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6강

아빠와 함께 2024. 8. 16. 10:50

[09 대구강의 11] - [피 6] - 사로잡힌 바 됨
                                                                                
                                                           09,06,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아니, 초대교회 때에 무슨 일이?

오늘은 교재 1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 어느 인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서 격분하지 않을 위인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다.

지난 시간에도 마지막에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을 격분케 했다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격분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도 격분하지 않을 위인이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사도들은 알다시피 초대교회 때 활동한 자들인데, 그래서 그 시대를 사도시대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초대교회 때, 그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21세기이고, 너무 오래된 이야기이고 해서 우리는 그 당시 초대교회를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가지만 말이다.

실제로 사도들이 살았던 그 시대, 즉 예수님은 승천을 하시고 가버리고 없고, 이제는 11명에서 1명을 더한 12명의 사도들이 남아있는데,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활동을 한 것이 초대교회의 사도시대라는 말이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때의 일이 오늘날 우리의 일이 되어야 !!

그때 일어난 일이 오늘 우리교회나 십자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데, 그때 일어난 일들이 오늘날 여러분들의 교회에서도 일어나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교인들과 타협이 있었는가? 그러면 그대로 방치를 했는가? 긍정을 했는가? 옹호했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존의 세상에 대해서 교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두고, 타협도 하지 않고, 방치도 하지 않고, 긍정도 하지 않고, 또한 옹호도 하지 않고, 그러면 도대체 교회가 무엇을 했느냐는 말이다.

타협, 방치, 긍정, 옹호 ??

오늘날 21세기 교회에서, 그래도 사도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볼 수 있는 목사나 장로가, 어떤 사람이 교회에 오게 되면 무엇부터 하게 되는가? 타협, 방치, 긍정, 옹호를 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런 것을 하나의 매개로 해서 그들을 자기 교회에 등록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충돌을 !!

그런데 초대교회에 가면 사도들이 무엇을 했는가? 오늘날처럼 어떻게 사람들을 교회에 끌어 모을지, 거기에 대해서 궁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만나서 무엇을 했는가? 그만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19페이지에 제가 그렇게 적었는데,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서 격분하지 않을 위인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사도들이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즉 “에에, 더러워라. 나는 산 속의 기도원으로 간다” 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무조건 나갔는데, 그런데 만나자마자 그만 계속해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와 유대 지도자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또한 고린도전후서를 보게 되어도 거짓 사도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그들의 만남은 충돌을 야기시켰다는 것이다. 타협, 방치, 긍정, 옹호와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충돌이 일어나면 나쁜 교회 ??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고 만남이라고 한다면, 또 그런 만남이 충돌로 이어졌다고 하면, 과연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런 만남과 충돌이 일어나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에서 충돌이 있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보는고 하니, 그만 나쁜 교회상으로 간주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그 교회에 문제가 있나봐. 그 교회는 안 좋은 교회구나. 가지 말아야 하겠어. 교회는 편안해야 돼. 조용해야 돼. 교회는 아름다워야 해. 그래야 은혜가 있는 거야” 라고 말이다.

교회가 아름답게 되려고 하면,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밋밋하면 안 되고, 꽃도 좀 있고, 또한 카페트도 깔려있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여기 밑에 조그만 내려가면 실제로 아름다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플랜카드를 보면 “좋은 가정, 그리고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는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인지, 아니면 가정 상담소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도들의 초대교회가 과연 그렇게 했는가? 저는 사도행전을 보면서, 좋은 아버지, 좋은 엄마, 그리고 자녀교육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교회가 그러한 자녀교육을 가르치게 되면 전혀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기를 가지지 못하는 가정에서 열을 받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충돌이 왜 일어나는가? 뭔가 격분할 일이 있었기에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런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격분한 그들이 악한 자들인가?

아무튼 이렇게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서 격분하지 않을 위인이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 나쁜 놈들아, 사도의 말을 듣고 화를 내다니?” 라고 하면서, 사도는 옳고 세상은 나쁘다고 해버리면 쉬운데, 과연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쁘냐는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나쁘고 악한 인간이겠는가? 그들이 산적이나 강도처럼, 그렇게 막된 인간이겠는가?

예수를 죽여라 !!

여기 교재 20페이지를 한번 읽어보겠는데, 여기 20페이지부터 22페이지까지의 내용은, 제가 이 책을 다 쓰고 나서도 잊을 수가 없는 부분인데 말이다. 제가 그래도 신학을 공부했기에, 저쪽 자유주의자들이나 감리교, 혹은 한신이나 장신 쪽의 신학을 그래도 조금은(?) 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세 번을 걷고 한 번 절하는 소위 ‘삼보일배’를 하는 분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냥 산 속에서 자기 혼자서 조용히 하면 되는데, 왜 그 복잡한 서울시내의 한 복판에서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물론 하는 것은 자유지만 말이다. 그리고 달라이라마 같은 양반들, 바로 그런 사람들의 글을 염두고 두고 다음 글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교재 20페이지를 제가 읽겠습니다.

** 예수님에 대해서 그토록 싫어했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오늘날 인간들보다 결코 인격적으로 편협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합리적이고 현명했고,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따르려고 애썼던 자들이다. 말씀 앞에서 장난치거나 까불대지 않았고, 진지하고 경건한 심령으로 자기를 낮추고 또 낮추면서 자기 절제에 사활을 내걸었던 자들이었다. 방종을 미워했으며 방종하는 자들을 저주했다. 그들은 무슨 판단이든 경솔히 내리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각을 진리라고 우기지도 않았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았고, 독단의 위험성을 잊어본 적이 없다. 다른 이들과 협의해서 예수와 세례요한을 심사했다. 공동의 노력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나무만 보지 않고 숲을 함께 보는 지혜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자기네 세대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는 세대까지 고려하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들이 이렇게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 “예수를 죽여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사도들을 죽여라”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방종과 독단과 편협한 의견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경건한 자들이 내린 결론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사도들의 말씀을 해석하는 실마리가 풀리게 되는데,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또한 베드로전후서 등을 설교함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도들에게 대든 자들을 막된놈들이라고 안일하게 여겼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인간들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열성을 끄집어내어야 !!

사도들의 적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즉 인간들이 가지고 진선미(眞善美), 그러한 모든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합체가 바로 “사도를 죽여라” 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사도들의 말씀을 보면서, 인간들이 이루어내고자 하는 진선미에 대한 열심과 합리성을 끄집어내어서, 서로 연결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만 되면 사도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인간이 신이 되려고 하는 그 모든 가능성을 다 끄집어내어서, 그러니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사도의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그 모든 인간의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들을 모두 들추어내서, 그리고는 사도의 말씀을 살짝(?) 가지고 와서는 교인들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즉 “여러분, 충돌이 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교인들의 반응이 “목사님, 사도들의 말씀이나, 진선미를 추구하는 그들의 열심히 하는 마음이 똑같네요” 라고 나온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전혀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없고, 또한 사도를 죽이라고 할 이유도 역시 없다는 것이다.

말씀은 통역이 필요한데, 그 기준은 사도 !!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방언이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한데, 그 통역이 맞고 안 맞고 하는 기준은 바로 사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다음 두 가지의 기준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데, 먼저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현재의 모든 말씀은 다 방언이기 때문에 통역을 해야 하는데, 즉 사도가 반드시 심사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통역이 필요가 없다고, 즉 굳이 그렇게 하지를 않아도 인간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보통 언어라고 나온다면, 사도가 죽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통역도 없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은 백이면 백이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지금 우리가 초대교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초대교회는 만남이었는데, 그런데 무슨 만남이었는가? 설득이 아니라, 충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충돌을 통해서 사도가 노린 것은 무엇인가? 지금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데, 그러면 그들이 말하기를, 왜 자기들이 모른다고 무시하느냐고 따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아담의 구조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들의 말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욕되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논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그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하니,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회개하라.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영적 사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바로 그런 쪽으로 진행이 되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즉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자세를 다른 일반인들과 비교하면서 이렇게 보셨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당부하셨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요즈음 사람들이나 심성에 변화가 없다. 그 당시 사람들도 자신을 도와주는 그런 메시야를 원했고,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사정을 알아주고 도와주기만 하는 그런 예수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결과는 매 한가지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설마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도록 미워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예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예수님은 다가오시는데, 그래야만 그 관계성 안에 십자가의 피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신, 정말이지 미워죽겠어 !!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미워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을 오해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인데, “저는 제 자신이 너무나 밉습니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그런데 “우리 악수를 하고 사이좋게 잘 지냅시다” 라고 하면, 그것은 전혀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 속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밀치고 죽도록 미워하는 것이 나와주어야, 그렇게 되어야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정말, 당신이 미워죽겠네. 왜 기존의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버리라고 하는가?” 라고 해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들은 기존의 알고 있던 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을 더 심하게 이야기했는데, 즉 인간의 행함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함과 상관이 없는 인간이 누가 있는가? 즉 “인간의 행함으로는 죄가 나타날 뿐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할 뿐이다” 라고 했을 때,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 다 거부당한다고 하는, 거기에 대한 격분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재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살펴보자.

** 자신의 업적, 자신의 성과, 자신의 열정, 자신의 존재, 자신의 수고, 자신의 지혜, 자신의 가치, 이 모든 것이 다 미워지지 않는 한 누구든지 예수님을 밀쳐 죽게 할 것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그러니 예수님과의 만남은 고운 만남이 될 수 없는데, 그리고 사도는 그냥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를 믿게 할 수는 없는데, 즉 예수님께서 작업을 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그래서 그들을 찾아다닌다는 말이다. 즉 추수는 주님이 다 하시는데, 그러니 사도는 이삭줍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반드시 밀어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나는 직접 신을 만나 담판을 지을 거야. 내가 그 동안 신에게 얼마나 성실했고 충성스럽게 섬겼는지를 보여주면서 당당하게 신 앞에 서고 말거야!” 그러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을 섬기지 말고 나 예수만을 섬겨라” 라고! 그러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늘 타인이다. 즉 그는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내가 아니다 !!

그러니 하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고 뭐고 간에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담판을 짓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늘 타인인데, 즉 “그는 내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나를 밀치고 나 아닌 것을 궁극적으로 사랑할 이유를 인간은 애당초 가질 수가 없었다. 인간의 본성은 최종적으로 자신만 겨냥한다. 그런 본성의 방향을 자기 말고 타인에게 향하게 할 이유나 능력이 없다. 나 말고 타인을 최종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받아들이기 곤란한 소식이다. 십자가를 거부하면 지옥의 열린 문으로 빨려 들어가 혓바닥 같은 지옥 불에 삼켜진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봤자 협박과 공갈로 받아드린다. 자기 말고 다른 이를 최종적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메시야가 교회 사람들에게 떠밀려 길바닥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를 빼놓고,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보다 더욱 더 사랑할 수는 가능성이, 그런 가능성이 우리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 인간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먹혀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아셨다. 인간 내부에 과물이 들어있음을. 이 사실은 악마도 아는 사실이다. 단지 괴물로부터 침입을 당한 당사자만 모를 뿐이다.

(마 8: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제발 지옥에 가게 해다오 ??

여기 괴물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좀 설명을 해야하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 제목이 “제발 지옥에 가게 해다오” 라고, 제목이 참 멋있지요?

 

제발 지옥 가게 해다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에게 간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제발 돼지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31절) 멸망을 자처하는 장면이다. 이 돼지들은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몰살한다. 그 뒤에 이 귀신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 귀신들은 예수님에게 회개하지 않고 죽기를 자청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셀 수도 없이 많은 복음을 전했건만 왜 사람들은 자기 소유물 속으로 깊숙이 기어 들어가 숨어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지옥에 가고 싶은 것이다. 천국이 싫은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옥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목표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 점을 예수님은 존중해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6-27)
 
이것도 모르고 복음 전달자는,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파멸의 장소로 미끄러지는 것을 끌어당기고자 불철주야 애타며 기도하며 심방하며 복음을 알려주려고 애셨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들의 심정을 존중해주지 않는 태도다. 그들이 천국 좋다는 사실을 몰라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지옥이 그들의 본향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서 그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렇다면 왜 악마에 속한 자들이 그냥 지옥하면 될 터인데 예수님에게 간청하는가? 교회에 나오는가? 복음을 외치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지옥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악마가 심어 넣은 본성이요 천성이다. 지옥은 가고 싶다고 자옥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도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그들이 꼭 가고 싶어 하는 지옥에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들추기도 하고 신학을 운운하면서, 자신이 지옥을 갈 수 밖에 없는 정당성을 스스로 갖추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복음이라는 것도 실은 인간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설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은 뭐든지 하나로 굳어질 수가 없다.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라. 내세를 묘사하는 이론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라. 지옥이 꼭 있다는 보장이 없다. 천국이 꼭 있다는 보장도 없다. 만약에 지옥이 꼭 있다면 내가 거기에 앞장서서 들어가 주마. 참으로 지옥이 꼭 있다면 왜 내가 앞장서서 목숨바쳐가며, 거기에 들어가지 말라고 외치지 않았겠는가! 수많은 세월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목회를 해왔지만 결국 지옥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았다. 이점을 내가 알기에 평소에 지옥을 강조 안 한 것이다. 신의 뜻이 궁금하냐? 될 수 있는 대로 쉽고 편하게 생각하라. 즉 그저 남 해코지 말고 사람답게 바르게 살아라 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이란 각자의 마음먹기 달렸다. 아무도 믿지 말고 신도 예수도 믿지 말고 네 자신을 믿어라. 비록 불분명해도 그 자체로서 족하다.”
 
이것이 가룟 유다의 본심이었으며 악마의 본심이다. 바로 이런 마음을 인정해주는 세계를 본인들이 원하고 있는 바이다. 이것이 그대로 내세로 영원히 이어졌으면 한다. 그러니까 정말이지 지옥가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본심을 신의 강압에 의해서 지적받거나 멸시받거나 무시당하지 않는 그런 세계를 원하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의 개성이 존중되는 그런 세계, 바로 그 세계를 진심으로 원하기에 개성이 죽는 천국보다 개성이 인정되는 지옥을 원하는 바이다.
 
이들이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님에게 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심을 예수로부터 허락받고 인정받기 위함이다. “주여, 저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주님만이 세상이 주관자인 것을 믿습니다. 그러니 저를 제발 지옥에 넣어주세요.”
 
따라서 복음전달자는 이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그들이 지옥을 가고 있음을 정확하게 말해주어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이 지옥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들이 지옥 가는 보람과 희망에 대해 격려해주어야 한다.
 
“당신은 복음은 모르고 ‘하나님의 주권’을 전하기 때문에 당신이 소원대로 지옥을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안심하세요.
당신은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예정론’을 전하기 때문에 당신의 소원대로 제대로 지옥하고 있으니 안심하세요.
당신은 복음은 모르고 ‘교회 개혁’을 외치고 있으니 당신의 소망대로 빠른 걸음으로 지옥가고 있으니 더욱 매진하세요.“라고
당신은 복음을 모르고 ‘개혁주의 신학’을 전하고 있으니 소망대로 꼭 지옥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복음은 모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으니 이 일을 통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되니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복음은 모르고 ‘삼위일체 신학’을 증거하고 있으니 소원대로 당신의 지옥 가치를 인정해주는 그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어쨌든 나를 죽이고 예수만 사는 세계는 싫다는 것이다. 예수가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미래에 나를 남기기 위해 어쨌든 지금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가고 싶은 내 심정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복음 전달자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십자가 없는 쪽으로 가시면 당신이 결국 당신이 역겨워하는 그 십자가가 영원히 없는 곳으로 가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힘 내세요. 지옥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지옥에도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간다는 사실이란 말이다.

이것은 미처 우리가 몰랐는데, 마태복음 8장에 나오듯이,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발 자기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에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은 죄를 지었다고 무조건 다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무리 천국을 이야기해도 지옥에 가야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세 번째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게 곧 결론인데, 그 사람의 심성을 존중해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너무 힘들게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까, “여러분, 지옥에 가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십니까? 불구덩이 속에 있어야 하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모르십니까? 부자가 얼마나 후회를 했습니까? 그러니 그런 짓을 왜 합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지옥에 가야될 사람은 반드시 지옥으로 !!

그런데 그것이 바로 목사의 잘못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이 지옥이 나쁜 줄 몰라서 가고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면 저주를 받는 줄을 뻔히 잘 알면서도, 자신의 본성이 거기에 가야만 하는 사람은 꼭 가야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옥에 가야만 되는 사람을 붙잡고, 물론 “힘내세요. 가세요”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목사가 자기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애정이 너무나 깊어서 “그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마시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하면 되는데, 그래서 제가 지옥에 가는 방법을 친절하게도 다 설명을 해놓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삼위일체를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교회개혁을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면 소원대로 지옥에 갑니다. 힘내라. 지옥으로 가자!” 라고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안다, 안다” 라고 하면서 이상스럽게도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사실 그때는 눈치를 채야한다는 것이다. “아하, 저 양반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저히 자기 본성을 이길 수가 없구나”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은 그냥 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면 그 양반들은 힘이 드는데 왜 자꾸 복음을 들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허락을 받기 위해서인데, 즉 “저는 지옥에 갈 사람이 맞지요?” 라고 말이다. 물론 주님은 허락을 해주시는데, 그래서 돼지 떼에 들어가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퀴즈 - 왜 마귀는 회개하지 않는가?

그래서 제가 여기서 문제를 하나 제기를 해보면, 그것이 모든 신학자들의 의문점이기도 한데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왜 마귀는 지옥이 있음을 알고도, 예수님을 만나고도 회개도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신학자들이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해도, 왜 마귀는 회개하지 않는지, 그것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마귀는 회개하지 않는가? 지옥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 얼마나 능청맞게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마귀가 최고의 신학자인데, 그러면서도 마귀는 왜 회개를 하지 않고, 지옥에 자진해서 가려고 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심어준 본성은 자기도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물론 그들은 “우리도 십자가의 피고 알고, 그 복음도 압니다” 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기어이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해주라는 것인데, 즉 갈 때는 아주 기분 좋게 보내주라는 것이다. 그 존중해주는 방법이 바로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삼위일체를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교회개혁을 전하면 지옥에 갑니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기계 ??

그것을 제가 “인간은 기계이다” 라고 했는데, 즉 괴물이 침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계를 보고 따지지는 않는데, 물론 성질이 급한 사람은 공장에서 기계가 돌아가지 않으면 발로 차고 하는데 말이다. 자동차가 멈추어도 발로 차고 말이다.

하지만 주님과 마귀는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현명하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기계 탓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괴물 때문임을 너무나도 잘알기 때문에, 결코 그 기계를 보고 따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왜 해산하는 아픔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여자는 기계이기 때문인데, 즉 여자는 아이를 낳는 기계라는 말이다.

에피소드1- 사랑은 가는 기차도 멈추게 해 !!

영화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거기에 보면 사랑이 기차를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둘이 서로 삐쳐서 이제는 잘 가라고 하면서 그만 헤어지는 내용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바로 헤어지는 그 순간 여자는 그 남자에게 사랑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물론 이미 기차는 떠났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 여자가 사랑한다고 하니, 남자가 그 여자의 말을 알아듣고 기차를 세워달라고 하니, 물론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차가 선다는 것이다(ㅋㅋ). 그렇게 이 사랑에 사로잡힌 바가 되면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조건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에피소드2 - 저는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

그야말로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하나 더하면, 김대식씨 친구 분이 이번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미 남자는 마흔이 넘었는데 여자는 아직까지 20대라는 것이다. 이 신랑이 될 남자는 장모하고 3살인가 차이가 난다고 하는데, 남들이 보면 그야말로 엉컴한 늑대이고 도둑놈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누가 말리겠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남자가 미안한 마음에 자꾸만 주저하니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저는 당신의 선물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여자의 마음을 거절을 하겠느냐는 말이다. 즉 “우리들은 하나님께 다같이 바쳐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당신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라고, 여자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여자는 직업이 교사인데, 그리고 그 친구 분은 복음을 아는 강도사님이고 말이다. 그러니 서로가 찰떡 궁합은 맞기는 맞는데, 남자가 쫓겨나면 여자가 먹여 살리면 되니 말이다. 이미 그 강도사님도 전과가 4범인가 된다고 하는데, 물론 앞으로 별이 계속해서 더 많이 붙겠지만 말이다. 이전에 총신을 다닐 때도 복음을 이야기하다가 2년이나 더 다녔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공부가 좀 딸렸는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말이다.

그런데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가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생전 그런 설교를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복음을 아는 강도사님에게 자기가 희생을 할테니 자기를 신의 선물로 여겨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자 집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그래서 2년인가 헤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여자가 정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 부모에게 협박을 해서, 즉 강도사님에게 시집을 보내주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허락을 받아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집을 올 때 이미 “내가 교사를 해서 먹여 살려줄 테니, 그러니 당신은 복음을 전하세요” 라고 했는데, 그것이 복음을 아는 남자에는 또 하나의 복음인데 말이다. 그래서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는데, 주례가 그 여자의 엄마가 다니는 제법 큰 교회의 목사인데, 왜 그 교회의 목사인고 하니, 여자 엄마가 그 동안 부조를 한 것이 많아서 말이다. 어차피 결혼을 하면 서울로 갈 것이니, 그 교회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돈만 챙기고 떠나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

아무튼 그렇게 사로잡힌 바가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미 다 끝난 이야기가 되는데, 그게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나오는데,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은 구절인데, 어린아이처럼 다같이 한번 읽어보자.

(딤후 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아니, 이렇게 사로잡히게 되는데 무슨 방종이 있을 수 있는가? 사로잡혔다는 것은, 자기보다 자기를 사로잡는 분이 더 세다는 것이다. 주님이 제일 센데 무슨 방종이냐는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방종을 하시는가? 그러니 전혀 방종이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디프컬트한 신학적 문제를 하나 !!

지금부터는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는데, 신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해결이 되지 않아서 난감해하는 부분인데 말이다. 진도는 조금 멈추고 한번 해보겠는데, 일단 예레미야 19장 11절을 찾아보자.

(렘 19: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여러분이 이 구절이 왜 어려운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이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이 한번 깨어지면 온전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 말이 맞지요? 즉 깨트리게 되면 회복불가인데, 그러니 조심하라는 것인데, 물론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신다” 라고 하는 것과 서로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서로 융합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어렵다는 말이다. 이미 다 알고 계시는데, 그러면 더 이상 조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에게 사로잡혔다면 그것으로 다 끝인데, 그런데 왜 쓸데없이 명령과 권면을 하느냐는 말이다. 왜 굳이 명령을 해서, 즉 “너희들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징벌을 받지 않고, 어떻고 저떻고?” 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사로잡았으면, “너희들은 사로잡혀서 꼼짝 못한다. 그러니 이상 끝!” 이라고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런데 왜 명령을 하고 권면을 해서 헛갈리게 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왜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라, 마지막 때니 깨어있어라” 라고, 왜 그렇게 군지렁 거리면서(?) 잔소리를 많이 하느냐는 것이다. 또한 “너희에게 믿음이 있는지 시험을 해보고”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외에도 이런 내용들이 얼마나 많으냐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을 공부한 교인들을 가르쳐야 될 목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입장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처음 것을 이야기하자니 교인들이 방종을 할 것 같고, 그렇다고 두 번째를 하자니 교인들이 머리에다 쇳덩어리를 이고 교회당 문을 열고 세상에 나갈 것 같고 말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

물론 조심하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사실 우리가 조심하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둘을 어떻게 결합을 시켜야할지 그것이 문제인데, 그래서 목사들이 흔히 써먹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이단에 빠진다고 협박을 하면서 말이다. 여호수아 1장 7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인데 말이다. 즉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그런데 이렇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그 중간이 되는데, 그러면 3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 인데, 그런데 그 중간이, 즉 제3의 길이 없으니, 그 구절과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구 내뱉는다는 말이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해 ??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왜 이러한 것이 논쟁거리가 되는고 하니, 즉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조심하라)” 라는 성경의 내용이 말이다.

이것을 보통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인간은 또 여기에 있다고 보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신이니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지시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다 예정하시고 예지하시니 아신다고 하는, 그런 관점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먼저 과연 이러한 관점이 맞는지, 그것부터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를 시작하면서, 성도는 누구의 말만 듣는다고 했는가?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행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행 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도대체 예수님에게 무엇이 나오는가?

흔히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데,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피가 나온다” 라는 것만 원하신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존재가 신인가? 인간인가?” 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에게 무엇이 나오는가?” 라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피와 우리의 만남이 !!

그러니 예수님을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와 우리의 만남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죄인으로 만나게 되니, 이렇게 성경말씀에서 조화가 되지 않는 이유도 무엇인고 하니,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즉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조화가 되는가? 안 되는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권과 자유의지가 조화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조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되기 때문에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피, 희생,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다.

야, 여기 있다. 가져가라 !!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게 무엇인가? 지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의는 또 챙길 대로 챙기고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평불만이 나오는데, 즉 “제가 잘 하려고 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자기 의이고 자기 방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주시는 분인데, 즉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다 완성한 것을 우리에게 “야, 여기 있다. 가져가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넘겨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위의 그 두 개를 조화를 시키지 못해서가 죄가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처럼 넘겨주는 자가 아니고 사수하고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식이든 무엇이든 간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안주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아하, 나는 정말로 죄인이 맞구나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렇게 조화가 되지 않는 말씀이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데, 그렇게 우리를 데리고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하는고 하니, “아하, 나는 정말로 죄인이 맞구나. 이 두 가지의 말씀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는가?” 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고 하니, “바로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면서, 오직 예수님 피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미 깨어지고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우리편에 서서, 우리가 어떻게 알고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매개로 해서 바로 그 예수님의 ‘다 아심’에 합류하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깨는 것이 주특기인데, 즉 모르겠다고 하고, 그러면서도 잘난 척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그런데 주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시면서, 우리와 같은 못난 인간도 주님의 뜻대로 의인을 만드는데, 바로 주님께서 완벽하게 모두 다 이루어내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이다.

결론은, 예수님의 피가 모두 이루었다 !!

그러니 누가 다 알고 있는가? 이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또한 깨어진 것도 주님이 아시기에 누가 회복시키는가? 예수님께서 회복을 시키는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성경말씀을 해석한다고 하면, 그 어떤 해석을 해도 결국 무슨 해석이 나오는가? 두 가지가 조화가 되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모두 이루었다고 하는, 그런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성경본문을 보면서 십자가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봐서,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그렇게 해서 신학적으로 도출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열심히 해봐도, 그렇게 해서 맞아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피가, 즉 우리가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모두 다 하셨다고 하는 설교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는 과정이 굉장히 힘이 드는데, 즉 굽이굽이 고갯길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목사님, 스데반 집사는 참 이상해요 ??

어떤 사람이 저에게 질문을 못되게 계속해서 퍼붓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스데반 집사는 참 이상하다.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왜 굳이 자기가 그렇게 설치면서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죽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런 종류의 질문을 예상보다 많이 하는데,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시는데, 왜 자기가 뭐가 잘났다고 설치느냐고 말이다. 그냥 오래 살면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고 하면서 말이다.

여러분이 저의 입장 같으면 뭐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를 왜 보내고, 또 빌립은 왜 전도를 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이 된 자는 굳이 전도를 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구원을 받는데 말이다.

하지만 제가 감히 여기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데반 집사님에 물어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주님이 내 안 계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토하게 하셨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그것이 바로 사로잡힘 바 된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께 사로잡혀서,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주께서 다 하시는 것이니, 나는 빠져도 되겠지” 라고 통밥을 굴린다든지, 그렇게 자기가 살려고 하는 노림수가 그만 주님에게 사로잡혀서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무대포로(?) 하는 것인데, 물론 그렇게 하다보면 죽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는데, “사도바울은 자기는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요? 왜냐하면, 자기는 유대인들에게 쫓겨서 성에서 밤에 몰래 바구니를 타고 도망을 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말이 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주님에게 사로잡힘 바가 되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살자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라고 하면 주님이 시켜서 순종하는 것이지, 자기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주님에게 참된 성도가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통밥,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인데 말이다. 그런 것은 아무런 쓸데없는 짓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두고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하면서, 즉 자기에게는 전혀 의로움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그런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쉽다고 했는데 말이다. 일단 다시 쉽게 정리를 해보면, 예수님은 내어주는 식이고, 우리는 끌어 모으는 식인데, 바로 그러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서 내어주는 식으로, 그렇게 죄인을 포섭하겠다는 것이다. 즉 “아이쿠, 이 불쌍한 인간아! 날마다 니 의만 챙기지? 이리 오너라. 내가 구원해줄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주님의 공로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내어주시는 분 !! 우리는 소유하는 놈 !!

그러니 항상 주님은 내어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소유하려는 자들인데, 즉 인간은 항상 소유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이 되었던, 또 과학이 되었던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매일같이 끌어 모으고 또 모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하면 안 되는데, 오히려 자기가 알려고 하다가 그만 얻어터진 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나는 이것을 안다고 하다가, 그만 주님에서 물에서 먼지가 나도록 얻어맞았다” 라는, 그런 것만 말이다. 그것이 바로 사로잡힘 바가 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제 교재를 보도록 하겠는데, 아까 말한 기계, 즉 괴물 이야기는 뒤에 나오면 그때 자세하게 하기로 하고 말이다. 일단 교재 23페이지를 살펴보자.

** 신혼이불같이 덮어주는 대자연의 감미로운 흐름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십자가라는 참극이 벌어지기 전에는 좋았다.

신혼이불같이 덮어주는 대자연의 감미로운 흐름은 !!

만약에 신혼여행을 갔는데, 그만 밤에 강도가 들어와서 신랑신부의 이불이 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보면 “신혼이불같이 덮어주는 대자연의 감미로운 흐름은” 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흐름’ 이라고 한 것은 동양철학을 염두에 둔 표현인데, 그러니 이 짧은 한 문장에 동양철학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는 달리 존재가 아니라 흐름, 즉 ‘기(氣)’ 라는 말이다. 동양철학에서 대자연은, 산은 산으로 가고 물은 물로 가는데, 그렇게 돌고 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곧 ‘바알’ 종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부활하는 말이다.

아니, 십자가 사건의 참극이 !!

그러니 무엇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 흐름에 맡겨두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만 여기에 ‘십자가 사건’ 이라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누가 그 참극을 일으켰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그 의미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철학이라는 것은, 우리가 굳이 동양철학을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부에 ‘기’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리에 나가면 “도를 아십니까?” 라고 해서, “당신 때문에 영혼이 뜨거운데, 그러니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교제 아닌 교제를 나눌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십자가의 피가 묻게 되면, 지우개나 하이타이를 가지고서 열심히 닦고 지우게 되는데, 그냥 참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집안은 감미로워야만 하고, 흐름도 원활해야하니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피투성이의 참극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세탁기를 하루종일 가동해서라도 깨끗하게 해야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게 해야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인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십자가의 피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피가 발리지 않으면 주님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흐름을 이야기하는 동양철학과 기독교의 만남이, 요즘 자주 만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만남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던 저 푸른 하늘이 유황불로 뒤덮이는 소식을 접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땅의 안정성을 믿었다.  

‘땅의 안정성’에 대해서 !!

여기에 ‘땅의 안정성’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설명을 좀 해야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안정성’의 대표적인 인물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인데, 이 가인이 자기 고향에서 쫓겨나서 도시를 만들고 문화를 일으킨 것은, 그것은 바로 땅의 안정성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땅의 안정성을 뒤집어서 이야기한 사람이 곧 노아라는 것이다. 이 노아는 현재 있는 땅의 안정성을 뒤집어버리고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안식의 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바로 ‘노아’ 라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의 후예들이 세운 땅의 안정성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안정성이 되려고 하면, 노아가 겪었던 그 위기의 순간을 같이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노아가 도대체 무엇을 느꼈는가? 모든 것은 물로써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인처럼 땅의 안정성을 원하는 그 자체가 심판을 받을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땅의 안정성은 왜 추구하는가? 그 땅에 누가 살고 있는가? 단지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는 말이다. 즉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은 무조건 안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인은 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는가?

그런데 여기서 또 골치 아픈 신학적인 문제가 등장하는데, 특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않고, 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게 했는가?” 라는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흔히 대답하는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즉시 죽이지 않고 쫓겨다니는 형벌을 받게 하셨느냐는 것이다. 알다시피 가인이 자기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그렇게 되면 그 당시에는 십중팔구는 당연히 사형감인데 말이다.

그런데 왜 가인은 그런 사형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유리하는 객이 되는 형벌을 받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곧 창세기 4장 12절에 나오는데, 즉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판결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물론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맞고 말이다.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 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 질문 -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을 할 차례인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인을 낯선 땅에서 유리하는 객이 되는 형벌을 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 답변 -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요? 

자유주의 - 나그네를 배려하는 것 !!

그것이 아니라(ㅋㅋ),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기 이전에, 우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그네를 배려하는 것” 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마지막에 사람을 죽게 하기 전에 한번 봐주기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당장 죽여도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한번 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해방신학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비록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것을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지 말고, 여기에는 아웃사이더가 해당이 되는데, 즉 동성애, 낙태, 마약, 근친상간 등등 말이다. 이런 전체를 두고서 요즘은 소위 ‘소외계층(소수계층?)’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요즘 영국 성공회의 신부들이 서로 동성애를 해도, 주교가 그것을 파문조치를 하는 것을 법에서는 금지하도록 해놓았는데, 그러면 왜 동성애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서로 땡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ㅋㅋ). 그렇게 땡기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 마약을 하는가? 역시 땡기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반응이 없는데 말이다(ㅋㅋ).

바로 그러한 소외계층을, 즉 보트피플, 혹은 이주자, 가난한 자, 학대를 받는 자, 옥에 갇힌 자 등등, 그것이 이사야서나 누가복음 등에 나오는데 말이다. 즉 누가복음 4장 18절에 있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그러니 이런 자들을 누가 거두어야 하는가? 교회가 끌어않고 감싸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술, 담배, 마약 등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즉 그들을 교회가 감싸주려고 하면 그냥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생각에 공감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탈북자도 포함되고, 정권을 잡고 있는 김정일도 역시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회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너무 나무라지 말고, 마치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었듯이,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움이니까, 그렇게 북한을 얼싸 않고 감싸주는 것이 교회가 해야할 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나 신부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삼보일배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말씀에 입각한 사명감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 그들의 행동이 좀 이해가 되지요?

십자가 마을 -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

바로 그런 자비심이 모든 정치 경제를 초월해서 만남을 성사시키는 유일한 통로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하나님이 자비심을 베풀었는데, 보수주의자들이 뭐라고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자들은 넘어갈 만한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성당에 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하는데, 물론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도 일조를 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사람을 끌어 모으는 방법은 가지각색인데, 참 쉽죠잉?(ㅋㅋ) 그러니 동성애든, 뽕쟁이든 간에 다 괜찮다는 것이다. 교회가 그런 것을 당연히 포용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처럼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너무 흥분해서 설치지 말고 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교회에서 축하는 현수막을 걸고, 또 크리스마스가 되면 절에서도 그렇게 하고 말이다. 그런 것이 바로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가인을 통해서 땅이 흥분하도록 !!

그렇다면 이것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왜 가인을 살려두셨는고 하니, 이 가인은 땅에다 피를 흘려서 땅을 분노케 한 자인데, 그러니 그런 가인이 계속해서 땅에 있어서 그 땅에 분노를 일으키게 해주어야, 그런 땅을 하나님이 심판해도 그 심판이 정당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계속해서 땅에 있으면서 자기의 자손을 퍼트려야 하는데, 그래서 마지막에 이 땅 전체를 하나님께서 한판 뒤집기를 해도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핑계치 못하도록 말이다.

바로 이런 한판 뒤집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모든 자들이 바로 그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도록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고 찌른 모든 자들을 마지막에 불로서 한판 뒤집기를 하려고 말이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사도들이 다니면서 증거하는데, 그러니 아까 말한,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 라는 차원에서 보면, 악마가 그렇게 설치고 돌아다니는 것도, 모든 것이 다 주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악마가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악마야, 이리 좀 나와봐. 휴가를 보내줄게 ??

제가 안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즉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무저갱에 잡아놓았다가 필요할 때가 되면, “야, 이리 좀 나와봐. 휴가를 가야지” 라고 해서, 그렇게 휴가를 보내서 마음껏 하나님을 훼방하도록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휴가가 끝이 나면 다시 불러들이고, 또 다시 필요하면 불러내어서 휴가를 보내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악마를 데리고 조절을 해서, 자기 택한 백성들을 끌어 모으는데 있어서 악마를 적절하게 잘 활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악마의 특징이 무엇인가? 즉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을 꼬드기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 긍정’ 라는 말이다. 

* 질문 - 그러면 땅을 징벌하기 위해서 가인이 필요했다는 말씀이지요?

물론 당연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가인이 죄를 지어서 피를 흘리니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땅이 그 피를 보고 하늘에다 호소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는데, 즉 성도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니 하늘에 호소를 하는데,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그것을 “향유에 담은 기도가 하늘에 올라간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어디에 있지?)

두 증인이 죽자, 춤을 추는 인간들 !!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죽는데, 바로 이 두 증인이 죽은 곳을 두고 소돔, 애굽, 그리고 뭐라고 했는가? 그곳이 예수님에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곳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좋아서 춤을 추고 난리가 났는데, 두 증인이 죽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춤을 추는 것을 보고는, 그만 땅에 지진을 일으켜서 그 땅의 안정을 한판 뒤집기로 뒤집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뒤집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다.

(계 11: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계 11: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계 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계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계 11: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 11: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욕을 듣고, 듣고, 또 듣고 !!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그렇게 주께서 뒤집어지게 할만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역할로서, 그렇게 성령을 받은 기계(?)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당하면 되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듣고, 또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듣고 말이다.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리던 미국에 계시던 ‘제임스 리’ 라는 목사님이 얼마 전에 조용히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그냥 그렇게 복음만 사모하고 전하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쉬시고 있겠지만 말이다. 성도가 그렇게 살면 되지, 그 이상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라고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기에 벌서 ‘종말’ 이라는 말이다.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예수님을 뒤따라오는 엄청난 구조가 !!

그러므로 예수님만 혼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줄줄이 뭔가가 따라왔는데, 즉 예수님의 세계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만 보고, 예수님 뒤에 따라온 그 거대한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시집을 가지 않은 사람은 구태여 갈 필요가 없고, 또 돈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없는 것으로 여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구조 때문에 그러한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온 그 거대한 구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 구조로 인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결혼하고 돈 벌고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고전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고전 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다시 말해서, 이러한 예수님의 구조 안에서는 선악과나무의 삶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구조는 도대체 어떤 구조인가? 선악적인, 즉 윤리와 도덕적인 구조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만 달랑(?)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는 그 구조, 즉 생명나무의 삶까지 그 사람을 덮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선악적인 구조에 대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또한 누구를 찬양하는가? 생명나무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말이다.

생명나무의 삶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 !!

그런데 그 생명나무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기에, 그 모든 것이 다 은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게 되면, 그것이 곧 은사인데, 즉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특별히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참, 당신은 윤리적으로 훌륭하십니다” 라는 것은 전혀 의미 없는 소리가 된다 것이다.

이것을 좀 어렵게 설명해서, 즉 윤리적으로 바라보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윤리적으로는 그러한 것을 구하게 되면 그만 죄가 되어버리는데, 하지만 생명나무의 삶에 있어서는 더 이상 죄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아무튼 이 생명나무의 삶에 있어서는, 우리가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선과 악으로, 혹은 악과 선으로 나누어지는 경우가 전혀 없는데, 즉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인도하시기에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점이 얼마나 좋으냐는 말이다.

선악구조는 주님의 생명나무 구조를 모독하는 것 !!

예를 들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그런데 왜 당신은 지금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사도바울님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해놓고, 왜 광주리를 타고 밤에 도망을 갑니까?” 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면 되는가? “예, 주님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 명확하게 끝날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변명이나 핑계가 아니고 말이다.

물론 아닌 생명나무의 삶에서는 그러한데, 다만 회개할 것은 자기 속에 선악과가 계속해서 꿈틀거리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하는 것이지, 생명나무의 삶에서 “야, 내가 그때 죽어야 하는데, 비겁하게 광주리를 괜히 탔어” 라는 식으로 회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어느 여자 선지자가 와서 하는 말이 “사도님, 그렇게 허리끈으로 묶으면 떨어져서 죽습니다. 가지 마세요” 라고 했을 때, 사도는 어떻게 했는가? “그래도 나는 가야만 한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니가 말하는 것도 주의 뜻이고, 지금 내가 말하는 것도 주의 뜻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행 21: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행 21: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행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러니 이것은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 그것은 이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것이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선과 악으로 생각하는 것, 바로 그 자체를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주님이 끄집어낸 그 구조를 잊지 못하는 것이고, 또한 주님이 몰고 오신 구조를 모독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 24페이지를 살펴보자.

** 예수님께서 종말을 몰고 오신 것이다. 질서 잡힌 세계가 예수로 인해서 무질서로 변했다. 우리 중에서 아무도 무질서를 원하는 자는 없었다. 예수님 홀로 무질서를 유발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말린다. 자제를 요청했다. 대화로 풀자고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철거하려는 철거반장과 같다.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은 왜 사자 코털을 ??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점잖은지 모르는데, 예수님의 그런 행동에 자제를 요청하고 대화로 풀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철거반장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을 보고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곳은 강도의 아지트이다” 라고 하셨는데, 아파트가 아니고 아지트 말이다. 같은 말인가?즉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그만 강도의 아지트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그 성전을 그만 뒤엎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성전을 건드리는 행동은 마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과도 같은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전이 없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죄명이 무엇인고 하니,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는 것이 결정적인 죄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성전 모독죄’ 라는 말이다.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래도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사람들이 되어서,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그냥 지나가 줄 수 있는데, 하지만 건드리지 말아야 될 폭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

요즘 교회 안에서 부교역자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경건한 당회장이 부교역자를 쫓아내지를 않는데, 다만 코털을, 즉 교회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마음이 너그러운 목사라고 해도, 심지어 이상근, 한경직 목사라고 해도, 교회를 건드리게 되면 부교역지를 그냥 쫓아내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부교역자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면 당회장이 얼마든지 감싸주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마음이 너그러운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말이다. 즉 “당회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두철미한 선악구조인데, 물론 장로가 집사가 바람을 피워도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말이다.

그러나 무엇만 건드리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고 폭발을 하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를 건드리면 도저히 안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것을 노골적으로 건드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사자의 코털을 그야말로 시원하게 뽑고 말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전혀 시원하지 않다고 한다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버린 자만이 !!

그리고 위에 나오는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인고 하니까, 천국은 있는데 어떻게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 목숨을 예수님처럼 버린 자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천국을 뚫는데, 어떻게 뚫는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뚫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죽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래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가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고난을 받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이 자기를 덮쳐서 아버지의 뜻만 온전히 이루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창호지와 벽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자기 몸을 던졌는데,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믿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 그러한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창호지와 벽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야구공을 벽돌에 치면 튕긴다는 것이고, 창호지는 뚫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창호지인지 벽돌인지는 통과해봐야 아는 것이지, 그 앞에서는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람들이 무엇을 함에 있어서 자기가 확인을 해서 던질까 말까 하는 것은, 즉 창호지인지 벽돌인지 확인을 하고 난 다음에 자기의 몸을 던진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냥 확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영화에 보면 종종 나오는데, 왜 폭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파란색 선을 끊어야 하는지, 빨간색 선을 끊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본인도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말이다. 다만 나중에 터지지 않은 것을 보니, “아하, 파란색 선을 잘 잘랐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확률인데?)

주님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을 가지고서 ‘믿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주시는 믿음은 창호지로 향해서 뚫리게 되어있고, 반면에 자기 자신이 만든 믿음은 벽돌에 부딪쳐서 튕기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아무도 몰라 !!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라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희생정신이 전혀 아니라, 그야말로 이 십자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니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창호지로 향해서 자기 몸을 마구 던지는 것이지, 이 십자가를 연구해서 자기 몸을 던지려고 한다면, 언제나 주저주저하면서 폼만 잡고 있지, 결단코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침 9시에 던지려고 하다가, 다시 오후 3시로 연기하고, 그렇게 하다가 결국에는 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 고마운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냥 무대포로 던지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벽돌에 던지게 튕겨나와서 자기 머리를 깨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만 순교도 하는 것이지, 자기가 연구해서 하다가는 스데반 집사님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그냥 자기 몸만 축내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한 엉터리 순교자들이 한국 교회사에 보면 제법 많은데, 특히 무교회주의자들을 살펴보게 되면 말이다. 자기들이 믿는 것이 십자가도 아니면서, 그런데도 거기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가여운 자들인데 말이다.

교재 24페이지의 “청아한 하늘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창문이 아니었는가?” 라는 대목은 아까 말한 대자연에 포함이 되니 그냥 넘어가고, 그리고 지금 공부하는 “하나님은 한 남자를 죽였다” 라는 부분은 좀 쉬운데, 그 다음에 나오는 “거꾸로 사는 삶” 부분이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처음은 좀 쉬워야지 책을 보니 말이다. 처음부터 어려우니 누가 보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목이 ‘피’ 라고 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데 말이다(ㅋㅋ).

이제 교재 25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람들은 교회에 갔다가 와서는 불가능의 흔적을 재빨리 지운다. 행여 십자가의 흔적이라도 남아있으면 숨이 막혀서 못 살 것 같아서다.

아하, 불가능 속에 들어왔구나 !!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 “아하, 불가능 속에 들어왔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한데, 그런데 교회당 문만 나서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불가능성을 지우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본 때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즉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는 실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만 은혜이지, 밖으로 나오게 되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범사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짜증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교회당 문을 닫지 말고 열어놓고 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기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전달이 되니 말이다(ㅋㅋ).

신랑이 돈을 잘 벌든지 말든지, 장사가 되든지 말든지, 아이가 공부를 잘 하든지 말든지, 그런 모든 것이 다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은혜가 모든 직장과 사업장과 가정에까지 골고루 다 퍼진다는 말이다. 마치 모기향이 퍼지듯이 말이다. (그러면 3초?)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서, 여름에 휴가를 전라도에 가는데, 그러면 전라도 땅에 들어서는 순간 예수고 뭐고 다 그만 없어진다는 것이다. 전라도 휴가 신, 즉 바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250KM나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요나 선지자인데, 물론 제가 전라도에 강의하려고 갈 때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다 불가능 속에 있다고 여기면 되는데, 자기가 전라도로 휴가를 가는 것도 물론 그렇고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자기가 열심히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불가능이 자기를 그렇게 마구 덮쳤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조자체가 불가능의 구조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러한 불가능의 구조 속에 빼도 갇혀있는데, 즉 전부가 다 생명나무의 은혜를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퍼지고 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사인데, 즉 자기가 어떻고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우산까지 빌려주시고 !!

그러니 객지에 가서 자동차가 펑크가 났는데 세상에 여호와의 증인이 와서 고쳐주고, 또한 비가 오면 통일교 교인이 우산을 빌려주고 말이다. 그것을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동부 프로미가 그렇게 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께서 다 알아서 인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마귀도 움직이시는 주께서 말이다.

안식교 교인이 우리 집에 물이 안 나온다고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주는데, 물론 여전히 그는 이단이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말이다. 또 담배를 피운다고 야단을 치다가도, 나중에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화끈하게 받고 말이다. 그러면 저는 “아이쿠, 담배를 피우니 그렇게 마음이 넓네요” 라고 구리를 치고 말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악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책한다든지, 자기를 스스로 피고로 세워서 재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도 우리를 피고로 세우지 않는데, 건방지게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다. 피고는 없는데, 다만 하나님의 백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불가능함 - 니 자신을 지워버려라 !!

이제 조그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아무튼 ‘불가능’ 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것을 누가 하지 못하는가? 예수님이 그러한가?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불가능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당연히 부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기 가치를 주장하고 우기느냐는 것이다.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한 것이 없는데,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기느냐는 말이다. “주여, 왜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러면 니가 알아서 해봐라. 되는가?” 라고 하시지를 않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전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하지를 못하니, 그러니 자기는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고서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불가능함’은 결국 자기의 것을 지워버리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어서, 목사의 심성으로 볼 때, 지난 주 예배시간에 한번 참석한 교인이 내 교회 교인인지, 아닌지 여전히 등록하지 않는 유동성 있는 교인인지 명확히 정리가 안 되는 목사는 불편해진다. 명확하게 나의 것이 될 때만 만족해하고 편안해한다.

목사가 자기 교회의 교인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전혀 판단할 능력과 권한이 없는데 왜 마음이 불편해지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가 여전히 살아서 그러한데, 즉 “이것은 내 교회이다” 라고 하는 말이다. 자기가 살아있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감사가 아니라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데, 왜냐하면 초조하고 불안하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 질문이 “목사님, 무엇을 해야합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때마다 제가 대답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 가르쳐준 답변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인간은 항상 경계선 순찰에 나서는데, 그 경계선은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선이다.

인간은 항상 경계선 순찰에 나서지만 !!

여기에 보면 “인간은 항상 경계선 순찰에 나서는데” 라고 히는데, 제가 봐도 정말 멋있는 표현인데, 누가 섰는지 몰라도 말이다(ㅋㅋ). 아무튼 인간은 그렇게 말뚝을 박아버리는데, 누가 들어올까 싶어서 말이다. 즉 항상 자기의 경계선을 순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순찰을 하시는 분이 따로 있는데, 녹매교회의 구자면 씨가 순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독수리인데, 물론 천사인데 말이다. 그러니 순찰은 그 독수리에게 맡기고, 우리는 순찰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순찰이 필요가 없는 생명나무의 세계에 있으니 말이다.

(계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매일같이 순찰하고 점검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서로를 다독거리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살아가는 재미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서 불안을 야기하고,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불가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이제는 주님이 주신 그 불가능 속에서 감사하면서, 그 불가능을 찾아 살아가는 재미로서 남은 생애를 보내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09, 14 오후 10시 30분에 마침.

                                                                       선덕여왕을 보면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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