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을 향하여
2024년 9월 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9-20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휘장이 있는 환경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환경입니다. 여기에 비해 인간의 환경에서는 휘장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환경은 휘장없고 대신 시간과 공간이 있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든든히 의지하고 삽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1:10-1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멸망하기 위해서 창조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인간도 포함됩니다. 즉 ‘있음’은 곧 ‘없음’으로 바뀝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없음’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자연의 변화와 인간 세계의 원천은 성막의 등장으로 그 내막이 밝혀집니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 뵙고 지상에 세워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한 지형에 있지 않고 높은 시내산 꼭대기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성막의 등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수평적 지형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로서 차이나는 두 공간이 이스라엘 내부에 생겼습니다.
기존의 공간이 있음이 없음으로 변해야 하는 인간 공간이라면 새로 등장된 공간인 성막은 없음에서 잠시 있다가 도로 없어질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 공간은 실은 하나님 스스로 망가지게 하는 장치입니다. 즉 성막이 속한 대자연과 더불어 성막도 같이 망가지는 겁니다. 이를 통해 ‘없음’에 근거를 둔 세계만이 영원히 있음의 세계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성악 안에 있는 휘장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휘장으로 인해 성막 안의 공간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뉘어집니다. 휘장이 나올 때까지의 공간은 거룩한 공간이지만 기존의 자연의 시간과 공간과 겸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휘장 뒤의 공간은 휘장이 찢어지므로서 진가가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즉 휘장을 찢어지지 않을 경우만 휘장 뒤의 공간인 지성소는 성소와 관련성을 맺으면 성립하는 공간이지만 휘장이 찢어지면 휘장 뒤의 공간인 지성소의 시간성과 공간성도 같이 날아가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멸망해야 될 이 지상의 용도가 휘장 찢어짐으로서 다 활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공간과 그 외의 공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일체 인간은 이 성막 안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성막 밖의 존재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비거룩한 존재로 단언하십니다. 성막 밖의 존재가 성막과 관련성을 맺으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짐승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비록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고 더러운 존재이지만 짐승은 흠없는 짐승이어야 합니다. 즉 깨끗함이 더러움을 대체되는 겁니다. 성막 밖의 인간이 더러운 이유는, 그들은 이미 ‘있음’을 근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곧 ‘멸망되기 위한 있음’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들은 온통 ‘자기 있음’을 계속 ‘있음’으로 지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은 ‘자기 구원’에 필요한 내용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천국가기 위한 아이디어나 지식 확보용으로 성경을 거론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독한 자기 설득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위해 조성한 환경 속에다 성경 지식을 쏟아붓는 식입니다.
즉 본인이 영화감독이 되어 하루하루 삶을 엮어 대단한 영화를 하나 제작하려는 겁니다. 이때 인간들은 자문위원으로 하나님을 위촉합니다. 본인을 빛내기 위한 영화에 차질이 없도록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성막의 존재와 상관없는‘소용없는 세상’공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왜 자꾸 믿고자 하는 걸까요? 그것은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바른 결정을 하게 되면 자아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도리어 빛이 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날이갈수록 자아가 더욱 긍정하게 되고 지키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성막 밖의 일상적 의미세계입니다.
참으로 소용있고 의미있는 공간은 인간을 대체하는 짐승이 피와 기름을 내놓고 나머지는 쓰레기 장으로 처리된 채 통과하는 공간입니다. 짐승 제물의 내장 및 부위들은 가차없이 성막 밖 쓰레기장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 쓰레기 장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성막 속으로 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방은 성소입니다.
이 성도 안에서는 움직이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실은 제사장은 ‘피의 운반체’일 뿐입니다. 이 피는 일단 휘장 앞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로서 성막 입구에서 휘장까지의 공간은 바깥에 작용하는 시간과 공간의 적용을 같이 받게 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육신이 기존의 인간 세계의 공간과 시간을 같이 느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휘장 앞까지 당도한 피는 곧 성막밖의 세상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들 피는 이미 자신의 육신이 이미 제단 위에서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입각한 피이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자에게만 막혀 있는 휘장이 보이는 겁니다. 성막 밖의 세상은 휘장의 중요성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생각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저 성경 내용을 믿고 있으면 자신들은 언젠가 구원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입니다. 자살이라는 것도 결국 자신을 놓지 못해서 생기는 결말입니다. 즉 ‘믿어서 지옥’가는 겁니다. ‘믿어서 자살’하는 겁니다. 휘장 앞까지 온 피들은 대기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나 성도들은 모두 이런 자들입니다. 자신이 이미 죽은 자에 해당됨을 아는 자인 동시에 그들에게는 휘장이 막혀 있음은 인식합니다. 즉 자신이 죽은 자되었음을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51에서 드디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맞추어 휘장이 찢어집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이로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의 능력이 휘장 앞에 대기된 자들에게 쏟아지면서 그들은 구원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도 없습니다. 그들이 바로 멜기세덱의 가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있음에 몰두하지 말고 예수님의 일하심에 몰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강-히브리서 6장 19-20절(휘장을 향하여)24090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9-20절입니다.
히브리서 6: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여기 본문에 두 가지 어려운 단어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휘장 가운데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 것, 그게 하나 어렵고요, 또 하나 어려운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멜기세덱의 반차’ 멜기세덱이라는 또 어려운 단어로 두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가 없다고 치고,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서 이 휘장과 관련해서 다른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다든지 대화를 하십니까? 멜기세덱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십니까?
안 하죠. 오늘 이 성경에 휘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런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의 재림이 안 올 수도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안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 그다음부터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뭐 얼른 답변이 안 나오죠?
오든 말든, 주님이 오든 말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살면 되지, 주님 오시는 거 뭐 언제 우리가 신경이나 썼습니까? ‘주님이 오시든 안 오시든 나는 내 삶을 꾸준히 이대로 살면 되잖아.’라는 그런 자세로서 사람들은 살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 예수님의 재림이 안 올 수도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을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만약에 휘장에 안 들어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에요. 주님이 휘장에 들어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게 되겠죠.
지금 이 질문을 왜 하느냐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궁금한 게 있어요. 우리가 죽을 때는 우리의 육신과 혼이 나눠져서 죽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산다면 그 육과 혼은 다시 결합이 될 텐데 결합이 되고 난 뒤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될까, 혹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이런 대목이 나오거든요.
그러면 우린 이 대목을 보면서 ‘대체 영은 뭐고, 혼은 뭐고, 몸은 뭐며,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온전히 유지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천국 들어갈 수 있느냐?’ 이런 이야기라든지 또는 ‘거지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면 지옥에 안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지옥에 안 가고 죽어서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할 때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간단해요. “그래서, 천국 가서 뭐 할 건데?” 거기에 뭐 뚜렷한 답변이 없어요. “열심히 성경 공부해야지.” “그래서?” “성경 진리 알아야지.” “그래서?” “그래서 구원받아야지.” “구원받아서 뭐 할 건데?” 구원받아서 뭐 할 건데요?
지금 예수님께서 휘장에 들어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요, 아무도 들어가질 못한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뭐 잘한 게 있다고 구원을 받아요. 주님께서 휘장에 들어갔다는 말은, 인간이 성경을 봐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해서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에요. 인간은 자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처지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휘장 속에 들어갔다는 말은 마치 렌즈 안에 들어갔다는 말과 똑같거든요. 사진은 찍을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그 렌즈 안에, 조리개 안에 기어들어 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그냥 찍히기만 하죠. 찍히기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식이 있어.” “뭐 오시겠지.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수님 할 일 하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잖아.”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여기 예수님의 재림이나 예수님의 십자가나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휘장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휘장이 들어있는 성막 안의 그 경로, 모든 세상의 스케줄이 그 안에 함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휘장 속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다음부터는 이 성막이 자체적으로 붕괴해버렸어요. 이 성막이라는 게 뭐냐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멸하고 스스로 망가지도록 만든 장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체붕괴할 수 있도록 망가진 거예요. 왜 하나님이 스스로 이 땅에서 망가지느냐? 망가짐으로써 애당초 인간은 천국을 갈 수 있는 어떤 경로도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 쪽에서 분명히 통보하기 위해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천국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나 권한이 못 된다는 겁니다.
그 점은 히브리서 1장에서 제가 이미 언급을 했지만 벌써 히브리서 1장을 한 그 세월이 얼마나 먼 세월입니까? 벌써 잊어버렸죠. 1장 10절과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땅을 만드시고 천지창조를 했어요.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그런데 만든 그 이유가 뭐냐? 그건 다 멸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낡아지고 결국 멸망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하신 겁니다. 좀 하나님의 취지를 알아먹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개나 고양이나 쥐나 이 세상의 뭐든, 해바라기나 코스모스를 만든 이유는 바다의 고기와 하늘에 있는 독수리부터 해서 해와 달을, 이 세상을 만든 이유는 폭삭 망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쉽게 이야기해도 인간은 못 알아들어요. 인간은 알아먹지를 못한다니까요?
이 세상은 망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겁니다.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망하게 만든 거 그냥 망해버려야죠. 거기서 구원 이야기가 왜 나오죠? 주님께서 홀로 휘장 속으로 넘어가 버린 것은 이 땅에 인간 세계가 일말의 어떤 가능성조차 없는 환경이라는 겁니다. 어떤 가능성도 없는 환경. 제가 환경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 사나 죽으나 맨 마찬가지의 환경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속 시원한 환경이에요. 왜? 모든 이에게 다 공평한 환경이니까. 이 세상은 좌충우돌해 봤자 소용없는 환경이에요. 열심히 믿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 이 세상은 열심히 믿는 자로 하여금 결국엔 자포자기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에요. 그런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둘둘 감고 무너진 환경에서 인간이 “믿습니다!” 하는 그 의도가 뭐예요? 하나님은 같이 무너졌는데, 히브리서 1장 11절에 보면 세상이 낡아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이 세상은 낡아진다’ 낡은 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같이 무너져버렸는데 그 집에 살면서 자기는 살 궁리를 한다? 이건 뭐 예수님 의견하고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요. 주님은 무너졌는데 본인은 무너질 생각을 안 해요.
인간은 천국 갈 생각, 자꾸 죽고 난 뒤에 지금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세울 것이 없어서 기껏 ‘나는 성경 말씀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꾸 “믿습니다”를 내세우는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독한 자기 설득이거든요. 이 지독한 자기 설득이 결국은 자살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끝까지 자기를 못 놓아주기에 생기는 현상이에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제일 좋습니다. ‘믿음으로 지옥 간다.’ ‘믿음으로 자살한다.’
자기를 안 믿으면 되는데 끝까지 자기 자신을 믿고 싶어해요. 안 망하려고 하고. 이게 뭐냐면, 인간 자기가 조성한 환경이에요. 인간이 조성한 환경은 자기가 손 쓸 수 있는 환경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하면, ‘내가 잘못하면 나한테 손해 보는 환경’이라는 것을 인간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조성한 환경은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도 망하도록 되어 있는 환경’이에요. 이게 다르죠?
‘아, 내가 지난번에 실수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텐데.’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로 만든 환경이에요. 인간이 이미 자기를 살리는 환경을 자기가 조성해 놓았기 때문에 거기다가 뭘 집어넣느냐면, 내가 살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성경의 모든 문자, 모든 내용을, 성경을 다 집어넣는 거예요. 다 집어넣어요.
성경에 보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하니까 그냥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믿음에 실패하면 나는 망한다. 그러니 조심해서 계속해서 끈끈하게 믿음을 이어가자. 내가 내 믿음에 손을 쓰자. 그러면 나 안 망할 수도 있겠어.’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님은 ‘너희들이 사는 세계에 와서 너희들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나는 망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인간들은 어쨌든 간에 내가 안 망하는 식으로 생각이, 아이디어가 자꾸 그쪽으로 가는 거예요.
쉽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한평생은 자기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이에요. 본인이 영화감독입니다. 자문 위원으로 누굴 위촉했느냐면, 하나님을 위촉했어요. 자기가 영화감독이에요. 자기가 다 찍어요. 슛! 컷! 자기가 다해요. 본인이 본인 인생의 주인공이면서 하나님을 자문 위원으로 위촉시켜 놓고 급할 때 물어보면서 내 인생, 내 영화 내가 찍는 거예요. 그래놓고 “믿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휘장 속으로 쏙, 들어갔는데요? 휘장 속으로. ‘우리도 들어가면 되지?’ 휘장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그 휘장이 없어졌어요. 어디로 들어갈건데요? 없는데? 주님 본인이 들어가고 난 뒤에 성막은 날아가고 없어요. 마지막 휘장 찢어지면 성막 자체가 무의미하게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믿을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님 이용할 생각하지 마시고 질문을 이렇게 하면 돼요.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질문을 이렇게 하면 돼요. “제가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마시고.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합니다. ‘성경은 바로 내게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요 5:39) 너희를 살리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인간들 보기에 어떻게 비춰지느냐 하면, 분명히 오셨는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분명히 한때 있었어요. 십자가 죽음을 마지막으로 없어졌어요. 무덤에 시체도 없고.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 쪽에서 답변하기를 “내가 있다가도 없어졌다.” 그렇게 답변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잠시 있었는데 너희들 앞에서 없어졌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이유가, 너도 바로 그 관점에서 너 자신을 한 번 보란 말이죠. ‘네가 있음 쪽이냐, 없음 쪽이냐’를 보라는 겁니다. 인간은 본인이 있다고 여겨요. ‘있는 것은, 나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하죠. 만일 집에 강아지가 있다. 그러면 ‘강아지가 있고 고양이는 없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모든 있는 것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게 무너지는 용도에요.
커튼이 있는데 커튼이 잠시 있다가 끊어지니까 중력에 의해서 쭉 내려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커튼만 바라보면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있음의 세계, 천지창조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 그동안 인간들이 쳐다본 게 뭐냐? 나처럼 있는 있음 세계만 쳐다보고 살아온 겁니다. 그 있음 세계에 뭐가 묻어 있느냐면 시간과 공간이 거기에 칡넝쿨처럼 얽혀 있던 거예요, 시간과 공간.
여러분들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어디서 나옵니까? 시간과 공간이 여러분의 인생을 둘둘 칡넝쿨처럼 휙휙 감아서 생긴 거예요. 시간과 공간. 내가 있으니까 나는 시간 따라 살고,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는 어디에 있다.’가 성립되고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는 지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고, 이게 시간이잖아요. 내가 있으면 공간이고. 이게 다 어디서 왔는가?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니까 시간과 공간이 같이 깃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할 때 나를 없앤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 버리면 우리는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이 된다면 뭐도 없느냐 하면, 죽는 것도 없어요. 없는 데 무슨 죽음이 있어요, 없는데? 이 모든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없잖아.’가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왔다가 없어졌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없어진 게 아니고 휘장 속으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휘장 속으로. 그러면 뭐만 있느냐 하면, 휘장만 있는 거예요, 휘장. 이 세상은 커튼이라는 그 가상 세계만 있었던 거예요. 그걸 확 제껴버린 거예요. 제껴 보니까 휘장 뒤에 진짜 영원히 있는 세계가 거기 있었던 겁니다. 멜기세덱은 거기 살고 있고요. 그리고 멜기세덱의 반열, 족보는, 그 영원한 세계에서 살 족보는 ‘이 땅의 누구지?’라고 해서 멜기세덱의 족보가 이 땅으로 뻗어 나온 거예요.
휘장을 경계로 해서 거꾸로 뻗어나온 거죠. 여러분,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고요,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고 우리가 미쳐서 그래요. 우리가 정신을 엉뚱한 데 팔아서, 지금 이런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없다면 죽는 것도 없어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분의 죽음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고 나머지는 죽는 것도 없어요. 그냥 없어지는 것이지 뭐 죽음이겠어요.
오늘 이 본문을 위해서 휘장 중심으로 한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휘장 중심은 성막 안에 있습니다. 성막은 네 개의 공간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네 개의 반영이냐면, 성막이 통째로 있잖아요. 성막 안은 바깥 공간과 구분되어 있죠? 벌써 공간이 두 개죠. 성막 안의 세계와 성막 바깥의 세계, 두 개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서 성막을 만듦으로써 지상에 서로 구별되는 공간이 두 개가 생겼어요. 그 성막 안을 거룩한 공간이라고 해서 모세가 갔던 시내산 꼭대기, 하나님과 만났던 그 수직적 공간이 인간들이 사는 이스라엘이 사는 평면적 공간 안에 납작하게 합체가 되면서 구별되게 차이 나는 공간에 영역을 하나 확보한 거예요. 수직적으로 거룩과 세속이 나누어지던 그 공간이 지상에 내려와서 지상 평면을 통해서 거룩한 공간 따로, 그 바깥 공간 따로, 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막 바깥의 공간은 뭐냐?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왜? 뭘 해도 거룩이 아니니까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아줌마들 전화하고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우리 애가 이번에 시험 쳐서 서울대에 들어갔다.” 혹은 “우리 큰 애는 로스쿨 끝나고 시험 쳐서 변호사 됐어.” “좋겠다. 우리 큰 딸은 이번에 의사하고 결혼해서 혼수 얼마 하지도 않고 남자 쪽에서 다 해서 잘살고 있어.” 그래서? 그래서 뭐요? 그 공간이 어떤 공간입니까? 그래서. “우리 손주가 이번에 산수를 백 점을 맞았대.” “그래서?” “천재인 것 같아.” 천재,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그래서? 거룩합니까?
결국은 똑같아요. 늙어 죽었다고 하는 것, 그것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늙어 죽었다는 거예요. 현철이도 죽었는데 자기가 안 죽을 수가 있어요? 앉으나 사나 당신 생각하다가 죽었잖아요, 그 현철도. 그러니까 이 세상의 공간은 소용없는 공간이에요. 이기고 지고, 누가 대통령 되고, 뭐 소용이 없어요. 하마스가 이기냐, 이스라엘이 이기냐,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집중하는 것은 다른 공간, 소용없는 공간 말고 소용 있는 공간, 의로운 공간, 그게 성막 안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성막 안의 공간이 이게 두 개예요, 또. 두 개인데 커튼처럼 늘어져 있는, 휘장이죠, 동쪽 입구를 통해 들어가는 곳을 성소라고 하고 커튼 뒤에 나오는 그 공간을 지성소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극한 성소죠, 지성소. 들어가면 커튼 이쪽은 성소에요. 성소인데 그 두 공간의 차이는 뭐냐? 그 공간의 차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비로소 확연해 집니다.
성소 안에 들어갈 때 제물이 피로 변해서 들어가요. 성막 바깥에 어떤 장치가 있냐면, 멀쩡하게 산 채로 있는 제물을 죽여버리는 장치, 제단이 있어요. 그 제단에서 제물을 죽입니다. 완전 토막 살인 사건이 따로 없어요. 그냥 토막 내 버려요. 토막 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빼놓고 나머지는 버리는데 그 버리는 것은 진 바깥, 인간이 사는 공간, 진 바깥에 버립니다. 그게 쓰레기장이에요. 그 쓰레기장을 신약의 용어로 지옥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옥!
지옥은 쓰레기들만 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안 받겠다고 확정 내린 것만 지옥에 가요. 성막에는 인간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일체 못 들어가요. 거룩한 곳에 인간은 못 들어갑니다. 왜? 인간 자체가 쓰레기이기 때문에 그래요. “쓰레기지만 나 받아주세요.” 할 때는 교체가 일어나야 돼요.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쓰레기 같은 짐승 말고 깨끗한 짐승으로 갈아타기를 하는 겁니다.
깨끗한 짐승으로 나 대신 드디어 성막 바깥과 안쪽의 경계선을 감히 겁도 없이 들어가게 돼요. 짐승은 “메에~ 메에~” 하며 뭣도 모르고 들어가죠. 죽으러 가는 거예요, 성막 안으로. 죽으러 가면 제사장이 “빨리 와. 빨리 와!” 논산 훈련소 조교들이 밖에서 얼쩡대는 애들한테 빨리 들어오라고, “빨리 와. 죽여줄 게 빨리 와. 너 안 죽으면 바깥에 쓰레기로 저주받는다? 빨리 와.” 양을 제단에서 잡아서 ‘이건 쓰레기’라고 바깥에 도로 던져버리고 안의 기름과 피는 짜내요. 이건 하나님이 받는 거예요. “내가 너 죽였다. 나 너 죽였어. 너 분명히 죽은 거야?” 그걸 확정한 것, 죽었다는 증표, 피와 기름을 내는 거예요.
로마서 6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도대체 성경을 누가 쉽다고 해요? 로마서 6장 10절 보세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게 되게 되면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인간이 죽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는 순간 인간 세계 전체가 죄로 인하여 이미 죽었음, 이 확정된 사실, 예수님이 하나의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 짐승으로 다뤄져서 죽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은 나쁜 짓 해서 죽은 게 아니고 그냥 죽었어요, 그냥. 그냥 죽었다니까요? “혼과 영과 몸이 어떻게 삽니까?” 어떻게 결합 되어서 구원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몸과 영과 혼을 합쳐버리면 그게 자아가 돼요. 주님께서는 몸 따로 영 따로 혼 따로 다루는 게 아니고 그 전체를 결합시켜 자아로 다뤄서 그 자아가 이미 죽은 몸이고 죽은 혼이고 죽은 영이라는 겁니다. 이미 자아가 죽었다는 거예요, 자아가.
죽은 인간이 구원을 언급하니까 이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말도 안 되는 거죠. ‘나 죽었구나.’ 이러면 되는데. ‘죽기는 죽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지?’ 그게 죽은 자가 할 소리가 아니죠. 하나님이 죽일 때는 죽인 취지가 있잖아요. 그런 소리 하라고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 소리는 네가 내뱉을 자격이 없다고 죽인 거예요. 예수님을 제껴버리니까 자꾸 죽어서 천국 갈 생각을 하는 거예요. 불교 신자들은 극락 갈 생각하고, 알라 신자들은 천국 갈 생각하고, 왜 그런 아이디어를 냈느냐?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자꾸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예수님만 살아난 거예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기 너희라는 말은 어떤 경우냐면, 일단 하나님에 의해 사신 분과 연관이 되는 사람, 관련된 사람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상태와 똑같은 상태가 복사되듯이 나타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자아는 본인 자아가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의 자아가 살아 있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 몇 년을 하고, 교회 생활 몇십 년을 했다는 그런 것은 이 시간 다 잊어버리시고 우리 오늘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될 때 양이 제단에서 죽어서 피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막에는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고 제사장이 들어간다는데 제사장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은 운반체입니다. 제사장이 뭘 들고 들어가야 돼요.
제사장이 주인공이고 제사장이 피를 들고 가는 게 아니고 피가 제사장을 고용한 겁니다. 죽은 피가 들어가요, 죽은 피가. 피가 어디까지 들어가느냐? 휘장 앞까지 들어가요. 거기서 휘장에 피를 일곱 번 뿌리고, 피를 뿌려야 들어갈 수 있어요, 제사장이라도. 향단하고, 떡 상이 있고, 등대 있습니다. 그것들이 성소 안에 들어있거든요. 거기까지 들어간다고요. 뭐가? 피가요. 이미 죽은 채로 들어가요.
죽은 채로 들어갈 때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피로 죽은 자에게만 휘장이 보입니다. 안 그러면 휘장이 보이질 않아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받은 자만이 휘장이 보여요.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자기가 살았다고 여기면서 천국 문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아가 그대로 있으면서 천국을 바라봐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자기가 조작한 거죠. 성경 보고 아이디어 얻은 겁니다.
그 성막의 경로는 피의 경로에요.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날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마 16:24 ; 막 8:34 ; 눅 9:23)고 했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아가 살아야 내가 따라갈까, 말까를 확인하고 판단할 수 있거든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자꾸 예수님을 믿고자 하고 성경을 믿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가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서에요. 옳은 결정을 하려면 누가 살아 있어야 하느냐? 자아가 죽으면 안 돼요. 자아가 살아 있는 그 나의 그 옳은 결정으로 하여금 나에게 이득을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옳은 결정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조성한 환경은 나를 위한 환경이지 주님의 환경이 아닙니다. 이건 터무니없는 환경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물로 만들고자 한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물로 삼고자 한다, 제사 용도로. 그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하죠.
그럼 예수님 오기 전의 다윗은 어땠냐? 다윗은 제물이 되었던 겁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 장군을 죽임으로써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주께서는 나를 원하는군요.” 그것을 다윗은 고백하고 있어요. 나를 원하는데 내가 위대하고 대단해서 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상한 심령이라는 그것을 원하는 거죠. “하나님에 의해서 ‘나라는 자아가 작살나야 될 자아, 엉터리 쓰레기 같은 자아’ 이게 하나님께 필요하군요. ‘너는 인간 가치도 없어. 너는 진즉에 천지창조와 함께 망해야 마땅해.’라는 것을 인식하는 자아가 필요한 거예요. 어디까지? 휘장 앞까지만 필요해요, 휘장 앞까지. 대기 상태 “스톱! 거기서 스톱하고 대기 해.” 대기 해야 돼요.
천하에 다윗도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이 안 돼요. 모세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구원 안 됩니다. 그 사람들도 대기 상태에요. 몇 주 전에 설교에서 구약의 모든 성도가 초보라고 이야기했죠? 모세와 엘리야가 천국 갔다고요? 아니에요. 대기 상태에 있어요. 무슨 사건이 있어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휘장을 뚫고 나가는 사건이 있어야 돼요. 그들은 죄인 맞아요. 죄인 맞다고 해서 죄인 되었음을 근거로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죄인이면 저주받아야 마땅하지 무슨 구원이 돼요. “내가 죄인입니다. 맞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게 구원이 능력이 될 수가 없어요. 그냥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 51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절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휘장이 거기서 찢어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린 것과 마태복음 27장에서 휘장이 찢어진 것과 타이밍상 이걸 연결시켰어요. 그때까지 휘장은 찢어지지 않아야 돼요.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는요.
다시 해 봅시다. 이 세상에 공간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시간도 하나고 공간도 하나에요.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운 것처럼 이 세상은 하나의 시간 하나의 공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 갔다 오고 난 뒤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이 이스라엘 내부에 마련되었어요. 그게 성막이라는 공간, 그리고 공간 안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이미 죽은 채로 들어가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 성막 바깥의 시간은 스톱이 되고 자체 안의 그 시간이 흘러요.
성막 입구에서부터 그 안에 들어가서 휘장 앞까지 가는 데 걸리는 그 시간, 거기가 성소지요, 그 너머를 지성소라 하고요. 그래서 성막 안쪽의 성소 안의 시간은 뭐냐? 이 세상의 시간 공간과 중첩이 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이미 죽었지만 죽은 자끼리만 통하는, 이 세상 시간과 같이 흐르는 시간과, 이 세상의 공간과 같이 흐르는 공간이 따로 있어요.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휘장이 이제 찢어집니다. 휘장이 찢어지면서 대기 되어 있는 그 죽은 자들이 뭘 느끼느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휘장을 찢어주지 않으면 어떤 경우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들이 깨닫게 돼요. 그러면 평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다시금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여기 요한복음 3장 7절에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경에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면 뭔가 뭔가 내침을 당하는 느낌, 섬뜩한 느낌이 들어요. 내가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이 말은 ‘네가 알고 있던 시공간에서 획득한 지식은 아무 짝도 소용없는 이야기를 지금부터 내가 할게’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뭘 믿어도요, 이미 익히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믿잖아요.
그러니까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의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 믿음을 총동원해도 그것마저 내침을 당해요. 우리 믿음도. ‘네 믿음 그거 쓰레기 같은 것을 여기에 해당도 안 되는데 왜 가져 오나? 이것은 네 믿음과 관련 없어. 도로 가져가. 갖다 버려.’ 그런 뜻이에요. 거듭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어요. 니고데모가 당연히 못 알아듣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 29절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여튼 주님이 말씀하실 때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나오면 그다음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이 안 될 정도예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주님께서 먼저 “기이히 여기지 말라. 내가 말하는 것을 네가 못 알아듣는 것을 다 알지만 그냥 못 알아들어. 그냥 일단 하는 이야기에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네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지 상관없이 내가 다 이룰 거야.” 해서 내뱉는 말씀이거든요. 모든 사람이 무덤 속에 있다는 말은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어요. 무덤 속에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요.
그걸 뭘로 보여주느냐? 성소가 보여주는 거예요, 성소가. 모든 인간은 자기가 제물이 되어 죽는다 할지라도 천국 못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예요. 천국 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휘장 앞에서 대기하는 상태에서는 아예 성막에 들어오지도 않은 저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어요. 차이점은 있어요. 차이점이 뭐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했거든요.
그러며 아예 성막 바깥쪽에 있는, 아무 소용없는, 이 세상 이야기만 할 줄 아는, 일상의 언어만 사용할 줄 아는, 일상의 의미밖에 모르는 그들은 결국 무덤에 가는데 그들은 아예 지옥입니다. 아예 지옥이에요.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해서 성소 안까지, 죽은 채로, 구원은 못 받지만 죽은 채로 대기하는 상태한테는 부활이 주어져요. 어떤 부활? 영광스러운 부활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리고 휘장이 찢어져요. 찢어지면서 휘장 밖 그 너머의 세계에 준비된 것들이 그 영역이 이쪽 휘장의 이쪽에서 대기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덮쳐지는 거예요. 죽은 자가 통성기도, 금식기도, 성소 안에서 그런 것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덮쳐지는 거예요.
휘장이 찢어졌기 때문에 댐이 터진 거예요. 댐이 터지니까 저쪽 주님이 먼저 가신 지성소의 세계에서 …, 지성소 세계는 뭐냐?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죄가 용서받아서 죽은 자도 영광스럽게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성소의 그 세계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된 그 능력이 찢어진 휘장을 통해서 이쪽의 대기 되어 있는 자기 백성에게 그 영광스럽게 부활이 되는 능력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꼭 거짓말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요.
성소에는요, 시간이 째깍째깍 가고 있어요. 모세는 기원전 1400년경, 엘리야는 기원전 약 800년, 나름대로 시간이 있어요. 하지만 둘 다 변화산에 나타났을 때는 휘장 찢어지는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주님, 저 휘장 언제 찢어집니까?”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 휘장을 찢을 수 있는, 모든 율법의 유일한 완성자는 예수님밖에 없기에 그 피, 십자가 피 흘릴 때 휘장이 찢어지게 되어 있어요.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불수레 타고 올라간 사람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이 보면 누가 봐도 산 사람이에요. 모세도 마찬가지지요. 시체를 못 찾았습니다. 꼭 에녹같아요. 어디 갔는지를 찾지를 못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 갔느냐? 하나님의 성막 안에 들어간 거예요. 성막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으로 휘장이 찢어질 때 성막 자체가 무너지면서 지성소는 그동안 중첩되어 있던 시간과 공간조차도 없는 세계, 그게 멜기세덱이 살고 있는 세계,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세계, 그 세계의 능력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말씀하시면서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신 거예요.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 하면, 멜기세덱의 반열, 멜기세덱의 세계에서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을 던지기 때문에 그 말씀은요, 그것은 말이 아니고 말씀이지요, 그 말씀의 능력은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말씀이에요. 유일하게 실효성이 있는 거예요. 실제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그 말씀은 휘장 찢어진 그 세계에서 나오는 말씀이에요.
제가 기이히 여기지 않아야 되는…, 또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그 세계에 속한 말을 사도바울도 언급한 대목이 있어요.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말을 했는데 골로새서 3장 2-3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가 잘 납득이 안되지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1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 곧 의미 있는 현실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절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셋째 하늘에 갔다. 왜 올라가게 되었는가, 그 능력이 어디서 왔는가? 이미 예수님께서 셋째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 하늘에서 열린 휘장을 통해서 성령으로 사도바울이, 사도니까요, 사도니까 예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전달자, 운반체로서 알려준 거예요. 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자, 아까 했던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 대한 답변은 이렇게 되지요. “오시나 안 오시나 나는 이미 죽었지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은 셋째 하늘 입장에서 인간이 조성한 환경을 다시 투시하기 때문에, 다시 거기를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 입장에서는 내가 나이가 20이 되든, 30이 되든, 80이 되든, 90이 되든 어떤 경우도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죽은 거예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 이것은 이미 죽음의 세계고 그것이 지옥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멜기세덱의 세계, 그 휘장 밖, 그 너머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그것을 그냥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안” 또 “성령 안” 그래서 사도바울은 쉽게 이야기해요. ‘예수 안에서 너희가 구원을 얻었다.’ 함축을 해도 너무 했어요. 너무 함축했어요. ‘예수 안에서 너희가 구원을 받았느니라.’
이건 뭐냐? 풀이하면 ‘예수님의 구원의 환경 안에 네가 놓여 있느니라.’ 또는 ‘너희에게 전해주는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의 환경, 예수님의 새로운 천국의 환경 안에서만 주어지는 의미를 품고 있느니라.’ 그런 뜻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에게 육신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육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는 그 말이에요.
자아가 있을 때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이 자아가 어떤 식으로 서로 소통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구약성경 다윗이 잘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참 여러 가지로 이해 안 되고, 납득이 안되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다윗이라는 사람인데 짧게 줄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몹시도 시달려요. 죽을둥 살둥 시달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같으면, 다윗에게 그러한 은혜를 줬으면, 성신까지 줬으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에게 쫓기지 않고 사울을 그냥 죽여서 다윗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왕이 되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굉장히 심하게 쫓기고 또 쫓기면서 죽을 지경에까지 자꾸 몰리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그 대목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심하게 이렇게 다그치느냐?’ 도리어 악신 들린 사울은 의기양양한지가 잘 설명이 안 되잖아요. 제가 줄여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가는 곳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요. 하나님께 묻는다고요. 지금 그걸 다 찾으려면 시간 걸리니 다 생략하고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 묻자온대” 또 “하나님께 아뢰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답변을 해줘요.
이게 더 이상한 거예요. 사무엘상 26장 12절 같은 경우에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했을 때의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하시면서도 이상하게 자꾸 쫓기게 만드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다윗은 계속 하나님께 물어봐요. “하나님, 다음에는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사무엘하 5장 23절, 사무엘하 2장 1절에도 이방인과 전쟁할 때도 계속 물으면 하나님은 또 답변을 해줘요. 이번에는 매복하라, 이번에는 이렇게 쳐라, 해서 승리해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던 그 육신이 자기 한계를 느끼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잡을 제물이기 때문에 계속 하나님께서 꾸역꾸역 살게 해주시는 거예요. 잡아먹을 제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휘장을 바라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든 누구든간에 어떤 인간도…,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잘 들으세요. 마지막 중요한 거니까요.
어떤 인간도 휘장보고 사는 인간 한 명도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내가 죽을 휘장 보고 살아가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들에게는 육신이 있어요. 나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목적은 하나, 나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무조건 내가 돈 벌고 밥 먹고 살아야 하겠다는 거예요. 그것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몰라요. 이 세상은 망하기 위해서 있다는 그것도 몰라요. ‘하여튼 그런 것은 모르겠고, 일단 나는 있고, 있는 그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줘서 살려줍니다. 왜? 잡아먹어야 되니까. 토실토실한 죄인으로 잡아먹어야 하니까. 왜 네가 산다는 그것이 죄가 되느냐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피의 배달체, 운반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의 피의 운반체기 때문에 내 육신은 무조건 살아야 해요. ‘십자가 피고 하나님이고 다 귀찮고 살아남는 그것이 인생 성공이다.’ 내가 영화감독이에요.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살아남았다. 마이웨이! 나, 이런 인생 살았다’ 자랑하고 싶어서.
휘장? 그런 것 없어요. 재림? 그런 것 알기는 알지만 나하고는 관계없어요. 나 사는 것과 무슨 관계 있어요? 아무 관계 없지요.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되죠, 뭐. 요한계시록 3장 1-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Wake up, and strengthen the things that remain, which were about to die; for I have not found your deeds completed in the sight of My God.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잡아먹을 이 똥 돼지, 네가 하나님께서 너를 잡아 죽일 제물인 것을, 죽어 마땅함을 네가 굳게 하라. ‘나는 기껏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입니다.’를 굳게 하라 그 말이지요. “남보고 죄인이라 하지 말고, 살고자 하는 내가 죄인인 것을 굳게 하라. 잡아줄 게 내가.”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음성이 바로 휘장 바깥에서 주님 가신 그쪽에서 외쳐나오는 의미 있는 말씀인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주여, 우리 인생은 안개같이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의 그 고백, 그리고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그 고백을 우리가 기쁨으로 서슴없이 성령에 의해서 튀어나오지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후 4:18 ; 약 4:14-15) 그게 바로 이미 구원받은 3층 천에 올라간 성령이 함께 있는, 성령 안에서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국은 죽는데, 결국 끝이 지옥일 뿐인데, 너무나 명확한데 왜 우리는 이 시간과 공간의 지옥 속에서 안 지려고, 남한테 뒤처지지 않으려고, 남에게 자랑스러운 인생 되기 위해서 소용없는 짓을 반복해야 됩니까? 주여, 그래야 우리 죄가 숙성됨을 주의 언약 안에서 깨닫게 되었사오니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강도 같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