순응하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친구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 거기에 있어요. 몸이 흉내를 잘내요 주위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으면 담배 피우는 것을 안 나쁘게 여깁니다. 주위에 술꾼들이 많으면 술 먹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변명조로 나옵니다. 몸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옛날에 하양근처 경산에 대구살기 이전에 목욕탕을 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탕속에서 남인수 노래를 크게 부르는 거예요 그게 한 15년 전입니다. 제가 탕속에서 남자가 노래 부르는 것은 1950년대, 60년대는 허락이 되었어요 그런데 1990년대도 아직도 초이니까 노래를 불러요 제가 또 오지랖이 넓어 나서서 이야기를 하려다가 찬스를 놓쳐서 못했어요 들어 가려고 했는데 노래를 끝내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탕속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자기 아버지하고 자기 형님들하고 그 시대에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요새 또 조폭도 문신하고 노래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없거든요 몸은 옳고 그름이 없어요. 주변에 있는 색깔에 따라서 얼추 비슷하게 맞춰나가면 그게 선이에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합니다. 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없어요. 비슷하게 그냥 묻혀가는 거예요 안 묻히면 왕따 당하니까 그냥 묻혀가는 거예요 청소년들이 술, 담배 하는 것이 왜 나쁜지 몰라요 친구들이 하니까 만약에 담배를 안 피우면 안 놀아주고 도박에서 돈 떨어지면 돈을 또 가져와야 하는 이유가 돈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 안 놀아주니까 도박판에 안 넣어줘요 돈 없는 인간을 왜 넣어줍니까? 그러니까 강도짓해서 금은방 털어서 돈 만들어서 또 거기에 놀아줘 하고 또 가는 겁니다.
몸은 한 마디로 ‘놀아줘’ 놀아 주세요. 몸은 고상스러운 철학이 필요 없어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몸은 옳고 그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 부처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 제발 나랑 좀 놀아달라는 겁니다. 이게 동질성입니다. 인간의 몸은 같은 몸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동물 또는 사회적 동물이라 했습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이 되지 혼자 살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화하는 가운데서 사람은 살 의지와 살 이유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냥 혼자 도를 닦으면 그것은 전혀 인간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비춰보기 때문에 대화라는 게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교인들이 큰 교회 가는 이유가 뭡니까? 뭐에요? 정신적이고 뭐고 다 핑계고 거짓말입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뭡니까? 그냥 놀아달라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음을 남들이 좀 이야기를 해 달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것을 안 해 주고 왕따 시키면 자살합니다. 애들은 성질이 급해서 안 놀아주면 자살해요 학원 폭력 사건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옛날에는 왜 자살을 안 했느냐? 얻어 맞는 것도 하나의 그들과 놀아주는 노는 방법이었어요 자기도 또 후배 때리면 되니까 아무 문제 없었는데 자기 집에서 안 맞다가 맞았기 때문에 집에서 맞다가 학교에서 또 맞고 하니까 맞는게 일이 되어서 자기 노는 일에 의의가 없는데 집에서 귀하게 키우다가 여기와서 맞으니까 내몸이 나는 안 맞을 몸인데 맞았거든요 그러면 자기 정체성이 깨져 버리는 거예요 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 처분을 넘기지 않고, 항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처분은 누가 해야 됩니까? 끝까지 내 몸은 누가 책임져야 됩니까? 내 몸을 관장하는 것은 내가 책임져야 되니까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처분을 나한테 맡기니까 나한테 정신적으로 괴로울 때는 이 괴로움의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이 몸이 남들에게 안 알려준 몸이니까 그 몸과 더불어서 장렬하게 자기 자신을 산화시키는 거예요 그냥 태워 버리죠.
그러면 본인이 자살한게 아니고 누가 그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몸이 죽이는 거예요 몸은 수동적이니까 안 놀아주면 안 죽더라도 이미 죽은 몸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게 아니고 누가 나를 인정해 주고 놀아주면 몸은 신나고 내가 아무리 믿음 좋아도 누가 안 알아주면 나는 괴로운 겁니다.
고상하게 삼위일체 동원해서 성경 복음 십자가 이야기 해도 그것은 포장지고 그것 벗겨 버리면 남는 것은 내 몸, 이 몸은 누구한테 처분할 필요 없고 내가 알아서 내가 처분한다 하는 그 정신, 그 불신앙만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는 겁니다.
그러면 이 첫 시간을 마감하면서 그러면 그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대책은 이거요 14절 봅시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의 몸은 우리가 관리를 못합니다. 제가 50분 동안 계속 이야기 했습니다. 관리를 못하면 처분을 누가 하느냐? 복음이 사랑이니까 십자가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몸을 그냥 가져가 버려요 우리 몸을 가져가 버리면 무엇에 사용하느냐 하면 우리 몸은 우리가 관리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해 버려요 그러면 누가 괴로우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이 괴롭습니다. 그 괴로운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1절에 나옵니다.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살전 4: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네 몸은 그냥 몸을 놀리지 말고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나님이 밥먹여 줄꺼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몸의 본능대로 네 몸을 위해서 한번 해 봐라 어느 시선 밑에서? 이 몸은 이미 하나님께 맡긴 몸이라는 그 안목과 시선 아래에서 옛날 네가 잘하던 행세, 다시 말해서 예수 믿기전에 내 몸은 내가 관리해 왔습니다. 하는 그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해서 죽을 때 까지 해 봐라 이 말입니다.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중요한 교훈을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죽은 사람 살렸지요? 맞지요? 사도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죽은 사람 살렸으면 우리 같으면 손수건도 사람을 살리는데 그 손수건 주인 되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죽이면 안 되지요 그렇잖아요.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AD 63년경에 참수 당했다 하거든요 자기 손수건 가지고 사람까지 살렸으면 유두고를 누가 살렸습니까? 사도 바울이 살렸지요 바도 바울이 밤새도록 설교하니까 졸다가 3층에서 떨어졌던 청년, 죽었다가 살렸거든요 사도 바울이 말씀 전했는데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도 해서 살렸잖아요 자기는 남을 살렸잖아요 남을 살릴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안 죽도록 해 주셔야 되잖아요
내가 이 물을 마셨다면 콜라도 마실 수 있고 사이다도 마실 수 있는 능력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것을 마신게 되잖아요 이것은 마셨는데 주께서 물 한 컵 안주는 겪이 되고 말았다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어렵지요? 남은 병을 고치주면서 남은 죽은 자를 살리면서 왜 죽은 자를 살린 당사자는 주께서 죽이게 만드느냐 이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몸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몸을 이미 예수님께 일임해 버리면 우리의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고 누가 관리합니까? 예수님이 관리하잖아요. 예수님이 관리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옛날 예수 믿지 않을 시절에 그동안 우리의 몸이 우리의 몸을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본격적으로 우리는 실시를 해야 되는 겁니다. 아, 이렇게 힘들구나!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구나! 그것을 기쁨 가운데서 그 괴로움을 만끽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을 살릴 능력을 그 정도 해 줬으면 나머지 기본적인 것은 제공해야 하나님답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왜? 사도 바울이 아플 때 몇 번 기도 했습니까? 세 번 기도 했잖아요. ‘하나님이여 아픕니다.’ ‘어쩌라고?’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기 병은 못 고치게 만든 이유가 뭡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몸을 주님께 의탁하기 이전에 우리의 몸이 우리를 관리했을 때 우리는 우리 몸에게 아무런 능력을 행세할 수 없고 우리 죄악대로 우리의 죄지은 대로 힘들게 고생스럽게 이 몸 끌고 살아가도록 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용도로서 우리의 몸을 버리지 않고 폐기 처분되지 않고 지금도 힘차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