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맹세 임신

아빠와 함께 2024. 8. 25. 17:38

맹세 임신 

2024년 8월 2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6-18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6: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두 가지’가 뭐지요? 그냥 “나는 너희에게 맹세하겠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맹세 남김에는 인간이 여기 ‘있음’이 거짓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없어지는 존재이기에 제대로 ‘있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맹세라는 것은 진정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인간의 있음을 거짓된 것으로 규명해서 없애는 식으로 성취성을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맹세란 ‘없는 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데서’ 나온 것을 참된 맹세라고 받아들일려면, ‘참되게 없는’ 바로 그분에게만 성립됩니다.

없음에서 자신을 시작하지를 못하고 ‘나는 반드시 있어야 함’으로 시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맹세가 소용없고 도리어 거짓된 것으로 배척받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와 무관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출생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있음’을 진실의 시작으로 본다는 겁니다.

즉 이왕 있게 된 것 잘해보자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짐승과 과연 차이점이 날까요? 맹세를 성취하실 분은 현 인간들이 ‘있다고’ 여기는 세계 출신이 아니라 인간들이‘없다’고 여기는 세계 출신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인간의 ‘있음’이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맹세가 또 하나 거짓말이 아닌 이유는, 인간보다 월등한 분이 이 맹세를 친히 이루신다는 겁니다. 왜 인간은 배제해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임무를 오직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일임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시진 찍을 때, 누가 머리 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비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그 두분의 주님 사이에서 모든 인간들은 나락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인간은 모조리 거짓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깨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9-10,17)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맹세를 받은 그 당사자들을 제물과 같이 둘이 쪼개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진짜라고 여기는 것이 실은 거짓이요 가짜요, 진짜 쪼개진 그 제물 사이를 통과하면서 맹세 자체를 홀로 다 이루시는 바로 그분 안의 세계뿐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과 쪼개집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는 이삭과 야곱을 인정해야만 하는 이삭으로 쪼개집니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름 붙여진 야곱과 둘로 쪼개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결국에는 남쪽과 북쪽 나라로 쪼개집니다. 가장 완전한 쪼개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한 몸으로 받으신 일입니다.

죄로 죽으셔야 하는 예수님과 영광스럽게 부활되셔야 할 예수님과의 쪼개짐, 바로 그 둘 사이에는 맹세는 성취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없으신 분이 인간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들어올 때, ‘이름’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나는 나다’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그 의미체계 속의 질서에는 일체 포함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곧 인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일체 알아챌 수 있는 근거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4-19)

두 개의 의미 있는 기호로서 표현되지 못하면 진정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이미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스스로 표출하는 증거에 대해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신 맹세 달성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다는 뜻입니다.

맹세로 인해 인간 세계는 더욱더 철저하게 하늘 나라에게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께서 흔적을 인간 세계에 남겼습니다. 것이 바로 전쟁 방식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 현실이라는 것이 인간의 노고로 인해 구성되는 것이 아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언약궤라는 나무상자가 다곤신상을 박살냅니다.(삼상 5:1-5) 이 둘 사이에 그 어떤 인간의 이해가 관여된 바가 없습니다. 마지막의 흔적은 바로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는 일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출생하므로서 처녀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마땅한 대상이 된 겁니다.

하지만 천사가 개입해서 마리아는 요셉이 낳은 아들인 것처럼 해서 양육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누가 갑니까? 짐승같은 자는 가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성령이 자진해서 인간 육신 안에서 생겨버린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수님 홀로 모든 맹세를 이루었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저급한 접시로 취급받는 것을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당한 말씀의 진격을 막을 길 없음을 늘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에 있어 우리 자신을 배제해주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0강-히브리서 6장 16-18절(맹세임신)24082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6-18절입니다.

히브리서 6:16-18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두 가지 변치 않은 사실, 하나님께서 무슨 이야기 했는데 갑자기 두 가지가 되어버렸죠? 인간들이 이렇게 이 본문을 아무리 봐도 한 가지만 보여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맹세하셨다. 우리는 그 맹세만 믿으면 된다.’ 맹세가 내용이 하나밖에 없는 걸로, 그 맹세를 믿으면 구원이 되는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하나님, 맹세 나타내주시옵소서. 제가 믿겠나이다.’ 이러면 일이 간단하게 되는데 여기 맹세라고 하면서 거짓말할 수 없는 이 두 가지의 변치 못할 사실, ‘맹세했다.’ 한 가지, 두 가지는?

하나는 어디 있죠? 두 가지를 믿어야 된다는 데, 하나님께선 거짓말하지 않는 두 가지를 줬다는데 받는 우리는 달랑 하나만 받았어요. 하나는 어디서 흘려버렸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두 가지로 보지 못하고 맹세 하나로 보는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맹세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없는 데서 맹세가 나타났다는 사실, 없는 데서 맹세가 나왔다는 사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 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달달 긁어서 믿어야 하는데 ‘두 가지,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라는 걸 빼버리고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식이라 이 말이죠. ‘하나님이 설마 우리에게 나쁜 걸 줬겠나, 좋은 걸 줬다. 우리가 믿는 자세로서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구원된다.’ 지금 이런 자세가 되어버리면 ‘두 가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이 내용이 굳이 주어질 이유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면 ‘네가 있다는 게 거짓인 줄 왜 모르느냐?’ 이런 뜻이에요, 내가 있다는 게.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계시고 하나님 쪽에서 맹세만 주면 우리는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모든 계획이. 그런데 내가 있다는 것이 이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깔지 않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믿습니다.” 하는 이 말 자체가 전부 다 헛짓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 ‘그 두 가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하는 말을 할 때는 지금 우리의 내가 사는 전제 자체가 이게 무너져야 돼요.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를 우리는 진실로 받아들이잖아요. 그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미처 못했는가, 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자, 거짓말하지 못하는 두 가지가 뭐냐? 하나는 맹세라고 하는 것은 없어야 하는데 나타났다, 라는 그 사실, 맹세가 있다는 게 아니고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있으면 믿으면 되는 데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뭐까지 믿어야 되느냐면, ‘맹세가 원래 우리한테 안 주어져도 그만이야. 없어야 정상이야.’ 이걸 인간은 못 믿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애를 많이 썼을 거야.’ 지금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되면 그건 없는 데서 나왔다는 첫 번째의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취지 자체가 우리한테 와닿지 않는 거예요.

그럼 와닿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원래 없는데, 같이 없는 데서 나온 게 맹세이기 때문에 내가 현재 있다고 여기는 나는 제거되고 내가 없다고 여기는 그 ‘나’가 구원받는 식으로 믿어줘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그 의미가 맹세와 같이 연동이 돼요. 뭐 일부러 어렵게 하려고 지금 비비 꼬는 거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보다 더 큰 이가 맹세했다는 사실은 거짓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보다 더 큰 이가, 인간보다 더 월등한 이가 이 맹세에 대해서 스스로 성취한다는 이 사실이 두 번째 거짓말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이건 뭘 뜻하냐면, 우리를 빼는 거예요. 맹세 성취 과정에서 우리를 배제시키는 겁니다. “네가 뭐 믿음 좋아? 실력 있어? 네가 착해? 다 뺄 거야. 네가 열심히 했어? 다 뺄 거야.” 네가 하지 못한 것, 네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백날 교회 다녀도 믿음 없어.” 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그것, 그걸 분명히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걸 다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믿습니다.” 백날 해도 하나님이 그 모든 걸 다 하셨다고 믿는 나는 왜 못 뺍니까? 그것을 왜 못 빼지요? 하나님이 하신 일에 어떻든 간에 현재 내가 있으니까 있는 내가 끼어들게 되면 끼어든 것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스스로 확보됐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이걸 잡아 빼버리는 겁니다.

내가 믿음으로 구원됐다고 할 때 내 믿음도 내 구원에 기여가 되고 보탬이 되었다는 생각을, 내 존재가 있는 이상 이걸 빼지를 못해요. 뺄 수가 없어요.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치매 걸리면. 나중에 치매 걸려서 예수가 누군지를 모르고 그냥 나훈아만 찾고 있는데 그럼 뭐, 나훈아 나라 갈 거예요?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빠질 때 빠지지를 않는 게 우리예요. 주께서는 빠지라고 하는데 안 빠져요.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센지, 우리 자신을 구원에서 빼질 못하고 있다니까요. 빼기가 안 돼요, 빼기가. 그래놓고 맨날 자기 믿음 없다고 좌절하고요. 왜 나는 남들처럼 이렇게 멋있게 믿질 못하느냐고 남하고 비교하고. 사람이 비교한다는 것은, 자기 과거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현재가 됐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과거는 사라졌다는 뜻이에요. 과거가 남아있으면 남과 비교할 거리가 남아있어요. “아, 나도 왕년에 잘나갔는데 정말, 지금 꼬라지 하고는. 내가 왕년에 잘나갔어.” 맨날 이러고 있다고요.

남하고 비교하는 것은 누적된 과거 기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거가 사라지지 않으면 인간은 윤리와 도덕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윤리와 도덕이 그냥 살아있으면 괜찮게요? 윤리와 도덕으로 뭘 도전하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도전합니다. “나 착한데 왜 내 인생 이렇게 꼬이게 하셨습니까? 나 착한데. 지금까지 착하게 살았는데 나 왜 힘들게 해요?” “어디를 봐서 착한데?” “제가 과거에 착했잖아요, 과거에.”

현재란 과거가 없어진 상태거든요. 없어진 상태에서 과거를 들먹인다는 것은 그것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리게 만드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맹세를 딱 주신다고 할 때 그 맹세를 받은 사람들이 처음에 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 땡 잡았다, 이제. 하나님이 날 지켜주신대. 나 구원받겠지.’ 구약에 나오는 맹세 받은 사람들, 왜냐면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 나오죠, 아브라함부터 해서 이삭, 야곱, 요셉, 이스라엘 전체, 선지자 전체, 세례 요한까지 전체가 하나님의 맹세를 받았을 때 그들은 전부 오해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까지 다 오해했어요. 나 자신을 구원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맹세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 보고 맹세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맹세를 남기시고 맹세를 성취할 분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보내신 그 하나님은 인간보다 월등합니다. 더 큰 자에요. 그리고 하는 말이, ‘맹세는 너에게 주되 아브라함에게 준 맹세는 아브라함보다 더 큰 자가 이룬다’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게 바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두 번째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해요. 거짓말할 수 없는 두 가지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그 과정에서 나 아브라함은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게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과 연동해서 같이 일어난다는 것, 거짓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끼리만 해당 되는데 감히, 감히 내가 거기에 하나님 하시는 일에 끼어들다가 내침을 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나서서 증거 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전체가 다 그래요.

그래서 이 하나님, 이게 신약에 나타나는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 둘 사이에 맹세라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 둘 사이에서 전선에 닿게 된 인간들은 나락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나락, 곤궁, 배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거짓말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제대로 성취되어서 구원이라는 게 주어지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 보고 예쁘다고 사진 찍는데 옆에 있는 아저씨가, 그것도 사각형 큰 얼굴 가져다 대면 뭐라고 하겠어요? “저 아저씨, 얼굴 좀 빼세요. 나는 내 아들 보고 사진 찍는데 당신이 거기 왜 낍니까?” 빠지는 거예요. 들어갔다가 호통 당하고 빠지죠. 그 역할이 아브라함 역할이에요. 오늘날 우리 역할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좋아해요. 예수님만 좋아하는데 우리가 끼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맹세를 주시면서 조건이 붙습니다. 여호수아 23장 6절에서 7절,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맹세를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이방 나라와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뭔가 좋아 보이는 누구든 가와 선뜻 맹세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아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맹세, 맹세는 언약을 말합니다, 약속, 맹세를 주시되 이 맹세를 받은 자는 절대로 다른 인간들, 맹세 없는 자와 맹세 하지 말라고, 계약하지 말라고, 그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주께서 맹세를 주시고 당부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도대체 맹세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왜 하나님의 맹세를 받지 않은 다른 사람과는 맹세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도대체 맹세의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이 창세기 15장 10절에서 17절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준비하라고 해 놓고는 뭐라고 명령하냐면, 그 제물을 쪼개라고 했어요. 쪼개는 거예요. 쪼갠다는 말은 그 자체를, 그 있음 자체를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하기 전에 제가 전제적으로 큰 틀을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맹세, 거짓이 없는 맹세를 하신 하나님은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에게 의지하지 않고 친히 맹세를 전담해야 될 인물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보낸 인물이 어디서 나오는가? ‘없음’에서 나와요. 인간 세계에 없는 데서 나와요.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미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인간 세계는 생명과 관련된 게 일체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생명나무와 연결되어 있는 인물을 이 땅에 보내 주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분이에요. 없는 분이에요. 없는 데서 맹세가 나오는 거예요. 없는 데서 맹세가 나왔다는 것은 이미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 세계에 자기들끼리 맹세가 활발하게 통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맹세를 너희들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없는 분이 주신 없는 맹세가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은 맹세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의 없는 데서 온 맹세 자체가 철저하게 인간을 무시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없는 분이 이 땅에 들어오셨을 때, 이 땅에 왔을 때 이 땅은 ‘있음’의 세계인데 없는 쪽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갖추는 것이 이 땅의 이름을 갖게 돼요. 없는 데서 생겨서 있어 버리면 이름부터 먼저 짓게 돼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너는 ‘있음’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창세기 2장 19절에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아담에게 아담의 세계이니 ‘네가 동물들의 이름을 지으라’고 하거든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이름을 지음으로써 너는 이제 ‘없음’의 세계가 아니고 ‘있음’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티를, 표시를 하는 겁니다. 이름이 불렸다는 것은 어떤 체제 안에, 질서 안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체제 안에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다른 ‘있음’과 만나게 되고, 다른 ‘있음’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쫓겨난 인간들끼리 이름을 가지고 서로서로 인간들 세계를 이루고 있잖아요? 그 인간들 세계에서 뭐가 소통되고 있냐면 거기 인간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의미가.

여러분 지금 잠 오기 전에 빨리 중요한 거 먼저 하니까 그다음에 주무시든지 하세요. 이게 뭐냐면, 맹세 없는 것은 주님께서 짐승으로 간주하거든요. 옛날에 아주 어릴 때, 제가 7살 8살 때 우리 할머니가, 제가 아직 어렸을 때라 어린 손자에게는 함부로 모습을 보여주는데 제 기억으로서는 할머니가 벗어놓은 속옷을 보는데 남자 속옷이에요.

‘할머니가 여자인데 왜 남자 속옷을 입었을까? 런닝셔츠도 찢어진 것을 입으시고 속옷도 남자 속옷도 입으시는 이유가 뭘까?’ 일단 안 보이잖아요. 속옷이니까. 안 보이니 뭘 입어도 괜찮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할머니니까 이제는 더이상 자기 관리하는 게 피로감이 쌓인 거예요. 속옷도 예쁘게? ‘아 짜증 나 정말.’ 나이 80이 됐는데 무슨 자기관리를 해요.

내 관리를 내가 포기한 겁니다. 짐승 같아요. 그런데 할머니한테 “왜 그렇게 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실용성이에요. 실용성을 거론해요. 비용 문제입니다. 이게 뭐냐면, 인간에게 맹세가 없어버리면 일단 실용적으로 나가요. 실용적으로 나가는데 그 실용성이 어디까지 나가느냐? 짐승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짐승의 본모습.

젊은 아이들 입장에서의 혼인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에요. ‘내 인생이 걸렸다.’ 그러나 연세 많은 분, 70세 이상 된 연세 많은 분에게 그 자식이나 손자의 결혼식에 대해서 어떤 관점이냐면, 짐승의 짝짓기 관점입니다. ‘네가 빨리 결혼해야 애를 낳지. 나도 남들처럼 좀 손자나 증손주 좀 보자.’ 요새 나이 70 된 사람들 보기에 나이 서른 넘어서 혼인하지 않으면 이건 뭐 골칫거리죠. “남들은 손자 보는 재미가 그렇게 좋다는데 나는 왜 느지막이 그런 재미도 못 보냐. 나도 손자 키우는 재미 좀 보자. 너 언제 갈 건데? 너 시집 언제 갈 건데?” 딸이 듣고 있다가 “그런 말 하면 추석 때 가지도 않는다.” 짜증 나서.

그러니까 “왜 엄마 아빠는 나를 애 낳는 기구로 봅니까?” “네가 나이 들어보면 알아.” 인간은 나이 들어보면 알아요. 자기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점점 짐승화가 됩니다.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까요? 인간이 죽을 때 몸의 변화가 여덟 가지가 되는데 첫 번째, 뇌부터 죽으니까, 뇌세포가 빨리 죽으니까 시력을 잃어버립니다. 두 번째, 7시간 8시간 되면 몸에 경직이 일어나면서 손과 팔이 내려앉아요. 내려앉습니다.

세 번째, 대소변을 몸 밖으로 배설합니다. 네 번째, 몸에 멍이 생깁니다. 시반 현상이라고 해서 15내지 24시간 이내에요. 다섯 번째, 그래도 신체 일부가 아직 살아있는데 각막이 아직 살아있어요. 그래서 몸이 죽고 난 뒤에 이식을 후딱 해버리는 거예요. 여섯 번째,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는데 그건 몸체에 있는 공기가 열기에 의해 팽창하면서 성대를 통과해 신음소리를 내게 돼요. 이미 죽었는데, 좀비도 그런 좀비 없죠.

그 체세포가 분해되면서 효소가 되는데 그 효소 때문에 좋~다고 박테리아와 미생물들의 활동이 촉진됩니다. 거기서 악취가 발생 되죠. 가스가 나와서 성대를 통과하니까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일곱 번째, 표정이 없어져요. 미소 짓지 않습니다. 여덟 번째, 사망하고 난 뒤에 여덟 번째 현상에 수염과 손톱이 자라납니다. 자라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주변의 피부가 괴사되기 때문에 뿌리까지 드러나니까. 마지막까지 남는 게 청각이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죽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성경에도 나오죠,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어요. 인간은 벌레예요. 하나님이 호흡 주지 않으면 다 이렇게 돼요. 그동안 인간인 ‘척’ 했죠. 사실은 짐승에 불과한데 인간인 척을 했습니다. 인간이 짐승인데 인간인 ‘척’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그게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짐승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감출 수 있는 요령이 생겨요. 그 요령이 뭐냐? ‘내가 하는 일의 의미는?’ 갑자기 의미가 발생돼요. ‘내가 하는 일의 의미는? 내가 하는 일의 모든 가치는?’ 이렇게 돼요.

그런데 인간이 의미와 가치를 챙길 때 누가 코웃음 치느냐면, 박테리아와 미생물들이 웃고 있어요. ‘빨리 죽어라. 넌 내 영양분이다.’ 인간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면서 유기물이 분해가 되죠. 분해가 되면서 항산화균과 인산가용세균 같은 게 있어서 결국 인간은 뭐냐? 칼륨, 칼슘, 마그네슘, 철, 망간, 아연, 구리, 니켈, 인산으로 분해됩니다. 칼륨, 마그네슘이 사람인 척했던 거예요, 사람인 척.

그럼 박테리아는 신이 났죠. 신이 나는데 우리의 후손들은 이 균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어요. 이 미생물을 농법에 사용합니다. 바실러스 균 같은 것은 탄저병 예방에 아주 좋은 효과가 있다는 균이에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농사짓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흙도 호흡을 한다는 거예요.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의 비율, 탄산가스의 비율이 흙 속에서는 달라져요. 흙도 “후~” 쉬고 산소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내놓고 그렇게 될 때 농사가 잘 된다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죠. 본인도 그렇게 살면서 영원토록 사람으로 산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에게 양식을 주신 것이 아니고 사료를 주신 겁니다. 짐승이니까요. 키울 만큼 키우고 사용할 만큼 사용하다가 다 버려요, 주께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있음’의 의미 체계에 ‘없음’의 의미 체계를 가지고 이름을 가진 분이 여기에 침투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맹세가 이스라엘 속에 침투한 거예요. 침투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을 더 보겠다고 나서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뭘 일으키시는가?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가? 다 쪼개져요. 쪼개집니다. 창세기 15장 다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 주면서 그 제물을 둘로 쪼개게 했습니다. 쪼갤 때 마주 보게 하시고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둘때에” 다시 말해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는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그때 “연기 나는 풀무(횃불)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이게 바로 맹세입니다. 있다고 여기는 것, 있으니까 내가 진짜고 있으니까 나 가짜 아니고, 있으니까 나는 거짓이 아니라고 우기는 나, 내 속에 없는 데서 오신 맹세가 나를 쪼개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에요. 아브라함을 쪼개 버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쪼개지는 거예요. 이삭이 쪼개져서 ‘에서 아들을 좋아하는 이삭이냐, 야곱을 좋아하는 이삭이냐?’가 쪼개지는 겁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 야곱이냐, 야곱이 이스라엘이냐?’ 쪼개지는 거예요.

맹세가 가는 곳에는 전부 다 예상 못 한, 내가 아닌 나가 되면서 쪼개진 상태에서 그걸 바라보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라는 맹세가 오게 되면 내가 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저주받는 그분이 우리의 조상 아담이 되는 거예요. 마지막 아담, 새로 제2의 아담이 되는 거예요. 나의 의미가 쪼개지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못 하는 두 가지. 하나는, 이건 절대로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그걸 믿으려면 ‘없음’으로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맹세 자체가 칸막이가 되어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할 때 내 앞에 철 칸막이가 딱 쳐지면 나는 맹세 이후를 몰라요. 맹세 이후를 모르고 맹세 이후가 칸막이 쳐서 깜깜하니 도대체 나는 갇힌 거예요.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직경 4만 킬로미터의 세트장 안에 갇혀 있어요. 왜냐면 적도 부근의 지구 둘레가 4만 킬로예요. 세트장이에요. 세트장에 태어났잖아요. 태어나서 열심히 살아보세요. 나중에 어디 부딪히느냐면, 결국 세트장에 머리 부딪혀요. 이게 청춘입니다.

젊은 20대, 30대 세상에서 부딪히려고 부딪히는데 자기 머리만 아파요. 살아보려고. 왜? 난 진실하니까. 난 여기 있음이 진실하니까. 나로 살아있는 것이 거짓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이 육신으로 살아내야 할 것 아닙니까? 살아내면서 부딪히는데 어디서 부딪히는지를 몰라요. 그냥 세트장에 부딪히는 거예요. 인간 세계가 만든 의미의 세트장에 부딪히는 거예요, 의미의 세트장.

“도와줄게” 하면서 찾아오면 보이스피싱. “한 건당 200만원 줄게.” 하면 마약 운반책. “너 큰 건 아르바이트 한 번 할래?” 그러면 그건 돈값 한다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한테 명의 이전시켜서 빚 져놓고 자기는 도망치고. 나중에 그 젊은 20대 30대에 남는 것은 이 세상이 준 상처뿐. 그래서 할 말은 뭐냐? ‘나 세상 안 나갈래.’ 자체적인 봉쇄에요.

‘그럼 너 누구랑 대화할래?’ ‘난 나하고 대화할래.’ 이걸 내면 소통, 이걸 하는 데가 어디냐? ‘봉쇄 수녀원’ 하루 여덟 시간 기도합니다. 기도 내용이 뭐겠어요?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명상 훈련이라고 합니다. 피할 곳이 자기 봉쇄밖에 없어요. 자기 도피. 여덟 시간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징벌이에요. 자기 스스로 때리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가두는 거예요. 그나마도 거기서 푸~, 하고 숨을 쉴 수 있어요.

세트장의 범위를 좁히는 거예요. 공부 많이 하면 뭐 합니까? 결국은 20대 30대 전부 다 자기 캡슐 안에 들어가 있는 게 30대의 정신사고에요. 부모들은 짝짓기하라고 하지, 젊은 사람들은 ‘내가 짐승이야?’ 이러고 있고, 대화가 안 돼요. 기성세대와 대화가 안 돼요. ‘내가 어딜 봐서 짐승이야?’ ‘너 짐승이야, 너. 너 지금 내가 밥 먹여 주니까 네가 인간 같지? 너 원래 짐승이야. 사료 없으면 못 살아. 밥값은 해야지.’ 맨날 이 싸움이에요, 이 싸움.

알 수가 없어요. 맹세가 와 버리니까 저쪽에서 무슨 세계인지를 알 수가 없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흔적을 남기죠. 맹세 세계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할 일이고 인간은 칸막이 쳐서 그 세계에 들어가지를 못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스라엘에게는 말씀의 흔적이 이쪽에 들어오는 거예요. 들락날락할 수 있는 능력은 말씀의 능력밖에, 맹세 자체의 능력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 흔적이 뭐냐? 바로 전쟁이에요. 흔적이 전쟁이에요. 이스라엘 역사는 죽어라고 계속 전쟁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전쟁의 예가 사무엘상 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5장 1절에서 5절에 보니까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맹세가 곧 현실이 된다는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인간 세계에서 알고 있는 현실은요, 조금 전까지 했던 나의 노동력이 현실이 돼요. 내가 어제까지 일했던 그것이 지금의 내 현실을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의미체계예요. 그 의미체계에서 쫓겨난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요, 우리가?

다곤 신상에 뭐가 들어가는가? 나무 상자가 들어갔어요. 그걸 언약궤라고 합니다. 언약궤는 누가 봐도, 시력 2.0이 안 돼도 괜찮아요, 0.5만 돼도 다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무로 만든 상자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저쪽의 다곤신상은 돌로 만들었을 거 아닙니까. 돌로 만든 다곤 우상과 나무로 만든 상자가 함께 들어갔는데 다곤신상의 손목이 다 끊어져서 엎어져 있어요.

그에 대한 인과 관계를 논하라. 물리학 박사 나가서 논문 하나 써 보죠. 나무 상자가 어떻게 멀쩡한 돌 우상의 모가지를 다 무너지게 했는가? 첫날은 모가지까지는 안 날아갔어요. 첫 날엔 엎어진 것을 다시 세워놨는데 두 번째 날에는 아예 엎어진 채로 모가지, 손모가지 다 날아갔습니다. “그에 대한 원인과 결과, 인과 관계를 논하라.” 논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 현실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노동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이게 인간 세계만의, 저주받은 세계만의 의미 체계에요. 주님은 거기서 쫓겨난 거예요. 같이 쫓겨나서 좋아라, 한 사람이 십자가 달릴 때 있었던 강도였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하고, 내가 강도질 한 것이 아무 인과 관계가 없어요. 그걸 강도가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 어떻게?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이 이미 시작이 돼야 돼요.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생활하지 않으면 이건 안 돼요. 마태복음 20장에 천국은…, 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천국이 이와 같으니…” 하며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3절에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 포도원에 들어올래?” 이랬어요. 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의 천국은 뭐냐? 그냥 꽁초 줍는 공공 근로 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모습이에요. 돈은 다 받았어요. 물론 돈은 나중에 주지만 일단 받았어요. 자기가 꽁초 줍는 양에 의해 임금을 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시간때우기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피 흘려놓고 이 피 값이 무슨 값인지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서 탈락이에요. “십자가 피 값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네가 논하라.”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 천국에서 탈락입니다.

“그 피는 내가 이미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가짜지요, 거짓이지요, 모든 것이 거짓말이에요, “…그 거짓말 세계에서 태어나서 거짓말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나를 위해서 흘려진, 죄 용서를 위해 흘려진 피입니다.”라는 말로 그 의미를 해석하려면 일단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는 짓거리에 하나님 일에 전혀 보탬이 안되는 거짓 일만 있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고요.

애 키우고, 뭐 대학을 보내고…, 아무 의미 없어요. 진급하고, 승진하고, 아파트 한 채 더 사고, 차 사고, 그런 것 의미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의미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그것 짐승적으로 분석 한번 해 볼까요? 여러분 앉아 있는 그 자리 있잖아요. 몇 평짜리입니까? 짐승적으로 계산해보면 그 앉은 자리가 앉는데 비용이 들어요. 매달 소요되는 비용이 있다고요.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전기세니 가게세니 이런 것을 다 합하게 되면 머리 당 그 비용이 나온다고요.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것도 다 돈이에요. 짐승적으로 계산하면. 따라서 그 비용이 아까우면 집에서 인터넷으로 들으면 돼요. 그런데 인터넷으로 하면 비용이 안 듭니까?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돈이 의미에요, 돈이.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고 돈 없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주님 보시기에, 맹세에 들어오신 주님 보시기에는 모든 의미가 어디서 나오는가? 두 개의 기표로 결정이 된다는 거예요, 두 개의 기표. 기표라는 말은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 기호를 기표라 하는 거예요. 최소한의 두 개의 기표가 있어야 그 사이에 의미가 담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8장 14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제가 죽 읽어 드릴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둘입니다. 두 개의 기표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너희들 보기에 내가 보이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너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런 뜻이에요. ‘나 자신을 보는 자는 우리 자신을 안 봐도 되지만 나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줄창(줄곧) 너 자신만 쳐다보면서 의미를 주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갈까, 지옥 갈까?’ 그게 맨날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는 거예요.

왜? 나는 여기 있다는 이것이 거짓이 아니니까. 이게 참된 것이니까. 그게 바로 인간들끼리 소통되는, 나락에 빠진, 타락한, 저주에 빠진 인간들끼리의 의미 세계에요. 열심히들 살아요, 열심히들 살아요. 열심히 살면 뭐합니까? 마지막에는 남자 속 옷이나 입고 다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하면 요양병원에 가서 짐승 되지요. 그냥 퇴비가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미라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어떤 진행 과정이, 그사이에 어떤 운동이 있어야 돼요. 그 운동은 ‘없다 – 있다 – 없다’로 빠져야 돼요. ‘없다 – 있다 – 없다’가 되려면 인간은 안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있다 – 있다 – 있다’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안 됩니다. 인간의 약속, 맹세, 이렇게 사고하는 모든 것은 배제되는 겁니다. ‘없다 – 있다 – 없음’이어야 돼요.

멜기세덱의 반열, 그 족보를 따라야 그게 가능해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분이 시작도 있고 끝이 있는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아브라함은 몰랐지요. 자기는 제물이나 바쳤지 그것이 왜 중간에 쪼개져야 되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시편 51편 17절에 보면 쪼개진다는 그 내용이 나옵니다.

히브리말 본래는 쪼개진다는 의미인데 우리 말 성경은 다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어요.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여기 상한다는 말이 쪼개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쪼개진 심령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물이 된다면 오늘날 구원받은 사람도 쪼개진 제물로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쪼개진 제물의 샘플, 그걸 먼저 보여준 분이 누구냐?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몸입니다. 쪼개져야 피가 흐르지요. 쪼개져야 살이 찢길 것 아니겠습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나 쪼개진다. 그러나 너희들은 지금 안 쪼개지고 멀쩡하게 천당 가려 하잖아. 왜? 네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가 거짓인 줄도 모르는 거예요. 맹세가 인간들로 하여금 인간들, 거짓된 자들끼리 오글오글 모이도록 훌친거예요. 그래서 저희끼리 모인 거예요, 저희끼리. 여기서 신학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고, 과학을 말하고, 국가를 말하고, 이게 마귀의 권력의 장이에요.

권력이라 하니 생각납니다만, 권력의 예를 잘 보여준 것이 있어요. 박정희 대통령 큰딸 박근혜씨가 서강대학교 다녔거든요. 서강대학교 1학년 다닐 때 엄마 닮아서 너무 참했어요. 그 아버지가 대통령인 줄도 모르고 어떤 남자가 데이트를 신청한 거예요. 그 당시에는 데이트 신청할 때 말을 이렇게 건넸답니다. “저랑 빵 드실래요?”

그래서 박근혜가 ‘한번 저러고 말겠지’ 했는데 그 남자가 진짜 꽂혔는데 보일 때 마다 “저하고 빵 드실래요?” 했대요. 어느 날은 “저와 빵 드실래요?” 하고 오니까 건장한 사내 네 명이 나타나더니 빵 네 상자를 가져와서 데이트 신청한 남자에게 들이밀면서 “빵 먹어라!”하고 준 거예요. 실제에요. 팩트에요. 이게 권력입니다. 이게 권력이에요.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부모의 권력과 대단한 사람의 권력에 휘감겨서 그 권력 안에서 출생한 거예요. 그냥 육신이 태어났다고 출생이 아닙니다. 권력과 함께 태어난 거예요. 바로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흔적을 남겼는데 그 흔적이 아까 말한 전쟁이었어요. 이걸 설명을 해야 되겠지요.

그냥 나무 상자에요. 분명히 나무 상자에요. 그리고 누가 봐도 다곤신상은 돌 우상입니다. 그 돌 신상은 인간이 만들었어요. 인간들은 만들어놓은 것을 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신의 원천인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껏 만든 그것이 빌 수가 있어요. 자기 내부와 소통하기 때문에. 자기 안의 신을 형식을 경유해서 자기가 모르는 어떤 절대적인 것을 향해서 비는 방법이 우상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신을 누가 깨겠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 상자인 언약궤가 깨버린 거예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런데 언약궤가 블레셋 나라에 왜 갔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 앞장세우면 우리나라가 산다’ 해서 전쟁에 나섰거든요. 전쟁할 때 전쟁도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언약궤 덕분에 승리하겠다, 하나님 이름 덕분에 승리하겠다는 그 생각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거짓이라는 것을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뻔했지요.

하나님 믿으면 몸이 안 아프다, 하나님 믿으면 사업 잘된다, 그게 거짓된 자기를 챙기는 하나의 거짓된 수법이라는 것을 망해봐야 아는 거예요, 망해봐야. 나 자체가 거짓되었다는 것, 거짓된 것을 자꾸 성공시키려고 애쓴다는 그 자체도 거짓된 거예요. 하나님의 맹세에서 내가 배제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자꾸 끼어들려고 하는 거예요. 속셈을 가지고.

그러면 신약에서의 방법은 뭐냐? 신약에서 방법은, 성령이 마리아 몸에 아기를 잉태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처녀 마리아 몸에다 아기를 잉태하는 거예요. 그러면 잉태된 당사자 마리아는 율법에 의하면 그 동네에서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 됩니다.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애를 뱄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있는, 율법이 권력화되어 있는 그 유대 사회에서는 죽어 마땅해요.

유대인은 ‘율법을 살리기 위해서 너는 좀 죽어줘’하는 세계였습니다. 율법의 의미가 이 유대 나라의 과거 전통을 이어서 메시아가 우리나라를 구원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그러한 사회가 유대 사회였어요. 그들은 그것이 거짓되었다는 것, 그것이 마귀 생각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지요. 유대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굉장히 으스대고 자랑스러워했어요. 뭐 4대째 신앙인, 그런 것 있잖아요. 내가 모태 신앙인이다, 그런 것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누가, 그 누가 알겠어요. 밤중에 천사가 요셉에게 언급을 했어요. ‘네 아내 건드리지 말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건드리지 말라(마 1:20)고 한 겁니다. ‘네 아내로 맞이해서 잘 살아라. 애 낳아준다.’ 짐승은 천국에 못갑니다. 짐승 말고 진짜 인간이 되어야 천국 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될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분에 한해서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성도는 뭐냐? 성령으로 임신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신이 된 사람이 성도에요. 성령으로 임신이 된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임신. 주님이 더러운 마리아 몸에서 태어나듯이 깨끗한 성령이 더러운 육신 안에서 ‘다 이루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의 기도 내용처럼 ‘다 이루었다’가 우리 안에서 임신이 되네요. 스스로 출산이 되네요. 그것이 성령의 임함입니다. 그게 성령의 임함이에요.

성령이 임하면서 동시에 질문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나는 뭐냐?’ 쓰레기지요, 뭐. 아무것도 아니지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된 그 기쁨, 이것은 유레카입니다. 심 봤다. 평생 살면서, 교회 그렇게 다니면서 내가 성령의 받침대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접시가 있는데 어떤 분이 귀한 접시를 주신 거예요. 그 귀한 접시에 빵을 담아서 전자렌지에 돌리려고 하니까 아내가 “멈춰!” 거기에는 은이 칠해져 있는 접시라 전자렌에 돌리면 불꽃이 튄다던가, 하여튼 안된다는 거예요. 아하, 귀한 양식을 담을 때는 내가 저급접시여야 하는 겁니다. 내가 저급접시, 뭐든지 어떤 인생이 담겨도 다 담을 수 있는 저급접시여야, 세리와 창기와 강도, 도둑놈이 되어야 그게 바로 주님만 증거 할 수 있는, 곧 주님의 사랑만 증거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동안 뭐 하고 살았어요? 내 의미였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의미였습니까? 어느 쪽을 증거 하려고 사셨습니까? 그저 안 다치려고, 그저 멀쩡하려고. 맨날 생각하는 것이 그것밖에 없지요. 그저 행복한 삶.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없어요. 행복은 내가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딜 건방지게, 짐승이 왜 자기가 저를 평가해요? 바이러스, 박테리아가 웃고 있어요. 빨리 망하라고. ‘이건 내 양식이야.’ 이게 자연의 순리잖아요.

흙으로서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뭐 그리 이상한 겁니까? 이스라엘도 남북으로 쪼개졌어요. 하여튼 하나님의 맹세가 들어가면 다 쪼개집니다. 쪼개져야 맹세만 살아나지요. 그럴 때 진짜 거짓 없는 것은 바로 그 맹세와 그 맹세의 성취자가 우리 인간이 아니고 따로 오신 분, 우리 인간보다 더 대단한 분이 친히 맹세를 이루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납치되고 거기에 쓰였다는 그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면서도, 말씀을 그렇게 수백독 하면서도 왜 자꾸 우리 자신의 본색을 감추고 있는지, 그것은 남들과 비교하기 위해서 꿇리지 않을 인생 살려고 내가 나를 관리한 이 더러운 악마의 짓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주여, 이제는 내가 스스로 당당하려 하지 말고 주저 없는 말씀의 거침없는 진격과 주님의 말씀의 돌진에 우리 몸을 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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