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저주 안에 담김 사랑

아빠와 함께 2023. 12. 24. 19:05

얼마나 마귀에게 데이트폭력을 더 당해야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갖고 놀며 학대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까. 알 길이 없으니 폭력은 당한 적이 없고 오직 사귐만 있었고 내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보호로만 느껴진다. 길이 없으니, 그것이 다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착한 마음이 작동하고, 그것이 가장 추악한 마음인 것을 모르기에, 살인강도 바나바는 넓은 마음으로 품을 수 있어도, 나를 악하다고 들쑤시는 예수는 결단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스스로 파멸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욕망이 ‘나’라는 허상을 강력히 통제한다. 진실에서 눈만 떼고 말씀에서 등만 돌려주면 그 대가가 너무 달콤하다.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하고 평화의 기쁨까지도 누려볼 수 있다. 나의 일에 몰두하면 바쁘고 건전한(돈이 되는) 보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두려운 것은, 이런 상태가 영적으로 악마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중인 것을 알게 되는 어떤 틈이 생겼다는 것이다. 틈은 사랑스럽지도, 거룩하지도, 신비스럽지도 않다.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역겹고 거북스러운 모습이기에, 고마움이 먼저가 아니라 두려움이 먼저다. 내가 나를 의심하게 되는 사건들이 미사일처럼 말씀을 타고 날아와 그 틈을 벌릴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이 정도로 마귀에게 고통이 되는가. 내가 고통받지 않으려면 낯선 타인에게 대신 고통을 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살려면 타인은 죽어야 한다. 타인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말 그대로 외지인이다. 내부인을 지키기 위해 외지인을 공격하는 것은 세상 윤리가 다 동의하는 정의로움이다.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마귀는 철저히 나를 단속시키고, 자칫 진리로 눈이라도 돌릴라치면 사정없이 공갈 협박이 들어온다. ‘딴 놈에게 눈 돌리면 죽여버린다.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이건 네가 잘못하는 거야. 알지?’ 사실상 악마는 공갈 협박은 해도, 자신을 가려주는 거처를, 자신의 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공갈이다. (마12:26)

그러나 외부의 낯선 침투가 공갈을 현실로 바꾸며 밀고 들어오기에, 진짜 내가 찢길 수 있음을 육신이 감지하기 시작한다.(마12:28) 악마가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임하면, 마귀는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았던 애인을 발가벗기듯 갈기갈기 찢으려할 것이다. 더이상 마귀가 쓸 수 없으니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악마의 퇴거할 날이 온 것이고, 귀신은 순순히 자신의 거처를 내놓지 않고 발악한다. (눅9:39, 42) 고통스럽게, 때론 애절하게, 자신과 헤어지면 결국 죽는다는 극한 죽음의 공포를 맛보게 하며, 인간의 마음에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며 최후 항전을 한다.

성령이 음부의 불같이 임할 때, 그것을 사랑이라고 단박에 알 수 없다.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고 저주스러운 모습이다. 여전히 나의 잔재가 남아서 나의 죽음이라는 착각이 밀려오면서 낯선 한 분의 죽음을 가린다. 불에 다 타고 남은 재까지도 흔적없이 다 날려갈 때까지, 성령의 바람은 쉬지 않고 분다. 매서운 책망의 회오리처럼 자꾸 위를 보게 만든다. 이 세상에 있던 자들이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은 성도로 거듭날 때의 모습은,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서 빼내실 때와 동일한 방식이다. 마치 사자가 택한 것을 얻기 위해 움키고 찢고 밀고 들어오듯이, 반드시 저주의 자리로, 예수님의 찢기신 상처 속으로 참여하게 하신다.(수6:20, 요20:19~20, 27, 계4:5)

이 상황에서 뭘 의식해서 준비하고 방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태는 붉은 줄과 함께 있는지 여부를, 인간보다 먼저 있었던 십자가 상처의 유무를, 이미 다 이루신 완성이 빛으로 비추시는 것만 남았고, 개개인의 윤리 도덕이나 성품과 행함은 무용하다. 그러니 마음껏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발버둥 치며, 흘러나오는 모든 것을 내보내는 수밖에 없다.

나의 뜻대로 되면 그쪽으로 계속 가면 되고, 뚫렸다면 밀고 들어오신 분에게 사로잡힌 채 통제받는다. (고후10:5)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증상도 포장이 불가하게 만드는 성령의 능력이 더 큰 힘으로 제압하고 누를 것이다. ‘두려워 말라. 떨지 말라. 그 모든 증상이 너의 것이 아니니 다만 너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드러내라. 추잡스럽고 흉악한 착함의 본 모습을’

이 지긋지긋한 폭력에서 해방시켜주는 성령의 책망이 왕왕거리는데, 들을 귀가 둔하니 ‘이미 다 끝났다’라는 최후의 나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초라한 변명을 하며 중얼거린다. ‘내가 악마에게 강간당한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사랑을 나눈 것을 강간당했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런 식이면 함께 지옥 가겠습니다’ 성령이 나를 변호해준다 해도 내가 오히려 마귀를 두둔한다. 내가 마귀이고 마귀가 나인 것을 인정할 수 없으니, 나는 나를 부인할 수 없다.

진짜 남편의 죽음이 찾아와서 품 안에 못처럼 박혀주셔야 내가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되고, 내가 사랑하는 애인이 악마였음을 알 수 있다. 사기극의 전말을 알고도 진짜 남편에게 순순히 돌아갈 육체가 아니다. 이미 주의 사랑 안에 있음을 느끼기엔 육신에 묻은 초등학문의 때가 여전히 두텁다.

자아가 허무함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지고 그 사이로 사랑만 비치도록, 성령은 반복해서 십자가 법정으로 나를 들이몬다. ‘당신은 애인의 사주로 진짜 남편을 죽인 것을 인정합니까? 당신은 애인에게 강간당한 것을 인정합니까? 당신은 더 이상 사랑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당신은 개보다 못한 가치없는 자인 것을 인정합니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지면서, 말씀은 사건의 틈에서 스스로 등장한다.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전16:22) 저주를 받지 않으면 진짜 주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도달하지 못하기에, 저주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사람은 저주받지 않으려고 주를 사랑하는 것만 할 수 있기에, 우리는 주를 사랑하면 안 되는 자들이다. 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하는 것은 사기와 기만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주를 사랑할 수 없음이 드러나는 사건이 주님의 일방적 사랑의 증표임을 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 했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처리하시며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고스란히 남게 해주시고, 우리를 그분의 사랑 자체가 되게 하신다.(빌3:8, 고전9:18) 쓰레기가 사랑이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벅차면 괜한 세 치 혀 놀리지 말고 그분의 사랑이 권하는 그대로 찢어지면 된다.(고후5:14)

하나님이 개입할 틈조차 주지 않으며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하려는 완악한 인간을, 하나님은 철저히 이용하시고 그들의 악함을 재료로 사용해서 스스로 틈을 만드시면서, 그 속에서 피의 사건만 분출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홀로 두지 않으시는 사랑은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질투와 같고, 하나님의 질투는 세상에서는 저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저주 속에서 사랑을 생산하시는 사건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만들어졌고, 그 공간의 실체는 최종적으로 한 분의 품,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몸에서 만들어질 나라였다.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서 이끌어서 만드셨고 함께 하셨던 나라인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동거를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동행하심 자체가 죄의 선봉에 설 수밖에 없고 교만의 극치가 노골적으로 들통나고, 주어진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악함이 모질게 추궁받게 될 공간에 놓인 것이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이 회개해야 할 극도로 악한 죄가 될 것을 알지 못했기에,(눅3:8) 그렇게 죄가 심히 죄 되는 증거가 선지자들의 무덤인 예루살렘, 언약의 핵심부에서 예수님을 통해 만들어졌다. (눅13:33~35)

죄의 실체를 만천하에 까발리는 것이 십자가인 것을 누구나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안다고 해서 스스로를 돌멩이보다 못한 자리로 돌이킬 위인은 없다. 웃사가 자신이 나무 상자보다 못한 돌멩이임을 알았더라면 감히 언약궤를 만지지 않았을 것이다. 웃사는 언약궤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이성의 지시대로 언약궤는 흔들리면 떨어지는 사물로 인식하고 반사적으로 언약궤를 잡았다.

언약궤는 살아있고 자신은 죽어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웃사는 움직였고, 언약궤의 움직임이 그의 움직임을 죽음으로 바꿔주었다. (삼하6:6~7) 성경을 보면서 ‘나는 이제 스스로를 돌멩이로 여기겠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자체 겸손을 비웃으며 죽음의 사건이 덮쳐주는 것이 복이다. 의식하든 말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죽음을 비치는 틈을 만드는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낙원을 잃은 아담의 상실감을 장착한 채 태어나고, 무엇이 주어지든 자신 안에 상실의 구멍을 채우는 데 이용하게 된다. 받은 것이 자신을 상실시키고 무너뜨릴 율법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간교하게도 주어진 율법을 세상의 뜻에 맞는 지식으로 바꾸어 열심히 행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롬10:3) 내가 원해서 그러기로 선택했기에 세상의 물이 나를 채운 것이 아니라, 구멍 난 물건을 물에 담그면 자동으로 구멍이 물로 채워지는 것뿐이다. (창8:21)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그곳이 되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고, 그렇게 아버지의 품에서 버려지시어 세상에 잠시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만졌고, 정말 그분이 세상에 있었기에 제자들은 메시아를 자신의 상실의 구멍에 채우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교만의 선봉에 서게 하는 원리는 열두 제자들의 선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허락하시고 망함을 보이게 하시는 원리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정도로(막 10:28),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눅22:33) 최극단의 쾌락이 눈 앞에 나타났고, 그런 보배로운 분을 알아본 자신들이 뿌듯했고, 주저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세상이 왜 악한지가 밝혀졌고(요15:22~23)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신앙의 모습이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단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수제자 베드로가 샘플이 되어 투명하게 비춰주었다.

주님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걸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붙이는 마지막이 어떠한지를 베드로를 통해 고스란히 노출되게 하셨고, 말씀은 오직 주의 이름이 스스로 이루어감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검을 가지라고 먼저 허락하심으로(눅22:36),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본성이 검을 가지고 검으로 망할 자였음을 들통 내셨다.(마26:52) 베드로가 검으로 만들어낸 결과를 다시 돌이켜 주시면서, 베드로가 망할 자리를 어린양이 만드실 죽음의 자리로 바꿔주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다.(요18:10~11)

예수님의 싸우시는 싸움은 아버지의 뜻대로 주의 이름이 놓일 공간을 예수님의 몸을 통해 만드시는 것이었음을 성령을 받고서야 알게 된 베드로는, 이제는 예수님의 영에 이끌리는 주님의 성전으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행로로 흘러갔다. 자신이 검으로 망해 마땅한 자였고, 그런 자신이 어떤 사랑으로 건짐을 받고 주님의 죽음에 합류되었는지를 증거 했다.(눅22:32)

‘(예수님이 세상에 있다고 믿으며) 주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요일2:15) 세상을 품은 자들이 주를 사랑하면 저주를 받는다. 예수님을 품은 자만이 주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그녀의 뜻도 마음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한 극한의 사랑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버려짐을 통해 세상에 오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에는 주를 사랑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게 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려짐으로 무사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처럼, 성령을 받은 그들도 철저히 세상에서 미움받게 하셨고, 버림받게 하셨다.

주님은 더이상 세상에 있지 않은 분이 되셨고, 이제 주님이 친히 사랑하는 자들을 찾아와 깨우시고, 흉악한 자기 자신과 결별 되는 사형선고를 내려주신다. 재판장은 예수그리스도, 증거물은 그분의 피, 그런데 정말 기이한 일은 형벌이 내려져야 마땅할 십자가 법정에서 기억상실이라는 엄청난 선물이 주어진다. 기억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은 하나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빼앗으신다. 과거도, 가정도, 자식도, 돈도, 건강도, 목숨도, 그리고 죄도 모조리 예수님이 다 이루신 율법완성 쪽으로 명의를 변경시키신다.

이제는 이 몸 안에 생명이 기억하는 주님의 일생이 풀처럼 시들어가는 육신을 통해 반복재생된다. 원래부터 죽어있던 시체 안에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분이 담겨있기에 그의 말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발생 된다.(마17:5) 세상을 품었던 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생명을 잉태하게 되니, 자존심 있음이 나 없음으로 교체되고, 자신은 비유이고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기에 더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함이 된다.(눅1:38)

세상에 있을 때부터 혼자가 아닌 자들의 출몰은 철저히 혼자 사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며 쌍둥이처럼 한 조를 이루어 사건을 생산한다. 실상은 혼자 살면서 주인이 있는 척 자작극을 벌이는 자들의 악함이 드러나면서 주인과 항상 함께 있었던 자들이 잠시 불빛처럼, 별처럼 반짝거린다. 악함은 실체가 드러나고 주인이 있는 자들은 도리어 비유로 사라지며 주인만 드러낸다. 성경에는 홀로 있는 자와 낯선 타인과 함께 하는 자의 충돌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그 틈을 비추는 예수님의 스토리로 가득하다.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겼다.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할 때, 한 달란트 맡긴 종에게서 한 달란트를 그대로 받자, 악하고 무익하다는 죄명으로 내어쫓았다. 물론 원금에다 플러스알파의 수익률을 창출 하는 것이 더 충성된 일이지만, 원금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되돌려준 것이 미련하고 게으르긴 해도, 악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할 중한 죄일까.

한 달란트를 그대로 남긴 종의 죄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는 주인을 두려워했고 악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자칫, 한 달란트마저 잃어서 죄인 취급 받는 것이 싫었다. 달란트가 손상될지도 모르는 일을 굳이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았고, 이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 즉, 손해 되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종은 자신이 종이라는 주제를 망각했고, 주인의 관점으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없다.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며 주인의 마음을 판단했을 뿐, 한 번도 주인과 같이 있지 않았다. 그는 항상 혼자였다.

세상에 복을 한껏 누리며 열심히 살고있는 부자의 집 앞에서 머물렀던 거지 나사로도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었던 충성 된 종이였다. 부모도 없고, 집도 없고, 건강도 없었다. 그는 거지가 되어 거리의 떠도는 개들에게서 조차도 그의 몸을 지키지 못했다.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온전히 주인의 일하심만 보여준 표준 모델이다. 거지 나사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름의 도우심만 믿고 의지했다. 거지 나사로는 혼자가 아니었다. 육체를 벗었을 때, 그가 항상 어디에 연결되어 있었는지가 참 현실로 드러났다. (눅16:22) 세상 속에서 거지 나사로는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없었던 틈 속에서 출현한 사건이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은 모두가 그들이 본 그대로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현실을 직시한 10명이 자신들이 메뚜기 같다고 말하며 그 땅 거민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자작극을 벌일 때, 난데없이 등장해서 장대한 거민들을 밥이라고 외치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주님이 만드신 사건의 재료로 말려들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은 오직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만 한다고 주장하는 2명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할 건데...’(민14:8~10) 이렇게 망할 줄 알았더라면 시작도 말 것을, 차라리 애굽에서 머무르며 주신 달란트 고이 싸서 잘 간직해 두었으면 본전은 찾았겠고만, 광야에서 했던 모든 수고의 대가는 고사하고 자신들이 이끌려 가는 곳이 죽으러 가는 자리였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룻이 이 광경을 보면 도리어 이스라엘을 책망할 것이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고 택함에서 제외된 이방인이다. 그러나 그녀가 시어머니에게 전한 계시는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만들고 그들을 시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기1:16~17) 룻의 마음은 어머니의 언약과 함께였고, 그 언약 안에서 죽기를 기뻐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장정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아말렉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다윗을 따르던 자들이 분노한 대상은 아말렉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다.(삼상 30:6) 하나님을 경외하고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자신들이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허상이 되기 때문이고, 그들이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은 없어야 하고 자신들만 있음이어야 했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려는 속에 감춰진 본성이 난데없이 튀어나왔고, 자신들과 같은 실상의 모습을 한 다윗을 향해 분노가 분출되며 사건의 틈을 만들어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불신자이고 그들은 하나님 없음만 계속해서 증거 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언약 있음이 스스로 밝혀나가고 있었다. 사람과 언약은 합치될 수 없다는 십자가 사건의 실루엣이 쉬지 않고 이스라엘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윗이 여호와를 의지하여 장정들 600명과 함께 가족들을 도로 찾기 위해 떠났을 때, 난데없이 600명 중 200명이 피곤해지는 일이 벌어지고 그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건의 재료가 된다. 400명이 아말렉과 싸워 이기고 가족들과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아 올 때,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고 고백했지만(삼상30:20), 결국 그들의 거짓말과 자작극이 들통날 틈이 싸움에 참여하지 못했던 남은 자 200명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200명을 미워하고 탈취물을 나누기를 거부했던 악한 자들은 바로 다윗과 함께했던 자들이었고, 여호와의 보호하심을 받았고, 승리를 주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알아야 했던 형제들이었다. 자신들의 것은 원래 없고 모든 것이 뜻밖의 선물로 받은 것이기에 참여한 자나 머무른 자나 분깃이 일반이 되는 것을 유일하게 알았던 다윗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로 삼았다. (삼상 30:24~25) 인간의 본성상, 자기의 공로를 무로 돌리고, 일한 자나 일하지 않은 자나 똑같다고 여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계시대로, 이스라엘에 저주를 추가하듯 율례를 추가하여 심판의 증거가 계속 드러나게 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언약을 부정하시고 다윗 언약으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왜 율법으로 사람이 될 수 없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은 받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언약을 파하고, 돌로 치고, 찢으며 언약에 머무르기를 거부했다. 기이한 일은,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틈을 만드시는 재료로 쓰인 것이 도리어 말도 안 되는 기적이다.(렘31: 32)

그리스도의 때에, 주 예수의 날에, 말세에 부어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언약 안에 머무르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난다. 그들에게 더이상 거짓도, 교만도, 정죄도 불가능한 나라가 임했기에, 그들은 무엇을 해도 침노하신 분의 사랑을 표현하는 몸짓이 된다. 하나님의 십자가 카메라가 캡쳐한 한순간,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는(욥1:8) 이 완전한 모습만이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모두 토로하면서, 자신에게 왜 천국이 합당치 않은 지를 증거 하고 저주의 자리로 합류할 때, 그 안에 담긴 순전한 예수그리스도만 드러나게 하는 십자가 사건의 재료들이, 바로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이고 예수님으로 옷 입은 언약의 존재이다. (눅15:22)

 

댓글

이근호    “죽음을 비치는 틈을 만드는 사건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죽음을 미리 맛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악마에게 맨날 진다. 악마는 인간보다 인간의 미래를 아니까. 성령님은 성도의 미래를 현재로 가져다 주신다. 이래서 악마는 성도에게 맨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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