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있음과 없음
2024년 4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17-18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시험’이란 예수님의 시험입니다. 인간들에 대한 시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와 상대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는 ‘시험’이 없습니다. 그 대신 인간 세상은 선택과 결정이 있습니다.
즉 자기 살 도리는 자신들이 알아서 그때그때 결정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신의 결정한 바로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미래가 정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좋은 미래란 평소에 자신이 얼마나 바른 결정과 선택을 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해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쿨하게 돈 벌어서 그것으로 자기 소유를 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자신의 실체가 만족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마 6:13)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당연히 인간들은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이것을 마치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너에게 손해가 되지 않게 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실체의 세상 밖의 사정을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5:8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솔직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즉 “주여, 저로서 이해못하겠고 설명 못하실 분으로 찾아오셨으니 저는 전에 내가 살던 그 ‘나’로 살고 싶습니다. 따라서 제 곁은 떠나 가시옵소서. 나는 살던 대로 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 중심으로 설명이 가능한 세상관에 파묻혀 설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시험’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22-24에 보면, “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 세상을 향하여 죄 있다고 지적하려 오셨다는 겁니다.
이 죄에 대해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이 자신의 것을 챙기고 관리하는 데 있어 철저하고 차질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죄로부터 나온 것임을 선언하게 되며 인간 쪽에서도 가만 보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해서 없애버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험이며, 그 시험 안에 놓여 있어야 비로소 ‘시험에 들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 줄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실체로서는 게시지 않고 과거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뒤늦게 예수님을 믿겠다는 자들은 실은 과거의 위대한 인물을 신봉하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분명 과거의 인물로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계시는 분인 줄 알았던 그 분이 본격적으로 부활하신 분으로 활동을 개시하셨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애초부터 전체가 죄 속에 빠져서 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음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1:2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마땅히 혼돈하고 무질서하고 허무하고 깜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 자신마저 한 통속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새창조란 이렇듯 혼돈하고 깜깜한 배경이 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모집했지만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는 말씀대로 예수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 14:27)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마 8:20) 그저 예수님을 실체로만 간주하고 눈에 보이니까 믿고자 했던 그들은 ‘예수님의 실체’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시험을 겪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시험에 대해서 설명이나 해석조차 내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을 찾아다니십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3-5)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이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면 성도는 우선 ‘누구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면서 비로소 성도는 자신의 실체가 하나님의 시험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미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해서 시험을 알려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선악과의 부작용에 대해서 내내 알려주십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기 결정으로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예 말씀을 성도 안에다가 집어넣으셨습니다.
이제 성도 속에서 친히 말씀이 작동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 본인의 자아성은 그 안에서 실을 잃어버립니다. 일종의 치매현상을 보입니다. 자기 결정과 자기 선택이 눈에 보이지 않고 거부당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무엇을 시켜도 군소리 말고 그대로 수행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신발’을 하나님 앞에서 벗는 겁니다. 이것은 사나 죽으나 더는 나 자신이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관계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혼돈 속에서 예수님의 일하심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히브리서 2장 17-18절(시험 있음과 없음)240414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7-18절입니다.
히브리서 2:17-18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시험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시험이 있고 다른 사람한테는 시험이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을 시험해야 될 존재가 필히 거기에 개입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마귀가 유일하게 예수님을 알아보고 방해를 놓으려고 하는 거지요. 그걸 예수님이 받는 시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한테는 이 시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마귀하고 한패가 되어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거기에 무슨 시험이 있을 수가 있어요? 각자 쿨하게 돈 벌어서 자기 소유 챙기면서 밥 먹고 사는데 이게 무슨 시험이 있을 수가 있어요? 시험이라 하는 것은 천국에 가야 될 사람에게만 있지 천국에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는 시험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너 예수님의 시험을 같이 받고 있느냐?”라고 묻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천국에 가려면 중간매개를 거쳐서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인간에게 천국이 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천국이 막혀 있다는 말은 인간은 천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겁니다.
천국과 인간 사이에 중간의 매개가 되는 분이 오셔서 천국이 있다고 알려줄 때 비로소 ‘아, 천국이 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인간에게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어요. 그냥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에요. 죽고 난 뒤의 걱정까지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세상 편한 것이 하나님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사는 것이 세상 제일 편해요. 그게 최고입니다.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자기 맘 둘 곳 찾는 것 그게 인간이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맘 둘 곳 찾으려고 하니까, 자기를 지키려고 하니까 역시 돈보다 더 좋은 게 없잖아요.
돈 벌기도 바쁜데 교회는 왜 나옵니까? 교회는 왜 나오지요? 이상하잖아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교회 나오는 이유는 혹시 돈 벌 때 행운이 따라와서 더 부자 되게 해 줄까 싶어서 교회 나온 거지요. 앞길이 잘 풀릴까 싶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시험’이라는 단어 자체를 집어넣는다는 이것은 뭐냐? 그냥 인간은 인간대로 살면 되는데 천국 갈 백성들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천국 갈 백성을 데려가기 위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매개 되시는 분을 너희에게 내가 보낸다는 거예요.
제대로 된 천국에 대해서, 제대로 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줄 사람을 내가 보낸다. 보내는데 그 사람에게 뭐가 실려있는가? 그 사람이 이 땅에 몸을 딱 담그니까. 인간세계에 몸을 담그니까 그때 시험이 팍 온 거예요. 시험이 왔다는 것, 시험에 대해서 우리가 뭘 알아본다, 무슨 느낌이 온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동일한 시험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이미 시험이라는 요소가 들어와 있어요. 들어와 있는데 뭐도 들어와 있는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누가 들어와 있느냐 하면, 마귀도 함께 이 땅에 들어와서 인간세상을 장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인간들이 자기 맘대로 살도록 방치를 한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마귀의 권세를 못 벗어나니까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죽으면 돼’라고 그냥 풀어줬는데 예수님이 괜히 오셔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고요. 그냥 우리끼리 살면 되는데 이런 말씀을 하셔요. 22절에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안 왔으면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도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나쁜 나, 좋은 나, 이렇게 구분하는데 실은 나쁜 나도 없고 좋은 나도 없고 그냥 나가 있어요.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이렇게 구분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거예요. 그냥 사람이에요, 그냥. 사람은 형편 따라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건 별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라는 것을 이야기하니까 비로소 죄가 생긴 겁니다. 아까 기도하신 분의 내용이 있지만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는데 뭐 죄 있어요? 뭐 죄가 있어야 죄를 사하지요. 죄에 대해서 아십니까? 우리는 평소에 죄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요. 열심히 사는 데 무슨 죄가 있어요, 열심히 사는데? 남한테 해코지 안 하는 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내가 죄라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죄라는 그 말은, 너희들이 말하는 죄는 죄에 속하지도 않는 거예요. 그것은 죄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 착한 척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죄에요? ‘저건 나쁜 사람이다.’ 하는데 너도 그런 사정 되어 보세요.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아무도 남을 죄 있다고 평하면 안 돼요. 둘 다 사는 형편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일만 챙기면서 살지 남의 일에 간섭할 필요도 없고요. 자기나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괜히 끼어들어서 죄가 있다고 하니까 그다음부터 사람들은, 죄가 없는데 예수님이 죄가 있다 했으니까 인간이 할 조치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지적하다가 사람에게 체포당해서 사형당해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죽었으니까 예수님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제일 이상한 일이 뭐냐 하면, 이미 없어진 사람을 왜 믿냐 그 말이에요. 없잖아요. 있지도 않은데, 있지도 않은데 왜 믿어요?
사람들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눈에 띌 때 믿는 겁니다. 눈에 띌 때 우리에게 살아 있을 때 믿는 거예요. 뭘 추종을 해도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이 살아 있으니까 추종을 하지 죽은 사람을 누가 추종합니까? 뭘 얻겠다고, 이미 죽어버렸는데. 그래서 교회에서 이미 죽어 없어진 예수님을 추앙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하는 그러한 발언들, 그러한 소리들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예수 팔아먹고 사기 치는 게 아닌가를 생각해야 돼요. 없어진 사람, 있지도 않은 사람을 거론해서 현금 뜯어내는 게 아닌가? 교회라는 게 그런 단체 아닙니까? 살아 있는 네 부모한테나 잘해라! 네 자식한테나 잘하지 죽어 없어진 예수님한테 돈 바치고, 충성 봉사하고, 무슨 그런 짓이 다 있어요, 그래.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데 부활한 예수님 만난 사람 몇 명이나 있습니까? 예수님 부활했으면 꿈에서라도 봤습니까? 예수 부활한 것 찾으면 주께서 쪼르르 내려옵니까? 예수님 만났어요? 키가 몇 센티쯤 돼요? 몸무게는 어느 정도고, 어떻게 생겼지요? 몽타쥬 한번 그려보지요, 예수님 만났으면.
이미 죽어 없는 사람을 교회 세워서 헌금 듣어내면서 전도시켜가면서, 교회 봉사시켜 가면서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요? 그게 왜 사기냐?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자기 맘 둘 곳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맘 편하려고 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음으로써 내세, 혹시 천국이 있으면 갈 수 있으니까 보험 하나 들어놓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내가 기도하는 대상을 하나 상상해서 설정해 놓으면 그래서 빌면 마음도 편하거든요.
그런데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깊이 한번 따져보세요. 머리 놔두고 뭐합니까? 한번 써먹어 보세요. 이 세상에 나무가 실체에요, 숲이 실체입니까? 한 번 따져봅시다. 자, 숲이라는 곳에 갔다 칩시다. 숲에 가게 되면 숲이 보입니까? 숲은 안 보여요. 나무, 나무, 나무, 나무…, 나무들만 있어요.
교회 가면 하나님이 있다고요? 교회 한 번 가보세요.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만 있어요. 하나님은 없고, 예수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목사도 사람이에요. 그러면 교회에 왜 가느냐? 그 하나하나, 있는 개체, 개체, 그 사람들에게 서로 마음 놓고 편하게, 정답게 이야기하면서, 친하게 지내면서 위로받고 또 내 자랑 떠벌릴 때 잘 받아주고 “아이고, 집사님, 잘됐네요. 집사님은 좋겠습니다. 참, 믿음이 좋네요.” 이렇게 나를 부추겨주고, 칭찬해주고, 마음 살려줄 때 정 둘 곳 있는 곳이 교회예요.
정 둘 곳 있고, 마음 둘 곳 있고, 내 이야기 들어주고, 내 아픈 것 다 들어주고, 나한테 관심 가져주고, 그걸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넘치면서 “이게 다 하나님 사랑이고 예수님 사랑입니다. 그렇지요, 집사님?” 또는 권사님, 해가면서 서로 편하게 상호 위로해주는 게 그게 교회예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개체밖에 없어요. 귀신도 안 보여요. 인간밖에 없다니까요. 인간의 세계에요, 인간의 세계, 그것뿐이라고요! 따라서 좀 정신 차려야 돼요. 방송을 보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나오는데요. 다단계에 빠졌어요. 다단계에 빠져서 자기 회사가 삼성보다 크다는 겁니다.
남편이 “제발 다단계 좀 나가지 말아라. 그건 사기 단체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3년 동안 투자했다.” 하니까 남편이 “그래서 얼마 벌었는데?” “당장에는 수익이 없지만 이게 비축되고 누적이 되면 언젠가는 목돈이 들어온다” 한 거예요. 벌써 3년이 지났어요. 돈 한 푼도 못 벌었고요. 그런데 삼성보다 현대보다 더 큰 회사가 자기 회사니까 언제든지 목돈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아줌마는 이혼하면 했지 그 다단계회사는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왜? 자기의 정성과 맘을 거기에 다 두었거든요. 거기에 꽂힌 거예요. 그냥 하나님 버리고 예수 버리면 되는데 왜 하나님 못 버리고 예수 못 버립니까? 50년, 60년을 교회 다니면서 자기의 평생, 마음이 거기에 다 꽂힌 거예요. 다단계 못지않습니다, 이 교회라는 게. 아무 실체가 없고요. 그래서 예수 믿어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하나님 믿어서 장래가 피었어요? 몸도 안 아프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시험이 없는데 본인이 본인을 믿기 때문에 일부러 없는 시험을 본인이 만들어내요. “사탄아, 물러가라” 이래가면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같잖아서.
주님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는 우리의 몸뚱아리에요. 그냥 쿨하게 돈 벌고, 돈 벌어서 생긴 것을 내 것 만들고, 부자 되고, 그게 행복이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말고 뭐 다른 게 왜 나와야 됩니까? 그것뿐인데. 교회 나오는 것은 이런 일을 하는데 행여 보이지 않는 행운이 찾아와서 내가 하는 일 도와줄까 싶어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좀 잘 될까 싶어서 다니는 거예요, 그것은.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설명할 수 있는 것만 설명하는 존재예요.
쿠바라는 나라에서 데모를 했어요. 37년 만에 데모를 했는데 그 데모의 구호가 뭐냐? 사회주의고 자본주의고 다 치우고, 개념이고 이념이고 치우고 빵 달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빵을 달라 이 국가야.” 그러면 국가는 국민들에게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네 빵을 국가가 왜 주는데? 네 빵은 네가 챙겨야지.” 네 빵은 네가 챙겨야지 왜 국가보고 달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동안 배급이나 받으면서 게으르게 살았으면 그 대가를 받아야지 이제 와서 국가보고 빵 내놔라?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책임지면 될 것 아닌가? 그동안 왜 국가를 믿었느냐?’ 쿠바에서 국가가 하는 이야기는 이거예요. ‘그동안 너는 너를 믿었잖아. 너는 너를 믿어놓고 이제 와서 누구 탓을 하느냐’는 말이지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누굴 믿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실체도 없는 것을 왜 믿어요? 인간이 믿는 것은 자기의 믿음과, 자기의 기도와,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헌금과, 신에게 충성한 자기 자신을 믿는 것, 그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행함만 믿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잘남과 자기의 성실함, 혹시 그것이 돈으로 들어올까 싶어서. ‘거봐, 나 이 정도 되잖아.’ 남한테 자랑거리 만들고 싶어서 노력한 것뿐이에요.
주님께서 요한복음 15장 22절에서 내가 오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죄가 없다고 한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애초부터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아예 모든 것이 하늘에서 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기에 너희가 어떤 노력을 해도 죄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인 거예요.
유대교가 어디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예를 들어 유대교는 창세기 1장 1절을 믿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걸 믿는다는 말이지요. 창세기의 창조는 그렇게 믿으면 안 돼요. 2절부터 믿어야 돼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왜 유대인들은 이것부터 시작을 안 해요. 세상이 다 어둡다, 부터 왜 시작을 안 합니까?
세상 자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이것부터 왜 시작을 안 하느냐 그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 다니는 자체가 그게 어두움이고 죄고 시커먼 심보라는 것을 왜 이야기 안 해요, 교회가. 창조? 무슨 창조? 하나님? 본인을 믿으면서 무슨 하나님을 믿어요?
주님께서 시험 들지 말라는 말은요, 야고보서 1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이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이게 어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해요.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Let no one say when he is tempted, "I am being tempted by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and He Himself does not tempt anyone.
이 말은 뭐냐? 너희들이 악마에 속했는데 너희가 무슨 시험을 받아, 그 말이에요. 참 하나님 보기에 같잖지요. “하나님, 내가 지금 시험받고 있습니다.” “네가 악이야, 네가. 네가 죄야.” 네가 마귀하고 한 편인데 무슨 시험을 받아요.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해주소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왜 구원해야 돼요? 죄인데 왜 구원을 합니까? 인간은 구원이 없어요. 인간에 구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천국은 하늘나라지 인간 나라 아니에요. 인간이 그런데 왜 가요. 인간은 인간대로 살다가 지옥 가면 그만이지요. 성경 전체가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시험에 빠졌다, 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걸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죽으리라’부터 시작했어요. 그 말은 네가 필히 죽는다는 뜻이에요. 창세기 4장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If you do well, will not [your countenance] be lifted up? 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and 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 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죄는 인간을 이미 잡아먹었어요. 노리고 있습니다. 이걸 인간은 설명 못 해요. 인간은 이걸 몰라요.
인간은 내가 나쁜 짓 할 때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미 죄에 빠진 거예요. 성경은, 인간이 나쁜 짓을 할 때 죄에 빠지는 게 아니고 이미 죄에 덮여 있어요 죄를 몰라요. 죄가 나보다 더 세다는 것을, 자기가 죄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하면 죄라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나쁜 짓을 안 해도 죄인데 그걸 이해를 못 하고 나쁜 짓 할 때만 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쁜 짓 할 때만 죄니까 자기가 나쁜 짓 했을 때만 예수님 찾아가서 예수님 피로서 제 죄를 씻어달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도 않아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가 왜 네 죄를 사해야 돼? 네가 욕심이 많구나.”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시험도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꾸 “하나님, 제 생활이 어렵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이런 헛소리 하는 이유가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네가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이 욕심인 줄 몰라?” ‘네가 구원받아서 천국 가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욕심이라는 생각을 지금껏 해본 적이 없어?’ 그런 뜻이에요. 사람은 설명을 해도 자기 이익되는 것만 설명하기 때문에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것은 아예 설명을 안 하려고 해요.
“너는 무슨 짓을 해도 죄고, 무슨 짓을 해도 지옥 가고, 너는 천국은 상관도 없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너를 죄 있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인간이 딱 들어보니까 나에게 이익이 안 되거든요. 이익이 안 되니까 그걸 아예 설명을 안 하려고 해요. ‘별 이익이 있겠어?’ 이렇게 한다고요.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를 하나도 몰라요. 사회에서 부자 되고 죽어서 천당 가고, 두 마리 토끼 다 잡으려고 생각해요. 그 정도는 유대인들이 모를 줄 알았어요?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이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예수님이 자꾸 이야기하니까 죽여버린 거예요. 나에게 이익이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익이 안되는 것을.
마태복음 8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니까 이렇게 했어요. 우리 보기에는 진짜 충성 된 제자처럼 보이지요? 예수님은 이랬습니다.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어.
“제가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너희 아버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너는 나를 그냥 따라. 이런 이야기를 주님이 해대니 누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가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의 조치는 간단합니다. 꼭 이점을 들으세요. 간단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이거예요. 목자를 치니까 그동안 뭔가 예수님에게 있는가 싶어서 예수 믿어서 천국 가려 했던 제자들이 다 떠났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지금껏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목자를 치니까 붙어 있는 인간 아무도 없이 다 떠나버렸어요. 이게 바로 예수님이에요. 제자들이 뭐 바보라서 떠났습니까? 따져보고 떠난 거예요. 시험을 받는다고요? 누가복음 5장 8절에 베드로가 정말 고마워요. 참으로 솔직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기 못 잡는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 던지라고 해서 한껏 잡게 했거든요. 잡게 했을 때 우리 같으면 “예수님,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5장 8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 이 전에 알던 나로 그냥 살게 내버려 두세요.” ‘이전에 알던 나, 나는 나 때문에 살았고, 나 챙기려고 살았는데 이런 나 그냥 내두시고 주님은 가시던 길 그냥 가세요. 왜? 나는 그냥 주님과 상종할 수 없는 너무나 추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나같은 인간 상종할 필요 없습니다. 가세요.’ 한 겁니다.
이게 바로 베드로의 본심이고 오늘날 주님의 기적을 직접 만난 사람, 만날 때 우리의 본심입니다, 이게. 우리가 주님을 직접 만날 때 본심이 드러나요. 그때부터 시험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성경의 어느 대목을 봐도 하나님 앞에 나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 저 어떤 존재입니까?” 먼저 물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단 한 명도 없고 주님께서 찾아와서 된 통으로 치니까 질문이 “나 누굽니까?”가 아니라 “주님, 누구십니까?”로 바뀌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사도행전 9장 5절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단박에 나오는 질문이 뭐냐? “주여, 누구십니까?”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나의 이익, 실익과 나 하나 챙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내 인생에 허락도 없이 끼어드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왜, 내 인생을 망치러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사울은 자기 인생을 망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이 파괴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사울은 예수님과 함께 시험받는 사람, 주님의 시험에 가담한 사람으로 된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받은 상태에요. 그게 구원받은 상태에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이것은 환호성입니다. 이게 환호성이에요.
내 마음 둘 곳이 없다고요? 내 마음 자체를 파괴시켰는데 마음 둘 이유가 없지요. 마음 둘 이유 없어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나는 파괴의 대상이에요. 주님으로부터. 내 마음, 내 인생 있으면 안 되지요. 그게 주님 보시기에, 주님 안목으로 보기에 그게 바로 악이기 때문에, 죄기 때문에, 그게 마귀의 장난이기 때문에. 내 맘이 어떠니, 행복하니 그런 것 있으면 안 되지요. 그거 파괴되어야 마땅하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가 무엇이냐, 부터 지적하면서 찾아오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시험의 공간이라는 것, 테스트 공간, 유혹의 공간인 거예요. 시험받는 분은 예수님 단 한 분밖에 없어요. 그 시작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40일 굶으시고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는 거예요.
여러분, 머리 좋잖아요. 정리합시다. 시험의 대상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시험하는 자는 악마만이 시험한다. 공식 하나 딱 정립합시다. 딱 정립하면 돼요. 악마는 우리를 시험 안 합니다. 자기 졸개를 뭘 시험을 해요. 이미 자기 밑의 부하인데 뭘 시험을 해요. 가만 놔둬도 자기 맘대로 사는데 뭘 시험을 해요.
어떤 자만 시험하느냐 하면, 내 맘대로 살다가 주님 찾아와서 예수 안으로 이미 들어온 자가 되는 그 순간, 그 순간 악마가 ‘너도 한번 당해봐라.’ 그때부터 시험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악마가. “네가 왜 거기 들어가! 네가 왜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 너 내 편이었잖아. 너는 너 잘난 맛에 살았잖아. 너 이 땅에서 부자 되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 그것만 생각했잖아.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고난에 왜 가는 거야, 네가!”
그때부터 악마가 우리를 쥐어뜯기 시작합니다. “정신 차리라고! 좀 적당히들 해라, 적당히들. 네 실익 챙겨야지. 예수도 믿고 인생 풀리고 둘 다 챙겨야지 왜 거기에 빠지냐?” 처음에 욥도 두 개 다 챙겼어요. 하나님 잘 믿고 부자 되고, 자식들 열 명 다 잘되고. 자식 열 명인데 다섯 명은 판사 되고 다섯 명은 의사 되고, 그런 식으로요.
다 잘되었지요. 욥은 그 자식들이 행여나 우쭐댈까, 세상의 지도층 되고 우쭐댈까 싶어서 욥이 한 일은 자식들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내 자식들 어디에 가더라도 죄짓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 돌리고, 빛과 소금이 되고, 욥 그때는 교회도 없었지만,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훌륭한 일군이 되어서 ‘야, 하나님 믿는 사람 저렇게 복 받는구나.’ 그런 것을…, 지금 목이 쉰 소리가 나오니 꼭 부흥사 같지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서 영광만 돌리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잖아요.
욥은 그 기도가 악마의 시험 든 기도인 줄 상상도 못 했어요. 그게 죄가 되는 줄 생각도 못 했어요. 내 새끼, 내 자식 잘 되게 하는 것이 죄인 줄 몰랐어요. 그게 자기 자신과 가문의 이익이라는 생각을 본인도 못했습니다. 그게 하나님 잘 믿는 티를 내는 줄로 알았어요. 그게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마귀하고 이야기합니다. “어이, 마귀야.” “예” “욥 믿음 좋잖아.” 마귀가 얼마나 잘 아는지 “하나님, 욥이요, 챙긴 것이 있으니까 믿는 거예요. 챙겼으니까. 아무것도 없어 보세요. 욕합니다.” “왜? 마귀 네가 뭘로 그렇게 인간을 장담하느냐?” “내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거든요, 내가! 모든 인간의 마음을 내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내가 너무 잘 압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을 다루도록 허락했지요. “생명만 빼앗지 말고 나머지는 다 다뤄라.” 재산 다 뺐었고요. 건강 다 뺐으니까 드디어 욥 자기 본색이 드러났지요. “하나님이여, 저를 왜 이렇게 괴롭힙니까? 제가 어디가 잘못됐는데, 제가 어디가 죄인입니까? 내가 뭐가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괴롭힙니까? 이렇게 괴롭히려거든 이 땅에 태어나지 말게 하든지, 태어났으면 잘되게 하든지 해야지 이게 뭡니까?”
그 이야기를 여러분이 잠시 기억하면서 마태복음 2장을 생각해봅시다. 마태복음 2장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였습니다. 그 엄마의 아픔과 상처가 해소될 수 있을까요? 인간들은 설명되는 것만 설명해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입니다. “헤롯이라는 이 못돼먹은 독재자가 우리 애를 죽였는데 하나님은 왜 그런 불의를 보고 그냥 참고 있습니까, 하나님?”
어제까지 있었던 우리 애를 경찰이 들이닥쳐서 잡아 죽였다는 이 사실, 눈에 보이는 이 사실, 이 실체,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설명을 해요. 왜?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인간은 자식까지 잃어가면서 뭘 설명 못 하느냐 하면, 이게 다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을 인간의 힘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아기 예수는 귀하고 내 자식은 안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보고 네 자식을 바치라고 했잖아요. 아브라함보고 이야기했는데 오늘날 우리 보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무개야. 네가 모리아 산에 가서 네 자식을 바쳐라.” 그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마음은 뭐냐 하면,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내가 자식을 이만큼 아끼고 사랑한다는 그 심정을 그걸 알아줘야 사랑의 하나님이지 이것마저 빼앗아가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나를 파괴 못 해서 아주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나를 파괴 못 해서. 그러면 하나님이 이야기하지요. “네가 뭔데 내가 너를 파괴 못 해? 네가 뭐라도 되었어? 네가 대단해? 내가 파괴하면 파괴하는 것이지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그런 게 어디 있어, 내 앞에서. 내가 바치라면 바치는 것이지”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너는 죄라고 하면 그냥 죄에요. 참 너무 간단해서 말이 안 나와요. 정말 너무 간단한 거예요. 자, 하나님의 뜻을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의 어떤 행동과 상관없이 천국 보낼 자는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냅니다. 이게 기분 나빠요, 이게? 이게 기분 나쁘냐 그 말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봉사를 하든 안 하든, 돈을 내든 안내든 아무 상관 없어요. 내가 교회를 나가든 안 나가든 그것도 상관없어요. 천국 보낼 자를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를 지옥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러한 조치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합리적인 설명을. 납득 가도록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설명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악마로부터 시험받고 있기 때문에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악마 안에 죄로 잠겨 있기에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딱 주님 찾아와서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한방 치니까 “나는 천국 보낼 자를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낼 자를 지옥 보낸다.” 하니까 ‘아, 그렇구나. 바로 그거였구나.’라고 유레카! 환호성을 울린 거예요. ‘그동안 나는 나에게 꽁꽁 묶여서 살았구나. 내 마음, 내 행복에 묶여서 살았구나.’
나는 내 믿음에 묶여 산 거예요. 내 믿음이 족쇄였던 거예요. 내 믿음과 내 사랑이 족쇄였던 겁니다. 내 열심히 족쇄였던 거예요. 그게 나를 꽁꽁 묶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게 죄였던 겁니다. 내 믿음 가지고 구원받겠다는 것이 이게 천하의 몹쓸 죄인 것을 이제야 주님 찾아오니까 아는 거예요.
주님한테는 믿음도 소용없고, 소망도 소용없고, 사랑도 소용없고, 봉사도 소용없고, 교회 충성도 소용없고, 헌금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소용없어요. 주님은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친히 작동하면 그걸로 끝! 끝난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내가 말씀 지키려고 하니까 이게 뭐냐? 이게 계속해서 마귀의 노래개 감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말씀 지켜보려고 하니까.
이 성경 말씀은 어느 말씀도 내가 지킬 말이 하나도 없어요. 친히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아, 정말 너무 간단한데 이게 설명할 길이 없네, 정말! 요한일서 2장 14절, 이게 성경에 다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청년들보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앞에 두고 성경 쓰고 그런 것 하지 말고, 말씀이 멈추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 속까지 쑥 들어와서 우리 속에 성경 말씀이 살아 있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선악과 속에 주님의 눈동자가 들어 있어 가지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말은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하는 그 말씀이 선악과 속에 이미 들어있다고 봐야 돼요.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 말씀이, 예수님이 작게 해서 선악과 안에 딱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알기 쉬워요.
그래서 나를 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것도 모르고 아담과 하와는 과일 하나 따먹은 줄 알았어요. 말씀을 따먹은 것은 생각도 못 하고, 말씀을 따서 없애 버린다는, 그래서 말씀을 없애버리면 누가 돛대가 되고 누가 주가 되느냐 하면, 내가 스타가 되고 내가 신이 돼요. 그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 악마가 그걸 시킨 거예요. “먹어라, 먹어라! 네가 먹으면 신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창조를 하실 때 기존 창조가 있지만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미 내다보고 기존창조를 하신 거예요. 하시면서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헛되며, 세상 어느 것도 깜깜한 세상, 주님께서는 이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거든요. 거울에 비추니까 내가 실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나는 실체가 있구나. 있으니까 이 실체를 어떻게 내가 관리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실체라는 인간 때문에 죽으신 실체에요. 그분은 부활하신 분이에요. 부활한 식으로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을까요, 아직도 죽지도 않은 내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미 죽음을 딛고 부활한 채로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실체입니다. 우리는 헛방이에요, 헛방.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상에 악마들이 인간을 시험하지는 않지요. 성도를 시험하지요. 미혹하는 거예요. 성도를 미혹하기 위해서 인간 나름대로의 혼돈이 있으니까 인간 손에 의해서 혼돈에서 질서를 잡으려고 그들은 윤리와 법도를 만들어 놓은 거예요. ‘윤리와 법도’
그래서 나오는, 악마가 우리에게 평생 시키는 것이 뭐냐면, ‘매사에 제대로 선택하라’라는 것을 악마가 우리에게 가르쳤던 거예요. ‘너의 올바른 선택이 너희 미래를 결정한다’ 매 순간 선택이.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 이런 선택. 소지섭이가 한 선택입니다. 이런 선택을 매일같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택을 할 때 어떻게 선택하느냐? ‘너 어느 것이 착한 일이고 어느 것이 악한 일인지 선택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죠. 이미 악마 편이 됐다 이 말이죠. 따먹었지. 그러면 선악 지식이 뭐냐? ‘이것이 선이고, 저것은 악이니까 나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인간은 선택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 비스무리하게 자기가 신 같은 존재가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만든 영화 중의 하나가 마동석의 영화 <범죄 도시> 1, 2, 3, 4. 그런데 마동석의 영화를 보면서 ‘참 이게 복음적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마동석의 영화에 1, 2, 3, 4, 영화마다 전부다 빌런(villain)들이 다 나와요. 악인들이 나온다고.
악인들이 나오는데, 그 악인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지독한 악인이냐? 그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 마동석 앞에서는 다 그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그놈이고, 전부 다 똑같이 다 악인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마동석 편에 서 보는 거예요.
그리고 <파묘>라는 영화, 거기에 귀신 잡는 사람 나오거든요. 귀신 잡아야 된다는 이유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1장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우니까 내 한 몸 살기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좀 도와주셔가지고 이 땅에 악인들 좀 없애주시고, 사기꾼들 좀 없애주시고, 전세 사기꾼들 좀 없애주시고, 좀 질서 있게 착한 사람만 살 수 있는 세계, 마음 고운 사람만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로 제발 해 달라는 것이 이미 포획된, 죄악된 세계, 악마의 세계에서 인간의 소원이 그거뿐이에요.
착한 사람만 사는 세계,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시험케 한 거예요. 이제 여러분, 시험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시험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악하고, 악해야 되고, 혼돈해야 되고, 무질서해서, 이 세상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야 되는데 이 세상의 실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사는 데 편할 수 있도록, ‘신이시여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시험 든 거예요, 그게!
내가 왜 편하게 살아야 됩니까? 내가 왜 행복해야 돼요? 무슨 권리로? 뭐 잘했다고요, 우리가!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찾아오니까 사도바울은 파괴됐다 이야기했죠? 기생 라합을 보세요. 여리고성에 이스라엘이 쳐들어 왔을 때, 기생 라합은 남의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남의 나라의 여호와의 신이 자기 나라. 여리고성이 도시국가였으니까, 그 도시국가를 칠 때, 기생 라합은 자기의 모든 것이 날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기생 라합의 믿음이었습니다. ‘야, 그 여호와가 드디어 이 도시국가를 파괴하는구나, 그런데 그렇게 파괴하는 것은 그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너무나 정당한 조치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일은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를 만납니다. 모세 만날 때 떨기나무, 떨기나무에서 만나죠. 그때 주님께서 모세 만나고 제일 먼저 하는 얘기가 “신발 벗어라, 신발 벗어. 너는 더럽고 나는 거룩해. 그러니 신발 벗어.” 직접 찾아왔을 때 모세가 들은 말은 그거였습니다. “너는 더 이상 네가 주인이 아니다. 나의 철저한 종이다.” 이거였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그 관계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 내가 주인 되지 마시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 주인 만나는 거, 그게 환호성 올릴 만한, 그게 복이잖아요. ‘내 인생 어떻게 됩니까? 내 인생 어떻게 돼요?’ 그걸 누가, 내가 왜 걱정해야 돼요? 내가 주인이 아닌데요. 내가 내 주인이 아닌데. 아직도 내가 내 주인인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십니까?
그리고 난 뒤에 모세는 광야에 갑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백성들한테 닦달당하고 시험을 당해요. 그래서 모세는 더 참다못해 백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나만 가지고 왜 그래? 이거 내가 한 거야? 내가 한 거 아니야. 왜 자꾸 나만 붙들고 왜 그래?” 물 내놔라 떡 내놔라, 고기 먹고 싶다……, 40년 동안 백성들은 그렇게 모세를 해코지하고 괴롭혔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광야 때 40일 동안 굶었고요. 그 예수님이 40일 굶은 것과 함께 3년 동안 십자가 길을 가면서 그렇게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시달렸고요. 주님께서는 3년 동안 시달렸고, 십자가에서 겟세마네에서 세 번씩 기도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자기 몸이 전부인 줄 알고, 실체인 줄 알고, 실체는 따로 있는데, 인간은 생명도 아닌데 지가 생명, 은혜 될 사람인 줄 알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 뒤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종으로 어떻게 살았어요?
사도바울은 예수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치매 현상을 보였어요. 그게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비결이 뭐냐?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모든 시답지 않은 일, 모든 어려운 일, 모든 것을 다, 군소리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에서 사도바울은 등신이 된 거예요. 바보가 된 거예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거예요, 그냥!
이게 성도잖아요, 이게 성도 아닙니까? “하지 마라”부터 시작된 주님 지식이 이제 주님한테는 사도바울에게 ‘이거 하라, 하라’로 나가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창조, 천국의 백성의 모델적인, 샘플적인, 모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짓말,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교회 다니면서,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우기면서 자기를 속여가면서 살아온 우리, 그 원인이 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셔서, 이러한 죄인 중에 괴수를 가만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그게 바로 ‘죄’라고 지적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