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능력( 빈 형식 안에 채워짐)
2024년 10월 6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6-19
(7: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7: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7: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은 육신과 관여합니다. 그런데 이 육신이라는 것이 매우 수상합니다. 육신 내부에 율법은 온전케 할 수 없는 괴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셔서 인간 육신의 요구를 배제하시면서 따로 영생을 완성하십니다. ‘영생을 완성한다’는 것은 그냥 하늘 나라에 열매가 있는 것으로 달성되는 게 아닙니다.
선악과 나무 열매나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관계 맺으므로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즉 이 지상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나무나 선악과 나무의 취지가 완성이 됩니다. 인간들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을 때, 그들은 ‘정녕 죽으리라’는 빼놓고 따먹었습니다.
즉 인간들은 ‘정녕 죽으리라’가 뭔지를 모릅니다. 살다가 힘들면 그냥 콱 눈 감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죽고 난 뒤는 어떻게 되는지 그냥 “모르겠다”고 외쳐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를 여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죽음은 선악과 열매와 관련된 ‘제대로 된 죽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죽음은 ‘영원한 형벌로서 받게 되는 저주’입니다. 이 저주의 전부는 짧은 기간 동안만 사는 인간의 육신으로 다 구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 온전하게 구현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마저 율법과 연계해서 체험하셨습니다. ‘죽으리라’의 온전함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내용으로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달성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이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생명나무 과실이 있는 곳에서 추방시켰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영생이나 영원한 생명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란 곧 이 생명의 능력을 실어내는 형식을 요청하는 겁니다.
어떤 형식 말입니까?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생명나무의 취지와 선악과 나무 과실의 취지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일을 하실 때, 인간들의 폭력 안에서 달성하셨습니다. 즉 인간들의 폭력 속에서 영생의 반대되는 성질이 내포되어 있었던 겁니다. 인간들이 영생을 기피하는 이유는, 영생은 필히 영멸과 연관되어 있는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어느 한쪽은 영원히 멸망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영멸되기 싫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빈 형식이 아니라 뭐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가 심어준 ‘자기 의(義)’입니다. 즉 인간들은 창피당하기 싫은 겁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창피당하기 전에 자신에게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끝까지 지켜내는 마지막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었지 창피당하기는 싫다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6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 이미 목숨보다 자기 의를 더 챙기고 최후까지 사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말하고 성경 지식을 전해도 먹히지 않는 이유는 ‘자기 의’를 끝까지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의에 도달되는 복음의 능력은 결국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생이 이런 폭력을 통해서 구현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성을 품고 있는 영생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게 되면 성도의 일평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며는, 영생은 ‘빈 형식’에 가득 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형식은 이미 자기 잘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을 토하게 하고 게워내는 작업은 영생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율법을 받게 되는 모세도 출생부터 이런 지경 속에 놓였습니다. 출애굽기 2:3에는 어린 모세는 바구니에 담겨서 자기 집을 떠나게 됩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이 상자는 모세가 율법을 받고 난 뒤에는 ‘언약궤’가 됩니다. 어린 모세의 막강한 애굽 나라의 권력에 시달립니다.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친히 모세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인간은 본질 자체가 저주의 자녀이기에 자신의 힘으로 자기 본질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냥 태어난 게 세상이 죄요 존재하는 것이 죄요 사는 게 죄입니다. 죄 아닌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노력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건짐받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이 오기 전에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1:28-31에,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즉 구원은 순전히 주님의 뜻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쪽에서 “싫소이다”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폭력을 가하시는데 “좋소이다”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이미 온전한 채로 주님께서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율법을 육신에게 주신 것은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고질적인 자기 의’거치면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비로소 바구니에 담긴 모세의 처지에서 주님을 압니다. 영생은 바로 거기에 이미 담겨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에 의해서 폭력당하신 그 분이 영생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히브리서 7장 16-19절(생명의 능력)24101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16-19절입니다.
히브리서 7:16-19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인간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빠집니다. 인간은 빠지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리 생각해 둔 영원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오신 그분, 율법과 그분의 관계의 결과에 따라서 이 땅에 원래 없는 생명,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생겼습니다. 나타났어요.
그래서 영원한 생명, 쉽게 영생이라고 하죠, 영생이라는 것을 이미 받았고 영생 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를 뺍니다. 자기를 빼고 율법이 왜 주어졌는지 그리고 멜기세덱의 반열에 따른…, 멜기세덱의 반열은 인간의 혈육의 반열을 따라온 게 아니고 혈육과 상관없이 따로 오신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오신 그분이 왜 오셨는지, 영생 얻은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영생 얻은 사람의 특징은, 나라는 인간이라는 것은 율법과 멜기세덱의 관계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의 빈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죠. 인간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 안에 들어있는 그것이, 굳이 하나님께서 이 땅까지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와야 될 이유가 된 겁니다. 인간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인간 안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뭐로 꽉 차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꽉 차 있는 그것을 거부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그 율법을 상대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따로 보내셔서 율법도 땅에 내려왔고 그분도 땅에 내려왔고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영생이 없는 곳에서 영생이 발생되도록 그렇게 조치했습니다.
그걸 이미 알게 된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빈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기껏 형식과 형식의 만남으로 그친다는 거예요. 이걸 노골적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시체와 시체의 만남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고 기대해도 안 되고, 만나봐야 내놓을 게 없고. 왜냐하면 빈 형식이니까 영어로 empty, 빈 형식이니까 내놓을 게 없어요.
그러면 그 빈 형식이 뭐로 차 있느냐? 생명의 능력으로만 가득 차게 되는 겁니다.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 차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빈 형식이 되기 위해서 성도는 자꾸만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게워 내고 토해내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돼요. 욱, 욱, 하면서 자꾸 뭔가 토해내는데 그 토해진 게 뭐냐 하면 자기 의로움이에요, 자기 의로움.
지금 히브리서 오늘 본문 말씀은 현대의 우리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해하게 느껴져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그런데 로마서 1장 16절 17절에서는 오늘 본문보다는 확실히 현대인에게, 다시 말해서 이방인에게 더 확실히 다가오는 느낌을 줍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다시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되어 있단 말이죠. 이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능력, 구원을 주신 능력이니깐 구원이 없는 자는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겁니다. 복음을 기피 한다, “저리 가, 저리 가. 나 안 들을래.” 밀어낸다는 거예요.
밀어내는 이유가 뭐냐?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 의가 나타나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밀어내는 이유가 자기 안에 뭐가 꽉 차 있는데 그게 뭐냐? 자기 의예요. 자기 의로움. 사람 목숨이 귀하다, 귀하다 하지만… 강의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올해 한국 사람이 죽는 순위 가운데 최초로 5위까지 올라온 게 있어요. 자살입니다.
뭐 배고파서 자살하지 않아요. 창피스러워서 자살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창피스러워서 자살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게 있었어요. 그게 자기 의인데, 보통 살기 위해서 목숨 붙잡는다고 하는데 목숨보다 더 깊숙이 인간에게 더 소중한 게 있다면, 목숨은 버려도 못 버리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자기 의예요.
자기 의가 인간 속에 제일 소중한 것으로, 가장 소중함으로 박혀 있는 그 증거가 수시로 인간들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데 창피스러운 것은 못 참겠다는 태도에요. 창피스러운 것은 못 참겠다. 뭐 창피스러운 거 있으면 사람 안 만나면 되니까. 사람 안 만나고 산속의 자유인으로 살게 되면, 모든 대인 관계로부터 다 피해 버리면 뭐 하나 건지는 게 있어요. 그게 ‘나는 잘났다는 거예요. 내 속에 나의 잘남이 들어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남이 자기 의를 지키는 그것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내 인생의 마지막을 책임질 수 있는 대안이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게 있어요. 아주 강하게 외치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겠다’를 그렇게 자신있게 이야기 해요, 모르겠다.
“죽고 난 뒤는 난 모르겠고” 그걸 아주 자신만만하게, 모른다는 것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해요. “죽고 난 뒤에 뭐 어떻게, 천국, 지옥…, 아, 모르겠고, 난 몰라. 난 내 잘남만 지키면 그만이야. 나한테 복음 이야기 들려줄 생각 하지 마. 난 복음에 대해서는 모르겠고 난 창피스러운 인생만 안 살면 선방한 인생이야.” 그게 전부입니다.
그 점에 대해선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시죠? 왜? 다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여기 로마서 지금 세 번째 읽습니다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 인간은 생명나무를 못 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어서 추방된 입장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영생은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내세운 조건은 뭐냐? ‘내가 건지면 영생의 나라로 옮겨놓을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건져놓는 것을 가지고 구약적개념에 의해 구출, 또는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먼저 샘플 되는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끄집어내는 구출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 작전을 벌인 연장선에서 마지막에 영생이 없는 이방인에게도 영생을 줄 수 있는 조건으로 구원을 하는데 이 구원은 인간 스스로 해내지를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능력이 와야 돼요, 외부에서.
그 외부의 능력이 뭐냐? 이미 능력까지 포함된 게 우리에게 일부러 찾아온 겁니다. 그걸 가지고 기쁜 소식, 그걸 복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복음을 왜 거부하느냔 그 말이죠. 그게 바로 로마서 1장 17절에 그 안에 인간의 자기 의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못났어. 나는 겸손하기 때문에 나의 의 같은 거 없어.” 뭐 이러고 사람들이, 불신자들이 구시렁구시렁거리죠. “나는 못났어. 내가 뭐 잘났어? 누구한테도 내가 이야기해. 난 못났다고.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해.”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창피당하는 것은 그렇게 싫어하죠, 창피당하는 것. 남한테 놀림 받는 것은 그렇게 싫어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 8장에 돌아와서 인간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 조치한 거끼리 해서 생명, 영생을 주는 것, 생명의 무한한 능력, 영생입니다, 영생을 주셨다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로 하여금 토할 게 있어야 되거든요. 토할 게 있으려면 뭘 경유해야 되느냐? 내 육신에 있는 자기 의를 이 말씀이 경유해서, 이걸 거쳐서 이 말씀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일단 우리 속에 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나의 잘남, 나의 의를 거치게 되면 이 영생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가? ‘영생이 있어? 영생이 있냐고. 괜히 없는데 호들갑 떠는 거 아니야?’ 이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교회들이 장사하려고 영생, 천국 팔아먹는데 그거 애초부터 없는 거 아니야?’ 그 질문은 교회 몇십 년 다녀도 매일같이 할 수 있는 질문이에요.
영생도 없는데 “너 전에 교회 좀 다니다가 요새 왜 안 다니냐?” 이런 소리 듣기가 창피스러워서, 내의에 흠집이 되기 때문에 ‘뭐 나쁜 짓 아니니까 교회 나가자’ 하는 식이 아니냐, “영생 누가 봤어?” “그거 나는 모르겠고!” 하여튼 ‘모르겠고’를 제일 크게 이야기해요, “모르겠고! 없잖아. 영생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런 이야기를 경유해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된단 말이죠. 믿는 척 하면서 덤벼들지 말고요.
사람이 영생이 없다는 것이 영생 있다는 것보다 먼저 마음이 끌리고, 당기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 영생이 있으면 뭐가 문제냐? 영멸이 있어요. 영생이 있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히 멸망하는 것은 영생과 짝을 이루거든요. 영생만 있으면 ‘아이고 그거 좋은 거네. 일단 받아놓지.’ 이렇게 되는데 그게 아니고 영생이 없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아요. 저주를 받아요.
멸망,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잘 들으셔야 돼요. 인간은 죽어서 저주받는 게 아니고 산 채로 저주받아요. 인간은 못 죽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가 없어요. 이게 인간의 제일 큰 문제점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냥 눈 감고 죽으면 그만인데, 한 줌의 재가 되면 그만인데, 그래서 재를 흐르는 강물에 뿌리면 속이 시원하죠.
그런데 인간은 안 죽어요. 이게 미치고 환장할 일이에요, 이게. 인생 괴로우면 자살하면 그만이에요. 언제든 자살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자살해도 안 죽어요. 정말 이것은…, 나라는 것이 내가 끝까지 손댈 수 없는 존재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는 고쳐주잖아요. 그러나 의사는 살려주지를 못해요,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의학이 전부라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그 너머에 있어요. 인간은 자기 것인데도 자기가 손을 못 댑니다. 그게 요한계시록 20장 12-14절에 나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둘째 사망에 되려면 사람이 소실되면 안 돼요. 없어지면 안 돼요. 사라지면 안 돼요. 계속해서 그 자아라는 것이, 그 인간 자체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죽어도 죽음이 아닙니다. 가짜 죽음이에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게 진짜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경험한 것은 뭐냐? 영원한 저주를 경험한 거예요, 십자가에서.
인간들아, 이게 네 모습이라는 거예요. 죽는다는 개념도 인간이 경험해서 죽는 것을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게 죽음이야.”라고 제대로 된 죽음은 예수님만 죽을 수 있어요. 그리고 인간들은 거기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영원한 저주예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속량, 죄 사함이 되기 전에는 먼저 율법의 저주 아래 우리가 놓여 있어야 돼요, 율법의 저주 아래에.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 율법은 “너 살아있잖아.” “아이고, 살아있어도 나중에 늙어 죽습니다. 요양병원에서 늙어 죽어요.” “아니야. 네 속에 너의 의가 살아있다니까, 너의 의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행위가 살아있어요, 우리 안에. 나는 죽어도 그 행위가 나를 못 죽게 만들어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거, 하나님께 대적했다는 거, 하나님의 원수가 됐다는 거, 마귀와 한통속이고 마귀와 한패라는 사실, 나는 죽어도 내 안에서 그건 내가 죽어도 안 죽어요. 안 죽는다고요.
그러니까 인간 문제에 내 문제는 없어요. 전부다 주의 일입니다. 허접스럽게 살아도 이게 주의 일이에요. 감히! 내 일도 없는데 내가 왜 걱정합니까? 내가 왜 초조하고 염려합니까? 내 일이 있어야 내가 초조하고 걱정하는데 내 일 자체가 없는데요. 살고 죽는 것 내 일이 아닌데요. 주께서 태어나게 했고 주께서 영원히 저주스럽게 살게 하는 것, 이게 영멸이거든요.
영멸과 영생은 짝을 이뤄서 나오는데 이 땅에서 영생을 모르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이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하는 조치는 십자가에서 영생보다 영멸, 영원한 저주를 자기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거예요. 영원한 저주를 먼저 알려주시고 그다음 차례가 건져냄이에요, 영원한 저주에서. 자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살해서 될 문제 같으면 살다가 어려우면 자살하면 그만이죠.
이것은 뭘 뜻하냐 하면, 영생과 영멸의 공통점이 둘 다 폭력적이라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부터 되게 폭력적이었어요. 채찍부터 시작해서 목숨을 뺏어가는 것, 그 주변에 있던 인간들이 주님께 폭력을 가하는 것, 뺨 때리는 것, 모든 창피란 창피는 다 안기는 것이 전부다 폭력적입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80년 전에 내가 보기엔 한 50년 전에도 우리집에서 했는데 할머니들이 하얀 한복 입고, 색깔이 있는 한복은 어울리지 않아요, 하얀 옷에, 또 하얗게 머리에 두르고 다듬잇돌 있죠, 삼베 이불 홑청 올려놓고 방망이로 어떻게 합니까? 되게 폭력적이에요. 여자 두 분이 흰 모자 쓰고…,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다다다다다다다…, 사정없이 때리잖아요.
다듬잇돌 위에 놓인 것이 그저 이불이라 하지 말고 그 위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우리 인생이 거기 놓여 있다고 보세요. 매 순간 하나님이 때리는 폭력이 가해집니다. 맨날 아파요, 맨날. 맨날 다다다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맨날 폭력이에요. 애들도 맨날 숙제에요. 직장 가면 승진해야 돼죠. 가게 열면 손님이 와야 돼죠. 내 가게 앞에 똑같은 라이벌 업종으로 또 열어버리죠. 도대체 어디 피할 곳이, 폭력을 피할 곳이 어딨습니까? 애는 커가죠, 돈 쓸데는 많죠. 애는 왜 커가요? 걔들은 왜 커가느냐는 말이죠.
인생 자체가 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때려야 내 속에 있는, 폭력을 유발한 하나님의 적이 나오죠. 하나님의 원수가 튀어나오죠. “네가 이걸 먹었느니라.” 패야 나옵니다. 때리면 “하나님이여, 언제까지 팰 겁니까?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 못 했다고 인생을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언제까지 때릴 거예요, 언제까지?”
그게 뭐냐?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나와요. “이만큼 하나님 섬겼으면 됐잖아요. 이만큼 헌신하고 봉사하면 됐잖아요. 여기서 뭐 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정도 해도 나 지금 죽을 둥 살 둥 주님 섬기고 봉사하는데 여기서 더 내놓을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이런 것. 자꾸 못살게 굴어요. 이야기했지요. <범죄 도시 3, 4>에 나오는 것. 자꾸 못살게 굴어요.
생명이라는 건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적과의 폭력 안에서, 적과의 싸움에서 나온 결과물이 생명이에요, 이 땅에서는. 하늘나라에서는 조용히 달려 있죠. 그렇게 있는 그 생명이 이 땅에 올 때는 폭력적이고 적을 나타나게 해요, 적이. 그 적이 누구냐? 나예요. 내가 생명의 적이에요. 내가 생명을 거부합니다. 왜? 나한테 자기 의가 있으니까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나의 잘남이 있으니까요.
마태복음 21장 28절 이하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을 예로 들어요. 아버지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첫째 아들에게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니까 “예. 가겠습니다.” 해놓고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자.” 하니까 “저는 싫습니다.”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갔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31절에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인간에게 영생이 없는데 영생에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에게. 그걸 바리새인보고 이야기를 한 거거든요.
여기서 무엇을 우리가 유념해야 하느냐 하면, 그 ‘싫소이다’가 없으면 그건 제대로 영생의 길로 가는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싫소이다. 첫째 아들이 “오케이, 좋습니다. 하나님 믿겠습니다.” 이게, 이게 영생을 방해한다는 거예요. 왜 ‘싫소이다’라는 말을 안 하고 있어요? 이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의를 가지고 내부로 더욱더 깊숙이 도피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영생으로 간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 ‘싫소이다’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싫어하고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기억을 간직하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야 구원이란 게 돼요, 구원이라는 게. 구원이 내가 시도하는 게 아니고 강제로 끄집어낸다는 뜻이거든요.
‘싫소이다’가 돼야 ‘내 뜻은 싫소이다’가 유지돼요.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아버지 뜻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으로. 맨날 싫어요. 그런데 그 길이 천국 가는 길이에요. 패는데, 폭력으로 나오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하루하루 삶이 주님이 때리는 폭력으로 얻어맞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요? ‘싫소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돼죠. ‘교회 가는 것도 억지로 갑니다. 하나님 아시죠?’ 이런 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때 주님께서 옆에 붙어 있게 한 벌칙이 있어요. “네가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그 말이죠. 선악과 나무는 하나님이 심어놓았습니다. 그러면 선악과 나무가 보여주는 최종 완성 상태의 구현은 심어놓은 하나님이 구현해 내요.
인간은 뭘 못하느냐? 그 죽는다는 것을 인간은 구현을 못해요. 자살해도 죽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언질을 줬던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으리라’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죽으리라’의 구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을 때 구현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죽어도 ‘죽으리라’가 구현이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영원한 죽음을 인간은 이 육신을 가지고는 이루지를 못합니다. 구현해 내지를 못해요. 주님께서는 그 영원한 ‘죽으리라’를 구현하기 위해서, 여기에 생명나무도 같이 엮어서 구현하기 위해서, 영생을 같이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말은 굉장히 쉬운데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 들어있어요. 둘 다 나무잖아요. 나무를 심어놓았다는 그 취지가 그냥 에덴동산에 나무 심었다고 될 일이 아니고, 그 두 나무와 예수님의 생애가 결부되어야 그 두 나무의 취지가 다 구현이 될 수가 있어요. 생명 되시는 분이 어디까지 포함하느냐 하면 ‘죽으리라’까지 포함이 될 때, 생명 되시는 분이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죽음, 그 죽음까지 떠안을 때 생명나무가 생명나무답게 완성이 된다니까요.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17장 3절에 나옵니다. 2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영생은 우리 인간에겐 없습니다. 없는데 그냥 무상으로 주는 거예요. 없는데 주는 거예요. “싫소이다!”하는데 영생을 줄 이유가 없잖아요.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없는데, 없는데 새로 알게 되는 거예요. 인간 속에는, 아까 그랬지만 인간은 “영생이 어딨어? 교회가 구라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되거든요. 우리는 그래요. 우리는 나의 의만 있으면 돼요. 영생 같은 것은 필요 없어요. 내 잘남으로 지옥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나는 내 것으로 산다는 거예요. 아주 심지가 굳어요.
그런데 여기 영생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영생이 나타나니까 ‘영생? 그거 한 번 들여놔 봐? 들여놔?’ 이를테면 “영생이 한 오만 원 하는데 구매하시렵니까?” “구매하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지.” 하고 영생을 얻는데 영생 얻는 방법이 뭐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니까 “알면 되지, 뭐. 아, 영생 쉽다. 영생 압니다.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압니다.”라고 손 들면서 영생을 구입했어요, 내 안에.
나의 의도 있는 데다가 거기에다가 뭘 보태서? 하나님의 영생도 같이 겸해서 곁들여서 있는 걸로 여기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나의 의를 경유하지 않은 채 해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영생은 그냥 얻는 게 아니고 폭력적으로 적과 싸워서 생긴 결과물이 영생이에요. 그 적이 누구냐? 나랑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고,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한통속이고 그 후손들이에요. 자기 의로 사는 거예요. 폭력이라니까요.
그런데 이 요한복음 17장 3절 보고 ‘영생’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폭력 없이 그냥 순하게 받아들인 거예요. 그러니 이게 가짜 영생인 겁니다. 가짜 영생, 뭔가 토해내는 게 없어요. “싫소이다. 싫소이다…”를 늘 토해내야 하는데 토해내는 게 없어요.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인간의 그 시답잖은 태도에 전혀 말려들지 않고 다듬이 방망이를 가지고 매일 같이 우리를 팹니다. “네가 어떤 경우가 창피스럽나? 객관식으로 할게. 1. 내가 복음을 모르는 게 창피스럽다. 2. 남들이 나보고 놀리는 게 창피스럽다. 몇 번이냐?” 매일 같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 폭력에 의해 생기는 게 영생이라면 이 말은 영멸, 영원한 저주를 받는 사람들도 폭력에 의해서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예를 구약에서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보면 율법이 나오죠.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는 걸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에요.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모세는 누구죠? 자기가 뭔데 율법을 받습니까? 자기가 뭔데요, 뭐 잘난 게 있는데? 자기가 하나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왜 율법을 받죠?
출애굽기 2장 3절에 보면 모세가 태어날 때 뭔가 같이 모세의 환경이 구비되어 있어요. 모세의 환경이 뭐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모세는 바구니에 담겼습니다. 이 바구니가 뭐냐? 모세의 엄마가, 강물에 빠지는 것을 방비하는 바구니에 모세를 담아 보낸 거예요.
그 바구니, 모세가 율법을 받음으로 그 모세와 같이 율법을 같이 공유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바구니 같은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게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 모세의 바구니, 이게 뭐냐 하면 애굽의 인간 세계의 권력이 제공하는 적그리스도적인 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엄마가 아들을 키우지 못하고 내보내야 된다는 것, 아주 위태위태하게 인생을 내보내야 한다는 이유가 뭐냐?
그 애굽의 권력 때문에 그래요.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하나님께 대적하는 권력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율법은 조금 이따 설명하고 에베소서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2, 3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본질상 진노밖에 없는, 모조리 다 죄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하는 게 다 죄고, 사는 게 죄고, 존재하는 게 죄가 돼요. 그걸 누가 아느냐? 이미 영생 얻은 자는 그걸 아는 거예요. 영생을 얻지 않은 사람은 그걸 몰라요. 죄 안 지으면 되지, 죄짓더라도 회개하면 되지…, 이런 식이에요.
애초부터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에요. 사는 거 자체가 죄고. 본질상이에요, 본질상. 변경이 안 돼요. 본질상 죄의 저주받은 육신을 가지고 본질상 살기 때문에 우리가 나한테 어떤 조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본질상 하는 그것이 뭐냐? 내 시간과 공간 지키고, 내 자존심 지키고, 내 것 사수하는데 그 결과가 뭐냐? 그 안에 나의 의로 점유되는 겁니다. 나의 의로 비축되는 거예요.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고 힘들게 살았는데 내가 아까워서 인생 하루 더 살아야 하겠다. 링거 꽂아라. 살아온 지난날이 아까워서라도 야무지게 내가 더 살아야겠어.’ 다른 말로 하면 ‘야무지게 죄 더 지어야겠어. 나의 의가 있으니까.’
그런데 모세는 동동 떠 있어요, 바구니에 들어 있어서. 그 환경을 본인이 변경 못합니다. 그냥 압도적인 애굽의 권력 가운데서 하나님이 엄마에게 내린 그 조치가 모세를 홀로 두지 아니하고 바구니에 담아서 어디에 집어넣는가? 하나님의 뜻에, 주의 뜻에 맡겨요. 오늘 우리 성도의 처지가 언약궤라는 십자가의 바구니에 담겨서 하루하루를 주의 뜻에 내맡기는 삶이 되는 겁니다.
그걸 빈 형식, 형식인데 내 것으로 채울 수 있는 빈 형식, 나의 의도 거기서 다 토해져야 될 빈 형식, 그 안이 주님의 공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고 생명으로 채워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가 준 것, 하나님 자기 자신을, 우리를 통해서, 빈 형식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영생을 건지시고, 내 속에 복음을 건지시고, 내 속에 말씀을 건지시고, 내 속에 주님 자신을 건져냅니다. 빈 형식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를.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날마다 두드려 가면서, 그걸 확인시켜 가면서 예수님을 담는, 귀한 보석을 담는 방식으로 우리를 건집니다.
바구니에서 건짐받은 모세는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 벗어나서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뭘 주느냐? 홀로 있을 때 사명 주시고, 그다음에 모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처럼 건질 백성이 있을 때 모세를 통해 준 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여기에, ‘육체와 상관된 계명’ 육체와 관련된 계명, 거기엔 뭐가 없는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7장 16절 내용이 그거예요. 율법 자체는 나쁜 게 아닌데 선한 것에서 생명이 없다는 거예요. 선한데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은 뭐라고 우기냐 하면 ‘내가 착하면 영생 얻을 수 있다.’라고 우깁니다. 본인이 그 중간에, 자기 육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영생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몰라요. 본인이 알지를 못합니다.
울산 강의 때 제가 울산역에 내리면 늘 고마운 권사님께서 저를 타에 태워서 새순 교회까지 운반해 주시지요. 저는 벌써 메모지 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무슨 복음적인 말이 나오는가.’ 그런데 전혀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기대에 충족합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손주가 생기고서 그렇게 예뻤다는 거예요. 딸이 질투할 정도로 외손주를 그렇게 예뻐했답니다. 물론 해줄 것 다 해주고요.
이성이 아니고 그냥 올라오는 대로 예뻐했는데 어느날 손주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할머니, 느그 집에 가!” 할머니 느그 집에 가. 이 말 듣는 순간 손주 사랑이 싹 날아가 버렸어요. 느그 집에 가. 그 권사님은 일방적으로 내가 퍼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 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나는 그 이야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을 다 퍼준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반말로 ‘느그 집에 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무조건 사랑한다?’ 이게 엉터리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나의 의가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상대에게 다가설 때 본인이 느끼지도 못했는데 자기 의를 위해서 퍼준 거예요. 상대가 나의 의를 건드리지 않는 조건 하에 퍼준 거예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할 때 그 영생을 우리는 받는다고 하지만 왜 그걸 못 받느냐 하면, 나의 의를 경유하지 않고 받았기 때문에, 나의 의의 실체가 뭔지를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을 얻은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나의, 인간들의 의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망가진 모습이에요. 이 말은, 영생이 이제는 나의 의를 폭력적으로 다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요? 나의 의를 건드리는데요? “네가 하루하루 살면서 무엇이 그렇게 창피하더냐? 직장 쫓겨나서 창피하냐? 애들이 공부를 못해서 창피하냐? 네가 신자들한테서 ‘너는 신앙도 아니다. 너는 교회 나오지 마’라는 그런 것 때문에 창피”한 겁니까? 돈이 한푼도 없는 그것 때문에 창피합니까?
그놈의 창피함, 그놈의 부끄러움, 우리는 그 부끄러움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요? 무슨 수로? 무슨 그런 거짓말을! 나는 내 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이에요, 내 의를, 내 잘남을. 자살해도 포기 못 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가져가는 것이 나의 의에요.
이처럼 매사가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이 육신 자체에 율법이 가미된 것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히 7:19).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주셨다. 왜 주셨을까? 다른 민족에는 율법이 없다. 우리에게는 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주셨다. 율법에 보니까, 이걸 지키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 아,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또 있느냐? 열심히 지키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고 다른 이방민족에는 영생이 없다.’
이 논조를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가져와 보세요. “우리는 예수를 믿게 되어 영생 얻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들은 영생을 못 얻는다. 기쁘지 아니하냐?”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그것이 뭘 안 건드리냐 하면 나의 존재가치, 나의 의를 지금 안 건드리고 해석하는 해석법이에요.
나의 의를 안 건드리고 잘난 체 하면서 했던 그것을 오늘날 교회 교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당시에 열 두 제자도 그런 짓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여기 물러간 사람의 명칭이 제자라고 되어 있어요. 제자들이 다 물러갔어요.
열두 명만 따라다닌 것은 아니고 70명부터 해서 예수님 가시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허경영 같아요. 영생수 준다고 하니 아줌마들 다 따라다녀요. 팬들 같아요. 이찬원, 임영웅, 김호중은 대기상태고, 또 방탄소년단 그 애들. 그처럼 예수님이 당시에 소문이 났어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기대와 희망을 준다는데, 내가 이익을 본다는데, 그분을 모르는 게 손해가 된다면 우리는 알고 싶은 거예요, 따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따랐는데 주님께서 수시로 잘라내요. 따라오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지금 따라온다는 것은 나를 지금 엄청 오해했다는 겁니다. 오해한 이유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적, 마귀가 집어넣어 준 것, 자기 의를 내다보면서 말씀을 줬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줬다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줬다는 것, 그래서 자기구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으니까 율법 지키는 그 모양새로 주의 말씀도 믿으라고 하면 그냥 믿습니다,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는 계속해서 난해한 말씀을 주셨지요. 요한복음 6장 60. 61절에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즉 “이 말이 너희들에게 지금 장해물이 되지, 그렇지? 그러라고 준 거야.” 이게 뭐냐? 율법 기능이에요, 율법 기능. 율법은 ‘이것 지키면 복 받는다.’ 할 때 ‘이것 어기면 저주받는다.’를 까먹고 ‘이것 지키면 복 받는다. 너에게 실제로 이익이다.’ 이것 붙들고 율법 지킨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율법적 기능이 있으니까.
다 가버렸어요. 그리고 제자들이 남았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은 제자들이에요. 66, 67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 대목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실 때 ‘딴 사람은 가도 너희들은 안 갔네? 아이고, 착하기도 해라. 그래 너희는 나와 함께 다니자.’ 이런 취지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열두 제자가 지금 모르는 것이 있어요. 인간이 따라가도 갈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이 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열두 제자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율법은 막혀 있는 거예요. 우리의 육신 자체가 영생 가는 길을 철저하게 차단시키고 있다는 것. 그러니 이 육신이 죄에요. 이 육신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못 가는 거예요.
이 육신 안에 악마가 장착하고 있으니까, 자기 의가 있으니까, 창피스러운 것은 죽어도 싫으니까, ‘나를 창피스럽게 만들지 않는 조건하에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는 생각이 넘치니까 제자들도 ‘갈 사람 가라. 나는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리겠습니다.’ 여기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68절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함으로써 자기가 칭찬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했을 때 인간의 육신의 한계를 보여주려는 거예요. 야무지게 예수님을 따르면 나중에 영생 얻는다는 생각이 너희 인간들의 생각의 한계점이에요. 하나님께서 그걸 막고, 막고, 차단하고, 차단해 버리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영생을 얻을 수 없는 조건인 것을 인간은 잊어버리고 ‘잘 하면 영생 얻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알면 영생 준다 했잖아요.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을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은 자기 의를 경유하지 않고, 자기 의는 그냥 여기 있고 거기다 말씀을 보태서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는 보험 하나 들어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 제자들 다 떠났습니다. 다 떠났어요. 그러니까 주님의 구원은 구원받으려는 인간들의 일이 되면 안 돼요. 백프로 온전히, 오롯이 예수님의 일이 되어야 해요. 구원의 일이 되려면. 그러면 그들이 그런 말을 하든 안 하든 ‘싫소이다’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야 해요. “가라. 그냥 가 있어.”
그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이겁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선택한 거예요. 모든 인간을 선택 한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영멸할, 지옥에 갈 가룟 유다도 선택하듯이 선택함으로써 그들은 지옥 가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만 오롯이 구원하시기 때문에, 인간 구원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복음을 집어넣은 자는 그 주님의 복음을 건지면 같이 빈 형식으로 구원받고 주님의 복음이 안 들어오면 자기 잘남과 자기 의로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날 것으로, 날 것으로 받아요. 영원히, 영원히, 그것도 날 것으로.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의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은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율법도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육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육신과 관련 있을 때는 율법이 주어지지만 육신이 죽고 난 뒤에까지 남아 있는 영원함은 그다음부터 누구 권한이냐?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열의 제사장인 예수님 권한이 되어서 모든 율법도 온전하게, 모든 구원도 온전하게, 모든 지옥 가는 것도 온전하게 이루실 분은 바로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좋은 소망, 주님의 소망이 들어 있는 자는 주님에 의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 중이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성도의 하루하루는 우리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맨날 실패야.’ 맨날 실패입니다. 그런데 맨날 실패를 하면서, 짜증이 확 올라오면서 그 짜증 속에 ‘창피당하면 안 돼. 나는 잘나야 해.’ 이게 섞여서 구토되고 있는 거예요. 그 능력, 그것은 바로 영생의 능력, 주께서 친히 이끄시기 때문에 발생되는 희한한 현상입니다.
놀라운 기적 다른 것 찾지 마시고요, 날마다 나의 의 때문에 주님이 폭력적으로 저주받았고, 그렇게 저주를 받았지만 주님의 부활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모세가 이제 주님을 알았거든요. 스데반 집사가 주님을 알았어요. 빌립집사가 주님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알았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주님을 알았습니다.
그 정도 아는 것,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자기의 의가 하나님의 적이 된 것, 내 적을 내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런 것을 바탕으로 주님과 아버지의 관계를 아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의 능력 안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하는데 왜 자꾸 나의 일을 따로 계산하고 챙겨야 되는지, 이것조차 주님에 대한 모독인 것을, 그것도 기쁘게 감사하면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