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4강

아빠와 함께 2024. 8. 13. 21:50

[09 대구강의 9] - [피 4] - 대신 죽으심
                                                                                
                                                           09,05,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 나는야 짝퉁 !!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죽인 한 남자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은 왜 우리 인간들을 죽이지 않고서 그 한 남자를 죽였느냐는 것이다. 즉 기존 인간들이 아니라 따로 이 땅에 동정녀의 몸을,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사람을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그런데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사람을 죽임으로서, 하나님은 도대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셨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 죽음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있고, 또한 보통 사람들이 죽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죽음을 달리 구별을 하시는데,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은 죽음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는 무관한, 즉 인간들이 오해하고 잘못 생각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짜로 생각하는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 외부에서 일어난 그분의 죽음만이 진짜 죽음인데, 그런데 여기서 이 ‘대신’ 이라는 말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쳐다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을 포기하도록 유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포기한 나” 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나는 인간이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그 대신 죽음을 만나게 되면, “나는 인간도 아니었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신’ 때문에 말이다. 이것이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닌데 말이다.

다시 예를 들어서, 여기에 호세아 선지자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하나 있다고 있다고 했을 때, 자기는 거기에 문지기로 있으면서, “나는 호세아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의 문지기다. 그러니 호세아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나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 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문지기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해서 보냈다고 한다면, 자기는 여기서 쫓겨나는데, 그렇게 쫓겨나게 되면, 자기가 호세아 기념관에 문지기였다는 것이 이제는 가짜가 된다는 것이다. 예가 조금 이상한가요?

◈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짜 !!

아무튼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이 바로 이것인데, 즉 “우리는 가짜이다” 라는 말이다. 즉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짜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한 자기 자신이 바로 가짜였다는 말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까, 그것은 대신 등장하신 분 때문에 그러한데, 그분 때문에 자기가 그동안 가짜로 살아왔음이 다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면 대신해서 등장한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그분이 바로 진짜 ‘나’가 된다는 것이다.

◈ 과연 진짜 인간은 누구인가?

그런데 여기서 그분을 진짜 ‘나’ 라고 해버리면 말이 좀 이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나’ 바깥에 있는 사람이 진짜 ‘나’가 되어버리면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인간’ 이란 말을 집어넣으면, 즉 “진짜 인간은 누구인가?” 라고 말이다. 그 진짜 인간은 바로 예수님이고, 우리는 가짜 인간이라는 말이다.

◈ 진짜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주어야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짜 인간과 가짜 인간을 구분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진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보여주는데, 그것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일 때, 바로 그런 인물을 두고서 비로소 진짜 ‘인간’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인간이다” 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전혀 인간이 아닌데, 즉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인간은 가짜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인간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그냥 ‘흙’에 불과한데, 즉 움직이면서 돌아다니는 흙덩어리라는 말이다. 아담은 좀 오래 움직이는 흙덩어리였고,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을 움직이는 흙덩어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는데, 그냥 흙으로 사라지는 그 과정 속에 아담과 같이 동승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 아버지, 이 오토바이는 어디로 가지?

그것은 마치 아담이 오토바이를 타고 절벽으로 향하는데, 그 뒷자리에 우리가 탄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토바이 뒤에 탄 우리는 단지 타고만 있는데, 물론 어디로 가는 줄도 전혀 모르고 그냥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자리에 타고 있는 자는 아담, 즉 우리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앞에 있는 양반에게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물으면, “오냐. 니 애비다” 라고 하는데, “아하, 그렇구나. 그렇다면 나도 같은 인간이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오토바이가 ‘빠라바바 빠바’ 라고 하면서 신나게 달려가지만, 결국은 절벽에 떨어져서 아버지도 죽고 자기도 죽고, 그렇게 모두가 다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죽음의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니는 인간이니, 앞으로 인간답게 살아라. 알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놈은 “예, 알겠습니다. 제가 인간이니, 제 자식도 인간이네요. 그러면 저도 자식놈에게 인간답게 살라고 잘 가르치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일방적으로 인간답게 살라고 서로 서로 격려를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모두가 다 죽고 만다는 것이다. (가슴아픈 비극의 로망스?)

◈ 인간은 결국 마네킹 !!

그러니 이 말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가짜였다는 것인데, 이 가짜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마네킹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가짜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만 보여주는고 하니, “나도 인간이다” 라는 것만 보여주는데, 그래서 가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가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신학과 철학과 과학과 같은 학문 등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레기와 같은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님을 진짜 인간으로 붙잡음으로 말미암아서, 나머지는 모두가 다 가짜 인간임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짜에게서 나오는 철학과 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은 당연히 쓰레기이고, 유황불에 집어넣어서 모두 다 태워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우상’에 주목하는데 !!

그런데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가짜 인간에 대해서 주의 깊게 보는 것은, ‘우상’ 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인데, 물론 자기들은 우상이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신’ 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신과 부딪치면서 참된 하나님인 여호와께서 사건을 일으키시는데, 즉 가짜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인 우상과 접촉해서, 진짜 신인 참된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기에 개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 여호와께서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만든 신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합작품이(?) 곧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이 구약성경에서 ‘죄’ 라고 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즉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라는 것이다. 십계명이나 율법에 나오는 다른 것들은 다 여기에 딸린 부차적인 것인데, 구약 선지서나, 물론 율법서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시고 집착을 하시는가? 바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만이 참된 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다른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우상을 통해서 인간을 깨는 하나님 !!

구약성경 전체의 체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일단 인간은 제쳐두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인간이 쉴 사이 없이 내뱉고 있는 신,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신을 우상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이 만나게 되는데, 도대체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는 말이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

그렇게 하나님은 우상과 만나서 서서히 그 신을, 즉 우상을 깨부숨으로서 또한 무엇을 깨는고 하니, 그 신을 믿고 찬양하는 인간들을 마구 깨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신을 통해서 인간을 깨부순다는 말이다. 물론 신을 저주함으로서 그 신을 만들어낸 인간을 저주하고 말이다.

◈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우상의 싸움판 !!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일종의 싸움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싸움은 바로 신과 신들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후반부에 가면 신에서 인간으로 가다가, 그 인간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진짜 신이 있는데, 그 신이 바로 악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결국은 창세기 3장으로 다시 돌아간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성경을 보면, 처음에 악마인 뱀 이야기가 나오다가, 그 다음에는 인류의 역사가, 즉 인간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신약성경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대로 알아보는 것은 악마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최초로 일을 한 것이 광야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마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육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과의 싸움인데, 그러니 시시하게 인간하고 붙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고수는 고수끼리 논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영과 영의 싸움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마귀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 인간도 인간으로 인정해주자는 것인데, 즉 죄를 짓고 난 아담도 인간으로 쳐주자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인간으로 쳐주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왜 그런고 하니, 아까도 말했지만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만이 약속을 품고 있다는 것인데, 나머지 인간들은 약속을 품고 있지도 않지만, 그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일종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 땅에는 뱀의 지배를 받는, 즉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인간 아닌 인간들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 흙덩어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드리워지는가?

여기서 창세기 3장의 구약으로 들어가 보면, 여기 있는 이 가짜 인간, 즉 흙이 될 수밖에 없는 마네킹 같은 인간이 있는데, 또한 토기장가 다루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인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흙이고, 토기에 불과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어떻게 드리워지는지, 바로 그러한 문제가 남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약속이 드리워지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고 하니, ‘상함 심령’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오직 약속에 의해서 죄인으로 태어나야 될 자들을 발생시키는데, 그들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아예 개니까, 즉 약속밖에 있는 놈들이니 언급할 가치도 없고 말이다.

◈ 이스라엘은,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인 역할을 !!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그릇으로서 죄인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부러 만들어내셨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말이다.

◈ 역사는, 약속의 구조가 내려 비쳐서 !!

지금까지는 이것을 그림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다시 구조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그리고 방금 말한 지상의 모든 역사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약속의 구조가 내려 비취는 꼴이 된다는 말이다. 약속이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A 라는 지점이 있다면, 이렇게 A'가 있고, 또한 B 라는 것이 있으면 B'가 있고, 그리고 C 라는 것이 있으면 C'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A가 실체라고 한다면, 여기 A'는 모형이고 그림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형과 그림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허구’ 인데, 그런데 허구라는 것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말로 하면 ‘기호’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신선들의 바둑놀음 ??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바둑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면, 이 바둑의 실체는 딱딱한 돌을 놓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촌 할머니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촌 할머니는 그것을 바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줄이 가로와 세로로 그어진 판떼기 위에다 까만 돌과 하얀 돌을 놓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할머니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는 것도 역시 무엇인고 하니, 남자와 여자가 서로 적당한 곳에 모여서 산을 개간하고, 또 건물을 짓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의 경우에는 강바닥을 모조리 다 파서 넓게 만들고, 또한 북한의 경우에는 열심히 핵을 만들고, 그냥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고 하면, 그들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판떼기 위에다가 가로 세로로 줄을 그어놓고 하얀 돌과 까만 돌을 번갈아 가면서 놓고 있다는 것이다. 한 쪽이 두 번 달아서 놓으면 반칙이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또한 돌을 놓는 것도 취소하고 다시 하면 안 되고 말이다.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냥 소위 신선노름이라고 하면서 게임이나 벌리고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라는 것도, 판사라고 하면 법원에 나가고, 삼성전자 직원이라면 구미공장에 출근해서 TV를 만들고, 교사들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말이다. 그냥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가정주부는 아침에 허연 거짓말인가 하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 설거지나 하고 말이다. 물론 병원이나 약국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예배당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허구로 !!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악마를 먼저 만나는 일을 시작함으로 말미암아서, 앞서서 제가 말했던 모든 것이 다 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찬호가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는 “아이쿠, 헛짓을 하고있네” 라고 하면, 박찬호가 화를 낸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 죽으라고 던지는데 말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열심히 “골라, 골라 3000원!” 이라고 열심히 외치고 있는데, 그들을 보고는 헛짓을 한다고 하면 당장에 달려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실체가 따로 있는데, 이렇게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이 누가 무슨 짓을 해도 허구라는 말이다. 그냥 바둑판 위에 있는 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하지만 바둑을 두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내가 잡은 돌이고, 저것은 잡힌 돌이고, 또 내 집은 30집이고, 니 집은 50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기려고 서로 열심을 바둑을 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들 나름대로는 룰도 있고 굉장히 진지한데, 즉 서로가 한번씩 돌을 놓아야지, 한 사람은 한 번을 놓고, 다른 사람은 두 번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고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자기들이 바둑을 두는 것에 상당한 의미를 둔다는 말이다. 그렇게 의미를 두는 것을 두고 ‘허구’ 라고 하지를 않고, ‘기호’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게임이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침 9시에 수업을 시작하는데, 어떤 학생이 10시에 온다면 그 학생은 복도에 손을 들고 서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하는가? 9시까지 와야하는데, 10시에 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학생이 10시에 왔다고 해서, 어디 그 학생이 지옥에 가는가? 그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 하늘나라의 구조가 그대로 이 땅에 악마의 제국으로 !!

그러니 인간들 나름대로의 이 기호와 허구를, 구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이 모든 기호와 허구를 비언약에, 즉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비언약에 해당되는 구조로서 되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비언약에 해당되는 것이 이 땅에 A', B', C' 등등이 있는데, 그런데 바로 그러한 죄와 악이라는 것이 이미 하늘나라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의 원천적인 약속의 구조 속에 이미 이러한 죄와 악들이 짜여져서, 그것이 이 땅에 그대로 내려 비춰졌다는 말이다. 

이것이 중요하고도 참 어려운 점인데,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미 하늘에서 전쟁을 치른 놈이 있는데, 누구인가? 바로 악마라는 것이다. 그 악마가 하늘에서 전쟁에서 패해서 쫓겨나서 이 지상에다 악마의 제국을 세웠는데, 그러면 악마가 자기 나라를 만들 때, 만드는 그 모든 게임의 법칙과 룰을, 즉 기호를 어디서 가지고 왔겠는가?

(계 12: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계 12: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계 12: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 악마의 제국이 항상 노리는 것은?

그러니 악마는 이미 하늘에 있는 것을, 즉 하늘나라를 그대로 베껴서, 그것을 이 땅에 그대로 흉내를 내어서 자기의 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든 나라가 바로 악마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제도가 노리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항상 무엇을 반대하겠느냐는 말이다. 즉 악마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자기의 국가를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이 악마는 이미 잘 알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악마는 자기의 나라를 만들 때 그 모든 초점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서 아들의 나라를, 즉 예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쪽으로, 그런 속성을 가지고 모든 제도와 모든 법칙과 모든 기호가 인간들에게 통용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 사이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것이 악마의 나라의 특징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악마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가 곧 실체가 되는데, 즉 이 땅이 실체가 되고, 또한 이 땅에서 그런 실체를 이루는 주인공들을 주체라고 하고, 또한 그 주체에 종사하는 자들이 자랑스러운 자아가 되고, 바로 그런 자아를 두고 진짜 사나이, 즉 진짜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라고 한다면, 오늘 이렇게 시원하게 알려주었는데, 그것도 이 세상의 내막을 말이다.

◈ 그러면 이 땅의 인간들이 만든 실체도 과연 허구인가?

왜 그들이 인간을 진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자아를 자기가 만들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자아를 어떻게 만드는가? 자기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만드는데, 그러면 무엇으로 만드는가? 이 땅을 실체로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즉 기차나 자동차나 컴퓨터와 같은 것이란 말이다.

또한 산에 나무를 심어서 홍수가 가뭄을 방지하고, 저수지를 만들어서 옥토를 개간하는 농사를 짓는 지혜, 그리고 대나무에 구멍을 내어서 퉁소를 만드는 지혜, 그리고 땅 속에 있는 광물 중에서 녹여서 순수하게 철광석만 빼내어서 도끼나 쟁기를 만들어서 땅을 개간하는 지혜 등등 말이다. 그런 것들을 과연 누가 발견한 것인가? 그 주체가 누구인가?

◈ 난로에 석탄을 넣으면 분명 따뜻해지는데 !!

바로 인간인데, 즉 인간에게 그러한 주체가 있으니 곧 자아이고, 그러니 진짜 인간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 땅에서 없는 자동차와 없는 컴퓨터와 없는 폭탄을 만들었기에 말이다. 이 폭탄은 분명히 실체인데, 왜냐하면 건드리면 실제로 터지니 말이다. 세포로 구성된 우리 몸도 터지는 폭탄 옆에 있으면 그만 죽고 말이다. 그리고 날씨가 추우면, 난로라는 실체에다 석탄이라는 실체를 집어넣으면 거기서 온기가 생기는데, 그러면 우리가 그 온기 덕분에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잘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허상이고 허구인가? 도대체 난로를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난로에 석탄을 집어넣는 아이디어는 누가 생각해 내었는가? 그것도 역시 우리 인간이라는 말이다. 먼길을 차를 타고 편안하고 빨리 가도록 자동차를 만든 것은 누구 아이디어인가? 역시 우리 인간의 아이디어라는 말이다. 여기에 무슨 허구가 있고, 이것이 기호인가? 엄연한 실체인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뭐가 그리 재미있나요?” 라고 하면, 상대방이 뭐라고 하겠는가? “저런, 바둑도 모르는 놈이 있나? 이게 얼마나 재미가 있는데” 라고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야말로 지루하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판 위에 돌이나 놓고 말이다. 차라리 알까기를 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고스톱을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밤을 지새워 고스톱을 치는 사람을 보면 미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본인들은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도 점당 1000원씩을 놓고 남의 돈을 따먹는 재미로 친다면 말이다. (아싸, 쓰리고에 광박에 피박, ㅋㅋ)

◈ 창세기 4장의 가인의 후예들을 보면 !!

바로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나’ 라고 하는 자아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진짜 인간은 바로 ‘나’ 인데, 그 진짜 인간이 원하는 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재미나는 것,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육축을 하고, 음악과 예술을 하고, 또한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고 말이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 4:18)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 4: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창 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 4: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 4: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그런데 이 두발가인의 기계는 무기를 만들게 되고, 그 무기는 농사를 짓기보다는 지은 농사를 빼앗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은 포로로 잡아서, 그 포로에게 일을 시키고, 자기들은 수금을 타고 노래하면서 놀고 말이다. 그것이 훨씬 더 행복해 보이는데,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땡볕에 일을 하는 것보다도 말이다. 즉 돈 2000원을 주고 시장에서 시금치를 사서 먹는 것이, 밭에서 시금치를 수확하려고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다. 

◈ 아,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

그러니 이러한 주체자의 세계를 감히 어느 누가 허구적 세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너무나도 생생한데 말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과연 애굽을 잊었는가? 잊지 못했는가? 잊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언약적 구조에 의해서, 허구의 세계에서 어디로 딸려 나오고 있는가?

그들은 약속의 세계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들은 이 약속의 세계보다 자기들이 떠나온 애굽의 시절이 훨씬 더 실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더 생생하고, 더 확신이 가는 말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뒤돌아보면서, 모세에게 뭐라고 하는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새롭게 경험하는 약속의 세계는, 애굽에서 살던 그 실체와 너무나 다르니, 자기들이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왜 감당이 되지 않는 세계를 허락하시는가?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감당이 되지 않는가? 그렇게 감당이 되지 않아야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까, “내가 과연 인간이 맞기는 맞는가?” 라고 하게 되는데, 즉 “내가 자아가 맞아? 또한 주체가 맞아? 지금 내 힘으로 살고 있는 게 맞아? 이 세상이 실체가 맞아?” 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이다. 애굽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자기들은 갓 구운 빵이나 맛있는 고기를 원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인가? 하늘나라의 구조에 보면 만나가 들어있는데, 그래서 그 만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나가 떨어지니, 그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What is this?” 라고 했는데(영어를 쓰기가 무서버, ㅋㅋ), 즉 “이것이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떨어진 것의 이름도 역시 “이게 뭐꼬?” 인데, 즉 ‘만나’ 라는 것이다. 

◈ 만나, 낯섬, 불가능 !!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낯선 것’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고 지난주에 설교한 내용대로 하자면, ‘불가능한 것’ 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주 신기한 보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질만한 ‘나’ 자체가 마네킹에 불과하고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인간인데, 이 빵을 가지고 싶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빵을 주셨네. 참으로 고마운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되어버리면 무엇이 안 되는가? ‘나’ 라고 하는 인간이 짝퉁임이 들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주게 되면, “이것이 뭐지? 도대체 내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주는 것이지?” 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복음을 두고 공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공짜가 아니라 무엇을 부수는 공짜인고 하니, 놀랍게도 자기 자신을 쳐부수는, 그래서 자기는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마다 모두가 다 엉터리라는 것이, 즉 자기는 죄인임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고발하고 들통내는 것을 주었을 때, 그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서 십자가를 지게 만드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천주교의 이단성은, 롱코트 ??

그래서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천주교는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준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고상하고 거룩한 것만 말이다. 가짜 인간이 죽어도, 선종을 했다고 향을 피우고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그냥 마트에 가서 방향제나 하나 사서 옆에 두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옷도 그냥 옷이 아니고, 아주 기다랗게 끌면서 말이다. 저는 아직 미니 스커트를 입은 신부나 수녀는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그런 고상한 것들을 통해서 고상한 세계를 바라보도록 하는데, 즉 예술과 같은 진선미를 통해 궁극적인 세계에 도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우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그런 것들은 인간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여기서 웬 모래시계가?

여기서 우리가 규명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A 지점에서 A' 지점으로, 즉 마귀가 있던 자리가 이쪽 땅의 자리로 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왜 우리가 모래시계를 보면, 드라마 말고 진짜 모래시계를 말이다. 모래시계는 시간이 다 되면, 테잎을 돌린다든지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꾸로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꾸로 해놓으면 또 줄줄 쏟아진다는 것이다.

현재 마귀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실체인데, 왜냐하면, 마귀는 숨어있는 신이기 때문에 그만 빠져버리고 인간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마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데, 엄연히 자기의 배후에 마귀가 도사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녹취자 - 마귀가 숨어있는 신이라? 이것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인가요?)

◈ 인간은, 죽음의 공포에 쫓기면서도 !!

그러니 웃기는 것은, 이런 마귀가 주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하지만 정작 누가 그런 공포를 주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알 수 없는 공포에 묶여있으면서도, 자기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들밖에 없으니, 인간들끼리 열심히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개미가 모래성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데,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모래성을 올라가도, 그만 모래톱을 올라가는 순간 중력에 의해서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음에 쫓겨서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 시도해보지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다시금 주루룩 주루룩 미끄러져서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마는데, 그런 모든 것을 마귀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 의’ 라는 맨홀뚜껑으로 !!

그러니 마귀가 보는 실체라는 것은 여기 이 ‘자리’ 인데, 즉 악의 자리, 죄의 자리라는 것이다. 마귀는 이러한 죄의 자리를 인간을 통해서 덮으려고 하는데, 마치 냄새나는 하수구를 뚜껑으로 그냥 덮듯이 말이다. 바로 그렇게 덮는 것이 인간의 ‘자기 의’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기 의’ 라는 것은 일종의 맨홀뚜껑과도 같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냄새나는 것을 엉덩이로 덮어서 꾹 눌리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안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그것을 하나의 실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고 말이다.

◈ 그러면 ‘약속의 구조’는 어떠한가? - 매우 디피컬트함 !!

지금까지는 아주 쉽게 이야기했는데(?), 이제부터는 무지 어렵게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위의 구조를 한번 그려보겠는데, 이것이 약속의 구조인데, 그것이 어떠한고 하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있어서 약속이라는 것은 등장인물이 누구인고 하니,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고, 뱀의 후손이 등장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구체적으로 남녀가 등장해서 약속을 이룬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약속의 틀 안에서 여러 가지 사태가 일어나는데, 노아홍수가 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기생 라합이 구원을 받고, 그렇게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묵시세계에서는 어떠한고 하니, 이미 예정이 된 것인데, 그것이 이렇게 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퍼지는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그것을 무엇으로 묘사하는가? 그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여기 이렇게 안경집이 있는데, 이 안경집을 빛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 그림자를 보고 안경집인 줄 알 수가 있는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길다란 것이 있으니, 이것이 소시지가 될 수도 있고, 또한 길다란 빵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가능성이 모두 다 있는데, 그러니 그것은 하나의 기호이고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실체가 없이 그냥 애매 모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어떠한가? 그림자가 아니라,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제대로 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하늘에서 주어지는 사건의 원리원칙은?

그런데 지금 제가 여기서 왜 어렵다고 하는고 하니, 이렇게 A에서 A'로,  B에서 B'로 내려오는 과정, 그 과정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립을 할 것이냐는 말이다. 이 약속이라는 실체가 이 땅에서 사건화가 될 때, 이렇게 ‘팍’, ‘팍’ 터지게 될 때, 홍해사건이나 여리고 성 사건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건이 터지게 될 때, 주어지는 원칙과 원리를 그 중간과정에서 어떻게 잡을 것인지, 그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사건이라도 동일하게 적용이 될 수 있는, 그래서 그것만 알면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다 그 원리원칙대로 주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녹취자 - 물론 분명히 있겠지만, 과연 알 수 있을까요?)

◈ 텐서, 벡타, 메트릭스 ???

이것을 수학에서는 ‘TENSOR(?)’ 라고 하는데, 즉 수학에서는 힘을 가질 때 양(量)과 함께 방향까지도 이야기를 하는데, 즉 그 힘이 어디로 튀는지를 말이다. 그것을 ‘벡타량’ 이라고 하는데, 보통 말하는 양은 ‘스칼라량’ 이고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위의 좌표에서의 벡타량을 아래쪽의 좌표에서의 벡타량으로 바꿀 때는 ‘텐서’ 라는 수학적 개념을 동원해서 좌표를 같은 벡타량로 이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나오는 것이 그 유명한 ‘메트릭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번역하자면 ‘행렬(行列)’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수학적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약속이, 즉 묵시적 세계가 역사적 세계에 가라앉아서 사건을 일으킬 때는, 그 벡타(방향)가 반대로 뒤집혀서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까 모래시계를 언급했고 말이다. (아하, 그렇구나!)

◈ 예수님은 거꾸로 오셨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죄인으로 오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가? 그래도 역시 하나님이 맞는데, 그러면 왜 죄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방향을 반대로 뒤집는 것인데, 거꾸로 산다고 할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박기삼 씨가 ‘거꾸로 사는 삶’ 이라는 책을 냈는데, 하지만 이렇게 반대로 뒤집는 것을 그냥 거꾸로 사는 것으로만 멈추면 안 되고, 그렇게 되면 그만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무소유’가 어떻고 하면서 말이다. 이 거꾸로 뒤집는 것을, 자기가 머리를 밀고 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뒤집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의 자아는 뒤집는 자아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를 부인한다고 할 때는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니 정신을 좀 집중하시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들어달라는 것이다.

◈ ‘A’에서 ‘∀’가 아니라, ‘B’ !!

예를 들어서, 이렇게 ‘A’ 라는 것을 뒤집어버리면, 그 기호가 ‘∀’ 라고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뒤집어버린다는 것은 ‘∀’가 아니라 ‘B'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이다. 즉 ‘A’에서 ‘∀’가 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할 수 있는데, 그런데 ‘B’가 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가능하니,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런 금식주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라마단’이 히트를 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머리를 깎고 산에 가든지, 금식을 선포하고 굶든지 간에, 그것이 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조계종에서는 중들이 자기 재산을 포기하는 각서를 선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아무런 그런 짓을 해도 ‘B’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기껏해야 ‘A’에서 ‘∀’로 가는 수준인데,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정도라고 할까? 즉 “예수님, 제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A’에서 ‘B’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B’ 라는 것은 인간들이 도저히 예상도 못하고 상상치도 못한다는 것이다. 즉 ‘A’ 라고 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는 어떤 공백이고, 어떤 공란인데, 그렇게 비어있는 존재가 바로 ‘B' 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그 무엇으로 !!

제가 미리 어렵다고 했는데, 정말 어렵지요?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A' 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A'나 ∀인데, 물론 B'나 C'나 D'도 있을 수 있고 말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뭐라고 이야기하는고 하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겠습니다. A'는 어떤가요 ∀는 어떤가요?” 라고 하면서 지어내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제 다 했지. 그것 말고, 전혀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 B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렇게 위에 있는 것이, 그것이 텐서에 의해서 아래로 벡타량으로 내려올 때는, 그것이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 세상이라는 악마의 나라의 좌표에 해당되는 곳에 하나님의 모습으로 내려올 때, 그때 달라지는 원리가 바로 이러한 원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 땅은 악마의 제국이고, 여기 위는 예수님의 나라인데, 이 예수님의 나라에 있는 이 모든 지점의 사건들이, 악마의 나라에 들어올 때는 이것이 뒤집어지는데, 어떻게 뒤집어지느냐는 것은, 그것은 여기 악마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예상도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전혀 예상할 수가 없어 !!

심지어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예를 들어서, 여기 ‘A' 라는 인간에게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그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온갖 종류의 십자가를 모두 상상해서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십자가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항목을 다 이야기하게 한 다음에, 반드시 거기에 없는 것으로, 그렇게 십자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시간적으로 도저히 규명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만약에 규명이 되었다고 하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고 하니까, 사람이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보고 아는데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를 알면 어떤 열매가 나오겠는가?

◈ 어느 미친 여자(?)의 헌금 이야기 !!

어제 낮 설교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자기의 생활비를 모두 다 바친 어느 정신이 나간 여자에 대해서 말이다. 헌금을 하면서 자기의 생활비를 다 바치고 말았는데, 그러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겠는가? 물론 성경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만약에 더 기록했다고 하면, 아마 “그 다음 날에 그 여자는 그만 배가 고파서 죽었다” 라고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아서 그냥 굶어죽고 말았다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의 생활비를 다 바치는 것은 미친 짓이지, 그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여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을 성도는 매일같이 하고 있는데, 즉 성도는 누구만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는가? “저는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기도를 무화과나무 밑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다나엘처럼 말이다. 

◈ 성도는 불가능성 속에서 !!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자기의 기도에 기를 기울여주시는 분이 계신다고 하면, 지금 당장에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뒤집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란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악마의 세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데, 바로 그런 사건이 터진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약속이 악마의 세계에서 터진 사건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는 ‘불가능성’ 이라고 하는데, 즉 성도 속에는 그런 불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 왜 약속은 모래시계처럼 오는가?

제가 지금 너무 집중을 하다보니 더워서 잠시 옷을 벗겠는데,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이 약속이 왜 모래시계처럼 뒤집어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악마의 제국이 이미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여기에 이렇게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약속이 침투하기에 적당하도록 악마의 제국이 다같이 번성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관심사는 무엇인고 하니,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선과 악의 세계의 실체가 그대로 구체화되는데 있는데, 그러니 이 지상에 내려간 악마가 제대로 악의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악의 적나라한 모습을 다 보여주고, 또한 악을 악답게 보이는데 도움을 주고 기여를 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이 터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약올린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아그립바 왕이 뭐라고 하는가? 그만 감옥에서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로마의 시민권이 있을 줄도 모르고 잡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기어이 옥에서 나가지를 않는데, 그래서 로마로 끌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감옥에서 나왔으면, 로마로 끌려갈 이유도 없고, 전도를 계속 하면서도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로마의 시민이니 재판을 더 높은 사람에게 받겠다고 하면서 로마서 가다가, 그만 풍랑을 만나서 섬에 갇히는 사건도 터지고, 또한 독사에게 물리는 사건도 터지고, 그렇게 전혀 터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이 자꾸만 터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독사에 물려서 죽는 것이 아니라, 독사를 치니 독사가 그만 나가떨어지는데, 그 일로 인해서 멜리데 섬의 추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다 나와있는 내용인데 말이다. 

◈ 성도는, 악이 번성하도록 도와주는 사명을 띠고 ??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성도는 힘껏 악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도와주지 않으면, 악마의 제국이 악마의 제국답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 이후 뒷부분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선지자가 기도하면 할수록 하늘에서 점점 더 어떻게 되는가? 대접이 떨어지고, 또 나팔을 불고, 인을 떼고, 그렇게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악들은 점점 더 하나님께 대든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해야 될 자들이 누구인가? 두 증인인데, 즉 선지자들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과 성철스님이 머리를 깎고 절에 간 것하고, 도대체 어는 것이 진짜 ‘거꾸로’ 라는 말인가? 성철스님이 머리를 깎는 것은, 자기가 그만큼 배운 것에 대한 자기 과시이지만, 그러나 성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손담비의 ‘정말 미쳤어’ 라는 것인데, 즉 완전히 미쳤다는 것이다. 

◈ 아, 질린다, 질려 !!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면, 목사가 아무리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는데, 교회에 무슨 억한 심정이 있는지 말이다. 그냥 좋게 풀어줄 때 나가라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는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질린다(?)’ 라고 하는데, 마치 이상규 집사와 박길현 목사가 대화를 하면서 박 목사가 질리듯이 말이다. 그것이 ‘질린다’ 라고 하는 의미인데, 그러니 성도의 인생은 자기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 이미아 씨와 같이 살 사람도 질리지 싶은데 말이다(ㅋㅋ).

* A : 그만 하소.
* B : 한번 물어봅시다.
* A : 마, 그만 하소.
* B : 그래도 한번 물어봅시다.

그러니 인간은 자아가 없을 때 사명이 남는데, 자아가 가진 사명은 사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가짜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를 깨부수는 사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왜 사는가? 나 때문에 산다” 라고 하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뭐라고 해야하는가? “나는 사명 때문에 산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명은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런데 그 사건이 어떤 원리인고 하니, 예수님에게 오면서, 예수님은 그냥 자기를 부인하려고 십자가를 진 것이 결코 아닌데, 그것은 자유주의나 현대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고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마로 하여금 더욱 더 악마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내려오신 예수님의 몸뚱아리(?)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고 하니, 장차 구원받을 성도들의 몸뚱아리도 다같이 포함되어서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 안에 말이다. 즉 성도의 사명과 운명과 팔자도 바로 예수님의 몸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의 몸의 구조와, 악마의 제국의 구조가 만나면?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아주 복잡하게 되는데, 약속이 악마의 제국에 내려오게 되면, 결국 유일한 인간인 한 남자인 예수님이 내려오면서 그 예수님의 몸은 구조가 매트릭스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처럼 촘촘히 배열을 짓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서 구조화가 되는데, 즉 예수님의 몸이라는 새로운 구조와 이 세상의 악마의 제국의 구조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와 매트리스가 사촌인가?)

그런데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몸이라는 구조가 이 세상에 오게 되면, 악마의 제국이 더욱 더 뚜렷하게 구조화되는데 협조를 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협조를 하는가? 성도가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사명을 부여받고 배분을 받아서, 그 배분을 받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이 더욱 더 확실하게 악마의 제국으로 구조화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는 흐릿하고 희미하게 보이던 구조가 이제 성도 한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희미하게 보이던 구조가 이제는 보다 더 짜임새가 있고 촘촘하고 치밀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복음을 반대하는 구조로서, 그렇게 ‘딱’ 하고 콘크리트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명절에 복음을 전하게 되면 !!

예를 들어서, 어떤 아주머니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드디어 명절이 되어서 온 집안 식구가 다 모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천주교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절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아무튼 모였으니 이 아주머니는 자기가 믿는 예수님을 이야기하는데, 즉 성도로서 받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풀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 천주교가 어떻고, 절이 어떻고, 또 교회가 어떻고 하던 자들이,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당들처럼 되어서 누구에게 달려들었는가?

그들이 구조화가 되어서 누구에게 달려드는고 하니, 성도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자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곧 감추어진 악마의 제국이 더욱 더 그 가정에서 구조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도의 사명이고 말이다.

◈ 결국, ‘나도 인간이다’ 라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 !!

그렇게 구조화가 되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 악마의 제국인 A와 B와 C의 각각 지점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 기독교를 사람, 불교를 믿는 사람, 그렇게 있다고 하면, 결국은 이런 것 전체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런 일관성으로 들이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아까도 말한, 즉 “나도 인간이다” 라는 것인데, 즉 “니가 알고 있는 복음도 좋지만, 내가 알고 있는 천주교도 괜찮은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나는 절에 다니면서 봉사도 많이 한다. 그러니 우리 불교도 괜찮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나도 인간이다” 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자기도 인간이니까, 좀 알아달라는 것이다. 즉 자기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절에 다니면서 봉사도 하고 착한 일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을 아는 자는 뭐라고 하는가? “내가 언제 인간이라고 했는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자만 죄인 중에 괴수이고, 나머지는 뭐라고 하는가? “나도 교회에 잘 다닌다. 나도 집사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무엇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나도 인간이다” 라는 것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데, 즉 “나는 짝퉁이다” 라고, 즉 “나는 가짜 인간이다” 라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야야, 요즘 많이 어렵제 ??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아까 우리가 악마의 제국에 있어서, 이렇게 A와 B와 C의 지점들을 허구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막상 악마의 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절에 다니던 동서가 자기 아들의 대학교 학비를 선뜻 내줄 때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교회에 다니던 사람도 모른 척 하고, 천주교에 다니던 사람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매일같이 갓바위에 가서 빌고 하던 집안 어른이, 막상 자기 집에 큰 어려움이 있으니까 선뜻 돈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거금 1000만원씩이나 말이다. “야야, 요즘 많이 어렵제? 이거 얼마 안 되는데(?),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말고 보태서 이번 일을 잘 해결해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다 가짜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인간이지만, 가짜 인간이라는 말이다. 절에 다니면서 말로만 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에게 정말로 해주니, 자기는 얼마나 고마우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그것이 무슨 허구이고 허상이냐는 말이다.

◈ 퀴즈 - 보살이 도와주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여기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는데, “과연 그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배운 것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도 되고 참으로 좋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가지고 강도사 고시를 쳐도 좋지 싶은데, 절에 다니던 사람이 도와주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겠느냐고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현재 우리는 분명히 자아가 깨지고 없는데, 그러면 그 돈은 결국 무슨 돈인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돈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자기는 복음을 전하는데 아이의 학비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데, 그런데 주님이 보살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서, 자기는 이제 복음을 증거하는데 전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석을 하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전서 3장 21절을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한번 찾아보겠는데, 누가 카랑카랑하게 한번 23절까지 읽어보세요.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여기 21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절에 다니던 동서나 집안 보살을 믿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동서나 보살을 믿다가, 나중에 그들이 반대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어려울 때 도와주었으니 감사하기는 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믿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의 경우에 !!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어서 살기가 막막할 때에, 엘리야가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워주었는데, 그런데 그만 그 과부의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부의 자아가 아직도 살아있었던지, 그만 엘리야에게 아들을 살려달라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즉 기름병을 채워줄 때는 좋아해 놓고는, 그만 아들이 죽으니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말한 것이 성경내용과 대충 맞지 싶은데, 맞지요? 그게 열왕기상 17장의 말씀이지 싶은데, 틀린 부분이 있으면 수정해서 알아서 들어달라는 것이다. 요즘은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쇠퇴해서 그런지, 강의시간에 하는 성경구절이 틀린다는 소리가 나중에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데 말이다(ㅋㅋ).

(왕상 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왕상 17: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왕상 17: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왕상 17:17)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왕상 17: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왕상 17:19) 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왕상 17:20)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왕상 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 진짜 기적은, 자아를 부수어 버리는 것 !!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고 하니, 진짜 기적은 기름병을 채우고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아를 부수어 버리는 것, 그것이 진짜 기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축구경기를 보면서 전반전만 보고 다 보았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후반전까지 다 봐야지 말이다. 야구경기도 그렇고 말이다. 특히 LG하고 하는 시합은 끝까지 봐야 하는데, 7점이나 8점은 우습게 뒤집으니 말이다. 

◈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

여기 고린도전서 3장에 참 좋은 말씀이 있는데,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라고 말이다. 욥기에 있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라는 것만 액자로 만들지 말고 말이다. 물론 엉터리로 해석해서 액자로 만들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있는 말씀, 즉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라는 것이, 이 얼마나 간단하고 선명하고 좋으냐는 말이다.

그러니 북한의 핵폭탄도 누구 것인가? 바로 우리 것이라는 말이다. 복음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핵폭탄이 서울에 터져서 불바다가 되어야 복음이 복음답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서울에 아파트를 산 사람은 마음고생이 심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대구가 적당한데, 평양과 거리도 제법 되고 말이다. 그런데도 도무지 대구에 있는 아파트는 사람들이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병원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만 오늘내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위로를 해야하겠는가? 만약에 “할아버지, 만물이 다 너희 것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겠는가? “얼른 꺼져버려” 라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한 현실이고 실체라는 말이다.

그렇게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 라고 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 절에 다니는 동서가 자기 아들 공납금을 대준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물이 도와준다” 라는 것이다. 그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요한복음 17장 2절의 말씀인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라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권세를 다 예수님에게 몰아주었다는 말이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예수님은, B는 B'가 되고, 또한 D는 D'가 되도록 !!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셔야만 하는가? 창세 전에 약속 안에 있는 B와 D를, 즉 B는 유황불이 떨어지는 지옥에 갈 사람들이 있는 지점이고, 또한 D는 생명책 리스트가 있어서 천국에 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B는 B'가 되고, 또한 D는 D'가 되도록 역사를 움직이게 되는데, 누가 와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꾸미고, 또한 예수님이 보낸 성도에 의해서 역사가 순간 순간 재조립이 된다는 것이다.

◈ 다시, 해쳐 모여 !!

다시 말해서, 일종의 ‘해쳐 모여’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손성식 목사가 전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한번 형성된 구조에 겁먹지 말고, 거기에 성도가 들어가게 되면 바로 그 성도에 의해서 다시 해쳐 모여가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 자칭 성도이고 자칭 복음을 안다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거기에 어느 누군가가 들어갔다면, 그러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들어간 사람으로 인해서 복음을 안다고 하던 것이 모두가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나고, 바로 그 사람으로 인해서 다시금 해쳐 모여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실례를 들면, 정석훈 목사님이 인천의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로 갔는데, 물론 그 교회도 자기들은 복음을 안다고 우기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정 목사님이 두 달인가 복음을 전하고 나니, 즉 설교를 약 60여편 정도를 한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주로 새벽예배 시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새벽마다 복음을 전하니 그 중에서 몇몇이, 나중에는 이 몇몇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몇몇이 그 순간에 해쳐 모여가 되었다는 것이다.

◈ 바울아, 내가 너에게만 할 이야기가 있다 ??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고 말고 하는 것은 결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주님이 사도바울의 곁에 서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귀에다 대고 속닥속닥 말씀하기를 “바울아, 조용히 해라. 내가 누군지 알지? 이것은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앞으로 로마에 가서 죽어야만 돼. 걱정하지마. 내가 너와 함께 해줄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알려 주어도 그렇게 알려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으라고 그렇게 다정하게(?)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으라고 하면서 무슨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기도의 응답도 참으로 희한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 뒤집혀서 내려오는 하늘의 구조 !!

바로 이렇게 매트릭스로 활동하는 여기가 ‘F’ 지점이라고 하면, ‘G’ 지점에는 성령이 계시고, 또한 ‘H’ 지점에는 악마가 있다고 하면, 이러한 영적인 구조가 이 땅에 그대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져서 내려온다는 말이다. 물론 그 뒤집는 모양새도 전혀 우리가 예상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모양새로만 보여지는데, 그것이 뒤집어져서 내려온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성도의 인생은 전혀 자기가 예상한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쳐서 나온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1년에 한번이 아니고, 5년에 1번도 아니고, 또한 10년에 1번도 아니고, 그때그때 ‘해쳐 모여’ 라는 것이란 말이다. 즉 그때그때마다 주께서 십자가의 영으로 우리를 여기 이 지점에서(?) 또다시 뒤집히게 하기 때문에 말이다.

◈ 성화론은, 저리 꺼져 !!

그러니 성도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밖에 없는 삶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을 또 다시 부인하면서, 새롭게 주님으로부터 십자가의 의미를 공급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성화론은 전혀 발붙일 수 있는 틈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심으로서, 우리는 분명히 자기가 가짜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서 수시로 “나는 인간이다” 라고 우기는 존재임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는 흙으로 돌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분명히 예수님만이 진짜 인간인데, 그런데 자기도 인간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자아만이 진짜 자아인데, 그런데 자기의 자아도 자아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의 자아라고 여기니, “주여, 저는 어떻게 됩니까? 이제 로마로 가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어떻게 인도를 하시는가?

사도바울이 독사에게 물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로마로 갈 수 있는데, 그런데 꼭 손에 물려서 놀라서 털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서, 그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믿게 하고 말이다. 물론 사도바울 본인은 독사에 물린 흔적은 남아있지 싶은데, 그러면 왜 그런 흔적이 있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해보면 !!

이제 강의를 마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해서 말이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를 보내셨다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는고 하니, 여기에 ‘대신해서’ 라는 의미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대신해서’ 라는 의미 때문에 한 남자는 인간이 되고, 다른 인간들은 모두가 다 가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전혀 인간이 아니란 말인데, 왜냐하면 ‘대신’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가짜를 대신해서 이제 진짜가 왔으니, 그렇게 오신 한 남자, 즉 예수님만이 진짜 인간임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가짜 인간들이 만든 제국은 가짜들이 만들었기에 분명히 하늘나라는 아닌데, 제가 이것을 두고 ‘허무’ 라고 했는데, 왜 허무라고 할 수 있는고 하니, 그 위에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런 ‘허무’ 라는 용어를 감히(?)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충돌을 !!

그렇다면 이 허무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분명히 실체가 따로 있기 때문에 허무인데, 그런데 이 허무는 자기를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실체가 위에 있는 실체와 아래에 있는 실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실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밑에 있는 것을 실체라고 하면, 그 실체를 누가 만들었는가? 주체가 만들었는데, 그 주체는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이 실체는 실제로 창조가 되어서 있는 것인데,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등등 말이다. 그런 것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의자도 있고 난로도 있고 말이다. 또 만지면 만져지고 말이다. 그러면 이런 실체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만든 사람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실체가 있으면 그 주체도 실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을 누가 만들었지요?” 라고 하면, “예, 제가 만들었습니다” 라고 할 것인데, 바로 그 ‘나’ 라는 것이 실체인데, 바로 그 실체를 진짜 인간이라고 이 세상에서는 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진짜 인간이 이렇게 만들었을 때, 앞서 말한 그런 것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거기에 앞서서 끄집어내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신’ 인데,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서 보면 그것이 ‘우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땅의 실체는 우상이고, 곧 ‘헛됨’ !!
 
그런데 그런 우상을 건드린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몸이 실체이고, 자기들의 그런 진짜 인간을 만들어낸 신이 있다고 본다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이 실체이기 때문에 자기들을 만들어낸 그 신도 역시 실체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구약의 약속에 의하면 우상이고, 즉 ‘헛됨’ 이라는 말이다. 말이 좀 복잡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즉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함으로서, 바로 그 ‘신’을 통해서, 즉 우상을 통해서 접근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 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니까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 신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데 그 신이 헛된 것이라고 하면, 그 신을 만든 우리 인간들도 역시 허구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 허구가 만든 모든 것은 다 허상이기에 !!

그렇게 신을 만든 인간이 허구로 끝이 났다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생명은 호흡에 있다고 했는데, 그러니 그 호흡을 데리고 가버리면 흙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진짜 인간은 가짜가 되고, 가짜 인간이 되니까, 그 자아는 실체가 아니라 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허구가 되어버리면, 노동의 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의 주체도 역시 허구인데, 그러므로 그들이 만든 그 모든 것들도 역시 유황불의 불바다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의자나 난로 등도 모두가 다 불에 탄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순서가 왔던 순서로 거꾸로 해서 다시금 가는데, 좀 복잡해도 이해가 되지요?

◈ 지상에 없는 언약이 주어져서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인간이 만든 신의 실체에 있어서, 구약에서 그것을 우상시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기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이 언약은 이 지상의 그 어떤 공장에서도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지상과 하늘을 하늘을 연결시킬 때 모세가 무슨 산에 올라갔는가? 시내산에 올라갔다는 것이다. 거기서 모세는 40일 동안 물과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빛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부과 병원이나 미용실에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다 허구인데, 하지만 모세에게 빛나는 얼굴을 준 실체는 어디에 있는 실체인가? 결코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모세의 그러한 빛나는 영광이 없으면 결코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만든 빛을 가지고 자기들을 아무리 치장을 하고 꾸며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우겨도, 결코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인간은 결국은 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실체라고 제 아무리 우기고 우겨도, 전혀 소용이 없는, 입만 아픈 실체 아닌 실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인간이 만든 신을 우상이라고 하고 고발하는 실체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 인데, 그 언약이 어디서 내려오는가? 위에서, 즉 시내산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민수기를 하면서 산 위의 거룩이 산 아래로 내려온다고 했는데, ‘뒤에서 본 한국교회’ 라는 강의에서 말이다. 구 목사님이 독수리 타법으로 녹취를 해놓았는데, 거기에 설명이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 악마는, 하늘의 실체를 그대로 베껴서 지상으로 !!

그렇게 위에 있는 언약이 내려오는데, 그렇게 내려오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이것이 조금 어렵기 때문에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여기 하늘에 실체가 있고, 그리고 밑에 지상에서는 이미 악마의 제국이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것은, 마치 이 안경집을 빛을 내려 비취면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런데 그것이 안경집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소시지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빵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윤곽만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구조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구조는 악마가 이미 하늘에 있는 구조를 보고, 즉 하늘의 실체를 그대로 베껴서 이 지상에 가지고 와서 그 모형으로 구조화를 시켜서 악마의 제국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 지상에 있는 모든 법칙과 제도라는 말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등이 말이다.

◈ 하늘의 좌표가 땅의 좌표로 옮겨지는데 !!

그런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언약이 이 지상에 내려온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언약 안에는 실체화된 구조가 들어있는데, 이 지상의 구조가 아니고 말이다. 제가 그 구조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A와 B와 C와 D라는 지점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A와 B와 C와 D라는 지점이 이 지상에 내려오면서, 단순하게 양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방향과 힘으로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것을 두고 ‘벡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에서의 좌표의 위치와 이 땅에서의 좌표의 위치를 옮겨질 때 ‘텐서’ 라는 수학적 용어를 사용해서 벡타의 전환, 즉 같은 벡타를 전환시키면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 왜 굳이 ‘텐서’ 라는 수학적인 용어를?

왜 제가 그런 수학적인 용어를 사용했는고 하니까,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울었을 때, 그렇게 우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아닌가? 여전히 하나님인데, 즉 하나님이란 본질을 전혀 잃지 않으면서도 우시는 것은 악마의 제국에 합당하게 우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고 하니까, 같은 힘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런데 왜 모양새가 다른가? 즉 하늘나라에서는 울 일이 전혀 없는데, 왜 지상에서는 우셨느냐는 말이다. 또한 하늘나라에서는 매를 맞을 일이 없는데, 그런데 왜 지상에서는 매를 맞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위에 있는 언약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그냥 내려오는 게 아니라, 거꾸로 뒤집어져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거꾸로 뒤집을 때,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뒤집는, 그런 뒤집힘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중이 머리를 밀고 산에 들어가서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서, 즉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 부인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가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허구이기 때문에, 진짜 인간, 즉 성령을 통해서 동정녀 몸에서 태어난 그분만이, 즉 예수님이라는 실체에서 주어진 것만이 진짜 제대로 된 거꾸로 됨이고, 또한 뒤집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가짜 인간이, 자기가 머리를 써서 “아마 이 정도만 하면 자기 부인이 될 거야” 라고 해서, 그런 자기 부인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바리새인들이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는 짓거리이고 말이다.

◈ 성도의 사명은?

그러니 예수님께서 거꾸로 하시면서 성도를 보낼 때, 성도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거꾸로 됨을 가지고 파견이 되면, 그러한 성도를 통해서 이 지상에서 더욱 더 죄가 죄 되도록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악마의 제국이 그 본질을 드러내도록 말이다.

바로 그 예가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사도바울은 왕이 자기를 풀어준다는 것을 마다하고 기어이 상위 법원에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가야만 되고, 또한 거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서 더욱 더 이 세상이, 즉 악마의 제국이 더욱 더 규격화가 되고, 더욱 더 제도화가 되는, 바로 그러한 사명으로 주께서 사도바울을 몰고 다니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되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는가? 자아는 없어지고 사명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 마음의 가죽을 벗겨라 !!

이 부분은 아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데, 예레미야 4장에 보면 “마음의 가죽을 벗겨라” 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귤이 있는데, 이것을 네모를 내어서 껍질을 벗기면 귤의 속살이 나오는데, 물론 껍질도 나오고 말이다.

(렘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바로 이렇게 예레미야 4장 4절에서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라고 하면서, 그것을 할례의 의미와 연결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할례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를 온통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이런 피부가죽이 아니라 마음의 가죽이니, 그 마음의 가죽을 벗기면 또 벗겨야하고, 또 벗겨야하니,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서로 모순이 되니 말이다.

◈ 예수님이 거꾸로 해서 오신 사명은?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거꾸로 해서 오시게 되면, 그렇게 거꾸로 해서 오신 사명이 무엇인고 하니까, 놀랍게도 이 지상의 세계가 얼마나 악한 세계인지를 더욱 더 독려하고 격려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악을 조장하도록 하는데,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내는고 하니, 성도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 안에는 주님이 주신 거꾸로 된 사명이 !!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나오는 그 뒷부분인데, 즉 일곱 인,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을 어떻게 할 때마다 그들은 더욱 더 격앙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들게 되는데,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성도를 그들에게 보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오게 되면, 그 성도 안에는 주님이 주신 거꾸로 된 사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우에도 곱게 죽는 것이 아니라, 꼭 성전에 가서 한번 뒤집음으로서 자기 죽음을 유도하신다는 것이다. 기어이 그들로 하여금 말이다. 즉 이 지상에 있는 A, B, C, D 각각의 모든 각 지점들이 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뱀의 후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구조가 그렇게 제대로 활용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강의제목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를 대신해서 보내셨다” 것이다. 한 남자를 대신해서 말이다.

이제 끝으로 교재 16페이지를 한번 살펴보자.

** 인간 내부에서 죄인이 되기 싫어하는 악한 성품만 꿈틀댄다. 절대선(善)에 비해서 모자라고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죄인은 아니라고 극구 우긴다. 어떻게 하든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해서 다루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할 한 분을 보내셨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죄인이 무엇이지를 밝혀주실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분의 거룩과 선과 의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 우리와 경쟁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를 짊어지고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 서신 분이다. 

◈ 악마로 하여금 감추어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

여기에 “우리와 경쟁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마귀를 만나서 상대하신 것이지, 시시하게 우리 인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A와 B와 C의 지점이 있으면, 그것이 이 지상에서는 A‘와 B’와 C‘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의 지점인데, 그렇게 구조화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귀인지 아닌지는 누가 와서 밝혀주어야 하는고 하니까, 바로 예수님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니 마귀가 자진해서 “당신은 벌써 오실 분이 아닌데, 왜 이렇게 와서 나를 괴롭힙니까?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은 악마로 하여금 감추어진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듯, 바로 성도의 역할도 또한 그러해야 하는데, 그러니 진짜 성도는 어느 교회라도 가기만 하면, 그동안 조용했던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와락 달려들어서, 자기들이 가짜임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명이 성도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에 복음을 알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사명을 사명답게 감당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천국이 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천국에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사명자임을 알았사오니, 이제는 모든 만물이 우리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자유롭고 마음껏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9,11 새벽 1시 10분에 마침.

                                             목사님의 받은 은사가 참으로 부럽다는 말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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