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자작극의 결말

아빠와 함께 2024. 1. 15. 17:32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으면서 빼앗기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복음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내 꼴이 우습다. 귀신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믿고 떠는데(약2:19), 당당한 건지 뻔뻔한 건지 정신이 없는 건지, 내 것은 건재한 채로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서 나를 보충하고 키워보겠다는 심보가 멸망하는 짐승의 모습을 방불한다.

이런 일그러진 마음에는 스테로이드 약도, 약침도 소용이 없다. 구안와사로 외형이 무너져내리는데 균열 된 막의 틈새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은 존재가 접근해서 얻은 뜻이 아니다. 무엇에 접속되었는지, 나와 언어가 분리되며 나를 배제하고 말이 스스로 들락날락 보이지 않는 분의 목소리를 터뜨리는 모습은 사건의 봉오리가 톡 터지듯 곱다.

말씀의 출현은 나의 전쟁으로 얼룩진 커튼을 걷어 젖히고 이미 있었던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을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빼앗는 작업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방어가 팽팽하다. ‘피곤하다, 내용이 어렵다, 허리가 왜 이리 아프지, 싸우고 온 남편은 지금 화가 풀렸나...’ 이 모든 뜻을 하나로 뭉치면, ‘복음 너! 내 속에 들어오지 마’라는 충돌의 표현이다. 저항해도 귓구멍을 쑤시고 고막을 찢을 기세로 밀고 들어오면, 그제야 나와 상관없는 전쟁에 말려든다.

자아의 막이 찢어져야, 자아를 사칭하는 귀신의 최후항변이 들린다. ‘나, 여기 왜 있지?, 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 나, 나...’ 끝까지 내가 나를 고수해줘야, 막 뒤에 숨은 마귀가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마귀의 거처가 파편화되면 더이상 있을 곳이 없기에 필사적인 항전을 하는 모습을 ‘나’라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은 나의 증상으로 해석한다.

늪에 빠지면 발버둥 치지 말고 몸에 힘을 빼고 몸의 표면적을 넓힐 수 있게 누워서, 침착하게 천천히 땅 쪽으로 움직이면 된다는 지식 속에는 인간의 생존에 이로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뜻이 담겨있다. 사는 것이 의미있다는 있음은 있어도, 인간이 살아남는 것이 의미가 아니라는 무의미는 없다. 여전히 여기 지금 생생히 있는 이 뜻이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 죄라는 참뜻을 가린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복음의 비밀이 빠진 하나님으로는 인간이 살려고 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한다.(롬1:21) 창세 전 비밀이 배제된 채로는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알려고 할수록 도리어 그 마음은 미련해진다. 귀신도 알고 떠는 한 분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일한 사람,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행17:31)

그러나 사람은 내가 ‘나’라는 커튼의 무늬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나에게 중요한 거, 나에게 복음인 거, 그리고 나의 기쁨을 경유해서 하나님의 것으로 해석한다. 말씀과 씨름하며 단단히 휘장을 움키고 나의 뜻을 사수하려는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커튼을 찢으시고, 나의 이름을 빼앗아가시는 축복은 아무나 만날 수 없다. (창32:26) 자기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폭력을 가하고 이겼는데, 진 상대를 붙잡고 ‘제가 패배했습니다. 부디, 저에게 축복해주세요’라고 고백하는 것이 사람의 고백일까. (눅23:42, 행9:5, 행16:30)

아무 저항 없이 평온하게 말씀을 들었다 해도, 주님의 선택이 담긴 막들은 반드시 주를 증거 하는 전쟁터가 되게 하신다. 편안하게 말씀을 듣고, 그날 밤 편안하게 잠들기 전에, 편안하게 메세지를 클릭하다가, 주님의 피싱(phishing)에 걸려든다. 주님이 내부를 해킹하고 나만 알고 있는, 또는 나도 모르고 있었던 기밀을 끄집어내신다. ‘다 털리면 어떻게 하지...다 빼앗기면 어떻게 하지...나 망하면 어떻게 하지...’

강의를 통해 창세 전에 나는 없었고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말씀의 일 하심만 있다는 것이 믿어지며 자기통제가 제법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평온함은 온데간데없고, 창세 후의 치열한 생존 바닥에 던져진 시체가 좀비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도 없으면서 두려움까지 느낀다. 누구의 두려움인가. 주의 기쁘신 뜻이 나에게 넘어오면 왜 한결같이 썩고 변질한 음식 같은지. 주님의 배달 사고를 추궁은 해도 내가 비정상일 거라는 생각은 상상 속에도 없다.

다들 자고 있는데 홀로 화장실에서 해킹을 막을 대책을 찾느라 2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통화를 한다. 전화선을 타고 넘어온 해결방법은 ‘핸드폰 초기화(reset)’ 이것저것 끌어모았던 나에게 유용한 정보들(전화번호, 계좌번호, 비밀번호, 생활지식...)이 다 없어지고 전화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폰의 해킹은 막았지만, 주님의 해킹은 성공했다.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 폭탄을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없애기 위해 폭탄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다. 주님의 보이스피싱 작업에 말려들어 내가 초기화되는 과정에서 이미 내재 되었던 진짜 나 이신 분의 정보가 압축이 풀린다. 기쁘고 감사할 겨를이 없이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온다. ‘누구냐? 너? 아니, 나?’ 나는 내가 아니다. 이 질문이 오기 전에 정답이 미리 설치된 자는 복되다.

아담은 아담 자신을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충족되는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보호처가 먼저 있었고 아담은 나중에 그곳에 담겨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움직임을 만들어주니, 마치 엄마 배 안에 아기같았다. 하나님이 아담의 내부요소로 여자를 만드셨고 그녀를 이끌어왔을 때, 아담은 단박에 여자가 자기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여자는 여자 자신을 몰랐지만 먼저 있었던 아담은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담과 여자가 사단의 꾀임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아담은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 통보받아야 했다. “너는 흙이니”(창3:19)

아담보다 먼저 계셨던 하나님이 사건을 경유해서 아담 안에 담겨있던 정답을 꺼내주셨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복제공간이 된 아담은 자신의 내부에서 나온 여자를 보며 생명의 통로를 느끼게 된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시 두 나무가 하나의 공간에 통일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창세 전 계획안에는 아담 자신보다 앞선 분이 진짜 생명으로 친히 죽음 안에 들어오실 것을 감지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창3:20)

창세 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약속이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완성과도 같은 것이기에, 십자가를 품은 언약 있음은 십자가 있음이고, 그렇게 창세 전에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고, 주의 선택을 찬양할 찬양대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들을 깨끗하게 하기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해주는 장치가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

창세 전의 십자가가 창세 후의 십자가와 만나는 여정은 창세 후에 속한 인간에게는 흘러간 역사 속에 하나의 해프닝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시작과 끝이 한 곳에 맞닿아있었고, 바로 그 한날, 그 한 지점에서 그리스도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열린다. 그러나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은 여전히 역사를 끝나지 않을 영원이라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다 됐다는 통보가 없기에, 그분의 끝을 담을 종말 자체가 될 수 없다. 그저 환상 속에서 조작된 종말을 기다리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 세상은 이미 지옥이다.

58분과 59분의 차이는 1분의 차이가 아니라, 수천 년의 차이가 아니라, 영원이다. 아무리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도 가 닿을 수 없는 간격, 뜻 있음이 뜻 없음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인간 언어의 장벽, 존재가 스스로 사건이 될 수 없는 간격,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다.(눅16:26)

차라리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더라면. 그러나 이미 태어나서, 들어버린, 뱉어버린 말들이 나를 견고하게 구성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 불연속성이 주님의 연속성 상에 놓이기를 바랄까. 예수님에게 책망받은 니고데모의 손을 붙잡고 같이 우는 수밖에 없다. 어찌할꼬.(요3:9)

아담으로부터 계속 유전되는 죄와 허물을 담고 태어난 인간은 세상에서 입력되고 수집된 정보들을 그대로 스크린으로 되비치는 컴퓨터와 같은 존재이다. 사람들은 진짜 자신의 실체를 회피하기 위해 언어를 수집하고 의미를 생성한다. 너희 아비 마귀가 시키는 금식 역할, 회개 역할, 구제 역할, 의인 역할은 잘하는데, 진짜 자신의 역할을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욕감을 느끼며 반발한다.(요8:44) 거짓말쟁이, 불법자, 말씀의 훼방자, 그리고 마귀의 역할은 당황해한다.

에베소서에서 아내들에게 명하시기를 자기 남편을 복종하라고 하셨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한다. 여자의 사랑은 상대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소유로 연결된다. 소유는 탐욕을 부른다. 여자 안에 있던 복종치 않는 요소가 말씀을 왜곡시키면서 선악과 사건이 유발되었다.(창3:3) 여자의 불복종이 아담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에베소서에서 남편들에게 명하시기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남편들은 아내를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복종은 소유 당함이고 사랑은 소유함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주인공인가. 창세 후의 세계에는 남편이 없다.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창세 전 복음의 비밀을 빼면 모든 말씀은 어그러진다. 말씀에서 사람을 빼고 단 한 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구성해내는 세포들의 역할만 남겨주시는 것이 창세 전 비밀의 활동이다. “그리스도에게 하듯” 그리고 “그리스도께서”(엡5:22~25)

아담을 통해 벌이신 사건, 여자가 하와가 되는 사건에 빨려 들어가야만, 율법과 말씀이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음을 밝혀주는 것이고, 우리가 이미 죽었기에 이 땅에 오신 주의 이름을 미워할 수밖에 없고, 죽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만약 죽었던 너희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의 움직임은 생명의 움직임이기에 오직 창세 전의 비밀에 대해서만 증거 한다.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행2:23) 그리고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행2:32)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주의 생명으로 깨어난 자들은 더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그리고 항상 현재로, 주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혈관을 통해 공급하시며 그분의 지체를 깨워서, 예수그리스도의 창세 전의 비밀을 펼쳐내신다. 피가 먼저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용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말씀의 방해꾼, 훼방자 역할을 하며 죄와 허물을 드러낸다.

내가 거부하고 밀쳐낼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사랑의 능력에 압살 되었기에, 성도에게는 주의 지시 외에는 기쁘고 감사할 일이 없다. ‘미쳤다, 지옥 간다, 망한다, 죽는다...’라는 메시지가 마귀의 소리인지 주님의 소리인지 혼란을 느낄 필요도, 흔들릴 필요도 그래서 주저할 필요도 없다. 이미 하나로 통일된 주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주님의 뜻으로 통일되었기에, 모든 판단은 주님이 하신다.

누가 선택받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고, 누가 구원받았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아들을 창세 후로, 사람의 형체를 한 종의 자리로, 죽음 속으로 보내시고, 그 아들을 창세 전으로 다시 되살리신 그 사랑이, 예수님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면서, 그 충만함과 하나님의 기쁨이 흘러넘쳐서 그 사랑에 덩달아 코팅되는 탕후르같은 양자들이 출현한다.

창세 후의 있음이 창세 전의 없음이 되는 불가능한 사랑을 보여줄 샘플들이 좀비의 무리에서 채취된 것이다. 이 샘플이 보여줄 것은 주님의 사랑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보이기 위해 맷돌같은 마귀를 목에 걸고 바다로 던져진 채, 멸망할 바벨론의 더 깊은 곳, 더 흉악한 곳, 예수님의 죽음이 만들어졌던 악의 바닥까지 하강하면 된다. 추락하면서 확인하면 된다. 우리의 미친 것이 그들의 미친 것과 질적으로 다른 것을.

 

댓글

이근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해주는 장치가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
즉 예정된 것은 ‘예수 안’이었습니다. ‘예수 안’ 세계의 형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밟았던 그 과정을 거쳐야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이 동일하게 작렬하는 곳이오로지 그곳 뿐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날 일은 벌써 예수님에게 다 일어난 일이라서 ‘다 이루심’으로 적용이 됩니다. 발악하듯이 속에서 터져나오는 육신의 생각들은 십자가 피를 증거로 들이대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다음과 같이 고백으로 전환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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