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316a약2장5절(임플란트)-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5절부터 하겠습니다. 야고보서2장 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이 5절에서 세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세상이라는 말을 했다는 자체가 지금 주님께서 세상을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세상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야고보서5장에도 나와 있어요. 늘 이렇게 주시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5장에서는 심판하신다. 심판주가 문 앞에 나와 있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같은 인간끼리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같이 동고동락했던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위에 계신 분이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 그 싸움이 벌어져요. 그 싸움이.
인간들끼리 같이 있어버리면 거기는 역사가 형성됩니다. 인간들과 인간들 사이에는 방금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역사가 있지요. 역사가 어려우면 그냥 전통이라 보면 돼요. 이 말도 어려우면 그냥 관행이라 보면 됩니다. 좋은 게 좋다는 이야기죠. 하나님께서 이 인간 역사를 세상으로 볼 때는 뭐냐 하면 바로 말씀으로 보거든요. 이 전체를.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볼 때는 여기 뭐로 보신다? 말씀으로 다른 말로 하면 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말씀 따라 말씀하고 우리의 역사하고 같을 수도 있잖아.’ 라고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요. 하나님 생각이나 우리생각이나 뭐 별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말씀 따라 오신 분이 계세요. 예수님이 말씀 따라 오셨고 그 당시 사람들은 역사와 전통과 관행으로 뭉쳐져 있었고. 섞였다 이 말이지요. 어떤 일이 벌어졌어요? 십자가 죽음입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도 예수님을 다 버렸잖아요. 그러면 여기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버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와 전통과 관행으로 둘둘둘 도포 감듯이 감고 있었던 겁니다. 감고 있어가지고 내 행동이 어떻냐, 옳으냐, 그르냐를 역사와 전통과, “옆 사람 이웃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요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태가 돼요. 이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된다고요. 평소에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하면 되지?” 이래지. 말씀이나 주님한테 물어보는 그런 것은 별로 없지요.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비췰까가 중요한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이 없으면 내가 욕을 얻어먹으니까. 이질감을 느끼면 외로워서 못사니까요. 그동안 정답게 산 것도 그들 덕분인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 덕분에 이게 헤어지면 “아휴, 나는 못 살아.” 이렇게 될 것을 벌써 그걸 상상만 해도 우리는 겁이 나는 거예요. ‘아휴, 혼자서는 못 사는데.’ 이런 거요. 손녀 같이 있을 때는 힘들지만, 또 떨어져있으면 섭섭하잖아요. 쓸쓸하잖아요.
사람이 같이 있을 때는 거기서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유대감이 형성되고 그게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고 그것을 초코파이 정이라 하는 겁니다. 정. 그게 정이에요. 초코파이 선전할 때 정이라는 말을 하거든요. 인정을 이야기해요. 인정. 이 인정에 울고불고해요. 사람이 울고불고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복음 때문에 울고불고하지 않습니다. 인정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못돼먹은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정머리 없다고 이야기하지요. 인정머리가 없다. “너는 어떻게 사람이 뭐 인정머리가 없다.” 이리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인정머리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지요. 스데반 집사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선지자들 보세요.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그 사람들 다 고난 받았습니다. 인정머리 하나도 없어요. 너무 냉정해요. 냉혹해요. 예수님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까도 우리끼리 말씀드렸지만, 롯의 처를 생각해라. 뒤돌아보면 작살난다. 너무 인정머리가 없어요. 뒤돌아보면 작살난다. 그러면 우리는 뭐로 하면 되겠습니까? 역사와 전통과 관행 이걸 아까 정이라 했지요.
인정머리하고 둘둘 감아가지고 주님이 좋기는 좋지만, 인정머리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게 더 싫어. 그래서 ‘아이고, 뭐, 주님은 나중에 만나고 우선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이게 남는 장사다. 이게 인생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생각이 아주 강렬하지요.
그래서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그걸 아시겠어요? 모르시겠어요? 다 알지요. 아니까 주님께서는 그런데 대해서 다시 말해서 이 전체에 대해서 계속해서 야고보서2장5절 말씀,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모이게 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모인다는 말은 뭐냐 하면, 각각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라 모인 게 아니고 우리는 아무리 말씀을 해봐야 우리는 ‘나는 내 살아온 행세 나는 안 버리겠습니다.’ 라고 아주 마음에 작심들을 하시고 모인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게 되게 되면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있을까요? 못 지킬까요? 못 지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만약에 지킨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의 인정머리는 하루아침에 떨어져나가는 게 아니에요. 감추게 되지요.
“주여! 믿습니다.” 하고 감추면서 막상 어떤 가까운 이웃이 되든지 심지어 자식이 몸이 아프면 말씀이고 예수건 간에 화들짝 놀래가지고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주님께 원망하고 내 자식 살려내라고 난리에요. 데모를 하고. 그 데모하는 게 새벽기도 이런 건데. 데모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본색 드러나는 거예요.
그래서 법칙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말씀들을 때는 “귀 있제. 들어라.” 이 정도가 아니고 너희들을 휘저어 놓을 것이라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말씀하옵소서. 우리는 좋게, 곱게 듣겠나이다.’ 그건 우리 생각이고 실제로는 우리가 만만치 않아요.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전체를 뭐라고 했던가요? 세상이지요.
세상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한통속’이라는 말이지요. 한통속.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속 일부가 돼가지고 말씀을 우리가 듣는다. 안돼요. 안됩니다. 따라서 억지라도 요걸 빼내기 위해서는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말씀으로 인하여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고난’이라고 해요. 고난. 자, 오늘 본문 그 뒤를 봅시다.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무슨 뜻인지는 알잖아요. 한글로 돼있으니까. 무슨 뜻인지는 알지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무슨 뜻인지는 감이 오지요? 그러니까 집안이 넉넉지는 않지만 믿음 좋다. 그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습니까? 문제는 이거에요.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실제로 우리가 이렇게 될까봐 겁나지 않습니까?
믿음도 좋고 넉넉하게 살고 싶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지요. 굉장히 가난한데 믿음 좋다고 해서 되게 좋아라 하는 사람 있어요?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는 지갑에 돈이 만원밖에 없는데 믿음 있어. 그러니까 나는 행복해.” 그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좋은 겁니까? 그게 인생의 소원이겠어요? 그게.
제발 Please! 저한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부자도 되고 덤으로 믿음 좋고. 이러고 싶지. 조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요란스러운거 저는 내 취향에 안 맞습니다. 하고 우리는 약간의 거부반응이 일어나지요. 그런데 이 본문에서는 뭐냐 하면 가난하지만, 믿음에 부요하게 하는 사람을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가난한 자로 그 다음에 세 자가 나와요. 가난한 자로? 택하사. 택하사! 이거 놓치면 안 되겠지요.
자,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가난한 자가 천국가기 위해서 일부러 가난했다. 성립돼요? 성립 안돼요? 성립 안 되지요. 나는 부자인데 천국가기 위해서 돈을 이웃에게 다주고 일부러 가난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국 간다. 요거 말 돼요? 안 돼요? 요거 사기입니다. 절대로 그 사기에 넘어가면 안돼요. 그걸 가지고 ‘자기 의’라고 합니다.
내 구원받기 위해서 이런 헌신과 이런 낮춤까지 다했다. 교회에서는 아주 인기가 높지만 고거 사기꾼입니다. 택함에 있어서는 돈 유무와 그리고 환경 크게 일체 반영해 주지 않습니다. 조건보고 택하고, 이런 거 없습니다. 그 조건부로 택해 주는 거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 전부가 뭐라고 했습니까? 한 통속. 자꾸 이런 말을 잊지 마세요.
세상 전부가 잘난 놈, 못난 놈 할 것 없이 전부 다 세상이라는 한 묶음. 한 통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니는 가난해서 천국가고, 이런 거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주의해야 돼요.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고, 천국으로 가야지.” 이건 도피지 믿음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인데 나는 고구만 전도, 오이전도지 뭔지 하여튼 나는 가난하지만, 돈 생각은 하지 않고 전도만 합니다. 사기꾼입니다. 그래가지고 교인 수 모았다 해가지고 돌아가서 강연회 하는데 절대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하여튼 교회에서 튀는 것 전부 다 사기로 보면 돼요. 그 배후에는 돈 내라. 돈 끌어 모으는 수작으로 연극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제는 안 속겠지요. 절대로 속으면 안돼요.
모두 한 통속이에요. 그러면 신앙도 다 이게 뭐냐, 그걸 자기 의라 합니다. 남한테 자랑거리가 있을 때, 근근히 사는 그 힘든 인생 가운데서 그래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남한테 의시대고 자랑거리 있다는 자기 의. 그거 하나 믿고 “에고, 참자. 참자.” 해서 살아가는데. 참자해서 참자로 살아가는 것은 그건 기쁨의 신앙이 아니에요. 억지지.
성령의 일은 억지가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돼요. 여기 모임도 자연스러워야 돼요. 억지로 왔다. 하면 안 되지요. 누굴 위한 억지입니까? 이리 모여가지고 성경공부하면 하나님이 복 줄줄 알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백성이라 알아 줄줄 알고? 그거는요, 하나의 수작이에요.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자연스럽게 모여야 돼요. 그래야 주도권이 주님한테 있어요. 우리에게 있으면 안 됩니다. 항상 사람은 내가 있는 곳을 절대화 시킬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내가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에 다른 교회보다 우수하다든지 내가 이 몸에 장착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남보다 더 뛰어나다든지 그러할 가능성이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을 수가 있어요. 택했다는 것은 조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였으니까 구원해 주는 거 없습니다. 헌금, 십일조 했다고 구원해 주는 거 없습니다. 그리고 농땡이 부린다고 해서 구원해 주는 것도 아니에요. 농땡이도 자연스럽게 하세요. 뭐든지 억지로 하면 안돼요. 억지는 이상해.
억지는 분명히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억지는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이것하면 우리 아들이 사업이 안 되는데 내가 열심히 헌신하면 내 업을 보고 지금도 믿음의 농땡이 부리는 아들한테 엄마의 성과급이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노림수 때문에 나라도 기도해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이걸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그것도 엉터리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 자식도 사실은 엄마 말 잘 듣는다 하지만, 물어보면 세상과 한 통속입니다. 마치 내가 옛날에 한 통속인 것처럼 그 자식도 똑같이 한 통속이에요. 모두 다. 똑같습니다. 자, 지금 뭘 강조하느냐 하면, ‘택했다’ 를 강조하지요.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이 가난한 자를 택했다고 하지요. 이제부터 어려워요. 말씀이 택하면 그 사람이 재산이 10억이든 20억이든 관계없이 무조건 가난한 자가 돼요. 그 사람이 5000억을 가져도 가난한 자가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본인의 주도권은 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택함에 있음을 본인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에 5000억 있는데 남한테 손님한테 자랑할 때 우리 집에 복 받아 5000억 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나, 주께 선택받았어. 나 믿음 생겼어. 나 너무 좋아.” 그럼 친구가 “야, 니 돈 좀 자랑해라.” “돈 자랑은 이건 구역질나서 못하겠어. 주면 주고 가져가면 가져가고. 그건 주님 거고. 중요한 것은 내가 택함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해.” 라고 누굴 증거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지요.
사도행전1장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어요. 이번에 강남강의 할 때 제가 칠판에다가 글을 썼지요. ‘성령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는 방법은 없다.’ 그걸 단선이라 해요. 단선. 선이 하나밖에 없다 했지요. 성령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늦게 오시면 이런 혜택이 있어요. 지금까지 한 걸 다시 반복해서 합니다. 반복해도 괜찮은 이유가 먼저 오신 분이 30분 들어도 무슨 이야기했는지 못 들어요. 지금 야고보서2장5절이고요. 2장 5절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그 대목을 지금하고 있습니다. 설명을 더 하게 되면, 하나님이 세상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을 세 자로 뭐라고 했지요? 한 통속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 없어요. 세상은 전부 다 한 통속인데, 그 증거로 인간 몸에 뭐를 휘감겼다 했습니까? 역사와 전통과 관행이에요. 인간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공부하는 줄 알지요. 아닙니다. 전부 다 주변에서 체험한 것들이고 체험한 것들에 그 의미가 같이 실려 들어와요. ‘아, 이 행동은 요런 의미이다.’ ‘요런 행동은 요런 뜻으로 판단하라고 우리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했어.’ 그러니까 사람은 혼자 사는 거 같지만, 다 주변과 소통하기 위해서 연결된 관계로 이렇게 도포 말 듯이 둘둘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성경을 본다든지 누굴 만날 때는 내 생각으로 만나는 게 아니고 익히 아는 그러한 분위기를 가지고 그걸 아우라라고 합니다. 아우라. 그 분위기를 가지고 성경 말씀이나 대인관계에 나서게 돼요. 그러면 그 쪽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통해서 저 사람은 학교는 어느 정도 나왔고, 저 사람의 집안은 어디고, 저 사람의 출신 성분은 어떻고, 파악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둘둘 말은 그 관행과 관습과 역사와 전통은 공히 저쪽도 같이 둘둘 말아 있기 때문에 공통성을 찾아낼 수 있는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관계는 결속이 되지요. 결속이 되니까 세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전부 다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유별나게 나는 똑똑하고 니보다 잘났다고 할 수가 없어요. 한통속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떤 대행을 줬느냐 하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했다, 했지요. 아까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목하시는 분이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합니까? 속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만이 한통속에 속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보냈다면 한통속 된 예수님과의 결별이 일어나지요. 이 결별이라 하는 것은 헤어짐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같이 있어도 의사소통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전혀 되지를 않지요.
그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유난히도 보여주기 위해서 택했던 자가 열두 명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열 두 제자에요. 우리는 생각하기에 열 두 제자가 예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간단계로 더 성숙된 단계로 생각하시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일종의 세상의 대표자들이에요.
갈 데까지 갔는데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갭이 있었다는 것. 3년 동안 배웠고 합숙훈련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갭은 절대로 뛰어넘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가, 세상으로 갔습니다. 누가복음 마지막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글로브하고 한 제자, 그 사람 어디로 갔는가, 역시 세상으로 갔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뜻은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가 이해해서 믿으면 구원을 받잖아.’ 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제가 처음에 했듯이 우리는 베드로든 야고보든 누구든 우리는 뭐다? 한통속이기 때문에.
한통속이라는 말을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면 인간은 자기가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결심내린 것이 아니고 세상의 지금까지 전해온 역사와 관행으로 둘둘 말아있는 거예요. 인간이면 그럴싸하게 고개 끄덕이면서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생각도 없어요. 빠져 나오면 외로워서 못 사니까. 푹 젖어있었던 거예요. 그 젖은 것 가지고 뭘 이해한다? 주께서 주신 말씀과 역사를 이해한다. 이건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이건 상식이지만, 말씀은 그냥 결과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안거든요. 그러니 말씀의 완성이 다 이루었다 하는 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을 중심으로서 야고보서2장 5절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아까 오실 때 하던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뭘 이야기했느냐 하면, 택하사 이야기했지요. 자, 택하사, 라는 말이 성립할 때 택하는 준비나 택할 수 있는 만반의 조건을 우리 인간 쪽에서 제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야 택함이 돼요. 착하다고 택하고 심지어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라고 천국에 가까운 게 아니라는 사실. 가난한 자는요, 부자 되지 못해서 한 맺힌 자들이에요. 돈 보면 환장하는 자들입니다. 새벽기도 제단 엎드리는 것은 돈 달라고 하는 거예요. 시위하고 데모하는 것들이에요.
따라서 뭐냐 하면, 가난한 자의 조건을 결정은 우리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립니다. 택하면 5000억 있어도 가난한 자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둥 없는 둥 해요. 오천억 있어도 회사에서도 별로 신경 안 써요. 그냥 예수님만 증거 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구 것이다? 그것이 오늘 본문 5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거예요. 5절 마지막에.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아니하면, 요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가 근거를 구약의 근거를 대기 때문에 저도 구약을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부터 약간 복잡해요. 어렵지는 않아요. 약간 복잡한데, 야고보서2장5절 설명하기 위해서는 구약과 결부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특징이 있어요. 구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끼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인데. 어제 울산강의에서 했지만, 애굽이 함 민족입니다. 가나안 민족이 함 민족이에요. 셈 민족은 이 동네에 있지 않습니다. 셈 민족은 갈대아 우르동네에요. 갈대아 우르동네에서 하란을 통해서 이렇게 세겜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여기에 파견 근무하는 거예요. 일종에. 함 땅에 셈의 족속 한 사람이 파견한 거예요. 여기 들어온 거예요.
특히 브엘세바라는 남쪽에 브엘세바라는 그 동네에서 아브라함은 굉장히 자기가 낯선 동네입니다. 하나님께서 멀쩡하게 남들 다 부동산 소유하고 있는데 자기 땅이라고 하니까 무슨 의미인 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는 기근을 일으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요. 애굽으로 내려가면 애굽에서 뭐가 기다리는가 하면 사건이 기다립니다. 그 사건은 뭐냐 하면 소유로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소유로서는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이 기다립니다. 현재 아브라함에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내입니다.
아내를 성상납하지요. 바로 왕에게. 그렇게 해서 생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밤중에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바로에게 찾아왔습니다. 왔을 때, 아브라함이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약속은 아브라함 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해서 직접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경유해서 다시 약속의 땅에 왔을 때 약속에 땅에서 있는 모든 약속은 내 행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이룰 구체적 인물은 어디 있느냐, 바로 나가 아니고 내 배에서 날 나의 자손, 이삭이 되는 거죠.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삭과 아브라함 사이에 행할 수 있는 모든 요소는 절단 나야 돼요. 깨져야 돼요. 그래서 아내 사라가 불임여성입니다. 애기를 못 낳아요. 이거 누구 자식이냐? 제 자식 아닙니다. 제 행함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해야 돼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가 먼저 예고편으로 그 자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고편으로 아버지가 먼저 있었던 거예요. 자식이 먼저고 아버지가 나중이고. 이건 유전하고 반대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이러잖아요. 자식이 아버지를 낳는 거예요.
그럼 이삭은 어떻게 낳는가. 야곱이 낳아요. 야곱은 누가 낳는가. 죽 점선을 이어보면 누가 낳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아무 행함도 필요 없이 모든 천국 갈 조건을 혼자 구비하시고 그 다음에는 줄 사탕처럼 길길이 이어져서 어디까지? 아브라함까지 이어서 그 사탕 줄에 있는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나의 행함과 별개였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걸 가지고 두 자로 로마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해요.
믿음이라는 것은 나를 안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아까 배웠던 거 해보면 한통속이기 때문에. 나는 뭐가 있다? 세상의 역사와 관행과 전통으로 둘둘 말았어요. 세상의 역사와 전통이라 하는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유리하게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날 때 뭐를 내놓습니까? 어제 밤에 이거 했다. 나는 오늘 이거 했다. 행함과 행함으로 흥정하는 거예요.
인간 모든 관계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적 협상과 타협으로서 맺어지는 게 인간관계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남편과 아내 아닙니까? 남편과 아내는 절대로 한 몸이 될 수가 없어요. 흥정관계고 서로 필요한 요소에 대해서 필요할 때만 있는 관계에요. 그게 역사와 전통과 관행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용납이 되는 거예요. 그게. 용납이 된다 이 말이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돈 관계지요. 내 자식은 니 얼마 줄래? 그런 관계인데, 세상에 있는 모든 관계는 이렇게 나 중심의 이익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역사와 전통가지고 주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인다.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information, 정보에 불과하고 지식에 불과하지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택함은 택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택함이 우리 몸에다가 뭘 하느냐, 요번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임플란트. 우리 잇몸에다가 박아버려요. 이건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주님의 자기 일이기 때문에 자기 과제기 때문에 자기 과제를 우리를 바탕으로 우리를 데리고 사용하시는 거예요. 제목도 적어놔야지. 나중에 되면 다 잊어버려요. 우리 잇몸에다가 박아버립니다.
하나 박는데 백오십만원 필요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박는데 그걸 성령의 세례라 하거든요. 성령으로 박아버리면 예수님이 다 이루심이 그 안에서 같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주께서 마지막 때 우리에게 뭘 보겠어요? 우리의 행함을 보겠습니까? 우리의 잇몸 안에 들어있는 걸 보겠습니까? 그걸 로마서8장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조건이 달랑 하나에요. 성령이 있으면 그리스도 사람이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에요.
교회는 나름대로의 교회는 한통속이기 때문에 교회는 뭐가 있다? 역사가 있고 관행이 있고 전통이 있고 법이 있어요. 전혀 이건 주의 계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교회라 하는 것은 조직체를 하기 위해서 흥정하고 타협한 겁니다. 구원 해줄 테니까 돈을 내라. 이런 식으로 흥정한 거예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교인들이 교회 와서 돈 낼 때도 구원은 기본이고 보너스로 뭐냐, 우리 가정 남산위에 노루새끼처럼 잘 뛰어 놀게 해주시고 사업 잘되게 해주시고 이걸 추가적으로 얻어요. 이걸 바알종교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을, 잘 들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애굽에 다녀왔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은 어디를 다녀와야 합니까? 필히 어디를 다녀와야 돼요? 애굽을 다녀와야 되잖아요. 애굽을 경험하지 않으면 뭘 모른다? 약속의 땅의 의미를 몰라요. 애굽을 다녀와야 되지요. 애굽을 다녀오면서 다녀온 애굽에서 빼냅니다. 빼내면 남자는 사십만명이 올 때, 이 사람이 애굽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둘둘 감아있는 게 애굽사람일까요? 아니면 딴 거 일까요? 애굽이지요. 애굽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가나안 땅을 모였는데 이 가나안 땅이 같은 함족입니까? 이게 애굽이에요? 애굽에서 나왔던 힘이 아니면 애굽에 못 들어갑니다. 애굽에서 나온 힘이. 애굽에 나올 때 어린 양 피 발랐지요. 어린 양의 피를 계속 받는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래서 시내산 가가지고 언약궤 구조 설계도를 받아와야 돼요. 모세가. 받아와서 중심이 언약궤가면 되는 거예요. 언약궤 없이 가면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 영 있으면 되는 거예요. 성령이 없으면 백날 교회 충성해도 안 되는 겁니다.
이쯤 이야기하면 저한테 묻는 게 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 받을 수 있습니까?” 이리하는데 그건 저도 세상의 한통속이기 때문에 저한테 물으면 안돼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해서 사도바울은 자기 소관의 교인이 하나도 없어요. 목회라는 거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주의 종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주님이지 자기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보낸 자만 예수님께 오기 때문에 자기가 아버지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어떤 권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건진다고 요한복음6장39절에 이야기했거든요.
따라서 선교, 전도, 목회, 다 이건 인간들의 불신앙에서 나온 거예요. 결국. 해외선교부터 해가지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전문 직업 갖고자 하는 데서 핑계대기 위해서 돈을 우려내는 한 방법일 수도 있고요. 주님이 부활 안했으면 우리끼리 해서 하늘나라 확장합시다! 지금 주님이 우리보다 더 많이 해요.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계속 일하고 있어요. 우리는 일 방해자입니다. 그뿐이에요.
따라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방해자인걸 알 때 이게 비로소 행함이 또다시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서 주님께만 증거 되고 주님께 감사하게 돼요. 그러니까 막 살아야 돼요. 얻어터져야 돼요. 얻어터질 때 나보다 더 생생하게 현존돼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 한통속을 포기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포기를 못합니다.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때려죽일 때까지 포기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고함을 지르겠지만, 오늘 조용하라 해서 조용히 해요.
이 사람들이 나올 때 점잖게 나왔어요. 여기 나올 때 미리암은 찬송가를 불렀던 미리암은 아주 신이 났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가 용사되니까 이제 우리는 땡잡았다. 그 땡잡은 사람들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찬미함으로서 그게 찬미인줄 알았습니다. 찬양인 줄 알았지요. 소프라노, 엘토 이런 거 하면 찬양대하게 되면, 파이프 오르간 하게 되면 찬양인 줄 알았어요. 찬양은 그게 찬양이 아닙니다. 원망이 있어야 돼요. 애굽으로 내려가야 아브라함이 돼요.
원망 없이는 찬양이 안 나옵니다. 원망 조건 주께서 밀어붙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요. 내비게이션이 있는 거예요. 내비게이션이 어디로 인도하느냐,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해요. 교회 안 되고 사업 안 되는 쪽으로 인도하고 교회 나와서 애 교통사고 나는 것이 물 없는 곳으로 인도하고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전부 다 이제는 주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어요. 애굽이란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주께서 껍데기 하나씩 벗겨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무슨 문제냐 하면 생존을 거론해요. 생존. 광야에 생존거론 할 때 그걸 딱 노린 자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어디 갔지요? 시작하기 전에. 광야 갔지요. 사탄이 예수님께 제일 먼저 한 시험이 뭐였습니까? 생존이었습니다. 생존문제가 우리는 인간 문제라 생각하잖아요. 철학이나 과학이나 모든 매스컴에서. 국민들 대통령 지금 생존문제 하잖아요. 마태복음4장에서 생존문제가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사탄이 인간을 억압하는 문제로 보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생존문제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악마가 누루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 세계의 진리가 뭐냐 하면 니 이러면 죽는데이. 니 죽는다! 이게 유일하게 인간의 마지막 진리이냐 안 진리이냐를 결정하는 그 포인트에 있는 게 뭐냐 하면 이러다가 다 죽는 게 아닐까? 사는 게 남는 건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남아야 숨은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여, 호스 꼽읍시다. 안 돼! 지금껏 효도해야 돼. 꼽아야 돼. 사는 게 남는 거라고. 뽑아야 될 사람을 계속 뒤늦게 되지도 않는 효도 짓한다고 계속해서 병원에다가 호스 꼽게 만들고 이게 왜냐 하면 아버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평소의 생활에 기본 바탕이 철학이 그렇다는 거예요. 나는 죽는 게 그렇게 두려운데 우리 아버지도 얼마나 두려워할까?
죽는 게 두렵다는 히브리서2장15절의 말씀, 죽는 게 두렵다는 말은 결국은 무슨 뜻이에요? 모든 사람이 죽음에 갇혀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진리가 뭐예요? 사는 게 진리고, 무엇 때문에 교회 옵니까?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그럼 무엇 때문에 아침에 설거지 했어요? 다 살기 위해서. 머리 미장원에서 하는 것도 전부 다 살기 위해서. 더 멋있게 살기 위해서. 모든 게 산다는 것에서는 찐드기를 해놓으면 쥐들이 와서 들러붙잖아요. 몸부림치면 어떻게 됩니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못 빠져나옵니까? 늪이지요. 그 늪이 뭐냐 늪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사는 것이 남는 거다.
이거 육이 있는 이상 나이 80, 90, 100살 된다고 인간될까요?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못 빠져나오지요. 못 빠져나옵니다. 40년 동안 다 죽여 버려요. 죽이려고 애굽에서 데려나온 겁니다. 죽이려고. 달랑 두 사람 남았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늘 야고보서2장5절 끝에 있는 말씀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간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약속이기 때문에 가야된다는 겁니다. 잘 들으세요.
약속을 믿어서 가는 게 아니고, 약속이기에 내 속에 약속이 임플란트, 약속이 들어있기에 내가 가기 싫어도 질질 끌려서 약속이 주도권을 쥐고 나를 데려가야 된다는 겁니다. 약속이 데려가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는 뭘 해야 된다? 우리의 본색이 드러나야 돼요. 나는 예수고 십자가고 복음이고 뭐고 간에 나는 오로지 내 사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그 강력한 발을 뺄 수 없는 이게 나의 진면목이고 참모습인 것을 유지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의 가정 죽든 말든. 내 가정만 잘되고 내 몸만 잘되고, 가정으로 또 분해해보면 내 새끼 하지만 나중에 새끼보다도 내가 잘되어야 돼요. 내가 잘되어야 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견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택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이런 모습이기에 내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될 수 없습니다. 내 증거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 인 거 외에는 증거 할 게 없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임플란트 있는 사람이에요. 아까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교회에 속아 넘어갔던 이유는 교회 탓이 아니에요. 바로 자신의 그것을 고상한 걸로 거룩한 걸로 땜질하는 그 비용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교회가 대인관계잖아요. 남은 기도 2시간하고 찬양할 때 눈물 흘리고 이러니까 나는 언제 저 정도 수준으로 올라가느냐 해가지고 따라 흉내 낸 거예요.
저 사람은 십일조, 십지조 내니까 기분 좋거든요. 나도 기분해가지고. 30배 받았다. 60배 받았다. 하니까 나는 언제. 돈 놓고 돈 먹기거든요. 산에 가야 범을 잡고 그거와 똑같은 거예요. 인생은 한방이니까 한방 터지면 재판 터지면 나도 된다 싶어서 전능하신 하나님 믿고 한 거예요. 그 밑바닥에는 뭐냐 하면 죽으면 안 된다는 지을 수 없는 나의 주홍글씨 같은 거예요. 그걸 독약이라고 하는데. 선악과의 독약.
이 독약이 암 조직에 퍼졌는데 어떻게 내 손으로 치유가 돼요? 안되지요. 치료하겠다는 인간들이 사기꾼들입니다. 치료 안 됩니다. 안된 채로 그냥 데려가요. 천국에로. 치료해서 데려가는 게 아니에요. 이들을 치료해서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언약궤에요. 언약은 약속이거든요. 약속대로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그럴 때 이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들이 쫓겨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훌륭해서 쫓겨난 것이 아니에요. 언약궤 때문에 다 쫓아냅니다. 언약궤. 누가?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가 들어올 때에 누굴 만나요. 누굴 만나느냐, 군대장관을 만나지요. 군대장관은 여호수아한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니하고 계약 안한다. 나는 너그 선생하고 모세하고 계약 끝났다. 모세에게 준 약속대로 하니까 니는 목격담만 전해라. 목격담만.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지도 펴놓고 들어가기 전에 땅 제단 다 합니다. 요건 누구 땅 누구 땅.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마치 인덕원 근처에 부동산을 남의 땅인데 큰아들은 이 땅하고 요건 둘째 아들 니가 하고. 말도 안 되는 걸 하는 거예요. 여호수아는 믿었지요. 믿은 이유가 세겜에 나중에 두는 언약궤를, 세겜에는 언약궤도 있지만, 요셉의 뼈도 있어요. 요셉의 뼈를 이동해서 왔거든요. 요셉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우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나는 막벨라 굴에 묻힌다. 막벨라굴은 애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약속의 땅에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을 임플란트, 약속이 너희들로 하여금 너희들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가게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택하심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입니다. 사업이 변화고 몸이 아프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변화가 아니라 뭐가 변화냐 하면 자기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말씀 앞에서 다시 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린다는 것. 이게 변화의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 복음 안다고 해서 갑자기 수입이 늘어나고 그런 거 없어요.
어제 울산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이 일이 꼬인다고 해서 여러분이 잘못해서 일이 꼬인 게 아니에요. 세상은 한통속이기 때문에 울산에 화학공단이 있거든요. 가끔 새요. 그러면 독가스가 퍼지지요. 그러면 기도 못해서 게을리해서 독가스 맡았습니까? 한통속이라니까요. 차사고 일어나서 5명 죽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 없겠어요? 내가 예수 덜 믿어서 죽은 게 아니라니까요. 차라리 이 세상은 죽도록 돼있는 세상이에요.
죽으면 성도는 데려가는 거고 불신자는 지옥 가는 거예요. 이건 우리의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행동으로 벌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심어놓은 우리의 독소는 모든 일을 우리가 세밀하게 살펴서 내 뜻대로 안되면 내가 주님 앞에 헌신을 제대로 못하고 충성을 못하고 신앙생활 소홀히 했기 때문에 벌 받는다고 공과 과오를 따지는 그러한 스트레스를 계속해서 주는 거예요.
거기에 장단 맞추어서 목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거 봐! 목사 안 섬겼으니까 벌 받았잖아.” 거기에 같이 장단 맞추어 춤을 추고 있어요. 무당춤을 추고 있어요. 참, 얼마나 믿음이 약했으면 같이 춤을 추겠어요. 얼마나 약했으면. 우리가 얼마나 이기주의였으면. 내거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못돼 먹은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평생 갑니다. 요거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평생 갑니다. 징크스 제거하고 금기사항 알아서 피해가고 시험 치기 전에 머리 안 감고 그것도 재미삼아 한번씩 보고 궁합보고 재미인데 뭐~ 이러면서도. 요거 평생 못 놓습니다. 놓지 마세요. 놓지 않은 채 천국 갑니다. 그거 발휘하고 놓지 않은 채 구원받아요. 왜? 그러니까 고맙지요.
성령의 일은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요. 억지라는 게 없습니다. 억지 들어오면 마귀 일이에요. 처음에는 거부반응 일어나고 기도를 좀 해야 안 되겠느냐, 성경 두 장 더 봐야 되지 않겠느냐, 헌금 몇 천원이라도 보태야 되지 않겠는가 하다가도 내가 누굴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느냐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요. 이것이 누굴 위함이냐는 말이지요. 누굴 위함이냐? 건성으로는 잘 알지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 헌금을 하며, 하늘나라를 확장하고, 배운 가락이 있어가지고 온갖 다 써먹어요. 그런데 따져보세요.
결국은 내 것 손상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것 손해나지 않기 위해서. 내 가정 화평 깨지 않기 위해서 하는 억지 몸부림치는 거, 울부짖음에 불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원망밖에 나올 수 없어요. 십일조 했는데 수입이 내 예상보다 훨씬 적게 늘어났어요. 원망이지요. 해도 원망이고 안 해도 원망이에요. 전에 수요 참석했는데 못했다. 바빠서 못했다. 사돈 만나느냐 못했다. 그런데 토요일날 집에 수도가 새더라. 그러면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 참, 끝 있네. 아니 그 수요일 날 참석 안했다고 그래 토요일에 수도가 터치는 야~~ 정말 째째하다. 정말.’ 이런 생각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들지요.
아들이 변변치 못하고 자리를 못 잡으니까 모든 탓을 엄마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내가 성의가 부족했고, 기도가 부족했고, 요새 골프 치러 다닌다고 성경은 보지도 않고. 자꾸 천주교에서 말하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차 뒤에다 붙여놓고.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남들 보기에는 겸손해보이고 온유해 보이고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사랑과 성령의 열매처럼 보이고. 이 더러운 짓을 이게 더러운 짓이거든요.
그럴 때 이야기합니다. 왜, 햇빛 주시는데 감사 못했습니까? 왜 공짜로 공기 주셨는데 감사 못했어요? 꼭 미세먼지 들이 닥쳐야 감사할 겁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생명주시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감사는 없고 내 것 들어오고 나오고 출납계산 그 장부계산해가지고 맨날 오늘은 요거 감사하고 요건 원망하고. 이 생활이 광야생활이에요. 이 생활이.
주께서는 그 때마다 뭘 줬느냐 하면, 예상 밖의 일을 해요. 요건 좀 어렵기 때문에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예상 밖이라는 것은 전제가 뭐냐 하면 요걸 전제로 해요. 나 의식. 나라는 의식. 내가 예상한다는 것은 나의 이런 범주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간은 그 때 그 때마다 구축해요. 요 정도 되면 요건 나고 요거 바깥에는 너고, 남의 거고. 요게 있는데 주님께서는 예상 밖을 이야기해요. 그럼 예상 밖의 이야기는 뭐를 깨느냐 하면 나라는 요 범주 있잖아요. 이 범주를 찢어버려요. 니는 너를 지금도 아직도 모르고 있다. 니가 어떤 인간인줄 모르고 남들 눈에 보이기에 이 정도하면 남한테 기죽지 않겠지. 라는 남의 인정받기를 고려해서 급조해서 그 때 그 때마다 나라는 것을 구축하는 겁니다.
이것은 언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부부싸움 할 때. 그런 게 굉장히 일어나요. 남편이 한마디 했는데 이상하게 나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어. 급조, 급하게 우리 집안이 이런 집안이라는 것을 남편에게 상기시키지요.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니 시집올 때 니 마음대로 라고. 나라는 것이 이 정도 바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할 때 남편의 그러한 것을 상기 시켜서 “까불지 마라. 나한테 함부로 대들면 니 당신 당해.” 라고 할 때 그럴 때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러면 내가 남들을 의식해서 구축했던 이것이 수정당해야 된다는 그 과정의 반복이 광야입니다. 10분 쉬겠습니다.
■안양20180316b약2장5절(임플란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서 자아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자아의식과 말씀이 만났을 때에 왜 우리가 말씀보고 그냥 실천에 옮기면 되거든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주셨다. 지키라고 준 거다. 그러면 지키라고 준 거면 지키면 하나님께 영광. 공식이 너무 간단하지요. 골치 아픈 거 하나도 없다 말이지요. 중간에 십자가가 끼어 들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십자가 주셨다. 십자가 믿으면 되잖아요. 부활 주셨다. 부활 믿으면 되고, 재림 믿으면 되고. 뭐든지 싹싹 빨아들이면 되는데.
문제는 빨아들이는 그 본부, 그 바탕 자아의식에 대해서 왜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문제 삼아야 되느냐 하면, 자아의식이 변한다. 변한다를 다른 말로 합시다. 흐름으로 되어있어요. 인간은 자아가 하는 것이 수시로 바뀌어져요. 대표적인 것이 무슨 현상이냐 하면 치매현상. 60,70대까지 잘 믿었는데 잘 지키고 난 뒤에는 치매현상이 걸렸을 때에 목사님이 묻습니다. 사도신경 해보세요. 예수님 아십니까? 찬송가 불러보세요. 하나도 못해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예수님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상상이 안 되지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장기기억만 기억해요. 치매는 장기기억. 단기기억은 안돼요. 장기기억, 돌아가신 남편 생각한다든지 맨날 그런 것만 생각하거든요. 그건 바로 시냅스라 하는 두뇌세포와 두뇌세포의 연결고리 신경전달 물질이 제대로 원활하게 안 나와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정보 전달이 안 돼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야고보서2장5절을 다시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라고 했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행함의 바탕에서 나옵니다. 그냥 믿음을 주지는 않아요. 실컷 막 살게 만들어요. 실컷 막 살게 해놓고 “아니지. 그치? 아니잖아. 그거.” “그런데 제가 했잖아요. 제가. 제가 했다니까요. 남이 아니고 내가 기도했어요. 내가. 그러니 나를 구원해주세요.” 하면 “그래, 니가 문제다.” 이 말이지요. 너가 문제.
이 자의식을 지금부터 말씀드릴건데요. 상당히 난해해요. 왜 난해하냐 하면 난해한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4장 같은 데 보면 이스라엘을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했어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이스라엘은 남자는 40만 명입니다. 단 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뭘로 봅니까? 이걸 하나로 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집단주체라고 아예 용어상 그렇게 제가 붙일 수가 있는데. 집단주체에요. 집단주체.
하나로 본다고요. 하나로 보면 이 사람들이 여러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여러 사람이 있으면 이게 하나가 되려면 개개인을 무시하고 개인, 개인 연결고리가 있을 게 아닙니까. 연결고리가 동일한 연결고리로 연결 질 때 이걸 하나로 붙여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로. 부부가 두 명이에요. 두 명인데, 하나로 보는 것은 연결고리가 하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창세기2장에 나오지요. 부부가 아담이 말하기를 저 여자하고 나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한 몸이라고 이야기했지요. 한 몸. 둘이 아무리 붙어봐야 한 몸이 안 됩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핑계대지요. 저 여자가 하면서 핑계대지요.
그러면 이게 뭐냐,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하나 됨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에베소서4장에 보면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인간을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은 놔두고 우리는 이기주의에요. 죽을 때까지 이기주의 됩시다. 되는데, 뭘 보이느냐 하면 요 중간에 그걸 관계를 이어가요. 관계를 이어가는 것을 뭐냐 하면 이걸 의라고 하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지금 그 의가 사람들은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 개인주의로 시작하니까 의를 소유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행위로 내가 챙겼다는 거예요. 의를 챙겼으니까 이제부터는 의의 종이니까 나에게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죄가 나오지 말고 의만 나오게 해야 된다. 그걸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을 주셨고 전에는 성령 없을 때는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을 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교회들이여, 열심히 충성, 봉사해서 성화의 삶을 삽시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나도 거룩하니 거룩하게 삽시다. 논조가 이런 논조에요.
그러면 그렇게 거룩하겠다는 챙기겠다는 마지막 챙김에 끝은 어디냐,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했던 짓을 똑같은 짓을 해요. 그런 주장을 한국교회가 하는 이유가 뭘 모르기 때문에 그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신학을 몰라서 그래요. 그들이 신학을 알게 되면 요번에 내가 이스라엘을 가서 누굴 만났느냐 하면 랍비를 만났어요. 랍비가 강의하는데 뛰어 들어갔어요. 그 정말 주님의 은혜 같아요. 랍비의 강의를 3일을 앞두고 차마 예의상 녹음하기가 중간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녹음하기가 이건 무리한 거거든요. 또 영어가 안 되잖아요. 제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수업 방해되기 때문에 그냥 들었어요. 랍비의 사상을 들었습니다. 아~ 귀한 걸 들었어요. 실제로 랍비가 어떤 수작을 하는지를 들었어요.
랍비가 이런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했어요. 누가 들어도 하자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요. 하나님과 인간을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해서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관계를 딱 설정했어요. 하나님과 자기의 말씀. 뭐가 빠졌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하나님의 개입이 빠졌다고 하세요. 예수님은 허다한 상식적인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중간 카바 들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상상도 못한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목적이 있고 목적은 말씀을 줘서 그들이 영광 돌려서 옛날에는 실패했지만, 아담은 실패했지만, 두 번 다시 이스라엘을 만듬으로서 두 번 다시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본 겁니다. 이건 제 이야기 아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야기한 이야기니까 제가 그대로 적겠습니다. 제가 지어냈다고 하지 마세요. 그대로 적겠습니다. 유대인의 3대 원칙이 있어요. 가서 알았어요. 가서 들어서 알았어요. 유대교의 제3법칙이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다.’ 세 번째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다.’ 이게 유대교의 3대 원칙입니다.
이건 유대인을 강의하는 터널에서 강의하는 그들에게서 나왔어요. 랍비 이야기에서 나온 게 아니고 종합해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이야기를 듣고 같이 동승했던 그 목사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지금 이 사상이 틀렸다. 틀렸고 성경대로 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 두 번째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세 번째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했다. 이게 맞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개념. 유대인에서 나온 거예요. 유대인에서. 여기에 있는 인간 개념. 유대인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유대인을 창조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이미 장악하고 있는 악마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생각이 인간의 자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유대인을 통해서 다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성경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여기에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사이에 중간에 인트셉트 끼어들게 하신 분이 계세요.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걸 빼버렸어요. 이걸 인간 예수로 본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설정된 구조에 그냥 예수님께 숟가락 하나로 얹은 것으로 봐요. 재벌이 있는데 재벌2세 하나 더 안 것으로 본 겁니다. 이 구조는 변화지 않는다고 본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 유대교의 구조하고 똑같은 구조가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택함 받았으니까.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택함을 받았으니까 의미가 있다. 이리 보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사명감을 갖고 있어요. 존재 자체가 사명이라니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렇게 유대인들이 고난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들은 그것을 이사야53장의 완성으로 봅니다. 이사야53장 다 아시지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유대인들이 채찍에 맞음으로 이방민족이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 자손의 언약의 완성으로 봐요.
요한복음에서는 모든 성경을 누구를 증거 한다? 예수님을 증거 하잖아요. 요한복음5장39절.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가 독진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과 세상의 비밀에 대해서 천기누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난다는 것은 우리 유대인들만 알고 있으니까 성경은 유대인을 경유해야 비로소 그들은 증거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 이야기하면 “아이고 목사님, 그 유대인 이야기를 왜 합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닌 엉터리이지요.” 하지만, 지금 모든 개신교가 이 생각을 갖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있고,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이 만들었고, 나는 누굴 위해서 있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그런데 아~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아~ 우리가 영광 돌리는데 뭔가 모자라는 게 있었던 기라. 모자라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을 제대로 못 지키니까 예수님께서 모델로 삼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델로 삼는 종교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천주교라 합니다. 천주교하고 개신교하고 달라요. 천주교는 예수님이 모델이에요. 천주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으라 하는 이유가 그런 취지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나, 하나님께 영광 어떻게 돌리지? 어? 예수님. 나를 본 받으라. 예수님처럼 살면 되는구나? 자, 그렇게 될 때, 자기의 하자가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자기의 하자는 보이지 않아요. 모자람이 보이지요. 바탕은 괜찮은데 부족해요. 부족한 것을 누구를 모델삼아서 예수님을 모델삼아서 마저 채우면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이 된다는 것이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천주교의 교리에요. 그러면 그게 천주교의 교리라면 개신교의 교리는 뭡니까? 여러분, 묻고 싶지요. 개신교의 교리는 루터의 교리하고 캘빈 교리가 달라요. 개신교의 처음 출발할 때 루터, 캘빈 두 사람이 있었거든요. 투톱인데. 루터가 16년 앞섰어요. 루터의 교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천주교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잖아요. 루터의 교리입니다. 천주교는 교회 없이는 구원 못 받는다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우리도 제사장이고 우리도 직접 성령 오게 되면 신자가 된다. 이게 루터입니다. 루터교리의 한계가 뭐냐 하면 구원론이라는 거예요. 교회로 구원받지 못하고 직접 성령 받으면 구원된다. 자, 목적하는 바가 뭐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되느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지요. 그러면 캘빈은 뭐냐, 루터의 사상을 일부 가져와요. 후배니까. 배웠으니까. 가지고 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렇게 구원 받은 사람끼리 모인 것이 옳은 교회가 되어버려요. 캘빈은 뭐냐 하면 오늘 중요한 거 많이 합니다. 결론은 교회론입니다. 똑같아요. 교회 없으면 구원 없는 게 이 캘빈주의에요. 한국 교회는 캘빈주의입니다. 루터주의 아니에요. 캘빈주의에요.
성만찬식을 목사 말고 사찰집사가 하면 안돼요. 목사가 해야 돼요. 루터는 만인 목사설이에요. 캘빈은 아니에요. 목사는 따로 있는 거예요. 문제는 어느 것이 옳으냐인데, 어느 것이 옳으냐는요, 어느 것이 숫자가 많으냐에 결정되는 겁니다. 숫자 많은 데가 많은 사람이 숫자 많은 데가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많이 모였을 것이 아니냐, 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진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보낸 것이 진리에 가깝고, 교인이 두세 명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을 안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성경에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이 세상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제일 적다고 했어요. 그리고 누가복음 보면 적은자여, 무서워 말라. 하늘나라는 너희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7장에 유명한 게 있지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작은 숫자가 생명의 길이라고 우겼던 교회가 숫자 늘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자기는 생명의 길이라고 우기지요. 숫자 적은 것으로 구원 받는 거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구원 자체가 문제가 돼요. 구원론 자체가.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권리가 있는지를 창세기3장을 보자 이 말이죠. 생명나무 차단시켜 났지요. 그것도 지켰습니다. 천사로. 화염검으로 지켰지요.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무슨 뜻입니까? 생명나무 쪽에서 가면 가고 안 오면 못 오는 거지. 못 온다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쳐다보는 것도 니 주제에 안 맞다는 거예요. 쳐다보는 것조차도. 나오고 나서.
그런데 마귀가 아담을 속였기 때문에 이미 그들은 신이에요. 신 같으면 신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걸 구약 내내 이야기하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거죠. 우상숭배. 이제는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문제고. 여러분들이 이제는 좀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그 유대인 랍비가 말하기를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했어요. 또 하필 희한하게 우리는 정치를 몰라요. 유대인 아닌 걸 알잖아요. 동양 사람이니까. 세 사람 들어갔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독교는 굉장히 과격하다 했어요. 굉장히 과격한 것을 믿는다.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연속으로 되어야 하는데 끊어진 것을 믿어버리면 연속이 안 되잖아.” 하는 걱정스럽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단계, 단계 안 끊어져야 하는데 뚝 끊어진 것을 어떻게 인간 능력으로 띄어 넘을 수 있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기독교는 과격하다. 나쁘게 말해서 논리가 중간에 일관성이 없다. 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유대교는 복음을 몰라서 그래요. 유대 랍비가. 일관성은 사다리를 우리 쪽에서 만드는 일관성은 하나님께서는 차버립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세기28장에서는 야곱에게 외치는 일관성은 우리 일관성이 아니고 창세전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일관성이 우리에게 주어지지요. 그걸 아까 했던 관계라고 하는 거예요. 관계. 그게 하나님의 의에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의를 만드는 게 아니고 지상에 와서 아버지하고 그 일을 만들어버려요. 지상에 와야 지상의 같은 죄인들 속에 죄인으로 취급받으면서 의가 되어야 그 의는 죄와 죽음과 심판과 저주와 율법을 이길 수 있는 효과 있는 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끼리 하나님이 노는 의가 아니라 지상에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 지옥가도 효과 발휘하는 의. 그 의는 아담은 의인이 무죄상태거든요. 무죄상태는 언제든지 다시 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에요.
그런데 의가 되어버리면 예수임이 완성한 의이기 때문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의를 취소할 임플란트 오늘 제목이지요. 임플란트를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우리에게. 그게 한탄스러워 해야 될까요? 감사해야 될까요? 감사해야 돼요. 로마서 8장 이런데 보면 어떤 권세자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환란, 곤고, 핍박이 오게 되면 우리에게 뭐가 나오지요? 광야기 때문에. 원망 나오지요.
쉽게 말해서 어떤 원망을 해도 니가 원망한다 할지라도 너을 취소하거나 용서에서 의에서 탈락시키거나 취소하지 않겠다. 왜? 그리스도가 심어져, 씌워져 있기 때문에. 나는 너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보고 하거든요. 그래서 로마서8장 앞부분에 보면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너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인데. 자, 이렇습니다. 진도 나가겠습니다.
제가 3가지 항구를 들을 테니까 셋 중에 여러분이 적당한 거 골라보세요. 여러분이 맞는 거 골라보세요. 첫째 1번,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둘째 2번, 나는 이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세 번째 3번, 나는 죽고 싶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이것은 도피주의에요. 기도주의 기도원에 사는 사람들, 세상 더러워 못살겠다. 기사(?)에 들어가자.
세상이 믿음이 좋아도 안 알아주고 이렇게 하나님 말씀조차도 안 알아주는데 “그래, 너가 안 알아주는 내가 나를 차버리지.” 하고 그냥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거. 이게 정신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배짱 편합니다. 신문 끊어버리고 TV없애버리고 애들 학교에 안 보내고, 애들 학교에 안 보내면 저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오는 게 있어요. 또. 가정에서 가르치는 게 또 있어요. 희한하게 정보들 많아요. 거기서 검정고시해가지고 바로 빠른 시간 내에 대학입학 자격 따는 거 있거든요. TV에서 영재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거 보면 가끔 나와요. 학교에서는 도저히 애를 우리의 능력으로는 감당이 안 돼가지고 집에서 가르쳐가지고 자격증 몇 개 따고 초등학교 때 영어 도사고 그런 게 있어요.
그런 분위기로 넘어가는 그런 교단들이 또 있어요. 세상은 썩었다. 쿰란공동체 비슷하게 해가지고. 세상의 교회는 다 썩었다. 목사들은 전부 다 정통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직접 성령 받아서 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제도, 교회를 버리고 우리끼리 공동체 생활하는 것이 옳다. 1번 쪽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 외에는 과학이고 뭐고 모르겠다. 하는 쪽이에요.
그 다음에 2번 이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 이건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어떤 거대한 목표를 해가지고 레이스 경쟁을 시키는 거예요. 교회에서. 헌신 경쟁, 낮아진 경쟁, 내려놓기 또 내려놓기 지하2층인데 또 더 내려놔. 지하3층, 6층까지 내려놔요. 내려놓기, 내려놓기, 책의 제목이 내려놓기, 또 내려놓기. 그 다음 편에 또 내려놓기. 내려놓을 게 왜 그리 많은지 몰라.
이거 해서 거룩. 전에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문둥병을 물을 갖다 줬는데 수녀가 그 물을 마셨다고. 누가 더 센가 보자. 발 씻으라고 문둥병자에게 줬는데 그 물을 수녀가 먹었으니까 갖다 준 신부가 믿음이 좋은 게 아니고 수녀가 더 세다는 거. 그걸 계속 고안해 내요. 둘 다 비슷한데 이쪽은 뭔가 초보와 노련미가 있어요. 오래한 숙달된 선수들이 있고 초보자들은 초보자 대우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그게 단계가 죽 있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 때에 7단계 있었어요. 제일 윗 단계가 사두개인 단계 그 다음 단계가 바리새인단계해서 제일 밑에 단계는 백정들, 쌍놈들, 천한 것들, 세리와 창기가 제일 밑에 단계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이야기했고 세례요한은 제일 윗 단계에 있는 사람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니들이 구원받아? 이 돌멩이가 구원받겠다. 완전히 억제시켜놨지요. 이 둘 중에 하나 고르라면 우리의 상식 같으면 착해야 영광 돌리지. 하는 유대인처럼 그렇게 되고,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도 둘 다 뭐가 살아있어요? 여기는 둘 다 자아가 있어요.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이런 식이에요. 자아가 있으면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론 위주에요. 구원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길에서 막 묻지요. 구원론 위주로 말합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구원론 아니에요. 뭐냐 하면 예수님 증거 하는 겁니다. 구원은 관심이 없어요. 구원론에 관심 있다는 것은 자기가 안 죽었다는 뜻이거든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게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 위주로 삽시다.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왜 상기 시키느냐 하면, 3번째 정답 나오면 이 자아가지고 3번 되려고 하기 때문에 3번은 이 자아를 가지고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자아는 1번 아니면, 2번입니다.
낮추고 또 낮추던지 안 그러면 지 맘대로 살려고 하는 “그래, 나 개판이다. 구원받았다.” 이리 하던지 간에 하여튼 자아의 어떤 즐거움, 자아의 어떤 쾌락, 자아의 자유에 대한 만끽함, 그게 즐거워서 이렇게 나오는데, 사도행전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쟁론한 게 있어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이 주의입니다. 일종의 이게 뭐냐 하면 불교에요.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이런 논쟁을 했거든요. 내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거예요.
그런데 3번은 건방지게 내가 왜 나를 처리합니까? 만드신 분이 주님인데. 밥을 먹었다. 주께서 주신 거예요. 숨을 쉬었다. 주께서 주신 겁니다. 염색 안하는 것도 주께서 주신 거거든요. 밀가루에다가 전을 지질 때 칙~ 하잖아요. 안에 내용은 안 보이고 계란 노란 거로 한다고 완전히 주님 거품으로 주님 은혜로 범벅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따로 끄집어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죄인이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 사이에 뭘 집어넣었습니까? 의로운 관계를 집어넣었지요. 의로 성립되려면 우리는 계속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죄인 되어야 돼요. 죄가 뿜어져 나와야 돼요. 썩어빠질 육신이지만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주님께서는. 다 필요해요. 썩어빠질 육신이지만. 자살하지 마세요. 다 필요해서 계속 가게 하시는 겁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중풍병자를 가지고 자기는 병 낫고 온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뭐라고 이용했습니까? 그 소원대로 안 해줘요. 뭐 합니까? 니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처음부터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으려고 생각하고 온 게 아니고 병이나 나으려고 왔는데 우리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1번, 2번이에요. 이 자아가 어떤 식이 평범할 것인가를 왔는데 주께서는 우리에게 의인되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내가 알아서 의인되고 싶었는데 주님께서는 아예 의인되게 했다니까요. 멀쓱하지요. 이건 예상 밖의 보너스인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대신 니는 철저히 죄인 되어야 돼. 알겠지?” 그거야 우리는 주특기가 그거니까. 우리는 고민 안 해도 돼요. 죄 짓는 거는. 생존만 참고. 사는 게 남는 거고. 남한테 요만큼 빼앗기기 싫고. 이거는 평생을 다해도 우리는 그 솜씨에 대해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1번, 2번 이 자의식이 예수님한테는 자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럼 자의식이 없으면 그럼 밥 먹는 건 누가 했느냐, 자의식, 자아가 아니고 주체입니다. 자아, 주체가 한 말인데 번역하면 둘 다 나에요. 나. 영어로 하면 셀프고 서브젝트에요. 둘 다 나라고요. 그럼 우리는 다중인격자인가? 우리는 가시나무에요? 내안에 내가 너무 많고 그런 거예요? 갈라디아서2장20절,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 살아가는데 우리보고 그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매일같이 그렇게 용도가 우리가 그런 용도로 되게 하는 거예요. 용도가.
그러면 용도 되기 위해서 우리는 뭐냐 하면 육이 나와서 육이 바로 나의 실수요, 실패인 것을 본인이 절감할 때,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입니다. 범사에 감사한 거예요. 물을 마시는데 또 기도하고 감사해야 될 텐데 그냥 마셔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구원해주니 감사합니다. 모든 사소한 일에도 주께서 허락하신 거죠.
주님은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예수님만 증거 돼요. 이쪽은 누구 증거 되느냐 하면 나하고 대질돼요. 항상 우리 인생이 스트레스 받는 것은 대질하는 사회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비교 당하고 대질하기를 요청하는 겁니다. 비교하고 대질 요청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들은 미투 당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미투 당하지는 않아요. 얼마나 못났으면. 얼마나 돈도 없고 그렇고, 그렇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니 있었나 할 정도로 모르고, 좀 떠야 미투 하던지 유투를 하던지 투 넥스트를 하던지 투 넥스트는 다음에는 니다. 하는 그런 운동이 또 있어요.
평생을 남자라고 살았는데 돈이 있나, 유명해지려고 했는데 유명해지지도 않고 승진도 안 되고 미투 할 것도 없어. 여자도 건드려야 건드릴 맛이 나지 건드릴 가락지도 없고. 모든 게 대질이 되고 비교되고 올라가면 흔들어서 지 올라가고. 지 올라가면 또 흔들고. 또 흔들어버리고.
그게 뭐냐, 대질되고 비교될 때 그것은 비교해서 지지 않기 위해서 계속 자아를 더욱 더 강화시키고, 여기는 억지와 억지니까 암에 걸리고, 이것 때문에 또 암에 걸렸다는 것은 나오면 안 되지만, 하여튼 스트레스 받고 암 걸리고, 개도요, 개도 스트레스 받으면 암 걸린다는 것을 드라마보고 처음 알았어요. <키스 할까요>보니까 감우성의 개가 암 걸려서 죽는 게 나오데요. 개도 암 걸리는구나. 심지어 개도 우울증 걸리는구나. 인간 곁에 있는 개가 잘못이에요. 인간 곁에 괜히 붙어있어 가지고 오염 돼서 그런 거예요. 원래 개는 오뉴월 개팔자가 진짜 개 팔자에요.
그렇다면 왜 이걸 제가 3가지를 비교하느냐 하면 이걸 둘로 줄이면 내 중심에서 세상이 나오느냐, 아니면 예수님 중심에서 세상이 나오느냐, 이걸 분간해야 돼요. 예수님 중심에서 예수님만 단독자거든요. 많이 나올 때 이게 다양이 되고 파생이 되고 다수가 돼요. 그런데 다수끼리 비교하면 안돼요. 똑같은 인간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잘났던 못났던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의를 줘버립니다.
의를 줘버리면 졸지에 이 사람은 의사고, 이 사람은 판사인데, 더 잘났다고 하는데 갑자기 둘 다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둘 다 갑자기 죄인 되기 위해서 판사 되었고, 죄인 되기 위해서 의사된 거예요. 그래서 의사되어서 못난 이야기하고 판사 되어서 못난 이야기해요. 둘 다 못난 이야기밖에 안 나오겠지만.
그럴 때 그들의 만남에서 누구와 함께 있어요? 두 세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마태복음19장, 20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만약에 이렇게 되지 않고 내 중심으로 되게 되면 내 교회 잘되는 것이 하늘나라 확장이고 주께 영광이라는 그러한 사기에 홈빡 넘어가는 거예요.
저도 우리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습니다만, 우리교회가 교인들이 우리교회를 쳐다본다면 그건 법당에 온 거예요. 절에 온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약간의 불편을 했어요. “목사님, 이스라엘 가기 전까지는 성지순례 그렇게 욕하다가 갔다 오고 난 뒤에는 왜 성지라는 말을 쓰면서 옹호를 합니까?” 하는데 그 분은 뭐냐 하면 무시해야 되는데 왜 의미를 둡니까, 이런 뜻이에요.
제가 성지라는 말을 쓰고 거기에 대한 유적지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우리는 있잖아요. 우리 자아는 있잖아요. 그러니까 의미 없는 것을 의미부여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의미를 두는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참에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주님께서는 내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의 뜻으로 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데 그건 이론이 되고 실제로 이 지상에서는 그걸 누가 이렇게 걸림돌 역할을 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주의 뜻대로 되되 저 사람 말고 나한테는 이익이 되는 식으로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는 생각이 우리 이 욕망을 우리가 감당이 안돼요. 절제가 안 된다니까요. 이게 마음으로 될 것 같으면요, 우리가 마음으로 다 되지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몸이에요. 주님이 복음 전하라고 주신 몸인데 이걸 왜 부정합니까? 죄 지어야지요. 맞잖아요. 내가 내 자의식 같으면 죄를 지으면 안 되는데 주님이 주인공이라면 죄 지으라고 있는 몸인데 죄를 지어야지요. 그런데 죄 지을 때 일부러 지을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이 계속 오게 되면 먹는 거 입는 것도 감사하지 못한 것도 죄가 돼요. 돈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돼요. 성경을 자꾸 보도록 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만하면 남들과 대질해서 낫다고 했는데 마침 성경을 보게 되면 아~ 주님 앞에 대질할 때에 우리가 남 쳐다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2장5절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오류를 찾으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다시 한 번 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했는데 그 뒤에다 내가 일부러 하나 넣을게요. 이 말이 기분 좋으냐, 이 말이 기분 좋을까요?
짜증나지요. 한 마디로. 좋은 말도 한 두 번이고. 다 아는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런 생각이 들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해요. 그리고 이 말씀 보면서 이렇게 합니다. “그래, 우리보고 믿음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있는 돈 다 날리고 부도나게 해서 가난하게 만들었습니까? 주여!” 이런 원망 같은 게 나오지요. 이거 없어도 믿을 건데, 괜히 가난하게 믿었지 않습니까? 이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오류가 우리에게 나온다는 것을 니가 우리 자신을 인정해서 그 죄를 자아 속에다가 결합을 해서 이 죄인을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좀 더 진도를 나아가볼게요. 그럼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된다고 했는데, 아까 한 거 다시 해볼게요. 이스라엘은 아들입니다. 요건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되지요. 그럼 인간들 인간들 사이에 주님의 의가 들어간다고 제가 신약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구약적으로 뭐라고 하냐, 여기에 언약이 들어가요. 언약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워요. 언약이 들어가면 이 두 사람이 언약을 외우면 되잖아요. 십계명 외우면 되잖아요. 외운다고 언약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십계명을 위반해 줘야 돼요. 이게 어려워요. 언약의 완성은 십계명이 아니고 십계명+제사법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법에서 뭐가 나와요? 피가 나와요.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양푼에 피를 담아서 율법 전하고 피를 다 뿌립니다.
율법 없이 피를 뿌리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피가 하나의 주술적인 미신이 돼버려요. 십자가 피 믿고 천당 가는 게 돼요. 아니에요. 율법주고 피를 뿌립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정보를 획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이 피가 요청하는, 피가 요구하는, 죄인으로서 부여받은 요청받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지만, 고귀해요. 십자기 피만을 감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예수님 자랑이 아니고 세상자랑하기 바쁘지만,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피로 십자가의 그 귀한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생명나무 생명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주께서 이렇게 여기에 언약으로 개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한테 직접 개입하면 되지 다른 사람은 왜 붙이는가, 그것은요, 인간은 혼자서 도 닦으면 자기를 몰라요. 자기 자신이 훌륭해 보이지요. 이렇게 마지막 때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잖아요. 모여서 생속 다 내놓으면 “아휴~ 말씀 때문에 가기는 가야 되는데, 최집사 때문에 꼬라지 보기 싫어서 내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보겠다.” 이런 경우 안 생기겠어요? 생깁니다.
그걸 사회적에서는 이걸 법적으로 부부라고 묶어놨기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그나마도 애가 생기면 남편은 뒷전이고 애한테 올인하지요. 남편은 돈이나 벌어가지고 와라. 내가 애한테 전부를 다 바치기 때문에 애 때문에 살아요. 애 결혼식 할 때 손잡고 갈 남자있고. 남자들은요, 여러분, 남자를 잘 몰라요. 지 기분 내는 게 삶의 목적이에요. 기분 내는 거. 그래서 남자들 약사, 남자들 의사, 남자들 변호사는 본업이 놀러가는 거예요. 남자들 교사. 지금 여자 교사는 자식 때문에 다니고, 남자는 지 놀러 다니기 위해서, 취미생활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부부약사는 항상 여자만 일해요. 남자는 골프 치러 가요. 남자는 노는 게 삐까 삐까 자기 과시하는 게 삶의 목적입니다. 지 과시하는 거. 지 잘난체하는 거요. 여자의 삶의 목적은 그 자슥 때문에 살아요. 자슥 때문에. 딴 거 다 건드려도 되는데 내 자식 건드리면 남편이고 부부고 없어요. 내 자식 건드리면 부모라도 용서가 안돼요. 그러면 그 자식한테 존경 받는가, 존경 안 받아요. 자식은 엄마를 이용하지요. 욕하던 말든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대상이 없으면 자기를 모르게 돼있어요. 내가 혼자서 백날 연구해도 몰라요.
상대방에게 내가 던지고 튕겨 나온 공을 주워 담을 때 그게 나에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자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남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아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게 나에요. 그래서 인간은 확인차원에서 만나기 싫더라도 만날 수밖에 없고 만약에 확인할 게 없잖아요. 자살합니다. 우울증 걸려요.
부부가 서로 싸웠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이 죽었잖아요. 그렇게 나가서 죽으라고 욕하던 아내, 우울증 걸립니다. 좋으나 미우나 그저 바깥어른이 있는 게 낫다고.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남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서. 내가 사랑하는 만큼 저쪽에서 사랑해주길 기대하면서 상대방에게 밥도 해주고 설거지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다 해줘요.
자식한테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니가 나의 기쁨이기 때문에 니가 나의 소원대로 해주면 더는 소원 없다. 그걸 기대하면서 자식하주고 자식은 그걸 이용하고. 그걸 얍삽하게 이용하지요. 이 말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혼자라는 게 없어요. 그건 사탄이 거짓말 친 거예요. 인간은 집단 속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이 맞아요. 너희는 아들이에요. 인간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 속에서 내가 아우라, 분위기에 섞여서 그 중에 하나로서 대충 묻어가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왜? 그게 무화과나무고 자기를 가리는 주특기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의견이 달라도 공통점은 치마 입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가죽옷을 입혀줬는데 가죽옷은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구원의 의미가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지, 구원의 의미는 없어요. 예수님의 의미는 반드시 우리를 뭐로 만든다? 죄인으로 만들지요. 니가 만든 치마 그 현장에다가 가죽옷을 입혀 놓음으로 말미암아 이처럼 너희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계속 하나님 쪽에서 확정 시켜 버리는 거예요.
뭐 가죽옷을 했는데 피가 흐르고. 그 피 이야기 안 나와요. 피는 창세기4장에 나오지. 창세기3장에서는 안 나옵니다. 가죽옷을 할 때 그건 어린양의 피고. 어린양의 피가 안 나와요. 자꾸 그렇게 오버할 필요 없어요. 사람을 그렇게 구원해 주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주님의 과제지 우리의 과제가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싫어하면 말고지. 지가 목회 성공하려고 한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얼마 전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주께서 확정을 이렇게 쉽게 준다는 그 자체가 확정을 시켜준 그 자체가 이미 아담과 하와는 구원받은 겁니다. 왜? 내가 그걸로 죄인이 확정됐기 때문에. 확정됐다는 말은 주님께서 자기 일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고, 무슨 짓을 해도 예수 안에서 의인되고. 이제 우리 남은 것은 주께서 활용하도록 맡기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짧은 구절이지만 성경 보면서 전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의 일을 내 일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