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희생의 무서움

아빠와 함께 2024. 4. 7. 19:14

희생의 무서움 

2024년 4월 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2:14-16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인간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알 수 없는 무서움이 묻어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란 무서움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그 무서움은 ‘죽을 수 있다’는데서 비롯됩니다. 이것까지가 인간이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무서움을 제공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모릅니다. 그저 무서움에서 막혀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악마로부터 오는 생각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 합니다. 인간들은 바로 이점을 인정 못하고 있습니다. ‘악마’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악마의 모든 활동의 초점은 ‘메시아 죽이기’에 있습니다. 즉 악마는 인간들이 모르는 진짜 메시야에 대해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악마의 굴레에서 빼내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우리 인간쪽에서 알아서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면 되지를 않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과 복음과 말씀을 대하는 그 당사자들이 모두 악마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구원자보다 그 구원자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자기 자신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본인들이 알아 먹을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의 이론같으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말은 그다지 필요치 않는 대목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되지 왜 굳이 ‘아브라함 자손만 구원’이라는 구절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구원’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 구원’입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창세기 12:2-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과 저주의 기준으로 삼으시는 겁니까?

그냥 누구나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아닐까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단서나 요건을 왜 꼭 달아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복과 저주가 한 인물에게 복합적으로 공존해 있다는 이 특이성 해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지니고 있는 복과 저주는 오로지 ‘아브라함 자손’에 와서 완전한 상태로 최종 성취를 보게 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서랍에 복과 저주 두 개의 공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아브라함 씨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서랍을 열면 무조건 복된 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이 서랍을 열면 무조건 저주 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육신은 악마의 종으로 붙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이 선택하면 선택에 참여하지 않는 쪽은 무조건 그 선택의 반대 결과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무엇을 얻을까’를 따지는 언약이 아니라 ‘너의 자리는 어딘가’를 묻는 기능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정작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본인도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자신이 굳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될 이유가 없으며 어떻게 한 인간에게 복과 저주가 같이 공존해 있는가를 신기할 지경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추장의 땅으로 살려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의 부인을 탐내었던 아비멜렉은 하나님으로부터 혼줄이 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단순한 육적인 존재로 보았던 아비멜렉에게는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하나님에게 무서움을 갖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 아브라함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희생’을 휘몰고 다닌 바가 된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 언약이란 세상 사람들에게 참으로 무의미하고 낯선 내용입니다.

이 낯섦은 이방민족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아브라함 자손들이 태어나면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돌판을 받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부수되는 율법도 함께 알아옵니다. 모세는 이 율법은 레위지파를 포함해서 13지파에게 나뉘어줍니다. 그런데 이 12지파가 레위지파 중심으로 통합됩니다.

그것은 레위지파에게는 대제사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즉 죄사함을 전문적으로 행사하는 담당지파가 중심 지파가 됩니다. 하지만 이 율법에 의한 대제사장 제도로는 아브라함의 죄를 씻어내지 못할 뿐더러 악마의 사실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율법이란, 왜 인간들은 결국 다 죽어 마땅한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악마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서 있어 율법을 온전히 수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히브리서 7:15에,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영원한 하늘에 하나님께서는 ‘별다른 제사장’을 따로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죽음으로 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못하는 일반 인간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영원한 하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계통이기 때문에 홀로 영원한 죄사함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늘의 제사장이 따로 투입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악마가 하늘 높은 곳에서 땅 아랫까지 추락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반란해서 그러합니다, 원래 천사들이란 오로지 결속력 하나로 뭉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돌이키지 않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행하며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겔 10:11-13)

이처럼 하나님만 섬기는 그 자리에 이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하늘의 오른편에 앉혀서 그들도 주님을 섬기고 그들 또한 천사들로부터 섬기를 받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 희생을 단순히 앎의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다 걸어야 될 사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적인 용도로 구원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 홀로 공로로 성도라는 결속력 있는 단체가 새로 형성된 것을 감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히브리서 2장 14-16절(희생의 무서움)240407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2장 14-16절입니다.

히브리서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의 가는 길에 대해서 본문이 스케줄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혈육이 있다는 겁니다. 육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육이 어디에 매여있느냐? ‘사망에 매여있었다.’ 사망에 매여있다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하기를 육이 사망에 매여있다, 정도가 아니라 육이 마귀에 매여있다, 그렇게까지 내용을 추가해서 친절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의 육이 사망에 매여있고, 더 나아가서 악마에게 매여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 현상은 15절에 나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누가? 육이. 누가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육을 가지고 있는데 육이 무서움을 유발하는 이유가 된다는 거예요. 육이 없으면 무서워하지 않을 건데 육이 있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마귀는 그 육을 노리고 장악하고 있고요. 세력을 잡은 자니까요. 죽음으로서 하나님 자녀의 육을 꽉 쥐고 있다는 거예요.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좌지우지에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거기에 어른이 있고 거기에 주도하는 힘이 작동하고 있어요. 어떤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더라도, 직장을 옮기고 어떤 회사에서든 어디서든 발언을 한다든지, 장사하면서 손님을 맞이할 때 모든 행동과 생각에는 무엇이 거기에 다 묻혀 있느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이게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애를 밤에 잠재울 때, 모기에 혹시나 물릴까, 모기 물리면 죽겠죠. 그러니까 모기장 또 치겠죠. 왜? 어떤 행동과 태세에 준비를 한다는 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죽으면 안 돼.’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이가 먹고 세월이 간다고 해서 희박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너 나이 60 됐으니까 내가 놓아줄게.” 하지 않아요. 마귀가 놓지를 않아요. “너 내 똘마니 노릇 많이 했잖아. 이제 네 마음대로 해.” 그런 건 없습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았으면 ‘끝까지 가자, 끝까지!’ 네가 요양병원에 들어가든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끝까지 죽기를 무서워하게끔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좀 정직할 필요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김정은이가 무서워요.” 김정은이 무서운 게 아니라 마귀가 무섭죠. 세력을 잡았으니까요. “나는 러시아의 푸틴이 무서워요.” 푸틴이 무서운 게 아니죠. 푸틴이 세력을 잡은 것도 아니고 푸틴은 눈에 보이고요.

그거 말고 푸틴이 없을 때, 김정은이 없을 때도, 시진핑이 없을 때도 우리는 무서워 했다 이 말이죠. 그게 누군지를 몰라요. 물음표(?).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한시도 죽음이 무섭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 무섭기 때문에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악마가 와락 침범하니까 그걸 본인이 견딜 수 없어서 그것도 자기가 악마의 침범을 바깥으로 드러내서 타인에게 가해를 입히죠. 죽음의 힘을 어느 인간이 감당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스케줄을 오늘 소개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스케줄이 있는데 그게 뭐냐? 인간은 물음표니까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하며 평생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스케줄에 의하면 네가 무서워하는 그 배후의 실체를 주님께서 불러내요. 주님께서 처리해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무서워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처리를 해줘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야, 하나님 참 좋으신 분이다. 죽는 걸 무서워하기 때문에 예수님 보내셔서 마귀를 없이 하시고 다시는 죽지 않고 천국 가서 살게 해주시니 우리 하나님 정말 좋은 분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죠? 그게 오해인 거예요. 왜냐면 16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이 혜택 준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만 이런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성경이라는 게 어려운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기 왜 나오느냐, 이 말이죠. 아브라함이 거기서 왜 나와? 아브라함 좀 뺐으면 좋겠어요. ‘하나님 좋으신 분입니다. 하나님 우리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예수님 보내서 예수님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깔끔하게 어떤 조건이나 제한 없이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런 말씀만 하면 되는데 여기 생뚱맞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기에 왜 등장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시도가 근원적으로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귀가 떠나면, 죽음의 공포도 떠나면 나는 행복 해지겠지.’ 이 자체가 마귀가 원하는 바에요. 마귀의 관심사는 아브라함에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느냐? 나한테 있어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느냐, 죽어서 좋은 나라 천국 가느냐, 관심이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이거 우리나라 사람 아닌데? 아브라함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아브라함하고 나와 관계가 없다고 이걸 그냥 건너뛰어요. ‘나만 구원받으면 됐지. 아브라함까지 내가 왜 신경을 써?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성경 전체를 너무나 일방적으로 자기 본인 입장에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혈육에 속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혈육에 속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 종노릇이라고 되어 있죠.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여기 종이라는 것은 본인이 최종적인 주도권을 갖지 않은 상태를 종이라 합니다. 내 모든 결정과 행동과 생각을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겠다면 그건 종이 아니에요. 자기가 주인이에요.

종이라고 하는 것은 내 주인이 되는 그 주인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그냥 유입 받는 것, 그게 종의 입장입니다. 종의 처지에 있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문장, 단어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수만 개가 넘죠. 수만 개가 뭡니까, 엄청나게 많은 단어와 그 개념들을 많이 보면서 이것을 마귀가 주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이 성경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죠.

이 성경을 마귀가 주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귀가 이 성경을 왜 줍니까? 성경 보고 너 구원 받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획득, 소유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게 마귀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중간 것 걷어 치워버리고, 성경은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천당 보내려고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우리가 마귀 들렸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는 종이고 마귀가 내 주인이기 때문에 성경이 아니라 다른 경전이나 어떤 귀한 말을 들어도 ‘야, 이거는 좋은 아이디어다. 진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이다. 받아들이자. 그럼 내가 잘 되겠지.’ 그런 생각을 갖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하나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성경 구절 하나도 이해 못 하는 겁니다. 자, 어느 정도로 이해 못 하는지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서 3절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죠.

이 말씀 들으면 “나 아브라함 좋아해. 사랑해 아브라함. 나 아브라함 팬이야.” 이렇게 막 나올 준비를 하는데 그거부터 생각해야 돼요. 왜 아브라함을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게 했는가?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 다 제치고 유독 아브라함을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게 해서 아브라함이 복 있는 줄 알면 복이 오고 아브라함에게 복이 있다는 걸 모르고 아브라함의 존재를 무시하면, 도외시하면 자동적으로 아무리 잘 살아도 그 자체가 저주가 된다는 이런 판단이 왜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졌느냐, 이 말입니다.

왜? 예? 아브라함과 우리가 무슨 차이가 나서 왜 나는 무시하고 아브라함은 특별대우를 하는 이유가 뭔데, 그 이유가 뭔지 모르면서 “아브라함 좋아해. 아브라함을 믿을 거야.” 그렇게 나오면 복 받고 구원받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좋다고 아브라함이 조상이라고 믿었던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사태파악을 못 하고 있어요.

이 말은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악마가 인간에게 무서움을 줬다, 두려움을 줬다, 죽기 무서워하는 공포심을 줬다. 악마가 인간에게 단지 공포와 불안감만 준 게 아니에요. 악마가 장악할 때는요, 인간이 하는 모든 생각이 악마의 생각에서 바깥으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이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은 적이 없도록 만들어요.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요.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실수를 줄이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불행하지 않으려 하고, 실패한 슬픈 인생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것이 성경에 보면 악마의 생각이에요. 악마의 생각이 그대로 우리 생각까지 스며든 겁니다. 그리고 그 스며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꽁꽁 묶여 족쇄를 차고 있기 때문에 이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요.

악마의 앞잡이 앞에 성경을 들이대니까 성경에서 나에게 좋은 거, 귀한 거 다 달달 외우고 성경 100독 하고 성경 쓰기까지 하고 성경 연구하고 그러죠. “이런 문제를 그러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결합니까?”라고 저한테 물으면 종인데 무슨 해결을 해요? 종은 묶인 존재인데요. 우리는 해결 못 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것 같으면 마귀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죠. 꽁꽁 묶어놓고 꼼짝 마라고 하는데 거기서 우리의 무슨 유도리가 나와요. 무슨 우리 융통성이 거기서 발휘가 됩니까? 해결이 없어요. 그러나 해결은 없지만 지금 천국 간 성도들은 있을 것이 아니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천국에 갔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죠. 율법을 줌으로써 그 율법을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으로 압축을 해 놨습니다. 열두 지파를 해 놓고, 거친 표현이지만, 그들을 한 데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면 그게 무슨 지파가 되느냐 하면, 레위 지파가 돼요. 그러니까 지파가 열세 지파에요.

열세 지파인데 그 열두 지파를 한 지파에 종속되게 했습니다. 뭐가? 율법이. 누가요? 하나님이. 누구에게? 아브라함 자손에게. 이 아브라함은 본인도 지금 당황스러워요. 왜 내가 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본인도 납득이 안 돼요, 납득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다’ 그 말뿐이고 택하여 세웠다는데 왜 나를 택했어요, 왜? 좋다, 기쁘다, 가 아니라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는 거예요. 왜 나를 택해서 복의 기준으로 삼는지요.

그것은 아브라함을 만두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두는 만두피가 있어야 되잖아요? 밀가루 반죽 만들어서 홍두깨로 쫙 쫙 밀어서 만드는 만두피. 종지기 가지고 팍팍 찍으면 만두피 되거든요. 거기다가 속을 채웁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은 만두피가 되고 하나님의 아브라함 언약은 그 속이 됩니다. 속이 꽉꽉 차버리면 만두피가 폭발하면서, 터지면서 죽음이 터져버려요.

죽음이 터져버리면 아브라함과 악마와의 관계도 비로소 찢어지고, 절단 나고, 파괴되어 버리는 겁니다. 언약을 집어넣어서 그동안 악마의 철저한 사유물로 존재가 묶여있던 것…, 죽음 가지고 ‘너 죽는다? 죽인다? 죽인다.’ 죽는 것 가지고 지배를 한 거예요. 악마가 알아요.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아요.

악마가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이 아무리 바르게 살아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어 마땅한 거예요. 그걸 즐기고 있습니다, 악마는.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안 죽으려고 말씀 지킨다고 난리에요. 죽음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요.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해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속을 채웁니다. 언약으로 속을 채워서 아브라함 자체가 완전히 다 찢어지게 만들어요. 터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터지면 기존에 아브라함과 그 혈육을 장악했던, ‘꼼짝 마라’ 했던 그 죽음도 같이 터져버려요. 죽음이 갈기갈기 다 찢어진다고요.

풍선이 있는데 악마가 만든 그 풍선에 우리가 갇혀있어요. 그 안은 죽음과 저주의 세계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늘로 풍선을 탕 터트리면 뻥, 하고 다 터지면서 비로소 그동안 인간을, 아브라함의 자손을 가두었던 죽음의 공포가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물론 아브라함이 만두피이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체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과 저주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복과 저주가 중첩이 되어 있어요. 널 믿으면 복 받는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만약에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데 비로소 복이라는 것을 현실화시키고, 저주라는 것도 같이 현실화시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점을 이렇게 생각하면 진짜 쉽고 제일 간단해요. 서랍이 있는데 서랍 안에 복이 들어있고 저주가 들어있고 중첩되어서 있습니다. 그런데 복 받을 사람이 서랍을 열면 그 안에 복만 들어있고 저주받을 사람이 똑같은 서랍을 열면 저주가 나타나도록 아브라함에게 작용하게끔 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신기하죠? ‘아브라함에게 복과 저주가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 대해 네가 복을 빌면 복을 얻으리라.’ 할 때 ‘나 아브라함에게 복 받아야 해.’ 하고 자신만만하게 아브라함이라는 서랍 딱 열었는데 거기서 저주가 나와요. 그리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저주 외에는 복을 받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 받으려는 모든 인간은 저주로 마감돼요.

그 이유가 뭐냐? 물리학에 보면 ‘양자얽힘’이라는 게 있어요. 한 번 상호작용을 한 입자 사이는 아무리 둘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동해서 마치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현상입니다. 빨간 공, 파란 공 두 개가 있는데 한쪽이 빨간 공을 쥐어버리면 저쪽에서는 어떤 결심과 각오와 의지를 총동원해도 그 사람이 여는 서랍에는 파란 공만 있어요. 왜? 연동되어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누구와 상호작용을 하느냐? 이미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상호작용을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작용을 멈추지 않습니다. 끝까지 갉아요. 자기가 만든 인간이기 때문에. 끝까지 갉고, 갉고, 끝까지 관계를 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그 인간을 갉음으로서 새로운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서 인간을 갉으면서 다루고 상대하십니다.

기존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서랍을 여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아브라함의 서랍에서 뭐가 나오느냐? 바로 복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저주받는 자라는 것이 확정이 되어 버립니다. 양자얽힘에 의해서 한 번 상대한 것은 끝까지 관계를 끊지 않아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복을 완성했다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인간은, 그 사람이 어떤 종교적 노력과 기도를 해도 그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탄의 종으로 발각되고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이 얼마나 멋집니까! “예수님 빼놓고는 인간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그걸 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그것도 모르고 아브라함에게 복 받는다 하니 “나 아브라함 좋아해. 아브라함 팬이야.”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너 누구야?” 하면 “난 인간이야.” 아니에요. 예수님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인간은 사탄의 종이에요.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악마의 종이 되어 있다니까요.

그건 본인이 연구한다고 밝혀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 중에 하나가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을 하신 거예요. “너는 이 악마의 권세 아래 이렇게 놓여있다. 악마의 노림수,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거다.” 유대인 보고 그랬죠.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악마의 하수인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죽여라.”에요. 누구를? “메시아를 죽여라.”입니다.

메시아를 왜 죽여야 하는가? 내가 멀쩡한데 메시아를 왜 믿어야 돼요? 내가 멀쩡한데. 내가 뭘 잘하든 못하든 알아서 하는데 메시아가 왜 끼어드냔 말이죠. 그 메시아 그리스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르게 살아라.” 이런 이야기를 하신 메시아가 아니에요. “나는 너 때문에 희생한다.” 이 이야기 하거든요.

예수님이 “나는 세상 짐을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희생하러 왔다는 거예요. 왜? 너희가 워낙 못났으니까. 너의 힘으로 마귀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희생하러 왔다는 거예요. 그 희생이라는 것, 이게 아브라함의 경우에 어떻게 오는지를 창세기 20장에서 한 번 보겠습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을 만나요. 창세기 20장 8절에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심히 두려워한 거예요. 아비멜렉하고 아브라함이 만났는데 이 대목을 제가 찬찬히 말씀드릴 테니까 이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를 한 번 경험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외지에 갔어요. 자기 동네가 아닌 외지에 가니까 그쪽에서 어떤 폭력을 해도 저쪽은 쪽수가 많고 난 하나밖에 없으니 내 가족과 가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잘 고개 숙이고 수그리, 하고 들어가야 돼요. 잘 보여야 된다고요. 비위 맞춰야 살 수 있어요. 아브라함이요, 죽기를 무서워하니까.

그런데 보니까 아비멜렉의 눈총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죠. 아브라함을 보면서, 그에게 시선이 가면서 그 옆에 있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게 주는 눈길이 좀 수상해요. ‘어떻게 한 번 해볼까’하는 눈치에요. 그래서 아비멜렉이라는 추장이 말합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그건 됐고’ 옆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십니까?”

아브라함도 눈치가 있어서 ‘이거 자칫하면 날 죽이고 내 아내를 뺐겠구나.’ 그래서 요령을 부린 거예요. “제 누이동생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화색이 돌면서 “아이고, 사돈!” 또는 “아이고, 처남!”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갑자기 아브라함 가족과 가축의 생존이 유리해진 거예요. 아브라함도 죽기를 무서워했기 때문에요.

그래서 누이라 하니 밤에 아비멜렉이 사라와 관계를 맺으려 하다가 가까이는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라고 했어요. “네가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아비멜렉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사라도 그렇고 모두 다 공통점이 있는데 전부 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돼요.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떠는 인간을 왜 하나님께서는 복과 저주의 기준점이 되게 하셨느냐 그 말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요. 그 답은 이래요. 아브라함이 기준점이 아니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기준점이죠. 아브라함 자손인 거예요.

요한복음 8장 56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이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인지 몰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 당신은 나이 50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2000년 전에 아브라함을 봤습니까?” 이렇게 나온 거예요.

누가 봐도 누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냐면 유대인들이에요. 마치 오늘날 우리들처럼.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요, 얼마나 거짓말인가 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거예요. 자기를 믿지 예수를 믿지 않죠. 납득될 수 있는 건 나지, 예수가 납득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 그런데 창세기 20장 8절에 아비멜렉이 그 이야기에 너무너무 무서워서 “큰 분 등장했다. 조심해라.” 이렇게 된 겁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이 왜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무서움을 느꼈는가? 인간이 무섭다는 것은 낯설음이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악마의 종으로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의미 있는 삶을 꾸려가고 있었던 거예요. 의미 있는.

‘이렇게 하고 요렇게 바르게 하고 또 성경 가지고 교회 다니면 천국 갈 것이다.’ 이렇게 굉장히 안전빵, 안정적인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겁니다. ‘내가 뭐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왜 마귀를 무서워해? 나 혼자 성실하게 살았는데.’ 성실하게 살고, 착실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말씀 믿고, 예수님 믿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 하는데 이 아비멜렉의 입장도 마찬가지예요.

아비멜렉이 두려운 것은 딱 하나에요. 본인도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브라함이라는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인간의 등장이 왜 하나님을 우리 집까지 불러일으키냐는 겁니다. 나한테 자기 부인이라고 하면 될 걸 본인이 무서워서 누이동생이라고 했던 그런 찌질하고 쪼잔한 인간으로 인하여 왜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나타나 “너는 죽어!” 왜 이런 무서움이 오게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게 뭐냐? 희생의 무서움이에요. 예수님 희생의 무서움입니다. 십자가 피의 무서움이에요, 그게. 예수님의 피를 알기 때문에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직접 와 버리면 이것은요, 믿자, 안 믿자, 수준이 아니고 목숨 걸어야 돼. 목숨 걸어야 할 문제입니다. 헌금 돈 현찰 몇 푼 준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내 목숨을 거기 걸어야 돼요.

왜? 그 십자가 피보다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에. 희생보다 무서운 건 없어요. 뭐 장사가 되니 안 되니, 여기 감기가 들려서 목이 아프니, 지금 이런 문제가 아니에요. 마라톤 때문에 오지를 못 하고,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고요, 애가 공부를 잘하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라, 직장에서 쫓겨나고 어떻고 이게 문제가 아니고, 그런 건 다 마귀에게 꽁꽁 매여서 넋두리하는 거죠.

인간은 평생 자기한테 투덜대려고 살아가는 거예요. 이래도 투덜투덜, 저래도 투덜투덜, 뭐 그리 불만이 많은지. 그게 쫓겨서 그래요. 마귀에게 쫓겨서 무서워 그래요.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입장이 난처해진 거예요. 오히려 지금 아비멜렉이 이성적이고 제대로 된 인간이에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엔 입장이 난처하게 됐어요.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여자들을 전부 다 단산시켜 놨어요. 임신을 못 해요. 나는 시시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일을 크게 벌려놔 버렸어요.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이십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내세울 건 아무것도 없어요.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게 죄송합니다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0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아비멜렉과 그 아내,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 다시 태가 열렸어요.

이런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참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 남과 비교해서 ‘나 이것 좀 할 줄 안다.’ 이랬는데 뭐 ‘변기 수리 이런 거 잘한다.’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정말 난 찌질이 중에서도 이런 찌질이가 없어요. 진짜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뭘 예수 믿고 뭘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이건 욕심이 과해도 보통 과한 게 아닙니다. 어딜 넘봐요? 자기 주제 파악도 못 하면서. 어딜 천국을 넘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을 통해 드디어 만두 속을 채웁니다. 그게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그 언약 안에 뭐가 들어오는가? 야곱의 열두 지파가 들어갑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 지파 앞에 레위 지파가 있어요. 레위 지파가 있으면서 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뭘로 구성되느냐? 율법으로 꽁꽁 묶여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참 성경이 어렵죠. 다시 읽겠습니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그냥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하면 얼마나 쉬워요? 왜 그 쉬운 말 놔두고 히브리서 7장 10절 굳이 이 말이 있어야 됩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그 만두 속, 그 율법, 그 언약이 계속해서 전개되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로? 아브라함의 자손, 혈육에 속한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삭이고, 이삭 자손이 야곱이고, 야곱 자손이 열두 지파에요. 그러니 열두 지파에 뭐가 살아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집어넣은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살아 있다는 말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이거 지키면 구원받는다,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구원받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너는 마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구원은 어림도 없어요.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아브라함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서랍 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거든요.

저주가 툭 튀어나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서랍이라면, 상자라면 그 서랍을 열 때 여는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열어도 복과 저주 가운데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 있는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복과 저주가 중첩되어 있고 같이 공존해 있다면 아브라함 안에 어디가 복이고 어디에 저주가 있느냐는 거예요.

두 개 다 있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 속에 복과 저주가 공존해 있거든요. 그럼 아브라함을 한번 조사해보자는 거예요. 어느 쪽이 아브라함의 복 쪽이고 어느 쪽이 저주 쪽인지를.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모르죠. 왜? 자기는 만두피니까 만두 속이 뭔지 모르죠. 만두 속이야 만두피를 이용하니까 자기는 어떻게 조치를 할 수가 없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저주가 뭐냐?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 모세가 나오거든요, 아브라함 자손 가운데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줌으로써 율법이 주어진 곳에 저주도 같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레위 지파가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인 하늘의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 그때 아브라함 내부에, 만두 속에, 허리에 레위 지파가 들어있었다, 저주가 들어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복과 저주, 둘 다 공존하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복은 예수님 쪽이고 저주는 모든 인간 쪽이에요. 왜? 인간은 악마의 종이니까요. 이참에 깨끗하게 정리합시다. 정리 깔끔하게 합시다.

그러면 ‘레위 지파가 제사 드리고 해서 제사장 노릇 잘 하지 않았느냐? 레위 지파의 역할이 제사니까.’ 라고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히브리서 7장 23-28절에 보면 그 율법에 의해서 제사장이 된 사람의 모든 제사에 대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23절에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율법에 의해서 열두 지파 안에서 레위 지파를 제사장 삼은 것은 그들이, 인간이 아무리 제사를 지내도 죽음을 초월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한 것은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이 되게 한 거예요. 제사 지내서 구원 못 받는다는 거예요. 왜? 그것은 제사장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취지를 완료시키고 성취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존재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율법 줘서 율법 지키도록 제사장 마련했으면 하나님이 그 제사는 받을 만도 한데 ‘안 받는다’고 된 거예요. 그 제사 드리는 인간 자체가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안 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 속에 있던 저주의 요소에요. 그렇다면 아까 그 질문, 지금쯤 하늘에 가 있잖아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가 있고, 성도들도 가 있는데 성도들은 어떻게 가 있느냐 그 말이거든요.

여기에 보면 히브리서 7장 15절에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여기 단어 하나 “별다른 한 제사장”, 별다른 한 제사장. 율법에 의한 제사장 이것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제사장이라서 그의 모든 제사가 무효가 돼요.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계통, 율법 계통 말고 제사장직을 하되 별다른, 그것과 전혀 다른 노선, 다른 노선의 제사장을 따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처음부터 준비하지 왜 율법, 제사장을 이미 마련해놓고 “그것은 아니야”라는 말을 왜 하느냐? 마귀의 정체를 들춰내기 위해서, 인간하고 마귀하고 결탁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율법을 통해서 언급해서 어떤 인간도 마귀가 대장이기 때문에 율법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선제작업이 필요했던 거예요.

다시 말해서 마귀가 “그냥 너 하는 대로 해” 이게 아니고 마귀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주관하는, 호세아의 말대로 그야말로 마귀는 주님이에요, 그걸 ‘바알’이라 하거든요. 인간의 모든 종교의 주님은 마귀입니다. 알라, 여호와, 예수, 전부 다……, 용어가 뭐가 문제겠어요, 용어가.

메시아 이용하고 신을 이용해서 자기 천당 가려고 하는데 이거 뭐 용어가 뭐가 문제겠어요? 그게 마귀 짓이지요. 그런데 그 제사장이 어디서 나왔는가? 멜기세덱 계통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멜기세덱은 뭐냐?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고 난 뒤에 전쟁에 말려들었어요. 자기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 전쟁에 포로 잡혀서 본의 아니게 조카 구한다고 뛰어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만두 속, 복과 저주가 이게 현실화될 때는 반드시 어떻게 되느냐? 전쟁이라는 형식으로 드디어 역사 속에 업적과 실적을,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어요. 전쟁이라는 형식입니다. 전쟁할 때 그 전쟁을 하게 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등장한 인물이 살렘왕 멜기세덱이에요.

창세기 14장 17절에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제사장이 멜기세덱인데 원판이 따로 있었어요. 하늘나라에 이미 제사장의 영원한 기능을 해야 될 준비된 분이 있었어요. 그분도 이 땅에 오면 인간인데 그 인간과 아담 인간하고 달라요. 기존인간들은 마귀의 종이에요. 그런데 그분은 마귀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 둘을 이 땅에서 직접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만나게 해 주실 때 그분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이 땅에서 일하느냐? 마귀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십니다. 그 전쟁을 해서 이긴 쪽이 뭘 폭파시키는가? 그동안 인간에게 압박을 가했던 이 죽음이라는 보자기가 폭파해버려요.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그걸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거봐! 내 무덤은 빈 무덤이야. 사람들이 나를 죽음에 가두려고 했지. 마치 자기 자신들처럼. 나 봐. 거기서 헤치고 나왔잖아. 죽음을 헤치고 나왔잖아.” 그런데 그 죽음을 헤치고 나온 예수님의 기능이 뭐냐? 제사장 기능이에요.

제사장 기능은 율법에 의하면 스스로 제사장 되시고 또 제물이 되셔서 죄를 사해주는 기능을 제사장 기능이 하는 거예요, 죄를 사해주는 것. 정리하면 이렇게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제사장 일인데 그것은 뭐냐? 지금 인간들이 죄 때문에, 마귀지요, 죄 때문에 어떻게 하지 못한 자를 끄집어내는데 그 원칙이 아브라함의 원칙에 준해서 끄집어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원칙에 준해서 끄집어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를 뭐라고 하느냐,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자손, 다가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에요. 히브리서 2장 16절 오늘 본문처럼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왜 아브라함 자손을 붙들어주는가? 다른 자손은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이거든요. 안돼요, 이 사람들은 안 돼요. 그런데 진짜 문제가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인지 아닌지를 어떤 식으로 스스로 판정할 수 있느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그 판정하는 방법이 뭐냐? 16절입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어요.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천사 말고 나를 구원했다, 가 아니라 천사 하고 비교해보라는 거예요, 천사 하고. 왜 하나님께서 천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을 구원하느냐 하는 겁니다. 원래 천사가 자체적으로 노동조합이 구성되어 있어요. 천사의 특징은 결속이에요. 결속인데 사탄이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천사는 히브리서 1장 14절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천사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지시대로 따르기만 해야 돼요. 그게 천사입니다. 천사들의 집단은 그런 집단이에요.

그런데 그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사탄이 반란을 일으켜서 배신하고 거기서 싸움이 벌어졌어요. 하늘나라에 내란이 벌어진 거예요. 그런데 다른 천사 미카엘의 공격을 받아서 어떻게 되었느냐? 더이상 하늘나라에서 버티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왔거든요. 내려오니까 무엇이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그 천사들의 조직체에 빈자리가 생긴 거예요, 빈자리.

그 빈자리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채우는 겁니다. 악마가 빠진 그 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사탄이, 악마가 시시한 천사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높은 천사인지 이사야 14장 12절부터 나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하늘도 보통 하늘이 아니에요. 13-15절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누가? 사탄이. 누가요? 모든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을 종으로 삼은 그 천사가. 그러면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누가 와야 되느냐? 주님께서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 넣듯이 와야 되겠지요. 그래서 하늘보다 더 높은 자리, 천사보다 더 높은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누구 자리냐 하면 하나님의 자리에요, 그 하나님의 우편 자리를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 내줘요.

그렇게 내주면서 처음 인간을 만들었던 그 창조의 취지도 함께 살리는 요량으로 그 자리를 만들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뭐냐? 악마의 종이 되었던 인간을 예수님을 보내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어디까지 올리느냐 하면, 하나님 우편까지 올려버려요. 올려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이제는 천사들이 누굴 섬기느냐? 성도를 섬겨요. 예수님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니까 구원은 무슨 문제냐 하면요, 구원은 내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 문제에요, 자리 문제.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늘에 앉혔다는 거예요. 누굴? 성도를, 성도를 앉힌 거예요. 이유가 뭐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름으로 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아브라함 믿고 복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게 너무 어렵지만 반드시 들어가야 될 꼭 아셔야 될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 혈육적이라서 꼭 아브라함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고요, 아브라함 자손은 여럿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한 분이에요, 단 한 분.

예수님이 아브라함 언약을 대할 때는 무조건 복이에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 분……,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말씀은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했는데, 그런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어요.

그 나머지는 들러리예요. 왜 그렇게 되는가? 왜 예수님만이 진정 아브라함 자손이 되어야 하는가? 원래 성도가 앉을 그 자리가 천사들을 통제하고 결속시키고 한 자리에서 모든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요. 따라서 아브라함 자손의 특징은 뭐냐? 결속이에요. 사적인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결속이에요. 그 결속을 누가 해야 되는가? 그 결속을 천사들이 하는 거예요. 천사들은 개인플레이가 없습니다. 결속이에요, 전부 다 결속. 그들은 전부 다 하늘나라에서 주님 중심으로 춤을 추는 자들이에요. 성경에 보면 천사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추는 장면이 나와요. 아가 6장 13, 14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여기 마하나임이 군무를 춰요. 마하나임이 뭐냐?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가는 길에 떼쓰리 천사를 만나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숫자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럿이에요. 여럿인데 하나같이 움직여요. 그 대목이 잘 나와 있는 곳이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오는 천사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바퀴가 있는데 명령에 따라서 바퀴가 딱딱 그 지시대로만 움직여요.

이게 바로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도 주님의 지시 하나에 딱딱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공통점은 뭐냐? 쪼다예요, 쪼다. 아브라함 같아요, 아브라함.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냥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마치 천사와도 같아요. 아브라함이 자기 마누라 예뻐해서 탐낼까 싶어서 지레짐작 겁내서 “누구십니까? 마누라?” “아니요, 사촌 누이동생입니다.” 사촌이 맞기는 맞지요.

그런 식으로 빌빌거리면서 가던 그 아브라함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다. 손 털고 이 쪼다 이제 갑니다. 바보 등신같이 아무것도 아닌 나, 왜 저를 천국 보내시는지? 서랍 열면 저주가 나와야 되는데.’ “너 나와. 내가 희생할게.” 희생하신 분이 서랍을 여니까 복만 나오는 거예요. 복만 나오니까 아브라함 자손 그 외에는 뭐냐? 저주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양자얽힘에 의해서. 이쪽에서 파란 공 뽑으면 저쪽에서는 무조건 빨간 공, 이쪽에서 빨간 공 뽑으면 저쪽은 무조건 파란 공이에요. 빨강, 파랑, 선거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정치적 발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겁니다. 희생은 우리가 무서워 하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희생입니다. 예수님이 희생했다는 것.

그 사랑, 그 사랑 앞에 우리는 바보가 되어도 상관없어요. 그때는 너희가 울었지만 이제는 너희 입가에 미소가 있을 것이다. 웃을 것이다. 모든 눈물을 주님에 의해서 씻어주는 그 날만 여러분은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이 땅에 나그네라는 사실을…, 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뭘 할 줄을 알아야지요. 뭐 한 게 있습니까, 할 줄 아는 게 있습니까?

앞으로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아무것도 못 하는 우리를 그냥 천사처럼 복의 하나의 단체, 복된 단체의 결속된 일원으로서, 집단으로서 우리 주님 앞에 춤추면서 섬길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덕분이라는 말조차도 정말 황공스럽습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희생하셨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하사 그동안 우리가 철저하게 마귀한테 농락당했음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그 기쁨이 충만한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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