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당장 죽이셔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나, 그 나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믿던 ‘나’가 있었다.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저와 함께만 해주세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 그런 거 바라지 않습니다. 함께만 있어 주세요’ 참으로 나에 대해 무지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에 이런 망상스러운 꿈도 순수한 양 품어보았다. 이것이 개체에 담긴 교만과 오만이고, 악마를 위한 순교자의 모습인 것을 몰랐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나를 오해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혹시 은혜를 받아 자신이 괴물같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어도, 베드로의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눅5:8) 주님이 나를 떠나도록, 더러운 나를 떠나도록 부탁드리며 내가 끝까지 지키고자 한 그것이 바로 악마의 착함, 자기의다.
떠나라고 했는데 친히 끌고 가시고 배신하고 떠났는데 다시 찾아와 주는 분, 이렇게 한 발짝도 자기의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뚫고 찾아와 주시는 그분이 사랑의 본체이시다. 진짜 주의 사랑이 찾아왔다면 그 사랑은 먼저 나를 버리게 한다.(눅5:11, 요4:28)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다음은 나를 버리고 좇은 예수님을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자로 만드신다. 그토록 사모하던 예수님을,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던 하나님을, 메시아를 더는 기다리지 않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이다.
나를 향한 미움이 충만해지고 나조차도 나와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이미 죽었고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비존재가 직접 찾아와서, 내가 나를 보는 자기 응시의 결박을 끊고(사58:6), 유일하게 응시해야 할 타인으로 나타나셨을 때, 이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자기부인이다. 친히 오시는 분을 만난다는 것은 먼저 내 쪽의 그리움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내가 기다렸던 그분이 나와 연루된 채 죽어야 하고, 더이상 내 지식에서도, 내 기억에서도, 내 마음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살고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고 난 후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 난 후에 그분의 죽음에 점령당한다.
십자가에 처참히 죽었기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았고, 그때 죽으신 분이 직접 찾아오셨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유대인의 그 기다림이 자기의의 최고치를 드러내며 죽였던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기다림을 절단하신 뒤에 다시 오셨다. 결코 믿은 적도 없고, 기다린 적도 없고, 내세울 의로운 것도 없고, 그저 저주하며 떠난 것밖에 없는 본래적 모습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그분을 향한 기쁨과 동시에 근심이 밀려왔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방적 무조건적 사랑을 언급하셨다.
수제자 베드로가 인류를 대표해서 예수님께 퍼부은 저주를 도리어 축복으로 바꾸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나타날 때, 이제 육적인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저주는 공의로운 심판이 된다.(막11:21)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고 일방적으로 저주할 수도 있는 권능이 하나님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질서로 만물이 통일된 예수안에서 뿜어져 나온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저주를 받는 이유는 자신이 주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마지막 희망을 인간이 아닌 마귀가 대신해서 단단히 쥐고 있기 때문이다. 악마가 알려준 주를 사랑하는 그것은 주님이 알려주신 그것과 같지 않다. 이 세상에 없던 것이기에 인간이 생전 처음 보고 느끼는 어떤 것을 어찌된 일인지 첫눈에 서로 알아보게 되고, 그제야 내가 주를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자기 통제력을 잃고, 파괴의 손길에 나를 내어드리고 내 자리를 내어드리며, 흙으로 돌아가기를 기뻐하게 된다.
내가 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있기 이전에 사랑이 먼저 교통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주님의 사랑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다 안다. 이미 다 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이 입의 주인이 마음의 주인이 친히 통제하신다는 그 사실이 왜 놀라운지도 모르고 놀랍고, 왜 고마운지도 모르면서 고맙기에, 성도는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이 말밖에 할 게 없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만 제 더러운 마음을 다 아십니다”(요21:17)
성도 안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꿈을 구약에 이스라엘이 샘플이 되어 미리 앞서 꾸었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자신들과 함께 계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믿었기에, 모든 게 괜찮고 어떤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그런 아름다운 꿈을 꾸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 그걸로 충분했다. 광야에서 벌어진 선조들의 추한 모습조차도 타산지석 삼아, 더욱더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순전한 마음으로 극한 믿음을 다져갔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약 이스라엘의 전쟁과 분쟁의 역사 속에서 그 정신은 더욱 구체화 되어갔고, 어떤 혹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다렸다. 오시겠다고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셨던 것을 그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을 내 백성, 내 아들이 되게 하리라’라는 약속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전달되었고, 율법과 계명을 주시며 지키라 하셨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율법의 조건적 사랑에 갇혀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낱낱이 폭로 당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육(肉)임을 인정하지 못했고 여전히 망상에서 깨지 못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을 입은 선지자들은 깨어나야 했다. 선지자들은 성신이 임했기에 영으로 소통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이스라엘이 품은 소망이 아름다운 꿈이 아니라 잔인한 꿈임을 미리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향한 대상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그 이유 하나로, 약속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그 이유 하나로, 자기들의 사랑과 헌신과 목숨을 건 진실을 받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로,(창4:4~5)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죽일 장본인이 된다. 진짜 하나님의 마음과 연락된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했을 때(막11:14),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영이, 악령이 반응했다. 주님의 저주가 무조건 적이고 합당한 대우라는 증거가 육이 말라 죽으면서 가림막이 치워져야 영적 세계가 비친다.(막11:21) 마귀의 영이 주의 말씀 앞에 발악하는 것이 나타난다.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체화 된 죄의 샘플 이스라엘, 이스라엘에서 죄가 더욱 구체화 된 유대교, 그 유대 사회에서 더욱더 구체화 된 열두 제자들 속에 사탄, 이들은 속에 담긴 악마의 거짓 믿음을 응집시켜서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를, 참믿음을 없앴다. 그러니 믿음은 없어야 한다.
진짜 믿음이 오시기 전에 가짜 믿음을 유포할 천사가 자기 처소를 이탈해서 먼저 땅으로 내려왔고 인간의 몸을 점령했다.(유다서1:6) 지혜로운 악마는 하나님이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창3:5) 아담의 몸을 차지한 후, 율법을 지키는 주인공으로 행세했다.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위해 예비한 장소(신12:5, 신12:13~14, 눅13:33, 35)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이 아버지의 품인 처소를 떠나 아들의 신분으로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비워내고 종의 형체로(빌2:6~8), 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두실 자리인 몸으로 오셨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신 복종은 예수님이 피로 값을 치르고 잉태할 성도가 장차 남편 되실 신랑에게 하게 될 복종의 본보기이다.(엡5:22) “정녕 죽으리라”라는 율법에 복종하시기 위해 하나님 속에서 분리되신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신을 입으셨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그러니까 유대인이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오셨으나,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이 응축된 고귀한 기다림을 묵살하는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은 자기의 목을 쳐서 죽여줄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기, 그들의 애타는 기다림은 결국 하나님을 죽이고자 하는 기다림으로 들통났다.
육은 영과 통하지 않고, 영은 영으로만 소통하는 증거는 오직 십자가뿐이다.(고후5:15) 이 땅에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는 게 아니고,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도 아니고, 사람이 악마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영과 영이 내부에서 부딪히고, 영을 담은 육체와 육체가 부딪히는 현장만 있다. 그곳에서 표출되는 성도의 모습은 말라비틀어진 무화과나무와 같다. 저주가 마땅한 모습으로 육의 결국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말씀 성취인 십자가 사건이 반복 재현되는 장소가 된다.
신이 되고자 땅에 내려와서 마귀가 장악한 율법인 ‘지키리라, 나를 막으면 정녕 죽이리라’가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인 “너희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이다, 정녕 죽으리라”와의 충돌이 십자가였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들을 ‘주’로 만드시는데 악마를 충분히 활용하신 것처럼, 이제도 성도의 육체를 사단에 매이게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세상에 충만함을 증거하도록 이용하신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터럭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그때까지 육체는 죄에 매이도록 하면서 말씀이 스스로 자유롭게 활동하신다.
성경의 동일한 율법을 가지고 무슨 근거로 마귀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으로 나눌 수 있는가. 차이를 만드는 것은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리’이다. 어느 자리에서 왔느냐. 너의 처소는 어디냐? 하나님 내부에서 온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처소에 있는가? 하나님 외부에서 온 사탄이 관찰하며 해석하는 가상의 처소에 있는가? 이 땅에서 악마의 가짜 처소의 위력은 성령의 처소까지 모방할 태세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도 미혹하려 할 정도로 강하다.(막 13:22)
성령이 육체를 먼저 매어놓고 홀로 활동하시는 결과를 보이도록 쓰이고 있는 몸이 주님의 사랑에 매인 주의 지체이다.(딤후2:9) 그러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사람의 행동, 표정, 입에서 나오는 언어, 이 겉모습으로 복음인가 아닌가를, 믿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려 한다면 그 판단으로 이미 자신은 정죄 받았다. 말씀의 능력을 알아보는 것은 자신도 죄에 매었음의 고백을 경유해서 나오기에, 그 입에서 판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나온다.(고전4:19, 고후5:16)
죽음이 죽음을 전달하는 경로를 전도라 하고, 주님 전도의 증거는 서로의 발을 씻기는 형제 사랑 외에는 없다. 성도는 온몸이 주의 보혈로 깨끗하나, 여전히 육신으로 발을 딛고 움직여야 할 이 땅에 매인 삶은 늘 마귀에게 지는 모습, 흉악한 모습, 흠모하지 않을 모습으로 복음과 함께 등장하기에, 언제나 오해와 곡해와 선악적 편견의 공격에 노출된다. 형제가 형제를 알아보기 전에 소통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성도의 연약함을 서로가 품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용납하게 된다.
이 세상은 이제 불로 태워질 날을 위해 예비된 채, 이미 승리한 주의 전쟁의 남은 불꽃을 태우며 사라지는 마지막 전쟁 중이다. 영적 전쟁 속에 복음과 충돌한 자아가 가루가 되어 거처도 없이 세상에 흩뿌려지고(호1:4), 너는 긍휼을 입지 못하고(호1:6),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호1:9)는 메시지를 미리 받은 육체를 통해서만 저주안에서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이 증거될 수 있다.(수8:30, 단3:25) 내가 느끼고 아는 것이 아니라, 보내진 그곳에서 악마가 알아보고,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정녕 죽인다.
잔인한 꿈이 실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꿈인 것을 베드로도 알았고 사도바울도 알았고 성령이 임한 자들은 안다. 죄인 중에 괴수가 마침내 누구를 바라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나’라는 패역한 인간을 어떤 사랑으로 죽여주셨는지를 알았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리스도에게 감사한다. 야수가 미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나듯이, 기름부음의 빛이 괴수를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로 바꿔 치신다. 성령이 피를 앞세워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의 뼈가 박히고 주님의 살을 입혀서 처소로 임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채우시기에, 성도는 이미 예수안에서 아버지와 연결되고 하나가 된다.(겔37:7~8, 엡2:21~22)
댓글
이근호 “예수님을 죽이고 난 후에 그분의 죽음에 점령당한다.” 살아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에 접근하는데 최대의 장벽입니다. 살아 있기에 자신의 행함을 도저히 부정 못하고 믿음 대신 자꾸 행함을 제시하게 됩니다. 고마운 것은 나의 세상 생활이 결국 부실하게 끝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죽은 자’로서 출생했음을 되풀이 해서 확인해 주시는 말씀에 감사하게 됩니다.
댓글
임청일 실제로 일어난 십자가 사건도 구체성이 빠져버리면 지식 전달로서의 복음 자랑일 수 있음을 무수히 경험한다. 내 자신의 체험으로만이 아니라 남의 글도 구체성이 없으면 목사님의 설교와 같은 새로움이 사라진다.심지어는 반복되는 목사님의 음악예시까지도 이젠 그만! 하는 나 자신의 반응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악마가 나를 장악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의 순간이 아니면 복음을 지식으로 무장한 적그리스도로서의 내 자신을 보며 그것이 회개나 재충전의 기회로가 아니라 당연한 나의 현실임을 기쁨과 감사로 여길 수 있음만을 감사할 따름이다.
'송민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몸(몸을 지키는 자아) (1) | 2024.05.21 |
---|---|
복음에 대한 반응 (0) | 2024.04.25 |
자작극의 결말 (1) | 2024.01.15 |
저주 안에 담김 사랑 (1) | 2023.12.24 |
강제 조치 (1) | 2023.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