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쓰신다고 할 때, 베드로는 사람이 사람을 전도하는 게 아님을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알았다. 먼저 자신이 철저하게 죄로 엮어진 주님의 체망이 되어야 했고, 그 체망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채로 복음을 전했다.
지금 시대에 성도가 이 체망의 역할이고 어떤 체망은 고기를 잡아도 쑥쑥 빠져나갈 정도로 엉성한 죄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고, 어떤 체망은 걸리지 않는 죄가 없고, 들키지 않는 불법이 없을 만큼 촘촘하다. 촘촘할수록 갈라짐은 더 선명이 일어난다. 한쪽은 그 말씀 앞에서 지키겠다는 의지는커녕, ‘어찌할꼬’ 속수무책 손을 놓고 말씀이 나오는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숨을 쉴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떠나간다.
이런 말씀의 현상 앞에서 체망이나 거기에 걸려 떠나지 못하는 고기들이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손끝에서 나오는 유일한 판정에 자신의 처음과 끝을 부인당한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의 판단이 자신에게 없기에 더 이상 나를 있음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작용에 말려든다.
‘복음과 다른복음’를 읽고난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언니와 동생에게 이 책을 주고 싶었다. 이전에도 그런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닌데, 늘 주려다 마음을 접었던 건, 아무리 이야기를 나눠도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고, 줘도 안 읽을 거고, 버려질 거고, 복음이 밟힐 거라는 악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책이 어찌 되든 줘야겠다는 강한 마음이 올라와서 책을 들고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언니는 오랜만에 나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것에 반가워했고, 동생은 성심당에서 1시간을 기다려서 사 왔다는 요즘 핫한 케이크와 깜짝 선물들을 준비해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책을 꺼내지 못했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몇 권 되지도 않는 책들이 너무 무거웠다. 하강하고 또 하강하듯 말씀이 연자맷돌처럼 매달려 몸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말씀이 다시는 이 말씀에 손도 대지 말라는 접근 불가의 빨간딱지를 붙이며 사정없이 내 손을 찍어버린다. 자기 것을 지키는 용도로 인간이 언약에 직접 손을 대어 손상시키기 전에 차라리 내 손을 잘라내 주시는 그것이 은혜인데, 왜 감사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나는 개나 돼지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이고 싶었고 지키고 싶은 내 것이 있었다. (신25:11, 막9:43)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않은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모독하고 주님을 밟을까 걱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열매를 밟을까 두렵고 그렇게 나의 의가 찢기고 상하는 것이 걱정된 것이다. 정작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세상 사람 중 하나로 취급받으시며, 개와 돼지같은 인간에게 거룩한 것을 주시고 보배로운 진주를 던져주셨고(요15:22), 사람들은 가차없이 복음을 짓밟고 예수님을 찢어 상하게 했다.
‘진짜 오시지를 말지. 오지 않으셨으면, 아니 차라리 입을 좀 다물고 계셨으면 내 손에 죽으실 일도 없었을 것을’ 끝까지 마귀는 인간의 탈을 앞장세워 무죄를 주장한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잘못하신 거라고. 그냥 나를 좀 가만히 놔두지. 건들긴 왜 건들어. 주님은 이런 마귀와 상관할 것이 없으셨다.(요14:30) 하나님의 의을 담은 몸이 오셨고, 죄를 담은 육체들이 의인을 죽였고, 그렇게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드러내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하셨음을 세상에 나타내셨다.(요14:31)
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나서 책을 건네게 되었고, 책을 읽은 동생은 내가 정말 이 책을 다 이해하는지, 왜 복음이 이렇게 어렵게 설명되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성경은 너무 쉽고 명백하게 말씀하시는데, 일부러 어렵게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뭔가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수긍이 갔다. 복음은 어렵다. 아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밉고 화나고 싫다. 왜 나의 존재를 무시하는지, 왜 예수님만 혼자 다 하려고 하고 혼자만 존재하려고 하는지, 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죄라고 하는지, 아무 의미도 없고 행복도 없고 희망도 없는 복음이 너무 미운 것이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미움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윤리도덕적 표현을 마귀가 살며시 제시해 준다. ‘어렵도다’
그 고상한 탈을 벗기고 나면 나오는 쌩얼은 신혼 첫날 남편만 놀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놀라 자빠진다. ‘왜 내가 이해 못하는 말을 해? 왜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 취급해? 왜 내가 주인공 되는 걸 방해해? 나는 아무에게도 지지 않아. 나는 패배하지 않아. 나를 이기려는 자를 내 구조에서 추방할 거고, 죽일 거고, 결국 내 세계에서 나는 영원히 주인공으로 남을 거야’ 그 미움이 응집되어 한방향으로 뜻을 발휘한 결과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는 이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어떤 것이다.
두려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기적은 하나님이 나보다 강하셔서 나를 이겨주실 때 일어난다.(렘20:7) 죽으면 죽었지, 나 스스로는 결코 나의 의를 포기하고 조롱의 자리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나를 만나시고, 나에게 패배하심으로 나를 이기시고 나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를 핍박하는 아무개’ 내 이름 앞에 “핍박”이라는 보석을 달아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창32:28, 요16:33)
이미 십자가로 패배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예수님 옆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된 자들은 십자가만이 참사랑인 것을 알아버렸기에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고 부각되는 자체를 역겨워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리는 자신의 사랑, 자신의 자비로움을 경멸한다. 이런 일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면서 자기의 행함을 미워한다. 그리고 그런 실체를 비춰주시는 성령의 행하심에 기뻐하고 그 빛의 주체를 향해 감사한다.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 있던 언니가 입을 열었다. ‘자꾸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니고 이렇게 하니까 불교 같아. 엄연히 내가 여기 있고, 그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 내가 있고, 그 나가 주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거야. 성경 그대로잖아.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있는 그대로잖아’
성경을 볼 때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관통하지 못하고 내가 없다는 이론으로 스스로 가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와 ‘무아’를 구분하는 자체가 또 다른 이론이 된다. 지식은 지식일 뿐이고, 그 모든 게 내 세계관 안에서 더 현란한 이론으로 탈바꿈되어 나를 견고히 세워준다. 이런 현상이 강화되는 증상은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복음이 나오는 출처가 시시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예수안에서 복음이 나오는 출구와 복음이 들어가는 입구가 일반이지만, 듣는 것을 앞서는 전해짐 앞에 굴복되어야, 말씀이 육을 관통할 수 있고 나를 단절시키시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말씀 앞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과 동등 되거나 말씀을 제압한다면, 말씀에 찔린 지렁이처럼 뒤집히고 엎어지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문둥병에 걸린 자가 어떤 자극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인 것과 같다.
사도의 서신서에는 나는 죄로 인해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내가 산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때, 그 나는 의식하고 느끼는 내가 아니라, 안을 형성할 껍데기일뿐 나를 주장할 수 없고, 그 껍데기 안에 처소를 만드신 그리스도의 영이 거처를 함께 하며(요14:23), 몸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고, 이 또한 말이다. 말이 말씀이 되는 능력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금 말하는 ‘나’가 자꾸 인식될 때, 그 나는 여전히 사망의 세상에 육체가 담겨있기에, 이 세상 임금인 마귀가 나를 사로잡아 주인공으로 만드는 ‘죄’가 작동하는 것이고, 죄가 항상 나를 이긴다. 그렇게 지기 싫고 이기고 싶은 악마성이 발현되어야 성령이 홀로 일하심이 드러나고, 예수님의 이미 승리하신 통쾌한 십자가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면서 ‘나’인 그 ‘죄’의 머리를 치시고, 나를 갈아서 반복적으로 십자가 안으로 흘려보내신다.(출32:20)
아무런 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행하는 족족 저주받을 죄가 되는데, 그 죄가 주님의 의를 이루는 재료가 되는 기이함 속에서, 죄를 짓느라 수고한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미친 짓은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행하는 행함이든 행하지 않는 행함이든, 그 행하는 일을 통해 ‘나’를 느끼고, 나라는 환상을 실상으로 조작하는 죄가 반복되는데, 그 죄로 심히 죄 되게 해주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심히 십자가 되니, 참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은 참으로 신기하다. 주의 뜻대로 보내심을 입은 자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데, 정작 복음은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리고 숨어계시다가, 때가 되면 주님의 작품으로 등장한다. 이미 지나갔기에 마음에 담겨있는지도 잊고 있던 말씀이 주님의 사건과 만나면서 내 마음을 찌르는 칼로 바뀐다.(창37:11, 눅2:51, 눅2:35)
마음을 찌르고 쑤시고 들어오는 말씀은 내가 구원받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 나를, 주님의 계시를 가리는 나의 계시를. 악마를 호구로 보았던 내 무지를 보게 하면서, 지옥의 언저리에서 절규처럼 복음이 뿌려지게 하신다. 어차피 지옥 가는 게 분명해졌는데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있는 동안에 잠시라도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이 올라올 것 같지만,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의 몸은 이미 아버지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영화롭게 하시고, 스스로 찬양받으시고, 감사를 한없이 흘려보내시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완전체가 되셨고, 이 소식을 미리 들은 자들은 꼼짝달싹 못 하고 갇힌 존재로 주님의 의를 증거할 도구로 사용된다. 내가 예수 안에 갇혔는지 저주 속에 갇혔는지 구별할 가치조차도 찾지 못한다. 자기 쪽에서 붙잡는 손이 헐거워지고 방어막은 너덜너덜해지기에,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한들 어떤 생각에도 붙잡힐 수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 한 분 만으로도 모든 것을 무한 재생산할 수 있으시다.(출32:11, 골1:16~18) 더구나 이제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던 근거인 언약이 모두 이루어져서 더 이상 어떤 끈도 피조물에게 남아있지 않다.(출32:14) 그렇기에 마지막 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에게서 끝날의 징조가 펼쳐진다. 성령의 빛이 왔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을 보셨던 관점이 입혀지고, 예수님의 보호막이 없어진 자들의 모습을 통해 어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다. 나를 내가 지켜야 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그것이 어둠이다.(눅22:36,38, 마26:31)
예수님이 이 땅에 함께 계셨기에 제자들은 잠시동안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되는 빛 속에 있었고 실족하지 않을 수 있었다.(요12:35~36) 오늘날의 성도는 알 것이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이 낮이 아니라, 주를 위한 주님의 활동이 낮이고, 나를 위해 사는 나의 활동이 어둠인 것을. 세트장 안이 밝고 어두운들 주님이 계시지 않는 이곳이 온전한 어둠인 것을 미리 보는 자는 어두워져 갈 때 세트장 밖에서 뚫고 들어온 그리스도의 빛의 세계에 합류된 자이다.(슥14:7, 벧후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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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마귀는 인간의 탈을 앞장세워 무죄를 주장한다” → “인간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심한 것 같다. ” → “마귀는 인간의 탈을 앞장세워 하나님의 유죄를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너그럽게 하나님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 → “인간은 예수님을 믿어주기로 한다” → “그러나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언제까지 믿을지 장담은 못하겠다…”
이 어느 대목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인공됨을 포기할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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