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가르치신 기도(눅11;1-4)110220

아빠와 함께 2014. 2. 3. 18:21

가르치신 기도 (누가복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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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02-20 13:18 
가르치신 기도

2011년 2월 2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1:1-4

(눅 11:1, 개역)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눅 11:3, 개역)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눅 11:4,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침으로 인해 더 이상 제자들은 자기네 끼리의 ‘우리’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포함된 ‘우리’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의 주도권은 이미 예수님에게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이 말은 동시에 제자들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기도로 인하여 지적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은 자신들이 기도가 하나님과 교류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기도문 세계 속에 들어오므로서 더 이상 그들의 소망은 깨어지고 맙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원치 않는 현실에 대해서 강력하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은 곧 현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정신차려 보니 자신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누구를 하늘 나라에 보냈다는 말은 지상의 인간들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면서 살아오고 있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8:24-28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무너져내림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고는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이 겁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의 무너짐을 기정사실화해야 하는데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보이는 것’의 무너짐이 곧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진입을 의미합니다. 보이는 것의 무너짐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보이는 소망’이라는 범위 밖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보이는 것’들이 걷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간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을 철거하고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로의 진입을 야기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허무한 것에 대해서 굴복하는 피조성을 들고 있습니다.

즉 성도는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허무한 것에 대해서 굴복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집에 예수님께서 일을 일으켰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 가정에 충격이 가해졌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그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실제 상황으로 다가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가 죽자 두 자매는 강하게 예수님에게 저항합니다. “왜 우리들이 사랑하는 오빠를 죽이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이 ‘우리’ 속에 이제 오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합류했다는 점을 그들은 이해하지를 못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합류하게 되면 인간은 필히 예수님을 공격하게 됩니다. 결국 주기도문이란 예수님이 죽이라고 독촉하고 촉구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원으로 가담하므로서 발생되는 상황을 그려내게 되는데 이 주기도문의 내용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는 인간을 배제한 채 예수님과 아버지만의 대화입니다. 거기에 보면,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일임되어 있음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은 곧 인간이란 그 어떤 인간이던지 간에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참 하나님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내용에 구색맞추는 식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신앙체계를 갖추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참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면 그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해댑니다. 이런 주장을 일소에 해결하는 방식은 바로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바로 그런 발언을 일삼는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들추어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기에 바로 그 십자가 죽음에 너도 참여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기적으로 간주하지만 실은, 그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인간이 죽는 것도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려고 시도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부터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가지고 놀았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죽이고 살고를 예수님 뜻대로 행하시므로서, 살고 죽는 것이 모두 예수님 소관인 것을 믿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주되심의 취지에서 보면 기도문은 곧 보이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겟세마네 기도가 예수님과 아버지와만이 아시는 은밀한 대화라면 주기도문은 이 눈에 보이는 인간 세계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의 손에서 진척되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내용은 곧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촉구하게 만드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중의 두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하나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인간들이 내일을 위해 여분의 것을 대량으로 마련하는 그 양식을 강탈하고 빼앗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참지 못하고 격분해서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싶게 만듭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용서’입니다. 즉 하늘에서 보이에 우리는 사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평생토록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라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만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성도 모두의 공통적인 응답입니다. 즉 이미 응답부터 받아들고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기 즐거움으로 사는 우리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