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존재와 기능

아빠와 함께 2024. 9. 29. 17:05

존재와 기능 

2024년 9월 29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11-15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7: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7: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7: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7: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이 기능의 원천은 인간 육신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주어진 겁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하지만 이 기능이 이스라엘 역사 내부에서 장애를 만나고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악마의 사주를 받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서입니다. 그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12지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이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기능이 제사기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레위지파가 담당하는 제사기능이, 다른 지파에 의해서 온전함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 지파가 유다지파입니다. 왜 도중에 바뀌어야 하지요? 왜 그냥 줄곧 레위지파가 하도록 맡기지를 못하는 거지요? 그것은 그 어느 지파이든 이스라엘은 이미 인간이라는 점 때문에 온전히 완성되지 못하는 겁니다. 제사기능을 담당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한계란 다름이 아닌 인간은 자신을 ‘절대 존재자’로 행세한다는 점입니다. 즉 제사 기능을 특수한 죽음, 곧 흠없는 제물의 죽음 앞에 기존의 모든 존재자를 함께 죽이는 기능입니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자기를 살리고자 자신을 친히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을 준수하는 기능자’로 만들어졌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승리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 따르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따로 독자적인 존재로 행세할 수 있어 하나님의 권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배후에 악마가 인간에게 이런 심성을 심어주었습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에게 놀아나지 말고 너는 너의 인생을 살아라 는 겁니다. 그게 너답고 네게 합당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를 가동시키십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이런 이야기를 인간을 얼마나 화나게 하겠습니까? 참새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인간의 근원적인 자율권 자체를 예수님이 공박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실 때, 인간들이 자기 생각하지 않고 그 하나님만 정신없이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동네에 방역차 나타났을 때, 아이들이 그 소독약 냄새에 취해서 그 연기 안에서 자기를 소멸시키고 그냥 따라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자칭 어른이라는 자들은 방역차 안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에 집중하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따지는 것은 이것입니다. “존재나 기능이냐” 존재라는 것은 스스로 서는 것을 말하고, 기능이란 다른 존재에 철저하게 종속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너무나도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범쪼로 이스라엘에게 보내어서 철저하게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9-10)

하나님께서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는 방식은 ‘진멸’입니다.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 진멸을 전제로 해서 ‘희생 제물’이 투입됩니다. 이것이 제사기능입니다. 즉 제사기능이란 다수의 존재들을 특수한 하나의 존재의 죽음 앞에서 다 죽여버리는 기능입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의 특별한 단 하나의 가치보다 다수의 가치를 선호했습니다.

이러한 존재 중심적 생각이 레위지파 내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출애굽 할 때에 분명 다수가 나왔는데 모세 너만 우리의 지도자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불만이 민수기 16:13-14에 나옵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3-14)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 관리자가 본인이라고 여기게 되면 자기 존재를 파괴하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보존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에 고라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안 망하고 안 죽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자를 말씀 속으로 끌어당겨 죽이는 곳입니다. 그래야 제사가 됩니다. 자신이 죽는 것마저 하나님의 허락하신 일로 알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 껍질인 존재를 벗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렁쉥이(멍게)를 손질하면서 껍질은 벗어고 안 쪽만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직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존재라는 껍질을 벗기도 악마의 심성을 채택해서 어린양의 죽음과 섞여 죽여버립니다. 바로 이 기능이 제사기능의 완성이요 이것을 유다 지파가 ‘왕’이라는 이름으로 담당하게 됩니다.

제사 기능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민수기 18:5-6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즉 최후의 심판을 미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존재 앞에서 하기에,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된 존재로서 새로이 덧입혀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내부를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얼마나 악마적인 가를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히브리서 7장 11-15절(존재와 기능)24092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11-15절입니다.

히브리서 7:11-15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현대를 사는 우리한테는 낯설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낯설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주었던 율법 안에 나오는 단어들, 율법 안에 나오는 문자들과 그 개념들을 다시 여기서 나열하는 이유는, 그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멸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역사라는 사실이 여기서 이걸 통해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처럼 다른 민족도 망하게 돼 있는데 다른 민족은 율법이 없이 그냥 망하고 이스라엘은 샘플로서, 시범으로서 율법 줘서 망하게 하는 겁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하고 인간은 애초부터 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왜 이스라엘에 레위 지파가 있었고, 왜 그들이 제사를 지냈고,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로 줄곧 제사장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나라로 가면 될텐데 여기서 유다 지파가 또 등장해서 제사드린 적도 없는 유다 지파가 레위 지파를 다스리면서 레위 지파를 제끼고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장악했는가?’

그렇게 장악했으면 잘해야 하는데, 유대 지파가 이스라엘을 장악한 나라가 유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유다 지파만 남고, 사실은 벤야민이 옆에 있지만, 나머지가 멸망한 그 나라가 유다 민족이에요. 유다 민족이 남았는데 그 유다 민족이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또는 사람이 되셔서 오신 그 하나님을 죽이는 그 기능,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좀 잘하지. 하나님이 율법과 계명을 줬으면 좀 더 잘하지.’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율법을 줘도 그들은 자신을 망하게 하는 율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망하고 난 뒤에 비로소 그들에게 준 율법의 기능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계획한 바가 있어서 그 안에 그게 담겨 있는데 그 계획한 게 뭐냐?

인간의 모든 존재를 다 죽이는 기능이에요, 인간의 모든 존재를. 인간의 모든 존재를 죽이고 그 죽음 안에 하나님 자신도 거기다가 포함을 시켜 넣는 겁니다. ‘다 죽자, 우리. 다 죽자. 나도 죽을게. 창조주 되는 나 하나님도 죽을게. 따라서 너도 죽자.’ 그러면 죽이시는 이유가 뭐냐? 죽으면 남는 게 뭐냐? 남는 게 기능이에요, 기능.

하나님 제사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존재를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 기능을 발휘하는 게 바로 제사 일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죽어야 될 이유는? 원래 인간은 처음에는 기능적으로 하나님과 통해야 돼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선악과 안 따먹는 기능을 유지할 때만 인간은 그냥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게 했습니다.

마귀가 왜 인간을 앞장세워 선악과를 따먹게 했는가? 하나님이 하는 모든 제도와 그 법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밑의 피조물이 통치되는 것을, 피조물 중의 악마가 대표로 나서서 반발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마저도 이기면 되잖아요. 교회 나오라고 하면 교회 안 나오는 게 이기는 거죠. 복음 받으라고 하면 ‘나 안 믿는다.’ 하면 이기는 거죠.

최고 권위자의 말을 거부함으로써 나는 최고 권위자 밑에 있지 않고 최고 권위자 위에, 또는 최고 권위자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다른 영역에 따로 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볼 수 있는 위치에 내가 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게 있다, 이 말이죠. 그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긴 기능이 되죠.

그 기능을 내가 품고 있으면 나는 완전한 신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이제 마귀가 인간하고 협의한 거예요, 사전에. “네가 따먹으면 신처럼 된다. 네가 머리가 있거든 생각을 해 봐라. 언제까지 매여 살래? 너도 하나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지. 신의 시다바리라고 하는 그런 기능인으로 언제까지 있을래? 따로 나와서 너도 하나의 단독 존재가 되어 봐라.”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에게 지지 말고 이기면 되잖아요. 이기는 방법은 하지 말라는 것을 일부러 하면 되는 거예요. ‘하라’고 하는 것을 일부러 안 하면 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면 되고. 그게 오늘날 인간존재입니다. 인간존재의 특징은 뭐냐? 인간존재는 나 같은 인간이 다수, 여럿이 있다는 그것을 사람들이 정상적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윽박질러서 여럿을 인정하지 않고 단일, 하나만 인정하니까 그게 인간들은 싫은 겁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 자기가 선택해야지 뭐 하나만 믿어야 돼? 그것도 이스라엘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고 다른 민족의 신은 믿으면 왜 안 되는 거야?’ 그러한 불만 같은 것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죠. ‘다수가 다수끼리 평화롭게 살면 되잖아. 왜 하나님은 하나만 고집하는 거야?’ 거기에 대한 불만감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 있다. 그러니까 ‘나도 여기에 있다, 나도. 하나님만 있나? 나도 있어. 나도 있다고, 신처럼. 왜 내 존재를 무시하는 거야? 왜 내 결정과 내 선택을 무시하는 거야? 너만 여기 있어? 나도 여기 있어.’ 있음과 있음, 존재와 존재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은 “너는 기능이야. ‘나, 하나님만 있으면 돼.’라는 것을 알려주는 기능이 인간”이에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뭐냐? ‘참새도 하나님 아버지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는 거예요, 참새도. 참새의 운명이 참새한테 달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야 참새가 떨어져요. 그걸 인간들이 안 믿어요. 왜냐하면 참새도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이 되어야 떨어지게 되면 생물학 전체가 다 날아가요, 생물학 전체가.

생물학 전체가 다 날아간다는 말, 참새가 하나님의 허락하에 떨어진다는 말, 이것은 곧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의 일거수일투족 너의 모든 것, 숨 쉬는 것조차 내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고, 이것은 더 나아가서 ‘네가 죽어서 천국 가냐, 지옥 가는 것은 네 소관이 아니고 내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지옥 가고 싶어도 허락 없이는 지옥 못 가고 천국 가고 싶어도 허락 없이는 못 간다는 그 이야기와 통하니까 참새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안 떨어지는 것도 거부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 잘하고 싶어요? 신앙이 뭔지 알고 싶어요? 진짜 신앙생활 제대로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간단합니다. 여름철에 방역차 골목에 뜨잖아요. 방역차 엉덩이로 연기 팍 뿜어내면 애들은 정신없이 그 방역차 소독약 냄새에 취해서 막 따라가요. 지금 저녁 먹을 때인지 엄마가 저녁을 해 놨는지 정신도 없어요. 숙제고 뭐고 없어요. 그냥 방역차 연기 안에 들어가니까 친구도 소실되고, 나의 흔적도 소실되고 그냥 연기만 따라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나타났답니다. 그러면 방역차 따라가듯이 사람이 되신 분을 따라가면 되잖아요. 자기를 생각하지 말고. 참 쉽죠? 너무 쉽죠. 내 신학이 어떻니, 내가 어느 신학교 출신이니, 내가 이 교회 몇 년 나왔느냐, 내 가족이 몇 명이냐, 한 달 수입이 얼마냐, 내 몸이 지금 건강하냐, 내일 계획이 뭐냐, 남들이 날 인정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방역차만 따라가면 되잖아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대요. 절호의 찬스 아닙니까? 그 찬스 놓칠 거예요? 따라가게 되면 내가 여기 있느냐, 저기 있느냐가 의미가 없어요. 내가 여기 있고 저기 있지 않은 이유는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이, 누가 그렇게 배치 해서 그래요. 내가 어제부로 죽지 않고 오늘 살아있는 것은 어떤 분이 조치를 해서 그래요. 어떤 분이 허락을 해서 그럽니다.

참새 떨어지는 것을 허락한 그 분이 조치를 해서 어제도 살아있었고 지금 오늘도 살아있는 거예요. 내일은 몰라요. 오늘이 최후의 날이니까. 내일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일 계획은 우리가 존재라고 우길 경우에만 이게 성립되지 너희는 존재가 아니고 기능인데요.

제사장이 하는 제사직은 뭐냐? 다수의 존재를 하나의 기능으로 전부 다 소멸시켜 제거하는 게 제사직이에요. 다수의 존재들을 너, 나, 우리, 다수의 존재를 하나의 특수한 죽음으로 다 같이 죽여버리는 그 기능이 제사직이에요. 그 제사직은 창세 전부터 계획이 되어서 멜기세덱을 통해 알려진 창세 전의 계획이 뭐냐? 하나님으로 오신 그분이 하는 어떤 기능이 있는데 그분의 존재가 하는 기능은 제사장이요 왕의 기능이라는 거예요. 모든 존재를 없애버리는 기능. 모든 존재를 없애요.

하나님께서 구약의 출애굽기 32장 9절,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런 내용이 나와요. 이스라엘이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스라엘 역사,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줘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이방 민족을 진멸해요.

이방 민족을 진멸하는 그 내용이 신명기에 보면 나옵니다. 신명기 2장 34절에 “그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존재라는 것 때문에 진멸 당하는 겁니다. 네가 있기때문에 진멸 당하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는 남자, 여자? 소용없습니다. 어른, 어린아이? 소용없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 소용없습니다. 병든 자, 건강한 자의 구분? 소용없습니다. 전부다 진멸의 대상입니다, 존재하는 그 자체가.

신명기 7장 2절에서 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여기 치는 족속이 1절에 보면 여러 가지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쭉 그렇게 나와요. 그들의 우상을 깨뜨려라,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하시는 일은 뭐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다 제거 대상이 돼요. 여호수아 11장 20절에는 그 취지가 노골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을 칠 때에 이방 민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도 있고 나도 있는데 왜 너희들이 나를 치려고 하느냐?” 그때 이스라엘은 “너희가 보기에 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존재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여호와 이름이 존재하지 우리는 그 존재를 드러내는 기능자들이에요, 기능자. 주님이 방역차고 이스라엘은 따라다니는 아이들이에요. 자기를 생각하면 안 돼요. 아이 성 앞에서 조그마한 성이라고 무시하고 자기 생각하고 달려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 못 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진멸하기 위해서 일단 이스라엘을 찾아오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반함으로써 이방 민족을 칩니다. 이방 민족을 쳤던 하나님께서 레위 민족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고요, 그 레위 족속 중심으로 통치되는 그래서 레위 족속에 포함된 이스라엘을 유다 지파를 통해서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을 치고, 그래서 유대 민족이 생기면 그 유대 민족을 주님이 쳐버리고, 그다음에 모든 민족을 쳐버리고,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진멸, 친다, 이 표현을 했는데 원래 문장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폭격하죠. 진멸을 폭격으로 바꾸면 돼요. 모든 존재하는 헤즈볼라는 다 폭격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폭격해 버린다고요. 다 없애버려요. 남자나 여자나, 유아나,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친절한 사람, 못된 사람, 그런 거 안 보고 존재한다는 이유때문에 그냥 다 진멸해 버려요.

그 진멸의 기능이 제사 기능입니다. 하나의 죽음, 네가 죽는 하나의 이유는 하나의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것, 하나의 죽음, ‘그 흠 없는 제물의 죽음에 근거해서 너희들은 마땅히 죽어야 되는 것을 인정해라.’ 그게 제사 기능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택한 민족 이 이스라엘이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했기 때문에 모세는 진멸이 안 될 거야.’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라고 했습니다. 이 모세는 존재하죠. 모세는 존재하고 손도 존재에서 나오는 하나의 사지니까 내 존재에 부속된 거죠. 손을 내 몸통 되는 품 안으로 넣었습니다. “다시 빼 봐라.” 딱 빼보니까 문둥병자예요. 저주받아 합당한 존재가 된 거예요, 모세도, 모세도!

그런데 이게 어디에 속하느냐? 내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기적에 속해요. 하나님의 기적이 뭐냐? 아무리 연구해도 몰랐던 나 자신, 나라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존재로 비치는가에 대해서 내가 미처 몰랐던 거예요. 내가 존재한다는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언제든 저주와 심판의 대상으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그러면 제사 기능은 뭐냐? 제사 기능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제사 기능이에요.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갈 때 모세가 잘나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 보니까 숙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청업자 내지는 동업자라고 알고 있는 모세를 하나님이 죽여버리려고 했던 거예요.

왜? 왜 하나님은 자기 사람인데 죽이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죽임이 모세 안에 들어있지 않는 한 모세는 하나님의 어떤 기능도 내세울 게 전혀 없게 돼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죽인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어떤 소리를 해도 그건 복음의 능력이 없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애교를 부리면서 사는 이유가 내부에 독소를 숨기는 본인만의 전략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주 못된 게 들어있어요. 못된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하하, 호호, 웃으면서 애교 부리면서 살아 갑니다. 그래야 남들이 나를 인정해 주니까요. ‘너 존재 있어? 나도 존재로 인정해 줘.’ 나라는 이 껍질이 나의 이 음흉하고 못된 구석을 계속 숨기는 쪽으로 발달 되어 있어요, 이 껍질 기능이.

그런 점에서 우렁쉥이를 손질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우렁쉥이는 경상도 표준말로 멍게예요. 멍게 손질할 때 어떻게 다룹니까? 안에 있는 물컹물컹한 것을 빼버리고 남은 껍데기는 버리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 물컹물컹한 이 독소조항을 건지시고 나머지 껍데기는 갖다 버립니다. 그리고 그 물컹물컹한 것을 유일한 존재인 어린 양 앞에다가 그걸 기능화로, 존재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의 기능만 채택해서 하나님이 설정한 제사 기능 앞에다가 집어넣는 그게 바로 제사직이에요, 그게 제사입니다.

존재는 필요치 않아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아시잖아요. 부자는 죽어서 지옥 가고 거지는 죽어서 낙원에 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 부자가 지옥 가도 여전히 지상에서 자기 존재 지키는 것은 여전해요. 그 말은 뭐냐? 이미 부자는 지옥 가기 전에도 지옥 삶을 살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매일 같이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는데 돈이 많으면 많이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악착같이 돈 버는 이유가 그게 버티는 방법이에요. 왜 버티는가? 울지 않기 위해서. 늘 웃기 위해서. 돈이 많은 데서 오는 그 기쁨으로 웃기 위해서, 늘 울지 않기 위해 버티는 거예요. ‘신이시여, 나를 울리지 마옵소서.’ 그 뜻이에요. ‘신이시여, 하나님이여! 나를 울리지 마옵소서.’ 하나님도 존재지만 나도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존재 값을 하는데 지옥 가서도 간절함이 있어요. 무슨 간절함? 손가락에 물 한 번 적셔서 오기를 바라는 그 간절함. 부자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 보고 ‘제가 간절히 비오니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적셔달라’고 간절히 원할 때 예수님이 그 이유를 이야기 하십니다.

“너희들은 여전히 버티고 버티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물 한 방울 달라고 했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간절함은 물방울 하나의 간절함이 아니라 모세와 시편의 글, 예언자의 글, 말씀의 간절함, 너희들은 왜 그런 간절함이 없느냐?” 그 말이죠. 지옥에 살면서, 존재의 바다에 살면서, 너도 존재고 나도 존재고 그 잘난 체나 하는 인간들 속에서 살면서 무엇을 간절히 원해야 하는지 그걸 왜 모르냐,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런 말씀 해요. 6장 21절에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우는 자’ 6장 25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그들은 껍데기, 멍게 껍데기만 쥐고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뭘 폭격하려는지를 몰라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자기 존재를 버티는 것이 90평생입니다. 심지어 애들도 버텨요, 애들도. 교회 안 나오는 거 버틴다고 안 나오는 거예요.

할 수 있는 재주는 버티는 것밖에 없어요. ‘내 인생 내가 버틴다.’ 왜? 그래야 하나님을 이기니까. 왜 하나님을 이기고 싶은데요? 그게 악마의 마음이거든요.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게 종속된 기능을 존재로 확립시켜 준 게 악마입니다.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 어디에 정신을 파느냐?’ 뭐 교회 오시라고 복음 전하면 “그거 나에게 이익이 됩니까?” 묻는 게 그거예요, 자기 존재 간수하기. 이게 나에게 이익이 됩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의 이야기에요. 커뮤니케이션, 교제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볼게요.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본인이 어떤 평가 받기를 원하십니까? 5초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 받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나를 평가했으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성립이 안 되는데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늘 올라오는 질문이 이거에요. ‘나는 어떤 자로 평가받기를 내가 원할까?’ 이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평생 살면서 엉터리 아닌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전부다 엉터리였어요. 몽땅 다 엉터리였어요. 너도 엉터리, 나도 엉터리, 그리고 매 순간 엉터리.

어떤 평가를 원하십니까? 1번 형편없다. 2번 대단하다. 정답은 ‘형편없다’와 ‘대단하다’의 그 중간 지점이에요. 거기서 왔다 갔다 해요. 주님의 질문은 뭐냐? “네가 존재냐, 기능이냐?” 이걸 묻습니다. 네가 존재냐, 기능이냐. 네가 누구의 일을 하고 있느냐, 그걸 물어요. “존재는 잠깐이고 기능은 영원함이니라.”

그 영원함이 히브리서 7장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이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기능입니다. 왕의 기능과 제사장 기능이 결합 된 그 계열, 멜기세덱입니다.

그 멜기세덱의 기능이 하나님의 이름 안에 들어왔어요. 구약 때의 하나님 이름은 신체, 육체가 없고 그저 기능뿐이었어요. 그 기능이 신체가 있는 이스라엘 속에 들어왔고, 그 이스라엘을 왕과 제사직으로 폭격을 했고, 그들은 진멸을 했고, 그들의 역사는 망해버렸고, 마지막에는 그 왕과 제사장 기능이 실체를 가진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껍질은 인간이지만 안에는 왕과 제사장 기능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 하실 때에 우리가 물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이 평소에 이렇게 물을 수 있죠. “성경이 너무 두꺼운데 너무 두꺼운 게 문제다.” ‘창세기 1장,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2장, 인간이 범죄 했느니라. 창세기 3장, 드디어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 지고 구원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하면 딱 석 장이에요.

성경이 왜 이렇게 두꺼워요? 예수님이 왜 미리 오면 안 되느냐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이제야, 신약 때에 왔느냐는 겁니다. 미리 오면 될 텐데. 왜 미리 오지 않고 이스라엘을 마치 구원 하는 것처럼 해 놓고서는 기어이 다 망하게 해 놓고 왜 이제 왔느냐, 그 이야기, 그런 질문 여러분 해 보신 적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만들려고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그 인간의 특징은, 전에 만들어진 인간의 모든 요소를 다 알고 있어야 돼요. 인간이 인간이라서 마귀와 더불어서 기능에서 존재로 해서 자기가 신이 된 양 설쳐대는 그 요소를 다 공감해야 되고 공유하고 있어 줘야 돼요.

그래야 제사 직이 살아요. 나는 저주의 대상으로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만 비로소 하나님 오셔서 하는 그 제사직의 취지가 살게 되는 겁니다. 이걸 죄가 숙성했다, 죄가 무르익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에서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악마적 죄는 죄다 다 펼쳐져야 될 기간이 필요 했던 거예요.

예를 들면 욥 같은 경우죠. 욥은 처음에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욥은 ‘나’라는 존재죠, 그 ‘나’라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내가 믿으니까 하나님의 완전한 모든 혜택, 축복을 내가 다 받았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은 대가다.’라고 그렇게 생각했죠. 여전히 욥은 자기가 존재 중심이라는 사실은, 그건 생각도 못 하고 ‘하나님의 존재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된 존재답게 해줬다.’ 이렇게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탄, 인간을 처음 미혹했던, 인간에게 관여해서 하나님에게 승리한 자로 간주하게 했던 그 악마로 하여금 처음에 마귀가 인간에게 했던 짓의 그 결과를 욥에게 그대로 부여하게 만들었어요. 악마가 제공한 것을 악마가 다 뺏어가도록 만드는 거예요.

욥은 지금 자기가 진멸의 대상인 걸 모르고, 넘치는 복으로 커버가 되어 있으니까 자기의 그 물컹물컹한 본성은 모르고 그 존재의 두께, 멍게의 두꺼운 그 두께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거예요. 욥에 대해서 그걸 일일이…, 아프지만, 아프니까 인간이죠. 일일이 다 뜯어내요. 네 안의 독소조항, 네 안에 독소를 보게 하는 겁니다.

다 뜯어낼 때 악마도 알아요. “하나님, 그러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 악마도 이미 알고 있어요. 하나님도 알고 있어요. 욥 본인만 몰라요. 여기서 욥에게 나오는 것은 완전에서 그다음에 완강함, 완강한 버팀.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인간의 존재는 완강함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 그걸 성경에서는 교만, 건방짐 이렇게 하는데 쉽게 말해서 완강함, 완악함으로 똘똘 당구공처럼 뭉쳐 있는 게 인간존재에요.

“제발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도 존재니까, 신 같은 존재니까 날 건드리지 마. 제발 나로 하여금 나로 살게 둬요, 건들지 말고!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 됐든, 집사가 됐든, 엄마가 됐든, 아빠가 됐든 그냥 날 내버려둬요. 형이 됐든, 동생이 됐든.” 건드리면 우리는 웁니다, 울어요. 우리는 안 울기 위해서 버티고, 버티고 애교 부리고 늘 웃는 척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웃는 척하고.

참 그 연기도 참 얼마나 힘들겠어요. 평생 그런 연기 한다고. 속에서는 울고 있는데 겉으로는 안 우는 것처럼. 아들이 “엄마 힘들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야! 엄마 대단해요.” “그러니까 네 엄마지.” 진짜 놀고 있어요. 성경 보면 뻔히 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진멸의 대상이에요. 진멸의 대상.

욥기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욥기 마지막 42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욥처럼 정당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욥기 42장 8절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욥으로 하여금 제사장직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어요. 주님께서 먼저 제사직부터 출발해서 왕이 되시는 겁니다. 왕은 뭐냐? 승리지요. 현재 누가 이기느냐? 악마가 신마저 이기지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내가 하겠다는데 신이 왜 간섭이야?’ 신의 권한마저 이긴 자가 악마지요. 거기에 덩달아 악마 편에 선 것이 인간이고. 인간은 모두 존재라는 껍질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내 존재의 단도리를 내가 알아서 하니까 나 말고 다른 존재가 내 일에 끼어들지 말고 잔소리 하지 마.’ 그게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민수기에 보면 그 레위직이 붕괴합니다. 레위직에 자체적인 모순이 벌어져요. 그거 보기 전에 먼저 레위직이 뭐냐가 민수기 18장 5, 6절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 형제 레위인을 취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진노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의 진노와 무엇의 만남? 그 진노를 용서하는 제단의 만남으로 인하여 진노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같은 레위지파쪽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고라가 주동자가 되어서 내부반란이, 쿠데타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모세야, 출애굽할 때 너 혼자 나왔나? 우리 다수가 같이 나왔잖아. 우리 다수를 무시하고 네가 단독자로 총회 위에서 우리를 통치하고 지배하느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민수기 16장 13절부터 14절까지 나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라고 이야기를 해요.

무슨 이야기냐? ‘당신이 나를 교회에 불러서 나는 복 받는 줄 알고 교회 나왔고, 천국 가는 줄 알고 교회 나왔는데 당신이 나를 교회로 전도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는 이제 당신 말 안 듣는다.’ 그 뜻이에요. 고라가 하는 이야기가 왜 중요하냐면요, 교회의 하는 일, 기능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와서 우리를 망하고 죽게 하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불러 모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 존재의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교회 나오다가 있는 살림마저 거덜 나겠다. 후회하기 전에 빨리 빼자.’ 빼겠다는 거예요. 또는 ‘교회 좀 다녀보고 내가 행복해지면 계속 다니고 불행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뺄 거야. 왜? 내 존재는 귀하니까. 내 존재는 내가 관리하니까.’ 그래서 고라자손이 이야기한 것은 뭐냐? 다수의 가치를 다수의 가치대로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누구한테? 모세한테.

제사라는 것은 다수의 가치를 특이한 단일의 죽음 안에서 다 죽여버리는 거예요. 이게 제사입니다. “너희들이 다 죽어야 해. 대신 어린양이 죽는 거야.” 이 이야기를 제사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고라가 하는 이야기를 좀 귀담아들으세요. “당신 믿고 우리가 애굽에서 나왔는데 당신은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젖과 꿀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인도했다. 더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고라가 모르는 것이 약속의 땅은 인간존재가 들어가는 땅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은 언약궤가 들어가는 땅입니다, 언약궤. 언약궤가 광야에서 만들어졌어요. 처음에 율법이 먼저였고 율법에 의해서 언약궤가 만들어집니다. 만들어진 언약궤는 율법의 목적지를 보여주기 위한 물체지요. 그 언약궤가 광야 지나서 요단강 건널 때 언약궤 중심이지요.

그다음에 여리고 성 정복할 때 언약궤 중심이지요. 그다음에 약속의 땅에서 실로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다음에 에벤에셀로 가고, 아스돗으로 가고, 가드로 가고, 에글론으로 가고, 벧세메스로 가고, 아얄론으로 갔다가, 기럇여아림으로 갔다가, 마지막에 약속의 땅의 어디로 가느냐?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 도중에 언약궤가 블레셋 땅을 경유해서 가요. 이 말은 언약궤는 이스라엘 편도 아니고 블레셋편 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언약궤 중심으로 제사했던 레위 지파의 자기 기능이 다 날아가요. 인간의 의식 자체가, 존재가 무너져야 되는데 레위 지파부터 해서 모든 인간이 제사드렸으니 살려달라는 식으로 계속 자기존재에 대한 집착이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아까 말한 그런 마음, ‘우리가 시키는 대로 했잖아. 그런데 왜 우리가 힘들게 살아야 해?’ 라는 그런 논리가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중이에요.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진멸할 것을 봐주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그 어린양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한다는 것은 모르고, 그리고 구원받은 자는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어린양이 내 존재를 대신하고요…, 실제로 그래요.

실제로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우리의 껍질은 예수님과 연관된 껍질이 우리의 기능과 결합되면서 천국에서 살게 돼요. 이 존재는 후패해야 돼요. 그래서 지금 후패하고 있잖아요. 나이 들면서 후패하잖아요. 관절이고 허리고 여기저기 다 아프잖아요. 어깨고 무릎이고 안 아픈데가 없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우렁쉥이 껍질, 친히 벗겨주는 이 고마움. “존재의 갑옷은 그만 입어라, 그만! 기능 좀 보여줘 기능. 천하의 죄인입니다, 그 기능” 방역차 따라가면서, 십자가 따라가면서 그걸 보여주라는 거지요. 뭐 신앙이 어쩌니 하면서 되지도 않는 소리들, 다 존재 위주로 하면서. 제사를 레위 지파가 하던 것이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이제는 누가 하느냐?

유다 지파의 다윗 계통의 솔로몬이 성전을 준비하고 성전 안에 언약궤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유다 지파를 이제는 하나님이 폭격해 버립니다. 그러면 성전은 어디로 가느냐?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요. 하늘로 올라간, 승천하신 그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유다지파 계통에서 지은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원래 성전이 율법 제사의 완성으로 되었어야 하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스라 느헤미야라는 책이 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간 관계상 다 읽지는 않고 한 곳만 봅니다. 에스라 4장 1, 2절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나오는데 그 유다 지파 밑에 레위 지파가 있어요. 오늘 히브리서 본문의 내용이 그겁니다. 제사하지도 않는 유다 지파가 모든 제사직을 담당했던 레위 지파를 통솔해서 성전을 짓게 만들어요. 그 성전 지을 때 조건이 있어요.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조건 하에 성전도 함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지상의 성전의 구비조건이었다.’라는 취지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을 짓습니다.

BC 539년에 처음 지대가 놓였는데 그 후 19년 동안 공사가 중단이 돼요. 그래서 BC 520년에 공사를 재개해서 BC 516에 완성됩니다. 에스라 3장 12, 13절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성전의 지대 놓인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대성통곡하고, 어떤 사람은 기뻐하고 그랬다는 거예요. 옛날의 솔로몬 성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대성통곡합니다. ‘애걔? 이것도 성전이냐?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기뻐하고요. 이것이 다 섞여 있어요. 레위지파와 유다지파의 두 기억이 섞여 있는 입장에 있다는 말이지요.

BC 446년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서 느헤미야가 와서 그 벽을 다시 축성하는 기능을 했어요. 그런데 이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아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했어요. 에스라가 이스라엘로 귀환했을 때 지키자, 지키자 해서 처음에 지키려고 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얼마나 율법을 지키려고 했는지 특히 에스라에 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해서 강제로 다 이혼시킵니다(스 10장). 강제로 이혼시킨다고 나라가 다시 삽니까? 인간의 존재의 한계지요. 그래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제사직이 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존재를 허럭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제사직에 같이 뛰어들게 만들어요.

존재를 벗기고 그 죄 된 것을 가지고 뛰어들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할 때 우리는 어디에 치중해야 되는가?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에 치중하는, 그 죄인의 기능을 보여주는 그것이 진짜 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이게 바로 천국 백성이에요.

죄짓는 기능을 내세우면서, 방역차 따라가는 어린애처럼 십자가만 따라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버릴 때 울지요. 하지만 주님 만날 때 제대로 웃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지, 세상적으로 딴짓하면서, 딴생각하면서, 지독하게 나에게 관심 가지면서 십자가 운운하고 하나님 믿는다고 우기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지. 하지만 이 가증스러움마저 우리 안에서 실시되어야 하고, 살아가면서 이게 튀어나와야 하는 그것이 도리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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