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말씀 작용과 자립

아빠와 함께 2024. 9. 15. 20:15

말씀 작용과 자립

2024년 9월 1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7:4-7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내려와서 뭘 할거냐’라는 질문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왜 굳이 내려오셔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짐승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짐승 정도가 아니라 그냥 물질입니다. 물질로 와서 물질로 돌아갑니다. 짐승과 매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수상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아’가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악마가 인간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인간은 이 ‘자아’를 가지고 아비처럼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비와 아비 노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처음의 아담이 나옵니다.

곧 ‘흙’이 나옵니다. 인간의 흙의 자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닌 겁니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는 예수님 뿐입니다. 제대로 된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비록 예수님은 인간과 같은 동일한 물질로 된 육신을 입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지시, 곧 창세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내어놓을 것은 자아 뿐입니다. 이 자아 안에는 악마의 본성이 들어 있습니다. 물질로 된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 악마는 이 육신으로 온갖 고상하고 경건을 것을 다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구원과 천국 등등 이 자아가 잘 풀리고 잘 되는 것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는 간단합니다. 그 자아를 둘로 쪼개는 겁니다. 실제로 언약이 주어진 사례를 보면 언약을 받은 자가 자신의 자아가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뉘어짐을 알게 됩니다. 우선 이삭의 경우를 봅시다. 불임여성이었던 이삭의 아내에서 졸지에 자식이 생기는데 하나가 아니라 쌍둥이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형과 동생 중에서 형을 밀어줍니다. 모든 취향이 형 에서에게 끌립니다. 에서가 해준 사냥 고기를 좋아합니다. 이삭의 인생 끝날이 가까이 오면서 그는 맏이인 에서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기 위해 사냥 고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복이 주는 시점에서 복은 동생인 야곱에게 다 가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이삭 본인의 자아가 둘로 쪼개진 경우에 해당됩니다. 복을 원했지만 그는 에서와 같이 저주의 자아로 살아왔음이 들통난 겁니다. 여기서 이삭은 자신이 원치 않았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입니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쪽이 복된 자아쪽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자식들은 아버지가 누리는 그 아버지 자리를 본인이 반복시키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는 윗대의 아버지 자리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최고의 자리에 자신이 홀로 차지하는 바로 그것이 자아의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멜시세덱이라는 하늘의 요소가 땅으로 내려오는 이유는, ‘사람의 아들’이 해야 될 일 뿐입니다. 그 일이 바로 제사기능입니다. 제사란 매일같이 죽음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타인에게 미안한 일이 있으면 두 손 모아 싹싹 빕니다.

즉 물건을 다루는 두 손으로 모아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게 가루로 만드는 모션을 취하는 겁니다. “이 두 손 사이에 있는 나는 내가 알아서 나를 가루로 만들었으니 이제 당신은 마음껏 처분대로 행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레위기 2:14에 나오는 소제는 바로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레 2:14) 하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굳이 죽으셔야 하는 이유는, 말씀이 예수님에게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직을 통해서 악마가 심어준 자아는 ‘말씀’으로 교체를 시키겠다는 것이 제사 기능입니다.

인간은 필리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저주받아 마땅한 이유는 말씀과 연계되지 않고 말씀으로부터 탈피한 면면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68-71) 왜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선택한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선택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 지었다고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어야 지옥갑니다. 이 지옥가는 가룟유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본인(=자아)입장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십니다.(마 26:24-25)

그리고 가룟 유다 본인은 과연 악마를 거론합니까?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마음 고백을 합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3-5)

즉 그는 매사가 자신의 자율성에 입각해서 결정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 매달린 강도도 마찬가지요 거지 나사로 앞에서 부자로 살다가 지옥간 부자도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에 자립성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여깁니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사모합니까? 오직 하나 ‘자립’입니다. 이 자립을 위해 주변에 말씀을 다 밀어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요? 말씀이 작용에 의해서 날마다 자립이라는 배설물을 시원하게 토해놓음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알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말씀의 기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히브리서 7장 4-7절(말씀작용과 자립)24091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7장 4-7절입니다.

히브리서 7:4-7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멜기세덱’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고, ‘십분의 일’을 이해해야 되고, ‘레위의 아들들의 일’, 그것에 대해 알아야 되고, ‘아브라함’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요, 그다음에 ‘높은 자’에 대해서 알아야 되고, ‘낮은 자’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방금 이야기한 단어들을 빼버리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대 사회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의 조합으로 오늘날 우리가 뭐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이게 왜 오늘날 우리와 관계있는 이야기이어야 하는가?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을까? 전혀 현대에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의 내용을 굳이 우리가 알 필요가 뭐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방금 했던 여러 가지 단어 조합을 압축해서 현대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물질로 와서 물질로 돌아서는 그 현상에서 하나님의 율법…, 5절에 보면 율법이 나와요.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물질로 돌아서는 인간과 결합되어서 땅에 있는 인간을 하늘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물질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지만 어차피 나이 들면 물질로 돌아갑니다. 죽죠.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화장터에 가면 그동안 추억을 같이 나누었던 우리의 식구가 어떤 선반 위에 뉘어요. 화장터에 하도 많이 가서 제가 유심히 보는데, 선반 위에 놓여서 한 2000도 되는 불 속으로 들어 갑니다. 들어가면 거기 직원이 “그만 보시고 이제 집에 가세요.” 이렇게 문 닫아 버려요. 뒷모습이 너무 참혹하기 때문에요.

선반 위에 뉘어서 불판으로, 불 속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수능을 준비했고, 학원을 다녔으며, 결혼을 하게 되며, 아파트를 구입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예요, 인생이라는 게?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화장터 들어가는 거, 이건 변동이 안 되는, 변함없는 확정된 거예요. 결국 가야 될 곳이 그곳입니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굉장히 많거든요. 동영상이 그렇게 많은데 제가 보기에는 화장터에 시신이 타는 걸 찍은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이게 뭐냐? 사기죠. 제대로 이야기해야지요, 제대로. 제대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불 속에서 하나의 재가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 재 뿌리는 거 이런 거 나오죠, 드라마에 그런 거 나오는데 뿌리는 거 말고 재가 되기 직전에 저와 여러분께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그걸 여러분이 아셔야 되죠.

이 세상은 결국엔 물질로, 한 줌의 재가 되기 때문에 그 필름을 뒤로 한 번 돌려 봅시다. 뒤로 돌리면 태어나는 그 출발 자체가 물질로 태어나요. 60조 개의 세포 덩어리로 태어난다고요. 이 세상은 뭐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인간은 이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았다고 하나 사실은 죽은 존재다,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110가지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화학 시간에 여러분 다 배우셨잖아요. 110가지 원소로 되어 있어요. 원소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거고, 인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게 다죠. 여러분 얼굴을 거울 앞에서 한 번 보세요. 뭐가 있는가? 거기 하나님 있습니까? 없죠. 거기 마음 있습니까? 마음 없어요. 거기에 사랑이 거울에 안 비칩니다. 미움? 그런 게 비치지 않아요. 얼굴 딱 대고 거울 보면 보이는 게 뭐냐? 코 보이고, 눈 보이고, 귀 보이고, 혀 내밀면 혀 보이고, 그게 다죠.

우리가 좀 정직하게 생각합시다, 정직하게. 괜히 허풍떨지 말고 정직하게 보세요. 거울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세요. 머리카락 있죠? 어제 이발했으면 이발한 머리카락이 있잖아요. 머리카락, 코, 눈, 얼굴, 그리고 피부, “목사님 그 보이는 피부가 다가 아니죠.” 그러면 째 봅시다. 수술칼로 한번 째보자, 이 말이죠. 째보면 안에 장기 있죠. 창자, 혈액, 또 째보면 세포, 세포질, 핵, 뭐? 그걸 또 쪼개봐요? 원자, 분자, 뭐, 모든 게 인간은 그냥 물질이에요. 이 물질, 박 물질, 최 물질, 전부다 물질에 불과한 거예요, 물질에.

정신, 마음, 양심, 사랑, 우정, 소망, 믿음, 물질밖에 없는데 왜 그딴 걸 반칙하면서 억지 쓰며 갖다 붙이냔 말이죠. 결국 화장터 불판 위에 올라가는 게 우리의 모습인데 왜 애써 억지 부리며 애써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죽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 거야. 무슨 의미가 있을 거야.’ 물질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물질에? 살다가 흙이 되고 죽는 건데. 치매 걸려서 나중에 요양 병원 가게 되면 아무도 없어요. 끝으로 혼자 가는 거예요. “여보! 따라갈래~.” 따라가지 마세요. 그냥 혼자 가요.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길, 물질로 태어나서 물질로 사라지는 길 그거뿐이죠. 그거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성경 전체는 우리가 볼 가치가 없다는 뜻이에요. 성경 전체가. 이게 정직한 겁니다. 이걸 세상에서는 가르치지 않아요. 세상에서는 우리가 물질이지만 짐승과 차이 난다는 거예요. 어디서 차이 나는데요?

짐승은 막 살지만 인간은 인간답게 바르게 살고, 또 교회 가면 이런 이야기 해요. 짐승은 못하는데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겁니다. 뭔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야, 참 무리해요. 하나님을 기쁘고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 봤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걸 봤어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좋아하는 자기가 자기 바람에 기뻐한 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 찬양 받으소서.” 해 놓고 자기 찬양에 자기가 매료되는 거 아닙니까? 하여튼 교회를 다니고 뭘 해도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지난 목요일에 서울 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어요. 인간은 누구를 만난 적이 없고, 만날 재주도 없고, 만날 능력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날 능력이 없어요. 왜 그러냐? 맨날 자기하고 만나요. 자기가 자기보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요, 자기가 자기보고 좋아한다고 하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거짓말인데 왜 거짓말이냐?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그 나를 좋아할 수 있느냐고 상대방한테 윽박지르는 거예요.

자식? 부모? 사랑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만 사랑할 뿐이에요. 여기서 인간은 반칙이 되는 거예요. 어떤 반칙이냐? 인간은 분명히 물질인데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게 튀어나와요. 그게 뭐냐? 자아라는 겁니다. 그냥 솔직하게 ‘나는 흙이다. 물질이다. 죽을 때도 물질로 죽는다. 따라서 걱정 같은 것은 나에게 오감 한 일이다.’ 흙인데, 물질이 무슨 걱정을 합니까? 질소 산소가 걱정합니까? 탄소가 걱정해요?

걱정한다는 것은 여기 뭔가 나와서는 안 되는 게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 나라는 게 나왔기 때문에요. ‘나’, 나라는 게 나왔어요. 이건 골칫거리예요. 이건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나는 없어요. 거울 봐도 나는 없어요. 그냥 물질만, 코 눈만 보일 뿐이지 나는 없는데 이상하게 나라는 게 기어올라서 그다음부터는 먹을 거 있어도 자살해요. 희한한 일이에요. 못 먹어서 죽는 게 아니고 먹을 거 있고 다 있는데 죽겠다는 거예요. 왜? 자존심이 상해서. 자존심이라니. 자존심이 왜 생기죠? 자긍심? 자존감? 그게 어디서 튀어나왔죠? 다 구라 아닙니까? 이거 거짓말이거든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물질은 물질 스스로 다룰 수가 없어요. 물질 속에서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도 없는데 뱀이 인간 속에 자아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그 자아를 통해 뭘 숙성시키는가? 나와서는 안 되는 죄가 너라는, 육신이라는 물질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그걸 숙성시키는 데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은 흙입니다. 인간은 흙이에요. 사람이 아니고 흙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딨느냐?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등장했을 때 그 ‘사람의 아들’만 아들이에요. 사람의 아들을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분만이 사람이고 나머지는 흙이에요. 흙입니다.

그래서 성경 구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흙이 흙을 낳고 흙이 흙을 낳는 거예요. 그게 아브람이에요, 아브람. 흙이 흙을 낳고 흙이 흙을 낳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두 가지로 쪼개지는데 이 쪼개지는 것부터 먼저 설명드릴게요. 이삭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삭이 쌍둥이를 낳게 돼요. 하나님이 자식을 주는데 이상하게 쌍둥이를 줬어요.

큰아들이 이름이 에서, 동생 이름이 야곱이에요.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인 에서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어서 그냥 밀어줍니다. 자기 마음에 드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밀어주는 겁니다. 밀어주는 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에서에게는 저주가 돌아오고, 아버지가 싫어하는 그 둘째 아들 야곱에게는 복이 돌아가게 돼 있어요.

내가 밀어준 첫째 아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그 아들과 결탁 돼 있는 아버지가 저주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뭐냐? 쪼개짐이에요. 쪼개지는 것. 하나님께서는 물질인 인간에게 반칙으로 자아가 있으니까 이 자아를 쪼개서 인간 속에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범죄하지 않은, 죄짓기 전의 진짜 인간을 그 쪼개짐을 통해 만들어내는 작업을 율법으로, 약속으로 해주시는 거예요. 삽입되는 거예요.

인간은 물질로 가는데 거기 있어서는 안 될 자아라는 게 피어올랐다, 이 말이죠. 정직한 것은 물질인데 갑자기 “이 육신은 내거야.” 하고 ‘나’가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를 두 조각 내는 거예요. 나를 두 조각 내서 ‘나’가 있기는 있는데 그 나는 어느 쪽인가? 저주 쪽에 속한 나라는 겁니다, 저주 속에 속한 나.

아까 기도하신 우리 집사님께서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과 여러 가지를 주신다’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일은 인간에게 좋아 보이는 은혜와 축복과 여러 가지 감사할 것을 주시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는 죽음과, 저주와, 심판과, 지옥과, 악마와, 선악 지식의 죄들을 먼저 끄집어내는 작업을 먼저 하죠.

‘긍휼을 입었으니 감사합니다’ 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 때 주께서 되묻습니다. “어디서부터 구원인데?” “하나님께서 긍휼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네가 긍휼을 받아야 되지?”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왜 네가 사랑을 받아야 되지?” “천국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국? 내가 너 뭘 보고 천국 보내는데? 그 이유를 네가 알고 있어?”

나라는 게 교회 왔으니까, 안 다니던 교회 왔으니까 천국 가야 된다는 것은 나로부터 출발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저주받을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십일조 나오잖아요. 십일조라는 것은 제사 기능의 활용, 활성화를 위해서 투과되는 제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십일조를 함으로써 제사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거예요.

제사 기능의 활성화라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물질과 하나님의 법을 결합시키면서 생뚱맞게 그 깨끗한 짐승을 계속해서 매일 같이 죽여 나가는 작업을 제사라고 합니다. 물질을, 거기 양의 짐승을 죽이는 거예요. 생뚱맞게 왜 죽입니까? 양은 뭐의 대체물이죠? 양은, 소위 인간이 없는데 인간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대체물이잖아요.

죽어 마땅한데 인간이 자아라는 걸 가지고 그다음부터 뭐냐?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면서. 뭐 노림수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다는 노림수? 이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출발을 물질로부터 출발해야 정직한데 이게 트릭을 쓰는 거예요. “하나님 저 보세요. 저 있잖아요. 기도합니다. 새벽 기도도 하겠습니다. 저 십일조하고 헌금합니다. 봉사합니다. 저 예쁘게 봐주세요.” 하나님께서 “그건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끼리 하는 행세다.” 인간들은 남한테 인정받는 걸 목표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건 남한테 ‘나 어때? 나 괜찮은 존재 맞지? 그러니까 날 사랑해 줘.’ 그건 인간들끼리 하라고 해요, 인간들끼리.

인간은 물질입니다. 정직함부터 시작합시다. 거울 보고 비치는 그것부터 시작해요. 코, 눈부터 시작합시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피부에요, 피부. 안에 있는 내장도 마찬가지고요.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뭘 하냐 하면, 자기 자아를 노출시키는 환경을 조성해요, 자기 자아를. 이제는 ‘내가 죽을 때 죽지 아직은 살아있다. 화장터 들어가기 전까지는 난 인간이야!’라고 우기게 만드는 요소를, 인간이 ‘나는 흙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나는 나야’라는 그런 큰소리치면서 살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 주시는 것,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환경을.

누가 뭐래도 나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주시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것이고, 내 미래는 내가 개척하는 것이고, 내 인생은 내가 창조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계속 속임수죠. 주님께서 여기서 멜기세덱이라는 것을 등장시켰어요, 오늘 본문에서.

멜기세덱이 뭐 하는 사람이냐? 왕인 동시에 제사기능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왕은 통치죠. 심판주입니다. 그런데 제사 기능은 뭐냐? 맥없이 죽는 기능이에요. 이건 모순됩니다. 적어도 왕이라면 튼튼해야 되고 안 죽어야 되는 데 제사 기능은 맥없이 죽는 거예요.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 있어요.

하늘에 속한 분이 그냥 하늘에 사시지 왜 땅까지 내려오는 겁니까? 하늘에 속한 분이 땅에 내려와서 나타난 현상이 제사 기능, 그게 레위지파라는 겁니다. 물질 맞아요. 물질인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질인 걸 감추고 ‘나는 사람입니다’ 하고 우기고 있어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접근시킵니다. 율법으로 하여금 소위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내부에 제사 직능, 제사 기능을 거기다가 작동시켜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같이 해야 될 일이 죽는 기능이에요. 나 대신 양을 잡아 죽이고, 나 대신 양을 잡아 죽이고…, 계속 잡아 죽이는 거예요. 자동차 엔진 기능처럼 죽음을 반복시키는 일을 하는 겁니다. 죽음을 반복하는 거예요. 왜 그래요? 그 일을 왜 하느냐? 다른 민족은 그런 거 없어요. 이스라엘은 왜 그 기능을 매일 같이 계속 해야 되는가 하는 거예요.

그냥 물질로 죽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의미가 발생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과 물질이라는 인간과 결합시켜 버리면, 인간이 처음부터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인간 쪽에서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죽어가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의 의미를 물질을 통해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발췌하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 말입니까?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 이 하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요즘은 그런 게 없지만 옛날에는 심방 통화 같은 거 더러 했거든요. 어떤 분과 통화를 해보면 “목사님 저 아파요. 조금 아파요.” 많이 아프다는 소리는 안 합니다. 걱정할까 싶어서. “제가 좀 아파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죠. “하나님은 죽었는데요?” 당신의 관심은 자기 자아가 건재한 것밖에 모르죠. 자아가 건재한 것. 죽을 인간이 아픈 건 너무 당연한 거예요. 아직 죽지는 않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산 사람 보고 부탁할래요, 죽으러 오신 분에게 부탁할래요? 이게 중요한 문제인데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가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안 믿은 이유가 뻔합니다. ‘같이 죽어가는 처지에 당신 믿을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당신을 왜 믿어야 돼요?’ 그 강도의 생각에 대해서 여러분이 표를 던진다면 그 강도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멀쩡하게 살아서 하늘에 계셔가지고 모든 만사를 좌우 하시고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이런 하나님 같으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맛이 나는 데 맥없이 이 땅에 와서 아무 도움 주는 것도 없이, 뭐 좀 도움받을까 싶어 기대려는데 본인이 앞서서 힘없이 죽어버렸잖아요. 고린도후서 13장에, ‘그분은 약하심으로 죽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4절)

하나님이 죽어버렸는데 죽은 시체 붙들고 뭘 부탁해요. 죽은 시체 보고 뭘 부탁합니까? 어느 강의, 제가 서울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남편이 말기 암 4기가 넘어서 오늘내일, 하면서 숨 쉬고 있는데 아내가 너무 슬퍼하면서 남편 보고 “여보,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 곧 죽으니까 말도 못 하고 눈 껌벅하고, ‘뭔데?’ 이런 뜻이죠. “우리 이혼하자.” 우리 이혼하자.

이게 뭐냐? 십자가 옆 강도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자세입니다. 얼마나 현명한지 몰라요.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런데 누가 살았죠? 지금 누가 살았다고 보는 겁니까? 내 육신이 살았다고 보통 생각하잖아요. 육신이라는 것은 산 적이 없어요. 죽은 적도 없고 산 적도 없어요. 물질이기 때문에. 뭐냐? 자아입니다. 모든 원인은 자아에 있어요. 나한테 있어요, 나.

십자가는 나보고 지적하는 거예요. 내가 악마와 결탁해서 얼마나, 내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면서 남한테 안 들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 자아를 주님께서는 기어이 네가 지금 신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발췌하는 것, 그것은 말씀이 와서 자아를 밟아줘야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아가 할 일은 뭐냐?

말씀이 있는 곳을 전력을 다해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는 것. 마치 눈 올 때 쓰는 밀대 있죠. 큰 써레, 말씀이 있는 곳은 눈 훌쳐내듯이 쫙쫙 밀어서 말씀이 내 곁에서 다 떠나게 만들어요. 다 밀어내는 겁니다. ‘말씀은 근처도 오지 마라. 내가 죽여버린다, 정말.’

왜? 말씀은 진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진실을. 멜기세덱은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보통 제사 기능 가운데 소제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미안할 때 손바닥 가지고 싹싹 빌잖아요. 이건 뭐냐? ‘내가 현재 여기 자아가 있음을 손바닥 사이에 집어넣어서 이 있음을 없음으로 제가 다 부숴뜨렸습니다’라는 식으로 동작을 보여주는 게 싹싹 비는 거예요.

보통 손바닥은 물건을 가지는 기능인데 그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에 아무것도 없이 ‘나는 이걸 가루로 만들어서 당신의 처분이 어떤 처분이라도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게 싹싹 비는 거라, 이 말이죠. 그게 레위기에 나와요. 2장 14절, 그게 다섯 개 제사 가운데 소제라는 겁니다. 가루로 만든 거예요. 나를 쪼개는 거예요.

율법은 나를 쪼개는 겁니다. 자아를 쪼개는 거예요. 자아를 쪼개면, 아까 말한대로 에서와 야곱이라는 자식을 줬기 때문에 아버지 자아가 쪼개졌어요. 쌍둥이로 인하여 쪼개졌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누구 편을 들었는가? 큰아들 편을 들었잖아요. 그런데 큰아들이 저주받았다는 말은 아버지인 내가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 한통속이 되었다는 것이 말씀에 의해 밝혀진 겁니다.

쪼개면 두 개가 돼요. 나는, 내 자아는 애초부터 저주 쪽에 속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나를 쪼갬으로써 발견하는 겁니다. 말씀이 옴으로써. 따라서 저주받을 자는, 이건 물질인데 물질이 그냥 물질의 의미가 아니고 지옥을 가야 될 물질이라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이미 선점해서 의미를 제공한 거예요. 그게 진실이에요.

전에는 그걸 보면서 ‘나는 물질이야. (거울 보면서) 코, 눈, 이게 나야’ 이랬는데 말씀을 대하니까 그냥 물질이 아니고 저주를 표현해야 될, 저주를 발산해야 될 용도로서 쓰여지는 물질이에요, 물질. 그걸 로마서 9장에서는 ‘진노의 그릇’(22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감췄던 물질 속에까지 직통으로 내려오니까 밝혀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말씀이 하늘에 계시지 왜 땅에 내려오는가? 바로 멜기세덱의 기능, 왕 같은 제사장 기능이 율법이라는 것, 제사 기능, 레위인들이 하는 제사 기능 속에 하늘의 것이 땅속에 삽입이 됐기 때문에 그런 특이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늘의 것이 땅에 들어오게 되면 ‘너는 그냥 늙어 죽는 게 아니고 꼭 저주받아야 돼’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제사 기능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룟 유다라는 이름을 들어봤죠? 예수님 팔아먹은 제자. 그런데 그 요한복음 6장의 가룟 유다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사람의 아들, 인자로 오시면서 모순되는 두 가지 기능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12제자를 펼쳐놓고 어떻게 드러내는지 나옵니다.

69절에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믿습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자인 줄 믿습니다.” 해도 소용없어요. 이건 다 헛소리예요. 제자들 소용없었어요. 제자들의 자아가 예수 덕분으로 구원받으려고 이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속아넘어갈 예수님이 아니죠.

뭐라고 되어 있느냐? 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열둘을 택했다는 말은 “네가 날 선택할 권한은 없다. 난 너의 선택은 일체 거부한다.” 왜? 선택할 권리도 없는데 자아라는 게 마귀와 결탁해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신이다’라고 행세하기 때문에 너의 선택은 일체 거부한다는 겁니다.

선택은 누가 하느냐?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내가 선택하는데 이렇게 해요.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지옥은 주님이 선택할 경우에만 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지옥은 죄지었다고 가는 데가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의 선택을 경유해야 돼요. “네가 왜 지옥을 네 맘대로 선택해. 네가 뭔데? 그런 권한 없어.”

인간 쪽에서 선택하겠다는 것, 자기 결정권을 갖겠다는 것,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은 물질이라는 것을 벗어나서 자아가 있다는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있다는 자체가, 나는 사람이라는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물질인데. 이 자아를 활용해서 하나님께서 “나는 겸손한 자를 찾는다”라고 하니까 막 겸손을 해요. “마음을 낮추면 구원받는다.” 마음을 낮춰요. “회개하면 구원받는다.” 회개를 막 하는 거예요. 보면 웃기지도 않아요. “회개합니다.” “하지 마, 회개 하지 마. 네가 뭔데 회개를 해?”

회개 이전에 주님의 선택이 먼저 있어야 돼요. 주께서 선택한 자만 지옥 갑니다. 그러면 주께서 선택한 이 가룟 유다가 어떤 모양새를 내는가? “주께서 나를 선택했다.”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아요. 아, 이게 놀라운 점이죠. 주께서 나를 선택했다는 발언을…. 가룟 유다는 분명히 선택을 당했는데, 악마의 사람으로 선택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에게서 악마라는 말이 안 나와요. 대신 뭐가 나오냐 하면 자아가 나와요.

마태복음 26장 24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이렇게 하고 마태복음 27장 3절에서 5절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다음 5절에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스스로, 스스로, 자아가 결정했다는 그 결과물이 ‘스스로’입니다. 셀프, ‘스스로’에요. 내가 스스로 한다는 자체가 악마가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인간은 스스로 하는 게 없어요. 사탄이 하거나 주님이 하거나 둘 중 하나지 스스로 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지옥 가기로 선택된 사람은 절대로 입에서 사탄이라는, 악마라는 말이 안 나와요. “이건 내가 스스로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펀드 이거 내가 스스로 했고, 주식도 내가 스스로 했다는 거예요. 비트코인 내가 알아서 스스로 투자했다는 거예요. 이과 갈까, 문과 갈까, 내가 스스로 결정했다는 거예요.

물질 주제에 거기서 스스로가 왜 나옵니까? 스스로가 어디서 나왔죠? 물질 주제인데. 탄소, 질소, 수소 덩어리인데 어떻게 거기서 스스로가 나오죠? 지금 세상의 모든 철학가들의 고민이 그거예요. 눈에 보이는 산소, 그리고 원자로 되어 있는데 왜 거기서 자아가 나오고, 거기 스스로가 왜 나오냐? 그걸 풀어낸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정신 분석하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모든 인간은 미쳤다는 거예요. 이게 그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미쳤다.” 자기밖에 모르는 미친 자들. 교회는 전부 다 미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자기 구원받는 것밖에 모르고 자기 복 받는 것밖에 모르는 미친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선택, 이런 건 인간 속에 없죠.

오늘 본문에서 하는 해답은 이겁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자리는 내가 선택해서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기능을 활발하게 움직이는 공장 같은 것, 팩토리(factory), 공장 같은 기능으로 내가, 너희들의 그 있어서는 안 될 자아의 자리를 거점으로 내가 사용할게.” 이겁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있었는데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갔죠. 부자의 특징은 지옥 가기 전부터 이미 지옥 생활을 했다는 거예요. 지옥 생활이 뭐냐? 자립입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스스로’라고 하면 안 되지만 ‘스스로’가 있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물어보세요. 여러분 무엇을 사모합니까? 여러분이 사모하는 게 뭐가 있죠? 뭐 애타게 사모하는 것, 애타게 내가 요구하고 싶은 것, 그건 뭡니까?

제가 정답 말씀드릴게요. 그건 뭐냐? 자립입니다, 자립. 자신만만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왜? 이미 창세기 3장에 그 내용이 나오니까요. 나 홀로 사는 거예요. 결혼해도 나 홀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결혼해도 결혼한 적이 없어요, 각자 홀로 사니까. 뭐 사랑합니다, 너 없이는 못 산다, 어디 입에 발린 거짓말을 그렇게.

결혼하기 전에도 솔로였고 결혼하고 나서도 솔로에요. 이게 내 맘대로 안될 때 생긴 현상이 뭐냐? 자식이 생긴 거예요. 솔로가 또 하나 생겼어요. 골칫거리예요. 자식 때문에 오 영은 박사에게 찾아가야 돼요. 이 괴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원래 ‘아브람’이었는데 그 사람 이름이 바뀐 겁니다. 쪼개지니 바뀝니다. 아브람이 쪼개지니까 그 이름이 아브라함이 되고 그래서 두 개의 이름이 되었어요.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이 뭐냐? 뭐냐? 우리 아비는 존귀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곧 나다. 그 아버지는 그 아버지의 나고.

아비의 세상이에요. 계속 아버지의 세상을 내 대에서 반복하는 것, ‘내가 이제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를 내 자식에게 물려주면 이제 자식은 누구의 자식이 아니라 내가 그 아버지의 연속이에요. 그 아비의 아비는 누구냐? 아담이에요. 모두 아담에서 나온 거예요. 아담 이름은 흙이에요. 흙에서 나와서 흙이 흙을 생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이방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별히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지요.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면 너의 자리를 이제부터는 네 손에 넘기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거점으로 사용하겠다, 거점으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거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함께하는 거점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거지는 죽어서 낙원에 간 것이 아니고 거지가 있는 그 장소 자체가 이미 낙원이 시작된 거예요. 부자가 죽어서 지옥 갔지만 죽기 전부터 이미 부자 자리가 지옥 생활을 이미 개시한 겁니다. 그 사람은 꼭 지옥에 갈만한 일만 했어요. 왜? 자립적이니까. 독립적이니까, 나밖에 모르니까. 주위에 고마운 사람들 많지요. 그러나 고마운 것은 어디까지나 고마운 것이지 고맙다는 이유 때문에 내 영역에 침투한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아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좋은 사람은 좋아요. 사랑해 주는 사람 있으면 고맙지요. 하지만 아무리 고마워도 내 자아의 영역에 손톱이라도 들어온다면 인간은 분노합니다. 인간은 분노를 달고 살아요. 인간성이 좋아서 참고 있을 뿐이지요. 나는 나 외에는 믿은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와서 우리를 깨부수고 쪼갤 때 진짜 내 모습을 말씀이 와서 밝혀준다는 이 기쁨, 이것이 아까 집사님이 기도 중에 나온 ‘복’이에요.

이게 복이니까 모든 만사가 감사할 것밖에 없지요. 어제부로 죽지 않고 왜 살려주지요? 한 달 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왜 아직 살지요? 사는 게 이상해? ‘왜 자꾸 살지? 좀 그만 살려 주면 안 돼요? 왜 자꾸 살지 내가?’ 기적 같아요, 사는 게. 왜 사느냐? 주님이 직접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제사 기능, 멜기세덱 기능을 활발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설교했어도 무슨 말인지 여러분이 잘 모를 수 있어요. 그걸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라는 존재 대신 말씀으로 교체하는 작업.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말씀 지켜서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그것은 사기꾼들이나 하는 짓이고요. 우리는 육신만 제공할 뿐인데요, 어차피 탄소, 산소, 질소, 이런 것만 제공할 뿐이고요, 세포만 제공하는데 이것을 주님의 말씀이 활용하도록 활용당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에 생긴 특이한 사항이에요.

나와 말씀을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나와 말씀을 바꿔치기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었어요. 그 나머지는 흙의 아들이니까 사람도 아니고요. 사람의 아들이 된 그것을 두고 ‘인자’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면 그 아들의 경로가 있어요. 왔다가 떠나간 그 경로가 있습니다. 그 경로에서 죽었는데 말씀에 의해서, 제사직의 말씀에 의해서 분명히 죽었기 때문에 거기에 절단면이 있어요.

사흘 동안의 절단면을 두고서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의 경로가 이런 경로를 타서 죽어도 새로운 자아로, 영원한 자아로, 복된 자아로 다시 천국을 이루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씀, 예수님이 활동하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이미 도달하게 되면 그 경로에 따라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사는 거예요.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는데요.

내 속에 다른 분이 계신 거예요. 그러면 독립도 못 되고 자립도 못돼요. 나 돈 벌어서 으쌰으쌰, 하면서 나한테 못되게 군 인간 쥐어박고 싶어요. 그런데 그 자아, 독립적인 자아, ‘네가 신인 것을 왜 몰라? 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런 자아를 들어왔던 말씀이 ‘이거 또 죽어야 해. 내가 죽여버린다.’ 그런 자아를 죽이면서 살아났던 새로운 자아, 예수님의 자아가, 내 안에 그 새로운 우리 자아가 마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낙원에 가는 거예요. 껍데기는 거지인데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 해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뭐냐? 우리 안에서 본래적인 말씀 기능을 발휘해 나가는 거예요. ‘말씀 기능’입니다. 자립 아니지요. 이거 독립 아닙니다. 누가 나를 지적해주는 거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 이건 아니고요. 예수님이라는 그 환경이, 성경에서는 ‘예수 안’이라 하지요, 예수님의 환경이 기계인 나를 천국백성 만든다. 전에는 악마가 다루는 대로, 자아가 다루는 대로 움직였던 기계라면, 이제는 예수님이 너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계가 된 것을, 그것을 ‘의의 종’이라고 로마서 6장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게 무슨 말이냐? ‘목사님, 내가 독립적이지 않고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이 궁금할 거예요. 내 안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우리가 매일 같이 토해내요. 뭘 토해내느냐? 악마가 우리 안에 집어넣어 준 것을 매일 같이 토해냅니다. 이기주의, 자존감, 자존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 남에게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과시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남에게 손해보기 싫은 것, 특히 남에게 지기 싫은 것, 그게 매일 같이 우리 안에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나는 너한테 이만큼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줬는데?’ 또 ‘우리 집에서 너 시집온다고 혼수 이만큼 해줬잖아. 그런데 꼴랑 베개 하나 들고 왔냐?’ 이런 것. ‘우리 집에서 너 한 것 뭐 있나? TV 하나 사 들고 왔잖아.’ 그런 것. 이걸 두고두고 곱씹어가면서 10년, 20년 계속 우려먹고 있어요. ‘결혼식 때 우리집에서 부조금 많이 들어왔나 너희 집에 많이 들어왔나?’ 이런 거요.

이게 뭐냐? 이걸 가지고 토해낸다. 욱~! 계속 토해내는 거예요. 이걸 감추면 안 돼요. 이걸 계속 토해내 줘야 돼요. 왜냐? 내 안에 말씀이 계시니까, 예수님이 계시니까. 수치스럽고 우세스러운 것을 대외적으로 터트려야 돼요. 터트릴 때 진짜 성령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싱긋이 웃으면서 터트린다는 거예요. ‘나도 알지, 알지~! 이게 얼마나 이기주의라는 것을 나도 알아.’ 알지만 이 쓰레기는 분리수거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추석날에도 분리수거 차 와요.

이 더러운 것을 웃으면서 내놓을 때 아, 주께서 하는 일은 말씀이 들어오고 내 속에 있던 악마의 심성은 바깥으로 드러내고, 이걸 계속 해 오시는 것, 이것이 말씀과 자아가 함께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씀 공부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는 말씀이 안 들어와요. 안 들어오고는 뭐냐? 내가 토해놓은 그 죽같은 것을 내가 도로 또 마셔요.

더러워서 못 봐요, 더러워서. 너 십일조 얼마 했어, 너는 얼마 했는데, 교회 충성 얼마나 했어, 너는 얼마나 착한데 …, 그런 것이 악마라고 내놨는데 남에게 안 지려고 그 착한 것을 또 자기한테 집어넣어요. 그것은 말씀이 들어온 적이 없고 말씀이 들어온 것처럼 흉내 내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적이 없고 성령을 받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더러운 것을 왜 먹어요. 남에게 자랑질하고 싶은 걸 왜 자꾸 합니까? 그것은 홀로 살고 싶기에, 독립적으로 살고 싶기에 그렇습니다. 설교가 벌써 50분이 넘어가서 이 압박이 보통 압박이 아닌데요. 정말 우리 안에 내가 손댈 수 없는 말씀 자체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계속 드러날 때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이렇게 더러운 이기주의가 나오더라도 싱긋이 웃으면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어. 내가 주님 죽인 거야.’ 싹싹 빌면서 ‘제가 주님 죽였습니다’하고 기쁨으로 싹싹 비는 그러한 자유로움, 주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말씀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억지인지, 위선자의 모습인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 믿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깨닫게 하옵소서. 이 자아가 하는 모든 짓을 주께서 받지 않는다는 것을 왜 진즉에 몰랐는지, 이젠 도리어 말씀 스스로 우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사람으로 사용해서 천국사람 만든다는 하나님의 이 솜씨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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