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속의 모세
2024년 4월 2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1-3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예수님과 하필 모세와 결부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세는 시대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로서 모세는 지상의 인간들의 관계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을 구조적으로 보게 됩니다. 즉 구조의 구성원들은 구조 안에 있더라도 구조의 구성원들은 구조의 주인을 바라볼 수 없다는 위치에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은 애굽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율법이 없습니다. 그저 서로가 있을 뿐입니다. 세상 살이란 나와 너의 관계로 성립된다는 겁니다. 나와 너를 비교하고 나와 너와 경쟁하고 나와 너를 상대하는 것으로 나를 지켜내면 되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서로가 필요에 의해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결속을 다지는 것으로 조직을 구성하면 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모세 입장은 그게 아닙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뭔가 가지고 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언약입니다.
율법과 언약이 인간 개개인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시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만 산 밑의 백성들에게는 신마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호신 정도로만 여깁니다. 즉 진실로 그들에게 느껴지는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 뿐입니다.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도 여기 있는 나가 신을 제키고 더 중요한 존재인 겁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조’같은 것은 생각 안 합니다. 구조는 개인을 주체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조 안에서 개인에게 어떤 의도나 노림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킨대로 살면 됩니다.
하지만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면 어쨌든 나를 지키는 방식만이 최종적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언약이 없는 신이요 다른 하나는 언약이 있는 신입니다. 언약이 없는 신은 내가 여기 있기에 나를 위한 신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이란 실은 추상이요 관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언약이 있는 신은 인간은 없고 오로지 언약만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보여주는 기능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인간 위주’가 아닌 환경으로 이끕니다. 그러니 백성들 앞에서 모세는 늘 원망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모세 마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므로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 위주의 생각에 얼마나 훼손되고 방해받는 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겁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구약 성경에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하나는 모세가 총회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지팡이로 반석을 겨냥하면 될 일을 답답한 백성들에게 화를 내면서 반석을 두 번 지팡이로 쳤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약속의 땅을 앞두고 모세는 백성의 말에 동의하여 12 정탐꾼을 미리 파견해 본 일 때문입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신 1:22-23/36-37)
이 두 가지 경우는, 모세가 백성들에 치여서 덩달아 분노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도리어 ‘약속의 땅’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신 바가 됩니다. 그것은 언약의 성취가 결코 인간 손에 달린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괴물은 인간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최종적으로 자기 긍정으로 마감되는 그런 구조에 이미 갇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저갱’입니다. ‘무저갱’이란 악마와 귀신과 추종자들이 갇혀 있는 지옥같은 곳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자기 위주로 모든 게 마감됩니다. 즉 자신의 영원함을 인간을 쉬지 않고 시도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자’로 만듭니다. 모세의 시작에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하고 모세의 끝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해서 연결되게 하십니다.
모세의 인생은 마치 대나무 마디 같습니다. 그는 진즉에 물에 빠져 죽을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으로 새로 출발케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끝도 백성들의 잡아 먹힌 채로 같이 약속의 땅을 못 들어가는 인물이 찍혔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 모세가 누가복음 9:31에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 엘리야와 더불어 말합니다. 이는 진정한 시작과 끝은 인간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뿐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의 삶은 이 생애에서 단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생에서 있어던 자기 행위가 이 세상말고 죽음 후의 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바로 모세에게 개입된 제사장 언약에 준한 ‘피’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0-21) 인간 제사장들의 제사는 매일같이 반복되지만 예수님의 제사는 단번에 완성되었습니다.(히 7:27)
따라서 성도에게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 죽음이 내부적으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일 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롬 4:5)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나 위주의 악한 구조에 놓여 있기에 주님께서 우리로 인해 죽으셨음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히브리서 3장 1-3절(구조속의 모세)240421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1-3절입니다.
히브리서 3:1-3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이스라엘을 하나의 집으로 간주했습니다. 집으로 간주하시면서 집 자체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집일 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은 모세가 그 당시에 눈에 띄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의 모임 또는 결속, 무리 지음, 이것으로써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간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같은 인간과 인간들끼리의 관계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점이 문제가 되느냐 하면, 전체적인 이 구조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너 있고 나 있고 둘 다 동등한 입장이다. 그러니 너는 나에게 잘 해줘야 되고 네가 잘 해주면 나도 너에게 잘해줄게.’ 이런 평소의 인간 대 인간관계만 남게 돼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할 때 꼭 그와 같은 방법으로 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백성들과 달랐어요. 모세는 시내산까지 올라가서 다시 백성들 있는 곳으로 합류했던 사람입니다. 시내산 위에서 아래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는 아무리 그들이 개인과 개인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한 구조 안에 모두 갇혀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걸 모세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모세는 본인이 있지만 본인이 주인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지 나의 어떤 주관이나 어떤 의견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런데 밑에 있는 백성들은 좌우를 살펴봐도 사람들 밖에 안 보여요. 모세가 있는 거지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만만한 상대라고 아쉬운 거 있으면 모세에게 달려들고 원망하고 그랬던 겁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를 주인으로 어떤 주체자로 보지 않는 이유는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주체자가 따로 있다는 것, 나의 주인이 따로 있고 그 따로 있는 주인과 나 사이는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언약적 관계로만 형성이 된다는 사실 그걸 알았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언약 관계라는 것, 하나의 약속의 관계, 율법 성취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시급한 일이고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 밑에 있는 백성들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니까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물 내놔라, 계속해서 그들에게 시급한 문제는 언약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에요. 나를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세는 알았어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애굽에서 애굽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히브리인들을 끄집어낼 때 율법이라는 이 말씀이 어디를 겨냥하는 건지 알고 있었던 겁니다.
겨냥이라고 하는 건 총 쏠 때 총 딱 대고 사냥꾼이 맷돼지 겨냥하듯이요. 율법은 어떤 겨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는 것은 율법이 일종의 총이 되어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부를 조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네 속에 궁극적으로 뭐가 있는지를 율법을 통해서 찾아내겠다는 거예요. 네 속에서, 껍데기인 너 말고 네 속에, 뭐 배고프다 목마르다, 말고 그런 원망하고 불평하는 네 속에 어떤 괴물이 들어있는지를 율법이 아니면 파헤칠 수가 없어요. 율법이 아니면.
이게 정말 특이한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까지 포함해서 세상 전체를 두고 볼 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하나님밖에 없어요. 한 종류의 하나님은 언약이 없는 하나님, 또 한 종류의 하나님은 실제로 모세에게 율법을 주는 하나님, 딱 두 종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첫 번째로 당부했던 것은 “나 말고 다른 신은 섬기지 말라.”라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 빼놓고, 여호와 빼놓고 나머지는 다 아무것도 아닌 그런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8장 4절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설명하기를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우상이라는 개념은 어떤 자에 한에서 아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약속의, 언약의 하나님 외에는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히, 단언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또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인간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신을 섬기는 그런 괴물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여호와 아니고, 율법 주신 하나님은 아니고 인간들 자기가 섬기고 싶은 신이 인간 속에 이미 내재가 되어 있어서 그들이 기도를 하나 뭘 하나 항상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 언약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미래까지 위탁하고 맡기는 식으로 살아갔다는 것을 전제로 해주는 거예요.
이야기가 이렇게 됩니다. 이 모든 세계가 여호와가 없어요. 여호와가 없다는 것은 이사야 45장 15절에 나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그럼 인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가인도,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 앞에 제사 드렸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보면 심지어 마귀도 하나님을 알고 무서워 떨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기는 아는데 영화롭게 할 수 없었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을 알지만 영화롭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율법과 언약이 없기 때문에, 사다리가 없기 때문에 자기의 욕심, 본성대로 신에게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섬기고, 나아가고, 또 구원받고자 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할 수 있는 방도가, 방법이 없어요.
따라서 성경에 그게 나왔다는 말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지금 이런 진짜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내 안에 어떤 하나님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지를 네가 들춰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무슨 수로 아느냐?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이 세상에 종교가 되게 많아요. 천주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이런 종교들이 있어요. 기독교도 있고요. 이런 종교들을 조사해 보면,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느냐? 모든 종교가 삼위일체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의 아이디어, 머리에서 나온 거예요. 보다 완벽한 자기 구원을 위해서 인간이 아는 모든 이성과 모든 착함과 윤리와 거룩함을 총동원해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괴물, 이 괴물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 괴물을 섬기면서 나오는 종교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 사람들이 ‘인샬라’라는 말을 해요. 모든 것을 알라의 뜻대로 하옵소서, 또는 신의 뜻이 그러하다면 제가 기꺼이 수긍하겠나이다, 이런 뜻이에요. 기독교 종교에서는 이걸 신의 주권 사상이라고 해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많이 이야기하죠?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찬송가도 나오죠? 그게 알라 종교에, 이슬람 종교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이게 이슬람 종교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불교에도 있습니다. 나미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아미타 부처에게 나는 모든 것을 다 귀의합니다. 주권 사상이에요, 관세음보살에게 나는 귀의합니다, 합쳐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관세음보살의 컨셉, 주특기는 뭐냐? 어떤 중생에게 괴로움이 있을 때 즉시 달려가서 자비를 베푸는 신이에요. 불교에 이렇게 신들이 많아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들이 있어요. 티벳 불교에는 ‘옴마니반메훔’ 이걸 정기적으로 티벳 사람들이 외우는데 이것은 뭐냐? 이것만 외워도 신기한 영험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뜻은 뭐냐? 원하는 바는 다 이뤄지게 하옵소서, 라는 뜻이에요.
방금 이슬람, 불교, 티벳불교, 세 가지 말씀드렸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나를 없애주세요.”가 없어요. “내가 괴물입니다.”가 없습니다. “나를 죽여주옵소서.”가 없어요. “나를 저주해주세요.”가 없어요. “나를 심판하세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help me, “나를 살려주세요.”
그러니 이슬람이나 불교 이 사람들이 솔직히 이야기해서 신을 섬기지만, 신에게 귀의하지만 이것은 완벽하게 거짓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여기 있고, 그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에게 필요한 신이라면 언제든 양보하고 섬길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이에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요. 이걸 그대로 기독교에 적용시켜 보세요. 똑같아요. 기독교도 똑같아요.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만, 수백 번 수천 번 설교 했어요. 했는데 다시 한번 이점을…, 도대체 언약의 하나님이 뭐지? 언약이 없는 것은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에요, 이방 민족의 하나님. 언약이 없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저주받을 것들이에요. 예레미야 10장 25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이게 언약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에요.
예레미야 11장 3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언약에는 축복과 저주, 둘 다가 있어요. 하나님은 언약 위주이지 사람 위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나 위주에요. 나를 다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성질나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발 나를 없애지 마세요,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더 솔직하게 말해서 신은 없어요. 신은 없고 있는 건 오직 나밖에 없어요. 인간이 아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이걸 솔직하게 이야기한 사람이 있어요, 서산대사. 이 서산대사가 작사했다고 하는 노래가 있어요. <회심곡>이라는 노래에요. 김영임이 불러 대히트했던 노래에요. 꽹가리 치면서 부른 노래 있어요. “일심으로 정념은 극락세계라”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에요.
그 회심곡 앞에 가사가 일심으로, 한마음으로 보게 되면 세상은 극락세계라. 그리고 “억조창생(億兆蒼生) 만민(萬民) 시주(施主)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소” 내 말 한 번 들어보소. 그다음에 가사가 인간의 정곡을 찌릅니다. 마귀니까 도사에요. 이 서산대사가 마귀 아닙니까.
【이 세상에 사람밖에 또 있나요,
이 세상에 태어나신 사람 사람마다
홀로 절로 낳노라고 거들대며 우쭐대고
불법말씀 들어보면 사람마다 홀로절로 아니 낳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남의 종교 쓸데없는 마귀 소리라고 듣지 마세요. 기독교도 결국은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성경 보고 복음 듣고 하지만 마지막 남는 것은, 역시 믿을만한 건 ‘내가 여기 있다.’ 그것만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고 나머지는 추상적이에요. 관념이에요, 관념,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3대째 목사 가정, 4대 째 장로 가정, 그 자식들 왜 교회 안 나옵니까? 있는 것은 오직 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서산대사가 회심곡의 그 긴 가사에서 특히 부모님의 은덕 대목을 보면 하나밖에 없는 부모가 우리를 기를 때 어떻게 길렀는가?
【그 부모가 우릴 길러낼 제, 어떤 공덕 들였을까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우시고
마른자리는 아기를 뉘며,】
진자리, 쩍쩍 들러붙는 자리는 엄마가 눕고 마른자리는 아기 뉘이고
【음식이라도 맛을 보고,
쓰디 쓴 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단 것은 아기를 먹여
오뉴월이라 짧은 밤에 모기 빈대 각다귀 뜯을세라,
곤곤(困困)하신 잠을 못다 주무시고,
다 떨어진 세(細)살부채를 손에다 들고 왼갖 시름을 다 던지시고
허리둥실이 날려를 주시며, 동지섯달 설한풍(雪寒風)에
백설(白雪)이 펄펄 날리는데,
그 자손은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를 주시며
왼팔엔 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兩人兩親)이 그 자손의
엉대허리를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銀子童)아, 금자동(金子童)아 금이로구나】
하면서 키웠던 이 부모, 이 부모의 은덕을 모르면 네가 염라대왕한테 지옥 간다는 거예요. 얼마나 설득력 있습니까. 얼마나 납득이 되는 말이에요, 이게. 이게 언약과 무슨 관계가 있고 율법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생각해보면 감정으로, 느낌으로 아는 이야기에요. 이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어요. 교회를 다니든 성당에 다니든 관계없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고요.
“아이고, 부모한테 못 한 게 어떻게 천당을 간다고.” 이런 게 남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우리는 그런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6절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일한 것도 없이.
언약은 안에 은혜가 담겨 있어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무엇이 반대하고 무엇이 극렬하게 저항하는지 이 은혜의 율법을 가지고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겨냥해서 쑤셔보는 거예요. 쑤셔보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나만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내가 행해서 구원받겠다는 악마적 심보가 그 안에 들어있던 거예요, 모든 인간 안에.
거저 주시는 은혜 싫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행함이 되려면 내가 주인공이어야 해요. 내가 주체가 되거든요.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인생은 내가 행함으로, 바른 행함으로 이생에서 저 생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서산대사가 주장하는 게 그거에요. 인생에서 효도한 사람은 저 생에 가도 이 땅에서 하는 행위의 연속성, 그 행함이 우리가 저승에 갈 때 구원받고 복 받는 것에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서산대사의 주장이에요.
믿습니까? 믿어요? 이 땅에서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 달렸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이거? 침례교는 믿어요. 감리교는 믿어요. 장로교는 교리상 믿지 않아요. 교리상 안 믿어요.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마귀가 이미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에 보내서 그 마귀에게 잡혀있는 죄인들에게 잡아먹히라고 보낸 거예요. 잡아 먹히라는 거예요. 승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잡아 먹혀야 된다는 거예요. 내 아들 네가 잡아먹어야 이 세상이 마귀의 세상이라는 것이 그제야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누가 누가 착하냐 거룩하냐, 그런 시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누가 바른 생활을 하나 그런 시합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모든 각자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주체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 언약이라는 것이 성경 내용이 너무 많으니까 한 번 짜보자 이 말이죠. 한약 짜듯이 한 번 쭉 짜보면 뭐가 나오는지 보자는 거예요. 원자폭탄 만들 때 우라늄 있잖아요, 우라늄이 많아도 폭탄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라늄 235이에요. 그런데 99.3% 우라늄 238이에요.
이건 쓰지 못하는 거예요. 천 분의 7만, 우라늄 235만 응축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만들 때 분리하는데 선풍기 틀어놓고 원자보다 가벼운 것, 약간이라도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을 모아놓고 그 모아 놓은 것에서 또 불순물을 제거해 정제하기 위해 또 선풍기 틀어놓고 날려 보내고 해서 또 모으고 하는 이 과정을 우라늄 농축이라고 합니다, 우라늄 농축.
언약을 농축하는 거예요. 언약을 짜보는 겁니다. 짜보면 뭐가 나오느냐? 모세 나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 많은 성경 위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모세와 연결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레위지파거든요. 제사와 관련된, 제사만 해야 하는 지파가 모세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세의 형 아론이 대제사장이에요.
짜보면 뭐가 나오는가? 제사법이 나오거든요. 제사법을 짜보면 뭐가 나오는가? 피가 나와요, 피가. 따라서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이 땅, 이생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했든 뭘 했든 묻거나 따지지 않고 오직 저 생, 천국 가려면 딱 하나면 있으면 돼요. 피입니다, 피. 우리 한글로 잘 되어 있어요. 글자가 한 자이니까.
히브리서 9장 20-22절에 보면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22. And almost all things are by the law 제거purg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is no 감면remission. 22. And according to the Law, [one may] almost [say], all things are cleansed with blood, and without shedding of blood there is no forgiveness. 정결하지 않는 것, 거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안 받아요. 그런데 제사장이 짜보면 피가 나오는데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율법을 줘 놓고 그 율법에 대해서 어느 백성들도 율법을 지킬 위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마주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주지만 나에게도 주세요, 하고 받는 분이 등장해요. 그 사람이 바로 구약 때 모세입니다. 신약 때는 예수님이지만 구약 때는 모세예요. 모세는 모든 것이 구조적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주인공이고 자기는 그냥 종입니다. 구조의 특징은 구조 안의 어떤 것의 주체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인공을 용납하지 않는 게 구조적 안목이에요.
그리고 이 구조적 안목에서 또 특징은 뭐냐? 개인에게 어떤 실적과 업적을, 어떤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시킨 대로만 하면 돼요. 그걸 사환이라고 하고 종이라 해요. 히브리서 3장에 보면요. 3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는 그 집의 사환이에요. 주인은 예수님이고요, 하나님이시고 모세는 사환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말 들어보니 사환 되기 참 쉽죠? 쉬운데 왜 모세를 원하지 않는가? 이게 내 속에 있는 괴물이 나를 주인공으로 바라본다니까요. 내가 나를 주체자로 바라보는 거예요. ‘내가 나를 주체로 좀 바라보면 어떠냐?’ 이러거든요. 내가 나를 주체자로 바라보는 것은 요한계시록 9장과 20장에 보면 또 다른 구조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보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무저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들었던 자와 그 졸개들이 구조적으로 꽁꽁 갇혀 있는 그 동네가 무저갱이에요. 지옥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면 참 쉬워요. 집에서 담그는 오미자 있죠? 플라스틱 오미자 통이 있잖아요. 그 통에서 오미자 다 들어내고 송충이를 담는 거예요. 그러면 송충이끼리 서로 싸워서 살아남으려고 자기들끼리 투쟁하죠. 이게 바로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어요. 그 송충이와 송충이는 눈에 송충이 밖에 안 보여요. 너는 어떻고 나는 어떻고, 스물네 시간 생각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 송충이에 누굴 보내느냐? 하나님께서 모세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모세는 송충이에게 잡아먹히겠죠.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못갑니다. 민수기 신명기 그리고 누가복음 9장을 통해서 보면, 모세가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한 이유 3가지가 나와 있어요. 교회 다니는 분들은 다 알잖아요.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민수기 20장 11절 12절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모세도 여기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모세가 평소에 화내는 게 취미입니까? 성격입니까? 아니죠. ‘모세가 반석을 그냥 가르치지 않고 두 번을 왜 쳤지?’ 이 대목 보면서 사람들은 안타까워 해요. ‘모세가 좀 참으면 될 텐데 왜 성질을 내서 총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배운 자로서 침착함을 잃어버리고는 자기 성질대로 반석을 두 번이나 치고.’
어쨌든 물은 나왔어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믿지 않아서 너희는 이 총회는 모세를 포함해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한다, 아 참 안타깝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모세가 왜 화를 냈겠습니까? 그것은 백성들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에 성질이 난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을 모르고 왜 자꾸 내 멱살을 잡고 나만 가지고 그래, 나만 닦달 내느냐는 거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는데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안 돼? 왜 자꾸 나를 믿으려고 해.” 이 말이거든요. “그냥 하나님 믿어. 알아서 인도할 거야. 약속대로.” 그런데 백성들은 ‘네가 책임져라. 우리가 못 믿는다고? 네가 우리를 납득될만 한걸로 인도를 해봐라. 우리가 왜 안 믿겠느냐?’ 이게 백성들의 생각이에요.
백성들은 자기 생각을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나 편하고, 내 육신이 편하고, 날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이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불편하게 하지 않아야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 백성들의 생각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샬라’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불교도 마찬가지고, 기독교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힘들게 하는데 믿을 인간이 누가 있겠느냐, 이게 백성들의 생각이에요. 모세는? 나도 성질난다고 두 번 쳤죠.
두 번째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신명기 1장 3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모세를 보고 너도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진노한 이유가 신명기 1장 23절에 나와요.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데 먼저 탐색전을 한 번 해보고, 어떤 민족이 사는지 만만한지 들어갈 만한지 정탐해 보고 갑시다, 할 때 이게 신명이 1장 23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이거에요. 이게 하나님을 화나게 한 거예요.
그래서 모세도 중간에 끼어서 화를 여러 번 냈어요. “하나님, 이 많은 백성을 저보고 책임자라는데 전들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맨날 이들이 원망이나 하는데” 이게 두 번째 이유에요. 아직 모세는 구조의 종이라는 사실을 상실하지는 않았어요.
세 번째 못 들어간 이유가 굉장히 긍정적이에요. 무슨 뜻이냐면,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으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게 다른 종교에는 없는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십자가를 내 위주로, 나 구원받기 위해 이용하지 않았기에 구원받는 거예요. 내 구원 용도로 십자가를 끌어당기지 않았기에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누가복음 9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거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오는데 변화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해 못 하는 이유가, 모세가 약속의 땅에 가지 않음으로서 비로소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하고 있어요.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이용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십자가의 취지를 드러낸 사람만이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말을 그렇게 비비 꼬듯이 해야 할까요? 그래야 구조가 살기 때문이에요, 구조.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피해서 구조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걸 안 피하면 이건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어요.
인도 종교에 ‘시바’라는 신이 있어요. 그 시바신의 교리가 뭐냐? 어린양을 바침으로서 우리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나와요. 인도종교에. 그들 구원받습니까? 지금도 아프리카 가면 닭 잡고 양 잡아서 그 피로 죄 씻음 받는 게 있어요. 아프리카 토종 종교에 그런 것이 많아요. 마야 문명은 사람 잡아서 사람 피로 용서받는 것도 있어요, 아브라함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우회할 방법이, 방도가 없어요. 왜냐하면 구조적으로, 악마 속에 우리가 구조적으로 놓여 있기 때문에 악마가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대로 하기 때문에. 악마가 항상 ‘네가 우선이다. 네가 구원받아야지. 너 구원 받았으면 너 얻을 것 다 얻었어.’ 종교를 통해서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 대는 거예요.
거기에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 때려 넣지요. 피로서 구원받는다, 부터 해서 언약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구속사가 어떠니 이거 다 때려 넣어요. 그거 다 집어넣어도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들이에요. 다른 종교에 삼위일체도 들어있다니까요.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게.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자기 부인이 안 돼요.
모세하고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그러니까 모세는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약속의 땅에 들어간 거예요. 변화산에서 모세하고 엘리야가 뭘 하느냐 하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눅 9:31) 별세.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언급하는 거예요.
이점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예를 들 텐데 이게 쓸데없는 예다, 구질구질한 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우리 자신이 어떤 한계에 있는지를 제가 예를 들 테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제가 질문을 던질 거고요.
어제 중국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1등급에 속하는 구쯔하오라는 사람이 있어요. 14억 인구 중에서 바둑을 제일 잘 둔다는, 얼마 전까지도 랭킹 1위였고 지금은 약간은 내려갔지만 거의 1위 그룹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계대회에 처음 출전하는 2007년생, 만으로 17세가 안 되는, 5월 17일이 생일이니까 아직 17세가 안 된 김은지라는 여자 바둑기사가 구쯔하오와 바둑을 뒀어요.
누가 이겼느냐? 우리나라의 16세 바둑기사 김은지가 중국의 1등급 기사를 이겼습니다. 자, 여기서 종교적으로 한 번 답변해 봅시다. 그 천재적인 바둑기사가 만 16세밖에 안 되는 소녀 신출내기한테 왜 졌느냐? 종교적으로 보면 ‘인샬라’에요. ‘신의 뜻이겠지.’ 주의 뜻이겠지. 이것은 답변하기 싫다는 뜻과 똑같은 거예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런 답변은 하면 안 돼요. 상대방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뭐냐? 객관식 1. 상대 선수를 얕봤다. 우습게 봤다. 2. 상대방의 바둑 취향을 미리 연구하지 않았다. 3. 중국의 1등급 바둑기사가 상대방이 하수라 해서 집중력을 다 기울이지 않았다. 4. 김은지라는 그 소녀가 유난히도 그날에 집중력이 강했고 컨디션이 상당히 좋았다.
제가 여기서 답이 뭐냐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니고 인간이 내뱉는 그 질문 자체가 답을 제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를 부인 못 해요. 이 땅에서 자기 괴물이 어떤 괴물인지를 알지를 못해요. 인간이 질문한다는 것, 인간이 뭘 묻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답을 정해놓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설교시간에 이렇게 했지요. 성경에 보면 인간이 한 번도 “하나님, 제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요. 오히려 반대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5) 오히려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다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 있어서 주님께서 이야기할 때만 비로소 자신이 발굴이 되고 노출돼요. 주님께서 찾아와야.
그런데 인간은 신에 대해서니까, 그리고 이 성경이 하나님이 만든 책이니까 자꾸 파고들고 연구를 해요. 자꾸 연구를 하게 되면 계속 질문이 나오는데 그 질문은 이미 틀이, 구조가 딱 짜인 데서 나오는 질문이에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이것까지 알면 돼요? 저것까지 알면 돼요?’ 계속 알아가면 갈수록 내가 아는 구조가 기껏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만 굳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고등학생이 길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선도하는 차원에서 담배 피우지 말고 사탕 먹으라고 주니까 사탕 집어 던져 버렸어요. 그 사탕을 내민 사람은 구조가 뭐냐 하면, 학생들은 해로운 것 먹지 말고, 물론 사탕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사탕보다 담배가 더 해로우니까, ‘사탕을 먹어야 해. 이게 옳아.’라는 학생이라는 어떤 범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집어던진 학생은 ‘나는 이미 어른’이라고 티를 내는 범위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이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게 아니고 본인이 속해 있는 구조, 그 구조를 결사적으로 사수하면서 필사적으로 사수하는 범위 내에서 언어가 대화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못 빠져나와요,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안 빠져나오면서 인간이 하는 것은 뭐냐?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과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전부에요.
인간의 두뇌 세포가 860억 개가 되고, 860억 개의 세포가 연결해서 만들어내는 연결고리, 연결점이 몇 개냐 하면, 200조 개가 돼요. 세포 피질 1cm³ 안에 들어있는 연결점의 수가 지구상 모든 인구 숫자의 20배가 넘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기질, 그러니까 재료 860억 개 가지고 훨씬 더 많은 관계망, 연결망으로 인간은 스스로 송충이들, 오미자 통 안의 송충이들이 서로서로 살겠다고 자기 변신과 환경에의 적응을 부단히 계속 노력하고 시도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모습이에요, 이 세상 모습입니다.
뭘 빠져나와요? 남은 살겠다고 그렇게 부지런히 노력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놀랍습니다. 뭐냐 하면, 모세를 끊어버려요. 모세를 시작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모세로 하여금 끝이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려요. 대나무 양쪽을 잘라버리면 그게 하나의 마디가 돼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것, 이게 예수님의 언약조직 안의 인간의 개체이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알파요 오메가라는 예수님만 시작이고 예수님만 끝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시작하고 인간이 끝내는 것은 이것은 마귀에서 온 잘라내는 절단의 모습이에요. 세상 모든 종교는 뭐가 없는가? 내 연속성이 끊어지는 절단이 없어요. 이대로 살다가 영원히 살래, 맨날 이래요. 계속 영원을 추구해요. 영원은 없습니다. 마디를 낸다니까요.
모세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라는 말의 뜻이 뭐냐? 물에서 건져낸 거예요. 없었어요. 모세가 그냥 태어난 것이 아니고 모세한테 어떤 마디를 줬는데 무슨 마디냐? 모세는 없어도 되는 존재라는 그 마디를 일부러 모세한테 입혀줬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는 그것 말고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는 그 끝을 모세에게 입혀줬습니다.
그 처음과 끝을 모세가 중간에 있으면서 모세가 알아채는 시작과 모세가 알아채는 그 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작,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끝을 하나의 대나무 마디처럼 모세를 사용하는데 그 모세를 가지고 ‘하나님 집의 사환’ 종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종교는 뭐예요? 나의 영원한 미래는? 나의 시작은? 이게 종교에요, 이게. 그러면 복음은 뭐냐? 십자가에서 끊어버려요. “그만 따라와, 그만 따라와. 너는 죽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야. 그만 따라와. 너의 할 일은 여기까지야.” 그리고 예수님을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게 함으로써 육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어떻고, 엄마가 어떻고….
아까 <회심곡>에서 엄마가 어떻게 키웠더라?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우시고 마른자리는 아기를 뉘며, 음식이라도 맛을 보고, 쓰디쓴 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단 것은 아기를 먹여…” 그거 다 육이에요. 그거 다 육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끊어진 거예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거든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상식적인 구조와 그 범위 안에서 나 편하고 나 잘되기 위해서 얼마나 예수를 이용해 먹었는지요. 어떤 사람은 말해요. 우리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이제 기복신앙은 청산했다고요. 여러분, 기복신앙 평생 갑니다. 뭘 끊었어요? 기복신앙은 안 끊어져요. 평생 가고 마지막 남는 게 기복신앙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끊어버리고 그 끊어진 자리에 뭘 하느냐? 제사장 언약을 딱 연결시켜요. 제사장 언약으로. 대나무를 끊으면 마디가 되잖아요. 마디 안에 피를 머금은 제사장 언약을 집어넣고 이쪽을 잡아당겨요. 그러면 대롱대롱 달리겠지요. 속에 관통하는 게 뭐냐? 하나님의 제사장 언약이 관통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이 하는 그 제사는 날마다 어떻게 되느냐? 날마다 끊어져야 마땅하지요. 히브리서 10장 1-3절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반복적인 끊음, 반복적으로 끊어지는 거예요.
2, 3절에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러분이 서글프게 생각하지 마시고 기뻐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실수하는 것을 우리보고 탓하지 않습니다. “너 왜 완벽하지 못하게 행동했어?” 이런 것을 묻는 게 아니에요. “너는 제사장 언약에 중간에 꿰어진 하나의 이미 끊어진 마디로서 사용되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끊어졌는데 그 끊어짐 속에 끊어지지 않음이 통과하는 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통과하는 것은 뭐냐? 히브리서 7장 27절에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 이것과 무엇이 대조되는가? “이는 저가 단번에…”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단번에, ‘날마다’와 ‘단번에’를 대립시키고 대조합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또 실수하고 그래요. ‘다시는 엎어지나 봐라.’ 해봐도 얼마 안 가서 또 엎어지거든요. 또 자빠질건데요 뭐. ‘내가 이제 목감기 다시 걸리는가 봐라.’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 우리는 반복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왜 기독교가 구원을 못 하느냐 하면, 성경을 지적으로, 지식으로 자꾸 습득을 하니까 이게 지식의 기억의 습관이 된 거예요. 기억의 반복이에요. 강남강의에서 했습니다. 인간의 몸에 배긴, 두뇌의 활동에 의해서 환경에 적응하면서 몸에 배긴 습관의 반복이 있고, 두 번째는 지식, 기억의 반복이 있고, 세 번째가 뭐냐? 죽음의 반복이에요.
우리 속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주님께서 매일같이 반복해서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를 반복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가 기다리는 이 세상에 마귀한테 잡아 먹히라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마디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우리가 모세 맞습니까? 그렇다면 모세처럼 이미 천국에 온 입장에서 예수님 십자가 벌써 지셨지요, 그것만 반복해서 보여주면 돼요.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안에서 언약의 완성이 나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나 실수 많고, 나 못났는데 그런데 신나. 그게 즐거워. 엎어지고 또 엎어지고, 자빠지고, 설거지도 못 하고, 청소도 안 하고, 그런데 그게 고마워. 왜? 나는 나의 시작과 나의 끝을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주께서 십자가 안에 통과하기 때문에. 그걸로 족하고 늘 범사에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세를 보내셔서 감사합니다. 모세도 착각한 것처럼, 세상에서 열 불난 것처럼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세상 때문에 남 탓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저희들, 다시 한번 십자가 생각하면서 그래야 마땅함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