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소유와 십자가(눅14;25-35)110911

아빠와 함께 2014. 2. 6. 06:05

소유와 십자가

2011년 9월 11일                        본문: 누가복음 14:25-35

(눅 14:25, 개역)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눅 14:26, 개역)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개역)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8, 개역)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9, 개역)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눅 14:30,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눅 14:32, 개역)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눅 14:33, 개역)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4, 개역)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눅 14:35, 개역)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오디션 받습니다. 오디션의 주제는 과연 네가 들을 귀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 나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너는 내 말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알아들었는지 내가 말해야 한다. 자 오디션 시작하겠다”라고 하시면서 시작하는 겁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은 곧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뜻 풀이를 우리 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소유를 버리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떤 식으로 이해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 이렇게 나와주어야 합니다.

“소유가 없으면 우리는 못삽니다. 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는 ‘들을 귀가 없는 자’로 부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안 믿는자, 지옥갈 자, 죄인된 자로 부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소유 언급은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이 소유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우리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아무짝도 쓸데없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서, 소유가 너희들이 좋아하고 포기 못하는 이 세상에서는 통할 수는 있지만 이 예수의 나라에서는 그런 정신상태는 전혀 통할 수 없고 용납되지 못할 정신상태라는 말이 됩니다.

이는 인간들이 원하는 나라는 실은 천국과 정반대의 나라, 곧 지옥을 대변해주는 표현이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서 기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상대하고 있습니다. 즉 “저 사람처럼만 하면 구원되겠다”든지 아니면 “저 사람하고 차이를 보이면 곧 구원받은 사람이겠다”는 식으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똑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들어야 합니다. “너의 목숨을 미워해야 나의 제자가 된다”는 말씀을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오디션 말씀이라고 바로 직설적으로 들어야 한다. 남 핑계대지 말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내에서 돌아가는 질서나 분위기가 도리어 우리의 구원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 자체도 우리의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유’ 안에 교회도 포함됩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고 계시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교회란 우리 자신이 원인이 된 그런 교회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발생된 교회를 두고 말합니다.

지상의 교회라는 것은 일종의 기차역과 같아서 떠나야 될 사람과 남아 있을 사람을 구분지어 주게 됩니다. 밤 11시, 마지막 기차가 떠남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노숙자들입니다. 탈락자이지요. 이들은 이런 환경을 싫어하고 미쳐버립니다. “왜 신은 나를 감히 배격한단 말이야”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소유를 버리라는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자신의 소유를 버릴 장소도 없고 버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소유가 가 있는 그곳마저 자신의 소유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의 경우를 보게 되면 ‘소유 버림’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광야라는 상황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쓸모없게 만드는 겁니다.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들이 갖고 노는 장남감을 버리듯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지난날 배웠던 교과서를 헌책으로 여겨 버리듯이, 군대 들어가면서 사제 옷을 포장해서 집에 버리듯이, 전쟁이 끝나면 쇠무기들을 녹여서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로 만들 듯이 말입니다.

전에 애굽에서 필요했던 그 모든 것이 천국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되면서 새로운 세계의 정황을 미리 알려주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소지하여서 그 상황에 적응하고자 하는 행위들이 새로운 나라하고는 안맞는 삶의 태도라는 겁니다.

천국에서의 삶이 태도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의 것’은 소용없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 되어 버리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기존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상대하게 되면 이는 곧 ‘나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과 상대하려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집을 건축하면서 장래와 미래의 상태를 미리 알지 못하면 기초공사만 하다가 그치게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는데 있어 적의 숫자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군사 소유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막대한 적의 군사력 앞에서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미리 항복해서 화친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장래 들이닥치는 하나님의 엄중함에 대해서 감당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사람들의 심보는 피하여 숨거나 도망치는 것이 능사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자아의 가치성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부터 ‘밖’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주 안에서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구출(구원)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기 이름’을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삽니다.

소금이란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게 되듯이 사람이 주의 이름이 없으면 맜없는 소금처럼 무용지물입니다. 주의 이름에 의해서 제공되는 은혜와 사랑이 인간의 존재 바닥을 형성하게 됩니다. 진정한 소금이란 그 안에 예수님의 이 은혜와 사랑이 담겨 있는 자입니다. 요나가 자기 사명을 운운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문제있음을 알았습니다.

인간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정상인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자아의 위대성만을 부각하며 사는 이 생활이 죄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09-12 15:45 
93강-눅14장25-35(소유와 십자가)1109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0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4:25-3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지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는 마지막 멘트를 우리가 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도무지 무슨 흐름으로 이런 말씀을 했는지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으라고 해놓고는 그 다음에 건축할 때 기초만 쌓아놓고 완공하지 못하는 이야기, 그 다음에 전쟁을 하는데 저쪽군사는 2만인데 이쪽은 1만 군사뿐이니까 게임이 안 되므로 사전에 화친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소금이 맛 잃으면 소용없으니 땅에 버린다고 해놓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말이 어떤 흐름이 있고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서로 연관도 없고 서로 통하지도 않는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말을 툭툭 던져놓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라고 나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숙제가 뭐냐,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 말씀이 어떻게 꼬지처럼 하나로 쫙 꿰어지느냐, 이것이 과제로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느냐, 그리고 그것이 하나로 이어졌을 때……,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로 이어졌을 때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분류되고 또 들을 귀 없는 사람이 따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요즘 TV에 보면 오디션을 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어요. 직장도 관두고 오디션에 응해서 탈락하게 되면 아주 몸부림을 치고 아우성을 합니다.

심사위원이 무능했다느니 무정했다느니 반발을 하는데 심지어 욕까지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오디션이라 하는 연기나 노래 같은 것을 하는데 심사받아서 합격하든지 탈락하든지 하는 거지요. 주님께서 지금 자기 말씀을 던져놓고 오디션을 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에서 탈락될 사람인지 합격될 사람인지 오디션을 할 테니까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거든 합격이고 못 알아들으면 불합격’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심판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고 심판주가 따로 계신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심판주입니다. 지금 심판주가 우리를 불러놓고 오디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심판 주 예수님이! 우리는 사람들의 말은 곧잘 들어요. 어떤 말은 좀 어렵기는 해도 약간 공부 하면 다 알아듣는 말입니다. 누구나 들을 귀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디션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필히 들을 귀 없는 자를 들을 귀 없다고 분명히 집어내는 용도로서 자기 말씀을 활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제가 서울에 종종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데 강의 마치고 나면 거의 막차를 탑니다. 밤 열한 시에 있는 막차를 타요. 막차를 타기 위해서 서울역에 가 보면 그 곳이 꼭 교회 같아요.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떠나는 사람 따로 있고 남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남는 사람은 누구냐, 노숙자들이에요. 서울역은 뭔가 떠나야 되는 사람들이어야 되는데 안 떠나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평생토록 교회에서 살아요. 얼마나 살았으면 교사되고 장로 되었겠습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주께서 오디션 하는 현장이고 분류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 자체에 주저앉고 교회 자체를 장식하고 치장하고 넓히고 키우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떠나야 될 자리를 죽치고 앉는 자리로 된 거예요. 왜 그럴까요? 교회가 예수님을 모시는 가 아니고 목사를 모시고 서로 알아듣는 이야기만 남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아버지 되기, 가정화목하기, 이런 것들, 시집 안간 사람들 짝 맞춰주기, 가게 단골 챙겨주기, 교회가 노는 장소, 죽치는 장소로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할 때 교회까지 버려야 돼요.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내가 있다는 이유로 인해서 생긴 교회도 버려야 됩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결과로서 주어진 교회만 있지 내가 원인이 되어서 생긴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것은 죽치고 앉으려는 심보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서 우리는 엄숙하게 오디션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오디션 하는 판단기준은 여기 서 있는 이 목사를 구석에 처박아 버리고 주님이 여기에 와서 서서 오디션을 할 때 주께서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5절 그대로 이야기해 버립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도 없어요.


이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주제들을 가지고 연결시켜놓고는 끝에 붙는 멘트가 뭐냐 ‘너희들이 방금 내가 말한 것을 들었지. 이제 설명해 봐라. 내가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방금 말한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5절을 들었던 너희들이 들은 바를 나에게 설명해봐. 그 설명을 듣고서 내가 들을 귀 있다고 여기면 합격이고 들을 귀 없다고 내가 여기면 불합격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이 친절하지 않습니다. 제가 좀 친절한 척 해서 문제지요. 그래서 이 오디션 앞에서 이 말씀은 서로 연결이 전혀 안 되어 보이는 이 주제의 나열들이 어떻게 하나로 꿰뚫어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전체적인 해답은 이겁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과 세상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돼요.


해와 달과 꽃과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상대할 때 사람들은 너무나 엄청난 스트레스, 압력을 느낍니다. ‘감히 내가 하나님을 상대하다니. 하나님을 제가 피해버리겠습니다. 너무 거룩하고 너무 엄청나서,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내가 행동하는 것이 너무 더러워서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목사나 상대하고 같은 교인이나 상대하는 그것을 대치하겠습니다.’ 라고 나오지요.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고 자기는 너무나 허접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도 너무나 미흡한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는 가기 싫고 천국에는 가고 싶고 하나님은 너무나 엄청나니 같은 교인들끼리 서로 비슷하게 찬송도 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대충 옆 사람들 하는 것들, 장로나 목사 같은 사람들 비슷하게 행동하면 주님의 오디션에 합격하는 것으로 맘 편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보다 다른 교회 씹고 어떤 집사 씹는 것이 맘 편하다는 거예요. 정작 본인은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감히 설 엄두도 못 내면서, 자꾸 피하고 도망치기만 하면서. 제가 명절 때 사람들 만나 보면 ‘참 어지간히도 말씀과 복음을 안대했구나.’ 하는 것이 확연하게 들어옵니다. 평소에 ‘매일 매일이 엄청나게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구나. 그저 사람들만 상대했구나.’ 라는 것이 온 몸으로 확확 다가옵니다. 뜨거울 정도로 다가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 하나님을 늘 상대했던 사람 같으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부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이 오디션, 마지막 심판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엄청나게 여겼던 그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오늘 읽은 누가복음 14장 25-35절, 고맙게도 출제될 문제가 미리 앞서서 제출되었습니다.


따로 교육 안 받아도 돼요. 여기에 지금 이렇게 나와 있어요. 보고서도 그것을 못 믿던 사람들이었어요. 보고도 못 믿던 사람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친절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더 이상 얼마나 어떻게 더 친절하겠습니까? 문제 출제 다 이야기 해버렸는데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요. 그리고 묻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 쪽에서 설명해 보라고, 저한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이 말씀을 남겼던 주님한테 ‘나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라는 것을 여러분 입으로,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용어로서 주님한테 직접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봤다고 치더라도 이 말씀이 너무 엄청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내가 실천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큰 갭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느낀 것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이 아니고 피하는 방법, 자꾸 말씀과 하나님을 자꾸 피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말씀을 설명해 주려고 해도 뿌리치고 도망쳐서 인간들의 시답지 않는 정치이야기나 취미이야기나 스포츠이야기, 개그맨 세금 떼어먹는 그런 가십으로 넘어가버려요.


그런 이야기가 나 사는데 편하게 만들어요. 언제까지 오디션 피할 겁니까? 도망가 봐야 도망갈 데가 없어요. 천문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바깥이 없는 존재다.’ 현대물리학, 천문학에서 ‘147억 광년 때 빅뱅으로 우주가 만들어졌고 이야기하면서 우주나 인간이나 지구나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안과 반대되는 그 밖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고 우주고 제멋대로 만들어졌듯이 인간도 제멋대로 산다.’


이것이 그들의 철학이에요. 그것을 성경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안 듣게 되면 ‘이것은 내꺼.’ 이것은 ‘안’이지요. ‘저것은 내 것이 아닌 것’ 이것은 밖이지요. 자기중심으로 안과 밖을 경계 지으니까 그 다음 나머지기는 뭐냐, 자기한테 부담되는 것은 도망치면 되고 피하면 되고 숨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불교신자는 이야기해요. 평생토록 내가 예수는 안 믿었지만 죽으면 다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당신은 성경을 안 봐서 그렇다. 요한복음 5장을 봐라. ‘죽은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당신은 교회 가나 안가나 자신은 부처를 믿는다, 이렇게 해도 결국 예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 속에는 밖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갇혀 사는 식이에요. 갇혀 살고 그 갇힌 모든 것에 대해서 심판이 가해지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내 것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고 이것은 내 것이니까 나와 상관있고, 이렇게 결정지을 수 있는, 자기가 자기한테 오디션하고 자기가 자기한테 판단하는 그것은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일체 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근대사회 이후에 인간의 시민정신이 발달해서 네 것 내 것으로 사는 시대가 되었어요. 내 것 내 것으로 살기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하면 기적처럼 느껴져요. 왜냐하면 나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조금만 머리를 써보세요. 자기 맘에 맞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요. 그것은 뻔한 상식이 아닙니까?


자기 맘에 맞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는데 어떻게 결혼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옛날에는 결혼이 자기한테 맞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결혼을 해놓고 맞춰갔어요. 결혼은 해놓고 애는 생기고 맘은 안 맞고, 그래서 골치 아프게 되지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이 뭐냐 하면, 네 바깥의 분과 계산하고 타협하고 오디션을 받든지 상대를 해야 되는데 맨 날 살아가는 것이 너와 네가 타협하고 계산을 하고 있으니 항상 자기한테 관대하지요.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7080 노래 가운데서 ‘삼포 가는 길’이 있습니다. 저는 그 노래가 그런 의미인줄을 몰랐지요. 삼포 가는 길이라는 그 노래의 가락이 좋다고만 여겼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 가사를 보니 엄청난 의미가 있어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사람이 교회 나와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삼포 가는 길에서 삼포가 없어요. 사람은 없는 이상향을 향하여 계속 찾아가는데 찾아가면서 누굴 보느냐, 찾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보거든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보는데 이 몸뚱이가 집구석에 있으나 교회에 가나 어디를 가나 항상 자기를 바라보니까 그 삼포 가는 길, 내가 놀라 자빠질 멋진 천국이 없느냐, 하는데 천국은 그 삼포가 아니고 삼포로 찾아가는 그 본인이 천국이라.


인간들이 교회 와서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나라고 자기세계지 주님 계신 곳이 아니고 자기가 왕초가 되고 자기가 신이 되는 그 이상향을 찾아가는 그것을 위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동안 교회에서 자기 즐거움에 빠져서 놀은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마을에 글 올라온 것이 있지요. <아, 오락> 이라는 글을 썼어요. 그것은 <오, 수정>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거기서 패러디 했어요.


찬양해도 자기를 위해서 찬양하고 찬양하는 자기를 보고 찬양하고, 헌금해도 헌금할 줄 아는 자기를 보고 기뻐하고, 성경공부를 해도 이렇게 똑똑한가, 자기를 대견스러워하면서 공부하고. 삼포 가는 길, 모든 것이 내가 어떻게 신으로 비춰질 수 있는가의 그 세계, 자기가 만들어져 가는 그 과정자체가 자기한테 그렇게 대견스럽고 훌륭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불교입니다. 불교! 처음부터 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26절에서 ‘자기를 미워하라. 그게 무슨 뜻인지 네가 설명해 봐라. 들을 귀 있는가 한 번 보자.’ 하고 나오신 거예요. 큰일 났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질문했는데 답변할 수 있는 여력이 우리에게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밖에 모르기 때문에.


제가 디모데후서 3장의 그 대목을 읽어 드릴 테니까 들을 귀 있는 분은 어떤 느낌이 오는지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1절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여러 가지가 죽 나오는데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진해서 고통을 당하는 때가 오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그 뒤에 19가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두 가지만 했는데 사도바울이 이런 입장에서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이야기해 줄게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 말은 여러분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이고 지옥 가는 사람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그 지옥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스스로 지옥 같은 고통스런 생활을 하는지 말씀드릴게요. 들어 보세요. 세상에 그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잖아요. 얼마나 웃겨요. 참 웃기는 일이지요, 그렇지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듣고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무 소리 못하지요. 왜, 평소에 사는 것이 그거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그러면 자기를 사랑 안하고 누구를 사랑합니까? ‘돈을 사랑하고’ 돈 사랑 안하면 굶어 죽으라고요? 사도바울 당신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요. 이 대목뿐이 아니고 다른 대목에도 이런 소리가 나와요. 사람을 약을 살살 올립니다.


‘여러분, 제가 지옥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 줄게요. 참 그 사람들이 웃기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하면, 여러분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저쪽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경상도 사투리로, 천지 삐까리, 아주 쌔삐맀어요.’라고 로마서 14장에서 이야기합니다.


듣는 우리는 뭐합니까? 그냥 한숨만 쉬지요. 참 오디션 어렵다~! 헌금 냈고 교회 나와 줬으면 되었지 더 이상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찬양대 봉사했고 주일학교교사 했으면 된 거지 뭘 어떻게 하라고, 뭘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주님께서 오디션 현장에서 듣고 있습니다. ‘네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 그래서 이 소리 듣기 싫어 복음과 말씀이 있는 곳을 귀신 보듯 하면서 도망치고 있어요.


떴다, 하면 후다닥 도망치고 말지요. 이 대목들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가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과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너희가 평소에 몰랐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니까, 특히 종교단체의 성직자, 목사나 장로 같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니까 ‘저 사람이 천당 간다고 우기니 그 사람 따라 붙어서 나도 흉내 얼추 내면 나도 천당 가겠다. 쉽네 뭐.’ 라는 식으로 얕은 인간들만 바라본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단서를 붙이면서 뭐라고 하느냐,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했어요. 사도바울을 강단에 세워서 예배를 드렸다면 나갈 때 씩! 씩! 툴툴거리면서 화가 바짝 치밀어 올라서 나가 줘야 돼요.


나가면서 한 마디씩 하겠지요. ‘교회 꼬라지 잘 되겠다. 어디 교회 잘 되는가 보자.’ 그런 악담을 퍼붓겠지요. 이런 악담뿐만이 아니고 사도바울은 그것보다 더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과 우리는 부모와 처자식과 연결된 사람이에요. 연결이 이렇게 달라서 세상 살기는 참 좋은데 문제는 마지막 오디션에서 탈락을 한다는 것이 문제거든요.


사랑이라는 것이 뭐냐, 그 사람의 마지막대목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이 세상에서 사랑을 해 버리면 그 사람이 사랑받고 난 뒤에 자기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오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과잉사랑을 요구하게 돼요. 감당이 안 됩니다. 주제파악이 안돼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적 사랑이라는 것은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하게 되면 자기가 마치 사랑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착각하게 만들어요. 오해를 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교회는 누가 와도 인사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이것은 제가 가르친 것이 아니고 자진해서 그런 것 같아요. 반대로 살아가요. 한국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꼭 반대로 살아가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느냐, 내가 내 이름으로 사는 일에 후원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우선이고 나한테 필요한 하나님은 차선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에게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모든 신은 내 이름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편의상 조작된 신의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이 만들어놓았으니 책임지세요, 라는 식으로.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그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신을 만들어놓았는데 그 신을 뭐라고 하느냐, ‘네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신’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신들 속에 ‘네 자신의 이름으로 살면 그런 우상이 나오지만 네가 사는 것은 네 이름이 아니고 이 하나님의 이름, 진짜 너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네가 산다.’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비로소 구출이 되리라.’ 누구한테서 구출? 비로소 내 자신이 삼포로 가는 길로부터 구출이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로부터 구출되리라, 내가 생각하는 내가 좋아하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만들어준 주님의 나라에 네가 동참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만? ‘네 이름을 미워하고 네 이름은 죄악 된 이름이고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선물이고 주의 이름이 은혜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가 툭 건드리면, ‘왜 사는데?’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무슨 뜻인데?’ ‘주의 은혜로 산다.’ 그 말입니다. ‘왜, 네 힘으로 왜 안 사는데?’ ‘나는 뭘 해도 죄밖에 안 나오니까.’


이것이 오디션에 합격하는 거예요. 이것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예수 믿지?’ ‘예수 믿는다.’ ‘날 사랑해 줘.’ ‘너는 사랑 받을 자격도 없어.’ ‘왜?’ ‘너는 오디션에서 탈락이야. 너는 환자야. 너는 벌레야.’ 시편 22편의 말씀처럼 ‘너는 벌레고 구더기야. 어디서 감히 주제파악도 못하고 사랑을 원해?’


인간이 사랑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환자고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어가는 존재인데 죽어가면서도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면 그 자체가 뭔가는 대단히 큰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 있는 내가 교회 왔습니다. 기도할 테니 복을 주소서.’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누가 살아 있는데?’ ‘제가 살아 있잖아요.’ ‘누구 덕인데? 누구 덕분에 살아 있는데? 죽은 인간 살려주니까 자기가 잘라서 사는 줄 알고.’


교회 와서 앉아 있을 때부터 사람이 정상이 아니고 정신병자에요. 이세상은 정신병동이에요. 헌금 한 것 왜 죄라고 하느냐고 달려들지요, 봉사한 것을 왜 죄라고 하느냐고 달려들지요. 오디션에서 탈락했으면 가만있어야지 왜 오디션에서 나를 탈락시키느냐고 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이게 바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는 자체가 이미 마지막 심판 현장입니다.


그것을 미리 알려줬다는 말은 ‘너 얼마큼 갖고 있어?’ ‘만입니다.’ ‘나는 이만을 갖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집을 짓는다든지 이 세상에서 전쟁을 할 때에 네 앞일을 미리 예단하지 못한 채 ‘이 쯤 되었으니 천국에 합격이고 이쯤 했으니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는 착각은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거예요. 심판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감당이 안 되지요. 심판주가 하시는 말씀 중에 ‘네 자신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감당이 안 됩니다. 이 설정이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미워하는 것도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꼼수지요. 미워하는 척해서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살리겠다는 작전을 벌린 거예요.


이 주의 말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그 말씀도 오디션의 문제지는 맞는데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답변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못 지키겠습니다.’ 이 얼마나 듣고 싶은 이야기겠습니까? ‘주여, 못 지킵니다.’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강의를 했어요. 교회는 공통된 의견과 보편적인 생각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하나밖에 없다. ‘용서를 받았습니다.’라는 그것밖에는 없다고 했어요. 50명이 모였든 백 명이 모였든, 목사든 장로든 관계없이 보편적인 생각은 ‘저 용서받았습니다.’ ‘왜?’ ‘저는 천하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어째서?’ ‘나는 마지막 때에 돈을 그렇게도 사랑하거든요.’ ‘어째서?’ ‘마지막 때에 나는 나를 사랑하거든요.’ ‘어째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죽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살거나 주를 위해서 죽지 않는 인간이기에 나는 천하의 죄인입니다.’라는 그 공통된 의견, 그게 내가 만든 교회가 아니고 주께서 모이게 해 준 교회는 그런 공통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장이 슬슬 풀리게 됩니다. 32절 봅시다.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만일 못할 터이면’ 이 대목 아닙니까? 슬슬 풀리지요?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 네가 졌다고 해라, 경상도 말로 졌다 캐라! 그 말 아닙니까? 주님한테 저는 게임이 안 됩니다, 미리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지요. 마지막 오디션을 보기 전에.


오디션 장에서 ‘대구에서 올라오신 분 어떤 노래하렵니까?’ 하면 ‘노래 못합니다.’ ‘서울서 올라오신 분은 어떤 주특기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저는 주특기 없습니다.’ 그러면 ‘귀하의 의견을 캐스팅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성령을 받은 성도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별로 안중요해요. 왜, 그것은 마지막 오디션의 문제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마지막 내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심판대에서 주어질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들어도 들으나 마나 하세요.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거북스러운 성경말씀이 진실로 나를 살리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교회에서 제발 노닥거리지 마세요. 오락(‘아, 오락’) 좀 하지 마세요.


저희끼리는 아주 진지하지요. 참 웃긴다고요. 그래서 ‘죄인인데’ 하면 툭 치면 ‘내가 왜 죄인인데?’ 이렇게 나와요. 그 다음에, 그러면 어떻게 화친하느냐? 방금 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옵니다.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만일 여러분의 총 재산이 1억이라면 1억을 바쳐서 어떻게 소비할 겁니까? 부산저축은행에 저축할겁니까, 안 그러면 우리교회에 헌금할 겁니까? 누구 좋으라고, 목사만 배불리라고? 사람은 자기 소유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버릴 능력도 없고 버릴 자리도 없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에 1억을 헌금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교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가 헌금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계속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소유를 어떻게 버리느냐, 소유를 안 버려도 돼요. 소유를 안 버리고 어떻게 소유를 어떻게 버리게 되는가? 지금 그것이 궁금하다, 궁금하다! 그게 바로 구약의 광야입니다. 광야는 소유를 가지고 있어도 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드는 것으로서 소유를 버린 것으로 쳐주는 겁니다.


자, 집에 재산이 10억이 있다. 이 10억이 천국 가는데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서 그 사람의 관심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 있지 자기가 가진 소유에 가지 않게 하는 식으로 소유를 버리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마음이 아주 안심이 되지요? 이제 헌금 안하고 마음 놓고 애 피아노레슨 시켜도 괜찮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광야라는 사건이 뭐냐, 애굽에서 나와서 바로 천국이 아니고 약속의 땅의 중간위치를 취합니다. 중간위치에서 ‘네가 너한테 어떤 행동을 가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너를 천국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하면 애굽에서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과 말씀, 복음과 복음, 오디션의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서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구원은 ‘졌습니다, 못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만 쳐다보는 사람만 구원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해 주신 겁니다.


목사들이 교회에 갖다 바치라는 소리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갖다 버릴 교회에요. 그런데 그렇게 키워놓았으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대구시내에서 두 사람이 약사 일을 하고 있다 합니다. 둘 다 똑같은 약사인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때 버려진 그 약사는 어떤 일을 했기에 버려졌고 천국으로 데려가진 약사는 어떤 일을 했기에 데려감을 당했습니까?


나쁜 약을 섞었습니까? 돈을 횡령했습니까? 성경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인자가 올 때도 그러하리라.’ 해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 때 인자가 갑자기 와서 두 사람이 쟁기를 갈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쟁기를 가는 자체, 약사 일을 하는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뭐가 나쁘냐하면, ‘약사 일을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마중할 수 있는 나의 주특기다. 약사 일을 해서 교회에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논리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구원받는 조건을 내 것에서부터 만들어내는 그것이 바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오디션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특징이라 그 말이지요.


데려감을 당한 그 사람도 그냥 약사 일을 똑같이 했어요. 하면서도 그 약사일이 내 죄를 씻어주는 일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는 그것으로도 내 죄가 씻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나를 건지십니다.’라는 믿음을 결과적으로 거듭나는 믿음이라고 해요.


이 믿음은 내가 만든 강한 신념에서 조작된 것이 아니고 결과로서, 그것을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선물로 준 믿음이 우리 안에 장착되면 주께서 주신 선물이 우리 속에서 계속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직업과 상관없이 ‘나는 아무것도 지킨 적도 없고 평생 죄만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토해내면서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겁니다.


34절에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러니까 오디션에 탈락하는 거예요. 신자 같으나 신자 아니고 목사 같으나 목사 아니고 장로 같으나 장로 아니고 집사 같으나 집사 아니고, 그냥 껍데기만 믿는 척을 하고 있는데 속은 자기가 자기를 의지하는 삼포 가는 길로 교회 나와서 자기가 자기를 영원히 살리는 그런 천국을 바라는 자기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이런 것은 천국에서는 탈락이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쓸데없다.’라고 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요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요나의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요나의 기적에서 사람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하면,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이 기적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요나의 이야기가 끝났으면 우리가 거기에 초점을 둬도 괜찮은데 요나 이야기가 요상하게 끝납니다.


요나이야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요나가 보기에 니느웨 사람들이 다 멸망할 줄 알았는데 멸망 안했어요. 요나가 삐져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 박 넝쿨이 시원하게 있어서 그 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박 넝쿨이 갑자기 시들해 졌어요. 시들해 지니 이 번에는 뜨거워서 못살겠다고 난리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야기를 하지요.


‘요나야, 지금 네가 하는 기능과 하는 일, 그 선지자 일을 하는 그것으로 네가 신자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네 스스로 판단했지? 정작 네가 그 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정작 중요한 네 자신이 얼마나 네 중심인가를 몰랐었지? 자, 저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할 뻔 했다가 살아난 것이 그렇게도 안타까우냐? 그렇다면 너한테 해 보자.’


박 넝쿨이 있을 때 자기는 당연한 것으로,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 거예요. 마치 오늘날 우리들 같아요. 지금 이만큼 살아온 것이 당연히 산 것이고 당연히 이 땅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박 넝쿨을 살짝 치워보니까 죽겠다고 난리입니다. ‘네 한 몸도 내 은혜가 아니면 못사는데 저 많은 사람들 살리니까 너는 네 한 몸 마땅히 살았다고 착각을 해서 저 놈들은 죽어버려야 되고 멸망당해도 마땅합니다, 라고 네가 심판하나?’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말은 뭐냐,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이 우리한테 심판해도 당연하고 박 넝쿨을 치워버리고 지금 부도나고 차사고 나도 마땅한데 주께서 불쌍히 여겨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고 돈만 사랑하는 우리를 매일같이 은혜로 이 바탕을 만들어서 살아왔으면 우리의 밑바탕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 있다는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돼요.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아하,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내가 나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 못되고 진짜 살리고 용서하고 천국에 넣어주실 분은 우리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이 그 말이구나.’ 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주님한테 하세요.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럼 너는 뭔데?’ 하면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죄인입니다. 강도입니다. 창녀입니다. 그저 십자가 피로만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저 주님의 피로만 죄용서 받아서 천국 갈 사람입니다. 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라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세상에 빠졌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하기만 했습니다. 도망쳤습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하는 그 경쟁과 비교하는 맛에 들렸습니다. 날 사랑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맛없는 소금이었습니다. 버려도 마땅합니다. 이러한 죄를 위해서 십자가 졌사오니 내가 하는 행동보다 십자가 피가 더 크게 다가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