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용서와 회개(눅17;1-4)이근호111030

아빠와 함께 2013. 12. 12. 20:52

용서와 회개(눅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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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1-10-30 13:28 
용서와 회개

2011년 10월 3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7:1-4

(눅 17:1,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 17:2, 개역)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눅 17:3,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개역)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메시아가 이미 투입된 환경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없는 환경이라면 오늘 본문의 말씀 것을 무시해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심판주이시오 재판장이십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과 내용에 대해서 필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몽둥이보다는 국수 체 같은 것으로 기능한다고 보면 됩니다. 즉 영생 얻을 자와 지옥갈 자를 구분하는 기능을 벌리십니다. 국수는 국수대로 물은 물대로 빠지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지옥 갈 자, 즉 목에 무거운 돌 추를 매고 영원히 깊은 바다에 빠질 자들은 어린아이에게 죄 짓는 자로 나와 있고, 반면에 영생 얻을 자는 ‘용서’를 아는 자라고 구분되어 있습니다.

용서’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죄’을 짓고 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용서가 발생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로 아는 것은 말씀 속에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말씀 속에 있다 할지라도 본인이 이해하는 말씀 해석 가지고서는 죄는커녕 맨날 변명과 핑계가 내놓을 것 뿐입니다.

따라서 말씀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이 내놓으신 해석 안에서 있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될 것이요, 그 죄를 죄 되도록 지적하는 그 능력이 바로 용서하시는 분의 능력임을 알 때에 이 사람은 용서 속에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용서를 모르는 자들은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사는 길을 택합니다.

이런 자는 지옥으로 구분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오늘 본문 2절에서 예수님께서 바다 비유를 들고 나오신 것입니다. 넓고 깊은 바다에 비해서, 너무나도 보잘 것 같은 어떤 사람이 목에 무거운 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광경을 예수님께서는 묘사하고 계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고 빠져나지 못하는 구조 안에 이미 인간들은 지내오고 있었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하십니다. ‘구조’란 인간이 개인보다 훨씬 크고 넓은 범위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바다 물에 풍덩 빠지는 것처럼 인간들은 구조 안에 풍덩 빠져있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의 말에 순종하게 됩니다.

즉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의 잔소리에 억매이지 않겠다는 겁니다. 독자적인 나만의 구조를 나의 행함으로 따로 조성하겠다는 겁니다. 나의 역사를 따로 만들면서 그 역사 속에서 홀로 만끽 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용서’라는 구조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지었다고 생각되는 죄가 알아채면 자신의 선행과 착함으로 무마하시는 것으로 나오게 됩니다.

즉 “나는 내가 스스로 반성도 가능할 정도로 착함이 나 내부에 풍성하게 담겨 있다”는 겁니다. 죄 지어놓고서는 여전히 선하고 착하고 의인으로 행세하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죄를 모르니 근원적인 용서의 세계와 구조를 알 리가 없습니다. 일곱의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실천력으로 불가능하다는 한계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바로 이런 불가능함으로 인간들을 몰아붙이는 이유를 지옥가는 자들은 알 리가 없습니다. 자꾸만 자기 행위로 가능할 자기만의 세계를 고집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뒤집어 씌어준 구조를 인정하고 싶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녀간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다녀간 후로는 그들의 치마가 달라졌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에서 가죽옷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녀가지 아니하면 그들은 용서의 바다, 용서의 세계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바다의 비유처럼 인간들은 모두 죄인으로서 깊은 저주의 바다에 빠져 있고 목에 무거운 추가 달려있기에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마치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개헤엄이라고 사실은 수영하는 것이 아니라 물 딛고 걷는 수준입니다.

수영 강사는 외칩니다. “발을 땅에서 띠고 내 몸을 붙잡지 말고 손을 놓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초보자는 무서워하면서 발을 바닥에 딛고 수영 강사의 몸을 붙잡고 놓지를 못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는 방식입니다. 반복해서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떡으로만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땅을 딛고 사람을 붙잡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사람들의 몸을 그런 습관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검고 깊은 죄의 바다 속에 목에 돌을 단채 깊숙이 빠져 있는 모양새입니다. 다른 삶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요 심판주이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그 가는 길목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이것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의 의미는 필히 오늘 본문과 결부시켜 봐야 하는 것이 필수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해주는 그 말씀의 구조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아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채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유는, ‘떡으로만 사는 것’을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는 것, 즉 나는 나로 인하여 내가 살리겠다는 그 의지력과 기대감과 소망함이 전부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아니하시면 이 습관과 반복적으로 누적된 버릇으로 종교적 폼을 다 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면 다음과 같은 고백자가 됩니다. 갈라디아서 6:17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에 그것이 유일하게 삶이 됩니다. 이 삶은 늘 ‘용서해주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할 것이 아니라 용서의 세계를 모르고 사는 죄를 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1-11-02 15:28 
100강-눅17장 1절-4절(용서와 회개)1110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7:1-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하면, ‘예수라는 분이 잔소리 하나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메시아가 투입된 환경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메시아가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하고 메시아가 빠져 있는 상태와는 세상 보는 관점이 확연히 달라야 되는 겁니다.


메시아란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에요. 히브리서 9장 끝에 그런 말씀 있지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이것을 줄여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음에서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고 있다.’ 더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다.’라는 뜻이지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타고난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셨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누가 심판 주며 무엇을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하느냐 하는 겁니다. 사흘 뒤에 시험을 친다 하면 그 시험의 과목과 내용과 기준이 궁금하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가는데 심판이 있다 했으니 답은 뻔 하게 나와 있습니다. ‘네가 이런 이유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단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심판이 이루어지겠지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있다.’는 그 말씀 뒤에 이런 것이 있어요. 그 뒤에 무슨 말씀을 붙이느냐하면 ‘영생을 얻을 자가 있다.’ 하는 겁니다. 죽는 것은 뻔한데 죽는 것은 이 세상으로 족하고, 죽는 것은 이 세상으로 그치고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들을 주님께서 그 때 판가름 한다는 거예요.


국수 삶을 때 물은 빠지고 국수만 건지듯이 어떤 의미에서 심판 주는 몽둥이 들고 온 심판주가 아니고 국수 채를 들고 오신 심판 주라는 말이지요. 영생 얻을 자만 건지고 나머지는 완전히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구멍 숭숭 뚫린 채를 들고 있는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그 심판주가 메시아고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그 국수 채 같은 역할, ‘이런 자는 구원받는다. 또 이런 자는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간다.’ 는 그 범위를 말씀 가운데 다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도 예외가 아니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은 이미 메시아가 와 버린 환경이라는 것, 심판주가 이미 와 버려서 우리 인간이 보는 세상 말고 주님이 보시는 세상 따로 있고 관점이 달라요. 그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기도를 해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해 봐야 자기 모습만 변명할 뿐이니까 그것은 다 소용없는 것이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계시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으니까 이 말씀 통해서 마지막 심판을 미리 대비하자 그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의 본문이기도 하고요. 오늘 본문도 영생 얻을자와 지옥 불에 들어갈 자,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네요. 2절에 보면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상당히 과격하게 보이고 조폭들끼리 하는 이야기 같은 느낌, 죽여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뭔가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다정다감하게 살아가는 인간세계에서는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과한 말씀을 우리 심판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들 사회에서는 그래요.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심한 말 하지 않지 않고 부부사이에도 서로 말 조심해야 되는데 주님 쪽에서 이렇게 심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식으로도 계속 교회에 나올 거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걸려 있어요. ‘이렇게 심한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우리가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는가.’라는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거기에 반해서 영생 얻는 사람에 대해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3절에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심판 주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이 영생 얻는 사람은 용서를 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대비, 지옥 갈 사람은 얼마나 무서운지, 무거운 돌을 추처럼 사용해서 깊은 바다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한다는 무서운 운명과 예고된 미래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받는 사람은 용서라는 환경 속에 놓여서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 어디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거든요.


그렇다면 이 두 개를 합치면 이렇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 간단하게 결론이 나지요. 주님이 주시는 용서가 어느 정도로 크고 넉넉한 용서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일곱 번 죄지어놓고도 일곱 번 용서할 정도로 넉넉한 것이 주님의 용서라는 말입니다.


일곱 번은 너무 적다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490번 죄를 지어놓고 490번 용서를 구하더라도 용서를 해 줄 정도로 여러분이 속한 환경은 용서의 바다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만큼 용서의 바다에요. 우리는 그 사람을 490번 밖에 용서 안 해줬는데 주님의 용서는 숫자로 헤아릴 수도 없는 무한대의 무한대, 무한대, 계속해서 무한대로 용서해준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구원받고 영생 얻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용서 속에 있다면 용서라는 것이 어떤 경우에만 용서라는 것이 있느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용서라는 개념이 성립이 돼요. 죄 지은 줄도 모르고 또 죄지은 적도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용서하노라.’ 하면 이것은 뺨 맞습니다. 사람 인격 모독하는 거예요.


뭔가 죄 지은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그 죄지은 것을 모르면 안돼요. 첫 번째 죄를 지은 것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죄를 알아야 되고 세 번째 내가 지은 그 죄는 내 힘으로, 내 의로움과 착함을 아무리 남에게 들이붓는다 할지라도, 내가 지은 그 죄는 내 힘과 능력으로 절대 용서가 안 돼, 라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용서용서 값을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뭐냐, 죄 지은 것을 인식하고 그 인식한 것을 자기 행함과 행실로서 그 죄를 무마시키려고 하는 장소가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곳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해도 아주 극단적으로 모독합니다. 착한 내가 실수해서 죄지었기에 착한 내가 내 지은 죄를 알아서 해소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선행을 쌓아서 그 쌓은 선행으로 작은 죄를 씻어버리면 그것으로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으로 유지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그리고 목사들은 그런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지옥가려고 아예 환장을 한 집단입니다. 아예 환장을 했어요. 가관입니다, 가관! 주님은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니라.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내 힘으로 용서를 아는 것으로 내가 구원받겠다든지 내가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구원받겠다는 그 시도 그것도 잘못이거든요.


그런 것도 다 예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예수 믿는 솜씨,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솜씨, 기도하는 재능, 이런 것을 가지고 천국을 한 번 뚫어보겠다는 그런 시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이겨보겠다는 시도인데 이것은 애초부터 성사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괜히 착각한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착한 짓 덜해서 간다든지, 지옥 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신자들보다 나쁜 짓을 더 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지옥 가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 자신이 놓여 있는 그 실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실정을 심판 주 되시는 주께서 어떻게 표현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2절을 봅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바다가 나옵니다. 그 넓은 바다에 비하면 그 바다에 빠지고 있는 사람은 티끌같이 작은 존재입니다. 물론 그 목에는 무거운 돌 추가 달려 있지만. 어쨌든 바다에 비하면 목에 돌 추가 매여서 두 번 다시 솟구쳐 올라올 수 없도록 가라앉는 그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빠지는 모습은 바다의 위력에 잠식되는 모습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인간아, 너희들은 어떤 구조 안에 있느니라. 너희들은 홀로 산다고 여기지만 어떤 바다 같은 넓은 구조 안에 잠겨 있느니라. 따라서 너희는 너희보다 훨씬 넓은 그 구조를 알아야 하느니라.’ 라는 것이 심판 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암시를 주시는 겁니다.


이 구조를 모른다는 것, 사람이 구조를 모르게 되면 자기로 인하여 자기로 살 뿐이에요. 내가 어느 구조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면 그 구조는 나보다 더 크고 넓기에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구조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구조를 싫어하는 거예요.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그 죽음의 구조 안에 갇혀 있을 때 거기에 뱀이 찾아와서 ‘그 구조를 벗어버려라. 너는 자유가 있으니까 네가 알아서 네가 원하는 구조를 너의 중심으로 따로 만들면 되지 구태여 기존의 하나님이 만든 구조에 얽매일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한 거예요.


이것이 뱀의 음성이고 악마의 소리인데 이 악마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우리 속에서 퍼집니다.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샘솟듯 나오고 있어요. ‘너는 너다. 끝! 구조가 뭐가 필요한가? 너는 너인데! 왜 자꾸 네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고 말씀을 의식하고, 너는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가, 불쌍하게. 안타깝다. 참말로! 너무 죄 의식을 갖지 말고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인생을 살아봐라. 너도 포부가 있으니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봐라. 비전이 있고 꿈이 있잖아. 꿈을 한 번 이루어 봐라.’


그런 소리가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또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우리가 어느새 딸려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말 아니에요. 그냥 한 번 외도하고 싶어서, 그 아내의 잔소리라는 그 지긋지긋한 구조에서 한 번 벗어나서 회사 마치고 회식하면서 술 마신 그 얼큰하게 취한 기분에 총각 때 가보고는 발 끊었던 그 룸살롱에 가게 되면 거기 있는 여자들이 이야기하지요.


‘아저씨, 참 용기 있습니다. 이제는 그 가정이라는 그 구조에서 벗어나세요.’ ‘그렇지요. 그럼요.’ 이것은 애고 어른이고 간에 이 구조라는 것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몸부림을 치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 투쟁의 역사가 인생입니다. 이 구조가 없고 나는 나 혼자밖에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인생은 한방, 한방의 부르스다. 나는 내가 원하는 인생 내가 만들어서 살 거야.’ 하는데 거기에 무슨 용서가, 무슨 용서가 싹틉니까?


왜 내가 남에게 용서를 받아야 됩니까? 완전범죄로 살아가는데. 나는 완전범죄를 노리고 완전범죄만 추구하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에 용서라는 구조가 왜 문제됩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내 원대로 살 거야.’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용서라는 구조로부터 영원히 이별한 거예요. 하나님의 용서의 구조에서 아예 무관한 거예요.


‘하면 된다.’라는 그 조폭의 교훈, 이것이 조폭이 아니라 우리 내부가 그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은 그것을 초월했습니다. 교회라는 구조에서 벗어나기로 작심들을 했습니다. 형광등이 깜박거리든 말든 날씨가 춥든지 말든지, 얽매이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용서는? 용서는? 죄를 알아야 용서를 알지요.


죄를 모르는데 무슨 용서를 느끼고 감사를 느끼겠습니까? 죄라는 것은 말씀 구조 안에서만 들추어내야 되는데 말씀을 버렸는데 무슨 죄라는 의식이 있습니까? 잠시 실수한 것일 뿐 그것이 근본적인 죄는 아니거든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영을 가르치는 수영강사처럼. 처음에는 수영강사가 애를 붙들어서 개헤엄 치듯이, 저는 아직도 그 수준입니다만 개헤엄이 뭐냐 하면 온갖 폼을 다 하면서 수영하는 것 같지만 발은 땅에 딛고 있는 거예요.


땅을 못 벗어나요.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해요. 물에 의존하지 못하고 땅에 의존해서 하는 수영이 개헤엄이에요. 개헤엄 치는 인간보고 두 발을 떼라고 하니까 그 다음에는 강사 허리만 쥐고 계속 가는 거예요. 강사가 ‘손 놔라. 뜬다.’ 믿지를 못합니다. ‘못 믿겠습니다.’ ‘놔라. 뜬다니까. 물에 의지해서 뜬다.’ ‘저는 땅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땅에만 의지해서 살았기에 붙잡아야 됩니다.’ ‘붙잡은 것을 놔라. 뜬다.’ ‘못 믿겠습니다.’


믿음 없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믿지를 못해서 지옥 갑니다. 살아온 습관과 버릇이, 누적되고 축적된 것이 사람 의지하고 땅 의지하는 이것으로만 살아 왔고 아빠의 눈치와 엄마의 눈치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를 뜨게 할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을 몰라요. 말씀 속에서 말씀이 나를 뜨게 한다는 것,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 간음을 하고 간통을 해도 그 여인은 천국 가는 여인이었다는 사실, 천국이 물 같은 기능을 해서 우리를 받쳐준다는 사실을 땅에 살던 사람이 알 수가 있습니까?


땅만 바라보고 살던 사람이. 땅에서는 믿을 놈이 자기밖에 없다는 거예요. 믿을 놈이 자기밖에 없어서 자기만 믿고 살아야 돼요. 자기실력 믿어야 되고 자기 손재주 믿어야 되고 자기가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그런 것을 믿고 살아가는데 이것저것 다 놓으라고 하니까 그것들을 다 놓으면 놓는 대로 백번이면 백번 다 가라앉습니다.


‘가라앉지?’ ‘가라앉습니다.’ ‘어디까지 가라앉는데?’ ‘죽는 자리까지 가라앉습니다.’ ‘그래, 그 죽는 자리가 네가 뜰 수 있는 자리야. 네가 지금 안 죽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야.’ 진작 죽어야 된다는 그 죽는 자리로 말씀에 의해서 가게 되면 너를 죽이는 그 말씀이 너를 뜨게 한다니까요. 영생을 준다고요, 영생을! 비로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자리라니까요.


행하지 마세요. 행해버리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이 수영강사가 되어버립니다. 행하는 그것이 여러분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살아왔던 습관이고 버릇이고 올무입니다. 여러분을 지옥 보내는 하나의 무거운 추 같은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다이야기를 끄집어내시고 바다에 빠진 인간이 돌을 목에 매고 가라앉는 장면을 언급하시면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우리를 영원히 죽게 만들고 바다같이 우리를 가라앉게 만드는 죄의 사슬들이 목에 감겨있고 우리 발목에 감겨 있다는 사실을, 그 현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 때문에 뜨지도 못하고 맨 날 죄 속에서 허덕이는 이 모습은 장차 그것과는 정 반대로 오직 말씀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있는 그 구조 속에 새로운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아먹지를 못해요.


예수님께서 말해줘도 그들 눈에 안보이니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거부를 한다니까요. 지금 이 내 몸이 전부인데 무슨 다른 소리를 하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아담에게도 그랬고 하와에게도 그랬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도 ‘지금 내 몸밖에 없는데 어디서 무슨 음성이 들린다는 말인가?’ 그랬습니까?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로 두르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길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은 아담이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었다 해도 자기가 만든 환경은 자기가 생각한 환경이 아니고 하나님이 조성한 환경이에요.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메시아가 개입된 환경입니다.


메시아는 심판주고 심판주가 하는 이야기를 다 벗겨버리면 우리는 지금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무슨 개 같은 소리? 결국 그런 소리는 치워버리는 겁니다. ‘죽음을 보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것이 이상한 망발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 모든 말씀은 ‘현재 너는 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구조 속에, 바다에 빠졌는데 목에는 무거운 추가 달려 있어서 그 죄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땅의 사람으로서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알지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알지도 못하는데 주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통해서 죄지은 사람의 운명이 이러하다는 것을 바다에 잠식되는 사람의 모양으로서 알려주는 식으로 파헤치는 겁니다.


주님의 방식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시약 같은 것입니다. 시약이라는 것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산성에 들어가면 빨갛게 물드는 것 같은 것입니다. 여기 일단 가상적인 화학구조를 생각해 놓습니다. 만약에 이 외부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어떤 화학적인 구조에 이 시약이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면 이 시약을 지금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에 집어넣었을 때 똑같은 화학적 반응을 보인다면 그 대상의 화학구조는 같은 것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겁니다.


정량분석, 정성분석 할 때 이런 방법을 씁니다. 요오드 용액 같은 것을 시약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동굴이 있는데 안에서 뭔가가 바스락거린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이 쥐인지 개인지 모를 때는 개가 좋아하는 음식을 넣어보고 음식이 없어지면 개가 들어 있고 쥐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넣었는데 없어지면 쥐가 들어 있는 거예요.


물론 막걸리는 넣었더니 없어지면 술 좋아하는 남편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동굴 속에 뭔가 집어넣으면 그 집어넣는 미끼와 결부된 새로운 구조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바다에 무거운 돌멩이를 목에 매고 빠지는 것이 있다면 그 지옥 가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지옥 가는가?

하나님께서 용서받은 사람의 그 용서를 모독했기 때문에 그렇게 바다에 빠지듯이 지옥 간다면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가는가, 바다같이 넓은 용서 속에 유영하고 헤엄치는 사람이다, 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용서에서 헤엄치려면 죄를 알아야 되고 자기가 지은 죄보다 용서가 바다같이 넓기 때문에 어떤 죄도 용서가 되는 그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영생 얻고 천국 가는 사람인데, 여기서 죄를 알려면 말씀이 동원되어야 됩니다.


그 말씀 은, 인간들이 창안한 말씀은 소용없어요, 인간들의 윤리 도덕은 소용없어요. 자기가 피고이고 죄인이고 죄가 들어 있어서 죄를 지어야 되고 죄를 지었기에 벌 받아야 되는 인간이 자기가 조작해 내고 만들어낸 윤리와 도덕이 무슨 그것이 윤리와 도덕이겠습니까? 그것은 장난치는 거지요. 시험 빵점짜리 컨닝 해봐야 같이 빵점 되지요. 지옥 간 공자 공부해 봐야 자기도 지옥가고 지옥 간 소크라테스 공부 백날 해도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간 목사 이야기 들어봐야 전부 다 지옥 간다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십자가 진적이 없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인간이 자기가 출제하는 시험문제는 전부 다 하늘나라에 안 통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자기 죄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왜냐, 자기가 죄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좁은 소견 안에서 통용되는 죄이지 막상 예수님과 비교하고 성경말씀과 비교하라고 하면 ‘못 지킵니다. 내가 그것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한다면 포기하겠습니다.’ 할 말씀이 수두룩합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리라.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그 말씀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사랑이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미쳤습니까? 자기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면 왜 사는데요. 장사하는 사람이 ‘남는 것 없습니다. 난 유익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슨 장사가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죄가 펄펄 피어나는 공장기계 돌아가는 소리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를 짓고 있는 중심체가 되는 거예요.


발포산 약을 물에 넣어보세요. 보글보글 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자기 사는 자리에서 매일같이 죄의 거품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체가 액체가 되는 겁니다. 연세가 좀 들면 알지요. 한때 천하를 호령하면서 ‘세상은 넓고 할 일 많다. 한국 땅 좁다. 세계로 나가자.’ 하면서 까불던 사람들, 나중에는 길섶에 있는 들풀에게 그리고 길가에 나뒹구는 소박한 것들에게 말을 걸지요.


‘시들어가는 들풀 네 모습이나 지금 내 처지나……,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던고, 왜 살았던가.’ 이렇게 사람들이 발길에 차이는 낙엽과도 같은, 아무런 삶의 가치를 모르는, 그래서 결국 쓰레기로 퍼 내버릴 수밖에 없는 그것이 인간인데 무슨 천하를 호령하겠다고 청와대 왔다 갔다 하고 보좌관한다고 하고, 그런 것이 돌아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페라 한다고 하는데 그거 한다고 목이나 다 쉬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말이지요.


결국 구조 속에서 사그라질 뿐인데. 결국 인간이 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 하나한테 죄지은 것도 차라리 네가 알아서 자결하라 그 말이에요. 목에다 맷돌 칭칭 감아서 바다에 잠수해라, 차라리 그것이 훨씬 낫다 그 말이지요. 작은 어린애한테 죄지은 것도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서 못 헤어나올 그런 죄라면 모든 사람을 향해서 무작위 적으로 죄 짓고 있는 우리는……?


나의 결점이 남에게 피해가 된다는 이 구조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합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죄인데. 바깥에 나가서 일하다가 짜증나면 안에 있는 아내에게 화를 퍽퍽 내지요. ‘미안하다. 바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가 스트레스 좀 풀었다.’ 미안하다는 그것으로서 자기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미안하다는 소리를 함으로서 나는 반성한다는 자기 의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하겠습니까? 자기밖에 모르는데. 그래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죄가 뭐냐, 인간이 뭔가 기대한다는 거예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걸 기대한다는 자체가 고집이고 집착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이것을 하리라, 이대로 되어야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은 구조가 없는 세계에요. 주님의 구조를 아예 깡그리 무시하고 내 중심으로 뭔가 나의 나 답다는 것, 내가 이 만큼 가치 있다는 것을 오늘도 발휘하는 하루가 되고 그것이 매일같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시도에요.


그런데 목표 없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눈만 뜨면 기대하게 되어 있는데. 심지어 솥에 밥을 해도 ‘밥 잘 해야 될 텐데. 물 적게 부어서 지난번까지 설면 안 되는데.’ 하는 이런 생각을 다들 한다 그 말이죠.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것인데? 목사님 기도에서 나온 것처럼 그것도 반발할 것인데? 기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가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뜻이에요.


안됩니다. 안 돼! 요새 개그에 나온 것처럼 안 돼!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이 출발부터 용서가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일곱 번 용서해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우리는 숫자 세야 됩니다. ‘여섯 번, 한 번 더 하면 일곱 번이다. 다음부터는 국물도 없다.’ 이렇게 베드로가 질문 했었어요. 베드로는 일곱 번이 다 인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일흔 번의 번의 일곱 번이라고 해서 490번으로 늘어버렸습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그러면 베드로는 계산합니다. ‘489번, 이제 두 번만 더하면 된다.’ 이렇게 계산하면 되겠습니까? 안 돼! 아마 그것 끝냈다면 일흔 번의 일흔 번의 일곱 번이 나올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여기서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할 때 산다는 것은 떡과 연계되어 있는 ‘산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다’입니다. 떡 먹으려면 돈 있어야 되고 돈이 있으려면 돈 벌어야 되고 그래서 산다는 이 ‘산다’는 것은 네가 알고 나도 알고 천하가 다 아는 이 ‘산다’입니다.


이 ‘산다’가 안되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익히 알고 있어요. 그러나 떡으로 살아도 지옥가서 산다면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살아도 불쌍한 삶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 하시는 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일의 개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는 내가 준 말이 너희에게는 안 되게 되어 있어. 하지만 이 말씀을 내뱉은 나는 안 되는 것을 필히 되게 하겠다.’는 말씀의 개시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 말씀부터 시작해서 십자에 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만 보지 말고 십자가가 오기 전에 누가복음 17장에서 어떤 말씀을 했기에 십자가에서 피로 다 이루었다, 가 되는 것인가? 그것을 연계시켜서 봐야 돼요.


이 말씀 지켰다고 십자가 버리면 안 되고 십자가와 이 말씀이 연계가 안 되면 안돼요.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 돼, 안 돼, 안 돼, 십자가로 돼! 왜, 내가 네 속에서 되게’ 하거든요. 용서라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다녀가야 됩니다. 다녀가시는 사람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게 뭐냐, 내가 너를 용서하셨다는 흔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다녀가셨을 때는 무화과 나뭇잎을 벗기고 입힌 그 가죽옷이 흔적인 것처럼 ‘아, 하나님 다녀가셨구나. 주님 다녀가셨구나.’ 매일같이 하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녀가셨던 흔적은 이삭을 바쳤는데 다시 살아난 그 이삭의 존재가 주께서 다녀가셨다는 증거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그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다녀가셨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우리 속에 있을 때 ‘내가 그리스도께서 다녀간 흔적을 가졌으니 나를 손대지 마라. 날 건드리지 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 어린아이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용서의 바다 속에 있는 성도를 이야기합니다. 용서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을 ‘죄 있니 없니, 시비 거는 놈은 차라리 목에 추를 걸고 바다 속에 빠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할 정도로 용서의 바다는 너희가 상상도 못할 만큼 엄청난 자비심과 용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바다 비유로소 우리에게 지금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심판주로 행세하고 일하시는 거예요. 신명기 8장에 가면 하나님이 일부러 그들을 광야로 가게 해버립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애굽에서 살았던 그 행세와 버릇이 계속 남아 있어요. 사람들의 버릇이 어디서 생기는가? 반복에서 생기지요. 자꾸 같은 것을 되풀이하면 마치 그 말씀을 성취한 것 같이 오해를 해요.


한국방송에서 하는 티벳 불교의 환생이라는 대목을 봤어요. 달마의 법이라는 제목인데 불교에서 어떻게 자비를 하는가, 어릴 때부터 나는 자비롭다, 나는 자비롭다, 그것을 되풀이하는 거예요. 50만 번을 되풀이 합니다. 아무것도 안 남고 반복만 남아 있을 겁니다. 방언이요? 되풀이하면 돼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랄랄라라.’ 방언, 됩니다.


기도 오래하기요? 처음에 누가 기도하라고 하면 10초도 못 넘겨요. 새벽기도회 같은데 가서 억지로 앉아서 해 보세요. 말이 말을 생산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 계속 나와요. 시계 보면 두 시간 지났습니다. 우리 교회는 반대가 되어서 처음에 기도할 때는 5분씩 하더니 그 다음에 기도 시키면 10초 만에 끝내지요.


모든 종교적인 행동은 반복학습의 산물이에요.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겁니다. 교회도 나가버릇 하면 교회 나가게 되고. 특히, 여기 줄 그어놔야 돼요, 십일조도 자꾸 하다 보면 십일조가 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잘 안되지만 하다보면 그것도 되게 되어 있고. 십일조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저주와 복이 갈라진다고 가르치니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속으로 박수를 보내지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헛방입니다. 헛방! 가면에, 가면에, 가면을 쓰고 또 쓰고. 그 모든 것은 ‘네가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은 다 헛방이다.’라고 작은 바늘로 한번만 쑤시면 왈칵 용서가 안돼요. 왜 용서가 안 되는가. 애초부터 용서의 바다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계속 땅 짚고사니 용서가 될 리가 있습니까?


내가 과거에 이만큼 했는데, 이렇게 했는데. 기존 교회의 장로님들 기도하는 것을 보면 멘트가 이런 것이 나와요. ‘우리 고 김시복 장로님께서 기도 가운데 이 터를 주셔서 50년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이렇게 부흥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은 완전히 개헤엄입니다. 뜨지를 못해요. 떡으로 살고 돈으로 사는 그 행세, 애굽의 버릇과 행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자기 목에 맷돌이 수백 개가 달려 있는데.


어디로 갑니까? 뜨지를 못하는데, 자기 행위를 자기가 부정을 못하는데, 자기 과거 역사를 부정 못하는데. 어디로 갑니까? 지옥 가야지요. 목사가 퇴직하면서 ‘내가 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돈을 탐하지 아니하고, 성경말씀은 알아가지고, 돈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러분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이 교회를 대구의 큰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돈 좀 내라 그 말이지요) 이제 내가 나가더라도 뒤에 오는 목사는 나의 공로를 잊지 말고 …….’ 이런 식으로 나오거든요.


차마 본인 입으로 못할 때는 옆에 있는 메니저들이 대신 낭독해 주곤 해요. 이게 간음한 여인이 용서받은 모습입니까? 이게 세리와 창녀가 하는 기도입니까? 천국 간 강도가 하는 기도가 이런 기도입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도대체 뭘 보고 싶은 거예요? 뭘 보려고 교회 왔습니까? 떠야 됩니다. 물에서 떠야 돼요.


자전거탈 때 만날 뒤에서 붙들어주면 안돼요. 뒤에서 손 놔버려야 돼요. 구원은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구원하지 교회가 혹은 목사가 구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여러분을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용서의 바다에서 헤엄쳐야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말은 돈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지금까지 안다는 것이 돈 없으면 죽고 돈 있으면 산다, 거기에 결부되어 있는 산다는 것,내가 살았다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지요. 글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십자가는 죽었다가 살아났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가 나흘 만에 살아난 것 하고 달라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나서 돌문 열리고 걸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 오빠는 살아났어도 맨 똑같이 사는 거예요. 전에 땅 딛고 사는 것과 똑같이 살았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 까지는 이 땅에서 살았지만 죽고 부활했을 때는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신분으로 산 것이 아니에요. 지난 수요일에 했잖아요. ‘만지지 말라.’고 했다고. ‘만지지 말라. 나는 네 몸과 다른 몸이다. 만지지 말라. 살아난 것은 맞지만 너와 같은 그런 몸이 아니다. 영광의 몸이다.’ 라는 말이지요.


그 영광의 몸이 이제 우리 몸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만지세요. 어차피 죽을 몸이니 만지세요. 하지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이 죽을 몸인 것을 확인하고 이 죽을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부활의 몸체로 바꾸는 십자가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모독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행위, 우리의 행위로 모독하지 마세요. 그것 건드리면 지옥에서 완전히 떠오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줘라. 이미 너의 신분은 인간적인,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거기서 벗어났느니라. 거기서 이미 관계가 끊어졌느니라. 이미 용서, 동서남북아래위, 전체가 용서인 바닷물 에서 너는 마음껏 유영하고 있느니라.’ 새로운 공간, 새로운 구조, 이것을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 옛날의 나는 죽었고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풍선 같은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용서로 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산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십자가 지신 것은 사실은 죽었지만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다른 식으로 영생 얻는 것을 위해서 오셨는데 이 메시아 환경을 우리가 매일같이 무시하고, 무시하고 또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목적과 모든 기도하는 것이 나의 애굽적인 습관이 나를 사로잡는 순간에도 주께서 주시는 이 용서라는 구조가 오히려 저희들을 사로잡아서 먹든지 마시든지 ‘나 용서 받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