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맹세와 율법

아빠와 함께 2024. 10. 13. 17:54

맹세와 율법 

2024년 10월 13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20-22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보증이란 최종성에 담보를 두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맹세의 보증은 고린도후서 1:22에 나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즉 최종 상태가 되도록 조치하셨다는 겁니다. 최종 상태에 나타난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최종 승인한 인간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그 최종성을 위해 중간에 들어선 겁니다. 갈라디아서 3:17-18에 보면, “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투입된 것은 처음 인간이 망가졌다는 겁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그 어떤 지식이 없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담은 마귀에 꾐에 빠저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고 단호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정녕 죽으리라’입니다.(창 2:17)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정녕 죽으리라’로 이미 확정된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이미 알아버린 선과 악의 지식을 활용해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내가 뭐가 나쁜데?”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런 인식은 자신이 마치 살아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인식입니다.

인간 세계 전체가 이런 법적인 질서체로 짜여져 있습니다. 거미망처럼 촘촘한 법적 체계 속에서 인간은 법을 붙들고 자신을 살만한 가치 있는 인간이양 여기면서 거저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하나님편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이 율법에 철두철미한 준행자가 되지 못하면 필히 저주가 주어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으로 인해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율법 행위가 인간 구원의 최종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미 인간들의 육신 자체가 ‘정녕 죽으리라’의 적용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는 육신적 행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율법 말고 맹세가 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22-26에 나와 있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즉 아브라함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육신의 자식은 이스마엘 하나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이 살아있다고 치고 그 산 육신과 관계를 맺은 육신이 바로 하갈입니다. 이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마엘은 저주받아 지옥가야 될 자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육신의 생산물이 저주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 육신이 당연히 저주받을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약(맹세)를 통해서 이삭이 죽은 사라의 몸에 의해서 태어나게 됩니다.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약속의 아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에 있어 두 개의 자아가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저주받을 육신에 언약이 주어지면 여기서 천국 갈 새로운 자아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율법이 주이진 이유를 보여주는 육신과 성령을 받아서 생긴 새로운 자아의 나타남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자임이 드러나고 약속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율법이 주어진 시내산과 예루살렘이 같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같은 장소가 둘로 나뉘어져 하나는 하늘로 가고 다른 하나는 그냥 땅에 남겨진다는 겁니다.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지옥가고 아니라 동일한 한 인간에 언약이 주어지면 그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자가 곧 약속의 증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 율법의 그물망에 갇힌 채 살아가게 됩니다. 법의 목줄이 목숨보다 더 셉니다. 즉 자기를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해서 잘난채 하는 바로 그것이 자기 목숨을 묶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런 법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 체제에서 맹세 차원으로 옮겨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예가 구약 에스더서에 나옵니다. 바사 나라의 혼인법에 의해서 아하수에로왕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는 그 나라의 혼인법보다 더 능가하는 무엇을 발휘하게 됩니다. 에스더 3:2에 유대인 모르드개는 당시 권력 2인자 하만에서 절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법 위에 다른 법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분노한 하만은 모든 유대인을 진멸하기 위해 또 법을 동원합니다.(에 3:13) 모르드개의 입장은 마치 애굽 나라에 꿈으로 휘저었던 요셉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꿈의 초법적 활동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서 인간 법망에 구멍을 뚫어내십니다.

왕과 왕비 사이에 있었던 법, 즉 왕이 먼저 초청하지 아니하면 왕비라 할지라도 왕을 알현할 수 없고 그것을 위반하면 왕비라도 죽는다는 국가법마저도 에스더에 의해서 뚫립니다. 그 힘은 바로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능력은 세상에 설치된 모든 법을 찢어버리고 탈출 구멍을 만들게 됩니다.

이 죽음이 나타내는 맹세의 위력에 하만은 모르드게를 법으로 처단을 내리려하지만 도리어 그는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해서 집안이 거덜납니다. 진멸을 하려던 계획은 왕의 반지를 넘겨받은 모르드개에 의해서 도리어 유대인의 적 75,000명이 죽게 됩니다. (에 9:16) 그리고 유대인들은 인간법을 이긴 날를 기념하면서 잔치를 벌리게 됩나다. (에 9:22)

소위 살았다고 하는 자들의 잔치를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된 자들의 잔치로 바뀌어집니다. 바로 이 최종적 현상이 미리 들어온 자들이 오늘날에 성령받은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24시간 온종일, 세상이 얼마나 십자가를 가리고 조롱하고 모독하고 있는지 파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히브리서 7장 20-22절(맹세와 율법)2410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20-22절입니다.

히브리서 7:20-22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들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것저것 믿어라, 하면 그냥 믿으면 될 텐데 우리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로 많이 기록된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 자체가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에요. 원래 만든 인간이 아니고 다른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인간이라는데 원래 만든 인간과 다른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 ■원래 만든 인간은 선악을 알지 못하고, 그다음에 정녕 죽지 않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와 결탁이 되어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법적인 성향이 인간 속에 들어왔고, ‘선과 악’ 선과 악 사이 구분하는 법적인 인식이 들어왔고, 그다음에 뭐가 또 들어왔냐 하면 ‘정녕 죽으리라’가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맹세에요. 하나님이 작심하신 거예요. ‘네가 선을 알고 악을 안다고 할 지라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안다고 할지라도 내 분명히 맹세한다, 넌 정녕 죽는다.’ 정녕 죽으리라, 이것이 항상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 자기 맹세를 확정하는 그러한 대상으로 삼았던 거예요. 확정하는 증거물로 삼았던 겁니다. 그 확정을 오늘 본문에서는 ‘보증’이라고 되어 있어요.

22절에 “이와 같이 예수는 더욱 좋은 언약에 보증이 되셨나니” 맹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맹세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증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보증이 된다는 말은,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일은 일체 없을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라는 것을 율법을 통해 주께서는 이미 맹세를 하고 보증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 인간들은 희망이 없죠.

28절에 보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사장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죽어요. 자꾸 죽어 나가요. 그것은, 인간이 율법을 받음으로서 그 율법의 취지에 동의할 수 없는, 합치화될 수 없는 약점이 있는 인간인 것이 제도로 들춰진 거예요, 하나의 율법에 의해서.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간단히 이야기 해서 이렇습니다. 시작한 게 있고 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되게 하는 방법이 뭐냐? 끝을 시작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 끝이 뭐냐? 하나님의 최종 보증한 것을 집어넣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약점 가진 채로의 ‘정녕 죽으리라’를 넘어서는, 다른 보증을 가지고, 끝부분이죠, 다른 끝부분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는데 뭘 집어넣는가?

바로 22절에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그럼 앞에 있는 보증은 마지막 보증에 비해서는 모자라죠. 율법이라는 보증, 그 보증보다 더 나은 보증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이제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오는데요. 1장 21절부터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셨다. 그 성령의 자리에다가 이걸 집어넣어 보세요. 최후의 보증, 최후의 능력. 이미 끝이 난 그 이후의 능력을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이 성령의 보증을 받은 사람은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의 문제점, 우리의 약점을, 그 시작점을 되씹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겁니다.

이미 우리 속에 마지막이 와 있기 때문에 도대체 시작은 어떻게 시작해서 마지막이 미리 와야 되는지를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시작점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거예요, 시작점을. 어디서부터 문제가 되었나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우리의 일상은 뭐냐? 기어이 살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살아보려고.

살아보려 하는데 인간들이 구상하고 있는 그 노력은 뭐냐 하면, ‘법적으로 정당하면 더 살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선과 악을 아니까 악한 자는 망하고 선한 자는 잘 된다. 따라서 내가 잘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선하면 된다. 선한 방법은 뭐냐? 성경 말씀 지키면 되고, 믿으면 되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 이런 아이디어가 싹 올라오는 거예요.

성경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이미 왜곡된 마음가짐 가지고 성경을 봐요. ‘내가 이 땅에서 죽는데 성경 말씀 지키면 죽어도 살지 않겠느냐?’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론이죠. 엉터리죠. 거짓말이죠. 하나님 믿는 이유, 성경 보는 이유, 예수 믿는 이유, 그 이유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덕에 나 자체가 ‘정녕 죽으리라’에서 탈피해서 ‘살리라’로 바꾸려는 하나의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성경을 백 독을 해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그냥 내 뜻만 지독하게 관철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주 독하게 관철하는 겁니다. 세상에 나와서 그냥 열심히 살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겠다는 거예요. 세상에 나와도 열심히, 그리고 교회 와서도 열심히.

그래서 교회나 세상에 나와서 신경 쓰는 것은 뭐냐? ‘제가 법적으로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이거에요. 자꾸 묻는 거예요. “제가 법적으로 하자 없잖아요? 제가 잘못된 거 없잖아요. 완전하지는 않지만 실수는 있는 법, 회개하면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핑계와 변명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그 남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잔소리나 하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에요. 사람에게 맞아 죽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피 믿고 천당 가자.” 이게 아니라 “제가 언제 주님을 때려죽였습니까?” 그것부터 따져야죠. “제가 평소에 남한테 해코지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인데 제가 언제 하나님을 때려죽였습니까?” 하는 그 질문부터 나와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관성이 있죠.

그저 예수님 앞에서 착하게 살려고,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하다는 게 뭐에요? 아직도 자기 속에 선과 악이라는 법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거예요. 법적인 인식이에요. 오늘 본문에 율법은 소용없다고 되어 있어요. 율법은 소용없어요. 소용없는 걸 갖고 있다고요.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어요. 목줄이 목숨보다 더 센 겁니다.

그 목줄이 뭐냐? 법적인 인식이에요. 양심이라는 인식입니다. 정당성이라는 인식,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냐? 하나님, 우리 좋게 나갑시다. 말씀이나 그냥 듣고요.’ 이러면 될 문제를, “믿느냐?” “믿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를 왜 중간에 하나님이 죽었다는 게 끼어들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 죽은 걸 빼버리고,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집어넣은 거예요. 그건 소설책이죠, 소설책. 요새 소설 때문에 아주 한국이 난리도 아니잖아요.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 같으면 재능이 있어요. 인간의 생각을 함축된 은유로 함축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에요, 한강이라는 사람이.

그런데 이 세상에는 그런 글 쓰는 재주만 있는 게 아닙니다. 피아노 치는 재주도 있어요. 이 한강이라는 작가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딱 세 문장을 쓰기 위해서 있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집중하고 집중하는 거예요, 글 쓰는 것에. 사람들의 동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요.

그런데 임윤찬이라는 피아니스트는요, 음표 두 마디 치기 위해서 일곱 시간을 연습한다는 거예요, 일곱 시간을. 우리나라에 신진서라는 바둑 기사는 24시간 가운데 20시간을 인공지능과 바둑해서 이기려고 인공지능을 붙들고 있어요. 집중력이에요. 여기 교회 밑에 있는 편의점은 밤새도록 손님을 보기 위해 집중하고 있어요, 밤새도록. 각자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무엇에 집중하느냐?  24시간 집중하는 것이 인간들이 예수님의 피를 어떤 식으로 조롱하고 모독하고 무시하고 가리고 있는지,그 자리를 탐색하는 데 24시간을 다 바쳐요. 이 인간 세계가, 주께서 다 이루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를 안 받아들이고 자기 나름의 자기만의 정당성을 거기서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교회를 몇 년 다녔니, 전도를 몇 명 했니, 헌금을 얼마를 했니, 교회 봉사를 얼마나 했니,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웠니, 이런 거. 그런 것들이 십자가를 가리는 짓이에요, 그게.

‘정녕 죽으리라’라고 분명히 규정했지만 자기가 정녕 죽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어요. “정녕 죽으리라, 대신 내가 선을 알고 악을 알면 그걸로 퉁 칩시다.” 그걸로 때우자는 거예요. 피아노 잘 치면 선이고, 노벨상 받으면 선이 되고, 바둑 잘 두면 선이 되고, 자기 분야에서 돋보이면 선이 되고, 게으르면 악이 되고.

■그 한강이라는 여자분이 노벨상 받았을 때 스웨덴에서 이런 평을 했어요. ‘역사적 상처를 보듬어 줬다’는 거예요, 역사적 상처를 언어로 보듬어 줬다.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인간들의 역사적 상처보다 더 아픈 게 있습니다. 그건 자연의 상처에요. 서아프리카의 모잠비크는요, 엘니뇨 현상 때문에, 십 년 동안 지속되는 가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거 누구 잘못입니까? 자연이 주는 횡포에요. 자연이 주는 상처입니다. 자연의 상처는 인간들의 무슨 사회적 상처는 이유도 아니에요. 태풍 불면 잘잘못 관계없이 싹 쓸어 갑니다. 산불 나면. ‘정녕 죽으리라’에요, 정녕 죽으리라.

■자연의 상처가 어디서 나오는가? 율법의 상처에서 나왔어요. 율법의 상처. ‘네가 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받으리라.’
그 율법의 상처, 율법의 상처에서 나온 게 지옥입니다. 지옥은 끝없는 절망이에요. 끝없는 절망, 영원한 절망이 지옥입니다. 살아있을 땐 희망이라도 있죠. 끝났어요. 율법의 상처, 대단합니다. 인간을 지옥 보내니까. 그래서 인간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이 지옥 안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죠.

■근데 지옥 안 가기 위해 교회 나오면 여전히 자기 상처를 보듬는 것밖에 안 돼요. 지옥 안 가기 위해 교회 나와서는 안 돼요. 그것보다 더 있는 상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상처입니다. 하나님의 상처는 헤아릴 줄 모르고 자기가 지옥 가서 영원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그것만 걱정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죽었는데 자기 죽는 것만 걱정하고 있다고요.

한 강씨가 쓴 책 안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저는 전에 이미 두 권이나 봤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책 내용에 이런 게 있어요. “죽음 뒤에도 배고픔이 있을까.” 죽기 전에 먹을 양식이 어디 있었나, 물이나 퍼마셔라, 해가지고 죽은 시체에 물을 마시게 하는 그 대목을 묘사해 놨어요.

노벨상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지만, 인간들이 어디서 막히느냐 하면,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으면 악이 되고 살아있는 것은 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선과 악에 ‘정녕 죽으리라’가 있는데요? 창세기 2장 17절, 주의 말씀. 인간은 그렇게 죽기 싫어하는데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은 죽어도 못 죽는다는 거예요. 속 편하게 죽으면 좋죠. 자살하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죽어도 못 죽어요. 이 팔자가 더러운 팔자가 되고 말았어요. 마지막에 죽은 자도 다시 무덤에서 끄집어낼 거예요, 지난 낮에 설교한 것처럼.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대책이 없습니다. 왜? 이게 맹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맹세에요. 약속이에요. 확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떤 대책을 세우라고 말씀을 준 게 아닙니다.

어떻게 요령 부리라고 성경을 준 게 아니고 확정된 맹세를 그냥 책으로 보여주면서 “너희들은 여기서 대책이 없다. 너는 어떤 대책으로도 하나님의 확정에서, 맹세에서 못 빠져나온다.” 하는 그걸 이야기하는 게 성경이에요. 이거 믿고 이거 지키면 뭐 될 게 없어요. 인간은 이미 끝났어요.

그러면 성경은 무슨 이야기냐? 탕수육에 소스 붓죠? 인간 죽음의 세계에다가 주님의 소스를 붓는 거예요. 주님의 맹세를, 피를 붓는 거예요, 거기다가. 피를 부어버리면 층이 두 층이 되어버려요. 하나는 ‘율법으로 모든 자가 이미 죽어버렸다.’ 그 ‘정녕 죽으리라’ 위에 주님의 소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는 소스가 덮쳐버리면 층이 두 개의 층이 된다고요.

이게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이미 그런 예언을 하셨어요. 시편 103편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이렇게 해서 11절에 있고, 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신 거예요.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된 게 아니고 탕수육 소스처럼 뭔가 찐득찐득하게 우리에게 덮인 게 있어요. 그게 능력이에요. 이걸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시편 25편 7절에 나오는데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의 일체 모든 기억이 소실되고 소멸된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여, 일체의 우리 죄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 달라는 겁니다. 간주했을 때 그 위에 뭐가 덮이는가? “주의 인자하심만 기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은 어떤 기억을 하든 그것은 이미 ‘정녕 죽으리라’의 원인 제공에 불과하니까 죽을 요소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건 기억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무의미한 거예요.

층이 두 층이 있다는 이 내용은 갈라디아서 4장 22절 26절에 나옵니다. 이 본문이 어느 정도로 난해한지 제가 읽어드리니까 일단 들어보시고 도대체 이것이 정말 인간의 육적인 수준에서 해석이 되는 것인지를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뭐냐면,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이 대목이에요. 이 하가는 하갈이죠,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이 하갈이라는 인물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 어떤 지점과 일치되고, 그 지점이 예루살렘과 일치되는 지점이라는 거예요. 인물이 공간으로 대비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또 어려운 대목이 뭐냐?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연결시켜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 가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가고’ 이게 해석이 아니라, 이게 아니라 하나의 인간 가운데 언약이 여기서 달라붙으면 하나의 인간이 두 층으로 분리된다는 겁니다.

하나는 육신이 속한 층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의 층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다 육신의 층이 있어요. 그렇게 육신의 층이 있고, 모든 인간은 육신의 층에서 살다가 육신의 층에서 끝나요. 끝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시내산에 있는 하갈, 다시 말해서 아까 본문에서는 이게 바로 저주받을 종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저주받을 자로 태어났다, 이런 뜻이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이 말은 아브라함의 육신에서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서는 육신으로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육신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 이스마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삭은 뭐냐?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아브라함의 자식이면서도 아브라함의 육신에 없는 요소가 가미된 겁니다. 그 가미됨으로 말미암아 육신 자식 따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가미된 새로운 이삭 자식이 따로, 가 되면서 갈 길이 따로 돼요. 육신의 자손은 지옥, 저주니까 지옥, 그리고 이삭이 갈 곳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26절, 하나님의 예루살렘 천국이라는 거예요.

천국인데 여기서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그 육신으로 갈 사람들은 시내 산, 율법을 받은 시내 산이기 때문에 율법을 따르는 사람들이에요. 법을 따르는 사람. 법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고 법을 지킬 경우에 ‘살아있는 내가 법을 준수하면 나는 선한 쪽으로 가고, 법을 준수 안 할 때면 악한 쪽으로 간다.’라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인간들의 공통점이라는 거예요. 육신으로 태어난 자의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공통점이라는 거예요.

한강이고 낙동강이고 전부 마찬가지예요, 전부다. ‘이왕 사는 거 제대로 인간답게 서로 도와주며 살자’, 이게 바로 노벨 문학상 받은 취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어디를 봐서 네가 살았느냐는?’ 하는 거예요. 도대체 네가 살았다고 하는 근거 뭐냐, 도대체? 육신이에요, 육신. 지옥 갈 육신이 살아 있지 그게 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와의 관계가 끊어졌어요. 그야말로 ‘정녕 죽으리라’를 아주 개무시한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심지어 교회마저.

천당 가려고 교회 나온다. 이미 죽었는데 왜, 무슨 천당을 가요, 죽었는데? 그래서 여기서 어려운 대목, 그 시내 산에 있는 그것이 지금 예루살렘과 같이 있다는 거예요. 중첩입니다. 중첩이에요. 전부다 성경에서 나온 건데 참 어려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만 주시면 되는데 율법 주시고 메시아 오는 게 아니고, 율법 주시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다윗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성전을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율법 그 위에 성전이 있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 율법도 지켰는데 율법의 완성이 성전이구나. 이제 성전에서 제사 지내면 이건 율법의 완성이니까 성전에 있는 우리 민족이야말로 진짜 구원받은 민족이고 성전 없는 민족들은 다 지옥 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성전이 UFO처럼 뜨네요? 하늘로 떠요, 이게. 뜬다고요 이게. 갈라진다고요. 무엇 때문에?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오면, 맹세가 오면 그렇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구원받는 사람은 뭐냐? 모든 인간은 육신대로 살아요. 부모로부터 육신을 받았어요. 받았으니까 육신이 품고 있는 정신, 다시 말해서 ‘나는 악착같이 살아야 돼. 죽어서도 천국 가야 돼.’ 이런 정신으로 무장돼서 있다, 이 말이죠. 여기에 뭐가 왔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이런 육신에 언약이 와버리니까 자아가 두 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는 ‘나는 기어이 버티고 살아야 한다.’는 그 육신적인 본성. 또 하나는 ‘예수님이 죽을 때 이미 너는 죽은 거야.’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새로운 두 번째 자아, 두 번째 언약의 사람. 이삭과 이스마엘 두 아들이 똑같은 아버지 밑에서 아들이라고 인정받았지만 결국 갈 길이 다르게 나누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날마다 뭐가 나눠져야 돼요.

내가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의 율법대로 ‘나는 정당하다. 하나님, 제 인생 고생스럽게 하지 마세요. 아프게 하지 마세요. 저는 나쁜 짓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무 가혹합니다.’라고 자기사수, 자기방어, 철저한 방어, 거기서 오는 반발, 이게 작동하고 있어요, 모든 육신에게.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신 없이 살아가고, 신을 모독하는 즐거움에 빠졌습니다. 그게 노벨상입니다, 노벨상. 신을 모독하는 즐거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힘으로 산다’는 그 독한 아주 독한 야무짐, 그걸 의지라고 합니다. 의지, 격렬한 의지, 그것 빼고 뭐가 있습니까? 집착이죠. 자기에 대한 집착 아집이죠. 똥고집이죠.

기도해도 야무지게, 헌금해도 야무지게, 봉사도 야무지게, 전도해도 야무지게. 그 야무짐은 그냥 법만 줄창 잡고 있어요. 법, 법, 내가 이렇게 아파서는 안 되고, 내가 가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증해 줄, 율법에다가 보증을 치고 있어요, 율법에다. 오늘 본문에서는 ‘맹세’인데 율법 쥐고 ‘난 이렇게 힘들게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대드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거 율법의 목줄에 묶인 자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이미 또 하나의 자아를 발견한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열심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맹세에 우리가 편입됨으로써, 끌려 들어감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이 와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믿음이 예수 믿는 내 믿음을 이겨야 되는 거예요. 날마다 예수 믿는 내 믿음은 작살나야 되고 박살나야 돼요. 주님의 믿음이 있는데 왜 내가 예수를 믿어야 됩니까? 어디서 종교적인 놀이를 하고 있어요? 가증스러운 짓이죠. 이러한 사태가 이미 구약 성경에 나옵니다. 에스더에 나와요. 에스더는 산 자들의 파티에 진멸될 자가 출현하는, 산 자들의 파티로 인하여 진멸된 자가 출현한다는 내용이 에스더에요.

약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과 혼인하는데 그 혼인하는 속에 혼인법을 능가하는 게 있어요. 법을 능가하는 게 있어요. 그게 에스더 내용입니다. 왕비가 되어서 왕과 결혼했는데 그 바사 나라 전체가 법적인 조직체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 법적인 조직체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법을 그냥 붙잡고 있어요.

왜? 자기는 정당해야 되니까, 법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되니까, 그래야 살맛이 나니까요. 그 중에 하나 에스더의 출발이 혼인법입니다. 왕이 파티를 열었는데 왕비의 미모를 그 밑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왜냐하면 이 왕도 알아요. 인간이 법을 따르는 것도 따르는 거지만,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아름다움에 인간은 서슴없이 굴복한다는, 무릎 꿇는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김건희가 예쁘잖아요. 그런데 왕비가 참석을 안 했어요. 귀찮다고 참석을 안 하니까 그때 자기 계획이 틀어진 것에 왕이 대노했지요. 그 왕이 이름이 와스디인데 에스더는 와스디라는 왕비 대용으로 들어간 사람이에요. “어떻게 법을 세워야 되느냐? 이걸 그냥 넘어갈까, 어떻게 할까?”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그냥 넘어가 버리면 왕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 나라의 여자들이 남편을 무시할 겁니다. 따라서 법을 만드세요.”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내치세요. 왕비를 과감하게 내치세요. 내치게 되면 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이 남편에게 꼼짝도 못 하고 굴복할 겁니다.” 그래야 나라 질서가 유지돼요. 왜? 인간 사회는 법의 결속체니까, 법 붙들고 살아가니까요. 이야기가 거기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 대용으로 들어간 사람이 누구냐? 에스더에요. 에스더가 들어올 때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우리 민족에 대해 말하지 말라.’(에 1:1)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에스더 3장 4절부터 보면 모르드개에게 일이 벌어집니다. 그 당시에 제2 인자 하만이라는 사람이 법의 권력을 가지니까 사람들이 이 나한테 굴복 안 하는 것은 이 나라 국법에 굴복을 안 한 게 되기 때문에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나라에서 멀쩡할 수 있다, 이런 계산인데 유독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드개는 왕궁을 지키는 문지기에요. 그런데 유독 모르드개만 왕국의 2인자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에 3:2-6)

인간은 현재 법을 만들고 있고 그 법에 의해서 권력자가 등장했는데 그 인간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뭐냐? 법에 누수가 생긴 거예요. 구멍이 뚫린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가 율법 속에 있는 인간을 끄집어낼 때 율법의 세계에서 맹세의 세계, 구원의 세계에 오기 위해서는 맹세가 그 율법의 망을 찢어야 돼요. 찢어야 한다고요.

어릴 때 어머니께서 옷자락 수선할 때 원단을 펴 놓고 가위 가지고 중간을 잘라버려요. 그러면 원단이 찢어지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속에 있는 선악이라는 율법을 가위로 찢어버립니다. ‘오늘도 난 잘 살았지’ 또는 ‘못살았지’ 이걸 찢어버려요. 그러면 법의 힘도 같이 찢어져요. 내가 누구냐는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법 말고, 법에 구멍을 낸 그쪽 약속에 의해서 나를 다시 보게 되는 기회를 갖는 거예요.

법의 누수입니다. 권력의 누수에요. “난 인간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내 생사를 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당신이 만든 법이 아니에요.” 하만은 주장하겠죠. “나한테 절하라는 말이냐? 아니야. 이 나라는 법을 가지고 있어. 법에 의해서 내가 2 인자야. 나한테 절해.” “안 해.” 그래서 하만은 어떻게 하느냐?

에스더 3장 13절에 조서를 내립니다.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9절에 보면 자기 재산을 은 만 달란트까지 쓰겠다고 하면서 왕의 허락을 받아낸 겁니다.

그래서 13일 하루 동안 모든 유대인들,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라고 법을 내렸어요. 법을 내렸다고요. 이제 남은 것은 법이 이기느냐, 하나님의 맹세가 이기느냐의 문제입니다. 모르드개에게 맹세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이유는, 모르드개 입장이 마치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 같은 처지예요. 요셉이 하나님의 야곱 언약에 의해 꿈을 꾸고 난 뒤에 애굽을 휘저었어요. 모르드개도 마찬가지입니다.

5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그러니까 이 하만이라는 제 2인자가 왕한테 특별 조치를 받으니까 자기 권력은 더욱더 강화됐다고 생각해 굉장히 만족했는데, 그 궁전에 앉아 있는 모르드개가 아직도 자기에게 절하지 않으니까 약간 화가 난 거죠.

자기 만족도에 틈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그걸 메꾸기 위해 어떻게 했느냐? “그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가 이르되 오십 규빗이나…” 오십 규빗은 25미터입니다.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나아가소서.”

여기서 법적으로 살았다고 여기는 권력자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는데 그 맞은편에 진멸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남원 사또 생일날에 춘향이는 죽게 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이 벌써 땅에서부터 이미 흔적을 남기고 있어요. 이 땅에서부터 벌써 흔적을 남기고 있어요. 그러고 난 뒤에 드디어 초청받아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다 알다시피 초청받은 그것이 왕이 자기를 초청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인 에스더가 자기를 초청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국가의 하나의 피고로서 등장한 것을 하만이라는 이 악한 자는 몰랐던 거예요. 그전에 유명한 말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찾아와서 ‘네가 왕궁에 있다고 해서 유대인이 다 죽게 되었는데 그냥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지금 우리는 완전히 진멸대상이고 너도 마찬가지다.’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에스다가 하는 말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이게 “정녕 죽으리라”에요.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인간의 법에 보호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모르드개도 절 안 하고, 에스더는 자기가 자기한테 절을 안 해요. ‘야, 걱정하지 마. 내가 너를 살려줄게.’ 이게 없어요. 인간이 자기가 자기한테 헌신하지 않는 것이 주님께 헌신하는 겁니다. 자기 챙기지 않는 것.

그래서 이제 들통이 났거든요. 들통이 났을 때 6장 13절에, 하만이 식구들에게 자기가 덫에 빠졌다고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그다음에 7장 8절에 왕이 하만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하만이 에스더를 권력으로 사용해서 사정사정 봐달라고 애걸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왕한테는 감히 왕비를 강간하는 모습으로 비춰서 화를 더 돋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오는 표현이 뭐냐? 7장 8절에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얼굴을 쌌다. 이게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나는 죽었다.’ 어디에 죽었을까요? 하만이 나는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접촉한 그 지점이 어디였는가 말이지요. 인간의 법을 찢어버린 거예요. 인간의 법을 찢은 것.

왕비는 지금 왕이 내민 지팡이를 내밀기 전에 오면 왕비는 죽어버립니다. 그게 그 당시의 법입니다. 모르드개가 와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위기에 처했으니 왕에게 가서 이야기를 하라’라고 하니 에스다가 하는 말이 ‘지금 왕이 지팡이를 내밀지 않아서 알현을 못하고 있다’라고 한 거예요. 그때 모르드개가 한 말이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다. 네 쪽에서 나가면 되지 않는가’라고 했어요. “그러면 죽는데요?” “죽으면 죽어라!”

왕 쪽에서 먼저 내밀어야 온다는 인간이 만든 법, 그 당시에 제국이 만든 법, 그 법을 하나님의 맹세가 찢어버린 거예요. 구멍을 내버린 거예요. 그러면 구멍을 낸 그 결과가 뭐냐? 죽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법과 하나님의 약속과의 만남, 이 능력 아니면 어떤 능력으로도 천국 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가로막혀 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선악 체계에 가로막혀 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선악 체계에 가로막혀 있어요. 우리가 가로막고 있어요, 우리가! 우리의 자기의, 자기 정당성이 가로막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구멍이 뚫렸습니다. 우리가 교회 오래 다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그동안 교회에서 충성 봉사했던 그 모든 추억들, 그 기억들이 어느새 우리 안에서 선과 악이라는 법체제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피로 찢어져야 돼요. 그게 구멍이 나야 돼요.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딴 게. 신학교 나왔다, 목사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장로나 집사가? 그걸로 천당 갑니까? 노벨상이 영생 줍니까? 생명의 면류관이 따로 있어요. 이 자리는 인간이 못 만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돼요. 정녕 죽으리라, 에 동의할 때 그 자리가 모든 법을 초월하고 모든 우세스러움과 모든 수치를 초월하는 자리인데 그 자리가 원래 우리 자리, 인간의 자리, 육신의 자리에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는 그 자리, 그 전에 주께서 하신 기도가 뭐냐?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아버지의 뜻이 뭐냐? 인간의 육신을 받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 가 아버지의 뜻이지요. 아버지의 뜻이 있는 자리, 죽을 자리, 그 자리가 찾아가야 할 우리 자리지요. 다른 자리는 없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것이 이상해요.

“아직도 네가 여기서 얼쩡거리느냐? 이 세상에 뭐 할 것이 있다고? 뭐 노벨상 타려고 얼쩡거리고 있느냐?” 우리는 얼쩡거리면 얼쩡거릴수록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밖에 안 해요. 자기 잘난 체하는 일밖에 안 합니다. 왜?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육신 살려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보다 내가 우선이지요. 그건 뻔한 이야기지요. 거기에 깊은 논리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고자 하는데 그게 뭐가 나쁜데?’ 뭐가 ‘나쁘냐’, 로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이 안 살려주면 내가 악착같이 살 거야.’ 그런 고집 외에 다른 것이 들어있지 않지요. 그것뿐이에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 안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는가를 알아야 돼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괴물이 평생토록 우리와 함께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죽었는데 우리는 살고자 할 때 그게 모독이지 딴 게 뭐가 있겠어요? 에스더 7장 10절에 보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자기의 법적인 원수를 죽이려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25미터 길의 막대기를 준비했는데 그 막대기에 본인을 죽이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맹세를 건드린 자, 하나님이 마련한 그 죽는 자리에 있는 자를 건드려 버리면 이제는 그들이 진멸 받을 차례가 되지요.

이제 하만의 끼고 있던 그 권력의 반지가 거두어져서 모르드개에게 다 넘어갔어요. 하만의 집도 에스더의 이름으로 등기이전되고요. 에스더 9장 16절에 “왕의 각 도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를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인을 도륙하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7만 5천 명. 유대인을 죽이는데 복무했고 협조했던 7만 5천 명이 죽었습니다. 유대인을 죽이려고 한 그날에 유대인 죽이려 했던 그들이 죽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의 성도는 뭡니까? 하나님이 던져준 미끼지요, 미끼. 그래서 성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건은 성도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죽인 자 하나님이 가만 둘리 없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성도를 우습게 보는 자는 하나님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성도가 뭡니까? 성도는 십자가를 가리지 않는 자가 성도지요. 어떤 식으로? 내가 죽을 육신을 갖고 있는 자라고, 이중의, 중첩된 이중의 자아를 통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바둑 잘 둬도 괜찮아요. “바둑 잘 두는 것도 죄입니다.” 하면 돼요. 피아노 잘 치는 그것도 좋아요. “피아노 잘 치는 것도 죄입니다.” 노벨 문학상 다 좋아요. “이것도 주님을 죽인 죄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에요. “자식 잘 키웠는데 이것도 죄였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한 그것도 죄입니다.” 이러면 된다 그 말이지요. 그게 어려워요?

불가능하죠, 불가능해요. 성령이 아니면, 성령, 그 마지막 영이 오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드디어 마지막에 에스더 9장 22절에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그날이 크리스마스에요. 12월 25일. 우연이에요. 부림절이라고 하는데요. 성경을 다 덮었다고 봅시다. 덮고 난 뒤에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지난 10월 10일은 ‘임산부의 날’이었습니다. 그거 뭐 아는 사람 있습니까? 임산부의 날. 모르지요. 그런데 달력에 임산부의 날이라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은 법적으로 체계가 잡힌, 질서가 잡힌 세계예요.

그리고 10월 21일은 경찰의 날입니다. 굳이 뭐 알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이 돌아가려면 이렇게 법적인 체제가 되어 있어야 해요. 토요일은 재활용품 버리는 날이고요, 목요일은 음식쓰레기 버리는 날이에요. 이 세상은 법적인 질서가 개입되지 아니하면 세상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이 현실 속에 성령을 보내준 그들로 하여금 살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지 않으면 그냥 현실 따라서 ‘나는 법적으로 하자 없다. 나는 파출소도 한 번 간 적이 없다.’ 하고 자기 잘난 체나 하면서 죽어갈 겁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16장 22절 보겠습니다.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하나님이 주목하는 자가 따로 있어요. 거지인데, 그것도 병든 거지인데 하나님은 지목해서 천사를 보내서 낙원으로 친히 데려가십니다. 거지가 이 세상에서 무슨 상을 받았겠어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알아줍니다. 왜?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어떤 상이 없더라도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주목하고 지목하는 자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죄인인 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를 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자리까지 오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동에서 서까지가 먼 것같이 다 처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맹세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맹세가 우리 속을 점령한 상태,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생 살면서 내가 누군지를, 세상은 어떤지를, 어떤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면서 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성경이 제대로 이야기를 해주실 때 우리는 정녕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 것을, 그리고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이 사실을 도리어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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