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맹세의 발포산

아빠와 함께 2024. 8. 18. 18:45

맹세의 발포산

2024년 8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13-15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맹세는 사람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에게 맡기십니다. 이런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육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육신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지 ‘나’가 아닙니다.

‘나’는 악마로 인해 나중에 발생된 겁니다. 인간의 육신은 직접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인간의 자아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악마로 인해 생겨난 자아가 이 육신을 자기 육신처럼 다루려고 했습니다. 반칙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맹세에서 인간을ㅇ 배제합니다.

그런데 그 배제하는 방식이 맹세를 주시므로서 밝혀집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집에 있을 때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맹세가 주어졌다면 아브라함은 여유롭게 맹세를 지키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맹세의 성취 현장을 본토 아비집이 아니라 낯선 곳에 데리다 놓고 주시게 되면 인간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존에 있음을 발각시키십니다.

그냥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이 우선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은 ‘죽이시려는 목적으로 살려두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 인간이 관여될 수 없는가를 밝혀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꾸만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자기 생존에 유리하고 자신의 미래를 본인이 확정지을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은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을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죄지었다고 인식하는 것만 벌받는다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이미 날 때부터 이단입니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면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 다가 죄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에게 맹세를 하시고 언약을 내리시는 겁니까? 이사야 55:8-11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과 전혀 다릅니다. 이렇듯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이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의 연장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급한 일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입니다. 하나님 말씀지키기는 그 뒷전입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약속의 땅을 약속하니 인간들이 얼마나 오해했을까요? 그들은 율법 제사법에 들어있는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가 있습니다.

번제란 제사드리는 자가 물로서 가슴과 다리를 씻으면 제사장은 벌건 제단 위에서 다 태우는 제사입니다. 소제, 즉 곡식제사는 고기드릴 정도로 여유있지 못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들은 곡식을 바치면서 필히 누룩과 꿀을 넣어서는 아니됩니다. 이것은 제물의 식량으로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식량을 통한 하나님의 고통을 담으라는 겁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에게 직접 잘못한 죄에 대한 제사입니다. 수컷이 아닌 암컷 제물도 바칩니다. 속건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속제하는 제사입니다. 이때 제물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으로 드립니다. 화목제는 제사 제일 마지막에 드린 제사로서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잡수시고 가슴살과 다리살은 제사장이 먹고 나머지 고기들은 예배자와 그 일행이 먹는 제사입니다.

즉 화목제란 하나님 앞에서 먹고 사는 삶을 말씀하시는 제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가 인간이 제일 우선적으로 여기는 ‘나 살기’도 아니요 ‘더불어 살기’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입니다. 이 방식을 위해 처음 유월절 그날 밤에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들의 맏배도 같이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할 약속의 땅에서는 그저 살기 위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보여주기 위한 땅이라는 겁니다. 레위기 17:3-4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장이 일하시는 그 회막 장소를 경유하지 않고 고기로 자기를 살찌우려는 자는 결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이는 제사장이 사는 삶이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겁니다. 제사장의 ‘하나님의 맞재비’인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신이 미리 생각한 약속의 땅은 자신의 풍족한 삶을 염두에 둔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그대로 드러난 경우가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위장 항복을 한 기브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물어보거나 진멸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경우로 나타납니다. “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수 9:3-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 9:14-15)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묻지를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본색이 자신들의 안정된 삶 터저 찾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안정적인 생활을 복으로 여긴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란 바로 이런 것들에 의해서 방해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지않고 오히려 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맹세를 이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성도란 이런 인간들의 모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든 삶이 죄 짓는 것뿐임을 흔쾌히 인정하는 삶을 말합니다.

왜 세상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이미 자아로 벗어나 그 자아가 엷어지면서 하나님의 맹세와 말씀이 발포산처럼 보글보글 올라오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위주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맹세가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9강-히브리서 6장 13-15절(맹세의 발포산)2408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13-15절입니다.

히브리서 6:13-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맹세가 사람하고 한 맹세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과 한 맹세, 하나님 자기가 자기보고 한 맹세라는 사실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그 이유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맹세라는 것은 맹세했다고 그 모든 뜻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맹세가 실효성 있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맹세를 맹세 내용대로 완성할 수 있는 능력자가 등장해야 되죠.

하나님께서 맹세를 할 때에 너보고 하라고 맹세를 한 것이 아니고 너 말고, 너 말고 능력자를 내가 따로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능력자 앞에서 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자인지를 파악하고 그걸 느끼는 것, 이게 벌써 복 안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축복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축복에 축복을 더한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무능력자에다가 무능력자, 무능력자의 바닥에 또 있는 무능력자, 끝까지 무능력자로 들춰내지는 그것이 새롭게 발견되는 즐거움으로 성도는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못난 자, 인간은 처음부터 못난 자고 뭔가 잘못된 건데 그동안 마귀가 우리를 속여온 거예요. 마귀가 인간을 속여오면서 악마에 대해 인간이 마중 나올 때 자아를 가지고 마중을 나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만들었을 때 육신은 다이렉트로 하나님과 연관되게 되어 있는데 중간에 악마가 만들어 낸 자아가 나서게 돼죠. 내 몸, 육신과 하나님 사이에 내 자아가 끼어드는 셈이 되죠. 육신은 내가 만든 게 아닙니다. 육신이 만들어져 있고 자아는 그다음에, 나중에 나타난 거예요. 나중에 있는 자아가 시건방지게 육신이 내 것이라고 자기가 지 마음대로 인수인계하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하는 소리가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네가!”

성경에서 다윗이나 구약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죄지었으니까 죄짓고 난 뒤에 벌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벌부터 먼저 받고 죄는 나중에 아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냐 하면, 사람이 죄짓고 벌 받으면 지은 죄에만 벌이 간다고 점점 더 자아에 대해 미련을 갖고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죄 안 지을 수 있었는데 죄지었다는 식으로.

인간은 날 때부터 이단이에요. 사람들은 날 때부터 이단을 가지고 뭐라고 미화, 아주 아름답게 꾸미냐면 ‘인간은 부족하다’에요. 부족한 게 아니고 이단이라니까요. 부족한 것은 “주여, 모자랍니다.”가 부족한 거고 이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것을 이단이라고 해요, 대드는걸. 포도 농사지으면서 얼마나 대들었다고요.

인간은 그냥 모자란 게 아니고 “왜 자꾸 저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요? 왜 자꾸 나의 인생을 괴롭히십니까, 하나님.” 이렇게 대드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어디서 나왔지? 너라는 게 어디서 나왔지? 나는 네 육신을 보고 있는데 왜 중간에 네가 거기서 나와?” 네가 왜 ‘저를 왜 괴롭히냐’고 합니까?

육신은 주께서 직접 만들었고 직접 관리합니다. 어떻게 관리하냐면 내가 살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나를 살리게 되는 거예요. 왜 살지 못할 인간을 계속 살려내느냐? 살 이유도 없는 인간을 계속 살려내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에 인간이 끼어들면 안 되고, 인간의 자아가 끼어들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 작업을 하는데 이단인 인간이 굳이 끼어들도록 허락하는 이유, 그냥 하나님 본인 맹세를 “내가 맹세한다. 그리고 내가 그 맹세를 이룬다.” 하면 될 텐데 그 못난 인간을 중간에 왜 끼어들게 하면서 족집게로 빼내는 방법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인간이 배후의 악마의 작용으로 악마와 한통속이 돼서 엉망으로 만들었거든요. 그걸 이제 차근차근 주님께서 풀어내 가시는 거예요. 그걸 밝혀내시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죄지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이미 죄 속에서 육신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육신은 인간 본인이 모르는 죄에 묻혀 푹 젖어서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복음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 내 죄를 다 씻었다고 할 때에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 피로 씻어버리자.”라고 해버리면 이건 오히려 십자가를 방해하는 거예요. 십자가 의미와 완전히 상충 되는 겁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제 십자가 믿는 죄는 짓지 말자.’ 이런 식으로 인간은, 자아를 챙기는 식으로 자아를 구원하는 식으로 이렇게 작용을 하겠죠. 배후의 악마가 그렇게 하겠죠.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미련 있고, 자기 자신이 아직 건질만 하다, 가치가 있고 강하게 될 수 있고 잘날 수 있다 하는, 평소에 마귀가 집어넣은 속성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십자가의 의미는 뭐냐? 십자가의 의미는 인간이 뭘 원하고 뭘 노리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십자가 지신 거예요. 십자가는 약해서 진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약한 하나님이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구제할 때 구제하면서 ‘내가 너보다 잘났기 때문에 구제한다’는 식으로 구제해버리면 상대로 하여금 잘난 나를 모델 삼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그런 경우가 발생 돼요.

그래서 구제할 때는 구제하는 자의 약점을 마음껏 노출해서 구제된 자가 자기의 약점을 쥘 수 있도록 약점을 노출 시켜 가면서 구제를 해 줘야 돼요. ‘못난 너보다 더 못난 자가 못난 자인 너를 구제한다’ 이렇게 돼야 됩니다. 잘났기 때문에 날 도와줄 것이라는 의식을 상대에게 심어주면 안 돼요. 그러면 상대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도와준 나보다 잘난, 의지할 만한 사람을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그건 구제해서 사람을 망치는 셈이 되죠. 당신은 구제받으면서 구제하는 내가 당신보다 더 못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잡아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십자가는 뭐냐? 십자가는 어느 인간보다 못난 존재예요. 사람들이 원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그 대단한 존재하고는 정반대 쪽에 계신 분이 우리를 용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창기와 강도, 성경에 나온 이들이, 못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거예요. 그리고 잘나고 잘난 것을 으스대고 자랑하고 그것을 마치 인간이 성공한 것처럼 여기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과 그 당시 지배자들은 예수님이 못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뭐 영웅 값을 해야 영웅이지. 영웅다워야 우리가 당신을 믿지. 당신을 뭘 보고 우리가 믿어? 뭐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우리 유다 민족을 로마에게서 해방해 봐. 믿지 말래도 믿어줄게.”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예수님을 탐색했고 탐색한 결과는 결국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해서 없애버리자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이거 정말, 하나님의 대단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일체 어떤 것도 내가 필요한 것이 전혀 없는 분, 바로 그분이 피 흘렸다는 사실, 그 피가 내가 잘 돼야 한다는 근원적인 죄를 지목하고, 그걸 들춰내고, 그 죄마저 씻어줬다는 사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잘난 사람은 가라, 잘나고 싶은 사람은 가라, 이 말이죠. 십자가는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소망을 일체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로부터 비난받을 대상으로서 자리 잡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오해, 죄짓고 벌 받는다는 이런 오해, 이러한 오해가 섞여야 그 섞여 있는 그 오인들을 족집게로 집어내면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숨겨놓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달성하는 하나님의 맹세, 언약 그것이 무엇인가가 눈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어느 농부가 밭을 가는데 그 밭에서 보물이 나오고 난 뒤에 모든 재산을 팔아서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는, 남들 보기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 밭을 사서 기쁘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말씀 하실 때 천국은 이와 같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숨겨놓은 것을 하나님이 찾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숨겨놓은 것. 인간이 전혀 기대할 수 없는데 그걸 보물로 알아보는 눈은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자신 외에 인간 자신은 보물이 보물인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걸 이제 쉽게 풀이하면, 모든 인간 눈에는 돼지 눈이 달렸고 개 눈이 달렸는데 그들에 의해서 철저히 밉상 받고 천시받는 것이 바로 보물이다. 보물이 보물로서 눈에 띄는 것은 오직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 내용입니다.

나중에 성령이 왔을 때 주님의 십자가 영이 왔을 때 내가 쓸모없다 갖다 버린 그 십자가가 비로소 천국의 문이라는 것, 천국의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죠. 그때 내 앞에서 툭 떨어진 게 있는데 그게 개 눈이고 툭 떨어진 게 돼지 눈이에요. 날 때부터 이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신보다 자아가 우선인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하나님이여 내가 잘 되는 데에 뭐가 필요합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 나온 거예요. 내가 잘 되는 데에.

“너 좀 빠져줄래?” 해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내 인생에 내가 빠지면 그럼 누가 책임자인데요?” 이렇게 개기고 대드는 겁니다. 지금껏 내 인생은 내 관리하에 살았는데 “너 빠져. 너 자꾸 방해돼, 빠져.” 이렇게 해 버리면 “나 빠지면 내 인생은 어떻게 삽니까?”라고 거기서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럼 주님의 답변은 간단해요. “나는 널 죽이려고 작정을 한 거야.” 주님이 너를 죽여야 맹세가 나오는데 네가 자꾸 살려고 하니까 맹세를 덮는 거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남녀가 부부가 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킬러가 되기 위해 붙여준 거예요. 그래서 이혼을 한다는 것은 나를 죽일 킬러를 내 손으로 먼저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게 이혼이죠. ‘너 때문에 괴로워서 못 살겠다. 내 손에 한 번 죽어 봐라.’ 하여튼 ‘하나님이건 예수건 날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고자 한다면 없앨 용의가 있다’가 내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이게 내 속에 있는 비언약이에요.

하나님의 말씀, 맹세, 언약은 내 속에 있는 그 비언약을 감지해내는 겁니다. “네 속에 이거 들었다?” 네 속에 언약에 반대하는 대드는 비언약이 들어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감지하면서 주님의 맹세와 말씀은 벌써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과 대치하고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은 친히 맹세를 이루려 했고 인간은 그걸 반대하고 있으니 주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그 인간의 반대하는 요소를 뜯어내고 제끼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이 맹세를 이루는 작업에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등장은 인간의 삶의 문제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거예요. 이번에 여름수련회 신명기 강의를 여러분들이 보셨겠지만 신명기를 딱 보고 뭘 느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면 되잖아요.’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온몸으로 느낀 것이 뭐냐면, 이게 생존 문제라는 거예요. 인간의 우선순위가 생존 문제지 말씀 지키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광야를 통해 들통 날 대로 다 들통 난 거예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급선무죠. 말씀 지킨다고 뭐 돈 더 벌고 그런 거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지 못하면 나에게 실패라는 거예요. 내 인생 자체가 실패라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어쨌든 간에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생존문제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선 오늘 본문에 누구에게 맹세를 줬느냐?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줬어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고향 집에 살면서 고향 집에 산 덕에 그들은 기본 밥은 먹고 살고 거기에 하나님이 말씀까지 주셨으니까 거기서 말씀 지키면 된다, 이렇게 돼요.

그러나 그것은 맹세가 맹세대로 노출되지 않는 환경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엉뚱한, 자기 살던 땅이 아닌 엉뚱한 남의 땅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럼 텃세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남의 땅에 산다는 건 일가친척도 아무도 없고, 자기 생존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냥 툭 떨어진 거예요. 그 툭 떨어진 것인데 거기에 말씀은 또 되게 하십니다. “네가 하늘의 별까지 내가 복을 줘서 번성케 하리라.” 오늘 본문에도 나오죠. “복 주고 복 줘서 번성하고 번성케 하리라.” 뭐, 뭐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번성케 하리라. 복 주게 하고 네 후손이 잘 살게 되리라”(히 6:14) 뭐, 뭐 있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 들을 때 ‘말씀 잘 지키자’ 그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든 간에 나와 우리 후손을 살려낼 것이다, 생존 문제와 관련해서 그 맹세, 언약의 말씀을 쏙쏙 받아들인 겁니다. 받아들일 때마다 이것이 점점 더 불가능성으로, 이건 내가 해낼 수 없는 참담한 미래로 나를 몰고 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맹세를 받았지만 그는 자기가 평소에 익힌 자기 삶의 방식을 마이웨이,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열심히, 구라를 떨든 거짓말을 하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 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냥 빌어먹고 살기나 하자. 어떻게든 내 자식은 낳자. 종의 자식도 괜찮다. 무조건 내 자식으로 등록시켜서 하나님의 약속을 내 선에서 한 번 해볼까?’ 했던 것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본색은 본색대로 다 드러났습니다. ‘나는 죽어서는 안 되고 내 후손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인간으로서의 또는 동물로서의 당연한 본성 같은 것이 꿈틀거리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식대로 다 했냐? 그게 네 한계지? 네 방식을 있는 대로 다 노출시키고 네가 알고 있는 방식과는 전혀 예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는 내 맹세를 내 식으로 이룰 것이다.”

아내 태가 죽고 난 뒤에 자식을 낳는 거예요. 아내 태가 죽고 난 뒤에. 병원에서 확인해 보니까 “아내분은 더 이상 자식을 못 낳습니다.” 산부인과에서 이미 확정 지어진 후에 그 죽은 태가 살아서 거기서 이삭이라는 자식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 마찬가지였어요. 이 원칙, 그런 불가능속에서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속에 율법을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속의 율법에 상상치도 못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 상상치도 못한 내용이 레위기 17장 3절에서 4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드리면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집의 돼지 잡고 소 잡고 뭐 가축을 염소를 잡든지 뭘 잡아먹는 데…, 아 돼지는 못 잡죠. 못 먹게 했으니까. 소 잡고 양을 잡는데 잡을 때 너희 집 뒤뜰에서 잡지 말고 어디로 끌고 오느냐? 회막 문 앞으로 끌고 와서, 잡을 때 피가 나오니까, 피를 흘려도 거기서 피를 흘려라, 이 말이에요.

율법의 내용이 이게 무슨 내용인지 오늘날 우리가 공히 꼭 들어야 될 내용이에요. 이 내용의 특징은 뭐냐? 너희들은 소고기 먹고 양고기 먹고 염소 고기 먹고 살 찔 그런 대상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에 나온 다섯 가지의 제사를 통해 밝혀집니다. 번제, 다 태우는 번제는 제물을 가져오는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그 회막 앞에서 물로 씻습니다. 씻어주면 제사장은 활활 타오르는 놋제단 위에 놓고 그걸 다 태웁니다. 그게 번제에요.

그다음에 소제라는 것은 곡식 제사인데 곡식 제사는 가축을 바칠 만한 그러한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곡식을 가져오되 빻아서 가져오고 그 빻은 곡식에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은 인간들이 먹기 좋게 이스트 집어넣은 거고, 꿀은 맛있게 하기 위해 집어넣는 거예요. 그 모든 맛과 인간의 식용으로 할 수 있는 걸 빼고, 누룩과 꿀을 넣지 말고 바쳐라, 이게 바로 소제라는 거예요. 소제, 곡식 제사입니다.

그다음에 화목제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더불어 함께 먹기 위한 제사인데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어요. 그다음에 피와 기름은 제단에 태워서 하나님이 먹고, 가슴과 뒷다리는 제사장이 먹고, 그다음에 나머지 고기에 대해서는 예배 참석자와 그 모든 일행이 화목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겁니다.

이건 뭐냐면,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나는 살아야겠다’ 그거?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또 인간들이 ‘우리는 함께 살아야겠다’ 그거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것, 그게 하나님 맹세의 원형이었어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안 살겠다고 에덴동산에서 뛰쳐나왔잖아요. 뛰쳐나와서 우리끼리 살란다, 사실은 마귀와 함께 살지만, 우리끼리 살련다, 또는 더 나아가서 나만 살란다, 하는 의식 가지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면서 하나님이 너와 같이 사는 방법은 하나님 쪽에서 맹세가 개입돼야 가능해요.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이 개입돼야 가능하지 인간들이 나름대로 하나님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인간, 안 받아 줍니다. 받아 주질 않아요.

십자가를 모르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안 열어줘요, 십자가를 모르면.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십자가 피로 용서해주세요.” 하면 하나님께서 “무슨 죄?” “…한 죄요.” “아이고 그것도 죄야?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그게 죄야? 그건 거짓이야.” 내가 죄지었으니까 하나님 피 믿음으로서 죄 씻음을 받겠다는 그것은 뭐가 빠졌냐면, 죄를 짓는 것을 제가 믿습니다, 하는 네 행함은 왜 빠뜨리느냐 이 말이죠.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네 의도는 왜 뺐어? 너 노림수 있잖아, 노림수. 네 자아를 살리겠다는 이 노림수. 자아가 왜 거기서 나와? 자아가 왜 끼어드는데 거기서? 그거 뺄 수 있어, 못 빼?” “못 뺍니다.” “가, 가.”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짐승의 수컷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속건제라고 합니다. 이웃에게 뭔가를 잘못했을 때 그걸 하나님 앞에서 보상하는 것. 속죄제라고 하는 것은 수컷은 없어요. 암소 또는 암염소, 암양, 암컷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 순서는 번제부터 먼저 드리고 속건제, 속죄제, 소제 먼저 드리고 마지막에 다 같이 파티 벌이듯이 하나님도 먹고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도 ‘하나님 것으로 먹습니다’ 하는 그러한 태도로서 같이 하나님의 고기를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산다는 것은, 내가 살고 싶어서 제사 드려서 복 받아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경유 할 때만 사는 게 돼요. 왜 이스라엘에게 그런 특수한 법칙이 주어지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12장 29절에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일인데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이건 사람의 맏이를 죽이는 거죠. 그런데 그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유월절 날 다 쳐 죽인 거예요. 왜? 가축의 처음 난 것을 왜 죽입니까?

그것은 가축의 자식은 가축 기르는 주인의 생존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가축을 기른다.’ 거기서 나오는 우유와 그 고기 그것으로 하여금 우리 가족이 살찔 수 있고 원기 회복을 할 수 있어서 그래요. 가축을 왜 키우겠습니까? 가축들 좋으라고 키우지 않잖아요. 가축 키우는 사람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키우잖아요.

주님께서 그것을 금지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살 가치가 없는데 넌 자꾸 가축 키우며 살고자 하는구나.’ 그렇다면 오케이, 그 가축을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 하나님의 경유된 가축으로 바꿔서 그 고기 먹어서 네가 있을 때만 넌 비로소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조건을 갖췄다는 겁니다. 이게 제사고 이게 율법이에요. 그게 맹세고요.

그래서 제사장을 경유하지 않는 인간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이게 맹세 이게 바로 율법에 나오는 제사법이에요. ‘제사장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사장은 너희들이 먹여 살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 살리는 샘플이기 때문에.’ 보통 경상도 사회에서 이렇게 하죠. “삼촌은 너희 맞잡이다.” 맏잽이라는 말을 해요, 맏잽이. 맏잽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대신해서 눈에 보이는 존재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동등하다, 라고 표현할 때 “너희 돌아가신 아버지의 맏잽이로 삼촌 말 듣고 잘 섬겨야 돼.” 할 때 맏잽이가 들어가요.

이스라엘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맏잽이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이 어떻게 생존하는가, 가 바로 우리가 왜 생존해야만 되는가의 이유를 제공하는 겁니다. 왜? 제사장은 하나님과 맏잽이기 때문에. 그래서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은 너희의 어른이다.’ 너희의 어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정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제사장의 특징은, 제사장의 일과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예요. 어디 중심에서? 회막 중심에서 사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이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내 중심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회막 중심적이고 제사장 중심적으로 돌아가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이번 수련회 교재에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제가 그 문장 일부를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설명에 의한 안심” 설명 또는 해설 “말씀에 대한 설명 해석에서 안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로 진행되는 것이 바로 맹세다.” 교회 와서 은혜받아 정서적으로 안정 될 생각하지 마라, 이 말이죠. “어떻게 해석과 설명을 잘 해 줘가지고 이 자아가 안심하도록 해 주세요.”라는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반복적 충격에 의한 반복적 동요, 마음의 흔들림이 계속 진행되면서 나는 점점 더 소멸되고, 말씀은 그 소멸된 나를 통해서 계속 뽀글뽀글 올라가야 돼요. 그거에 대한 적합한 단어가 발포산입니다. 발포산이라는 것은 물 안에 어떤 알약을 딱 집어넣으면 뽀글뽀글 방울들이 막 올라오잖아요. 주님께서 이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주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발포산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디 다가 집어넣습니까? 지옥 같은 세상에 집어넣어서 사람은 언약을, 맹세를 살리기 위해 일하지 나를 살리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포산으로 보여줘야 돼요.

나를 통해서 맹세를 살리고 말씀을 살리고 언약을 살리는 것이지 나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게 이사야 55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말씀은 다르다는 거예요. 네 생각과 주의 말씀은 다르다는 거예요. 어떻게 다른 인간이 천국의 문을 뚫는다고 열리겠습니까? 다른데요. “누구세요?” “접니다.” “다른데?” 안 열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10절에 보면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절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낸 자를 통해 맹세를 이루지 네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취지가 아니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내게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까지 강원도에 갔는데요. 강원도 가서 어떤 작은 해변에서 해수욕이랍시고 오후 4시에 들어가서 5시에 나왔어요. 왜 오후 4시에 들어갔는가? 가신 분들이 전부 다 연세가 많아서 몸 관리 한다고 그랬어요. 저는 아침부터 갔으면 좋겠는데 덥다고 못 논다고 오후 4시에 딱 갔어요.

그런데 오후 4시에도 한 시간만 논다고 해도 그늘막 4만 원 달라고 했어요. 일행 중에 어떤 분이 다 내기는 그러니 좀 빼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뒤는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물속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니까 뭘 느꼈냐면, 이 강원도 전체의 해변 모래사장이 점점 더 짧아져요. 이건 뭐냐면,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과거는 없어요. 잘린 정도가 아니고 이미 과거 자체가 없어졌어요.

없어졌는데 사람들은 해변이 짧아지니까 ‘아이고, 뭐 짧아진 거 어쩔 수 없지. 있는 해변이라도 즐기자.’ 하는데 오늘의 우리 인생은 내일 되면 이게 과거가 돼서 없어져요. 우리는 자꾸 도망쳐요. 덮치는 죽음에 쫓겨서 날마다 도망치면서 기껏 생각하는 것이 ‘뭐 있는 것이나 살지, 뭐. 있는 날짜나 살지.’ 이러다가 요양병원으로 쑥 들어가잖아요.

뭐 남는 게 없어요, 남는 게. 점점 더 엷어진다고요. 진리도 모르고 정답도 없고 남는 것은 뭐냐? 주어진 하루만 버벅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래서 아, 참! 사람인데 복음이 도대체 안 통해요. 복음이 안 통하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사건은 터졌고 이 십자가에 대해서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데 왜 우리로 하여금 이 십자가 복음을 알게 하시는가? 뭐 말해 봐야 안 통해요. 나중에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부 다 개 눈 돼지 눈 박았는데 어떡해요. 못 알아듣는 거예요.

거기에서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너는 배달의 민족이다.” ‘배민’이라고 하죠. 배달의 민족은요, 배달될 사람에게만 전하라고 하죠. 배달될 사람. 복음은 아무에게나 전하지 말고 주께서 보낸 자에게만 네가 가라, 이 말이에요. 주께서 보낸 자에게만.

그러면 주께 보냄을 받은 그 사람은 “아이고, 저보다 이렇게 복음을 많이 알기 때문에 저를 가르치는 군요.”라고 그렇게 오해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이렇게 답변해야죠. “제가 당신보다 잘나서 전한 게 아니고 저는 이런 약점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을 구제할 때 자기 약점을 상대가 쥘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주께서 일하지 내가 일하지 않는 것을 그들에게 아울러서 증거 해야 돼요.

어쨌든 간에 인생은 맨날 쫓기듯이 삽니다. 나중에 보니 이 해변이 너무 짧았어요. 짧아요. 그 짧은 해변이 마치 절벽 같아요. 앞으로 점점 더할 거예요. 그런 인생을 왜 살게 했느냐? 그걸 근원적으로 좀 정리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해수욕 하고 저녁 먹으러 주문진항에 갔습니다. 지금 이게 순서가 뭔지 모르겠어요. 왕 해물인가 그런 게 있었어요. 유명한 맛집이라고 심지어 송 가인도 왔다 갔다고 사인 같은 거 막 있어요.

그런데 같이 가신 사모님이 그런 이야기 했어요. ‘이거 뭐 먹을 것도 없는 꽃게가 왜 들어있느냐?’ 그 말씀을 딱 하시는데 ‘이야, 어쩌면 인생을 저렇게 간결하고 단출하게, 명쾌하게 표현했는’지요. 도대체 인간이라는 존재가 뭐냐? 다시용이에요. 다시용. 국물의 맛 내기 위한 것, 왜 이 세상은 죽어야 마땅함의 그 맛을 내는 용도로 인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꽃게는 퍼석퍼석해서 건져봐야 먹을 게 없는데 꽃게가 꼭 들어가야 이 국물 맛이 나요. 먹어보면 뜯어먹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인간은 단점과 이단성, 하나님께 대드는 것 그것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 껍데기 꽃게의 등 껍데기 뜯어내고 그 안에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달려들고…, 그것만 쥐고 사시면 됩니다.

맨날 반항하고, 맨날 하나님께 화내고 분노하고 달려들고, 그것, 그것만 매일 같이 뿜어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만드신 거예요. 왜? 그게 모여야 죄짓고 벌 받는 게 아니고, 날 때부터 죄를 뿜어내는 거예요, 날 때부터. 그러니까 성도의 삶은 그렇게 편해요. 왜? 죄만 지으면 되니까. 평소에 성깔대로 그대로 살면 되니까.

뭐가 성도의 삶이 어려워요? 네 성질 돋으라고 환경을 줬잖아요.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거 하나라도 있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왜 없느냐? 성질나라고, 하나님께서 성질내라고 우리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다른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세리와 창기예요.

‘뭐 하나님 믿으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개코도 도와주기는, 인생이 더 꼬였다.’ That’s right,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다시용이에요. 왜 이 세상은 불 심판 받고, 왜 이 세상은 저주받고, 왜 제단에서 인간과 관계없는 가축의 모가지가 날아가느냐? 제단에서 왜 고기가 뜯기고 불에 태워지는가?

철저하게 이 세상은 저주받아 합당함을 증거 하는 다시물의 용도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지옥 물에 풍덩 잠그는 거예요.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내 몸 하나 살려고 내빼게 되면 모래사장이 점점 짧아지는데 어디서 해수욕할 거예요, 도대체? ‘내 쉴 곳 없노라.’ 쉬기를 이 땅에서 왜 쉬어요. 하늘나라 가서 쉬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과 더불어서 형식적인 제사만 반복했을 뿐이에요. 담긴 의미가 뭔지를 몰라요. 모르고 ‘주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땅 주시겠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주시겠지.’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곳에 소문대로 그런지 가보니까 세상에 약속의 땅이 얼마나 포도알이 굵은지 포도송이를 들고 오는데 한 사람이 못 들고 와요. 둘이 영차, 영차, 해야 들고 와요.

70 넘은 아마추어가 농사짓는 게 아니에요. 약 세 번 쳐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엄청나게 포도알이 굵으면서 농사가 잘 된, 상품 가치가 있는 포도를 가져오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때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렇게 착각을 한 거예요. 약속의 땅에 가면 우리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하나님의 맹세,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보여주는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만 맹세했다는 사실을, 그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께서 환경 좋게 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는 되지도 않는 주장들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모르는 오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약속의 땅에서 비로소 밝혀집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8장에 보면 아이 성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대로입니다. 여리고 성 무너뜨리고 아이 성 칠 때는 ‘큰 성도 무너뜨렸는데 아이 성은 작으니까 작은 성 정도는 가볍게 가뿐하게 이길 줄 알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패배했어요. 졌어요. 사람들이 많이 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 이유를 보니까, 아간이라는 사람이 남들 몰래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자기가 자기 것으로 전환 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전쟁이 싫은 거예요. 내 자아의 전쟁을 따로 꿍치고 챙기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실제로는 내게 돌아올 몫이 무엇인가를 노리면서 교회 나온 겁니다.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누가 아이 성에 패배해서 36명을 죽게 했느냐,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서서 그 범인을 색출했습니다. 색출해서 죽이고 그다음에 여호수아 8장 29절에서 결국은 아이 성의 족장을 죽여 나무에 매답니다.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을 때의 형벌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아이 성을 점령했습니다.

아이 성을 점령하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말하는 취지가 뭐냐? “그거 봐, 하나님의 맹세대로 된다고 했잖아.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중 하나가 이렇게 헛짓했지만 그걸 넘어서서 결국 하나님께서 승리하신다고 했잖아.” 그런 취지로 여호수아가 나올 때 백성들은 안심을 했어요. 어떻게 이해했냐면 ‘그래 우리는 못났는데 하나님께서 못난 것을 딛고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주시니 우리는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 든든한 하나님을 모시느냐.’ 하고 신바람이 났어요.

설교 여기서 끝나버리면요, 오늘날 우리가 딱 이 식이에요. ‘비록 우리는 못났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맹세를 이뤘기 때문에 우리는 신나서 이젠 천국 갈 날만 남아 있다’고 딱 이렇게 오해를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갔을 때 아직도 여전히 내부 속에 감추고 있던 본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여호수아 9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갔었습니다. 먼저 11절을 보게 되면 거기 기브온 사람들이 나와요.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미리 항복을 해요. 옛날에 여리고 성이 대단한 성이었는데 그걸 이스라엘이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민족은 겁을 집어먹고, 또 기브온 민족은 미리 항복을 하고, 어떤 쪽은 더 힘을 모아서 ‘저 외국의 민족을 우리 토속인들이 힘을 합쳐 쳐부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랬을 때 그 기브온 사람들이 먼 데서 온 것처럼,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위장을 합니다. 12절에 나와요.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13절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모조리 다 조작을 하고 꾸며서 “제발 살려주세요.” 하는 식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다음에 14절에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묻지 아니하고. 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항복한 그들을 받아줬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이냐 하는 관심, 자기의 본심 속에 그것은 들어있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는 애당초 자기들 마음속에 없었고 나만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도움으로 나만 살겠다는 것이 생생했던 겁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셔서 기어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아, 좋다. 기쁘다. 야~, 나 그거 믿어야지.’ 그렇게 믿으면 하나님과 함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노출됩니까? 그건 안 들키게 되죠. 그건 안 들킨다고요. 그러니까 이것도 위선자죠.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살고 싶은데 인간들은 ‘하나님 떼 놓고 나만 잘 살게 해준다면 그다음에 하나님을 섬길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장난치는 거죠.

이게 인간의 마음대로 노출이 안 돼요. 하나님께서 맹세를 이루는 과정에서 위장 귀순한, 위장 항복한 그들로 하여금 묻지도 않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과 화친을 맺고 맹세를 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게 들통나 가지고 빼도 박도 못해요. 그제야 그들이 먼 데서 온 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진멸해야 될, 없애야 될 민족인 것을 모르고 덜렁 살려준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느냐?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언약도 아닌 비맹세, 비언약, 악한 악마의 요소를 들춰냄으로써 우리는 평소에 내 말을 내 의식대로 한다고 하지만 내 깊은 곳의 무의식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무의식에 의해서 행동해 왔음을 하나님에 의해 노출당하는 겁니다.

어떤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이 노래 가사 중에 제가 유념하는 대목이 있어서 제가 한 번 채택해 봤습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는 내게 묻지만
대답하기는 힘들어
너에게 이런
얘길 한다면
너는 어떤 표정
지을까

언젠가 너의 집 앞을 비추던
골목길
외등 바라보며
길었던
나의 외로움에 끝을
비로소
느꼈던 거야

그다음 구절입니다.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 대목이에요.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나의 온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야

이민우가 불렀던 ‘사랑일 뿐이야’라는 노래에요.

어디에 나의 생각이 갔느냐면 “그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이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역경으로 힘들게 살도록 해주셨죠. 그렇죠, 하나님?”라는 말을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경솔하게 내뱉을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나 구원받기 위해 교회 나오고, 나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고, 나 천당 가기 위해 하나님 믿는 거, 이 본색을 우리 언제쯤 들킬 수 있겠습니까?

내가 뭐라고, 내가 뭔데 왜 구원받아야 되죠? 다시물인데. 진즉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왜 우리는 ‘최종 나는 구원 받았다’ 그쪽으로 해석해서 내 정서적 안정을 취하려는 식으로 성경 해석을 해달라고 요청하십니까? 있을 수 없죠.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맹세를 준 거예요. 중간에 자아가, 내가 왜 낍니까? 끼면 안 되는데. 거기서 빠져야 되거든요.

결론 부분을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맹세, 말씀을 말씀으로 살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낸다고요. 그러니까 못나기 짝이 없고, 나는 나만 챙기고, 나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기껏 하는 신앙 고백이 “제가 구원받기 위해 그동안 많은 이별을 했죠.”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서 ‘그대’를 주님으로 바꾸면 “주님 만나기 위해서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몰라. 그대는, 우리 주님은 나의 온 몸으로 부딪혀 느끼는 사랑일 뿐이야.” 뭐 상당히 예쁨받고 귀여움받을 것 같습니까?

그런 결론을 내리면 그다음부터 십자가가 없어요.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다는데 저는 기억이 없는데 질문하고 답변을 한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목사님 사도들은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았습니까?”라는 질문을 저한테 했대요. 오 목사님이 기억해서 저한테 이야기해줬어요. 그런데 제가 그때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난 뒤의 삶은 사도들이 성령 받기 전의 삶을 반복했다.’ 비로소 반복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헛짓을 했는지 몰라.”라는 이야기를 구원받기 전에는 악착같이 그 고백을 내놔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에서 했지만 이제 성령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즐겁게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렇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즐겁게 하냐면 “내가 구원받도록 주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는 이 엉터리를 그동안 얼마나 내가 반복했는지를 모릅니다.” 싱글싱글, 이렇게. 이미 자아가 갇혀있던 벽을 뚫고, 그걸 뚫고 나서 저쪽에서 그동안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서 얼마나 애를 썼고, 성경 말씀을 어떻게 지키기 위해 애를 썼는가, 이것이 헛짓이고 바보 같은 짓인 것을 즐겁게 반복하면 되는 거예요.

쉽죠? 참 쉬운 거예요. 이번에 그 강원도 가서 영진 해변에도 갔는데 해변 입구에 어떤 입간판이 있었어요. 세워 놓은 간판이 있는데 간판 내용이 뭐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장 6절” 이렇게 적혀 있어요. ‘이거 뭐, 올림픽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들고 다니는 건 봤는데 해변가에 왜 이게 있지?’

보니까 앞에 ‘영진물회’, 간판이름 다 공개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주일은 쉽니다” 해놓고 또 맞은편 해변 초입에 입간판에 “나는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그렇게 해놨어요. 그래서 ‘야, 이런 것도 해놨네.’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찍을 때 보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도 같이 찍혔어요.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시답잖게 여깁니다. 왜냐면 자기중심의 사고방식, 그런데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자기중심이 사라졌는가? 아니죠. 더 본격화 되어 있음을 비로소, 비로소! 우리 자신은 바로 내 중심이었다는 것을 옛날이야기처럼 소실되는 과거 이야기, 날마다 소실되게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맹세 차원에서 퍼부어 주는 이것이 바로 복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 이제는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모든 맹세는 주께서 다 이루었기에 그때부터 새삼스럽게 우리가 내 중심으로 나 밖에 모르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제는 즐겁게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반복하면서 주의 맹세만 쳐다보는 즐거움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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