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십일조, 레위
2024년 9월 2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8-10
(7: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7: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활동을 따라하면서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허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은 계속 어디로 가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 사는 것과 유사하게 되면 그것은 인생의 정답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이런 인간들의 활동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들의 활동이 나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내려주신 매개를 드러내며 사는 자들입니다. 즉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매개 이야기합니다. 매개란 하나님과 땅과 연결된 고리같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것이 ‘멜기세덱 반열’과 관련있습니다. 멜기세덱이 품고 있는 요소를 매개를 통해서 땅에 있는 자에게 삽입시켜 줍니다. 그렇게 되면 땅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러냅니다. 바로 이들만이 ‘더럽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다’는 것은 매개가 없이 사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오는 본문 내용은 매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개의 내용에 십일조와 레위지피가 하게 되는 활동내역이 들어있습니다. 우선 십일조부터 생각해봅시다. 십일조란 인간들이 벌리는 활동의 일부인 전쟁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들은 땅과 땅의 전쟁입니다. 보다 좋은 땅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싸움을 합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말려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자기 조카를 기어이 찾아냅니다.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게 되는데 이 십일조란 곧 압축된 하늘의 내용 전부입니다.
10/1 안에 10/1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10/10이 들어 있습니다. 하늘의 요소가 응축되어 땅에 영적 전쟁이 일어나도록 유도한 겁니다. 인간들은 과학적으로 자신들이 물질에 불과학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육신은 필히 영젹 요소가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분노가 일어난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분노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게 자신에게 달라붙은 영적 요소입니다. 즉 “누구든지, 심지어 신이라고 할지라도 나에게 상처주면 나도 가만 있지 않는다” 정신입니다. 보다 좋은 것, 보다 비싼 것, 보다 힘이 될만한 것들로 끌어모으려고 합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서 분노는 일상화되고 보편화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육신은 성도 본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다루십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철저하게 관리하십니다. 육신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더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죽고 싶다고 더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육신에다 하늘의 요소를 결합시키십니다. 그것이 바로 멜게세덱의 제사장직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이 하늘의 요소가 레의지파에게 부어지면서 레위지파는 일반 이스라엘 12지파와 같이 숫자 헤아림을 받지 않습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느니라”(민 2:33)
레위인들의 숫자는 별도로 활용됩니다. 즉 제단에게 벌어지는 작업이 더러운 인간을 재료로 하여 하나님의 죽음을 집어넣어 생명을 지닌 새로운 피조물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 일을 위해 레위인들에게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이 됩니다. 이로서 이스라엘 12지파는 하늘의 매개물을 부여받게 됩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민 3:11-12)
레위인들은 사람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에 속한 것처럼 이스라엘 12지파의 맏이 신생아들, 곧 새로운 피조물들은 멜기세덱의 제사요소가 삽입되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매개로 인하여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깨끗하게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작업을 계속 밀어 붙이면 모든 관심사는 제단에 모아지게 됩니다.
즉 십일조는 제단 운용기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단이 중요성으로 인하여 그동안 인간들이 오직 자기 마음에 드는 영토 확보 전쟁에 집중하는 것과 전혀 다른 공간을 하나님께서 소개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레위 지파는 마치 이 땅에 여타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하늘의 요소를 보여주게 됩니다.
하늘에 속하면서도 땅에 나타나는 경우를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이름, ‘많은 무리의 아비’이지만 그 이름을 가졌을 때 아브라함은 단 한 명의 자식도 없었습니다. 이삭이 등장하므로서 아브람은 비로소 아브라함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허리’의 의미입니다.
현재는 자식이 존재하지 않아서 아비-자식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지만 허리에 있기에 모든 이가 ‘형제’되는 상황을 두고 말합니다. 즉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새로운 피조물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갈 4:26)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십일조가 되시는 겁니다.
십일조는 비록 형식적으로 10/1이지만 실은 10/10입니다. 하늘 나라의 전부가 이 십일조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체 안에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예수님은 맏아들, 곧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47-50) 오늘날 성도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말씀이 나오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 기이한 형제끼리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접촉하면서 행여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형제가 있는지 찾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히브리서 7장 8-10절(허리, 십일조, 레위)24092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8-10절입니다.
히브리서 7:8-10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 8, 9, 10절의 본문을 알려면 세 가지 단어를 끄집어내서 연결시키면 됩니다. 하나는 십일조, 하나는 레위, 하나는 허리, 허리와, 십일조, 레위 이 세 가지 단어를 끄집어내서 여러분들이 연결을 한번 시켜보세요, 어떻게 연결되는지. 제가 미리 예비 문제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겨울, 연탄, 따뜻함 이 세 가지 단어 가지고 문장을 하나 만들어보세요. 겨울, 연탄, 따뜻함.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탄 때문에 그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 수 있겠죠. 그러나 “그해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연탄이 필요 없었다.” 이런 문장도 가능하죠. 바로 유대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 모든 율법의 문자들을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위하여 열심히 조립을 했는데 그 조립이 다 엉터리였습니다.
막상 인간들의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그 단어 조립이 오히려 예수님을 죽게 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십자가를 통해서 그런 실수를 하고 잘못을 했다면 이제 우리 차례에요. 우리는 히브리서 7장 8절에서 10절에 나오는 ‘허리, 십일조, 레위, 레위, 십일조, 허리’라는 이 단어를 우리보고 조립하라면 우리는 어떻게 조립할 것인가?
뭐 조립 할 것도 없이 성경 덮으면 그만이죠. “난 안 보련다.” 그러면 깔끔하죠. “성경 난 안 볼 거다.” 이렇게 돼요.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또 준비된 게 있어요. 성경에서는 세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인간들이 활동하는 것. 두 번째, 성경에서 신앙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활동하는 것. 첫 번째는, 보통 인간들이 활동하는 것. 두 번째는, 성경 속에서 신앙인들이 특별하게 활동하는 것,
세상 사람의 활동과 성경 속에 나오는 그 신앙인의 활동이 서로 부딪히죠. 맞지를 않습니다. 한쪽이 한쪽을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또 한 가지 활동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활동이에요. 그러면 세상은 어느쪽이냐 하면, 성경을 덮어버리니까, 뭐 문자를 조립할 것도 없이 성경을 덮어버리니까 보이는 것은 인간만 상대해서 인간의 활동만 보고 그냥 따라쟁이, 너희들 하는 그대로 따라 하게 되면 ‘얼추 잘 산다, 세상 선방했다. 제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뭐 죽고 난 뒤에는 모르겠고…’ 그냥 그렇게 세월 보내면서 늙어가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죽을 때 죽더라도 즐기면서 살아야지.’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육신”이라는 거예요. 흙이라는 겁니다. 육신인데 그냥 눈에 보이는, 거울에 비치는 육신이 전부인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몸이 전부가 아니고 거기에 플러스가 돼서 뭐가 나와요. 인간이 좋든 싫든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요소가 육신과 같이 들러붙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분노에요, 분노.
분노는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분노는 이렇게 “몇 그램입니까?” 할 수가 없어요. 분노는 시장에서 팔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냥 육신뿐이에요. 육신인데 왜 분노가 일어나죠? 과학을 학교에서 배웁니다. “인간은 물질로 되어 있고 죽으면 흙으로 분해된다.” 과학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안 죽으려고 하죠? 그건 영적 요소가 달라붙어서 그래요, 영적 요소가.
이유 없이 분노해요. 화를 내고 있어요. 영적 요소에요. 그 근원은 몰라요. 성경을 덮어버렸으니까, 성경을 덮어버렸으니까 몰라요. 분노를 추적해 보면, 성경 덮고 세상적인 지식으로 분석해 보면 거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상처를 입었다는 거예요, 상처. 다시 말해서 ‘세상이여 세상 사람이여’ 또는 ‘너여,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상처를 내냐? 나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이게 바로 분노잖아요. 이게 영적 요소입니다.
해답은 모르는데 어쨌든 간에 나도 일방적인 내 분노에 대해 다스리지 못하고, 해명하지 못하고,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이유도 모르고 세월만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들의 활동이에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이방인’들이라고 하고 그걸 더 전체를 따져서 확실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는 매개가 없다. 매개, 중보가 없다.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가 없다. 연결되는 접착제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끊어져 있기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성경, 특히 구약 같은데, 레위기 보게 되면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더럽다’고 이야기 해요. 더럽다, 인간이 더러운 이유가, 매개가 없기때문에 더러운 거예요. 피, 씻어주는 피가 없기때문에 더러운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어서 인간 나름대로 ‘더럽다, 깨끗하다’를 윤리, 도덕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은 윤리, 도덕으로 간주하는 그것도 더러워요.
왜냐, 선악과 따먹어서 알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동원 시켰으니까. 선악은 매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받아줘요. 선과 악을 안다고 해서 그걸 매개라고 여겨서 ‘네가 연결고리가 있구나’ 해서 끄집어내 주는 게 아니에요. 그건 다른 종교에서 그렇게 이야기 해요. 그러나 복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매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매개입니다. 그게 없으면 모든 게 더러워요.
사람들이 자꾸 윤리, 도덕을 가지고 ‘저건 더러운 인간, 짐승 같은 인간’이라고 욕 하지만 사실은 따져보면 가장 더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게임이에요. 스포츠에요. 축구, 탁구 치는 것, 야구, 올림픽이 다 더럽습니다. 승부욕, 다 더러운 거예요. ‘누가 강하냐, 약하냐?’ 다 더러운 거고 ‘누가 부자냐, 가난하냐?’ 더러운 거고요. ‘누가 인기가 많으냐, 적으냐?’ 더럽고, ‘누가 힘이 세냐, 힘이 없느냐? 누가 권력을 쥐었느냐?’ 다 더러운 거예요.
이 더러운 것, 돈과 인기와 힘, 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와 만나면서 악마의 영적 마음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육신과 같이 들러붙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죠. 돈과 인기와 권력, 이게 악마가 예수님한테 유혹하기 위해 제시한 겁니다. 이게 더러운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더러운 것을 미처 못 가졌다고 마음에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누구한테 분노로 풀어야 돼요. ‘네가 왜 내 든든한 자아를 건드려?’ 하고 풀지 않으면 스트레스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활동, 다시 말해서 성경 속의 선지자들의 활동과 성경 밖의 인간들의 인간들과의 활동을 대비시키면서 성경을 기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더러운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가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매개를 가져서 거룩한 성도, 하나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깨끗한 선지자들은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 활동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너희들이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라, 이 말이에요.
선지자의 안목으로 보면 산다는 것,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죽이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근자근 죽이는 방식 중에 하나에요. 죽이는 방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하루를 살았으면 또 죽음에 가까이 간 겁니다. 그래서 다 살면 그릇 치우죠. 다 끝나죠.
성경 속에 활동하는 이 선지자, 또는 신약에서는 사도, 또 신약에서의 이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떤 영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육신+영적 요소’, 오늘 본문에 ‘허리, 십일조, 레위’가 나오는데 그 영적 요소의 구성 요소가 두 개입니다. 십일조와 레위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이 세 가지 설명드리고, 짧게 끝나면 그대로 끝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똑같아요. 뭐 배고프면 밥 먹어야 되고 눈에 보이는 건 똑같은데 특이한 것이 성도에게 매개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매개가 십일조와 레위가 들어가는데 우선 십일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십일조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만남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을 만날 필요가 없어요. 각자 인생 따로 살면 되는데 왜 만나게 되었는가? 전쟁 때문에 만났습니다. 무슨 전쟁이 일어났는가? 성경 바깥에 더러운 인간들끼리 전쟁을 한 거예요. 전쟁의 모토, 목적이 뭐냐? 괜찮은 땅 차지에요. 영토 차지의 전쟁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 영토가 어느 정도로 괜찮은 영토냐? 창세기 13장 10절에서 11절에 나옵니다. 그게 얼마나 좋은 땅이었으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 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덴동산만큼이나 사람들이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잃어버린 낙원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그 땅, 그 땅을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같이 나란히 서서 보면서 “우리 둘 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가축이 많은데 같이 기거할 수 없으니 자, 네가 어느 땅 할래?” 물어보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 할게.” 하고 조카에게 물으니까 조카가 이렇게 살펴보거든요.
쭉 살펴보니까 에덴동산 같은 그 땅이 물이 넉넉하고 목초가 넉넉해 보이니까 가축 키우기 좋단 말이죠. “저 영토 같으면 괜찮겠습니다.” 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하나님이 유황불 떨어뜨릴 것은 조카 롯이 까맣게 몰랐어요. 지금 당장 자기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 땅으로 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케이. 그러면 나는 네 땅과 떨어져서 다른 땅에서 살게.” 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롯이 갔는데 그 땅이 롯에게만 좋았겠습니까? 너도 나도 다 좋으니까 그 주변의 나라들이 호시탐탐 에덴동산 같은 그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키워서 늘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바깥의 인간들, 인간과 인간이 상대하는 인간들은 너한테 좋으면 나도 좋고 나한테 좋으면 너도 좋은 거, 그 좋은 것을 두고 탐욕이 나서 그 좋은 걸 차지하는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 전쟁은 지금도 멈추지 않아요. 인간은 땅 없으면 못 산다는 거 창세기 3장에 나와 있잖아요. 그 땅도 시들한 땅 말고 괜찮은 땅 강남, 대구 같으면 수성구, 학군 좋은 땅, 땅 성분이 똑같아도 땅값은 열 배 이상 차이 나잖아요. 열 배가 뭡니까, 백 배 이상 차이 나죠. 전부다 아파트값이 비싼 수성구로 가잖아요. 애들도 거기로 보내고요. 거기 경신고등학교 있고.
이 싸움, 이 싸움에 누가 말려들었는가? 아브라함의 조카가 말려든 거예요. 아브람의 조카가 말려들고 그 조카가 4 더하기 5, 네 왕이 다섯 왕을 공격하는 그 전쟁에 말려들어서 소돔과 고모라에 있던 조카가 네 왕에게 사로잡혀갔습니다. 그걸 보고 아브라함이 찾아가서 전쟁을 벌인 거예요. 끝까지, ‘단’(창 14:14)이라는 그곳까지 끝까지, 지금의 헤즈볼라가 있는 그 경계까지 가서 조카를 데려옵니다.
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면서 멜기세덱에 십일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곧 십일조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이번 전쟁에서 멜기세덱이 매개거든요. 하늘과 땅 사이에 연결된 특별한 인물이 멜기세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통해서 멜기세덱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본질을 그대로 복사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복제해 집어넣지 아니하면 아브라함과 롯은 새로운 피조물이 못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못 되면 이것은 더러운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복제물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인간은 뭐냐?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 새로움은 하늘의 준비된 것이 땅에 삽입될 때 새로워지는 거예요. 그 삽입된 게 뭐냐? 멜기세덱의 복제에요. 나중에 예수님한테 오면 예수님의 복제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아담.
첫 번째 아담은 안 넣어준다는 거예요. 천국에 안 넣어줘요. 두 번째 아담의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들어가기 위해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삭도 쪼개지고, 야곱도 쪼개지고, 아브람도 쪼개져요. 아브람과 아브라함으로 쪼개져요. 쪼개지고 난 뒤에 거기다가 뭘 집어넣는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그냥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맹세는 사람이 손 대면 안 돼요. 왜? 맹세는 절대로 하나님 스스로 이루지 내가 맹세에 손대서 이뤄지는 건 없습니다. 약속이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구원을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뭘 믿으면 됩니까? 어떻게, 어떤 말씀 지키면 됩니까? 전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드리면 됩니까?’
모든 것을 내 쪽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안 들어와서 그렇고, 매개가 없는 사람이고, 교회 58년 동안 다녀봐야 더러운 인간이에요. 그건 자기가 자기를 상대해서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게임을 해야 자기가 승리자라는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매사가 전부 다 게임하는 식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업무 보고 사업해요. 모든 게 게임이에요. ‘건너편 치킨집 망해 버려라.’ 이것도 게임 아닙니까. 모든 게 게임이에요. 그게 더러운지를 몰라요.
매개가 없으니까, 새로운 게 없으니까, 나한테도 새로운 것을 내가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이것은 자아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을 자꾸 지키려고 해요. 말씀을 지키겠다는 말은, 말씀이 안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말씀은 마치 뭐와 같으냐?
바위에 쐐기 해서 망치로 때리면 바위가 깨지잖아요. 말씀이 들어오면 계속해서 성령이 말씀 가지고 위에서 해머로 쳐버려요. 쳐버리면 자아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갈라지고, 더 갈라지고, 더 쪼개지고, 또 쪼개지고, 자아가 산산조각 죽을 때까지 계속 쪼개지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것이거든요. 아담의 복제물을 예수님의 복제물 위에 놓고 그냥 깨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교회에서 보통 말할 때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또는 집사님, 또는 목사님) 제 마음은요…” 다른 분하고 이야기할 때 “제 마음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러면 안 돼요. “제 속에 들어온 말씀은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는데요.” “내 속에 들어온 말씀은요…, 나란 인간을 쪼개버리게 한 그 말씀은요…,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이라는 그 말씀은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이에요. 아브라함과 조카 쪽에다가 멜기세덱의 본질을, 제사장 요소를 쑤셔 넣기 위해서 이번 전쟁을 관장한 겁니다. 영적 전쟁이지요. 위에서 관장한 거예요, 위에서. 위에서 관장해서 어디까지? 땅에 있는 아브라함이 있는 땅까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매개체,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연결되어 있으니까 아브람 속에 뭘 집어넣는가? 제사직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십일조는 뭐냐? 바로 제사할 수 있는 제단을 운영할 수 있는 운영 기금을 가지고 십일조라고 이야기합니다. 십일조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늘이 다 들어있어요. 이게 약간 설명이 필요해요. 이게 너무 어려워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냥이에요. 성냥은 짧은 막대기에다가 위에 질산칼륨의 질산염과 황의 혼합체가 달려 있어요. 이 성냥을 연마제에 쭉 긋는데, 유리조각과 적린(赤燐, 공기 중에서 발화온도 260도)이 섞인 그 연마제에 쫙 그어버리면 여기에 촉발이 돼요. ‘충돌-발화- 폭발’이 돼요.
이게 바로 하늘의 요소, 제사직을 아브라함 속에 집어넣는데요,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아브라함 속에 레위 지파가 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습니다. 10절에,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만날 때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습니다.’라는 이 말이 도대체 뭘 이야기 하기 위해서 성경에 이 문장을 썼느냐, 이 말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아비와 자식 관계, 자식과 아비 관계는 없고 오직 형제 관계밖에 없다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요.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여섯 명이 변화산에서 영광중에 만났어요. 사람들이 그 대목을 보는데 모세는 엘리야보다 한참 선배거든요. 모세는 B.C 1400년, 엘리야는 B.C 1000년경, 한참 400년이나 선배란 말이죠.
‘선배인데 같이 있어도 되나?’ 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성경 밖의 인간들이니까, 매개가 없으니까. 심지어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네가 어떻게 나이 50도 안 됐는데?” 예수님이 굉장히 늙어보였던 모양이죠.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요 8:57)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브라함? 내가 아브라함 있을 때 같이 있었거든.” 이렇게 이야기 해요. 요한복음 8장에서요.
이제 여러분들이,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확실해졌지요? 왜 성경을 안 보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나 문자가 조립이 안 돼요. 내가 멀쩡한 조건하에 조립이 안 돼요. 말씀이 나를 깨뜨려야 되는데 ‘나 깨뜨리면 나 상처 입어. 난 성경이든 불경이든 뭐가 되든 난 상처 입는 거 싫어.’ 이게 육신 더하기 악마의 요소입니다.
이건 악한 영적 요소가 있기때문에 성경을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납득이 돼야 믿지. 이 성경이 자아를 키우는데 무슨 보탬이 되느냐? 내 가족과 내 가정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데에 무슨 보탬이 되느냐? 내 인생을 든든하게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나 안 보련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쪼개질 생각은 하지 않고, 내 속에 매개가 들어온다는 생각은 안 하고, 내가 성경 지켜서 내가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쪼개지면 남하고 비교하는데 우세스럽다는 거예요. 그게 이유에요. 내가 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잠시 망할래요, 영원히 망할래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거지 나사로가 잠시 망했는데 영원히 잘 됐어요. 부자는 잠시 안 망했는데 영원히 지옥 불 갔습니다. 레위가 레위 지파의 제사직을 할 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과 함께 숫자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멜기세덱의 요소가 들어오면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비도 없어요. 이것은 멜기세덱과 같기 때문에.
민수기 2장에 보면 33절에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수되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다른 이스라엘과 숫자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늘에 속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민수기 3장 11절, 12절에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했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그러니까 육신이 있는데요, 인간들은 이 육신에 마귀적인 심성이 포함돼서 이 육신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인간들이 제일 이해 안 되는 것이, 이 육신이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게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육신은 하나님 것’이지 내 게 아니에요. 남하고 비교할 수 있는 권한은 이 자아에 없습니다. 본인 게 아닌데 왜 비교를 합니까, 본인 게 아닌데? 본인 게 아닌데 왜 ‘남은 오래 살고 나는 일찍 죽는다. 억울하다.’ 이게 왜 있습니까? 내 게 아닌데요.
제가 이렇게 하면 또 반박해요. “왜 이 육신이 내 게 아니냐, 일평생 갖고 왔다. 일평생!” 내가 내 것이기 때문에 갖고 왔다는 거예요. 머리도 염색하고 이렇게요. 내거니까. 나를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도 하고, 옷도 입고, 좋은 집 사는 걸 목표로 하고. 이게 내거니까요. 내가 육신의 주인이니까 그렇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런 것은 매개가 아직 도달되기 전의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 사람한테나 그런 소리 해라. 매개가 오기 전에.” 매개가 어디서 오느냐? 위에서 와요. 위에서 오는 그 멜기세덱의 본질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그 요소가 레위 지파한테 그대로 복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레위 지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어요.
그래서 이 레위 지파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자식이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비가 되게 하는 겁니다. 저보고 말 어렵게 한다고 욕하지 마세요. 성경에 나오니까, 탓을 해도 성경 보고 탓하세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애초에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거부합니다. 매개가 없어서,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가 없어서 이건 구원받지 못한다고 거부해요.
‘아브람’이 구원되려면 매개가 첨부된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이름은 ‘많은 열국의 아비’가 돼요. 그러면 그 ‘많은 열국의 아비’, 그 자식들은 아브라함의 어디에 있느냐?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는 겁니다. ‘아브람’의 허리에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어요.
그런데 지금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지를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되려면 ‘많은 자식의 아비’라는 그 용어에 합당하다면, 여기에서 자식 없는 ‘아브라함’에게서 자식이 나올 때 그 순간부터 카운트가 되는 거예요. 그게 없는 자식의 아비고, 아비는 없는 자식의 아비가 이미 되었고 진짜 없는 자식이 아비라는 이름 허리 안에 들어가 있고요. 이게 성경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우리 아무도 안 태어났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그 허리에 모든 택한 백성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 포함해서. 이게 믿어진다는 게, 이게 기적이잖아요. 말 같아야 이게 믿어지죠. 우리가 아는 단어 조립 있잖아요. ‘연탄, 겨울, 따뜻함’ 이걸로 백날 조립해 봐야 안 나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35장 11절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했어요. 35장에서 이걸 이야기했잖아요. 계속해서 성경은 36장, 37장, 38장…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언급하면서 거기에 대한 내용을 계속 깊이 있게 해머로 쪼개고 쪼개면서 들어가는 거예요.
38장에 보면 유다에게 아들이 세 명 있는데 세 명 다 죽었어요. 아버지가 유다인데 자식이, 아들이 있어야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 언약의 축복이 연결되는데 아들 세 명이 다 죽었어요. 두 명은 확실히 죽고 한 명은 지금 살았어도 죽은 겁니다. 매개가 없으니까, 언약의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그냥 셀라는 복의 계통으로부터, 언약 계통으로부터, 매개 계통으로부터 죽을까 싶어 아예 옆으로 빼놨어요.
막내아들 셀라마저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해서 빼놓은 거예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매개가 없으니까 야곱 유다와 내려오는 축복의 혜택을 못 보니까 그거 죽은 자예요. 하나님의 하늘의 복을 못 받은 건 죽은 거라 이 말이죠. 여기에 누가 끼어드는가?
다말이 끼어들어요. 이방 여인 다말이 끼어들어서 시아버지보고 “아버님 언약대로 밀어붙입시다. 왜 아들 둘 죽었다고 여기서 머뭇거립니까? 세 번째 아들 있잖아요. 저에게 주세요. 언약대로 밀어 붙어야지, 언약이 중요하지, 말씀이 중요하지, 하늘의 매개가 중요하지 지금 개인 자존심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그 다말 집안의 족보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 그 족보에요. 하늘로부터, 위로부터 내려와서 요셉의 육신으로 마감되는 족보가 마태복음 1장 족보고,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땅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마리아의 육신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아담까지 쳐 올라가는 족보가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족보입니다. 방향이 반대에요.
육신과 새로운 매개의 만남, 이해가 되는 인간들의 언어 구조와, 그 구조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교회 백날 다니고 목사 백날 해도 이해 안 되는, 이해할 수가 없는 그 요소, 영적 요소, 그것이 바로 매개요 그게 들어와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경은 지키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 속에 성경이 들어와 있어요. 해서 말씀이 이야기해요. 말씀이 그냥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아까 ‘아브람’과 ‘아브라함’ 이야기하면서 ‘허리’라는 것은 아비와 자식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나오는데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아비나 어미나 피 한 방울 안 섞였어요.
인간의 육신은 전부다 DNA적으로 아담의 계통으로 내려오는, 아빠 엄마로 내려오는 각각의 50%를 받아서 지금의 우리 육신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 육신은 매개가 없어요. 없으니까 마귀가 달라붙어서 ‘육신 네 거니까 네가 알아서 네 자존심 키우면서 살면 돼. 남들 다 그렇게 살아. 따라쟁이, 너도 그렇게 살면 돼.’ 세상 활동이 그렇게 됩니다.
마태복음 12장 먼저 설명하고 다시 민수기로 돌아갈게요.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 보면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쪼개졌습니다. 육신을 가진 예수님, 성령 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쪼개지면서 그 말씀이 스스로 말씀대로, 맹세대로 이뤄지면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냈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십일조가 되는 거예요. 맏물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맏아들이 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허리 안에, 모든 땅의 요소가 하늘의 요소 안에 잠복되어 있고 잠재되어 있다는 형식을 멜기세덱이라는 그러한 직능, 왕과 제사장 직능 속에서 그걸 집어넣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안에 있는 내용이 제사 기능을 하는 레위 지파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이제 마지막 남아있는 레위 지파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해 보겠습니다.
민수기 3장 11절에서 13절 아까 말씀드린데 다시 한번 읽어보면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육신으로 되어 있는 인간을, 레위 지파가 활동하는 제단이 그 육신을, 더러운 재료를 소비해서 새로운, 거룩한 깨끗한 피조물을 생산하는 장소,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율법화된 제단인 거예요. 그
그 제단에서 레위인들은 활동하는 겁니다. 더러운 육신, 그것을 재료로 사용하는 거예요. 한방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돼지고기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까지도 하나도 안 버립니다. 육신을 갈아서라도 이 육신을 소비시키지요. 한평생 동안 소비시킵니다.
토실토실 포동포동 갓난아이가 얼마나 예뻐요. 갓난아이가 오줌을 자기 얼굴에 싸도 “아이고, 예뻐라!” 그러고 있어요. 그 정도로 모든 것이 예뻐요. 그런데 점점 더 세월에 비례해서 그 생명은 죽음으로 색조가 바뀌지요. 거무튀튀하게 색조가 바뀌면서 연세 들면 ‘귀신이야, 사람이야?’ 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점점 변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숫자를 계산하는 레위지파를 제외한 열두 지파 이스라엘이에요. 그 죽어가는 인간들, 매개가 없는 인간들, 더러운 인간들,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더러운 것, 하나님이 안 받기 때문에 더러운 거예요. 윤리도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더러운 거예요. 자기는 깨끗하다고 주장하지요. 그 인간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 난 레위지파의 숫자를 따로 계산해서 그 숫자와 다른 지파의 처음 난 애들 숫자를 맞춥니다. 맞춰서 미팅해요. 1 대 1로 작대기 긋듯이 해서 숫자를 맞춥니다. 숫자를 맞추는데 그 맞춘 숫자가 민수기 3장 43절에 나옵니다. “일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4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성막의 제단 일에 종사하는 20세 이상의 숫자)보다 이백 칠십 삼인이 더한즉” 273명이 더했다는 말은, 숫자에 차이가 난다는 말은 그 차이 속에서 비로소 생명의 값이 나옵니다. 그게 47, 48절입니다. “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그 더한 자의 속전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아론은 제사하는 레위 지파의 총수입니다. 대장이지요. 대장을 그렇게 함으로써 무슨 영토, 무슨 공간을 유지하느냐 하면, 제단이라는 공간, 제단에서 제사 지내는 공간을 유지합니다. 결국 십일조라 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발생되는데 그 전쟁은 뭐냐? 인간인 내 육신을 살게 하는 영토냐, 그게 우리가 붙잡아야 될 영토냐, 아니면 제단이 있는 영토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느냐? 그 영토싸움이 영적 전쟁이에요. 그게 영적 전쟁입니다.
민수기 3장 49, 50절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에게서 받은 돈이 성소의 세겔대로 일천 삼백 육십 오 세겔이라.” 이렇게 해서 성경이 카메라로 치면 그 렌즈가 어디를 향하느냐 하면, 오직 성소, 성전의 제단, 레위인의 활동,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열 두 지파가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거기에 렌즈의 초점이 안 맞춰져 있어요.
그것은 레위인 빼놓고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하는 겁니다. 51절에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모세가 바로 매개, 중보자잖아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모세. 모세에게 주어진 그 율법, 그 율법을 이제는 제단을 통해서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더 쉽게 해서 보이지 않는 생명을 형식으로 만들면 제단이에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속의 제단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이스라엘이 출발할 때는 어떻게 출발했는가? 아까 창세기 13장에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이 출발할 때는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라고 해서 그 당시에는 최고의 제국이 애굽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애굽의 시민권을 얻는 것이 그 당시에는 소망이었습니다. 걸핏하면 특히 가뭄이 들면 애굽으로 갑니다. 시민권은 잘 안 줘요. 미국 시민권 잘 안 주잖아요. 잘 사는 나라 시민권 잘 안 줍니다. 아랍 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국민소득이 한 6만 불이 되지만 시민권 가진 사람은 10퍼센트도 안 될걸요. 나머지는 노예에요. 인도 노예, 파키스탄 노예, 전부 다 노예입니다. 그 정도로 시민권 잘 안 줘요. 또 그만큼 그들의 자부심이 셉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 그들은 애굽 대제국의 노예였어요. 거기서 나올 때 두 개의 물을 건너요. 하나는 홍해를 건너고 또 하나는 요단강을 건넙니다. 홍해 건널 때 지팡이 사용했고 그리고 요단강 건너갈 때 언약궤 사용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죽음이라는 것을 형식적으로 만들어낼 때 앞으로 더 큰 죽음을 위해서 지팡이에서 언약궤로 전환되면서 언약궤 중심으로 죽음이 더 활발하게 작업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의 제사라는 것, 대신 죽는 양의 죽음을 활발하게 생산함으로써 진정한 생명은 저 죽음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깊숙이, 깊숙이 곧 말씀이 현실 자체인 것을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다시피 민수기에서는 성막이 있었고 그다음에 성전을 짓지요. 성전 짓고서 다윗은 ‘이제 다 되었다’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성전 망했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게 뭐냐? 형식은 형식인데 이제는 물체로, 어떤 건축재료로서 죽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물이 돼요. 메시아가 와서 그냥 죽음이 아니고 대신 죽음, 옛날에 레위 지파가 다른 열두 지파가 처음 난 것을 대신함으로써 죽은 시체에서 생명이 나오는 율법의 효과를 심어준 것처럼, 이제는 제단이나 어떤 건축구조물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인격체에 형식화시켜서 그 안에서,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는 조치를 하신 것이 바로 신약시대입니다.
그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나오는데 바로 히브리서 7장이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히브리서 7장에서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10) “창세 전부터 너는 내 허리에, 예수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또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곧 “창세 전부터 너희들은 내 허리에 있었다.”
이 소식을 우리 자아에 그냥 쐐기박듯이 깊숙이 쑤셔 넣는 거예요. 이제 남은 문제는 뭐냐? 그러면 과연 내가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인가? 그것은 지옥 가지요. 백 프로입니다. 백퍼예요, 백퍼 지옥갑니다. 그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 속에서 나오는 사람이냐? 백 퍼센트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십일조가 십분의 일로 압축이 된다는 말이지요. 십분의 일, 맏물이 된다면 나머지 십분의 구는 형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십분의 일안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십분의 십이 들어 있어요. 육신이라는 보잘것없는 것, 남자나 여자라는 보잘것없는 육신 속에 십분의 십 전체가 다 들어가는 거예요. 다 들어가서 접혀 있어요. 접혀 있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 접혀 있는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하나둘씩 펼쳐지면서 우리의 행위와 태도와 말로써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연결되면서.
그래서 말씀이 펼쳐지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더러운 세상과 마주치게 했어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성냥의 원리입니다. 성냥의 원리는 접촉-발화-폭발, 접촉은 충돌이라 해도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냐? 어떤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인가? 왜 굳이 새로워야 해? 그냥 교회 다니면 안 돼? 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에게서는 나올 수 없어요. 우리는 새롭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그냥 대충 살던 대로 살래. 새로움도 힘들어. 새롭게 뭘 한다는 말인가, 이 나이에?’ 했는데 주님께서는 내 속에 새로움에 대한 그것을 계속 발각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맨날 더러운 것과 마주 치는 경계면을 형성합니다.
아, 빨리 끝내려고 했으나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접촉해서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그게 영적 전쟁이거든요. 오늘날 성도가 이 세상과 만났을 때 세상을 예수님 안목으로, 다 이루심의 안목으로 보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저들 가운데서 말씀에 반응을 나타낼 우리 형제가 있을 수도 있잖아.’ 이게 아침에 눈 뜨면 성도가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도 어떻게 내 육신이 밥 먹고 살아?’ 이것이 아니고 ‘지금 나한테 일어나는 이 기이한 현상이 내가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서도 혹시라도 일어날 수가 있잖아.’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나오는데요. 말씀이 나오는 사람은 형제인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이 나오는 사람이니까 비교하거나 하지 말고 같이 존경할 수밖에 없어요. 고린도전서 13장에도 나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뭐냐? ‘너나 나나 아무것도 아닌데 왜 말씀이 자꾸 흘러나오십니까, 집사님? 말씀이 왜 저기서 나와?’ 이걸 발견하는 기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전체가 다 들어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하잘것없고 더러운 일개 육체에 지나지 않지만, 주께서 친히 사용해 주셨다는 이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사태에 대해서, 혹시 다른 사람들도 주의 택한 백성의 현상이 있을 수 있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