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209a약2장1절(덮친 사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야고보서2장1절하겠습니다. 한 번 보세요. 야고보서2장1절에 보면 야고보서에서요, 주 예수 이야기가 딱 한 군데 나와요. 그래서 이 야고보서가 예수님 복음이야기인지 아니면 옛날 유대교이야기인지 내용을 얼른 보면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행함에 대해서 어떤 예시를 많이 해놨잖아요.
그런데 2장1절에 보면,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예시를 많이 한 이유가 야고보가 어떤 전제를 깔아놨어요. 어떤 전제냐 하면 2장 1절에 나옵니다. 내 형제들아, 해놓고 형제조건을 달아놨어요. 형제의 조건이 뭐냐 하면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굉장히 특이해요. 보통 형제라 하는 것은 어떤 종류냐 하면 형제라는 말을 할 때는 이건 보통 상투적인 이야기는 뭐냐 하면 같은 아버지, 어머니를 갖고 있는 그런 육적인 가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형제라 할 때는 이건 다 아시지요.
그런데 형제라고 이거 외에 다른 육적인 연관성도 없는데 형제라고 했을 때는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구약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의 형제 또는 초대교회 때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형제라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가족이 육적이라면, 육체적이라면, 형제는 정신적으로 생각을 같이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정신적으로 형, 동생 한다고 해서 형제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한 부모의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다 같이 공감을 해줘야 돼요. 한 부모.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공감을 해줘야 돼요.
마피아가 그거 아닙니까. 야쿠자가 그거구요. 조폭들이 그거거든요. 일본 야쿠자들이 팔목 잘라가지고 피 내면서 인간은 두 번 형제 있다. 하나는 부모로 태어난 형제 있지만, 이제는 의리! 의리로 맺은 형제 있다. 이리 하잖아요. 돈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형제. 진짜 돈 앞에서는 형제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의리 찾아도 소용없어요.
그러니 이 형제라고 할 때는 한 부모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야고보에서는 위에서 나왔다 해요. 위에서. 이 야고보서는 엄청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내 형제들아, 할 때 우리는 딱 보게 되면 ‘아이고, 뭐~ 같은 교인들끼리 믿을 수 있겠어?’ 이러한 내용부터 탁 나오지요. 형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돈 빌려가서 안 갚았겠습니까. 보증 서달라고 얼마나 했겠습니까? 형님! 동생! 이래가지고 얼마나 사기를 쳤겠어요. 이 세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옛날도 마찬가지고요. 의리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의리는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서는 아주 단정을 해요. 형제들아! 이 말은 뭐냐 하면 니나 내나 우리는 주님이 주신 덮어씌우신 운명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런 경우에 아주 대표적이고 알기 쉬운 예가 뭐냐, 전부다 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게 방주입니다.
방주는 그저 가족끼리 친해지고 싶어서 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가면 죽어요. 왜? 물이니까. 이걸 성경에서 노아방주를 언급하면서 여덟 식구와 같이 있었다는 것을 한 가족이니까 당연히 있는 것이라 이리 생각하시면 안돼요. 달리 갈 데가 없어요. 예수 믿는 거 보고 달리 아무런 갈 데가 없고 다른 믿을 것도 없는 그러한 사태. 그러한 사태가 우리에게 덮쳤다. 라는 인식을 갖은 사람은 형제입니다. 집안이 다 말아먹고 돈 날리고 집에 불나고 지진 나고 다 없어진다 할지라도 주 예수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찾는다는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기적이지요. 미라클이지요. 기적이지요. 기적!
아! 참, 그런 사람 모였으니까 이게 있는가 싶지요. 세상에 나가 보세요. 교회에 보세요. 그런 사람 있는가. 없어요. 다 제각기 자기 가정 복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온 거예요. 제각기. “이거 다 날아가도 불나도 저는 예수님만 있으면 더는 소원 없어요.” 이런 사람을 물론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합니다만, 우리가 막상 안 당해보니까 나도 그 신앙 유지될지 안 될지 장담하기 곤란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노아방주 할 때 우리가 언제 했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 때 했어요.
그 때 노아를 가지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본 겁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믿음의 후손은 조상 따라가기 마련이지요. 조상이 밖에 못 나오고 하나님이 정해준 구역 내에서 구차 없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조상이 그렇다면 그 믿음의 대대로 연이은 그 자손들도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똑같은 처지에. 그 처지는요, 인간이 자유하기 때문에 자기 팔자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 하잖아요. 그런데 전혀 자기가 팔자를 알아서 할 수 있는 입장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11장에 모세가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즐겨하셨으니 이는 장차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봄이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은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사태. 지금 어떤 낯선 상황이 덮친 거예요. 대만에 갔던 어떤 한국 사람이 지진 나가지고 호텔이 삐딱하게 엎어진데 있었어요. 자,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나중에 살아남았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앞으로 인생에 대해서 말을 안 하겠다.” 그게 굉장히 의미심장했어요. 나는 뭘 해서 성공해야지. 뭘 해서 해야지. 그것에 일체 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껏 그 사람은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가 결정해서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런데 대만에 갔다가 호텔에 묵어가지고 호텔에 삐딱하게 되었는데 하루 만에 금방 구조 받은 것도 아니에요. 12시간 지나서 하루 갇혀서 딱 살아왔을 때 그 사람은 뭘 생각하느냐, 도대체 내가 뭐냐는 거예요. 내가 뭐냐?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내가 뭐냐? 이걸 제 표현대로 하면 ‘사태’에요. 사태. 우리가 원치 않는 사태에 우리가 그냥 말려든 거예요.
이걸 뭐냐 하면 오늘날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게 되어있는 사태. 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걸 굉장히 심각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소소한 눈앞에 있는 즐거움 있잖아요. 눈앞에 있는 여기에서 내가 얼마나 빛내고 얼마나 성공하고 그리고 자기 인생에 실패감과 자괴감에 빠지는 것. 코앞에 있는 성공했다고 좋아하고 실패했다고 낙담하는 그런 속에 있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공, 실패라는 것이 이제는 무의미한 사태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성공, 실패가.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 믿음. 오늘 믿음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할 거예요.
자,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떤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 주어지는 사태 속에 우리가 갇혀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하늘에서 지붕을 만들어서 뒤집어 씌웠다 이 말입니다. 하늘에서.
그러니까 소소하고 사소한 일이라고 제가 이야기했는데, 내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거기에 심각한 일로 생각하거든요. 나름대로 심각한 일을 했는데 이게 성공을 안 거두면 나는 어떻게 살지? 라는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형제들한테는 하나님에게 태어난 같은 형제들한테는 그런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에게서 가장 심각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명예와 관련된 겁니다. 그 사람 그렇게 잘 먹고 잘살았는데 망했데~ 망했데! 자, 지금 안 망했어도 유지로 간당간당해도 망할까봐 인간은 겁내요. 뭔가 쫓기듯이 망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안 망해도 쫓기고 있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더 이상 쫓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누가 납치했으니까. 하나님이 하늘의 은사가 나를 납치했으니까. 이걸 사태라. 납치한 사태가 일어나고 보니까 내가 내 홀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그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 들통이 난 거예요. 누구한테 욕 얻어먹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돈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께서 나를 아들로 받아줬다는 것.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야고보서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줬다는 이 사태 앞에서는 이 방주 앞에서는 이 안에 들어온 것만 해도 더는 소망이 없는 거예요. 더는 바람이 없는 거예요. <10월의 어느 날> 노래처럼, 더 바램은 내게 죄가 됨이라 하는 것처럼. 이 물이 있는 입장에서는 이것만이 유일한 살길이거든요. 생명이 여기에만 있다 말이지요. 밖에 나가면 뭐냐 하면 옛날에 한 가닥 했던 사람들. 성공, 실패가지고 매일같이 스트레스 받는 그런 일상적인 사람들이 존재했던 그 세상이 하나님이 주신 심판의 물로서 완전히 덮어버렸거든요.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어요. 인자가 올 때는 그러함이라. 옛날에는 노아 때는 물로서 전체를 심판했지만, 앞으로 뭘로 심판한다 했습니까? 불로서 심판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노아가 비오는 걸 보고 방주를 만든 게 아니에요.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노아가 비오는 걸 보고 방주 만든 것이 아니고 비 온다는 약속 때문에 방주를 만드는 것도 약속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예수님의 뜻이에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봐주기 위해서.
도래하지 않는 일을 내 백성이기 때문에 소위 임시 특혜를 준다 할까. 특혜를 베풀어가지고 니는 돈 이런 것으로 가정 행복에 닦달하지 말고 이 예수의 피를 믿어라. 그러면 살리라. 니가 죄인이라도 의인이 된다.
적어볼게요. 죄인이라도 뭐가 된다고요? 의인되지요. 그러니까 죄인에서 의인되려고 애써야 돼요? 애 안 써야 돼요? 애를 안 써야 돼요. 만약에 죄인이 의인되려고 애써버리면 이게 죽어요. 주님의 의인되심이 죽어요. 그걸 보통 개혁신학에서는 칭의라 하는데 의인이라 칭해준다 말이죠. 칭의란 별로 좋은 말 아니에요. 그건 엉터리인데.
어떻든 간에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관계 때문에. 사람을 좋은 사람을 만나야 돼요. 주님을 안다는 이것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뭐됩니까? 의인되는 거예요. 그 의인은 뭐를 자랑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어있는데 예수님 자랑할 때 뭔가 밑천이 있어야 돼요. 그 밑천이 뭐냐, “내가 한평생 죄인이었습니다.” 를 밑천을 깔아야 돼요.
그러면 야고보서에서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뭡니까? “니가 이래도 죄인 아니야?” 하는 그런 뜻이에요. “니 이래도 죄인 맞잖아.” 라는 이야기가 야고보서 1장부터 쫙 써있는 겁니다. 이게 이해되어야 돼요. 이해되시지요? 여러분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 듣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뭘 이해하라는 말이냐 하면요. 성경에서 뭘 하라, 하라, 하는 말은 그거 안 하면 탈락시킨다는 말이 아니에요. 협박용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명령을 줄 때는 이 예수의 마음은 느긋한 마음인데 니도 그 느긋한 마음을 니가 나하고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를 불러서 구원했다 칩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실 때는 주님 입장에서는 느긋하지요. 왜? 그 사람이 자기 행함으로 의인될 가능성이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느긋해요? 니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니가 세리고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 느긋함. 그 느긋함을 공유할 때 그게 믿음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이라 할 때는 결국은 믿음이 없을 때를 죄인이라 하잖아요. 이제 제 논리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내가 죄인이라는 말은 뭐냐, 믿음이 없을 때 하는 행동들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이 없을 때의 행동들이 뭡니까? 내가 성공해야지. 제가 두 번 다시 이야기 안한다고 했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만, 내가 무슨 결정을 할 때 옳은 결정이기를 해서 잘되면 나는 성공이라고 여기고 못되면 나는 인생 조졌다. 인생 실패로 보잖아요. 그런 생각 자체가 뭐에 포함된다? 불신앙이고 그게 죄이고 육이 있는 이상은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아요. 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1장에서 우리가 누누이 봤듯이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져요. 하나님의 은사가 딱 주어지니까 은사하고 지상에서의 내가 헐떡거림.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 주여! 이러시면 안돼요. 이렇게 마주하면서 얼마나 우리가. 야고보서2장에 주욱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뒤에 죽 나오잖아요. 형제를 질타하고 니 나보다 못해.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것과 하늘의 은사가 마주할 때 우리는 야고보서가 “니 믿음 있어?” 라고 묻고 있는 책입니다.
“니 믿음 있어?” 다시 말해서 “니는 느긋함이 있어?” 못난 너를. 딕훼밀리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60이상은 압니다. 그 이하는 몰라요.
해도 잠든 밤하늘에
작은 별들이
소근대는 너와 나를
흉보는 가봐
설레이며 말 못하는
나의 마음을
용기 없는 못난이라
놀리는 가봐
랄랄랄라
랄랄랄라
랄랄랄라
라라라라라라라
미소 짓는 그 입술이
하도 예뻐서
입 맞추고 싶지만은
자신이 없어
누군가가 요놈하며
나설 것 같애
할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거든요. 그 못난 자를 아시고,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구원했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건사했다는 말 알지요? 거두어주는 거예요. 이게 사태입니다.
아까 노아 이야기했지요. 노아가 물 심판 이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셔가지고, 은혜 주셨다는 것이 이렇게 술 먹고 들고 자는 게 은혜가 아니고 뚝딱! 뚝딱! 남들이 이해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 거예요. 남들이 안 하는 짓. “집사님 뭐하셔요?” “몰라도 돼.” 뚝딱! 뚝딱! 방주 만드는 것.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것. 예수 믿는 게 오늘날 취직하는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가정행복에 무슨 쓸모가 있어요? 본인이 알아서 준비했습니까? 아니에요.
주님께서 시킨 거예요. 신앙을. 지금까지 안다 치고. 지금부터 어렵습니다. 제가 방금 두 가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믿음을 두 가지의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첫째는 내가 준비하는 믿음과 두 번째는 하늘의 은사. 은사라는 말은 선물입니다. 선물. 하늘의 선물로 준 거 하고 내가 준비하는 거 하고, 내가 준비하는 것은 사단 나는 거예요. 큰 탈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은 치매에 걸리면 다 날아가 버리니까. 내가 준비한 거 치매에 걸리면.
그러면 하늘의 은사는 뭐냐, 니가 벌써 치매에 걸렸다 치자 이 말입니다. 니가 치매에 걸렸다 쳐도 니 의식이라든지 너의 감정이라든지 너의 이성, 따짐이지요. 여러 가지 절제. 이런 것을 하늘에서 개무시하고 주신 은혜에요. 우리 스스로 이리 생각하면 제일 쉽습니다. 우리가 성령 받아서 믿음이 생겼잖아요. 그럼 나를 이름을 고치세요. 제가 이가인데, 이름을 아예 바꿔버리는 거예요. 이 치매라고. 이 치매는 다른 말로 하면 등신이지요. 이 등신. 공 등신. 등신이 가는 나라. 천국이에요. 미리 등신이 안 되면 그건 못 갑니다. 미리 치매 환자 아니면 못 가요. 왜냐하면 똑똑하기 때문에 자기가 준비해요.
“목사님, 헌금은 몇 프로 냅니까?” “내가 교회는 몇 번 가면 됩니까?” “이런 행동은 해서는 안 되지요?” “이런 행동은 해야 되지요?” 자꾸 꼬물짝 꼬물짝 준비한다는 그 자체가 결국 자기는 뭐 되기 싫다는 말이에요? 나는 치매환자 되기 싫고 나는 병신, 등신 되기 싫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바로 하늘의 은사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혼란스럽던 신앙생활 오늘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정리하고 오늘밤에 낙원에 갑시다. 골치 아픈 거 하나도 없어요. 지금 골치 아픈 거 하나도 없어요. 똑똑해서 탈이라. 똑똑해서 탈이고 신학교 나와서 탈이고. 바보 안 되려고. 세상에서는 바보 되면 실패자에요.
그러니 결국은 내가 내 실패를 거부하고 있다는 강력한 어떤 힘 같은 게 내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니는 똑똑해야 돼! 니는 남한테 지면 안 돼!” 이런 거요. 언젠가 제가 낮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했지요. 지지난 주인가. 인간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승부근성이라고 했습니다. 승부근성. 인간의 악마적인 요소가 승부근성이에요.
아까 집사님하고 식사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승부근성이 성경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지고는 못 살아요. 다 이겼어요. 속여서라도 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근성을 이용해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야곱한테 져버려요. 질 때 야곱이 하나님을 이기고 그 다음에 울고 통곡한 겁니다. 내가 이런 놈인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이런 놈인데 내가 자칭 뭐다? 복의 근원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야곱은 복의 근원 아닙니다. 야곱 속에 야곱이 모르는 다른 분을 하나님께서 만들어내기로 야곱을 이용한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구원되었기에 예수님 구원 받을 때, “너도 같이 있었어!” 라고 통보해 주는 거예요. 말씀으로. 주일날 설교할 거 미리 말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 사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는 뭡니까? 내가 보인다고요. 지지난주 설교에서 겉모습은 내가 보이니까 남들이 나를 보고 나에 대해 평가하니까 자연적으로 우리도 나에 대해서 남한테 안 꿇리려고 안 지려고 나의 겉모습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거예요.
이걸 주목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같은 말 아닙니까. 지목하는 거, 주목하는 거. 주목이라 봅시다. 사람이 일상생활하면서 누가 어디 뭔가 주목하는 경우가 되면 어떤 물건이라든지, 어떤 사건, 앞일에 대해서 주목하게 되면, 뭐를 놓치느냐 하면 ‘초과적인 영향력을 놓치게 됩니다.’ 초과적인 영향력.
초과적인 영향력이란 뭐냐 하면 야고보서2장1절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고보서1장에서 하늘의 은사가 있다 했지요.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까 다시 이야기 안합니다. 야고보서1장에 보면 가장 좋은 은사는 1장 11절에 어디서 옵니까? 위에서 오지요. 야고보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도요, 사람보고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신앙 있는 사람만 알아들으라는 이야기에요. 위에서 은사가 와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의 노력과 행함은 야고보서에서는 전혀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열심히 합시다. 이건 없어요. 야고보서에서는 없어요. 은사부터 시작해서 은사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은사가 2장1절에서는 뭐냐 하면 영광의 주를 우리 주 예수 믿는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 믿음을 저는 방금 뭐로 표현했습니까? 믿음을 ‘초과적인 영향력’으로 표현한 거예요. 초과적인 영향력. 초과적인 영향력은 말은 굉장히 어려운데 아까 쉽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인을 위해서 오셨거든요. 죄인을 위해서 오셨다는 이야기는 2장 뒤에 계속 나오는데. 죄인으로 오셨다. 그러면 죄인이 아는 죄인은 죄인이 자기 자신을 아는 그 범위가 만약에 한 자기 반경 25Km라면 그러면 죄인은 기껏 25Km 상황을 안다면 그러면 초과적이다 라는 말은 뭐냐, 26Km, 27Km, 28Km 이리 된다 말이지요. 그런데 26, 27Km돼봤자 인간은 25Km초과 못하니까 기껏 평생을 살아도 1살부터 91살까지 평생을 살아도 지가 체험하고 지가 알고 있는 정보, 알고 있는 것만 걷어 모아 가지고 이게 인생이고 이게 현실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기껏 자기가 아는 거.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강원도에 있는 어떤 할머니는 나이가 90인데 한 번도 강원도를 벗어난 적이 없답니다. 90인데 제주도도 안 가봤어요. 강원도를 벗어난 적이 없답니다. 그러면 그 할머니가 아는 지식은 결국 어디서 나온 지식입니까? 강원도 내에서 포집한 것, 모아들인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어쨌거나 배낭매고 자꾸 유럽으로 여행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견문을 넓힌다 하지요. 물론 인터넷 가서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제 보는 거 하고 온 몸에 피부에 와 닿는 게 다르잖아요. 피부에 와 닿는 게. 일본에 직접 가는 거 하고 내가 백날 보는 거 하고. 이스라엘 동영상 수백 개 봤는데 그 보는 거 하고 이스라엘 진짜 가는 거 하고 이게 다르잖아요. 다를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러니 모든 인간은 제한적이다 말이죠. 모든 인간은 제한적이다. 한 달 수입 50만원에서 200만원 사이의 많을 때는 200만원 적을 땐 50만원 이래가지고 평생 사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한 달 자기 용돈이 1억원 되는 사람 세계를 알겠어요? 모르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범위를 벗어나니까.
그러면 인간들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이 말은 뭡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재벌 되어야 돼요? 이 사람이 그러면 해외여행 가야 됩니까? 하나님은 그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백날 해외여행하고 재벌 돼봤자 요거는 직평적이에요. 직평적. 하나의 판대기. 직평적 옆 동네에요. 윗동네가 아니고 옆 동네라니까요. 잘 보세요. 여기서 저기 가도 옆 동네에요. 옆 동네. 윗동네가 아니라 말이지요.
구원은 어느 동네입니까? 옆 동네가 아니고 윗동네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초과적인 영향력이라 말씀드리는 거예요. 내가 부자 되면 주를 알겠지. 아,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죠. 옆 동네가 아니고 윗동네에요. 윗동네. 윗동네는 고맙게도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어요. 고맙게도. 이 고맙다는 말은 왜 하느냐 하면 사람에게 꿇리지 말라는 말이죠.
주님이 낚아채는 사태, 주님께서 낚아 챌 때에 “나는 하늘나라 안다.” 이 자랑질 하는 게 아니고 반대가 돼가지고 ‘아! 내가 어느 동네에 살아도 못사는 동네에 살아도 잘사는 동네에 살아도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그것을 알게 되는 체험은 이건 윗동네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윗동네. 그 사람은 초과적인 영향력 속에 녹아져있기 때문에 초과적인.
어떤 하나의 지우개에 주목하잖아요. 사람은 이렇게 육적으로 주목하게 되면 다 잊어버려요. 하지만, 지우개 있었는데 지우개를 잃어버렸어요. “아우~ 지우개 어디 갔지?” 하다가 ‘아~ 내가 지우개 살 때 돈이 아까워서 못 샀구나. 그럼 돈을 왜 아까워하지? 아~ 내가 돈이 있으면 성공이고 없으면 실패다.’ 라고 또 옛날 내가 죄인으로 살던, 불신앙으로 살던 그 행세가 지우개 하나를 잃어버림을 통해서 다시 새롭게 나한테 각인되는 겁니다. 새겨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이게 성도거든요. 그 때 뭘 느낍니까? 잠시 잊어버렸던 초과적인 영향력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자, 여기서 이제 어려운데 초과적인 영향력을 내가 모르면 그러면 천국 못 갑니까? 믿음 없는 거예요? 제가 아까 그 이야기했지요. 우리를 뭐로 보라고요? 등신으로 보라고 했지요. 미리 당겨서 치매환자로 봅시다. 치매환자로 보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셨다 말이죠. 주님께서 죄인 되게 하셨으면 내가 죄인 되어서 주님의 은사를 받아 챙겼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찾아왔기에 죄인된 거예요? 주님이 찾아왔기에 죄인된 거죠.
지금 컵은 안 움직입니다. 내가 이 컵을 만지려면 내 쪽에서 손이 뻗어져야 컵을 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컵이 여기 있다가 움직였다면, 이건 누가 봐도 컵이 알아서 움직인 게 아니고 내 손이 이렇게 옮긴 거잖아요. 그러면 등신이 되던, 치매가 되던,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은 지금 누구 손에서 움직입니까? 내 손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주님 손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오늘 갈 때는 운동화 신고 가라. 이것도 주께서 이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 십자가만 믿는 믿음만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믿음뿐만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소급해서 다 줘요. 뭐냐 하면 지금껏 살아온 그 모자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주님 허락 없이는 주어진 게 없음을 일괄적으로 다 줘요. 일괄적으로 해태종합선물이라니까요. 다 준다니까요. 요거는 내가 했고 요거는 주님이 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럼 기도가 뭐냐 하면, 기도란 소급해서 내가 애써서 주어진 것은 내게서는 전혀 없음을 다시 소급해서 깨닫는 것이 기도잖아요. 보통 기도할 때는 편할 때 기도합니까? 답답할 때 기도해요? 뭔가 기독교 용어로 컬컬하고 답답한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막걸리 마시면 되는데 우리는 막걸리 대신 컬컬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하기 전에는 문제해결이 안돼서 해결해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문제해결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리 짐작하겠어요? 짐작 안하겠습니까? 미리 짐작을 해요. 요 정도 되면 문제 해결되었습니다. 라고 지가 나름대로 한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너무 똑똑해요. 등신이 안 되고 너무 영악해. 똑똑해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 버리는가 하면 초과적인 영향력이 이게 느껴지지를 않아요.
‘아! 나는 기도만 하면 능력 받아.’ 관심사가 누굴 주목합니까? 자꾸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켜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거 마귀한테 계속 시달립니다. 목사 마귀한테 계속 시달려요. “목사님, 또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다음에는 헌금 더 할까요? 기도를 몇 분 더 할까요? 성경 읽기는 몇 장 더할까요? 예배 참석은 몇 번 더 합니까?” 계속해서 목사한테 묻고 시달리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 다니면서도 그러한 우울증 환자, 정신병 환자들이 많은 질문을 저한테 해요. 술 먹고 전화하는 사람들 정말 받고는 전화번호 지우고 싶어요. 저한테 행패를 부려요. 행패를. 나보고 행패를 부리는 게 아니고 한국교회 썩었다. 이렇게 술 먹고 한다고요. 한국교회 썩은 거 가지고 술은 왜 먹느냐 말이죠. 그 모든 문제에 본인이 문제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본인이 왜 그렇게 뭔가 성경을 왜 알려고 하느냐,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생 실패를 의미하고 나중에 자살까지 해요.
만약에 남한테 안지면 그걸 인생 성공이라고 자부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생 성공하려면 야곱처럼 어떻게 해야 돼요? 악발이 되어가지고 속여서라도 노력해서 성경 말씀에 신에게 헌신하라 하니까 헌신도 마다하지 않고 헌신도 하고 가는 곳마다 헌신하고 충성하고 희생하고 봉사하고 이웃사랑하고 그렇게 자기에게 밑천에 투자를 다 하는데 그거 왜 그래요?
그만큼 자기가 정상인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정상인은 어디서 봤느냐 하면 같은 수평적인 이웃에서 본 거예요. 이웃이라는 말은 옆집사람이 아니고 TV에서 본 거. 잘사는 집에 한 번 방문하고 난 뒤에 느낀 거. 누구 아들 잘됐다는 그거. 들은풍월 때문에 그거 따라 간다고 가랑이 찢어지는 겁니다. 그거 따라 간다고.
참, 여기서 그만하니까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 존경스럽기 짝이 없어요. 참 이러면서도 밝고 환하고 더는 욕심이 없다만 속이야 어떻든. 그런 모습을 보일 때 훈장까지 타고. 와~ 그러니까 만나도 성령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돼요. 만나도 성령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이게 ‘아~ 저런 인생도 있구나!’ ‘저렇게 해서 인생사는 것도 있잖아.’ 수평적으로 가랑이 찢어져가지고 따라가다 따라가지 못하고 지도 당하고. 이게 아니고 자살하고 이렇게 하지 말고 뭔가 수직적으로 누구한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것처럼 손에 잡혀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
누가 나보고 욕하고 이런데 신경도 안 쓰는 사람. 낯짝 들고 살려는 생각 아예 없는 사람. 그런 사람 없겠지만 하여튼 나 이렇다! 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 갑자기 이러니까 우리 가운데 해당되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그저 욕 안 얻어먹고 살려고 그러지 마시고 이게 야고보가 말하는 형제라는 겁니다.
야고보서를 보게 되면요, 요구하는 게 너무 과도함의 느낌을 받아요. 성경을 보게 되면. 얼마나 과도한지 볼까요. 여러분, 이 성경을 보고 알아야 돼요. 야고보서5장 4절을 봅시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귀에 들렸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일은 했는데 품삯은 못 받은 거예요. 거기에 대한 대책을 보세요. 형제들아! 형제입니다. 일반 사람이 아니고 형제들아. 10절,11절,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9절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 돈 벌 생각 하라,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돈 벌 생각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형제라는 겁니다. 얼마나 형제의 기준이 야고보는 너무 월등히 높아져버려요. 야고보서4장 13절 보세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여기에 아무 도시라고 했는데 여기 도시에다가 제천을 집어넣어요. 제천에 가가지고 장사하려하지 말라. 목욕하다 죽는 수가 있다. 이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요구하는 바가, 요구하는 기준이 인간의 힘으로서는 하늘의 은사 없이는 이게 도저히 흉내도 못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따라잡으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있는 그런 관점을 너도 갖고 있잖아. 라고 지금 묻는 겁니다. 원래 우리는 죄인이란 말이지요. 자, 이런 관점에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보겠습니까? 새삼스럽게 어느 도시에 가서 성공하려는 마음 갖겠어요? 안 갖겠어요? 안 갖지요. 그러나 처음에는 가져요. 처음에는 가지다가 야고보서 보는 동시에 형제라는 말을 듣는 동시에 ‘내가 부질없는 욕심을 부렸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4장4절에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뭐가 된다? 원수가 된다. 보세요. 야고보서에서 제시하는 기준이 얼마나 이건 높은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할 정도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형제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은사를 못 받은 사람이라면 이 야고보서를 보고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래 내가 세상 친구 다 끊어야지.” 이리 나온다 이젠 동창회도 안가고 계모임에도 안가고 다 끊어야지 하는데 직장생활도 안하고 다 끊어야지 하는데 지금 그런 이야기 아니라니까요.
다시 아까 한 거 다시 해볼까요. 믿음을 할 때 내가 노력해서 얻는 그 믿음 있잖아요. 그 믿음은 믿음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왜 오셨는데요? 잘난 사람 뽑아가려고 오신 게 아니잖아요. 이 야고보서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다 못난 인간들이에요.
못난 인간인데 형제 된 이유는 바로 방주 마련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은사가 믿음을 줘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1번 똑똑해서 잘나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요? 본인이 등신 되면 안 되겠지요. 치매되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화근이라. 이게 바로 불신앙의 증거란 이 말입니다.
내가 손을 대서 내가 컵을 줬잖아요. 그런데 컵이 억지로 해서 꺼떡 꺼떡 나한테 오려고 하면 이게 가능한 게 아니지요. 불가능한 거죠. 왜냐하면 컵은 옮겨봤자 수평에서 수평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하늘의 은사는 어디에 있다? 수평이 아니고 수직에 있잖아요. 수직에 있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전부다 야고보서에 의하면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안개 아니라고 우기고, 도시에 가서 돈을 벌려고 했고. 그런 거예요.
지금껏 제가 이야기한 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바보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치매환자는 누구의 눈치를 안 보잖아요. 그걸 지난 시간에 자유라 했어요. 자유케 하는 율법이라 했잖아요. 자유케 하는 율법. 벌써 한 달 지났다고 다 잊어버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으니까 야고보가 요구하는 대로 우리가 다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야고보 주 예수를 모독하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관점을 안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을 못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좀 더 나가봅시다. 하나 물어볼게요. 3가지 중에서 답변해 보세요. 다음 중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1번 수갑, 2번 영하20도 체감온도 영하20도, 3번 신앙, 몇 번입니까? 1번도 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하지요. 손을 묶어버리니까. 형사들이. 2번은 어떻습니까? 바깥에 영하20도인데 왜 기어나가요. 큰일 나지요. 감기 걸리려고. 영하20도에 거리에 안 나옵니다. 전부 다 안에 있고 거리에 다니는 것은 음식 배달밖에 없어요. 전부 집에서 자장면 시켜 먹고. 배달이 장사는 잘되는데 춥고 이러지요. 밖에 안 나오지요. 심지어 요번에 뉴저지에는 체감온도 영하50도라.
그런데 사람은 이 두 개가 물리적으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한다고 생각하는데 세 번째 신앙, 신앙이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해요. 신앙이 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느냐 하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지붕이야기 했지요. 지붕으로 덮어버린다 했지요.
이걸 수요일날 언급했어요. 전체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제가 지난 수요일날 설교하면서 야곱은 현재 사람이고 천사들은 미래의 안목을 갖고 있는 천사들이 거든요. 보니까 안 들은 모습이다. 현재의 야곱을 미래가 야곱을 미래의 사람으로 만들어요. 만드는데 뭐냐, 미래의 사람이 딴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미래의 사람이에요.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에 가려면 이미 살아있으면서 천국 가야 돼요. 천국이 와 있어야 돼요. 와있다. 없다, 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앞으로 주님과 함께 만났을 때도 안 죽을 수 있는 요건과 요소가 그 안에 그 사람 속에 들어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 그 전체적인 의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언약인데, 언약이 야곱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내 속에 들어오는 그것이 세상에 북한의 김정은이라든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하는 그 일의 원칙과 동일한 원칙이 내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지금 이해를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체적인 의미를 설명하겠어요. 이걸 장충체육관으로 봅시다. 체육관 넓잖아요. 우리는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는데 체육관 입구에다가 전체적인 의미를 붙여놨어요. “체육관에서는 조용히 하세요.” 라는 원칙이 있다고 합시다. “조용히 하세요.” 무조건 이 안에서는 조용히 해야 돼요. 그런데 2사람이 여기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합시다. 자, 그러면 전체적인 의미에서 라면 끓여먹는 것은 용납됩니까? 안 됩니까? 용납이 되지요. 조용히 하라고 했지 라면 끓여먹지 말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그런데 라면 끓이면서 하나, 둘 하면서 소리 내면 안 되는 거예요.
자, 전체적인 의미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 전체적인 의미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장사를 하던 지 맘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용납되지 않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자기 의에요. 자기 의. 자기 의라니까요.
우리가 한국 살다가 베트남에 갈 수도 있고 캐나다에 이민 갈 수도 있어요. 있어도 원칙 전체적인 의미를 품고 가야 돼요. 의미는 뭐냐, 북극에 가서 살지라도 예수님의 피, 용서, 그 피를 가지고 피가 있은즉 넘어간다 했잖아요. 이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고 피가 있으면 용서를 받아요. 그 의미 안에 우리가 성도는 꼼짝 못하게 묶여져 있다 말이죠.
여러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했잖아요. 신앙은 우리를 기분 좋은 원칙이지요. 우리한테는. 정말 감사에 꼼짝 못하게 묶어져 있다는 점이 세상 사람과 다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뭐하라?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니가 어떤 짓을 어떤 행동을 해도 니는 그것 때문에 그 행동 하지 말라 때문에 인생 온 게 아니고 주께서 주신 의미 때문에 이 땅에 니는 신앙인이 된 거예요. 신앙인이.
교회 키우라고 그거 하라고 우리 한 게 아닙니다. 이웃사랑 하라고 한 게 아니에요. 등신이 무슨 이웃 사랑을 해요? 지 밖에 모르는 등신이. 치매환자가 무슨 이웃사랑을 해요? 우리는 치매환자라고 등신이라고 제가 일부러 자꾸 낮추어서 하는 이유가 등신 돼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하늘이 주신 요소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나로 하여금 천국에 이동하기 때문에 내가 등신이 되던 바보가 되던 내가 똑똑하다고 수직되는 거 아니거든요. 수평적 옮김밖에 더 되겠어요. 하늘로 가는 거 아니잖아요. 여기서도 하늘, 저기 가도 하늘, 어디가도 하늘나라 가는 원칙만이 성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배라는 말은 우리가 그 안에 꼼짝 못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8장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계명대학교 그 앞에 보면 붙어있어요. 계명대학교 기독교학교 아닙니까. 옛날 영화촬영 많이 한 건물 있어요. 미국식 우아한 건물에 딱 붙어있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속되어라. 니가 자진해서 종이 되어라. 무엇에? 진리에. 진리가 누구냐 하면 진리는 진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되었어요. 거기에 감지덕지하고 그걸 고마워하라 이 말이지요. 그게 형제에요. 내 형제들아! 그걸로 규정을 합니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너희들아! 이러는 겁니다.
이~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소식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서로 너무 자기 자신의 잘난 체 하려고 하고 실패 안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예수님 말씀 듣는 것은 자꾸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가 스스로 똑똑해 지려는 옛날 육적인 본성을 따라가 보면. 남한테 뒤처지지는 않고 싶고. 내세우고 자랑거리는 있고 싶고. 그러니까 등신 안 되고 치매 아닌 사람으로 행세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데 그게 그리스도에 대한 범사에 대한 고마움이 초과적인 영향력이란 감사가 자꾸 엷어져요.
엷어지면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원망이 불평이 막 나오지요. 10분 쉽시다.
■안양20180209b약2장1절(덮친 사태)-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만약에 치매에 걸렸을 때 치매에 걸리면 아무리 믿음도 치매에 걸리면 예수도 모른다 할 텐데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겠느냐, 하는 그 문제.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치매에 걸렸다라는 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죄인 되었다. 바뀌면 돼요. 내가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구원받겠느냐, 하고 같은 말이거든요.
그런데 죄인 되었다는 말을 생각하느냐 하면 치매 걸린 현상이 내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평소에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구원이 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보충물이 돼요. 보충물. 보충물이라는 말은 팔 부러졌을 때 지지대 하는 거예요. 이걸 정형외과에서는 보철물이라 하지요. 보철물. 이빨 교정할 때 하는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정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하늘에서 낚싯대로 올린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죄인 되신 거예요. 죄가 죄인을 죄 되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뽑아내는 이게 보충물이 되는 겁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천벌이 없는 곳에는 천국이 없다고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천벌 치고는 약간 여유 있지만. 왜 여유만만한 생활이 천벌이냐 하면 자리가 수평적 자리거든요. 이 자리는 유럽에 가든 캐나다 가든 그게 천벌이에요. 천국이 아니잖아요. 이 자리. 옛날 노아식으로 말하면 물에 덮히는 곳은 다 천벌입니다. 그게 잘사는 동네든 못사는 동네든 결국은 물이 덮힌다는 말은 천벌 받고 있었던 거예요. 모양새가 한 쪽은 잘사는 천벌 이쪽은 못사는 천벌이지만, 어쨌든 천벌은 천벌이에요. 천벌이고 만벌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내가 똑똑해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니 똑똑하냐, 안 똑똑하냐, 치매냐, 치매 안 걸렸느냐, 묻는 게 아니고 “너는 죄인이야.” 라는 것으로 들어오시는 “너, 죄인이야!” “니가 죄인이 아니고 죄 속에 니가 있는 거야.” 이리 되는 거예요. 니가.
그러면 내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죄 아닌 게 없어요.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서 방해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요번에 강남모임에서 했지만, 주님이 보시는 관점의 죄가 있는데, 인간들은 인간들과 인간들끼리의 죄와 의를 나누게 돼요. 한 번 적어볼게요. 엉터리 죄지요. 엉터리 죄. 엉터리 죄가 2개입니다. 첫째는 뭐냐, 사람 대 사람의 비교. 비교해서 죄라는 것을 끄집어내고요. 두 번째는 뭐냐, 과거와 현재 지금과 비교해서 죄를 끄집어내요.
내가 옛날에는 참 착했는데 지금은 악하다. 개인적 시간적인 그런 차이를 통해서 죄, 의를 구분하고 내가 옛날에는 교도소가기 직전에는 악했는데 지금은 내가 고아원 방문할 정도로 착하다. 이러면 시간적 차이지요. 시간적 차이. 내가 착한 일하니까 착하고, 못된 짓하는 것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런 내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착하냐, 안 착하냐 가지고 선과 악을 따지는 거예요.
요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요. 이 이야기는 굉장히 난해하지만, 한 번 해봅시다. 자, 선악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이 보이는데서 나왔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지요. 그렇다면 아담이 생각하기를, 아담이 생각한 게 아니고 마귀가 또 그렇게 생각하지요. 마귀가 저걸 따먹으라고 하니까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저걸 따먹으면 악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걸 따먹으면. 선악과나무를 따먹지 말라 한 것을 따먹으면 악이 된다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인간들은 악마한테, 악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낮아요. 악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낮아요. 악마가 뭐냐 하면 따먹는 날에는 니가 뭐가 밝아진다고 했습니까? 눈이 밝아진다. 이건 뭐냐하면 니가 지금 눈이 침침하다는 거예요. 눈이 어둡다는 거예요. 눈이 밝아지고 자기 부끄러운 거 할 때도 눈이 밝아진다고 이야기했고 하지만, 어쨌든 니가 그걸 네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마귀는 이야기했느냐 하면 선과 악은 니 하기 나름이라는 입장에 악마가 한 생각을 같이 하는 거예요.
아담은 따먹으면 악이 되니까 안 따먹겠습니다. 나 따먹을 수 없어. 악마는 따먹으면 니가 눈이 열려서 선악 자체를 니가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이리 이야기해요. 선악자체를. 참 이게 어려워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악은 누가 정하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이 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하나님이 정할 거 없이 니가 알아서 하면 된다, 는 쪽이에요. 니가 알아서. 선과 악을 위해서 니가 눈이 그 위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선과 악을. 니가 결정하고 니가 판단하면 되지 않느냐. 이건 뭐냐 하면 ‘자아의식’이에요. 악마가 인간에게 자아의식을 심어준 이유가 악마 자기 자신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다! 니도 니 결정을 니가 해야지. 니가 해야지 누구한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미 우리가 선악과 따먹어서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도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못 알아봐요. 선악을 알기 이전에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미 선악을 아는 자아가 있는 이 상태로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 알려만 주신다면 또는 보여만 주신다면 내가 결정하겠습니다. 하는 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문제도 그렇고 죄짓는 문제도 그렇고 나한테 맡겨달라는 거예요. 나한테. 2장9절 봅시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만일 너희가 뭐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다 했어요? 뭐로? 외모지요. 또 보는 게 또 나왔어요. 2장 3절부터 죽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이리 나오더라 말이죠.
이게 전부 다 들어올 때에 눈으로 보고 하는 거예요. 야고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뭐냐, 야고보 이야기가 하나님 뜻이지만, 선악과 따먹었을 때 그 때 아담의 심정을 그 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선악과 따먹을 때 나는 구경도 못했습니다. 발 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처음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것은 뭐냐, 자아의식이었어요. 결정은 니가 내려라. 결정은 니가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은 결정을 내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속에 관한, 소속돼 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니는 선악과에 그 죽음에 소속돼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표현하는 제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는데, 쉽게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쁜 강아지를 이렇게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 강아지가 밖에 도망가지 않도록 염려하게 되잖아요. 어쨌든 강아지와 사이좋게. 그러면 강아지한테 “그래, 줄게, 줄게.” 이야기만 할 뿐이지 “강아지 너! 고구마 먹으면 쫓아낸다.” 이런 부정적인 명령을 강아지 앞에 들이 댈 일이 없어요. 같이 살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런데 선악과가 이미 심어져 있는 인간이 들어왔거든요. 선악과가 심어진 에덴동산에 인간이 살았다는 말은 너라는 조건보다 선악과 원칙이 더 우선된다는 겁니다. 니가 강아지가 나한테 이쁘지만, 나는 우리 집에 와서 강아지보다 이 고구마가 더 중요해! 이런 뜻이잖아요. 그래서 이거 먹기만 하면 니는 더 이상 내 집의 강아지 아니다. 쫓아낸다. 이런 뜻이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은 인간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다. 말이지요. 악마는 그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악마가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에게 반격하고 하나님에게 대드는 겁니다. 피조물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창조주한테 끌려가지 않겠다는 그런 심보입니다. 그 심보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목사님, 지금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하는데 구원을 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보충물, 아까 보충물 이야기했지요. 보완하는 것. 이 보충물이 반드시 있어줘야 하는 이유가 구원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선택에 맡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보충물 할 때는 하나님께서 구약에는 율법으로, 신약에는 율법의 완성된 말씀으로, 우리를 죄를 유발시키는 거예요. 죄가 보충물 되는 거예요. 누구한테 그런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형제에게. 그 형제가 뭐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합격이 된 사람, 이미 구원이 된 사람에게 죄의 보충물을 계속 허락하시는 거예요. 보충물 주시는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하느냐, 아까 이것 때문에 제가 예를 들었는데 그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치매 다시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50년동안 신앙생활 잘 했는데 70이 되어서 치매에 걸렸다. 목사가 물어도 예수님이 누굽니까? 전혀 모릅니다. 아무 감각 없어요. 자, 이 사람이 구원 받겠느냐 하는 겁니다. 나이 70같으면 많지는 않지만, 치매 와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가족도 못 알아봐요. 예수님 알아 볼 리가 없지요. 예수님이 어느 동네 사람인지 몰라요. 이 사람이 구원받겠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신앙 좋다고 소문 난 사람이고 오직 주님만 위해 살겠다고 50에 다짐을 하고 다짐을 했던 사람인데 그 다짐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어요. 이럴 때 이 사람이 구원 받겠느냐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라고 했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이야기해야 돼요. 치매에 걸렸다 하지 말고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죄인 되었다고 이야기하자 이 말입니다. 이 사람만 죄인 된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이 죄인 되었어요. 그럼 이 사람은 무엇의 증인이냐 하면 죄인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치매에 걸릴 때만 죄인이 아니고 소급이라니까요. 소급. 지난 지가 50년 신앙했잖아요. 이게 치매현상이에요. 지는 주님께 헌신했는데 말짱한 정신으로 이게 죄의 현상이에요. 한 번 십자가를 알게 되면 소급해서 전부 다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고 회개한 것조차도 뭐가 되냐, 강의 설교 전부 다 뭐가 되냐 죄가 되는 겁니다. 아예 태어난 것부터가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따라서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치매 걸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되지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저는 치매 걸리면 치매는 싫어요. 치매 걸리면 주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싫어요. 이럴 수 있는 능력이나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태어났음. 자체가 이미 죄인 되기로 태어났음이에요. 그렇다면 만약에 그 사람이 정신이 온전할 때 한 50대에 그냥 믿습니다. 헌신하는 이거 말고,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지금 내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죄라는 이름의 보충물이에요. 의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나라는 이런 50대에 “주님을 믿습니다.” 하는 요런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앞으로 치매 걸린 상태나 안 걸린 상태나 지금 이 상태에서 그대로 갇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주께서 의롭게 하신 다면 이미 온전할 때 정신이 온전할 때 성령 받아서 온전할 때 같으면 내가 앞으로 치매 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가 이미 확정이 된 겁니다. 앞, 뒤로 전부 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으로 생각했지만, 이걸 인류 전체 인간 전체로 보게 되면 처음에 에덴동산에 나무 두 나무가 있지요. 하나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중심에 있습니다. 중심은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나무가 중심이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중심이 아니고 나무 중심입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중심이에요.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합치면 이게 예수님이에요.
결국 인간은 처음부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그 당시 예수님 보면 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뭐냐 하면 우리를 죄인 되게 하고 우리를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합체하면 되는 거예요. 이걸 합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론상 되지만 이걸 실제화 되어야 돼요. 실제화 되기 위해서 아담에게는 뭘 더 해야 된다? 뱀이 오고 사탄이 오는 것을 주님께서는 알아요? 몰라요? 알지요. 그러면 말리던지. 전기 철조망해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지. 우리가 죄 짓고 난 뒤에 하는 소리가 뭐냐, “아~ 그 때 안 그럴 걸.” 그러잖아요.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것만이 죄가 아니라는 사실. 태어나서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죄가, 나의 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돼요. 나의 의를 위해서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내 막사는 걸 굉장히 오해한 사람이 있는데, 막 살면 구원받습니까? 하는데 내 막사는 게 나의 의를 위해서 막 사는 게 아니고 주님만이 의인, 그리스도 의를 위해서 우리는 막 사는 관계 속에 얽혀있는 겁니다.
주님의 의 앞에서 막 안사는 인간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막 살았고, 막 사는 사람 중에서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보충물 되기 위해서 뽑힌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진해서 등신 되어야 되고 바보가 되어야 되고 치매 환자가 되는 그게 뭐냐, 자진해서 가지만 사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는 거죠.
사람 눈에 의식하지 않고 사람한테 꿇리지 않는 그런 자유들 누리고 있지요? 야, 이거 생각해 보세요. 세상을 볼 때 다 복음적입니다. 그걸 발취할 수 있어야 돼요. 여자 검사가 성추행 당했다고 창원에 있는 여자 검사가 고발을 했다고요. 국민들이 모두 격분을 했어요. 검사계도 썩었구나, 검찰도 썩었구나. 격분해가지고 이참에 검찰 전부 바꿔라. 그리고 그 여자분에게 꽃다발 보내며 격려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난 뒤에 또 하나 검사가 8년 전에 부장 검사한테 성폭행 당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검사는 못 생겼어요. 자, 이게 문제에요. 지 입다 물면 선진 검사는 예쁘잖아요. 이쁜 거 나올 때는 못난 건 좀 가만히 있어야 돼요. 사람들이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사람이 그 진리에 정의 노릇하는 게 아닙니다. 이쁜데 정의 노릇해요. 이쁜 것. 이쁜 검사는 나라의 보배거든요. 그걸 지가 함부로 건방지게 선배라고 해서 분노하는데 못 생긴 것은 건드려주는 걸 고마운 줄로 알아라. 이런 식으로 받거든요.
이 세상은 정의가 없어요. 이쁜 게 정의에요. 이쁜 게. 고은 시인이 뭘 하던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걸 고발한 시인이 예쁘냐를 봐요. 이쁘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작살난 거예요. 그런데 못 생긴 게 고은이 성추행이고 하면 저거는 출세하려고 일부러 들이대 놓고 꽃뱀 해놓고 뒤에서 딴 소리 한다고 어디 그 동네에서 출세하려하면 몸 하나 바쳐야지. 대번 욕이나 대판 얻어먹는다고요. 이 세상에 정의 있습니까? 정의가 어디 있어요?
옛날에 제가 미션학교 교사했잖아요. 그 때는 제가 따지는 게 아니었어요. 다 미션학교니가 교장부터 해서 교회 다니고 봉화 제일 교회 다니고 그 동네에 제일 크니까 다 다니고 교사들도 거기 많이 다니고 기독교 학교니까 예수 안 믿으면 교회 안 다니면 교사 안 시켜준다 해서 다 다니고 다니는 척들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데 회식한다고 술을 하는 거예요. 나보고 술을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냥 안 먹습니다. 하면 되는데 속에 성령께서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나 예수 믿기 때문에 술 안 먹습니다.” 이래가지고 안 받았어요. 그 학교 들어 간지 6개월도 안 됐어요. 예수 믿기 때문에 나 술 안 먹겠습니다. 이건 성령의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그냥 아무 감정도 없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결국 술 먹는 저 인간들은 결국 교회는 다녀도 예수 안 믿는 사람으로 한 방에 다 들통 난 거예요.
그 검사들이 추행할 때 손모가지 밟아버려야 돼요. 작살내야 됩니다. 진짜 정의감 같으면. 이게 어디 영감쟁이가. 이리 되어야 된다고요. 그런데 그걸 왜 안했겠어요? 출세 정도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뭐냐, 살아야겠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이 땅에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가 돼요. 이건 뭐냐하면 자기를 스스로 뭐로 본다? 죄인으로 보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의인으로. 모르지요. 이 이야기가 여러분한테 격분되지 않는 이유가 이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세상은요, 감추고 감춘 게 오히려 운동을 해요. 껍데기는 그냥 바다의 찰랑 찰랑 하는 물결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감추고 감춘 것은 힘입니다. 어떤 권세, 권력인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왜 아름답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했는가, 하는 고 문제가 될 수 있고, 또 뭐냐 하면 하나님은 평범하게 선악과를 만들어놨는데 마귀가 와가지고 아담을 부추기니까 갑자기 그 선악과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될 수가 있어요. 어쨌든간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이다 말이죠.
인간은 아름다운 것, 누가?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그것이 인간에게는 정의요, 진리입니다. 그 동네가 지옥입니다.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야 되겠어요? 안 떠나야 되겠어요? 이 세상에 더 살려고 할 이유가 없지요. 이유 없어요. 사도들 다 일찍 죽었습니다. 일하고 다 죽었어요. 아무리 좋은 명분, 하늘나라 확장, 헌신, 백날해도 그 마지막에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 요거 마귀음성입니다. 마귀 음성이에요. 정말 여검사가 진짜 더러운 짓하게 되면 사정없이 밝혀야지요. 그래가지고 재판할 때 얼굴 벌개가지고 하게 되면 저 판사는 어제 밤에 뭐 있었나? 공부 한다고 엎어가지고 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 변명들 하든지 말든지. 그럴 여자 검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말씀이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가 요한복음8장에 나오거든요. 아까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8장이 무슨 내용이었지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이 아는 자유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죄인으로 살되 그 죄인으로 사는 것이 그게 자유인 것을 알아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죽을 수 있다가 아니라 “주여, 내가 죽어 마땅하군요.” 라는 사람이거든 돌을 던져라. 죽이고 그 던진 돌 가지고 그 다음에 니가 그 돌에 맞을 준비를 하라 말이지요. 그 돌을 누가 들고 왔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들고 왔거든요. 바리새인들이 들고 온 돌을 쳐라. 그리고 그 돌 가지고 이제 니가 맞아볼래? 이리 나온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한결같은 뜻은 뭐냐 하면 죄라는 이름의 보충물을 줘야 돼요. 죄가 있는 곳에 뭐가 있다? 의가 나와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그러면 목사님, 죄 아닌 게 뭡니까?” 죄 아닌 게 뭡니까? 아까 덮친 지붕이라 했지요.
덮친 지붕이라 했는데 덮친 지붕을 하늘의 은사라 했지요. 선물이라 했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신앙이 우리에게 온다는 말은 비둘기가 나풀 나풀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일으킨 사건이 나에게 덮쳤다 이리 보시면 이게 정확한 거예요.
우리는 지금 사람이기 때문에 옛날 이천년 전 사건에 우리는 거기에 현장에 없었잖아요. 현장에 없더라도 성령께서 그 현장을 우리에게 덮쳐버리면 그게 십자가에요. 그 때 예수님 죽이려할 때 우리는 가표 안했잖아요. 왜?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 때 있었던 상황을 우리에게 주는 게 우리에게 덮친 지붕, 아까 일반적인 의미의, 총체적 의미의, 전체적 의미라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덮치고 오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왜 죽으셔야 되지?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을 만 했구나! 라는 것을 그 관계성을 갖출 때 그게 그 사람에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뭐가 나오겠어요? 하나님의 의가 나오잖아요. 그걸 의의 증인. 그게 로마서6장 의의 증인이에요.
의의 증인을 만드는 방법은 내가 만드는 건 아니지만, 주께서 만드는 방법은 나로 하여금 죽어 마땅하고 죄인입니다. 라는 현상이 일어난 그 순간이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그것만 알게 한 현장이 아니고 뭐를 끄집어낸다? 주께서 여전히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는 현장을 매일 일상 가운데 그렇게 만들어 나가요. 한시도 한 틈도 빠짐없이. 모든 일을. 강아지 안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순간 순간이 하나님이 의인이시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수갑만이 우리의 몸을 채우고, 그 다음에 추운 혹한이 우리의 몸을 꼼짝 못하게 하지만, 그것보다 우리를 진짜 꼼짝 못하게 하는 거, 진리가 안에서 우리가 자유하는 것. 그것은 뭐냐 바로 신앙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죄를 가져가지 않고 죄를 의되게 하신 주님의 공로를 자기 공로를 주님이 자기가 가져가시는 겁니다. 그게 보충물이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절에 보면,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했지요. 제가 방금 읽은 것이 야고보서2장 3절의 말씀이지요. 자, 그러면 묻습니다. 야고보서2장3절이 성경책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은사가 돼요.
안 믿는 사람 같으면 그 이야기 들어봤는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니가 믿는 성경책 안에 있더라. 안 믿는 사람은 그리 되겠지요. 왜? 안 믿는 사람은 성경책하고 자기하고 별개에요. 성경책은 그냥 책일 뿐이고, 자기 현실은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믿는 사람은 성경 안에 있는 현실이 성경 안의 현실이 확대되어서 그 성경 안에 우리가 포섭돼 있지요. 들어가 있지요.
우리가 죽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대로 죽잖아요. 그렇지요? 예수님께서 항상 마태, 마가복음에 보면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그걸 카이로스라 하는데 그 때가 되매 일이 일어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때가 되매, 때가 되매, 돌아보면 다 할 때가 되게 되매 하는 겁니다. 때가 되매. 나사로가 죽는 것도 때가 되매 죽어야 했고, 나사로가 다시 나흘만에 사는 것도 때가 되매 살아야 되고, 이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다 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법이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고 외부에도 있지만, 우리 내부에 있다면 그 우리의 내부의 법을 누가 새겨줬습니까? 물론 여기서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새겨줬잖아요. 그럼 법을 새겨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고자 해서 우리에게 이 야고보서2장3절을 우리에게 새겨줍니까? 하나님께서 뭔가 새겨줄 때는 뭔가 얻고자 하는 게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아름다운 사람이 올 때는 “흥! 지가 뭐 잘났으면.” 이러다가 갑자기 교회에 거지 오게 되면 “아이~ 여기 앉으소서.” 이렇게 이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을 우대하고 잘 사는 사람이라고 우대를 특별히 안 해주고 그런 사람 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이르렀어요.
법이라는 것이 2장9절에 나옵니다마는, 하나의 조항으로 묶어버리면 이걸 비록 지켰다할지라도 다른 법을 지켰다고 자동적으로 이게 그 효과가 전이되지를 넘어가지를 않아요. 되박이 이리 있으면 물을 부으면 물이 넘쳐서 이 작은 됫박에 또 넘치잖아요. 이리 되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부자에 대해서는 히히 뭐 잘났나? 이렇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대접했다 칩시다. 그 사람이 다른 법을 지킬 때 요 법을 지켰다고 해서 다른 법을 자동적으로 지켜지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그렇다면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법을 주게 되면 이 법이 내가 미처 모르는 모든 법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 왜냐 하면 법은 여러 개라도 지키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 담배피우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왜? 성경은 담배피우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은 담배피우라는 말 그 자체가 없는데. 성경에 인터넷게임 오래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 성경책은 인터넷게임 자체가 없잖아요. 십자가마을에 어떤 분이 질문을 한 게 그 질문이에요. 그런 뜻으로 질문한 건 아니지만, 그런 뜻으로 답변한 게 있어요.
누가 법을 지켰다고 했을 때, “성경에 나오는 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을 때 저의 답변은 그거에요. 법을 지켰다고 치는 순간 그 법에 대해서 새로운 법이 또 파생되어서 나온 거예요. 파생되어서. 친구하고 일본에 놀러간다. 그러면 총무 아닌 이상은 “야! 놀러가자.” 보따리 캐리어 끌고 놀러 가면 돼요. 하지만, 총무는 뭘 해야 됩니까? 1번 놀러간다. 3박4일로. 총무라는 사람은 같이 가면 돼요? 도대체 예약은 어디에 해야 되고 예약 차이를 인터넷으로 찾아봐야 되고 사람 연락해야 되고 차비는 지하철 연결은 어떻게 해야 되고, 따라가는 사람은 놀러간다 하지만 막상 일하는 사람은 하나, 하나 거기에 대한 모든 상세한 것, 예상되는 것, 만약에 감기에 걸렸을 때 감기약을 챙겨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음식은 어느 쪽의 음식이 낫고 맛 집은 어디가 유명한가 그런 거 다 신경 쓰잖아요. 그지요?
그것처럼 법을 안 지킨 사람한테는 ‘그거 뭐 부자 같으면 너무 부자한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한테 하면 되지.’ 이렇게 하지만, 일단 이것을 해 본 사람은 이게 실행하게 되면 그 현장에서는 이것이 저만치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요. 가난한 사람, 부자를 나누는 기준부터 해가지고 이게 모호하기 짝이 없고요, 그리고 상대방을 대우한다, 대우 안한다, 그 기준도 너무나 일방적으로 내가 정한 기준이에요. 일방적으로.
결국 이 야고보서2장3절 지켰다고 시도해보면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는가 하면 아까 집사님은 죄를 알기 위해서 이야기했지만 시작해보면 그냥 죄를 아는 게 아니고 지켰다는 그 한 순간부터 미흡함을 안다니까요. 미흡함을. 아, 좀 더 잘해줄걸. 좀 더. 그 때 가난한 사람에게 좋은 자리 있습니다만 했는데 자리 안내만 하지 말고 애는 몇 명입니까? 집은 어느 동네 삽니까? 충훈부에 사십니까? 차비라도 보탤 걸. 차비를 봉투를 할 때 만원을 넣을까, 이만원을 넣을까. 이것이 계속해서 이 성경을 보는 우리 마음에 나오는 현장을 주님께서 주선을 해준다니까요.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키려고 교회 뒤에 않아가지고 혹시 가난한 사람, 부자 이걸 살핀다고 될 일이 아니고 즉 우리로 하여금 그 현장에 집어넣되 집어넣어서 이 야고보서2장3절을 기억 한다 칩시다. 하고 막상 실행에 옮겨보게 되면 수십 가지의 수백 가지의 대책들이 계속해서 결정을 우리한테 요청한다 이 말이지요. 봉투에 만원을 넣을 것인가, 2만원을 넣을 것인가, 아예 자리만 안내해 주고 차비도 안 줄 것인가, 그런 문제. 심지어 어느 교회는요, 돈 500원을 준다는 소문을 듣고 서초구 어느 교회. 소문나서 수원이고 서울 근방이고 노인들이 500원 받으려고 아침부터 줄서있어요. 500원 받으려고.
왜 천원주면 안됩니까? 자, 500원이 이웃사랑이 더 큰 이웃사랑입니까? 천원이 이웃사랑이겠어요? 천원이 이웃사랑이지요. 그럼 묻습니다. 천원이 이웃사랑이겠습니까? 사대보험이 이웃사랑이겠습니까? 사대보험. 사대보험은 교회에서 안 들어줘요. 왜 안 들어주는데, 교회가 예산이 모자라서. 예산이 모자라도 야고보서2장3절인데. 너희들 이야기했잖아. 교회의 모든 예산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나님이 예산 안 주는 거 보니까 아니네.
하나님이 야고보서2장3절하기 위해서 오는 노인네들 사대보험 들어주라고 돈 자금 마련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안 주셨다고? 그럼 기도가 모자라던지. 하늘에서 창을 들 열었던지. 너희들 교회가 아니던지. 사기꾼이든지. 뭐 그런 이유 있네요. 야고보서2장3절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 왜 안 도와주십니까.
이번에는 한 번 말을 바꿔봅시다. 말을 바꿔볼게요. 어떤 사람이 옷을 잘 입었는데, 야고보서2장3절해가지고 뒤에 앉은 집사가 옷 잘 입은 사람은 너무 친절히 대하지 마라. 흥! 하고 “저기 앉으세요.” “앞자리 앉지 말고 저 뒷자리 잘사는 사람은 뒷자리 앉으세요.” 이렇게 했다 말이죠. 이렇게 했는데 그 말 듣고 그 부자가 너무 감사하면서 “옷은 이렇게 해도 사실은 우리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나는 다른 데서는 이런 대우 못 받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뒷자리까지 앉게 해 주시니...” 내가 한 게 아닌데 갑자기 야고보서2장3절을 누가 했어요? 그 사람이 겉모습이 부자라는 것만 알았지 그 속에는 완전히 마음의 심령이 얼마나 찢어지듯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니까 교회에서 가난하게 보이는데 이게 카드가 100장이 넘어. 검소하게 살지 실제로는 실제 사채업자. 그것도 모르고 이거 한다고 앞자리 했을 때 그 실수한 걸 야고보서2장 3절 어긴 것을 누가 이걸 책임지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결론 났지요.
야고보서2장3절은 이거 지키는 것도 뭐다? 하늘이 주신 수직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소급해서 알게 하는 거예요. 자, 더 나아가서 뭐냐 하면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다 지키게 하십니다. 어떻게? “나는 못 지켰습니다.” 하는 순간 야고보서2장3절은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키게 하신 거예요.
결론을 들으니까 결론이 너무 싱겁지요. 너무 간단하지요. 나만 죄인 되게 되면 안 지키는 말씀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형제를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야고보서3장16절 말씀. 그걸 지키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형제를 위해서 간 떼어주고 보증서주고 이래야 됩니까? 방금 이 결론 들어보니까 간단하지요. 형제 앞에 뭐라고 합니까? “형제여, 내가 바로 너와 못지않게 내가 죄인이다.” 그게 바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는 뭡니까? 니 잘났다. 내 잘났다가 아니고 둘 다 이렇게 못난 인간 만나게 해 주신 건 누구밖에 없다? 우리 주님 예수님밖에 없다. 할 때 여기 있든 멀리가든 뭐 어디가든 그건 정말, 이 승철이 불렀던 이런 노래있어요. <그런 사랑 없습니다.>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 없습니다. 정말 이 세상의 기적이에요.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이건 예의상이 아니고 겸손 떠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걸 느낀다는 것은 이건 하나님의 수직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이 무섭겠습니까? 안 무섭겠습니까? 세상이 무서워요? 안 무섭지요. 니 그럼 죽는다가 무섭겠어요? 안 무섭겠어요? 떠나려고 환장했는데 그게 뭐 무섭겠습니까. 바로 야고보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진도 좀 더 나가겠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야고보서에 쓴 이 모든 야고보이야기는 하나님이 필히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요구에 대해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여기서 수직적으로 하늘의 은사가 옵니다. 하늘의 은사가 오는데, 우리가 하늘의 은사 받아서 우리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껏 모든 야고보서의 주석이 다 그런 겁니다. 주석들이. 해석들이.자, 은혜 받았으니까 우리가 어떻게 한다? 행동한다.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행동해 봐라. 행동해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어떤 법을 지켰다하는 순간 갑자기 내가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미흡하기 짝이 없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등신 같아. 못 지켜요. 우리가.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모든 말씀 지켜도 하나 어기면 다 어긴 게 돼요. 우리가 지금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 집사님 말대로 우리가 뭐 된다? 죄인인 줄 알지만, 현장에서 또 다시 뭘 느껴요? 내가 아는 죄인이 아니고 진짜로 내가 죄인이고 이 죄인을 진짜로 죄인을 깨닫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살아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 주셔서 진짜로 내가 죄를 깨달을 때 세상의 어떤 것도 무섭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 5절 봅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되어있지요. 자, 여기 가난한 것이 연간소득이 얼마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거 없지요. 가난하면 가난한 거예요. 먹을 거 입을 거 없어서 가난하냐, 그런 문제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뭐냐하면 자신이 믿음이 있는 거 같으면 세상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어요? 안하고 싶어요.? 안하고 싶지요. 주님만 자랑하고 싶지요.
그러면 세상 사람이 남들이 돈 자랑할 때 자기는 자랑할 게 누구밖에 없습니까? 주 예수님밖에 자랑할 게 없지요. 그러니까 이건 심령이 어떻게 돼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되는 거예요. 가난이란 말은 이 세상에 대해서 그 어떤 기대를 포기하는 거예요. 포기한 상태. 포기 안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포기하게 된 주님께서 손대서 포기하게 된 상태가 가난이란 상태입니다.
집에 수백억이 있어도 괜찮아요. 수백억이 있어도 괜찮다고요. 우리 외손녀가 지갑에서 돈을 딱 끄집어내면서 휙 버려요. 돈하고 상관없다 이 말이거든요. 아직 돈 좋은 줄 몰라서 그래요. 내가 보기에는 나는 돈 없이 산다. 저는 그렇게 억지로 해석을 해요. 아~ 저런 어린애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돈은 몰라요. 곶감주면 미칩니다. 아이, 좋아~~
이 세상에서 돈이 있든 없든 간에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출세라든지 성공,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성공하면 교만하기 때문에. 성공 안 해도 교만할 수 있는데 남들이 성공했다고 하는데 교만 안할 수 있겠어요? 누가 와서 나를 바닥으로 짓밟지 않으면 인간 안 됩니다. 누가 와서 나를 인간 취급 안할 때 개 취급할 때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주께서 보낸 천사입니다. 그게 야곱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 말씀하고 더 안하겠습니다만, 5절에 보면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뭐를 유산 남긴다? 뭐를 상속으로 남깁니까? 무슨 나라?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주는 거예요. 얼마나 아버지 고맙습니까.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상속을 해준다는 거예요.
진짜 좋은 아버지는 죽을 때 티 나거든요. “큰 아들! 집 니 가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둘째아들! 땅은 니가 갖고” 그걸 4자로 기쁜 소식이라 하고 두자로 복음입니다. 그것 때문에 특히 며느리는 그것 때문에 신경 쓰잖아요. 아~ 가기 싫은데 가는 이유가 그 마지막 멘트 그거. 그리고 또 그 영감님 부인은 초친다고요. 유서 쓴 것도 없는데 “아버지께서 요번에 도장 찍고 주민등록 썼고 다 적어 놨다. 이건 공증 받았다.” 있지도 않은데 해가지고 자식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자주 찾아오라고 협박 공갈치는 거예요.
상속을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걸 받을 자격이 됩니까? 뭐했다고? 뭘 잘했다고 상속 받아요? 그것도 상속받는 나라가 어디 부동산 어떻습니까? 저쪽입니까? 아니지요. 영원한 나라에요. 영원한 나라. 약속한 영원한 나라를 약속으로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있는 이상은 세상에서 꼴찌하나 중간쯤 하나 일등하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니들이나 그런 헛된 짓 많이 하라 말이죠. 니들이나.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요걸 더 추려보겠어요. 제일 마지막으로 정리한다면,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자유입니다. 내일 일을. 내일을 기대감이라고 했는데 이걸 바꿔보겠어요. 내일 일을 미리 당겨서 염려하지 마세요. 마태복음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은 내가 내 관여가 통하지 않는 날이 내일이에요. 누구 누구 올 것이다 했지만 보세요. 누구 누구 온다는 건 늘 왔지만, 빠질 때는 빠질 수도 있잖아요. 다른 분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내일 장담 없어요.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웃는 소리했지만, 결혼할 때부터 이미 이혼하고 결혼하면 된다고요. 왜, 내일 일은 모르니까. 그 모습하고 사이가 좋다. 그건 미리 당겨서 기대감 가질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든지, 그런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하루, 하루 삶이 니가 구상한 삶이 아니고 이 예수님을 살아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나가는 덮친 사태기 때문에 니가 거기서 니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니까 주신 것만 받고 믿음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사는 거 말씀에 비쳐보니까 엉망진창이고 남한테 안 지려고 성공적인 삶 살려고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